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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여왕의 귀환 (15/16)

14. 여왕의 귀환

마차는 수도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루키우스는 과한 흡혈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 보이는 스칼렛에게 입을 맞추며 자신의 타액을 삼키게 했다.

몇 번이고 그러다 보니 스칼렛의 하얗게 탈색된 얼굴에 서서히 분홍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자는 편이 혈액을 만들어내기 더 좋긴 했지만, 갑자기 잠들다니 좀 걱정스러웠다.

혹시나 해 이마를 만져보니 열은 없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품고 있음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배 속의 아이가 스칼렛의 몸이 허약해진 것을 알고는 피를 빨리 만들어내도록 재촉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는 건 순혈의 피가 강하게 흐른다는 뜻이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추측이 맞았는지 이윽고 스칼렛의 숨소리가 편안해졌다.

루키우스는 안도하며 그녀의 이마에 거북할 정도로 경건함을 느끼며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제 행동에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태어난 순간부터 묶여 있었던 체터필드가에서 풀려나 사랑하는 여인을 주인으로 섬기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지나칠 만큼 가슴이 벅찼고 그녀의 모든 것이 다 거룩해 보였다. 진한 키스를 퍼붓고 싶은 욕망이 저절로 사그라들 만큼.

‘좋지 않군. 몸은 흡혈을 하고 싶어 미쳐 날뛰는데 머릿속이 이렇게 차분해지다니….’

그러고 있는데 아이란 공주가 말을 몰아 마차 창밖에 따라붙더니 외쳤다.

“오라버니. 계속 가세요. 이제 수도에 도착하니 대로를 따라 달려 들어가자마자 성문을 닫으세요!”

“아이란 공주님. 잠깐!”

루키우스는 깜짝 놀라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가 엄청난 광경을 보고 말았다.

저 멀리서 이리나의 얼굴을 한 거대한 늑대처럼 생긴 것이 달려오며 막아서는 알렉사의 여인들이 탄 말을 물어뜯어 뒤로 던지고 있었다.

알렉사의 여인들은 말을 강탈당함과 동시에 몸을 날려 이리나에게 덤벼들었는데 상당히 날랜 솜씨였지만 채 1분을 버텨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제 남은 건 아이란 공주와 두어 명이 전부였고 마부석에도 한 명만이 앉아 있었다.

“젠장!”

루키우스는 마차 문을 열고 뛰어내리려 했지만, 아이란 공주가 한발 앞서 발로 차 문을 닫더니 외쳤다.

“가세요. 오라버니! 저 괴물의 표적은 여왕이라고요!”

그러더니 칼을 빼 들고 그대로 이리나에게 달려갔다. 그냥 무턱대고 덤비나 싶었는데 이리나가 말에게 덤벼든 순간 손에 든 뭔가를 확 던졌다.

이리나는 그것을 꿀꺽 삼켰고 엄청난 굉음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자욱한 안개가 꼈고 아이란 공주의 표정이 일순 밝아졌지만 이내 일그러졌다.

다시금 허리춤에 찬 뭔가를 꺼내 손에 쥐는 것이 보였고, 옆에 선 알렉사의 여인들도 똑같이 행동했다.

루키우스는 창밖으로 그 모든 것을 살피다 다시 마차 안으로 몸을 숨겼다. 덜컹대는 소리와 함께 마차는 왕성으로 이어지는 대로로 들어섰다.

시원하게 쭉 뻗은 대로를 따라 얼마 달리지 않아 어마어마한 굉음이 저 뒤에서 들려왔다. 루키우스는 눈을 질끈 감으며 신음했다.

“아이란….”

“루키우스?”

스칼렛이 소리에 놀라 깨어났는지 그를 불렀다.

“누워 계세요. 마이 퀸. 이제 곧 왕성에 도착합니다.”

“조금 전 아이란 공주의 비명을 들은 것 같은데요.”

“공주가 맞습니다. 아마 괜찮을 겁니다. 페란에선 공주가 행운의 별 포르투나 아래 태어났다고 하거든요. 포르투나는 어떤 위기도 다 피해 나가는 재주를 부여하죠.”

루키우스는 불안해하는 스칼렛을 달래려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스칼렛은 일어나 앉더니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에게 둘러댈 필요 없어요. 지금 상황이 대체 어떻죠?”

“이리나가 괴물이 되어 쫓아오고 있습니다. 슈발리에와 엔네야드가 모두가 덤벼들었지만 막는 데 실패한 것 같습니다. 알렉사의 여인들도 그렇고 아이란 공주가 페란의 최신무기를 꺼내 들었지만….”

“조금 전 폭발 소리가 그거로군요. 맙소사.”

스칼렛은 이마를 비비적대며 중얼거리더니 눈을 감고는 뭔가를 더듬는 얼굴로 읊조렸다.

“다행히 크게 다친 이들은 없는 것 같아요. 티베리우스를 비롯해 슈발리에들은 전열을 가다듬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고요.”

“그게 느껴지는 겁니까?”

“그냥 알겠어요. 수도의 순혈 뱀파이어들이 이리나의 등장을 느끼고 다들 긴장하고 있다는 것도요.”

“혹시 명령을 내리는 것도 가능합니까?”

“글쎄요. 안 해봐서.”

“해보십시오. 정문 앞 광장을 모이라 하세요. 마차가 통과하자마자 문을 닫아걸고 싸울 준비를 하라 이르세요. 성의 수비대장도 순혈 뱀파이어니 그가 움직이면 그래도 안심입니다.”

“좋아요. 해볼게요.”

그렇게 대답한 스칼렛은 미간을 찌푸리며 집중하는 표정을 지었다.

루키우스는 마치 뒤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놀랍도록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들었다. 희미하게 괴물이란 외침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이리나가 확실했다.

아이란 공주가 행여 죽기라도 했으면 페란과의 전쟁을 각오해야 할 테니 큰일이었다.

어떻게든 공주를 돌려보냈어야만 했다는 뒤늦은 후회에 괴로워하고 있는데 스칼렛이 눈을 번쩍 뜨더니 조용히 말했다.

“됐어요.”

그 순간 마차 앞쪽에서 뿔나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성의 수비대가 뛰어나와 일제히 불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연이어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마차 옆쪽으로 수비대장이 얼굴을 내보였다.

“여왕 폐하. 전군 경비태세를 갖췄습니다.”

“내가 무기를 찾아낼 때까지만 막아내도록 해요.”

스칼렛이 당차게 소리쳤다.

“기꺼이. 마이 퀸!”

수비대장이 대답과 함께 사라졌다.

잠시 후, 마차는 왕성의 정문을 통과했고 루키우스는 창밖으로 수비대원뿐 아니라 성에서 일하는 순혈 뱀파이어들이 뛰어나가는 것을 보았다.

모두 엄청난 괴물과 맞서는 것을 아는 듯 표정들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윽고 마차는 대로를 달려 관리들이 모여 있는 동궁 앞에서 멈춰 섰다.

동궁 앞 작은 광장에는 순혈 뱀파이어로 이루어진 수비대가 진을 치고 있었고 루키우스가 스칼렛의 손을 잡고 내려서자 고요한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이리나가 왜 다른 귀족들에게 순혈 뱀파이어에 대한 권한을 나눠줬는지 알 것 같네요. 이렇게나 시선 집중을 받다니.”

스칼렛은 툴툴거리면서 동궁 계단에 올라서더니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씩씩하게 말했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과 이야기를 좀 나눠보도록 하죠.”

루키우스는 대체 누굴 말하는 건지 의아해하면서도 잠자코 스칼렛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둘이 한 걸음 차이로 계단 끝에 이르자 리처드 레오폴드가 나타났다.

“마이 퀸!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순혈 뱀파이어들이 여왕을 보호해야 한다며 죄다 뛰어나가다니.”

스칼렛은 그와 마주 서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레오폴드 섭정. 이제부턴 당신이 이 나라의 재상이 되어줘야겠어요.”

“네? 재상이라니?”

“당신 친모인 이리나 아비스가 체터필드 대공을 죽였거든요. 그리고 지금 날 죽이겠다고 괴물이 되어 이곳으로 달려오는 중이죠.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내 자궁을 들어내겠다고요.”

“이런 젠장.”

리처드 레오폴드는 이를 그러 물더니 두 손으로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지만 스칼렛은 동조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전력을 다 그러모으긴 했지만, 이 나라는 전쟁 준비 따윈 안 한 지 오래예요. 만약 내가 죽으면 당신이 왕이 되어 이리나로부터 이 나라를 지켜주세요.”

“스칼렛. 그럴 순 없습니다. 내가, 내가 당신을 죽도록 내버려 둘 리 없지 않습니까!”

“이리나는 당신 친모이니 적어도 당신에게 손을 대진 않겠죠.”

스칼렛은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섰다.

루키우스는 착잡한 표정으로 그녀 옆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선 손톱을 불러냈다.

1분, 2분…. 4분.

정문부터 붉은 안개가 사납게 일렁이며 지키고 선 수비대와 순혈 뱀파이어들을 휘감아 날려버리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매우 빠르게 다가왔고 동궁 앞을 지키고 선 순혈 뱀파이어들이 죄다 허리를 낮추며 이를 드러낼 정도의 살기가 느껴졌다.

스칼렛이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아 왔다. 루키우스는 마주 꽉 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런 찰나 등 뒤에서 리처드 레오폴드의 침통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칼렛. 왕의 분노를 불러내요.”

바로 이것이 스칼렛이 원하는 답이었던 듯 그녀는 활짝 웃더니 아닌 척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그건 어떻게 불러낼 수 있는데요?”

***

스칼렛은 본의 아니게 연결되어버린 순혈 뱀파이어들의 시각을 통해 이리나를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몸은 거대한 늑대와도 같았고 얼굴만이 사람 그대로라 신화에 나오던 키메라처럼 보였다.

신화 속 키메라가 이길 자가 없어 오로지 영웅만이 상대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리나를 상대할 자 또한 아무도 없었다.

인간에 비해 적어도 몇 배나 되는 힘을 지닌 순혈 뱀파이어들이 낙엽처럼 돌진해오는 그녀에게 치여 날아가는 것을 보면서 이건 승산 없는 싸움임을 깨달았다.

루키우스는 굳이 보지 않아도 들려오는 소리로 상황을 알아차렸는지 다급하게 말했다.

“순혈 뱀파이어들은 정문 앞 광장을 모이라 하세요. 마차가 통과하자마자 문을 닫아걸고 싸울 준비를 하라 이르세요. 성의 수비대장도 순혈 뱀파이어니 그가 움직이면 그래도 안심입니다.”

스칼렛은 시키는 대로 했지만 그래도 이리나가 그녀를 잡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러므로 남은 희망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목에 걸린 마지막 뱀파이어 왕의 선물.

‘리처드 레오폴드. 그 남자라면 이걸 어떻게 쓰는지 알 거야.’

하지만 아무리 괴물로 변했어도 친모는 친모였다. 이러지 저러니 해도 리처드 레오폴드에게 자신의 친모를 죽일 방법에 대해 듣기는 절대 쉽지 않았다.

스칼렛은 고민했고 결국 묘지 지하에서 엿들었던 리처드 레오폴드의 진심을 믿기로 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입니다!’

비상사태가 아니라면 절대 이용하지 않았을 마음이었지만, 별수 없었다.

게다가 이리나가 만약 현재 스칼렛이 루키우스의 아이를 품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되면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도박을 했는데 통했다.

“스칼렛. 왕의 분노를 불러내요.”

리처드 레오폴드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스칼렛은 기쁨의 함성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참고는 태연한 얼굴로 돌아서서 물었다.

“그건 어떻게 불러낼 수 있는데요?”

리처드 레오폴드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스칼렛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눈짓했다.

“그걸 열고 손바닥에 쏟아내면 됩니다. 어머니의 실험실에 있는 움직이는 그림 중에 뱀파이어의 마지막 왕이 그렇게 쓰는 것을 담은 것이 있더군요.”

“스칼렛. 그걸 나에게 주세요.”

루키우스가 끼어들었다.

리처드 레오폴드가 손을 저었다.

“엔네야드 경. 마음은 알지만, 왕의 피로 만들어졌기에 그건 왕의 핏줄만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 친모가 그러시더군요.”

“고마워요. 리처드.”

스칼렛은 진심을 담아 말하고는 목걸이를 벗어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작디작은 호리병.

내리쬐는 햇살에 고대어가 흐릿하게 빛났다.

[아타 논 베르다 수칼레 아르카디움]

“내 피만이 분노를 다스릴 것이다.”

작게 읊조리며 뚜껑을 잡고 힘껏 돌렸다. 부드럽게 밀려 올라오며 통, 경쾌한 소리를 내며 뚜껑이 빠졌다.

스칼렛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손바닥에 대고 호리병을 기울였다.

투명하고 끈적한 액체가 흘러나오더니 피부에 그대로 흡수됐다. 뭔가 묵직한 것이 손바닥 위에 얹히는 느낌이 들더니 화끈해졌다.

읏!

놀라서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자 루키우스가 놀라 다가왔다.

“스칼렛. 괜찮은 겁니까?”

스칼렛은 희미하게 웃었다.

“아프진 않아요. 그냥 뭔가 굉장히 차가운 것을 쥔 느낌이….”

그렇게 대답하다 비명을 들었다.

반사적으로 고개 젖혀 바라보니 각 궁을 연결한 수천 개의 회랑이 검은 깨알로 변해 아주 빠르게 형태가 무너지고 있었다.

다행히 중간부터 변형되어간 덕분에 그곳에 있던 관리들과 오가던 이들이 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피하는 중이었다.

“이게 대체?”

루키우스가 무척 놀라 읊조렸고, 리처드 레오폴드는 이미 알고 있었던 듯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저것이 바로 왕의 분노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제 친모는 초소형 로봇이라고 부르더군요. 그게 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이름이라 했습니다.”

스칼렛은 신기해하며 손을 높이 들어 올렸고 그러자 검은 깨알들이 길고 가는 수천 가닥의 실이 되어 손바닥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이리저리 움직여 보니 마치 리본을 단 듯 따라서 나풀거렸다. 어째 모양이 꼭 고문할 때 쓰이는 가죽 채찍 같았다.

굉장하단 생각을 하며 들여다보고 있는데, 동궁 앞 작은 광장에 있던 수비대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황급히 돌아서니 늑대의 몸을 한 이리나가 닥치는 대로 수비대들을 물어 던지며 달려들어 오고 있었다.

“어머니.”

리처드 레오폴드가 울 것처럼 읊조렸다.

스칼렛은 숨을 들이켜고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스칼렛. 조심해요.”

등 뒤에서 루키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칼렛은 대답 대신 손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덩달아 손을 중심으로 자글거리는 왕의 분노도 흔들거렸다.

“다들 물러서세요.”

바닥에 이르러 명하자 작디작은 목소리인데도 저주로 연결된 덕분인지 남아 있던 수비대가 좌우로 갈라지며 이리나에게 길을 내줬다.

이리나는 두 발로 서더니 놀랍게도 다시 인간의 몸으로 돌아갔다. 다만 옷이 다 찢어졌는지 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언뜻 보면 평범한 여인의 몸이었으나 희미하게 다리와 팔 그리고 목 같은 부위에 선이 그어져 있었다.

‘브라운 교수님 말씀대로 정말 머리를 제외하고는 기계인가 봐. 인형처럼 저런 자국이 나 있는 걸 보면.’

스칼렛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가오는 이리나를 바라봤다.

머리카락의 길이마저 조정이 가능한지 흑발이 쑥쑥 자라나 나신을 덮었다. 그러더니 몸에 찰싹 달라붙어 검은 옷이 되어 버렸다. 대신 머리카락은 확 짧아져 단발이 되었다.

그렇게 상큼한 모습으로 돌변한 이리나는 멈춰 서더니 말했다.

“내 마지막 손녀 아이야. 난 네가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기를 바란단다.”

“이리나. 아니, 조상 할머님. 이제 그만두시죠. 왕의 분노까지 제 손에 쥐어졌으니 싸움은 무의미한 것 같은데요.”

“넌 그걸 다룰 줄 모르잖니. 그에 반해 내 손에 쥐어진 분노는 나와 천년을 함께 해왔지.”

이리나는 크게 외치며 손에서 붉은 깨알 같은 것을 불러냈다.

그것은 앞서 아툼 성에서 봤을 때와는 달리 엄청난 양이 흘러나왔고 스칼렛이 손에 쥔 것과 유사한 크기까지 수를 불려 이리나의 손 위에서 넘실거렸다.

스칼렛은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왕의 분노가 두 개일 줄은 몰랐다. 그래도 싸워야지 얌전히 죽을 순 없다 싶어 손을 앞으로 휘저었다.

손바닥을 따라 돌고 있던 검은 깨알과도 같은 왕의 분노가 이리나에게 날아들었다.

이리나가 크게 웃으며 그대로 받아치더니 매서운 속도로 제가 든 왕의 분노를 채찍처럼 확 내리쳤다. 그대로 맞을 뻔했지만, 루키우스가 달려와 그녀를 그러 안으며 옆으로 굴렀다.

“스칼렛. 좀 더 빨리 움직여야 해요!”

루키우스가 다급하게 말했다. 스칼렛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의 어깨에서 조금이지만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녈 안고 피하다가 이리나의 채찍이 스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스칼렛은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에 얼굴을 구기다가 문득 묘지에서 아이를 가지기 위해 잠깐 뱀파이어가 됐던 것을 떠올렸다.

엄청난 쾌감도 동반됐지만, 생채기조차 나질 않는 강한 몸을 지녀 놀라웠었다.

“루키우스. 나에게 죽음의 키스를 해줘요!”

“갑자기 그게 무슨!”

루키우스는 외치다 말고 이유를 깨달았는지 얼굴을 확 구겼다. 그러더니 거칠게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이리 와요.”

스칼렛이 얌전히 목덜미를 드러내며 다가서자 루키우스가 바로 이를 박았다. 흡혈이 아닌 그의 피가 몸으로 조금 스며들자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어댔다.

열락이 피어오르며 숨이 가빠왔다. 다리 사이가 근질거리는 걸 애써 참으며 이리나를 보자 온몸이 긴장으로 팽팽해지며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저 괴물을 당장 해치워야 해.”

스칼렛은 자신에게 명령하듯 읊조리며 빠르게 일어나 다시 날아드는 이리나의 채찍을 피했다.

놀랍도록 몸이 가벼워서 그런지 힘들지 않았다. 왕의 분노를 휘두르기도 더 편해졌다.

철썩, 철썩!

정말 채찍처럼 왕의 분노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찍었고 그때마다 돌바닥이 움푹 패 날아올랐다.

이리나는 짐승처럼 빠르게 움직여가며 몸을 피했고 그러다 빈틈을 발견하고는 왕의 분노를 칼처럼 직선으로 날렸다.

그대로 맞을 뻔했지만, 그 앞을 리처드 레오폴드가 가로막았다.

“어머니! 안 됩니다!”

이리나가 짤막한 비명을 지르며 손을 거뒀지만 한발 늦었다.

헉!

허벅지가 꿰뚫린 그가 신음하며 무릎을 꿇었다.

“리처드!”

이리나는 비명을 지르며 왕의 분노를 거둬들이더니 스칼렛을 노려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스칼렛. 내 아들을 이용해 날 어쩌려는 모양인데, 날 죽이면 순혈 뱀파이어들이 풀려날 거다. 족쇄 따윈 없어. 네 목숨 하나를 위해 이 왕국의 모든 인간을 죽일 셈이야?”

스칼렛은 말문이 막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리나를 겨눴던 손 또한 내리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묵직한 손이 제 손 위에 얹히는 것을 느꼈다.

깜짝 놀라 바라보니 손가락마다 보석 반지를 낀 커다란 남자의 손이었다. 그 손이 스칼렛의 손을 끌어 올려 이리나를 겨누게 했다.

스칼렛은 숨을 삼켰다. 누구 손인지 알 것 같았다. 마지막 뱀파이어 왕의 손. 이 모든 저주의 시작인 둘의 사랑은 이제 끝을 맺을 때가 왔음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러자 동생들이 떠올랐다. 암시장에서 만났던 수많은 뱀파이어들이 떠올랐다. 그녀를 보좌해온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그 밖의 다른 슈발리에들의 얼굴이 눈꺼풀 위에 점멸했다.

그리고 루키우스. 대공의 꼭두각시가 되어 수많은 이들을 죽이고 다녔던 것을 떠올려보면 가슴이 미어졌다.

순간 기분 탓인지 손등에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사랑하는 여인과 딸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족쇄를 찼던 왕이 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스칼렛은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왔음을 확신했다.

“우리 인간은 그걸 핑계로 천 년 동안 뱀파이어들을 탄압해왔죠. 이젠 끝내야 해요. 만약 그들이 원한다면 죗값을 치러야겠죠. 하지만 아닌 뱀파이어들도 있어요. 당신의 왕과 같은.”

마치 듣고 있었던 듯 손등을 덮고 있던 왕의 손에 힘이 실렸다. 휙, 손이 위로 솟구쳤고 앞으로 왕의 분노를 칼처럼 날렸다.

무섭도록 빨랐고 또한 강했다. 일으킨 바람이 어찌나 세찬지 스칼렛의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확 흩어졌다.

페란의 전사들을 돌아서게 만든 왕의 분노가 바로 이것이었다.

다음 순간, 칼처럼 하나로 모인 왕의 채찍이 이리나의 목을 꿰뚫었다. 은빛으로 변한 눈동자가 놀라서인지 휘둥그레져 있었다.

“세레우스.”

낮은 신음이 흘러나오더니 이리나가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몸과 목이 분리됐지만 피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러고도 이리나는 살아있는 듯 스칼렛의 등 뒤를 힘겹게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스칼렛은 제 손을 덮었던 손이 천천히 물러나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이리나의 눈에서 불이 깜빡깜빡하더니 핏, 어두워지며 은빛이 사라지고 검은 동공만이 남았다.

손바닥이 간질거리나 싶더니 액체열쇠가 주르륵, 바닥에 쏟아져 내렸다. 왕의 분노가 확 흩어지나 싶더니 거짓말처럼 다시 회랑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신기하게도 전에는 아치형의 지붕을 인 딱딱한 스타일이었는데 이번에는 그물로 엮은 듯한 다리 형태가 되었다.

‘목걸이의 주인이 가진 마음에 따라 다르게 만들어지는 걸까? 신기하네.’

속으로 중얼거리며 계속 걸고 있던 호리병 목걸이를 빼내 뚜껑을 열고 가져다 댔다.

손으로 쓸어 담으려 했는데 액체열쇠는 저절로 호리병으로 들어가 버렸고 뚜껑을 닫으니 예전처럼 초라한 목걸이로 돌아갔다.

하아-

엄청난 피로감이 몰려와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루키우스의 피를 이용해 뱀파이어가 됐던 몸이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며 여기저기 욱신대는 부위가 점점 늘어났다.

저주의 근원이었던 이리나가 죽어서인지 아주 빠르게 순혈 뱀파이어들과의 연결이 끊어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공포감이 솟구쳤다.

“그들이 풀려났어.”

그때였다. 루키우스가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스칼렛!”

다정한 목소리였다.

고개 돌려 바라보니 눈빛 또한 전과 다름없이 따뜻했다.

“적어도 한 명의 뱀파이어는 내 곁에 있어 주겠군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읊조리는데 저만치 티베리우스를 비롯한 슈발리에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마이 퀸!”

그 외침이 어찌나 우렁찬지 스칼렛이 소리 내 웃자 루키우스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마이 스칼렛. 나조차 내 종족을 믿지 못했는데 당신이 나를 구원하는군요.”

***

티베리우스의 지휘를 받아 동궁 앞 광장은 빠르게 정리되어 갔다.

이리나의 시신은 상자 안에 밀봉되어 여왕의 묘지로 이송됐다. 천 년 동안 비어 있던 석관에 드디어 제대로 된 주인이 자리를 잡은 셈이었다.

다만 석관 봉인은 금했다. 비록 이리나가 사악함의 극치이긴 했으나 지하 묘지에 있는 마지막 뱀파이어 왕을 거둬 옆에 묻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지극히 비밀리에 이뤄져야만 했다. 루키우스가 말했듯 시대를 벗어난 기술은 맹독과 같으므로.

한편, 리처드 레오폴드를 비롯해 이리나 때문에 다친 이들은 차례로 왕궁 병원이 있는 별궁으로 이송됐다.

그나마 다행인 건 리처드 레오폴드가 친모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고도 의외로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친모의 악행을 멈춰주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 싶은 그런 느낌이었다.

어쨌거나 스칼렛은 리처드 레오폴드를 배웅한 뒤 너무 지쳐 동궁 계단에 서 있는 정의의 여신 동상 앞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슬슬 저택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루키우스가 이것저것 지시한 뒤 돌아오며 말했다. 스칼렛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무언가 한 꺼풀 벗겨진 듯 그의 전신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신화 속에 살아 숨 쉬던 존재가 실제가 되어 눈앞에 강림한 느낌이었다.

비로소 족쇄가 진짜로 사라졌다는 것이 실감 났다.

“루키우스. 혹시 순혈 뱀파이어들과 연결된 건가요?”

자신이 느꼈던 감각을 곱씹으며 묻자 루키우스가 옆에 와서 앉으며 대답했다.

“네. 연결됐습니다. 족쇄에 묶이기 전에는 미처 몰랐던 초연결 상태입니다. 다들 최초의 뱀파이어와 연결된 기분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그건 당신을 자신들의 진정한 왕으로 받아들인다는 거네요. 그렇죠? 왕관을 통해 증명되는 그런 왕이 아니라 진심으로 연결된 왕으로.”

“그런 셈이죠. 하지만 스칼렛. 난 당신의 종복입니다.”

“아뇨. 루키우스. 당신은 왕위에 올라야 해요. 순혈 뱀파이어들을 하인 신분에서 해방시키고 자유민의 신분을 주기 위해선 필요해요.”

“귀족들의 반대가 있을 겁니다. 저도 원치 않고요. 난 당신이 여왕으로 있기를 바랍니다.”

“누가 왕위를 양위하겠대요?”

“그럼?”

“공동 왕이 되잔 소리예요. 엔네야드 왕과 아마칼리 여왕. 그리고 우리 아이가 우리 둘의 왕관을 물려받을 거예요. 이것이 바로….”

스칼렛은 말끝을 흐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루키우스가 뒤따라 일어서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천 년 전 왕의 소망이었죠. 그가 바랬던 진정한 시대가 시작되겠군요.”

그러더니 정의의 여신상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재상의 시종 무관이 되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저 여신상을 보며 한 생각이 있습니다.”

“뭔데요?”

“종족을 가리지 않고 착하고 선한 이들이 행복해지는 것이 바로 정의라고요.”

“그거 멋지네요. 당신을 위한 대관식 때 꼭 말해줘요. 모든 이들을 위해.”

“대관식까지 기다릴 필요 없겠습니다.”

“그게 무슨….”

스칼렛이 그렇게 묻자 루키우스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잡더니 동궁 계단을 올라 서궁으로 향하는 회랑으로 발을 옮겼다.

모양은 달라졌지만, 회랑의 위치는 바뀌지 않았는지 순식간에 서궁에 도착했다.

대체 어디를 가려고 이러나 싶었더니 대관식 날 수많은 인파에 인사하기 위해 올랐던 서궁에서 가장 높은 첨탑이었다.

도르래로 움직이는 나무 상자를 타고 꼭대기에 오르니 전과는 달리 아무도 없었다.

대신 첨탑의 테라스 밖에서는 우렁찬 환호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마치 대관식 날처럼. 하지만 부르는 이름이 달랐다.

스칼렛은 멈칫 섰다.

“루키우스. 이젠 내가 뒤에서 지켜볼 차례네요. 가요.”

루키우스는 걸음을 옮기다 말고 우뚝 서더니 싱긋 웃었다.

“마이 퀸. 마이 스칼렛. 공동 왕이라 하더니 그새 마음이 바뀐 겁니까?”

그러더니 손을 내밀었다.

스칼렛은 숨을 들이켜고는 조심스레 그의 손을 잡았다.

둘이 함께 테라스로 가서 섰다.

눈 아래로 광장을 가득 메운 순혈 뱀파이어들이 보였다. 이리나와 싸우기 위해 불러들였던 그들이 그대로 남아 이제는 루키우스의 이름을 연호하며 행복해하고 있었다.

루키우스가 손을 들어 화답하자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스칼렛은 족쇄에서 풀려나 눈에 띌 정도로 화사해진 순혈 뱀파이어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광장에 아에리우스 꽃을 심어야겠어요. 오늘을 기념하기 위해.”

“스칼렛. 기념해야 할 건 따로 있습니다.”

루키우스가 모로 서더니 바라봤다, 스칼렛 또한 끌린 듯 그와 마주 봤다.

“뭔데요?”

루키우스가 그녀의 두 손을 잡더니 물었다.

“나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스칼렛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왕이 될 테니 귀족들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랬지만 지금 이 순간 떠올린 게 둘의 미래라니 기쁘면서도 멋쩍었다.

“스칼렛. 마이 퀸.”

루키우스가 대답을 재촉하듯 손을 강하게 잡아 왔다.

스칼렛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나의 왕이시여.”

둘의 입술이 맞닿았다.

모두를 잊고 서로를 탐하는 그 잠깐 동안 광장은 침묵에 잠겼다.

그러다 입술이 떨어지자 만세 소리가 들려왔다.

“엔네야드 왕 만세! 아마칼리 여왕 만세!”

스칼렛은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

“우리 아이를 위해 새로운 왕조의 이름을 지어야겠어요. 뱀파이어 왕의 꽃, 아에리우스 왕조 어때요?”

루키우스는 부드럽게 웃더니 대답했다.

“그래요. 스칼렛. 내게 당신은 아에리우스 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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