소설리스트

에필로그 (16/16)

에필로그

올해 열다섯 살이 된 라키아는 오늘도 불퉁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았다.

페란의 아이란 고모처럼 부모님과 우아한 조식을 즐기는 것이 꿈이건만, 어머니도 아버지도 나란히 앉아 아침 식사를 하며 끝도 없이 밀려드는 귀족과 상인의 인사를 받아야 했다.

종족으로 보자면 귀족은 인간, 상인은 자유민인 순혈 뱀파이어가 대부분이었다.

다만 최근 들어선 인간과 순혈 사이에 태어난 자들이 작위를 잇는다거나 부유한 젠트리가 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서서히 그런 자들이 나타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었다.

부모님 말씀으로는 15년 전만 해도 꿈도 못 꿀 일이었다고 하는데 뭐가 됐든 라키아는 관심 없었다.

“난 공주야. 공주라고! 그런데 우아하게 부모님과 아침을 즐기는 게 내 생일 날 단 하루라니 말이 돼! 너무해. 루디와 루돌프가 조르면 분명 들어주실 거면서.”

물론 루디는 네 살, 루돌프는 태어난 지 이제 고작 1년이니 그런 부탁을 할 리 만무했지만, 그 점은 넘어가기로 했다.

중요한 건 부모님이 라키아에게 무심하다는 거였으니까.

“오! 공주님. 오늘도 표정이 굉장하시군요.”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이미 와서 식사 중이던 앨버트 이모부가 인사를 건넸다.

“이이는. 그러지 말라니까.”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앤 이모가 이모부의 팔을 툭 치며 야단을 쳤다. 라키아는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인지라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앨버트 이모부는 한때는 왕립 수사관으로 활약했고 현재는 탐정 사무실을 차려 승승장구 중이었는데 솔직히 외모만 보면 전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토실토실한 볼과 동그란 안경 그리고 둥글게 나온 배만 보면 영락없는 빵집 주인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예쁘장한 앤 이모와 결혼을 하다니 어른들의 사정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모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하면서도 예의에 맞게 인사를 하자 앤 이모가 방긋 웃었다.

“그래요. 공주님도. 좋은 꿈 꿨나요?”

“그럭저럭요.”

라키아는 새침하게 대답하다가 어렴풋이 웅성거리는 소음이 가까워지는 걸 듣고는 두 손을 모으고 속으로 숫자를 셌다.

‘다섯. 넷. 셋…. 하나.’

마음의 준비를 마치자마자 식당 문이 벌컥 열리며 외삼촌들과 이모들, 이모부와 외숙부, 외숙모가 줄줄이 들어섰다.

워낙 대가족이다 보니 분명 각자의 방에서 따로 움직이는 건데도 아침을 먹으러 나오다 보면 꼭 이렇게 하나로 합쳐져서 등장했다.

그중에는 물론 라키아의 남동생들도 끼어 있었다.

그 녀석들은 아버지랑 어머니랑 거의 따로 지내는데도 조금도 상관없다는 듯 방긋방긋 웃으며 이모들에게 안겨 깔깔 웃어대고 있었다.

그걸 보니 배알이 뒤틀렸다. 조용하던 식당이 소음으로 꽉 찼다. 그도 모자라 다시 문이 열리더니 아침 식사가 담긴 거치대를 밀며 쉐프들이 차례로 등장했다.

식탁 위에 음식들이 차례로 놓였고 언제나처럼 다들 아주 신나고 맛있게 하나하나 먹어치웠다. 물론 블러드 팩이 가득 담긴 상자 또한 빠르게 비워져 갔다.

라키아는 그 광경에 애써 눈을 돌리고는 칼과 포크를 이용해 오믈렛을 썰며 우아하게 식사를 했다. 얼마 전 놀러 갔던 아이란 고모가 사는 페란 궁전의 식탁을 떠올리려고 애를 쓰며.

“라키아. 너 배 아프니?”

불쑥 마크 외삼촌이 물었다.

라키아는 작게 썬 채소를 오물거리다 삼키고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바라봤다.

“아뇨. 왜요?”

“아니. 먹는 게 어째 똥 마려운 사람 같아서.”

마크 외삼촌의 대답에 바로 앤 이모가 뒤통수를 때렸다.

“마크! 공주님이라 불러! 그리고 그게 식탁에서 무슨 말버릇이니. 고운 말을 써야지!”

그러자 마크 외삼촌이 억울한 듯 소리쳤다.

“에이씨. 페란에 가기 전까지는 이름으로 부르다가 무슨 헛바람이 들어 갑자기 공주라 불러달래?”

“마크!”

앤 이모가 성을 냈지만, 라키아는 이미 입맛이 뚝 떨어졌다. 물론 페란에 가기 전에는 왁자지껄한 대가족과의 식사가 딱히 나쁘진 않았지만 이젠 달랐다.

‘난 공주라고!’

속으로 고함을 지르며 손에 든 포크를 탁, 내려놨다. 그러고 벌떡 일어서려 했는데 갑자기 식당 문이 열렸다.

그곳에 나타난 건 리처드 레오폴드 아저씨였다.

부모님이 제위에 오른 뒤 지난 15년 동안 재상직을 맡아오며 이 나라를 부국으로 만들어낸 주역으로 놀랍게도 앨버트 이모부의 이복형이기도 했다.

“안녕들 하십니까? 아침을 못 먹고 나와서 같이 먹으려고 왔습니다.”

자주 이러는지라 다들 먹으면서 손을 들어 반겼다.

하지만 라키아는 그러지 못했다.

까마귀 깃털처럼 새까만 머리, 황금색이 도는 까만 눈동자, 건장한 체격. 봐도 봐도 잘 생겼다.

물론 다리를 약간 절긴 하지만 어머니 말씀으론 이 나라를 구하려다 얻은 영광의 상처라 했다.

게다가 성격도 성실해 동궁의 재상실에서 매일 늦게까지 일을 했고, 심지어 금욕적이라 그 흔한 스캔들 하나 없었다.

정말이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왜 여자들이 이런 멋진 아저씨를 그냥 두는지 알 길이 없었다.

비록 순혈 뱀파이어는 아니었지만, 순혈의 피가 짙게 흘러 그에 걸맞은 젊은 외양과 체력을 지녔으니 탐이 나고도 남았다.

“라키아. 너 이 솟았다.”

갑자기 마크 외삼촌이 풋, 웃으며 읊조렸다.

라키아는 순간 얼굴을 확 붉혔다. 엔네야드라는 아버지의 성도 아마칼리라는 어머니의 성도 아닌 아에리우스라는 성을 쓰고 있는 라키아는 신종족이였다.

어머니 말로는 초대 아마칼리 여왕의 주술 때문이라는데 어쨌거나 라키아는 인간이기도 하고 뱀파이어기도 했다.

그건 곧 물도 마실 수 있고 피도 마실 수 있는 몸으로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는 걸 의미했다. 그러면서도 외형은 순혈 뱀파이어와 같았다.

덕분에 라키아는 열다섯 살이었지만 이미 성숙한 몸을 지니고 있었고, 어머니는 아직 어린데 너무 빨리 자라 섭섭하다면서 연거푸 동생들을 낳았다.

웃긴 건 동생들도 라키아와 똑같은 신종족이라 무섭도록 빠르게 성장 중이었다.

어쨌거나 이 사실은 리처드 아저씨를 몰래 짝사랑하기 전까지는 괜찮았다.

리처드 아저씨를 좋아한다고 자각한 순간부터는 그저 보기만 해도 순혈 뱀파이어로 제멋대로 돌변하니 죽을 지경이었다.

“외삼촌. 못됐어!”

라키아는 너무 분해 식탁 아래로 외삼촌의 정강이를 차고는 벌떡 일어섰다. 마크 외삼촌은 세상이 떠나갈 듯 울부짖었지만, 가족들의 웃음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오로지 막 자리에 앉던 리처드 아저씨만이 눈이 동그래져서 바라봤다.

“공주님. 벌써 식사를 마치셨습니까?”

목소리는 왜 이렇게 다정한지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사춘기네. 사춘기.”

마크 외삼촌이 울다 웃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지 낄낄거리며 말했다.

그러자마자 앤 이모를 비롯해 다른 이모들이 외삼촌에게 포크를 집어 던졌다. 마구잡이로 맞으며 외삼촌이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라키아는 고마웠지만 동시에 너무 창피해 그대로 식당을 뛰어나왔다.

그냥 마구잡이로 걸어 저택 뒤에 있는 후원으로 나섰는데, 바로 등 뒤의 문이 열리더니 리처드 아저씨가 나타났다.

“공주님. 무슨 일이신지 물어봐도 됩니까?”

라키아는 어쩔 수 없이 돌아서선 아저씨와 눈을 맞췄다. 하지만 황금색과 은빛이 동시에 감도는 눈동자를 보니 아무런 말도 떠오르질 않았다.

그러자 리처드 아저씨는 볼을 긁적이더니 멋쩍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뜬금없는 소리일지 모르지만 전 외동아들이라 어린 시절부터 다른 친구들이 형제가 많은 게 무척 부러웠습니다.”

“…저렇게 소란스러운 게 좋으시다고요? 페란의 식탁을 보셨어야 했는데.”

“글쎄요. 화려함에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전 언제나 조용하고 우아한 식탁을 경험하며 자랐거든요. 그건 보기에는 좋지만, 재미는 없습니다. 즐거운 식사 따윈 어린 시절 해본 적이 없고요.”

“즐겁긴요. 정신만 사나울 뿐이지.”

“뭐, 개인 취향이긴 하죠. 어쨌거나 전 공주님과 공주님의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식사가 좋아 일부러 아침을 거르고 왔습니다. 조용하고 우아한 식사라면 끼어들 틈이 없었겠죠.”

리처드 아저씨의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라키아는 숨을 삼켰다. 갑자기 자신이 바보스럽게 느껴졌다.

아침에 가끔 아저씨가 얼굴을 들이밀 때마다 온종일 기분이 좋았었는데, 그걸 거부하려 들다니!

“아, 저. 가서 같이 먹어요. 아저씨. 갑자기…. 저도 배가….”

라키아는 우물거리며 말을 늘어놓다가 후원의 문이 열리며 어머니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구불거리는 새빨간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어머니는 순혈 뱀파이어에 비하면 뒤떨어지는 외모를 지녔고 33살이란 나이에 걸맞은 모습이었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저 서 있기만 해도 위엄과 우아함이 넘치다 보니 무도회에선 언제나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물론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순혈 뱀파이어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라키아가 무슨 수를 써도 어머니처럼은 못 될 것 같았다.

“레오폴드 재상. 식사는 마치셨나요?”

어머니가 물었다.

리처드 아저씨는 놀란 듯 돌아서더니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는 라키아를 손짓하며 말했다.

“마이 퀸. 좋은 아침입니다. 아직 식사 전입니다. 여기 계시는 공주님과 함께 먹기 위해 모시러 왔거든요.”

그러면서도 리처드 아저씨의 시선은 어머니에게 박혀 있었다.

‘또야. 또. 언제나 저렇게 홀린 듯 바라보는 이유가 뭘까? 꼭 사랑에 빠진 사람 같아.’

라키아는 입술을 짓씹으며 생각했다. 그러자 그제야 알아차린 듯 어머니가 라키아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어머나. 라키아. 너도 나와 있었구나. 어서 가서 밥 먹어야지. 또 수업 시간 늦으면 브라운 교수님께 혼날 거야.”

“안 늦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불퉁하게 대답하는데, 다시 문이 열리더니 이번에는 아버지가 나타났다.

“오. 라키아. 잘 잤니?”

가볍게 인사하며 미소짓는 아버지의 얼굴은 오늘도 굉장했다.

햇살에 부서지는 하얀 금발과 프러시안 블루색 눈동자가 그린 듯 화사했고 리처드 아저씨보다 더 체격이 좋아 존재감이 엄청났다.

라키아의 머리색 또한 아버지와 똑같았지만 저렇게까지 아름답지는 못했다. 눈동자는 어머니를 닮았지만, 짜증나게도 어머니 같은 투명한 에메랄드색은 또 아니었다.

‘나만 못생겼어.’

갑자기 우울해져 입을 삐죽이고 있노라니 아버지가 어머니의 볼에 입을 맞췄다. 어쩐지 아버지가 어머니 곁에 있는 것이 누군지 알려주려고 한 행동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리처드 아저씨를 흘끔 보니 눈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버진 그 반응을 분명히 읽었을 텐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레오폴드 재상. 그렇지 않아도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었는데 마침 잘 됐군요.”

라키아는 무척 화가 났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란 말이야!’

속으로 외치며 용기를 내어 리처드 아저씨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안 돼요. 재상님은 나랑 아침 먹을 거예요. 그 뒤에 일하세요.”

그리고는 잡아끌었다.

“이런. 공주님. 전 천천히 먹어도 되는데요.”

리처드 아저씨가 절절매며 말했다. 라키아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대로 끌고 들어갔고 그러자 등 뒤에서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스칼렛. 내 딸이 저럴 때면 당신이랑 똑같아 보인다니까.”

“이이는. 참. 저 얜 당신을 쏙 빼다 박았어요. 은근히 고집스러운 점 같은 게.”

어머니가 피식 웃으며 던지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이내 두 분이 키스를 나누는 소리가 이어졌다.

틈만 나면 민망할 정도로 키스를 주고받고 흡혈을 하고 그러다 침실로 사라져버리는 걸 내내 지켜봐 온 터라 익숙한 상황이었는데 지금만은 달랐다.

마구 얼굴이 달아올랐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하지만 리처드 아저씨의 손을 잡고 있으니 내색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키스 소리 때문인지 아저씨의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라키아는 결심했다.

‘이 아저씬, 내 거야.’

그리고는 아저씨의 손을 꽉 움켜쥐고 성큼성큼 식당으로 발길을 옮기며 말했다.

“아저씨. 3년만 꾹 참고 기다려 주세요. 솔직히 지금도 가능할 것 같긴 하지만 순혈 뱀파이어는 국법상 18살이 되어야 결혼할 수 있으니까요.”

“네? 그게 무슨?”

리처드 아저씨가 묻자마자 라키아는 걸음을 멈추고는 돌아서서 시선을 맞췄다. 당혹스러움으로 가득한 검은 눈동자를 지긋이 바라보며 라키아는 소곤거렸다.

“제가 탐해드릴게요. 우리 아버진 툭하면 네 이웃의 뱀파이어를 탐하지 말라는 계명이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하시지만, 아저씨라면 봐주실 거예요.”

그러자마자 리처드 아저씨의 눈동자에 당혹스러움이 차올랐다.

“공주님. 제 나이가 몇 살인지 아시는 겁니까?”

“제가 아저씨 나이도 모를까 봐요? 올해 35살이 되셨잖아요.”

“그건 곧 경험의 차이입니다. 공주님. 당신은 너무 어립니다. 3년 뒤도 역시 어릴 테고요.”

“아저씨 눈높이에 맞게 3년 동안 고이고이 키워주시면 되잖아요. 아시죠? 저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해내는 거.”

라키아가 씩씩하게 말하자 리처드 아저씨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공주님은 정말 여왕 폐하와 많이 닮으셨군요. 그런 당돌한 말은 제발 아무 남자에게나 하지 마세요. 왕께서 왜 네 이웃의 뱀파이어를 탐하지 말라는 계명을 새기라 하셨는지 알겠군요.”

라키아는 못 들은 척 아저씨 손을 꼭 잡고 척척 걸음을 옮겨 식당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한창 식사 중이던 가족들이 다들 반겼다.

“오. 돌아왔냐. 라키아! 미안하다. 미안해. 어서 와서 아침 먹어!”

마크 외삼촌이 크게 외쳤다.

라키아는 피식 웃고는 아저씨에게 속삭였다.

“우리 가족 중 한 명이 되는 건데 싫으세요?”

그리고는 손을 놔주고는 먼저 식당으로 들어섰다.

리처드 아저씨는 한 방 먹은 얼굴로 서 있다가 앨버트 이모부가 바라보자 당황한 듯 성큼 들어섰다.

‘아저씨. 거부하려 해봤자 늦었어요. 내가 아저씨 찍었거든요!’

라키아는 리처드 아저씨의 얼굴에 감도는 희미한 기대감을 읽어내고는 미소 지었다.

셰프가 다시 따뜻한 오믈렛을 가져다줬다.

라키아는 포크로 큼지막하게 떠서는 평소 먹던 대로 입에 가득 밀어 넣고는 우물거리며 창밖을 내다봤다.

통통통, 하얀 구름 하나가 지나가고 있었다.

정원을 가득 채운 아에리우스 나무가 햇살에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근사하고 완벽한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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