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왕의 눈물
초겨울다운 나른한 햇살이 창을 통해 스며들었다. 엎드린 채 단잠에 빠져 있던 스칼렛은 낮게 신음하며 눈을 떴다.
그러자마자 루키우스가 보였다. 손으로 머리를 괸 채 옆으로 누워서는 창밖에 시선을 둔 채 그녀의 허리선을 살며시 쓸어내리며 낮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길고 긴 세월, 왕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흰 꽃 한 송이. 세월의 바람에 칼날처럼 베어 흩어져가도 그가 깨어나면 슬픔은 더는 없을 거라 은빛으로 흩날리네.”
아에리우스의 노래였다. 낮고 저음이라 그런지 아니면 허공을 헤집는 시선 때문인지 무척이나 슬픈 음색이었다.
‘어제 일 때문에 마음이 심란해져서 저러는 걸까?’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루키우스가 시선을 느낀 듯 고개 돌려 바라보더니 미소 지었다.
“언제까지 주무시는 걸까 고민 중이었는데 마침 일어나서 다행이군요.”
스칼렛이 대답 대신 미소를 짓자 루키우스가 한쪽 허벅지에 올라타더니 한쪽 다리를 밀어 올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어제 그 한 번으로는 부족해서요. 지난 일주일 동안 너무 참았나 봅니다.”
순간 스칼렛은 잠이 확 깼다.
“잠깐! 루키우스!”
외침이 무색하게 비스듬한 각도에서 성기가 쑤욱, 박혔다.
아읏!
스칼렛은 시트를 틀어쥐며 낮게 신음했다. 비로소 루키우스의 입술이 젖어 있었던 이유를 알았다. 그녀가 자는 사이 음부를 빨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안이 푹 젖어 있는 데다가 어제 오후 몸을 섞었던 여파가 남아 있는지 진한 쾌감이 느껴졌다.
루키우스가 그걸 느꼈는지 낮게 짐승처럼 그르렁거리며 웃더니 읊조렸다.
“후우- 스칼렛. 언젠가도 말했지만, 당신 뒤태는 정말 날 미치게 해요. 박고 싶은 충동을 마구 일으키거든. 하. 안이 바르르 떨리네…”
그러더니 퍽퍽, 거침없이 그녀 안을 오가며 탐하기 시작했다.
스칼렛은 주먹을 꽉 쥔 채 내벽이 바들바들 떨며 그의 성기를 꽉 무는 것을 느꼈다. 이 체위는 깊기도 깊었지만, 사선으로 쑤셔대서인지 엄청난 쾌감이 동반됐다.
“아으으으….”
속절없이 교성을 내뱉으며 허리를 비틀어 바라보니 루키우스가 그녀의 엉덩이와 허리선을 바라보며 제 입술을 혀로 덧그리고 있었다.
음욕으로 진해진 프러시안 블루색 눈동자를 빛내며.
“후으- 보면 볼 수 록 너무 예뻐서 아주 미치겠다니까.”
낮은 읊조림과 함께 그의 손이 엉덩이를 터트릴 듯 주물럭댔다. 스칼렛은 점점 더 빠르고 강하게 찔러오는 느낌에 시트에 얼굴을 비비적대며 신음했다.
찔꺽찔꺽찔꺽
듣기 민망한 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 퍼졌다.
헉헉-
루키우스가 거친 숨을 토해내더니 몸을 움직여 더욱 사선으로 박아댔다. 그의 성기에 내벽이 쩍쩍 달라붙으며 안달을 해댔다.
더는 강한 쾌감 따위 없을 줄 알았는데, 마치 처음인 듯 몸이 달달 떨리며 눈앞이 번쩍거렸다.
스칼렛은 시트를 틀어쥐며 마구 신음을 토해냈다.
“루키우스. 아으……우리 아이 가진 건… 기억하는 거죠?”
루키우스는 거침없이 허리를 흔들며 대답했다.
“인간 아이처럼…. 행여라도 잘못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순혈의 아이는 악착같이 커나가거든요. 놀랍도록 빠르게…. 하아. 이 조임이라니.”
그러더니 더욱 거칠게 박아 올렸다.
침대가 급기야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끽끽거리며 신음했다.
스칼렛은 부서질 것 같은 느낌에 시트에 이마를 비비며 교성을 흘렸다. 좋아도 너무 좋았다. 척추까지 저릿하며 내벽이 제멋대로 그의 성기를 조여 무는 것이 느껴졌다.
‘이거 뭐야. 나 이런 건 몰라. 이래도 되는 거야? 임산부가 이렇게… 음란하게 놀아도…’
혼란스러워하며 몇 번이나 그 감각에 취해 신음을 토해내자 루키우스가 짐승처럼 낮게 웃더니 말했다.
“순혈의 아이를 가지면 감도가 아주 좋아지…죠. 흐흡. 하아- 인간 여인들이 순혈의 아이를 품기를 소망하는 이유기도…… 하고요. 당신도 그러니 즐겨요. 나도 그러니까. 안이 달달 떨리는 게…후우,”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선부터 엉덩이까지 이어지는 굴곡을 쓸어내렸다.
퍽퍽퍽퍽퍽
강하게 들이치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스칼렛은 자신의 몸이 달아오르다 달아오르다 화끈해지며 깃털처럼 날아오르는 걸 느꼈다.
절정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쾌감에 눈앞이 번쩍거렸다.
그것으로도 충분했는데 루키우스가 팔을 잡더니 그녀를 옆으로 뉘고는 젖가슴에 이를 박았다.
쯥!
흡혈과 동시에 사방이 하얗게 불타올랐다.
“루키우스!”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대로 의식이 끊어졌다.
그랬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바로 누워 있었고 루키우스가 아직도 그녀 위에서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쾌감이 지나쳐 기절하는 건 문제가 있군요. 난 아직 끝내지 못했는데.”
스칼렛은 제 머리 옆에 놓인 그의 손목에 얼굴을 비비적대며 괴로워했다.
“제발 좀… 그만….”
울 것처럼 애원하자 루키우스의 성기가 크게 부풀었고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스칼렛. 역효과에요. 난 당신이 눈가를 붉히면…”
그러더니 진한 키스를 해왔다.
입도 아래도 모두 막힌 채 미친 듯이 탐해졌다. 흔들던 것으로는 만족이 안 되는지 위에서 내리치듯 박아대는데 정신이 점점 몽롱해졌다.
스칼렛은 그의 등을 손톱으로 마구 긁어대며 그를 조금이라도 멈추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거침없이 받아대는 동작만 더 커졌다.
‘이러다 죽겠어.’
또다시 기절하려는 순간, 루키우스가 혀에 질끈 깨물더니 조금이지만 흡혈을 했다. 그와 동시에 강하게 밀어 넣던 동작을 멈추며 엉덩이를 바짝 조였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기에 스칼렛은 그대로 축 늘어졌다. 배 속이 거북할 정도로 부풀었던 성기가 뜨거운 것을 몇 번이나 뿜어내는 것이 느껴졌다.
내벽이 그것을 쫙쫙 빨아들이며 쾌감을 불러일으켰다. 안달하며 허리를 비틀자 놀랍게도 배 속의 아이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루키우스가 그것을 느낀 듯 입술을 거두더니 아주 천천히 성기를 빼냈다. 그리고는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모로 눕더니 손을 들어 그녀의 배를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아이가 아주 활발하군요. 보통 일주일은 지나야 움직이기 시작한다고 알고 있는데….”
“어제 임신했는데 벌써 움직이는 건 이상한 거 아네요?”
“스칼렛. 순혈 뱀파이어의 아이는 성장 흐름이 다릅니다. 하룻밤 새 주먹만 하게 자랐을 겁니다. 내가 밤새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모르고 당신이 자는 걸 보니 알겠더군요.”
“아이가 자랄 때 산모가 숙면한단 소리예요?”
“순혈 아이는 어머니의 피를 영양분으로 삼으니 방심하면 큰일 난다는 걸 안다더군요. 그래서인지 어머니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예를 들면….”
그렇게 말하며 루키우스는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나 싶더니 질구로 손을 밀어 넣으며 덧붙였다.
“내가 진하게 뿜어낸 정액과 체액을 아주 말끔하게 빨아들인 것만 봐도 알겠군요.”
스칼렛은 계속 그녀 안에 머물며 장난을 쳐대는 그의 손을 밀어내려 애쓰며 물었다.
“어딜 그렇게 돌아다녔어요?”
“오늘 오후에 내 허락도 없이 엔네야드가의 비밀 회합이 열립니다. 어젯밤 만난 아이란 공주의 말로는 그곳에 이리나가 온다고 했다더군요. 그래서 급히 브라운 교수님을 뵈러 갔었죠.”
“이리나가 거길 왜 가요?”
“순혈의 저주를 풀어주겠다고 했답니다. 왕을 맞을 용맹한 신하들이 필요하다면서요.”
루키우스는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했지만, 스칼렛은 아까 루키우스가 왜 그리 심란한 얼굴로 콧노래를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이리나가 기어코 일을 저지르려고 하는군요.”
“그래요. 브라운 교수님이 정오에 오실 겁니다. 어제 우리가 본 상황을 말씀드렸더니 책을 좀 찾아보겠다고 하셨거든요.”
“정확히 뭐에 대해서요?”
“호리병 목걸이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요. 당신 말대로 딸에게 주는 선물에 저주는 내 피로 풀릴 것이라고 적어놓은 것이 영 이상해서 말입니다.”
“당신 말대로 마지막 뱀파이어 왕의 피로 만들어진 뭔가라서겠죠. 문제는 그걸로 풀 저주가 뭔지를 모르겠단 건데….”
스칼렛은 말하다 보니 무척 궁금해져 벌떡 일어나 앉았다. 빨리 브라운 교수님을 만나고 싶은 생각에 들떠 침대에서 잽싸게 내려섰다.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스칼렛. 정오에 오신다니까요.”
등 뒤에서 루키우스가 소리쳤지만, 스칼렛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욕실로 향했다.
일요일 아침은 루키우스와 보내는 것을 이젠 모두가 아니 굳이 메이드를 부르지 않아도 준비가 되어있을 거였다.
막 욕실 문고리를 잡으려고 손을 뻗는데 등 뒤에서 건장한 팔이 다가와 먼저 잡았다.
“스칼렛. 내가 어제 뭐라고 했었죠?”
루키우스의 속삭임에 스칼렛은 숨을 삼켰다. 뭐라 말도 못 하고 서 있자 루키우스가 그녀의 어깨에 짤막한 입맞춤을 하고는 어제 한 말을 반복했다.
“지금까진 당신의 허락만을 기다렸지만, 이제부턴 다를 겁니다.”
스칼렛은 고개 돌려 그를 바라봤다. 프러시안 블루색 눈동자가 여전히 어둡게 빛나고 있었다. 어쩐지 뱃속이 저릿해져 마른침을 꼴깍 삼키자 루키우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게 아연한 얼굴로 바라보면 곤란합니다. 싸우러 나가는 기사들의 성욕은 원래 출정 전에 고조되는 법이거든요. 자, 들어가죠. 시간이 아까우니.”
루키우스가 허리를 그러 안으며 욕실로 떠밀었다.
스칼렛은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욕조를 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 계명이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니었어. 내 이웃의 뱀파이어를 탐하는 건 목숨을 거는 일이야.’
***
브라운 교수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약속한 정오에 정확히 남궁에 있는 황실 도서관에 나타났다.
아무래도 밤새 책을 들여다봤는지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무척 피곤해 보였지만 평온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여왕 폐하. 먼저 와서 기다리시다니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봅니다.”
브라운 교수가 이미 책상에 앉아 있는 스칼렛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스칼렛은 반가워하며 벌떡 일어서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
등 뒤에 서 있던 루키우스가 잽싸게 그녀의 허리를 받쳐 앉혀주었다. 순간 스칼렛은 무척 창피했다.
‘욕실에서 너무 놀았어. 루키우스가 그만하자고 할 때 그만했어야 했는데….’
정말로 그의 말대로 순혈의 아이 때문인지 몸을 섞는 쾌감이 배로 좋아져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제 오후도 좋았지만, 오늘 오전은 오전대로 기가 막혔다. 귀부인들이 순혈의 아이를 가지고 싶어 안달한다는 말이 완벽하게 이해가 갈 정도로.
후우-
그저 떠올리기만 했는데도 얼굴이 달아오르며 숨이 차올랐다. 저도 모르게 배를 쓰다듬으며 입술을 짓씹는데 루키우스가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괜찮으십니까?”
스칼렛은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는 브라운 교수를 향해 미소 지었다.
“어때요? 뭔가 알아내셨어요?”
인사도 건네지 않고 질문부터 던지자 루키우스가 풋,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스칼렛은 황급히 고개를 꾸벅 숙이며 덧붙였다.
“좋은 오후입니다. 교수님. 일요일 날 모셔서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여왕 폐하. 기꺼이 달려오는 게 도리지요. 학자로서 이런 기회가 드물기도 하고요.”
브라운 교수는 점잖게 대답하며 맞은편 의자에 앉더니 옆구리에 끼고 온 책을 펼치며 말을 이었다.
“거두절미하고 엔네야드 경에게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보건대, 여왕 폐하의 목걸이에 새겨진 문구부터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요.”
“네. 아타 논 베르다 수칼레 아르카디움. 저주는 내 피로 인해 풀릴 것이다. 그래서요?”
“그렇죠. 지난 천 년간 그렇게 해석을 해왔습니다만 사실 아타 논 베르다 수칼레 아르카디움은 고대어다 보니 여러 다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많은 학자가 그에 대해 논하였죠.”
브라운 교수는 그렇게 말하더니 책상에 펼쳐둔 책의 문구를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읽어보시죠. 여왕님.”
스칼렛은 시키는 대로 그의 손가락 아래 적힌 문장을 소리 내 읽었다.
“내 피만이 분노를 다스릴 것이다. 어라? 저주란 단어가 분노로도 해석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천 년 전에는 곧잘 저주와 분노가 혼용되어 쓰였거든요. 그러므로 분노라고 풀이한다면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설마 왕의 분노 말씀입니까?”
루키우스가 불쑥 끼어들었다. 브라운 교수는 고개 들어 루키우스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스칼렛은 눈을 끔뻑대다가 언젠가 수업 중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 왕의 분노라면 페란의 술탄이 쳐들어 왔을 때 대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던 주술 맞죠?”
“맞습니다. 지금도 주변국들이 탐낼 정도의 희유한 주술이죠. 액체열쇠가 있어야만 작동된다는 기록이 전해져 내려오고요. 어제 찾아낸 기록으로는 작은 병에 들어갈 정도라더군요. 그리고 마지막 뱀파이어 왕의 피로 만들어졌다고도 하고요.”
브라운 교수가 대답했다.
스칼렛은 숨을 들이켰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호리병 목걸이를 손으로 짚으니 손가락의 맥박이 느껴졌다. 따뜻했고 감동적이었다.
“딸을 지켜주고 싶어 선물한 거군요. 태어나는 것조차 보지 못할 딸을 위해 최고의 선물을 한 거예요. 멋진 아버지였네요. 마지막 뱀파이어 왕은.”
“뭐, 제 추측은 그렇습니다만 사실 열어봐야 알 일이긴 합니다. 천 년 전 주술이니 병 안에서 변질했을 가능성도 있거든요. 왕의 분노란 주술이 녹슬어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고요.”
브라운 교수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루키우스가 물었다.
“가급적 열지 않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시군요.”
브라운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 손을 깍지껴 책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
“또한 엔네야드 경께서 어제 던지신 다른 질문과 관련된 제 고찰에 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루키우스가 눈을 빛내며 바라봤다. 브라운 교수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리나란 여인이 흘린 안드로이드니 유전자 조작이니 하는 말의 의미는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학자로서 추정컨대 그녀는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라 기계에 가까운 존재가 아닐까 합니다.”
“기계요?”
스칼렛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묻자 브라운 교수는 손을 들어 공중에서 돌고 있는 선풍기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것은 기계적 원리로 인해 돌아가는 물건입니다. 감히 추정컨대 저런 원리가 점점 복잡해지면 인간처럼 보이는 기계를 만드는 것 또한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리처드 레오폴드의 어머니고 아마칼리 왕조의 시조인데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미스터리한 문헌 중에는 불임인 여성에게 인공자궁을 만들어 주어 아이를 가질 수 있게 해줬다는 기록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러니 이리나란 여인 또한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솔직히 천 년간 살아온 것만 봐도 영혼을 제외한 모든 것이 다 기계이지 않을까 합니다.”
“하긴 천 년을 살아왔으니. 게다가 체터필드 대공이 아홉 살의 이리나를 만났다고 하는 걸 떠올려보면 몸의 크기도 조정할 수 있는 것 같으니 기계란 말이 맞을 것 같네요.”
스칼렛은 고개를 끄덕이며 읊조렸다. 그러자 루키우스가 물었다.
“교수님. 흔히들 머리가 영혼의 그릇이라고 하는 데 동의하십니까?”
“동의합니다. 그곳에 있는 두뇌가 영혼의 물질화라고 보는 학설에 동감하고 있거든요. 그러니….”
“이리나를 죽이려면 목을 베야 한다는 거군요. 다른 곳을 찌르거나 베봤자 의미가 없을 거라는.”
브라운 교수의 머뭇거림에 루키우스가 속내를 읽은 듯 단호하게 말했다. 브라운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매우 슬픈 얼굴로 읊조렸다.
“뱀파이어 왕조 이전의 인간 문명의 산증인이나 다름없는 존재인데 이렇게 돼서 심히 유감입니다. 교류할 수 있었다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을 텐데.”
“그러게요. 뱀파이어를 인간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는 걸 보면 굉장한 주술을 지닌 대마녀인 게 분명한데.”
스칼렛 또한 아쉬워하자 루키우스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마이 퀸. 마지막 뱀파이어 왕 또한 그런 생각으로 그녀를 받아들였을 겁니다. 그랬다가 왕국이 멸망했지요. 지금 우린 마찬가지 상황에 놓여 있는 겁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힘은 맹독입니다.”
순간 스칼렛도 브라운 교수도 숨을 들이켰다. 둘 다 그렇게까진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서로 시선을 맞추다 동시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엔네야드 경의 말이 맞습니다. 늙은이가 전 문명의 지식에 눈이 멀었었군요.”
“아, 나도 그냥 이리나가 왕을 기다린 시간이 너무 안타깝다 보니….”
브라운 교수와 스칼렛이 변명하듯 읊조리자 루키우스가 풋, 가볍게 웃었다.
“그저 섭정으로서의 의견을 드린 건데 두 분 다 참 겸허하게 반성을 하시는군요. 이런 분들만 공직에 계시면 걱정할 게 하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스칼렛은 멋쩍어져 루키우스에게 눈을 흘기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떡할 거예요? 이리나의 목을 치러 갈 거예요?”
“엔네야드가의 회합에 가서 원로들을 설득해보고 안 되면 칼을 들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 티베리우스를 비롯한 슈발리에들이 힘을 보태주겠다고 했거든요.”
“오늘 저녁에 열린다고 했죠?”
“네. 조금 있다 출발할 겁니다. 그러니 여왕 폐하께는 죄송하지만, 오늘은 수비대의 호위를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비대장에게 적합한 자를….”
“됐어요. 나도 함께 갈 거예요.”
“안 됩니다. 마이 퀸. 극도로 위험할 수 있습니다.”
“난 모든 순혈의 족쇄를 쥔 사람이에요. 여차하면 귀족에게 명령권을 돌려받을 수 있다고요. 또한 이리나는 나에게 묶여 있으니 내가 필요할 거예요.”
“여왕 폐하. 그건 아닐 것 같습니다. 엔네야드 경의 말에 따르면 이리나는 초대 아마칼리 여왕이니 저주의 근원입니다. 족쇄를 쥔 자는 바로 그 여인이지요.”
듣고만 있던 브라운 교수가 훈계했다. 스칼렛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니면 말고요. 내 조상 할머니가 그런 요녀란 게 영 믿기지 않아서. 어쨌거나 나도 갈 거예요.”
루키우스가 옆에 와서 서며 시선을 맞췄다.
“마이 퀸. 절대 안 됩니다. 꿈도 꾸지 마세요.”
스칼렛은 입을 삐죽이며 크게 외쳤다.
“그렇다면 애 낳을 때까지 잠자리는 꿈도 꾸지 말아요.”
“스칼렛!”
루키우스가 당황해 손을 내밀어 입을 확 막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브라운 교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루키우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거뒀고, 스칼렛은 실수했다 싶었지만, 교수를 바라보며 의연하게 물었다.
“브라운 교수님. 비밀로 해주실 거죠?”
브라운 교수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지요. 여왕 폐하. 회임을 축하드립니다.”
***
엔네야드가의 비밀 회합이 열리는 곳은 수도 근교에 있는 아툼가의 성이었다.
아툼가가 왕이던 시절 사냥을 즐기기 위해 쓰이던 별궁인데 드넓은 강에 있는 작은 섬 위에 지어진 완벽한 성채로 오로지 도개교를 이용해서만 오갈 수 있었다.
천년이란 세월 동안 왕가란 명성은 퇴색했지만, 여전히 뱀파이어들의 존경을 받다 보니 체터필드가에서도 아툼가의 사유재산이라 인정해 손을 대질 않았다.
어린 시절 루키우스는 바로 이곳에서 자랐고 그러다 대공의 풋맨으로 발탁된 뒤에는 다시 와볼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가끔 꿈에서 볼 정도로 그리운 곳이었는데 이제 눈 아래 성채는 그를 단호하게 거부하며 도개교를 올린 채 굳건히 잠겨 있었다.
‘아이렛이 슬그머니 사라졌을 때 짐작은 했었는데 아예 내 입성조차 막으려 들 줄 몰랐군.’
그러고 있는데 티베리우스가 말을 모아 옆에 다가와 서며 물었다.
“용케 여왕님을 두고 오셨네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몹시 화가 나신 것 같던데요.”
“우리의 여왕이 아무리 용감하다 해도 이제 저곳에 도착할 여인의 후손입니다. 순혈의 족쇄를 쥔 여인이니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조차 못 하겠습니다.”
“…이리나가 정말 올까요?”
“모르겠습니다. 아이란 공주님이 전한 바로는 이리나가 체터필드 대공에게 아마칼리 여왕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꿀 거니 구경하고 싶으면 동행해도 좋다고 했다더군요.”
“풀어준다는 게 아니고요? 의미심장하네요”
“그렇죠. 상당히 기묘하죠.”
“그래서 루키우스 님. 저 성에는 어떻게 진입하실 생각이십니까? 보아하니 도개교 외에는 통로가 없어 보이는데.”
“비밀 통로가 몇 개 있습니다. 그중 하나의 입구가 이 근처에 있고요.”
루키우스는 그렇게 대답하다 문득 대열의 끝쪽에 회색 망토를 푹 뒤집어쓴 체구가 작은 슈발리에를 보았다.
아이렛을 제외한 모든 슈발리에가 그를 따르겠다 길을 나서다 보니 서른 명이 넘는 자들이 함께하게 됐는데 다들 순혈 뱀파이어들이라 덩치들이 상당히 좋았다.
그런데 저렇게 작은 체구라니 영 이상했다.
“이봐. 자넨 누구지?”
루키우스는 재빨리 말을 모아 다가갔고, 그제야 뒤를 돌아본 슈발리에들이 눈치채고는 칼손잡이를 꽉 쥐며 경계를 했다.
하지만 곁에 다가가기도 전에 망토가 훌렁 넘어가며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스칼렛의 얼굴이 드러났다.
“루키우스!”
루키우스는 너무 놀라 말에서 뛰어내려 황급히 다가갔다.
“마이 퀸! 대체 어쩌자고 쫓아오신 겁니까!”
그러면서 바로 옆에 가서 서자 스칼렛이 훌쩍훌쩍 울면서 말했다.
“좀 내려줘요. 너무 높아서 혼자서는 절대 못 내려가요.”
루키우스는 팔을 뻗어 스칼렛을 잡아 바닥에 내려줬는데 발을 딛자마자 쓰러지려 했다. 루키우스는 황급히 받아 두 팔로 번쩍 안아 들며 물었다.
“왜 이렇게 힘을 못 씁니까?”
“가이우스한테 날 데리고 가라고 명령했더니 먹을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저 말을 타고 따라오라더라고요. 그러더니 자신이 타는 말꼬리에 당근을 달아놓지 뭐예요. 그랬더니 저 먹보 말이 그거 먹겠다고 막 쫓아 달리는데…. 너무 빠른 데다 이러다 미끄러지면 어쩌나 너무 무서워서.”
그러더니 다시 엉엉 크게 울음을 터트렸고 비로소 다들 가이우스가 탄 말꼬리에 말의 잇자국이 선명한 당근 꼬투리가 달려 있음을 알아봤다.
모두의 시선이 가이우스에게 꽂혔고, 가이우스는 무척 억울하단 얼굴로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엔네야드 경. 진실을 아셔야 합니다. 자신의 명을 안 따면 절 자르겠다고 협박하셨다고요. 아시죠? 제 아내가 요즘 제 월급 받는 재미에 산다는 거. 그리고 저 먹보는 보기엔 저래도 혈통서가 붙은 녀석입니다.”
그러자 스칼렛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루키우스는 제품으로 파고들며 계속 울어대는 스칼렛 때문에 입술을 안으로 말며 웃음을 삼켰다.
여기까지 따라왔다고 야단치고 돌려보내야 했지만 이러고 있으니 화를 내기는 다 글렀다.
“자. 그만 우십시오. 여왕님. 오다가 무사했으니 다행입니다. 가이우스 말대로 명마네요. 말도 탈 줄 모르는 주인을 용케도 안 떨어뜨리고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이름조차 먹보래요. 먹보.”
스칼렛은 좀 진정이 되는지 훌쩍거리며 대답했다. 루키우스는 그녀가 몹시도 귀여워 자꾸 흘러나오는 웃음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줬다.
바로 선 스칼렛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훅, 내뱉더니 배시시 웃었다.
“엄청 창피하네요. 멋지게 등장하고 싶었는데.”
그러자마자 티베리우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연이어 다른 슈발리에들도 웃어댔다. 가이우스가 살았다는 얼굴로 땅이 꺼져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루키우스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스칼렛은 볼을 붉히더니 웃음소리가 안 들리는 것처럼 척척 걸어 아툼가의 저택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가서 섰다.
“상당히 견고한 성채네요. 뱀파이어 왕조시대에 지어진 건가요?”
루키우스는 그녀 옆에 가서 서며 대답했다.
“전설에 따르면 뱀파이어 왕조의 마지막 왕이 주술로 하룻밤 만에 지었다고 하더군요.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서요.”
“아마칼리 여왕이요?”
“아마도 그렇겠죠. 자, 여왕 폐하. 저흰 이제 회합이 시작되기 전에 저 성에 입성해야 합니다. 하지만 도개교가 올라갔으니 비밀 통로를 이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당신을 막기 위해서니 당연히 비밀 통로로 막혔겠죠. 안 그래요?”
“그렇겠죠. 그래도 슈발리에들의 실력이 출중하니 시도는 해봐야죠.”
“불필요하게 피 보지 말고 그냥 날아 들어가는 건 어때요?”
“어떻게 말입니까?”
“슈발리에의 이 회색 망토, 바람이 안 통하더라고요. 가볍고 견고하고. 게다가 칼로도 안 찢기더군요. 이런 거라면 연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연이 뭡니까?”
“암시장에서 국경 수비대가 쳐들어올 것 같다 싶으면 띄우던 풍력을 이용한 기구예요. 궁에 있는 선풍기 만든 바로 그 나라에서 온 상인에게 만드는 법을 배웠는데 그걸로 돈 좀 벌었죠.”
“망토만 있으면 그걸 만들 수 있는 겁니까?”
“대나무가 핵심 재료예요. 그런데 저쪽에 작지만, 대나무 숲이 있더군요. 암시장에선 수입해다 썼는데 그걸 여기서 볼 줄은 몰랐네요.”
“언젠지는 몰라도 엔네야드가 출신의 학자가 가져다 심은 겁니다. 그분이 제조한 비료로 키우고 있죠. 베고 나면 다시 쑥쑥 자라니 모두 다 잘라다 써도 될 겁니다.”
“그렇게 많이는 필요 없어요. 아, 그리고 고무나무랑 흔한 약초 몇 개가 필요한데 오다 보니 변경 숲과 마찬가지로 잔뜩 있더군요.”
“무서워서 엉엉 울고 있었으면서 그게 눈에 들어오다니 놀랍네요.”
루키우스가 웃음을 삼키며 묻자 스칼렛은 곱게 눈을 흘기더니 소매를 걷어붙이며 외쳤다.
“힘 남아도는 분들 절 따라오세요. 적당한 대나무를 베야 해요!”
연을 만드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스칼렛은 불을 이용해 대나무를 달궈가며 꼿꼿한 나무 살을 적당하게 구부러지게 만드는 법을 알려줬고 슈발리에들은 금세 익혀 연을 지탱할 튼튼한 연살을 만들어냈다.
그런 뒤 고무나무의 끈적한 수액에 몇 가지 풀뿌리를 섞어 접착제를 만들어냈다.
루키우스는 스칼렛이 아주 익숙한 손놀림으로 망토에 연살을 붙여 연을 만들어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진심으로 놀랐다.
“아마칼리 여왕이 대마녀라더니 당신도 못지않군요.”
스칼렛은 바쁘게 손을 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루키우스. 이런 접착제 만드는 건 제가 사는 마을의 어린애들도 알아요. 마녀는 무슨.”
그러더니 마지막 연까지 완성하고 나자 손을 털고 일어섰다.
“밧줄들 다 있죠?”
정확히 한 시간 후, 루키우스는 티베리우스를 비롯한 슈발리에들과 함께 창백한 얼굴로 바람을 타고 둥실둥실 떠 있는 스칼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선 곳은 천 길 낭떠러지였고, 그 아래로 수심이 무척 깊은 시퍼런 강이 출렁였다.
아툼가의 성은 그 강에 있는 작은 섬 위에 지어졌는데, 이곳에선 푸른 잔디가 덮인 후원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였다.
목표지점은 바로 저 후원이었지만 바람을 타기 위해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려야 한다니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못 할 일이었다.
더 황당한 건 빨리 달리는 말이 무섭다고 엉엉 울 때는 언제고 연을 타고 날아오른 얼굴은 아주 신나 보였다.
“자, 보세요. 손에 걸고 있는 밧줄을 이용해서 방향을 바꾸는 거예요.”
스칼렛은 마치 새처럼 휙휙 자유자재로 방향을 바꿨고, 루키우스는 고개 젖혀 바라보다 현기증을 느꼈다.
‘야생마라고 생각은 해왔지만, 이제 보니 날개 달린 야생마였군.’
그때 바람이 확 불어와 스칼렛이 타고 있던 연이 뱅글뱅글 돌았고 밧줄을 잡고 있던 티베리우스가 혼비백산하며 황급히 줄을 잡아당겼다.
루키우스도 슈발리에들도 너무 놀라 소리도 제대로 못 질렀는데 스칼렛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바람을 사선으로 타더니 다시 중심을 잡으며 부드럽게 착지했다.
“후- 오랜만에 탄 건데 실력이 녹슬지는 않았네요.”
스칼렛은 이마에 고인 땀을 닦으며 방긋 웃더니 루키우스를 비롯해 슈발리에들을 훑어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렇게 다들 표정이 안 좋아요?”
그러자마자 가이우스가 손을 들더니 정중하게 물었다.
“여왕 폐하. 혹시 절 벌하시려고 이러시는 건 아니죠? 저희 몸무게가 여왕님의 최소 3배 이상일 것 같은데요.”
스칼렛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연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준 그 상인은 저보다 4배는 더 나갈 법한 몸이었는걸요. 그래도 잘만 뜨더라고요. 그러니 괜찮으실 거예요.”
“그때가 몇 살 때였습니까?”
루키우스는 문득 그녀가 그보다 한참 어리다는 사실이 떠올라 물었다. 스칼렛은 아차 싶은 표정을 짓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12살 때네요.”
가이우스를 비롯한 모두가 거의 동시에 숨을 들이켰다. 티베리우스는 턱을 벅벅 긁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루키우스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입을 열었다.
“연을 만드느라 고생하긴 했지만, 저희 순혈들은 같은 덩치의 인간들보다 무게가 더 나갑니다. 그러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뒤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이란 공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 그렇다면 저희가 들어가도록 하죠.”
뒤돌아본 루키우스는 검은 낙타의 털을 두른 아이란 공주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등 뒤로는 언제나 그림자처럼 공주를 쫓아다니는 알렉사의 여인들이 함께였다.
“어머나. 아이란 공주님?”
스칼렛이 무척 놀란 듯 외치자 아이란 공주는 성큼성큼 다가와 마치 남자처럼 허리를 숙여 절하고는 말했다.
“여왕님. 부디 돕게 해주세요. 저는 엔네야드가의 당주인 루키우스 오라버니를 무시하는 이런 처사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스칼렛은 동감한다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루키우스는 황급히 스칼렛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아이란 공주님. 저 안에 들어갔다가 행여라도 다치면 외교 분쟁이 일 겁니다. 페란의 술탄께서 엔네야드가를 절대 용서치 않을 거고요.”
“오라버니. 정말 너무 하세요! 이리나가 요물이란 걸 알아낸 건 바로 저예요. 제가 있어서 여기까지 오신 거잖아요!”
아이란 공주가 성을 내며 발을 굴렀다. 루키우스가 어떻게든 달래려 하는데 스칼렛이 그의 등 뒤에서 고개를 빼 밀며 아이란 공주에게 말했다.
“좋아요. 공주님. 우리 함께 날아보죠.”
아이란 공주가 좋아서 팔짝 뛰었고, 루키우스는 돌아서서 스칼렛과 눈을 맞췄다.
“마이 퀸. 대체 어쩌시려고….”
스칼렛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들어가서 도개교를 열게요. 슈발리에들과 함께 당당하게 들어와요. 저 성의 진짜 주인이 누군지 모두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
루키우스는 절벽에서 차례로 뛰어내리는 스무 개가 넘는 연을 바라봤다.
아이란 공주와 알렉사의 여인들은 스칼렛과 함께 아주 능숙하게 바람을 타고 강 위를 날아 목표지점인 아툼 성의 후원에 낙오자 없이 착륙했다.
가장 먼저 그곳에 발을 디딘 스칼렛은 루키우스에게 손을 흔들어 무사함을 알리고는 모두 착륙하자 순식간에 후원 너머로 사라졌다.
“이제 저희 차례군요.”
티베리우스가 안도하는 얼굴로 읊조렸다.
루키우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슈발리에들을 이끌고 절벽을 빠르게 내려가 말을 묶어둔 곳에 이르렀다.
아이란 공주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아툼 성에 자주 와서 머물렀었고 그러니 후원에서 어디로 가야 들키지 않고 정문까지 갈 수 있는지 제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할 거였다.
그런데도 스칼렛을 딸려 보내서인지 걱정이 앞서 저절로 얼굴이 굳어졌다.
‘어떻게든 설득해 보내지 말았어야 했을까?’
말에 올라타며 속으로 중얼거리다 이내 피식 웃었다.
스칼렛은 여왕이었고 그는 종복이었다. 비록 스칼렛이 그의 여자가 되었다 해도 그 관계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섬기고 따르고 싶은 왕을 발견한 기사의 심정이었으므로.
“마이 퀸. 마이 스칼렛.”
루키우스는 낮게 읊조리고는 말고삐를 힘차게 내리쳤다.
이럇!
흑마가 땅을 박차며 숲길을 거침없이 달려나갔다. 슈발리에들이 뒤를 따랐다.
워낙 익숙한 숲길이라 말이 가기 좋은 산등성이를 따라 지그재그로 달려 내려가 금세 도개교가 보이는 숲 어귀에 이르렀다.
그곳에 서서 보니 도개교 위의 탑 위에 평소 아툼 성을 관리하는 엔네야드가의 남자가 갑옷 차림으로 선 것이 보였다. 그 옆에 선 두어 명의 남자들 또한 그랬다.
루키우스는 말을 몰아 도개교가 내려오면 딱 걸리도록 만들어져 있는 버팀목 앞에 멈춰 섰다.
“아툼가의 당주, 루키우스다. 도개교를 내려라!”
목에 힘을 주어 외치자, 탑 위가 분주해졌다. 남자들은 쑥덕대더니 한 남자가 어디론가 사라졌고 아툼 성의 관리자가 몸을 내밀며 외쳤다.
“당주님. 정말 죄송하지만, 오늘은 이곳에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원로회의 결정입니다!”
루키우스는 숨을 들이켰다.
원로회의 실세는 큰 숙부로 당주지만 나이가 어린 루키우스를 대신해 수많은 결정을 해왔는데 그 때문에 학자로서 명성이 드높은 작은 숙부와 왈가왈부할 때가 가끔 있었다.
솔직히 그럴 때마다 루키우스는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기 싫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곤 했는데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 전혀 아니었다.
진즉 원로회로부터 모든 위임권한을 돌려받았어야 했는데 실수했다 싶었다. 이렇게까지 이름뿐인 당주가 되어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러고 있는데 티베리우스가 말을 몰아 옆에 와서 서더니 물었다.
“저희 중 루체른과 헬릭스가 화살 좀 쏠 줄 아는데 어떠십니까?”
루키우스는 웃었다.
“저들은 그저 원로회의 결정에 따를 뿐입니다.”
“엔네야드 경. 당신은 그저 한 가문의 당주가 아닙니다. 우리 순혈의 정점이죠. 그런 분께 저런 이야기를 하다니 간덩이가 단단히 부은 것 같아서 말이지요.”
“다 지난 일입니다. 이젠 하인 신분이니 위아래가 어딨겠습니까?”
“우린 인간과는 다릅니다. 뱀파이어죠. 모든 뱀파이어는 최초의 순혈로부터 뻗어 나온 가지입니다. 인간이 제 어머니에게 불손한 자를 버릇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
“…혹시 이곳까지 따라온 이유가 여왕을 위해서가 아니라 절 위해서입니까?”
“딱히 말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다들 그럴 겁니다. 뱀파이어로서의 본능이니까요.”
“아툼가조차 절 거부하는데 다른 곳에서 사랑받게 될 줄은 몰랐군요.”
“루키우스 님. 여러 가지 이유로 눈이 어두워져 당신을 거부하는 뱀파이어가 있을 순 있겠지만 당신에게 칼을 들이댈 수 있는 자는 없을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본능이니까요.”
“어쩐지 위안이 되는군요. 무사히 입성한다 해도 고작 스무 명이 조금 넘는 인원으로 수백 명에 이를 엔네야드가의 뱀파이어들과 어떻게 맞설지 고민 중이었거든요.”
그렇게 티베리우스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아이렛이 도개탑에 나타났다. 언제나처럼 유들유들한 웃음기를 머금은 채 아이렛이 외쳤다.
“어이. 루키우스! 좋은 말로 할 때 돌아가라! 난 아니지만 여기 있는 남자들을 비롯해 원로회 노친네들은 널 공격하기를 원치 않더라고.”
루키우스는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한발 앞서 슛, 날카로운 화살이 아이렛을 덮쳤다. 정통으로 맞출 생각 따윈 없었는지 화살은 그저 아이렛의 귓불을 스쳤다.
“이런 망할!”
아이렛이 귀를 감싸며 욕을 해댔다. 뚝뚝,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루키우스는 깜짝 놀라 고개만 돌려 뒤를 돌아다봤다.
슈발리에 중 과묵하기로 유명한 헬릭스가 막 화살을 쏜 동작으로 활을 들고 있었다. 그러다 루키우스가 바라보자 활을 내려 다시 어깨에 메면서 조용히 말했다.
“전부터 한 방 쏴주고 싶었거든요.”
주변에 둘러선 슈발리에들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반면 헬릭스는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돌려 도개탑 위를 바라봤다.
루키우스는 같이 웃고 싶은 걸 참으며 다시 앞에 시선을 줬다. 그 짧은 사이 아이렛은 귀를 수건으로 감싸고는 이를 갈며 궁수를 배치 중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뒤로 물러서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손을 들어 신호하려는데, 탑 아래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아이렛이 놀라 어디론가 뛰어가 버렸다.
그러더니 쇠사슬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이내 제 무게에 못 이긴 듯 도개교가 빠르게 내려와 강 위에 길을 만들었다.
다리 너머 성문이 보였고 그곳에는 스칼렛이 서 있었다. 어서 오라는 듯 손짓을 하는 그녀를 보자마자 루키우스는 말고삐를 내리쳤다.
그대로 단숨에 달려가 팔을 뻗어 스칼렛을 안아 말 위에 앉히고는 계속 말을 달렸다.
예상대로 아이렛이 성벽에서 저택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쇠철문을 내리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탑 위에 있던 궁수들이 뛰어 내려오더니 그의 뒤를 따라오던 슈발리에들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루키우스는 돌아서서 궁수들을 상대할까 하다가 일단 입성이 중요하다 싶어 그대로 달려 들어갔다.
말이 막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아이렛이 덤벼들더니 그의 앞에 탄 스칼렛을 낚아채며 옆으로 떨어져 내렸다.
깜짝 놀라 말을 멈춰 고삐를 돌리고 보니 아이렛은 스칼렛을 등 뒤에서 안은 채 손톱을 세우고는 노려보고 있었다.
“루키우스. 들어오지 말라 했더니 기어코 말을 안 듣지?”
“여왕을 놔줘라.”
“웃기지 마. 나도 엔네야드가다. 네 명령 따위 꼭 따를 필요 없지. 진즉 너 같은 놈은….”
그렇게 대답하던 아이렛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람처럼 나타난 알렉사의 여인들이 아이렛의 목에 칼을 겨눴다.
아이렛이 움찔 놀라 그대로 얼어붙자 아이란 공주가 저택 쪽에서 걸어오며 큰 소리로 인사했다.
“오랜만이네요. 세트가의 아이렛 님.”
아이렛은 고개 돌려 아이란 공주를 바라보며 인상을 구겼다.
“아이란 공주님. 엔네야드가의 일에 어찌 끼어드시는 겁니까?”
아이란 공주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루키우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오라버니. 죽이고 가죠. 살려둬봤자 귀찮을 뿐이니.”
아이렛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알렉사의 여인 중 한 명이 겨눈 칼날이 쿡, 그의 살갗을 찔러 피를 냈다. 질겁하며 아이렛은 들고 있던 칼을 떨구며 손을 들어 올렸고 풀려난 스칼렛이 그에게 달려왔다.
루키우스는 말에서 내려 스칼렛을 품에 안아 무사함을 확인하고는 아이란 공주에게 말했다.
“됐습니다. 아이란 공주님. 그를 그냥 놔두세요. 족쇄를 쥔 주인이 모자란 인간이라 그의 마음 또한 어리석어진 것뿐이니.”
아이란 공주는 얼굴을 팍 구겼다.
“오라버니. 착해빠져선 당주를 할 수 없어요.”
루키우스는 그저 미소 짓고는 스칼렛의 손을 잡고는 저택을 향해 돌아섰다. 그러자 아이렛이 벼락같은 고함을 지르며 알렉사의 여인을 헤치며 외쳤다.
“루키우스. 날 무시하지 마!”
그러더니 땅에 떨어뜨린 칼을 들고 덤벼들었다.
루키우스는 칼을 빼 들어 방어하려다가 그대로 앞으로 나서 아이렛의 칼을 몸으로 받아내려 했다.
“루키우스!”
스칼렛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이렛의 칼이 그의 어깨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닿기도 전에 칼이 우뚝 멈췄다.
“씨발. 이거 뭐야.”
아이렛이 부들부들 떨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루키우스는 무척 놀랐다. 티베리우스가 아툼가의 당주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뱀파이어의 본능이라 했을 때 반신반의했는데 진짜였음을 이제야 눈으로 확인한 기분이었다.
그사이 달려온 아이란 공주가 아이렛에게 칼을 날리려 했다.
“네가 감히 네 왕을 죽이려 해!”
루키우스는 손을 들어서 막고는 아이렛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아이렛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한 것처럼 그대로 무릎을 꿇고 앉더니 칼을 든 손을 늘어뜨렸다. 아이란 공주도 스칼렛도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 광경을 지켜봤다.
루키우스는 손을 거두고 잠자코 내려다봤다. 아이렛이 절규했다.
“날 죽여! 죽이라고!”
“아니. 아이렛. 난 널 죽이지 않는다. 난 네 왕이니까.”
그리고 돌아서자 아이렛이 땅에 얼굴을 묻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분해서가 아닌 속죄의 눈물이란 것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스칼렛이 놀라움이 가득한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빛내며 옆에 와서 섰다.
“지금 뭘 어떻게 한 거예요?”
루키우스는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미소 지었다.
“마이 퀸. 오늘에서야 제가 진정 무엇인지를 깨달았을 뿐입니다.”
***
스칼렛은 루키우스의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변한 것을 느꼈다.
원래도 당당하고 우아한 남자였지만, 아툼 성에 들어선 그는 위엄이 넘쳤다. 어쩐지 마음이 뿌듯해 씩 웃었더니 루키우스가 저택 문 앞에 서더니 물었다.
“마이 퀸. 키스하고 싶은 얼굴로 보시는군요.”
“난 당신이 체터필드 대공의 풋맨인 줄만 알았어요.”
스칼렛의 대답에 루키우스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문고리를 당겨 문을 두들겼다.
“여전히 전 그 신분입니다.”
그리고는 뒤에 서 있는 아이란 공주와 티베리우스를 바라보고 눈짓을 했다.
스칼렛은 아이란 공주의 알렉사 여인들과 슈발리에들이 조용히 칼을 뽑아 드는 것을 보았다. 긴장된 그들의 얼굴에서 애써 시선을 돌리며 루키우스에게 말했다.
“아뇨. 이제 보니 당신은 왕이에요.”
“그건 우리 순혈들끼리의 이야기입니다. 현실은 전혀 다르고 난 그 사실을 부정할 마음 따윈 없어요.”
“루키우스. 그 순혈 또한 이 왕국의 국민이에요.”
“마이 퀸. 그래서 당신이 우리의 여왕인 겁니다.”
루키우스가 미소 지었다.
스칼렛은 숨을 들이켰다. 자신이 그렇게 잘난 사람이 아니란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그 말에 선뜻 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있는데 문이 열리더니 안경을 쓴 중후한 인상의 남자가 나타났다.
“루키우스.”
“작은 숙부님. 갑자기 사라지셨다 싶었는데 이곳에 와계셨군요!”
루키우스는 무척 반색하며 그에게 다가섰고, 루키우스의 작은 숙부는 덥석 끌어안더니 자그맣게 속삭였다.
“내 힘으론 형님을 막을 수가 없었단다.”
“큰 숙부님은 어디 계십니까?”
루키우스가 묻자 루키우스의 작은 숙부는 그를 놔주더니 옆으로 물러서며 말했다.
“다들 2층 대회의실에 모여 있단다.”
루키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곳이 아주 익숙한 듯 척척 걸어 눈앞에 보이는 계단을 가볍게 뛰어올랐다.
스칼렛은 후다닥, 뒤를 쫓아 올라갔다. 아이란 공주가 오른쪽 옆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뛰어오르며 말했다.
“여왕님. 위험할 수 있으니 뒤로 빠지시는 게 어떨까요?”
스칼렛은 거절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티베리우스가 왼쪽 옆에 서며 말했다.
“마이 퀸. 아이란 공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발 뒤쪽에 계십시오. 가이우스와 함께요. 만에 하나 아까처럼 잡히시면 저흰 아무 저항도 못 하고 포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네. 네. 알았습니다.”
스칼렛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행을 앞으로 보내고 꽁무니로 쳐졌다. 가이우스가 옆에 와서 서더니 말했다.
“이미 충분히 싸워주셨으니 섭섭해 마세요. 이렇게 빨리 도개교 문을 내리실 줄 몰랐거든요.”
스칼렛은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성 후원에 연을 타고 착륙한 뒤 아이란 공주는 제가 아는 지름길로 안내를 했는데 그 길에서 마주치는 순혈 뱀파이어들은 페란의 여인들이 죄다 처리해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한 일이라고는 열심히 뛴 게 전부였다. 이런 일이 닥칠 줄 알았다면 아버지가 검술을 가르칠 때 좀 제대로 배워둘 것 그랬다.
하지만 이미 뒤늦은 후회였고, 지금은 루키우스가 하는 일에 걸리적거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이윽고 웅성대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거대한 문 앞에 도착했고 루키우스가 열어젖히자 그 안에 있던 엔네야드가의 순혈 뱀파이어들이 일제히 고개 돌려 바라봤다.
가이우스 옆에 바짝 붙어 숨듯이 서 있던 스칼렛은 그들이 무척이나 놀라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런 가운데 아까 입구에서 본 루키우스의 작은 숙부와 흡사하게 생긴 남자가 앞으로 걸어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루키우스. 결국 오고 말았구나.”
루키우스는 가만히 제 큰 숙부를 바라보더니 작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큰 숙부님. 공식적인 자리입니다. 당주라 불러 주시죠.”
루키우스의 큰 숙부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어쩔 수 없단 얼굴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당주님. 제가 무례했군요. 다시 인사 올리지요.”
루키우스는 손을 들어 인사를 대신하더니 회의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혈족 여러분. 모두가 자유를 염원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 당신들에게 그 약속을 한 건 애초에 그 자유를 묶어 놓은 여인입니다. 최초의 아마칼리 여왕, 이리나 아비스의 정체죠.”
순간 회의실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루키우스는 그들 한가운데 서서 계속해서 설득의 말을 이어갔다.
문가에 선 채 숨을 삼키며 지켜보던 스칼렛은 뒤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반사적으로 돌아보려 했는데, 가이우스가 앞으로 나서며 등 뒤로 숨기기에 멈칫했다.
‘적인가?’
그러자마자 나타난 건 체터필드 대공과 이리나 아비스였다.
슈발리에들은 둘로 갈라져 물러섰고, 아이란 공주는 알렉사의 여인들과 그들을 맞이했다. 스칼렛은 슬며시 후드를 써 얼굴을 가렸다.
“이 요녀.”
아이란 공주가 칼을 들며 이리나를 향해 으르렁거리자, 체터필드 대공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란 공주님. 대체 이곳에서 뭘 하고 계신 겁니까?”
“체터필드 대공! 당신이야말로 루키우스 오라버니에게 무슨 짓을 한 거죠?”
“이런. 공주님. 제 신성한 권리에 대해 왈가왈부하시면 곤란하십니다. 버릇없는 여왕의 헛소리에 놀아나시면 더더욱 곤란하고요.”
“시끄러워요! 오라버니께서 말리지 않았다면 난 당신을 죽였을 겁니다.”
“절요? 이런. 루키우스의 본성을 보고 싶으신 게로군요. 뱀파이어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난 그는 참으로 아름다운 야수지요.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서 먹어대는 모습은 극상이랍니다.”
체터필드 대공은 그렇게 대답하더니 루키우스에게서 시크릿 풋맨을 불러낼 듯 손을 들었다. 스칼렛은 아찔한 기분에 그대로 달려나가 몸으로 대공을 들이박았다.
“하지 마! 이 망할 놈아!”
등 뒤에서 기습당한 대공은 중심을 잃고 앞으로 넘어졌고 그러자마자 이리나가 스칼렛의 손목을 낚아채 쓰고 있던 후드를 벗겨내더니 활짝 웃었다.
“어머나. 유어 그레이스. 혹시 제게 선물을 주려고 오신 건가요?”
“이거 놔!”
스칼렛은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역시나 순혈 뱀파이어인 척했는데도 의심하지 못했을 만큼 이리나의 악력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그러고 있는데 체터필드 대공이 일어나더니 스칼렛을 보며 칼을 뽑아 들었다.
“잘됐군. 이 계집을 그렇지 않아도 없애버릴까 고민 중이었는데.”
그러더니 그대로 칼을 휘두르려 했지만, 그 손을 이리나가 막았다.
“대공. 이 무슨 짓입니까! 여왕께선 리처드 섭정과 결혼하실 소중한 몸이에요.”
대공은 얼굴을 구기더니 마지 못해 칼을 거뒀다.
“쳇. 하필 왜 이런 계집에게 빠져서는….”
순간 스칼렛은 어제 오후에 묘지 지하에서 엿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다른 건 몰라도 이리나는 절대 스칼렛을 죽게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리처드 레오폴드와 스칼레 사이에 태어날 아이였으므로.
그러니 바로 이 점을 이용해야만 했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자마자 체터필드 대공에게 조롱하듯 외쳤다.
“훗. 역시 재상은 고약한 늙은이에 불과하군요. 말만 할 뿐 칼을 휘두를 힘도 없는 노인네.”
그리고는 이리나에게 말했다.
“이리나. 이런 노인네는 관두고 다른 남자를 찾는 게 어때요? 당신이 무진장 아까운데.”
대공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이리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스럽게 바라봤다.
“유어 그레이스. 왜 화를 자초하시나요?”
스칼렛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난 진실을 말한 건데요?”
그러자마자 대공이 악문 잇새로 읊조렸다.
“계집. 더는 못 참겠군.”
그러더니 손가락을 세 번 강하게 튕겼다.
“와라. 루키우스.”
스칼렛은 초조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루키우스의 얼굴이 마치 책장 넘기듯 확 변하는 것을 보았다.
외형은 변한 것이 없는데 살기가 솟구치며 눈매가 서늘해졌다.
짙은 푸른 눈동자가 어둠을 품어 진득하게 가라앉으며 소름 돋을 정도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스터. 무엇을 원하시나요?”
대공은 히죽 웃더니 말했다.
“저 계집을, 레이디 스칼렛을 죽….”
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리나의 손에서 붉은 깨알 같은 것이 뿜어져 나갔고 다음 순간 체터필드 대공의 목이 몸에서 분리되어 툭,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회의장에 있는 모두가 경악했다.
본래대로 돌아온 루키우스가 심하게 헐떡이며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고 연이어 바닥을 구르며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공포와 울음이 루키우스 주변에 서 있던 엔네야드가에 퍼져나갔고 다들 루키우스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덜덜 떨며 심하면 흐느껴 울어댔다.
그러다 이내 파도는 슈발리에들을 덮쳐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었다.
“루키우스!”
스칼렛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려 하자 아이란 공주가 팔목을 잡아채며 악문 잇새로 읊조렸다.
“위험해요. 여왕님. 오라버니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에요.”
그러고 있는데 이리나가 부드럽게 웃으며 모두를 둘러보더니 벽 쪽에 놓인 탁자에 다가갔다.
그곳에는 물잔이 여러 개 놓여 있었는데 그중 하나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마자 아까 대공의 목을 자른 붉은 깨알 같은 것이 쏟아져 나와 잔을 채웠다.
황당하게도 붉은 깨알은 잔에 고이자 불투명한 흰색이 되었다.
이리나는 마치 우유처럼 보이는 그것이 담긴 잔을 들고 루키우스에게 다가가 내밀었다.
“마시도록 해요.”
루키우스는 덜덜 떨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이리나는 짤막하게 혀를 차며 말했다.
“유어 하이니스. 딱 이 한 잔으로 공포도 눈물도 멈출 거예요. 뱀파이어의 왕이 되는 거라고요! 자, 어서 마셔요. 아니면 일일이 죄다 먹여야 하는데….”
그러면서 들이미는 잔을 갑자기 누군가가 낚아챘다.
루키우스의 큰 숙부였다.
“바보 같은 녀석. 역시 넌 당주가 될 그릇이 못 된다.”
스칼렛은 그가 단숨에 잔을 비우는 것을 보았다. 놀랍게도 젊음의 묘약이라도 되는지 40대로 보이던 그의 외모가 20대 청년으로 바뀌었다.
“어리석은 놈! 쓸데없는 짓을!”
이리나가 기막혀하며 발을 굴렀다.
그때를 틈타 스칼렛은 아이란 공주의 손을 뿌리치고는 루키우스에게 달려갔다.
“루키우스!”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호명하자 루키우스가 눈을 맞췄다. 짙푸른 눈동자 위로 어른거리는 황금색이 붉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의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솟아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리나가 비로소 눈치채고 비명을 질렀다.
“떨어져! 당장!”
하지만 늦었다. 다음 순간 스칼렛은 짐승처럼 이를 드러내며 덤벼드는 루키우스를 보았다. 목에 이가 콱 들어박혔고 쭉, 피가 빨렸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의 목울대가 꿀꺽대며 피를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동안 이토록 많은 피를 단 한 번에 빼앗긴 적은 없었기에 점점 눈앞이 하얗게 변해가며 온몸에서 쾌감이 차올랐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쾌락에 스칼렛은 달게 호흡하며 전신에서 힘을 뺐고, 루키우스는 환호하며 더욱 강하게 피를 빨아올렸다.
“오라버니. 안 돼요! 여왕님이 죽어요. 죽는다고요!”
아이란 공주와 알렉사의 여인들이 달려와 둘을 떼어놓으려고 애를 써댔다.
“쯧. 어쩔 수 없지.”
이리나가 지켜보다가 안 되겠다 싶었든지 짤막하게 혀를 차더니 붉은 깨알을 루키우스의 큰 숙부를 향해 날렸다.
순식간에 그의 몸이 두 동강이 났고, 그러자마자 루키우스가 흡혈을 멈췄다.
스칼렛은 루키우스의 두 팔 안에서 그대로 축 늘어졌다.
눈앞이 핑핑 돌았고 숨쉬기가 무척 힘이 들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와중에 루키우스의 심장박동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녀의 몸 안에 둥지를 튼 아이가 내는 심장박동 소리도.
루키우스가 헐떡이더니 제 손으로 심장을 강하게 움켜쥐며 읊조렸다.
“마이 로드. 스칼렛.”
그 순간 스칼렛은 루키우스를 비롯해 엔네야드가의 순혈 뱀파이어들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었다.
그러더니 이내 그것이 슈발리에들로 퍼져나갔고 마치 파도처럼 점점 멀리까지 소리가 메아리치며 들려왔다.
쿵! 쿵! 쿵!
모든 순혈 뱀파이어들의 심장이 그녀의 심장과 하나가 되어 뛰고 있었다.
스칼렛은 천 년 전 이리나가 걸었던 저주의 주인이 자신이 되었음을 느끼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뭐야. 이거. 너무 이상해. 느낌이….”
그러고 있는데 이리나가 한기를 뿜어 올리며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 아이를 제게 주세요. 엔네야드 경.”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지 마시죠. 이리나, 아니 아마칼리 여왕.”
루키우스는 스칼렛을 두 팔로 번쩍 안아 들며 말했다.
그사이 정신을 차렸는지 슈발리에들이 달려와 앞을 방어하듯 가로막으며 이리나에게 칼을 빼 들었다.
“이리나. 그만두세요. 그렇게까지 해서 그 남자를 살린다 한들 행복해지지 못합니다! 자신을 잊어달라 부탁까지 했을 때 둘의 인연은 끝난 겁니다.”
티베리우스가 안타까운 듯 소리쳤다. 아무래도 루키우스가 묘지 지하에서 본 것을 죄다 알려준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이리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떻게 나의 왕에 대해 알게 된 거지?”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혼잣말을 했다.
“상관없지. 어차피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니까. 내 아이들조차 그랬었지. 다들 그이의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날 설득하려 들었지.”
스칼렛은 이리나의 주변으로 엔네야드 가의 순혈 뱀파이어들이 서서히 몰려드는 것을 보았다. 루키우스의 큰 숙부의 죽음 때문에 격분한 건지 아니면 스칼렛이 주인이 되었기에 그런지는 몰라도 그들은 격앙된 얼굴로 칼처럼 날카로운 손톱을 세우고 있었다.
이리나는 그렇게 살벌한 기운을 내뿜는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아들 리처드가 무척 슬퍼할 테지만 어쩔 수 없지. 후- 스칼렛. 내 마지막 손녀야. 난 네 자궁이 필요하단다. 그거면 돼.”
마치 스칼렛이 원하면 줘버릴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이리나의 미소는 너무 맑아서 도리어 두려웠다.
스칼렛은 현기증이 더욱 심해지는 기분에 루키우스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루키우스가 안 되겠다 싶었든지 돌아섰다.
“마이 퀸. 궁으로 돌아가죠.”
“가긴 어딜!”
등 뒤에서 이리나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들려왔다. 연이어 엔네야드 가의 순혈 뱀파이어가 그녀를 덮치며 내지르는 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수백 명에 이르는 순혈 뱀파이어들의 공격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건지 고함과 비명과 함께 허공을 날아 벽에 부딪쳐 나동그라지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엔네야드 경! 여긴 저희에게 맡기시고 가십시오!”
티베리우스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이번에는 붉은 깨알 같은 것이 파도처럼 솟구치며 슈발리에들에게 날아들었다.
그들은 칼로 그것을 막아냈고 붉은 깨알 같은 것 또한 쇠로 만들어져 있는지 날카로운 굉음을 울리며 부딪치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오라버니. 어서 가요!”
아이란 공주가 달려와 소리쳤다.
스칼렛은 루키우스에게 안긴 채 회의장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알렉사의 여인들이 뒤를 경계하며 달린 덕분에 순식간에 1층 현관문에 이르렀고 루키우스의 작은 숙부가 달려 나와 스칼렛을 보더니 읊조렸다.
“이런! 갑자기 심장이 부서질 듯 아프더니만….”
그러더니 뭔가를 본 듯 2층 계단을 눈짓하고는 황급히 문을 열며 말했다.
“저택 오른편으로 돌아가면 말과 마차가 있다. 어서 가!”
루키우스는 망설이는 듯싶더니 이내 발길을 옮겼고 아이란 공주와 알렉사의 여인들이 뒤따라 나왔다.
문이 닫혔고 그러자마자 뭔가가 문에 강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칼렛은 직감적으로 루키우스의 작은 숙부라는 걸 느꼈지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이리나가 인간도 순혈 뱀파이어도 아닌 건 알았지만, 설마하니 순혈을 능가하는 힘을 지녔을 줄은 몰랐다.
그러는 사이 저택 오른편에 도착했고 아이란 공주는 알렉사의 여인 두 명을 마차의 마부석에 타라 지시하더니 마차 문을 열며 말했다.
“어서 타세요. 오라버니!”
루키우스는 그대로 마차에 뛰어올랐고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란 공주와 알렉사 여인들이 탔을 말이 힘차게 땅을 박차는 소리가 들려왔고 순식간에 도개교를 통과했다.
그러면서 뭔가를 했는지 도개교를 지나자마자 철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내려와 닫혔다. 하지만 곧바로 거칠게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이리나의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스칼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