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아에리우스의 노래 (13/16)

12. 아에리우스의 노래

늦은 밤, 동궁의 최상층에 있는 섭정 사무실에선 그저 펜으로 종이 위를 끄적이는 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들의 여왕은 재상 체터필드가 플로라 여왕 다음으로 제위에 오른 여왕 밑에서 꾸준하게 바꿔온 법들을 올해 내로 다시 되돌리기를 원했고 그러다 보니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관리들은 비로소 어마어마한 양의 세금이 재상가로 당당하게 흘러 들어가고 있음을 알게 됐고, 별거 아니라 가볍게 여겼던 법들이 재상가의 배를 불려주고 있음을 파악해냈다.

다들 경악했고 나라의 국고가 파탄 나기 일보 직전이란 것이 알려지면서는 모두가 합심해 쥐구멍을 찾고 막는 일을 밤새워가며 도왔다.

분위기가 그래서인지 놀랍게도 리처드 레오폴드마저 성실하게 일하고 있었다.

아니, 아무래도 친부가 아닌 전대 레오폴드 공작의 손에 자란 덕분에 그 남자의 재주를 은연중에 익힌 게 분명했다.

본래 전대 레오폴드 공작은 여왕의 골칫거리를 시원시원하게 해결하기로 이름이 드높았고 그래서 여왕의 사냥개라 불리는 레오폴드 공작가의 명성을 드높인 주역이기도 했다.

루키우스는 맞은편 책상에서 산더미 같은 법률 서류에 파묻힌 채 머리를 싸매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그 사실을 곱씹었다.

그러자 리처드 레오폴드가 고개 들어 시선을 맞추며 얼굴을 구겼다.

“자네 말이야. 지난 며칠 동안 계속 그러고 보는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되겠나? 날 관찰하려면 좀 숨어서 해줬으면 하는데.”

“……여왕 폐하께 청혼하셨다더군요.”

루키우스가 읊조리자 사무실에서 끄적대던 펜 소리가 동시에 멎었다.

여기 있는 관리들은 대부분이 귀족 가문 출신이다 보니 미혼인 스칼렛에 관한 관심이 아주 높았다.

잠깐 쉬는 사이 나누는 잡담의 주인공 또한 여왕일 정도로 화젯거리였는데 스칼렛이 오늘은 어떤 머리를 했는지 뭘 보고 웃었는지 등등 소소한 것까지 죄다 그들 입을 오르내렸다.

리처드 레오폴드도 그 사실을 잘 아는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노려보더니 벌떡 일어서며 따라 나오라는 턱짓을 했다.

루키우스는 잠자코 사무실을 나섰다.

리처드 레오폴드는 그대로 걸어 회랑으로 이어지는 으슥한 복도로 가서 서더니 물었다.

“엔네야드 경. 신성한 사무실에서 그런 질문을 왜 던진 것인지 설명을 좀 해줬으면 좋겠군.”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였지만 루키우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번 주 내로 섭정직과 쉐도우 슈발리에 복무를 그만두고 대공가로 복귀할까 합니다.”

“대공이 돌아오라 한 건가? 아무리 자기 일이 아니라고 해도 그렇지. 신입 관리의 손까지 죄다 동원하고 있는 이 와중에 무슨 그런 심술을 다 부리는 건지. 됐네. 내가 그분께 말씀드리지.”

“아닙니다. 제가 그만두려고 하는 겁니다. 며칠 전 아이란 공주 일로 체터필드 대공이 또다시 저더러 스칼렛의 가족을 죽이라고 명령할 것 같아서 말이죠.”

“뭐? 어, 어떻게….”

리처드 레오폴드의 눈빛이 마구 흔들렸다. 시크릿 풋맨에 대한 정보가 어디서 샌 것인지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짚어보는 것 같았다.

루키우스는 말해줄까 하다가 이리나의 독사 같던 눈빛을 떠올리곤 그냥 하려던 말을 계속했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당신과 대공이 인간처럼 보이는 건 이리나의 피를 마시기 때문입니까?”

리처드 레오폴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루키우스는 자신이 답을 맞혔음을 확신했다. 물론 그냥 던져본 질문은 아니었다.

그날 리처드 레오폴드의 손에 묻어나던 흰 피를 본 뒤 그동안 대공이 물 대신 마셔오던 고가의 우유에 숨겨진 비밀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뿐이었다.

하지만 루키우스가 진정 궁금한 건 그것이 아니었다.

“당신이 흡혈 중 이리나의 동공이 뱀처럼 서고 은빛으로 변하는 건 왜입니까? 조사해보니 아비스가에선 그런 특이체질의 뱀파이어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던데요.”

“모르겠군. 난 사실 흡혈 중 어머니를 본 적이 없어. 스칼렛 때문에 송곳니가 나오는 거라 직접 흡혈 한 건 딱 두 번이 전부고 지금까지 팩에 담긴 하얀 피를 마셔왔을 뿐이거든.”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죠. 스칼렛이 지닌 헐버트가의 보물을 왜 노리는 겁니까? 당신도 대공도 순혈의 아이인 데다 저주에 걸리지도 않았으면서.”

“목걸이 말인가? 이리나 말로는 손으로 잡을 수도 없다더군. 몇 번이나 훔치려다 실패해서 상당히 우울해했었지.”

“…당신은 별 관심이 없단 겁니까?”

“없네. 애초에 친부가 필립 후작을 시켜 그 목걸이를 찾은 것도 이리나 때문이거든. 이리나는 순혈 뱀파이어니 욕심이 날 만하겠지. 나야 자네 말대로 상관없는 일이고.”

“그 안에 든 게 뭔지 아시는군요.”

“아마칼리의 피. 순혈 뱀파이어의 족쇄를 풀 단 하나의 열쇠. 묘비명에 아마 이렇게 적혀 있지? 저주는 내 피로 인해 풀릴 것이다.”

리처드 레오폴드의 가벼운 대답에 루키우스는 숨을 삼켰다. 예상은 했었지만 이렇게 확언을 받으니 심장이 쿵, 뱃속으로 떨어졌다.

“몰랐던 건가? 재밌군. 스칼렛 여왕은 제 남자에게도 호락호락하진 않은 모양이야. 역시 평생 곁에 두고 싶은 여자라니까.”

껄껄 웃으며 외친 리처드 레오폴드는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솔직히 자네 능력이 아쉬워서 잡고 싶네만 못 말리겠군. 시크릿 풋맨을 절대 불러내지 않겠다 약속받긴 했지만, 자네처럼 나도 내 친부를 못 믿거든.”

“…스칼렛을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떠나면 많이 힘들어 할 겁니다.”

“그렇겠지. 자네에 대한 마음이 아주 강한 듯 보이니.”

“제가 맡은 일은 대충 정리가 끝났으니 내일부터는 그만둘 때까지 쉐도우 슈발리에 일만 전념했으면 합니다.”

“그러게. 이별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리처드 레오폴드는 그의 팔뚝을 툭툭, 기운 내라는 듯 치고는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루키우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따라 들어가려다가 문득 근처 화단의 짙은 그림자에 숨은 인기척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창밖으로 몸을 날려 화단에 내려섬과 동시에 도망치려는 자의 목덜미를 잡아채고 보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차려입은 오동통한 아가씨였다.

눈이 마주치자 굳이 마스크를 벗겨보지 않아도 바로 알아봤다.

“귀국한 줄 알았는데 대체 여기서 뭘 하고 계신 겁니까? 아이란 공주님!”

루키우스가 황당해하며 묻자 아이란 공주는 손으로 마스크를 벗어 토실토실한 볼을 드러내더니 말했다.

“역시 오라버니시네요. 이래 봬도 잠복 중에 들킨 적이 없었는데.”

“잠복이라니 뭣 때문에요?”

“왜겠어요? 오라버니를 구하기 위해서죠.”

“아이란 공주님. 난 내가 원해서 여왕 곁에 있는 겁니다. 구해줄 필요 따윈 없어요.”

“나도 그 여왕님이 마음에 들어요. 사전 조사에서 두 분이 연인이라 하기에 왜 하필 온실 속 화초일까 걱정했는데 어쩜 그리 야무지던지. 어리숙한 오라버니께 딱 맞은 아가씨예요.”

“그걸 알게 됐으면서도 왜 날 구한다고 이러고 있는 겁니까?”

“으음. 그러니까 어머니랑 큰 외숙부님이랑 주고받은 편지를 우연히 보게 됐는데….”

“우연이라. 신중하기로 유명한 당신 어머님이 중요한 편지를 아무 데나 던져둘 리 없을 실 듯싶습니다만.”

“오라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요! 큰 외숙부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알아요? 체터필드 대공이 오라버니를 미끼로 삼아 왕을 깨우려고 하는 것 같다 쓰셨어요.”

“왕을 깨운다?”

“그래요! 뭔가 어감이 무시무시하지 않아요?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관여하지 말라고 쓰여 있는데 큰 외숙부님이 예전부터 오라버니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긴 했지만 이건 좀….”

“뭐, 큰 외숙부야 당주가 될 절호의 기회를 놓쳤으니 화가 날 법도 하죠.”

“천년이란 세월 동안 직계로만 이어진 역사를 감히 깨려 하는 게 미친 거죠!”

“그래서 공주의 어머님은 뭐라 하셨습니까?”

“당연히 어머님은 혼비백산하셔서 작은 외숙부님께 전갈을 넣었는데 대체 어디 계신지 연락이 안 된다지 뭐예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제가 달려온 거예요.”

아이란 공주의 절박한 목소리에 루키우스는 어쩐지 불안해졌다.

큰 외숙부는 테란으로 시집가 하렘의 안주인이 된 고모님을 무척 어려워했는데 그런데도 경고장 같은 편지를 보내다니 심상치가 않았다.

“당장 헤레이스 숙부를 만나 뵈어야겠군요.”

루키우스가 읊조리자 아이란 공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오라버니. 작은 외숙부님은 대공가에 안 계세요. 오라버니의 소개로 카페 트윙클에서 두 분이 의기투합한 뒤 그대로 브라운 교수님 댁으로 들어가셨거든요.”

“…대체 이곳에 언제 도착한 겁니까?”

“지난주 수요일이요. 제 수하들 말이 사전 조사는 필수라기에 며칠 일찍 도착해서 수도의 상황을 좀 살펴보고 알현하러 간 거예요.”

“수하들이라뇨?”

“제가요. 오라버니. 술탄을 위해 첩보부대를 만들었거든요. 알렉사라는 이름을 하사받았고, 부대원들은 아주 아주 뛰어난 여인들만 골라서 뽑는답니다. 다들 절 쉐도우 칸이라고 부르죠.”

아이란 공주의 으스대는 표정에 루키우스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캐묻지 않아도 상황은 대충 짐작이 갔다.

평소 술탄은 아이란 공주를 지나칠 정도로 귀여워하니 자신의 친위대 중 정예를 뽑아다가 만들어줬을 게 뻔했다.

문제는 이러면 이럴수록 아이란 공주랑 결혼하려는 남자가 없어질 거라는 점이었는데, 아마도 술탄은 공주의 나이가 아직 어리다면서 미뤄뒀을 게 분명했다. 스무 살이면 적어도 약혼자라도 있어야 하는 것이 현실인데도.

“어머. 오라버니. 왜 한숨을 쉬세요? 제가 일을 얼마나 잘하는데요. 술탄께선 제 보고를 들을 때마다 아주 아주 기뻐하신다고요.”

아아린 공주가 속내를 읽었는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러시겠죠. 술탄께선 예전부터 공주가 무슨 말을 하든 다 재밌다고 하시는 분이니. 뭐, 그건 그렇고 여관 주소나 좀 알려주세요.”

루키우스는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안내꾼도 붙여 드리죠.”

아이란 공주는 방긋 웃으며 말하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마자 수풀에서 불쑥 두 명의 인간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알현실에서 수행원인 척 서 있던 여인들이 분명했다.

둘 다 아이란 공주와 마찬가지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남자 못지않은 꽉 짜인 근육이 옷 위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인간인데도 기척을 이렇게까지 숨길 수 있다니 술탄이 정예 중의 정예를 붙여준 모양이었다.

루키우스는 헛웃음을 흘렸고, 아이란 공주는 해맑게 웃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자, 들었죠? 둘 중 한 분이 우리 오라버니를 작은 외숙부님께 모셔다드리세요.”

그러자 한 여인이 마스크를 벗더니 페란인 특유의 까무잡잡한 얼굴을 드러내며 대답했다.

“유어 하이니스. 저를 따라오시죠.”

루키우스는 손을 들어 말렸다.

“됐습니다. 아직 일이 끝나질 않았거든요. 주소를 말씀해주시면 내일 시간 나는 대로 찾아가 보겠습니다.”

아이란 공주는 어쩔 수 없다 싶었던지 입을 열었다.

“서든 스트리트 182번지에요. 브라운 교수님은 성격이 무진장 좋으신 건지 대범하신 건지 1층만 쓰시고 나머지 3개 층은 잡종 뱀파이어가 세를 들어 살고 있어요.”

“아이란 공주님. 잡종이란 말은 이 나라에선 금지어입니다. 주의하세요.”

“칫. 오라버니는 만날 그러셔.”

아이란 공주가 툴툴댔지만, 루키우스는 못 들은 척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럼 전 이만. 제발 부디 빨리 귀국하시기를 바라죠. 공주께서 이 나라에서 다치기라도 하면 외교 분쟁이 일어날 겁니다.”

그리고는 돌아섰다.

등 뒤에서 아이란 공주가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오라버니. 또 뵈어요.”

루키우스는 사무실로 들어가기 전 눈인사라도 하려고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조금 전까지 수풀 앞에 서 있던 공주와 두 여인이 바람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인기척도 느껴지질 않는 걸 보니 그 짧은 새 멀리 가버린 모양이었다.

“굉장하군.”

저도 모르게 읊조리고는 쓰게 웃었다. 그래 봤자 공주의 소꿉놀이다.

‘게다가 왕을 깨우기 위해서라니. 이 땅에 왕이 사라진 지 벌써 천 년인데….’

루키우스는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왕이란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며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다시 일해야 할 시간이었다.

***

토요일, 초겨울답게 하늘은 높고 공기는 청명한 데다 햇살은 적당했다. 정원에 의자를 놓고 둘러앉아 따뜻한 티를 즐기기 좋은 날이었다.

하지만 오후 5시의 티타임을 위해 단장 중인 스칼렛의 기분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이번 주 내내 루키우스는 툭하면 가이우스라는 슈발리에에게 쉐도우 슈발리에의 일을 부탁하고 슬그머니 사라졌다.

가이우스는 스칼렛이 집을 떠나 이곳으로 올 때 맛있는 스튜를 만들어줬던 슈발리에로 알고 보니 순혈 뱀파이어를 아내로 둔 유부남이었다.

심지어 네 살 된 딸까지 있었는데 그런데도 여왕의 애인이 될 슈발리에로 온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제가 저희 가문에서 가장 잘생겼거든요. 칼 솜씨도 좋고. 주인의 명이라 오긴 왔는데 제발 저에게 잠자리 시중만은 명하지 말아 주십쇼. 제 딸 볼 면목이 없을 것 같아서요.”

스칼렛은 진솔한 가이우스가 무척 마음에 들었지만 그렇다고 루키우스가 곁에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기란 영 힘들었다.

일단 변명은 섭정으로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였는데 도무지 믿어지질 않았다.

그래도 오늘은 토요일이었고 저녁부터는 둘이서 보낼 수 있어 꾹 참았다.

그런데 기막히게도 루키우스는 어젯밤부터 가이우스에게 쉐도우 슈발리에의 임무를 맡긴 채 지금 이 시각까지 돌아오질 않았다.

이리나가 귀신같이 눈치채고 어떻게든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를 썼지만, 스칼렛은 도저히 표정을 풀 수 없었다.

아이란 공주가 왔던 일요일 오전까진 분위기 굉장히 좋았었는데 대체 뭐가 잘못된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때부턴 흡혈도 페팅도 잘 안 하려 들고, 심지어 키스도 피하는 눈치라 무척 속만 상했다.

그 와중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떠오르는 답은 하나였다.

그녀 곁을 떠나려고 준비 중이라는 것.

아무래도 누군가가 루키우스에게 그가 시크릿 풋맨이라는 걸 귀띔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죽도록 그녀를 사랑한다던 남자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돌변할 순 없었다.

스칼렛은 울적해져 입술을 짓씹다가 화장대에 달린 거울을 통해 루키우스가 조용히 들어서더니 가이우스와 교대하는 것을 보았다.

“대체 어딜 다녀온 거예요?”

저도 모르게 가시가 돋친 목소리로 묻자 루키우스가 일부러인 게 분명한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사할 게 좀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그러자마자 스칼렛은 벌떡 일어섰다. 정성스럽게 머리를 땋아주고 있던 이리나가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머리가 확 풀리며 허리까지 늘어졌다.

그렇게 단정치 못한 모습으로 스칼렛은 확 돌아서며 외쳤다.

“티타임은 취소예요.”

그러자 응접실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 무관이 뛰어 들어왔다.

“마이 퀸! 이미 귀부인들께서 출발하셨을 텐데요?”

“그럼 그분들끼리 차를 마시게끔 준비해줘요. 난 가서 좀 걷다가 나중에 합류할 테니.”

스칼렛은 날카롭게 말하고는 그대로 드레스 룸을 나섰다.

1층으로 내려가니 티베리우스가 당연한 듯 나타났고, 스칼렛은 거두절미하고 한마디만 했다.

“북궁으로 데려다줘요.”

티베리우스는 무척 놀란 듯 보였지만, 평소 그렇듯 아무런 말도 없이 스칼렛을 북궁까지 데려다줬다.

“여기서 대기해요.”

티베리우스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그러는 사이 루키우스가 말을 타고 달려와 뛰어내렸다.

“마이 퀸. 바람이 부는 게 어째 비가 올 것 같습니다. 돌아가시죠.”

다가오며 던지는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스칼렛은 그대로 북궁으로 걸어 들어갔다.

북궁은 겉에서 보면 거대한 궁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이 뻥 뚫린 건물 속 묘지로 아무리 꽃과 화단을 잘 가꿔놨다 해도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래도 늦가을을 맞은 나무들이 낙엽들을 사방으로 뿜어내며 바닥을 색색으로 수놓아 나름의 정취가 있었다.

스칼렛은 낙엽을 밟을 때마다 울려 퍼지는 사그락대는 소리를 즐기며 이끼 덮인 묘비 사이를 정처 없이 걸어 다녔다.

아마칼리 여왕 이후 천년, 그동안 제위에 올랐던 모든 여왕이 다 이곳에 묻혀 있었다. 물론 혼자는 아니었다.

그들의 남편, 그들의 애인, 어린 나이에 숨을 거둔 그들의 아이들 심지어 애완동물까지 각자 한 자리씩 넓게도 차지했다.

물론 그렇게 대가족인 경우도 있었지만, 최근에 연달아 죽은 여왕들처럼 쓸쓸하게 혼자인 경우도 꽤 많았다.

제위에 올랐다가 병으로 인해 젊은 나이에 죽은 여왕도 있었고 지금처럼 정치 모략의 시기가 있었는지 아주 짧은 시기를 살다가 떠난 여왕들도 보였다.

스칼렛은 여왕들이 산 시간과 짤막한 묘비명을 읽으며 그들이 남긴 마지막 목소리를 음미하다가 이윽고 아마칼리 여왕의 무덤 앞에서 멈춰 섰다.

뱀파이어 왕을 저주해 신왕조를 연 여왕답게 북궁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무덤은 그녀의 동상이 세워진 작은 건물 안에 있었다.

그즈음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차가운 부슬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계속 뒤따라 왔던 건지 루키우스가 불쑥 다가오더니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스칼렛의 머리 위를 덮어주며 말했다.

“여왕 폐하. 일단 무덤 건물 안으로 들어가 비를 피하시죠.”

스칼렛은 그의 재킷을 손으로 쳐내며 말했다.

“꺼져요. 루키우스.”

그리고는 돌아서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낙엽 위로 빗방울이 튕기며 뿌연 안개가 피어올랐다.

스칼렛은 성큼성큼 걸었고 머리가 푹 젖어 얼굴과 목덜미에 달라붙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계속 걸으려 했지만 더는 못 보겠던지 루키우스가 다가와 덜렁 안아 들었다.

“이러다 감기 걸립니다.”

“당장 내려놔요!”

스칼렛은 발버둥을 치며 그를 힘껏 떠밀었지만 밀리기는커녕 미동조차 하질 않았다.

“놓으라고!”

“어린애처럼 굴지 말아요. 스칼렛!”

루키우스는 화난 듯 소리치더니 그녀를 데리고 아마칼리 여왕의 무덤 건물로 기어코 들어섰다.

문대신 무덤 입구를 막고 있는 쇠창살로 된 가림막이 요란한 소리를 열며 열렸다가 닫혔다. 건물 안은 전반적으로 어둡고 습기가 차 있어 축축했지만, 안쪽에 놓인 아마칼리 여왕의 석관과 그 위를 덮고 있는 근사한 조각상 위로는 유리로 된 돔이 있어 비가 오는데도 환했다.

루키우스는 석관 앞까지 가서야 스칼렛을 내려줬고 수건을 꺼내 그녀의 얼굴을 닦아 줬다.

손길은 다정했고 눈빛은 따뜻했지만, 표정은 슬펐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작별인사라도 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스칼렛은 사형장에 밧줄을 걸고 선 사형수의 심정으로 부들부들 떨며 그의 입술을 바라보다가 더는 참을 수 없어 그를 떠밀며 외쳤다.

“됐어요. 당장 떠나요. 구질구질하게 당신 잡을 생각 없으니까.”

루키우스는 닦아주던 손길을 멈추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칼렛. 내가 곁에 있으면 당신 가족이 위험합니다. 나 또한 언제 당신 가족을 죽이게 될까 두려워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에 지쳤습니다.”

스칼렛은 심장이 바닥까지 추락하는 걸 느꼈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누군가가 그가 시크릿 풋맨이라고 귀띔을 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젠 잡을 수 없었다. 너무 사랑해서 그가 공포에 질려있는 모습을 볼 자신은 없었다.

“그래요. 헐버트가를 떠나던 날 아버지가 그러셨죠. 네 이웃의 뱀파이어를 탐하지 말라는 계명을 가슴에 새기라고. 하지만 난 그 계명을 어겼고 그러니 벌을 받는 거겠죠.”

담담하게 말했지만, 순간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그대로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렇게 사랑하게 될 줄 알았다면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는 거였는데.”

목이 메와 간신히 읊조리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눈물로 인해 흐릿해진 시야로 아마칼리 여왕의 석관을 덮은 조각상이 눈에 들어왔다.

길고 긴 망토를 걸친 천사인지 죽음의 사자인지 모를 자가 한 손은 자신의 심장을 짚고 다른 손은 아래로 해 검지로 석관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검지를 따라 시선을 내리니 천 년간 아마칼리 왕국의 이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묘비명이 가로로 놓인 석관의 옆면에 아주 크고 우아하게 돋을새김 되어 있었다.

[아타 논 베르다 수칼레 아르카디움.]

순간 스칼렛은 제 목에 걸린 호리병의 무게를 느꼈다.

‘저주는 내 피로 인해 풀릴 것이다. 만약 이 호리병에 든 것을 루키우스에게 먹인다면….’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호리병을 만지작거리는데 등 뒤에서 루키우스가 제품에 강하게 그러안더니 소곤거렸다.

“안 됩니다. 그래선 안 되는 거 알지 않습니까? 천 년 동안 짓눌려 산 순혈 뱀파이어들이 풀려나면 이 왕국의 인간들은 모두 사냥당할 겁니다. 살육의 파티가 벌어지겠죠.”

목걸이 안에 뭐가 들었는지 스칼렛이 지금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 읽은 것 같은 어투였다.

스칼렛은 목걸이를 만지던 손을 내려 허리에 감긴 루키우스의 팔 위에 얹었다. 비를 맞아 차가워진 피부 아래로 맥동치는 온기가 느껴졌다.

수도에 도착했을 때 모든 것이 너무 낯설었지만 오로지 이 온기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용기를 낼 수 있었고, 당당하고 뻔뻔하게 굴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스칼렛이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잘 가요. 루키우스 엔네야드 경.”

울음을 참으며 의연하게 말하자 루키우스가 팔을 풀며 뒤로 성큼 물러섰다.

“부디 건강하시길. 마이 퀸.”

악문 잇새로 내뱉는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잠시 후 무덤 건물의 쇠창살 가림막이 열렸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이제 남은 건 빗소리뿐이었다.

무덤 건물을 때려대며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칼렛의 심정을 아는 것처럼.

스칼렛은 참고 참다 이내 큰 소리를 내며 울음을 터트렸다.

빗소리를 삼켜버릴 만큼.

***

루키우스는 무덤 건물을 나와 비를 맞으며 빠르게 묘지를 가로질렀다.

등 뒤에서 스칼렛이 비명 지르듯 통곡하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찢어지는 기분에 결국 가다 말고 멈칫 섰다. 이대로 떠나야 했지만, 다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이렇게 떠나면 다시는 만나지 못하겠지.’

머릿속에서 냉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별안간 리처드 레오폴드가 떠올랐다.

그가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을 지켜보며 나날이 들떠가고 있었으니 당장 그가 사라진 내일부터 스칼렛을 달래주고 안아주고 사랑한다며 보듬어 주려 할 거였다.

‘스칼렛의 목덜미에 이를 박고 그 달콤한 피를 들이켜고, 따뜻한 그녀의 가슴을 빨고 그보다 더한 짓도 하겠지.’

눈앞에 리처드 레오폴드가 스칼렛과 뒤엉키는 장면이 떠올랐다.

열락에 빠져 고개 젖히며 신음하는 스칼렛의 얼굴이 떠오르며 심장이 조여왔다. 욕정으로 인해 진득해진 녹음색 눈동자에 리처드 레오폴드가 담길 걸 생각하니 구역질이 치솟았다.

“씨발. 가야 하는데. 떠나야 하는데….”

루키우스는 빗물로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고개 젖혀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전히 스칼렛은 울고 있었다.

쾌청한 하늘을 뒤덮은 흐릿한 하늘보다도 더 심하게.

결국 그는 돌아섰다.

왔던 길을 되돌아 걸어가는 발걸음은 깃털보다도 가벼웠고 점점 빨라졌다.

비가 더욱 거세져 뿌옇게 물안개까지 피어오르는 낙엽이 깔린 길 끝에 무덤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쇠창살 가림막이 확 열리더니 스칼렛이 뛰어나왔다.

“루키우스!”

아마도 그처럼 잡으려고 나온 표정과 몸짓이었다.

그러다 그를 보고는 놀란 듯 우뚝 멈춰 섰다. 제 눈을 의심하는 듯 멍하니 바라보더니 이내 해가 뜬 것처럼 환하게 미소 지었다.

스칼렛이 두 팔을 벌리며 반겼다.

루키우스는 훌쩍 몸을 날려 스칼렛 앞에 내려서선 제품에 확 끌어안았다.

“루키우스. 제발 가지 말아요.”

애원하는 그녀에게 대답 대신 입을 맞췄다. 혀를 밀어 넣고 모두 먹어버릴 듯 여린 점막을 찔러대다 작은 혀를 삼킬 듯 빨아댔다.

스칼렛의 가느다란 팔이 그의 목에 휘감겼다.

루키우스는 그녀를 덜렁 안아 든 채 무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키스를 나누며 빠르게 걸어 들어가 아마칼리 여왕의 석관 위에 그녀를 앉혔다.

그제야 입술을 거두자 스칼렛이 숨이 막혔던 듯 붉어진 얼굴로 물었다.

“돌아온 거예요?”

“그래요. 돌아왔습니다.”

루키우스는 그렇게 대답하며 두 손으로 드레스를 페티코트와 함께 걷어 올렸다. 비단 스타킹이 드러났고 그걸 고정하는 가터벨트가 손에 잡혔다.

벨트와 스타킹을 연결하는 끈을 거칠게 뜯어내곤 한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틀어쥐며 비에 젖어 말갛게 빛나는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아으… 루키우스.”

스칼렛이 허리를 비틀며 헐떡거렸다. 그저 이를 박은 것만으로도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꿀이 흘러내리는 냄새가 느껴졌다.

루키우스는 마음이 급해 빈손으로 바지를 내리고 터질 듯 단단하게 발기한 제 성기를 드러냈다.

제대로 그녀의 속옷을 벗길 여유조차 없어 손으로 대충 젖히고는 그대로 허리를 강하게 밀었다.

만져주지도 않았는데 착하게도 애액을 줄줄 홀리던 질구가 그를 반기며 오물거렸다.

루키우스는 그 감각을 만끽하며 그녀 몸 안 깊숙한 곳까지 단숨에 파고들었다. 동시에 쭉, 흡혈을 했다.

스칼렛의 붉은 입술을 타고 열락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흡혈과 성교의 쾌감이 한꺼번에 닥치자 절정감이 이는지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녀의 내벽이 그의 성기를 오물거리다 못해 쫙쫙 빨아댔다.

순간 뿌리까지 뻐근해지며 성기가 더욱 크게 부풀었다. 스칼렛이 그의 등을 긁어대며 교성을 내질렀다.

“아읏! 루키우스… 루키우스!”

애절한 목소리에 루키우스는 이를 거두고는 그녀의 엉덩이를 꽉 쥐고는 강하게 올려쳤다.

지난 일주일 동안 어떻게든 스칼렛에게서 떨어지려고 꾹 눌러 참아온 욕정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퍽퍽퍽퍽퍽퍽

이지를 잃은 짐승처럼 미친 듯이 박고 또 박았다. 그의 팔뚝 위에 얹힌 하얗고 긴 다리가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이리저리 춤을 춰댔다.

“부서져…. 부서질 것 같아.”

스칼렛이 안달을 하며 그를 밀어내려고 애를 썼지만, 루키우스는 그 목소리에마저 욕정 하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마구 문질러지자 열을 품은 듯 내벽이 성기에 찰싹 달라붙으며 사정을 독촉했다. 뱃속이 저릿할 정도로 휘감겨오는 느낌이 환장할 정도로 좋았다.

“하아…. 씨발. 이걸 두고… 가려 했다니.”

루키우스는 고개 젖혀 포효하듯 외치고는 다시 스칼렛에게 입을 맞췄다. 아플 정도로 그녀의 혀를 빨다가 이를 박고 흡혈을 했다.

쯥!

달콤한 피가 목구멍을 타고 몇 번이고 넘어갔다. 천상의 맛이 있다면 바로 이런 맛일 것 같았다. 그 무엇과도 비교도 되지 않는 감미로움이 혀 위에서 춤을 췄다.

스칼렛이 쾌감을 이기지 못해 그의 목덜미를 마구 손톱으로 긁어댔다. 비에 젖은 피부가 마구 스치며 생채기가 생겼지만, 그 감각마저 좋았다.

점점 사정감이 부풀어 올랐다. 이제 스칼렛은 쾌감에 취한 듯 그에게 몸을 맡긴 채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찔꺽찔꺽찔꺽

무덤건물 안이 워낙 고요하다 보니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흠뻑 흘러내린 달콤한 꿀이 흘리는 야한 소리가 유달리 크게 울려 퍼졌다.

루키우스는 고환까지 뻐근해지는 감각에 이를 거두고는 입술을 천천히 뗐다.

비가 그쳤는지 머리 위 돔 형태의 유리창에서 환한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비에 흠뻑 젖었던 스칼렛의 붉은 머리가 마치 후광을 두른 듯 찬란하게 빛났다.

루키우스는 그녀 안에 닿을 수 있는 데까지 자신을 밀어 넣고는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성기에 쩍쩍 들러붙던 내벽이 오물거리며 더 해달라고 재촉을 해댔다.

후우-

이대로 기절할 때까지 해버리고 싶은 욕망을 애써 누르며 시선을 맞췄다.

“루키우스……”

스칼렛이 몽롱한 눈을 빛내며 읊조렸다. 햇살을 받은 녹음색 눈동자 위로 황금색이 어른거렸다.

“아직도 내 아이를 원합니까?”

사냥감을 눈앞에 둔 육식수처럼 다정하고 달콤하게 물었다.

이렇게 돌아온 이상 스칼렛을 노리는 남자들을 죄다 쳐내기 위해 제 아이를 품게 할 욕심뿐이었지만, 짐승 같은 본성은 가급적 숨겨두는 것이 나았으므로 최대한 인간처럼 굴어야 했다.

스칼렛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인생의 남자는 당신뿐이에요.”

“결혼이 1년 미뤄지는 것뿐입니다. 그 후에 수많은 미혼 귀족들이 벌떼처럼 달려들 겁니다.”

“1년이면 충분해요. 법을 바꿔서라도 난 당신과 결혼할 거예요. 안 된다면 애인으로 평생 지내고요.”

“그렇다면 마이 퀸. 아이를 만들도록 하죠. 마침 당신 가임기이기도 하니.”

“…내가 가임기인 건 어떻게 알아요?”

“쉐도우 슈발리에가 여왕의 생리 주기를 모를 순 없죠. 후각이 예민하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루키우스는 가볍게 대답하고는 얼굴을 발갛게 붉히는 스칼렛의 볼에 입을 맞추고는 속삭였다.

“스칼렛. 내 아이를 품기 위해 아주 잠깐이지만 당신에게 저주의 키스를 할 겁니다. 아이가 자궁에 자리를 잡는 순간까지만 효력이 이어질 거예요.”

“저주의 키스라면 순혈 뱀파이어가 인간을 뱀파이어로 만들 때 한다는?”

“그래요. 수천 년 전, 인간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순혈 뱀파이어들이 어둠 속에 숨어 있던 그 시절에 자신의 종복을 만들기 위해 쓰이던 방법이죠.”

“아픈가요?”

“아프긴요. 죽음의 키스를 하고 나면 당신 몸은 흡사 뱀파이어와 같은 감각을 지니게 될 겁니다. 임신하는 감각을 그대로 느끼게 된다고들 그러더군요.”

“임신하는 감각이라니?”

“쉿. 스칼렛. 더 쑤셔달라 내 걸 미치도록 빨아대면서 나더러 설명을 계속하라니 잔인하군요. 자, 그냥 느껴봐요. 내 아이를 품는 쾌감을.”

루키우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날카로운 송곳니로 혀를 살짝 깨물었다. 피 맛이 느껴지자 그대로 스칼렛의 목덜미를 물었다.

흡혈하는 대신 혀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주입하자 스칼렛의 몸이 펄쩍 뛰어올랐다.

아읏!

어마어마한 쾌감에 전율한 듯 가느다란 허리가 낭창하게 뒤로 휘며 그를 물고 있는 내벽이 꽉 조여들었다.

루키우스는 한 손으로는 그녀의 목을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받치고는 석관에서 들어 올렸다.

허공에 몸이 뜨자 그녀의 다리가 저절로 그의 허리에 휘감겼다. 있는 힘을 다해 꽉! 만족스러워하며 루키우스는 계속해서 피를 주입했다.

“루키우스. 안 돼…. 아으… 안 돼!”

스칼렛이 밀려드는 쾌감에 복받친 듯 교성과 함께 울음을 토해냈다. 그녀의 내벽이 성기를 쥐어짜듯 휘감으며 덜덜 떨렸다.

강력한 절정에 충만해진 스칼렛의 몸이 놀랍도록 뜨거워졌다.

루키우스는 준비가 된 것을 느끼고는 피를 주입하던 걸 멈추고 천천히 이를 거뒀다.

스칼렛이 헐떡이며 그를 바라봤다.

녹음의 눈동자 위로 어른대던 황금색이 사라지고 은빛이 감돌았다.

붉은 입술 사이로 작고 귀여운 송곳니가 뚜렷했다.

우유처럼 말갛던 피부가 티끌 하나 없는 도자기처럼 매끈한 순백으로 바뀌어 투명하게 빛났다.

눈썹도 머리 색도 좀 더 진해져 햇살 아래 불타올랐다.

잠깐이면 키스의 효력이 끝날 테지만 뱀파이어가 된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지금까지 보아온 그 어떤 순혈 뱀파이어보다도.

“스칼렛. 마이 스칼렛.”

루키우스는 달콤하게 속삭이고는 그녀를 석관 위에 뉘었다. 여전히 연결된 그녀의 안이 어서 빨리 쑤셔달라 부들부들 떨며 재촉을 해댔다.

그 감각을 사내의 근성으로 내리누르며 탄력이 넘치는 그녀의 다리를 잡아 어깨 위에 걸치고는 허리를 잡아당겨 좀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치마가 확 젖혀지며 그의 성기를 꽉 물고 있는 새빨간 속살이 보였다.

돔 유리창에서 내리쬐는 햇살 아래 둘이 흘린 체액으로 흠뻑 젖어 번질거리는 모양이 무척 야살스러웠다.

“후우- 스칼렛. 언젠가… 이걸 제대로…보여주죠. 당신이 날 오물…거리며 먹고 있는걸. 씨발……볼 때마다 정말 미치겠거든.”

하지만 스칼렛은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그의 팔뚝을 긁으며 허리를 틀었다.

“루키우스. 빨리…. 빨리 해줘요.”

그러면서 미친 듯이 안을 조여오는 통에 루키우스는 그대로 딸려갈 뻔했지만 이렇게 빨리 박아달라 애원하는 스칼렛은 처음이라 장난기가 돌았다.

못 들은 척 풍만한 가슴을 꽉 누르고 있는 검은 레이스를 거칠게 잡아 내리자 햇살 아래 발기하듯 쫑긋 선 붉은색 젖꼭지가 튀어나왔다.

루키우스는 허리를 숙여 젖꼭지를 입에 물고는 혀로 맛을 보고 빨아대다 이를 박았다.

쪽, 짤막하게 흡혈하자 지독하게 달아진 피가 입안을 적셨다. 어찌나 맛있는지 머릿속이 핑핑 돌았다.

아까도 기절할 정도로 맛있었는데 이건 비교도 안 됐다.

“젠장. 이런 맛이 날 줄이야.”

놀라워하고 있는데 스칼렛이 흡혈로 인한 쾌감까지 더해지자 미치겠는지 허리를 마구 틀어댔다.

“쑤셔줘요. 제발… 아으… 루키우스. 당신 아이를 갖게 해줘요.”

빨간 입술을 혀로 할짝대며 토해낸 목소리에 눈이 홱 돌았다.

“기꺼이. 마이 퀸.”

루키우스는 사나운 몸짓으로 퍽, 그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동안 인간인 그녀를 정말 부숴버리기라도 할까 봐 억누르고 있던 짐승이 이를 드러냈다.

거침없이 그녀의 안을 탐했다.

성에 차지 않아 그대로 들어 올려 목덜미에 이를 박고는 허리만 움직여 사납게 박아댔다.

쭉!

강하게 흡혈을 하자 그녀가 자지러지며 교성을 토해냈다. 그녀의 안에서 왈칵 진한 꿀이 줄줄 흘러내렸다.

퍽퍽퍽퍽퍽

그가 올려칠 때마다 반동으로 인해 뒤로 확 빠져나갔다가 콱 박히기를 반복하자 스칼렛이 울음을 터트렸다.

“루키우스!”

루키우스는 계속해서 허리를 움직이며 고개만 내려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그를 위해 부풀어 오른 붉은 눈가.

“사랑합니다. 스칼렛.”

그렇게 읊조리며 혀를 내밀어 눈가를 할짝할짝 핥았다.

달고 달았다.

***

스칼렛은 석관 위에 엎드린 채 지독한 쾌감에 엉엉 울었다. 눈앞이 계속 번쩍거리고 하도 교성을 질러대서 목이 말라왔다.

그런데도 루키우스는 그녀의 엉덩이를 터트릴 듯 주물러대며 박고 또 박아댔다. 경험한 적 없을 정도로 거대하게 부푼 성기가 내벽을 짓이기고 또 짓이겼다.

배 속이 거북할 정도로 차오른 성기가 빠져나갈 때마다 찔꺽대는 소리가 민망할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소리는 이내 힘껏 파고드는 성기가 만드는 소리로 덮였다.

쩍쩍쩍쩍

“하아… 스칼렛. 느껴져요? 당신… 안이 나한테 들러붙는 것이? 이렇게… 이렇게까지…… 흐흡! 이런 감각이라니….”

루키우스는 안달하며 읊조리더니 그녀의 뒤통수에 손을 찔러 넣고는 더욱 거칠게 흔들어댔다. 그러면서 그녀의 팔을 낚아채 손목에 이를 박았다.

몇 번이고 피가 빨렸다.

흡혈과 함께 밀어닥친 쾌락에 몸이 뒤틀리며 그의 성기를 더욱 꽉 조여 물자 더욱 무섭게 흔들렸다.

인간의 몸이었다면 꽤 아팠을 것 같은데 뱀파이어로 변한 스칼렛의 몸은 이렇게 거친 행위에도 생채기조차 나질 않았다.

대리석 석관 위를 거의 침대처럼 쓰고 있는데도 부딪쳐 멍조차 들지 않았다.

게다가 쾌감, 쾌감이 엄청났다.

인간의 몸으로는 겪어보지 못한 절정감이 계속 몰아치며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마치 전기가 오른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찌릿찌릿했다.

“루키우스. 제발…… 제발 이제 그만….”

체위를 몇 번이나 바꿔가며 그녀를 탐하면서도 도무지 사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그가 원망스러워 애원하자 대답 대신 그의 손이 배에 감기며 석관 위에서 몸이 붕 떠올랐다.

등 뒤에서 안긴 자세라 자연스럽게 허리가 휘며 머리가 그의 어깨에 얹혔다.

“스칼렛. 마이 스칼렛.”

루키우스는 귓가에 달게 속삭이더니 허리를 잘게 떨며 말했다.

“좀 더 하고 싶지만… 후으… 봐 드리죠.”

그러더니 그녀의 목덜미에 이를 콱 박아넣으며 쑥, 밀어 넣었다.

그의 목을 타고 꿀꺽대며 피가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몸 안에서 뜨거운 것이 탁 터졌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데일 듯 뜨거운 액체가 쏟아져 들어왔다.

“흐읏! 아. 씨발. 스칼렛… 너무 오물거리지 말아요. 끝낼 수가 없으니…… 후읍!”

루키우스의 신음이 너무 야해서인지 스칼렛은 제 안이 그의 성기를 비틀어 짜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꿀렁거리며 진한 정액을 쏟아내는 성기가 내벽을 짓이기는 감각이 너무 선명해 기절할 것만 같았다.

“아으으으.”

눈앞이 번쩍번쩍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가 뿜어낸 것이 자궁 안으로 밀려드는 감각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성기조차 닿지 못하는 그 공간에 뭔가가 스며드는 감각은 지금까지 느껴본 어떤 쾌감과도 비교가 되질 않았다.

“안 돼. 안 돼!”

정신없이 비명을 질러댔지만, 쾌감은 멈추질 않았다.

자궁벽이 기쁨에 잠겨 밀려든 액체를 빨아들이며 머금고 즐겼다. 그렇게 위로 밀려 올라간 정액이 내벽에 붙어 있던 씨앗을 휘감았다.

아주 따스한 빛이 그곳에 내리쬐는 것 같았다. 마치 흙 속에 묻힌 씨앗더러 어서 새싹을 피우라는 것처럼 온기가 강하게 느껴졌다.

온기 때문인지 배 속 깊숙한 곳이 간질거리고 움찔거리나 싶더니 새싹이 피어올랐다. 너무나 작았지만 알 것 같았다. 생명이 깃들었다는 것을.

쾌감을 넘어서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만족감이 밀려오며 눈앞이 밝아왔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는 루키우스가 보였다.

“루키우스….”

손을 내밀어 뺨을 쓰다듬자, 루키우스는 그 손에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

“괜찮습니까? 당신을 또 기절하게 했군요.”

“우리 아이가….”

스칼렛은 어쩐지 감격스러워 말하다 말고 배에 손을 얹었다. 루키우스가 환하게 웃더니 그녀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속삭였다.

“그래요. 스칼렛. 여섯 달 후면 어머니가 되겠군요. 내 아이의 어머니가.”

“여섯 달? 아, 아이는 인간이 아닐 테니 그렇겠군요.”

스칼렛은 작게 소리 내 웃고는 두 팔을 벌려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유리 돔이 뿜어내는 햇살 아래 진한 키스를 오랫동안 나누었다.

이따금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눈을 맞추고는 다시 입술을 마주 댔다.

그렇게 서로의 달콤함을 흠뻑 즐기고 나서야 루키우스가 정신을 차린 듯 읊조렸다.

“티베리우스가 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북궁 밖에서 고뇌에 잠겨 있겠군요.”

“그래도 와보지 않는 걸 보면 아는 거 아닐까요?”

스칼렛은 루키우스의 코에 자신의 코를 비비적대며 말했다. 루키우스는 싱긋 웃더니 스칼렛이 두른 팔을 풀며 물러섰다. 그러더니 스칼렛의 옷차림을 살피며 낮게 신음했다.

“이거 가서 아무래도 뭔가 덮을 거라도 가져와야겠습니다.”

비로소 제 몸을 살펴본 스칼렛은 드레스가 넝마 조각이 된 채 몸에 간신히 걸쳐져 있음을 알았다.

게다가 몸을 섞으면서 쉴 새 없이 흡혈 당한 까닭에 희미한 잇자국이 도장 찍은 듯 전신에 퍼져 있었다.

젖꼭지는 팅팅 부어올랐고, 손가락은 물론이려니와 심지어 발목까지 붉은 꽃이 피었다.

“굉장하네요.”

황당해하며 읊조리자 루키우스가 멋쩍게 웃었다.

“뱀파이어가 된 당신이 그렇게 맛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어쨌거나 다녀올 테니 여기 계십시오. 금방 돌아오죠.”

스칼렛은 고개를 끄덕였고 루키우스는 나가려다가 다시 돌아오더니 다시 한번 진한 키스를 퍼붓고는 읊조렸다.

“난 이제 당신을 놔주지 못합니다. 다른 남자가 당신 곁에 있는 것도 용납하지 못할 거고요. 지금까진 당신의 허락만을 기다렸지만, 이제부턴 다를 겁니다.”

다정한 목소리와는 달리 눈빛은 어둠을 품은 듯 진득한 파랑이었다.

스칼렛은 아까 자신이 했던 말을 반복하려다가 전혀 다른 의미란 걸 깨달았다. 지독한 소유욕. 앞으로 그녀의 선택과 상관없이 그녀가 누구 것인지 명확히 하겠다는 의미였다.

어쩐지 루키우스의 뱀파이어로서의 본성을 마주한 것 같아 스칼렛은 숨을 삼키고는 미소 지었다.

“그래요. 루키우스. 나도 당신이 나와 마주 서기를 바라요. 여왕인 내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남자가 되어줘요.”

루키우스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날다시피 무덤 건물을 나섰다.

“어서 다녀오도록 하죠.”

쇠창살 가림막이 열렸다가 닫혔다.

스칼렛은 그대로 석관 뒤에 드러누웠다. 유리 돔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아침처럼 화창했다. 하얀 뭉게구름이 흘러가는 걸 보니 기분까지 맑아졌다.

“아기라….”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 배를 문지르고 있는데 문득 석관 위에 장식된 조각상이 눈에 들어왔다.

루키우스와 격하게 뒹구는 것을 다 지켜봤을 텐데도 역시나 묵묵히 손가락을 아래로 한 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다 지금 자신이 조상 할머니의 석관 위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그제야 떠올랐다.

헉!

갑자기 너무 민망해져 황급히 뛰어내렸다. 볼이 마구 달아올랐다.

여기가 아마칼리 여왕의 무덤 건물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나니 몸 둘 바를 몰랐다. 동시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거대한 왕궁 안에는 좋은 곳이 정말 많은데 하필 아마칼리 여왕의 무덤에서 아이를 가지다니 루키우스와의 이별 때문에 미쳐도 단단히 미쳤었던 것 같았다.

스칼렛은 깔깔거리며 웃다가 문득 햇살을 등지고 선 석상이 반투명한 것을 알아보았다. 그러자마자 언젠가 브라운 교수님이 해줬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도자기처럼 보이지만 빛에 비춰보면 반투명해진다던 희귀한 금속 오르콘.

손톱만 한 크기마저도 금괴 열 상자의 가치를 지녔다던데, 설마하니 이런 거대한 조각상이 오르콘으로 되어있을 줄은 몰랐다.

“굉장하네.”

놀라워하며 조각상을 살펴보다 문득 아래를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이 반은 까맣고 반은 하얗다는 걸 알아보았다. 빛이 비치지 않았으면 몰랐을 사실이었다.

스칼렛은 어째서일까 의아해하다가 손을 내밀어 조각상의 손가락을 잡았다.

만지작거리다가 혹시나 해 돌리는 순간 아마칼리 여왕의 석관이 소리도 없이 뒤로 밀리며 그 아래로 계단이 드러났다.

“맙소사….”

***

루키우스는 무덤 건물을 나와 빠르게 묘비 사이로 난 길을 걸어나갔다. 그 앞을 누군가가 불쑥 가로막았다.

순간 하얀색 털옷이 눈에 들어와 흰 늑대가 길을 잃은 건가 싶었는데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오동통한 볼을 붉히고 있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이란 공주님!”

당황하며 가까스로 멈춰서자 아이란 공주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아침보단 표정이 한결 좋아 보이시네요. 다행스럽게도.”

그러더니 주변에 사람이 무척 많은 것처럼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소곤거렸다.

“숙맥이신 줄 알았는데 제법이시대요. 여왕님이 너무 좋아서 그렇게 자지러지실 줄은….”

“어험-”

루키우스는 더 듣고 있기가 머쓱해 헛기침해 말을 잘랐다. 그리고는 아이란 공주가 더 말을 잇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가서 급하게 가져올 것이 있는데요.”

그러자마자 아이란 공주가 손가락을 튕겼다. 소리도 없이 묘비 뒤에서 전신에 검은 옷을 걸친 페란의 여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주가 자랑했던 정보 수집 부대, 알렉사였다.

그중 한 여인이 잘 접힌 상의와 바지를 들고 다가와 루키우스에게 내밀었다.

“제가 입던 거라 죄송하지만 그래도 깨끗하게 세탁된 거니까 잠시 입으실 것으론 쓸 만할 거예요.”

아이란 공주의 설명에 루키우스는 스칼렛이 알았다간 난리 나겠단 생각을 하며 얼른 받아 들었다.

“굳이 이런 것까지 챙기실 필요는 없습니다만.”

“저도 가만 지켜보기만 하려 했는데 이리나와 리처드 레오폴드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서요. 가서 여왕님을 모시고 얼른 나오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젠장. 고맙습니다.”

루키우스는 황급히 옷을 가지고 돌아섰다. 바쁘게 걸어가는 그의 등 뒤에 대고 아이란 공주가 손을 흔들었다.

“이따 밤에 봬요.”

흘끔 돌아본 루키우스는 순식간에 모두 사라진 것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아이란 공주가 허투루 수장을 맡은 건 아닌 것 같군.’

하지만 걸음을 멈출 때가 아니었다.

스칼렛과 이곳에서 무슨 일을 벌였는지를 리처드 레오폴드가 알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질 거였다.

이제 스칼렛의 곁을 떠날 마음이 사라졌으니 그를 밀어낼 준비를 해야만 했다. 그가 눈치채기 전에 재빨리.

루키우스는 전력으로 뛰어 무덤 건물에 단숨에 도착했다. 쇠창살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니 스칼렛이 보였다.

“스칼렛. 우리….”

빨리 나가야 한다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스칼렛은 그가 아닌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대체 뭘 보고 있는 건가 싶었는데 가까이 다가가자 아마칼리 여왕의 석관이 밀리고 계단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대체 그게 뭡니까?”

스칼렛은 그제야 그가 온 것을 알아차린 듯 고개 돌려 바라보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저 석상이 오르콘이더라고요. 그런데 좀 이상해서 저 손가락을 돌려봤더니….”

“안에 뭐가 있는지는 봤습니까?”

“아뇨. 당신이랑 들어가 보려고요.”

“이리나가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리처드 레오폴드도요.”

“그럼 대충 살펴만 보죠. 궁금하지 않아요? 안에 뭐가 있을지?”

스칼렛은 그렇게 말하더니 그의 손에 들린 옷을 보고 반색을 했다.

“어머. 이런 게 다 어디서 났대요?”

그러더니 재빠르게 입고 있던 넝마나 다름없던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아이란 공주의 옷을 몸에 걸쳤다.

역시 체격 차이 때문인지 상당히 헐렁했는데 그 자체로 예뻤다.

루키우스는 그가 만든 잇자국이 가득한 몸이 하나씩 가려지는 걸 아쉬워하면서 지난 일주일 동안 그를 괴롭혀온 수수께끼를 떠올렸다.

[그를 미끼로 삼아 왕을 깨우려 한다.]

큰 숙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해도 해박한 헤레이스 숙부라면 바로 알 것 같아 브라운 교수님 댁으로 찾아갔는데 급한 전갈을 받고 떠난 뒤였다.

아쉬워하며 돌아서려고 했는데 브라운 교수가 그가 찾아오면 전해주라고 했다며 ‘아에리우스의 노래’라는 음유시인의 입을 통해 전해져 내려오는 곡의 가사를 건넸다.

루키우스는 둘이서 이 노래의 원본을 복원하는 일을 며칠씩이나 했다는 설명에 심란해하며 얌전히 받아들고 교수님 댁을 나섰다.

처음에는 왜 굳이 이 곡일까 싶었는데 노랫말에 왕이란 단어가 반복되는 걸 보니 무진장 찝찝해졌다.

고민하며 궁으로 돌아가는데 아이란 공주가 제 수하들과 초조한 얼굴로 앞을 막아섰다.

“큰 외숙부님이 이번 주말에 엔네야드가의 비밀회의를 소집했어요. 아, 글쎄 이리나 아비스가 저주의 족쇄를 풀고 이 나라를 엔네야드가에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대요.”

그러더니 무척이나 격정적인 어투로 덧붙였다.

“오라버니! 이리나 아비스에게 모두가 속고 있어요. 그 여잔 순혈 뱀파이어가 아니에요. 내내 지켜봤는데 도통 피를 마시지 않아요. 식사도 먹는 척만 할 뿐 오로지 물만 마셔요!”

루키우스 또한 은빛으로 변했던 기이한 눈동자를 본 순간부터 이리나가 평범한 순혈 뱀파이어가 아님을 확신했기에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란 공주님. 이리나의 정체를 밝히는 데 도움을 주실 수 있을까요?”

아이란 공주는 흔쾌히 찬성했고 루키우스는 지난 엿새 동안 알렉사의 요원들과 이리나에 대한 뒷조사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술탄이 자랑하는 정예 첩보 요원들이 뛰어드니 티베리우스와 표면적으로 했던 조사와는 다른 이야기가 속속들이 밝혀졌다.

첫째로는 이리나가 헬레나의 친여동생이 아니라 아홉 살 때 입양된 아이라는 것과 둘째로는 레오폴드 성에 남아 있는 마담 레오폴드가 제 여동생을 죽을 만큼 두려워하고 있다는 거였다.

“리처드는 그저 왕을 만들어주겠다는 제 친모에게 놀아나고 있는 것뿐이에요. 이리나가 진정 원하는 건 따로 있어요.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상상조차 못 할 사악한 일일 거예요.”

그녀를 방문했던 알렉사의 요원들은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자 했지만, 마담 레오폴드는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라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며 덜덜 떨 뿐이라 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 드러난 아마칼리 여왕의 석관 아래 숨은 비밀 통로는 대단히 불길하게 느껴졌다.

“제가 앞장서죠.”

루키우스는 스칼렛이 옷을 다 입자마자 한발 앞서 계단에 발을 디뎠다. 스칼렛이 바로 뒤따라 내려왔다.

위에서 본 계단 아래는 무척이나 어두웠다. 루키우스는 비상시를 대비해 들고 다니는 부싯돌과 기름 먹인 종이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진한 어둠에 발을 들인 순간 마술처럼 계단에 불이 들어왔다. 등불도 없는데 마치 계단이 스스로 불을 밝히는 것 같은 느낌이라 무척 신기했다.

아무래도 오르콘으로 만든 건지 반투명한 도자기처럼 보이는 계단이 줄줄이 환해지며 내려가야 할 길을 밝혔다.

길의 끝에 놓인 계단참은 삼면이 벽으로 막힌 것처럼 보였다.

루키우스는 높이가 계단 두 층 높이인 것을 눈대중으로 알아보고는 돌아서서 스칼렛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요. 단숨에 뛰어 내려가는 편이 낫겠군요.”

스칼렛은 얌전히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안겼고, 루키우스는 그대로 성큼성큼 몇 걸음 만에 바닥에 도착했다.

그렇게 계단참에 발을 디디자마자 벽처럼 보이던 문이 저절로 열리며 그 너머에 있는 방이 보였다.

루키우스는 스칼렛을 안은 채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로 문이 조용히 닫혔다.

방안을 이룬 벽 또한 스스로 불을 밝히는 듯 빛이 뿜어져 나와 무척 밝았다. 그러면서도 눈이 따갑지 않은 빛인 점이 신기했다.

“내려줄래요?”

스칼렛이 호기심 가득한 눈을 빛내며 말했다. 루키우스는 그녀를 내려주기는 했지만 조금 심란했다.

사각의 방에는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건들이 너무 많았다.

한쪽 벽면에는 커다란 유리창이 달려 있었는데 당연한 일이지만 그 밖으로 보이는 것이 없었고 푸르스름한 빛이 어른거렸다.

대단히 많은 단추가 달린 직사각형의 판도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서서 보니 그 위쪽에 놓인 수족관 안에 든 것들을 조종하는 데 쓰이는 듯싶었다.

문제는 그 수족관 안에 물고기가 아니라 연금술사의 연구실에서나 볼법한 길고 가는 시험관과 삼각형의 플라스크, 뱅글뱅글 돌아 내려가는 투명한 유리관 같은 것이 꽉 차 있다는 거였다.

“루키우스! 이리 좀 와봐요!”

돌아보니 스칼렛은 출입구와 맞은편에 놓여 있는 2층 높이의 단상으로 오르는 계단에 서 있었다.

1층은 지금 본 것과 비슷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고, 2층은 이곳에선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뭔가 재미난 게 있습니까?”

루키우스는 가볍게 말하며 하지만 재빠르게 계단을 뛰어올랐다. 그 짧은 새 스칼렛은 단상 위로 올라가 그 안쪽에 놓인 투명한 원통 앞에 서 있었다.

원통에는 갖가지 기계장치가 연결되어 있었고 주변에는 처음 보는 사각의 상자와 역시나 단추가 잔뜩 달린 직사각형의 판이 병풍처럼 놓여 있었다.

루키우스는 그것들을 살피며 원통 앞에 이르렀고 비로소 그 안에 웬 남자가 둥실 떠 있음을 보았다.

흰색 튜닉을 입은 남자는 선 채로 잠든 듯 눈을 감고 있었고 두 팔과 다리는 편안하게 늘어뜨린 채였다.

붉은 머리와 건장한 체격, 조각 같은 얼굴과 순백의 피부로 미뤄봐서 순혈 뱀파이어 같았다.

“이 남자 어쩐지 우리 아버지랑 닮았어요. 뭐랄까 현재 우리 아버지의 나이에서 한 30년 정도 빼면 이런 얼굴일 것 같은데.”

유심히 그 남자를 바라보고 있던 스칼렛이 중얼거렸다.

루키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플로라 여왕을 비롯해 그 뒤로 제위에 오른 여왕들이 지닌 아마칼리의 특징이 죄다 모여 있는 것 같네요. 코의 모양이나 눈꼬리가 위로 올라간 점이나 그런 것들이.”

“아마칼리의 핏줄처럼 보이는 남자를 대체 왜 이런 곳에 넣어둔 걸까요? 죽은 것 같지는 않은데.”

“산 것 같지도 않아 보이는군요.”

그렇게 대답하던 루키우스는 스칼렛의 옷자락이 원통에 달린 작은 막대에 걸린 것을 보았다.

“스칼렛. 조심해요!”

외치기가 무섭게 돌아서던 스칼렛의 옷자락이 당겨지며 작은 막대가 앞으로 넘어갔다.

그러자마자 마치 마술처럼 단상 위 공간에 빛으로 만들어진 반투명한 남자의 유령이 나타났다.

원통에 들어있는 남자였는데 지금도 가끔 왕실 공식 행사 때 귀족들이 입고 등장하는 화려한 문양이 수 놓인 재킷과 무릎까지 내려오는 반바지 차림이었다.

신분이 상당히 고귀했던지 목에 둘린 크라바트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십자형의 브로치가 달려 있었고 재킷의 단추 또한 색색의 보석이었다.

심지어 열 손가락 모두 보석 반지를 낀 데다 신발까지 진주가 박혀 있어 극도로 화려했다.

스칼렛이 무척 놀랐는지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루키우스는 반사적으로 그녀를 숨기듯 끌어안으며 한 손을 내밀어 숨은 손톱을 끌어내 세웠다.

여차하면 공격할 생각이었는데 남자 유령의 눈빛은 다정했고 목소리는 아주 상냥했다.

“아마칼리. 네 실험이 불완전한 건 알지만 이대로 너와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우리 아이가 왕대비와 간신배의 무리 때문에 살해당하는 걸 지켜볼 순 없어.

네가 순혈의 심장을 거머쥔다면 우리 딸은 찬란한 햇빛 아래 자랄 수 있겠지. 이걸 그 애에게 선물로 남길게.”

그러면서 남자 유령은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내보였다. 놀랍게도 손바닥 위에 놓인 건 스칼렛이 걸고 있는 호리병이었다.

“루키우스. 설마 저 남자 천 년 전 뱀파이어 왕은 아니겠죠?”

스칼렛은 그의 가슴을 꽉 끌어안은 채 고개만 돌려 호리병을 바라보며 물었다. 루키우스가 대답하려 했지만, 한발 앞서 남자 유령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들이 오고 있어. 너와 우리 딸을 죽이겠다는 포고령에 도장을 찍으라고. 사랑하는 나의 아에리우스. 신왕조를 열어. 우리 딸을 여왕으로 만들어. 부디 날 잊고 새로 삶을 시작해!”

치솟는 슬픔을 눌러 참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남자 유령은 누군가 들어온 듯 황급히 돌아섰고 그리곤 사라졌다.

루키우스는 손톱을 거두고는 고개 돌려 원통 안에 떠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타고 브라운 교수가 적어준 ‘아에리우스의 노래’의 원본 첫 구절이 흘러나왔다.

“길고 긴 세월, 왕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흰 꽃 한 송이. 세월의 바람에 칼날처럼 베어 흩어져가도 그가 깨어나면 슬픔은 더는 없을 거라 은빛으로 흩날리네.”

그러자 스칼렛이 들어본 적이 있는지 그저 읊는 것이 아니라 뒷 구절을 연이어 노래했다.

“내가 아니었다면 더 행복했을까? 나를 몰랐더라면 그댄 깨어 있었겠지. 아에리우스 꽃 피던 날, 하얗게 빛나던 내 사랑. 내 세상에는 그대밖에는 없는데.

왕이여. 당신이 깨어나는 날이면 슬픔은 다신 없을 거야. 여기 흰 꽃 한 송이, 은빛으로 흩날리네.”

노랫말만큼이나 슬픈 가락이었고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먹먹해지는 느낌이었다.

“이 노래를 아는군요. 음유시인들조차 자주 부르는 노래는 아니라던데.”

루키우스가 읊조리자 스칼렛은 제 허리에 감긴 그의 팔뚝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암시장 살롱 언니들이 삶이 고단할 때면 음유시인을 청해서 노래를 듣는데 그때마다 꼭 나오는 노래였어요. 이 노래를 빌미로 언니들은 펑펑 울곤 했죠. 지친 삶을 털어내기 위해.”

루키우스는 어쩐지 마음이 아파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스칼렛이 간지럽다는 듯 웃더니 그의 팔을 찰싹 치며 말했다.

“위로는 됐어요. 자, 이제 그만 나가죠. 이리나가 들어….”

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던지 1층에서 이리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아. 네가 원한대로 스칼렛을 살려두기로 했잖니! 왜 그리 걱정인지 모르겠구나. 넌 그저 절망에 빠진 여왕을 잘 보듬어 임신시키는 일에만 주력하면 된단다.”

그러자 리처드 레오폴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머니. 꼭 스칼렛과 제 아이여야만 해요? 스칼렛은 첫 아이를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을 거예요.”

루키우스는 스칼렛에게 가만있으라는 눈짓을 했다. 그러고 앞으로 가보려고 했는데, 스칼렛이 먼저 움직였다.

‘스칼렛!’

저도 모르게 외칠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고는 스칼렛 옆에 가서 섰다. 말도 나누지 않았는데 둘 다 동시에 몸을 낮춰 엎드렸다.

그러고 슬쩍 내려다보니 과연 이리나와 리처드 레오폴드가 보였다.

이리나는 아까 그가 본 수족관의 유리관을 위로 젖힌 채 긴 유리 시험관에 뭔가를 집어넣고 있었고 그 뒤에는 리처드 레오폴드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리처드. 몇 번을 말해야 하니? 스칼렛이 아에리우스 나무 밑에 섰을 때 은빛 꽃잎이 휘날렸다는 것은 그 애가 내 유전자 실험의 결정체임을 뜻한단다. 그이의 냉동 정자를 이용해 낳은 일곱 아이 중 설마하니 첫아들의 핏줄에서 결실을 보게 될 줄은 나도 몰랐지만. 그 녀석은 날 저주하며 도망쳤지. 심지어 제 누나의 목걸이를 훔쳐선. 천 년을 찾았는데 그걸 대대로 숨겨올 줄이야.”

그렇게 말하며 이리나는 수족관의 유리관을 닫더니 그 앞에 있는 수많은 단추를 익숙하게 눌러댔다.

“유전자가 뭔데요?”

리처드가 묻자 이리나는 의자를 빙글 돌리더니 그와 시선을 마주하며 대답했다.

“하아. 이런. 또 실수했구나. 정말이지 과학을 모르는 중세시대에 산다는 건 정말 피곤하구나. 불과 1500년 전만 해도 인간들에게 이런 단어는 정말 익숙했는데….”

“인간들이 지구를 엉망으로 만들어서 분노한 순혈 뱀파이어들이 전쟁을 시작했던 그때 이전 문명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 맞다. 그때 세계 정부에선 안드로이드로 개조한 과학자들을 지하벙커에 대피시켰지. 뱀파이어들이 문명을 철저하게 파괴해 중세시대로 회귀시킬 줄도 모르고 말이다. 바보 같았지.”

“어머니. 죄송해요. 제가 또 슬픈 이야기를 꺼냈군요.”

“됐다. 다 지난 이야기일 뿐이지. 어쨌거나 난 그 애가 필요해. 그 애의 피만이 잠든 왕을 깨울 수 있으니 부디 이해해주렴. 아이는 또 가지면 되잖니. 둘이건 셋이건 낳으면 될 일이야.”

“정말로 루키우스가 스칼렛을 떠날까요?”

“맙소사! 리처드. 내 아들. 또다시 반복이구나. 대체 언제까지 계속 되풀이해야 하는 거니! 이럴 거면 차라리 네 친부에게 시크릿 풋맨을 불러 여왕의 가족을 죄다 죽여달라 하렴.”

“그건 안 돼요. 난 스칼렛이 망가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이런 썩을! 정말이지 넌 어쩜 그러니? 가만 보면 넌 헬레나를 너무 닮았어. 헬레나가 널 키워서일까? 친모가 아닌데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이리나가 머리를 쥐어뜯는 사이, 수족관 안에서 뭔가가 덜그럭대며 돌아가나 싶더니 이내 수족관을 덮은 유리관 위에 푸르스름한 연기로 된 창이 떠올랐다.

그걸 본 스칼렛이 움찔 놀랐고 루키우스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천만 다행히도 그녀의 입술을 토해 튀어나오던 탄성이 쏙 들어갔다.

그런 채로 둘은 말없이 아래를 지켜봤고 이리나는 연기로 된 창을 손을 들어 이리저리 만져대더니 환희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보렴. 이 시뮬레이션 결과를! 99.98%야! 너희 둘이 낳은 아이의 피가 그의 몸과 혈액을 복원시킬 경우 왕이 깨어날 확률이란다.”

그러더니 리처드 레오폴드의 손을 꽉 잡으며 덧붙였다.

“기억하렴. 리처드. 네가 스칼렛에게서 왕의 목걸이를 반드시 받아주겠다 해서 그 애를 살려두고 있는 거야. 난 그 애의 자궁만 있어도 충분한 거 알지?”

“끔찍한 말씀 좀 그만하세요. 제가 사랑하는 여자예요. 자궁 적출이니 뭐니 들을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고요.”

리처드 레오폴드는 이리나의 손을 뿌리치며 성을 내더니 돌아서서 그대로 나가버렸다. 이리나는 한숨을 폭 내쉬더니 2층을 올려다볼 듯 고개를 젖혔다.

루키우스는 스칼렛의 입을 막은 채로 그대로 옆으로 굴러 피했다. 다행히 들키진 않았는지 낮은 콧노래가 들려왔다.

“왕이여. 당신이 깨어나는 날이면 슬픔은 다신 없을 거야. 여기 흰 꽃 한 송이, 은빛으로 흩날리네.”

아에리우스의 노래 끝 구절이었다. 그것이 몇 번이고 반복되다 발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뚝, 끊어졌다.

비로소 루키우스는 스칼렛을 놔줬고, 스칼렛은 그의 몸 위에서 그대로 축 늘어지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해가 안 가요. 이 목걸이에는 아타 논 베르다 수칼레 아르카디움이라고 새겨져 있어요. 딸에게 주는 선물에 왜 하필 그런 문장을 새긴 건지 난 도통 모르겠네요.”

“흠- 그 안에 든 게 마지막 뱀파이어 왕의 피로 만들어진 뭔가여서인지도 모르죠. 사실 난 당신 목걸이를 볼 때면 심장이 이상하게 두근거리곤 했거든요. 뭐, 조사해보면 뭐든 나오겠죠.”

루키우스는 가볍게 대답하며 그녀를 안아 들고 일어섰다. 스칼렛은 팔을 벌려 그의 목에 두르더니 쇄골에 머리를 기대며 소곤거렸다.

“내가 당신을 천 년이나 기다릴 수 있을까요?”

그 목소리가 어쩐지 애달파 루키우스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대답했다.

“내가 만약 이리나의 왕이라면 미쳐버릴 겁니다. 제발 자신을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를 바랐던 여인이 고통 속에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이 되어 버렸다는 걸 아는 순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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