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페란의 공주님
후욱, 후욱-
거친 숨소리와 함께 몸이 위아래로 정신없이 흔들렸다.
스칼렛은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창 쪽에 드리워진 가림막이 걷혀 있어 침대 안이 환했다.
덕분에 그동안 미처 몰랐던 사주식 기둥과 그 위를 덮은 화려한 자수가 수 놓인 지붕이 뚜렷하게 보였다.
잠시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아래로 하니 계속해서 흔들리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루키우스가 무릎을 꿇고 앉은 채 그녀의 몸 안을 정신없이 탐하고 있었다.
굉장히 흥분한 듯 순백의 피부는 불그스름했고 떡 벌어진 어깨와 두툼한 승모근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거친 숨과 함께 빠르게 오르내리는 두꺼운 가슴 근육을 타고 땀이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모습이 지독하게 야했다.
오늘 새벽까지 격하게 탐해지다 지쳐 잠들었는데 대체 언제 또 시작한 건지 몸 안이 흠뻑 젖어 있었다.
직각으로 들린 그녀의 다리가 그의 가슴 위에서 춤을 춰댔다.
찔꺽찔꺽.
둘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맞물리는 소리에 흥분이 차올랐다.
저절로 몸 안이 꽉 조여들었고, 다리 사이로 거침없이 오가는 단단하게 부푼 성기를 제멋대로 오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후우… 일어났군요. 마이 스칼렛.”
루키우스가 땀으로 젖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시선을 맞추더니 미소 지었다.
해가 뜬 듯 너무 환한 미소에 목구멍에 고이던 화가 스르르 녹아버렸다.
“루키우스. 일요일 아침쯤은 늦잠 좀 자게 해줘요.”
스칼렛은 말라버린 입술을 혀로 핥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에게 탐해지며 저도 모르게 헐떡거린 모양이었다.
루키우스는 좀 더 강하게 허리를 흔들며 대답했다.
“스칼렛. 일주일에 고작 하룻밤이잖습니까. 게다가 당신은 또 기절해버렸고.”
그러면서 부족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데 스칼렛은 현기증을 느꼈다.
공원에서 리처드 레오폴드에게 정략적 구혼을 받고 난 뒤 벌써 5주,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일이 너무 많아 어영부영 대답을 미뤄올 수 있었다.
문제는 그러다 보니 루키우스와 보낼 시간 또한 여전히 부족했다. 시종 무관을 달래고 얼러서 얻어낸 시간이 일요일 정오까지였다.
그랬더니 루키우스는 밤을 새우려고 들었다. 지쳐 잠든 건데도 기절했다고 지난주에도 툴툴대더니 오늘은 도저히 못 참은 모양이었다.
“루키우스. 이러다…. 나 임신하겠어요. 아무리… 순혈과 인간 사이에 아이가… 생기는 경우가 드물다 해도 이렇게 해대면.”
스칼렛은 철척이며 빠져나갔다가 퍽, 퍼억 올려치는 진동에 자지러지며 겨우 말했다.
“걱정 말아요. 스칼렛. 당신이 내 아이를 가지게 되면 후우…. 1년 동안 결혼을 못 하니 나름대로 조절하고 있거든요. 법으로 정해져… 있거든요. 오로지 임신을 하지 않은…. 미혼의… 여성만이 버진로드를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짐승처럼 허리를 흔들어대는 루키우스를 바라보며 스칼렛은 숨을 삼켰다.
‘그렇다는 건 루키우스의 아이를 가지면 리처드 레오폴드와도 결혼 안 해도 되는 걸까?’
갑자기 기분이 확 날아올랐지만, 이내 훅 가라앉았다.
가족들조차 안전을 위해 수도의 허름한 여관에 숨겨두고 있는 상황인데 이 와중에 임신까지 한다면 상황이 더 복잡해질 것 같았다.
게다가 아이 아빠가 되어줘야 할 루키우스에게서 시크릿 풋맨의 족쇄를 풀어내지도 못했는데 지극히 위험했다.
그렇게 머릿속은 복잡해졌는데 몸은 루키우스가 주는 쾌감이 미쳐 점점 더 날뛰었다. 스칼렛은 신음을 삼키려 손등을 입으로 물며 고개를 젖혔다.
민망할 정도로 찔꺽대는 소리가 더더욱 커지며 침대가 사납게 삐걱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전신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종아리와 허벅지 뒤쪽을 타고 흐르며 미끄덩거렸다.
사나운 짐승처럼 훅훅 열기를 뿜어대던 루키우스가 손을 뻗어 그녀의 가슴을 주물럭대며 물었다.
“젖꼭지가 많이 부었네요. 당신 잠든 사이에 너무 맛있어 보여서 나도 모르게 좀 오래 빨았다 싶긴 했는데….”
정신없이 흔들리던 스칼렛은 비로소 자신의 젖꼭지가 발갛게 부어오른 것을 보았다. 흡혈도 했는지 잇자국도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당신 정말… 짐승 같아.”
질렸다는 듯 읊조리자 루키우스가 싱긋 웃더니 두 팔을 뻗어 제 몸을 지탱한 채 엎드렸다.
자연스럽게 무릎이 밀려 올라가며 엉덩이가 허공에 붕 떴다. 발목이 그의 어깨에 걸렸다. 단단하게 부푼 성기가 자궁을 터트릴 듯 깊숙이 박혀왔다.
그런 채로 둥글게 허리를 돌리니 귀두가 자궁을 비비적대며 열기를 불러왔다. 그저 그뿐인데 어마어마한 쾌감이 밀려오며 내벽이 바들바들 떨렸다.
“후우… 이런 느낌이라니…. 이걸 고작 하룻밤만 맛보라니 당신이 잔인한 거예요.”
루키우스는 낮게 신음하더니 귀두가 질구에 걸릴 정도로 빼냈다가 퍽! 꽂아 넣었다.
아읏!
스칼렛은 고개를 젖히며 교성을 토해냈다.
눈앞이 번쩍번쩍했다. 자신의 내벽이 그의 성기에 쫙쫙 엉겨 붙으며 안달을 해대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그의 사정을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
루키우스는 그 감각을 만끽하는 듯 몇 번이고 혀로 입술을 핥으며 음미하더니 깊숙이 담근 채로 흔들어대며 취한 듯 읊조렸다.
“하아. 스칼렛. 마이 스칼렛….”
그러면서 좀 더 강하게 좌우로 흔들었다.
스칼렛은 시트를 잡아 쥐며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좋아도 너무 좋았다. 몸 전체가 저릿해지며 자꾸 발가락이 곱이 들었다.
이대로 몸이 녹아버릴 것 같아 시트를 잡으며 고개를 젖히자 루키우스가 좀 더 깊숙이 몸을 붙여 오며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피가 쭉, 빨렸다. 온몸이 흡혈의 쾌감에 전율하며 몸 안에 든 성기를 꽉 조였다. 위아래로 소용돌이치는 쾌락의 파도가 전신에 덮쳐들었다.
눈꺼풀 안쪽에서 번개가 내리치더니 그대로 삼켜졌다. 다시 정신을 차리니 루키우스가 매우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스칼렛? 30초 정도 대답이 없어서요.”
“너무 좋아서….”
스칼렛은 여전히 몸 안에 남은 달콤한 감각을 만끽하며 생각 없이 대답하다 입을 다물었다. 루키우스가 짓궂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서 뭡니까? 왜 말을 하다 말아요?”
더 듣고 싶은지 상냥하게 묻는데 목소리와는 달리 몸 안에서 부피가 다소 줄었던 성기가 부푸는 것이 느껴졌다.
“루키우스. 나 목말라요.”
이대로 또다시 강행할 것 같은 예감에 애원하듯 말하자 루키우스가 볼에 입을 맞추더니 천천히 몸을 빼냈다.
“알았습니다. 여왕님. 가만 계세요.”
루키우스가 침실 쪽으로 난 가림막을 걷자 일요일 아침마다 왕성 밖 카페에서 배달시키는 조식이 거치대 위에 놓인 것이 보였다. 맛도 있었고 무엇보다 앤이 일하는 곳이다.
매주 조식과 함께 앤이 쓴 편지가 함께 배송됐다. 물론 형제들끼리만 알아볼 수 있는 암호로 된 편지였다.
당장 읽어보고 싶었지만, 루키우스가 있으니 참아야 했다.
리처드 레오폴드의 부탁으로 체터필드 대공이 루키우스에게서 시크릿 풋맨을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지만 반신반의였다.
바뀐 것이 하나도 없는데 대공의 지랄 맞은 성격이 어디 갈 리 없었다. 기회만 있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불러낼 확률이 너무 높았다.
그러므로 가족들이 현재 어디 묵고 있는지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를 루키우스가 아는 것은 극도로 위험했다.
“자. 여기 있습니다. 여왕님.”
루키우스가 거치대 위에 놓인 이슬방울이 맺힌 차디찬 물병을 들어 물을 가득 따르더니 건넸다. 스칼렛은 받아 들고 아주 시원하게 들이켰다.
하아-
빈 잔을 내려놓으며 만족스러운 감탄사를 내뱉자 루키우스가 잔을 받아 다시 거치대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당신이 물을 마시는 걸 보면 물이란 게 맛있어 보입니다.”
스칼렛은 거장이 빚은 듯 매끈한 그의 몸을 눈으로 훑으며 물었다.
“피 대신 물을 마셔본 적 있어요?”
그러다 문득 시선이 그의 하반신에 꽂혔다. 대체 뭘 어쨌다고 그 짧은 새 성기가 부풀어 그의 배꼽에 닿을 정도로 곧추서있었다.
“어렸을 때 한 번. 삼키지도 못했죠. 역겹더군요.”
루키우스가 시선을 느꼈는지 피식 웃으며 천천히 침대 위로 올라왔다.
“우리가 피를 삼킬 때 느끼는 그 맛인가 보네요.”
스칼렛은 혀를 내밀어 말라오는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아마도 그런 거겠죠.”
그렇게 대답하며 루키우스가 침실 쪽 가림막을 쳤다.
스칼렛은 등 뒤에서 비쳐드는 햇살에 반짝이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루키우스. 나 배고픈데.”
“딱 한 번만 더 하죠. 자, 엎드려봐요. 그러면 좀 편할 거예요.”
마치 달래듯 읊조리는 목소리에 스칼렛은 어쩔 수 없이 그가 시키는 대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엎드렸다.
루키우스는 등 뒤에서 그녀의 허벅지 위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말했다.
“난 당신의 뒷모습을 아주 좋아합니다. 목덜미부터 시작해 부드럽게 휘어지는 등과 잘록한 허리선 그리고 통통한 이 엉덩이까지 입맛 돌게 만들거든요.”
그러면서 손으로 천천히 쓸어내리는데 그 감각이 황홀했다.
스칼렛은 낮게 신음했고 그의 손이 엉덩이를 주물럭대자 흥분이 올라와 허리를 비틀었다. 그렇게 다리 사이에 약간의 틈이 생기자 길고 굵직한 그의 성기가 질구로 밀려 들어왔다.
으읏!
예상보다 깊숙이까지 차오르는 느낌에 신음하자 루키우스가 엎드려 그녀 머리 옆을 두 손으로 짚으며 몸을 지탱하더니 격렬하게 허리를 털었다.
후욱- 후욱-
귓가에 그의 거친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쑥, 쑤욱 밀려들 때마다 엉덩잇살이 위로 확 밀렸고 팽팽하게 부푼 고환이 밀부 아래를 철썩철썩 쳐댔다.
성기를 제외하곤 몸이 닿은 부위가 없었지만, 등으로 그의 전신에서 뿜어내는 열기가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의 목덜미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뚝뚝, 등에 한두 방울씩 떨어져 내릴 때마다 괘감이 엄습했다.
밤새 탐해져 통통하게 부푼 클리토리스가 시트에 쓸리며 바들바들 떨어댔다.
“아우….”
스칼렛은 고개를 젖히며 안달을 했고 그의 성기를 잘라 먹을 듯 안이 조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루키우스의 숨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
“흐읏… 스칼렛…. 좋아요? 말해봐…요. 내가 박아…주는 것이 좋습니까?”
“좋아. 정말 좋아.”
스칼렛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키우스는 빼지도 못할 만큼 흥분했는지 깊숙이 밀어 넣은 채 빠르게 쑤셔댔다.
찔꺽찔꺽찔꺽.
자궁이 마구 문질러지며 그의 성기가 몸 안에서 더욱 부푸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녹을 듯 뜨거워졌다.
미친 듯이 신음을 토하자 그의 허리가 뒤로 확 빠지더니 퍽, 퍼억 몇 번이고 강하게 박혀왔다.
그동안 여러 차례 몸을 섞으면서 그 동작이 의미하는 바를 알기에 스칼렛은 안달을 하며 몸을 조였고 이윽고 그가 한껏 허리를 밀며 정액을 뿜어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흔들어대며 그녀의 자궁을 가득 채우는 동작에 스칼렛은 낮게 신음하며 바들바들 떨었고 그러자 어깨에 그의 이가 박혔다.
피가 쭉 빨림과 동시에 다시금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칼렛은 본능적으로 그가 다시 발기하기 위해 그런다는 걸 깨닫고는 울음을 터트렸다.
“루키우스! 한 번만 한다면서요!”
“한 번입니다. 아직 안 뺐잖아요.”
루키우스는 즐거운 듯 대답하더니 달래듯 귓등을 핥으며 소곤거렸다.
“정오까지입니다. 마이 퀸. 정오까진 당신은 내 거예요.”
***
스칼렛은 엎드린 채 가림막을 젖히고 나가는 루키우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두툼한 승모근과 예술적인 등 근육 그리고 꽉 조여져 오목하게 패인 보조개가 멋진 엉덩이부터 그녀의 허리만 한 굵기의 허벅지와 매끈한 종아리까지 지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쌓인 욕정을 해소해서인지 도리어 상쾌함마저 묻어났다.
12시 시계 종이 울린 것이 불과 몇 분 전인데, 순혈 뱀파이어라는 종족은 인간 체력의 몇 배라더니 정말 실감 났다. 아침도 못 먹고 이 시간까지 탐해질 줄은 정말 몰랐다.
아니, 생각해보면 지난 5주 내내 이랬다. 다만 그가 떠먹여 주는 조식을 먹으며 계속해서 섹스했기 때문에 배가 덜 고팠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지난주 밥 먹으면서까지 섹스하고 싶진 않다고 징징댔더니 전략을 바꾼 모양이었다.
‘저러고도 분명히 오후가 되면 목이 마르다느니 잠자리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툴툴대겠지.’
스칼렛은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동시에 이런 상황을 만족스러워하고 있는 자신의 몸을 느꼈다.
이리나도 그렇고 티파티 때마다 만나는 귀부인들 대부분이 스칼렛이 점점 더 예뻐진다면서 찬사를 멈추지 않았다.
사랑에 빠진 여자는 스스로 발광을 한다더니 맞는 말이었다.
루키우스만큼은 아니지만, 피부도 놀랍도록 매끄러워졌고, 화장 따위 필요 없을 만큼 얼굴에는 핑크빛이 감돌았다.
입술은 붉었고 눈동자는 더더욱 진한 초록색이 되어 대관식 이후 인사를 하러 온 외교관마다 첫 마디는 아름다우십니다, 로 시작했다.
그래 봤자 루키우스나 이리나의 미모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데도 그랬다.
스칼렛은 기뻤지만 동시에 괴로웠다. 모든 이의 시선을 받는다는 건 리처드 레오폴드 또한 그렇다는 의미였다.
매일같이 그는 청혼의 대답을 요구했고, 때때로 집요할 정도로 바라보며 욕망이 고인 제 입술을 혀로 핥곤 했다.
그럴 때면 까마귀 깃털처럼 새까만 머리와 새까만 눈 그리고 하얀 피부 때문인지 마치 먹잇감을 두고 사냥할 때를 노리는 육식수처럼 보였다.
하아-
생각할수록 가슴이 답답해져 스칼렛은 기를 쓰고 일어났다. 그러고 나니 루키우스가 되돌아와 번쩍 안아 들며 말했다.
“목욕 준비가 되어있군요. 가죠. 씻겨드리겠습니다.”
“됐어요! 지난주에도 그래놓고는 또 해대고선. 정오가 지났으니 이리나를 불러줘요.”
“정말로 씻겨만 드리겠습니다. 마이 퀸. 정말로요.”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는 루키우스의 짙푸른 눈동자를 보니 도저히 안 된다는 말이 나오질 않아 스칼렛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부탁할게요.”
정말 고맙게도 루키우스는 완벽하게 목욕 시중만 들었고 그러면서 다소의 장난을 치긴 했지만 그래도 적당한 시간에 나올 수 있었다.
그런 뒤에는 스칼렛을 제 무릎에 앉히고는 배달된 요리를 하나하나 정성껏 잘라 먹여주기까지 했다.
솔직히 스칼렛은 볼이 터져라 음식을 잔뜩 물고는 한꺼번에 씹어 삼키는 것이 익숙하다 보니 정말로 그의 펫이라도 된 느낌이었다.
“당신 정말 모이 주는 걸 좋아하나 보네요.”
어쩐지 멋쩍어져 받아먹으며 중얼거리니 루키우스가 귓등에 코를 비비적대며 말했다.
“네. 좋아합니다. 당신이 받아먹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아주 재밌습니다. 물론 당신이 입에 마구 넣고는 우걱우걱 씹어 삼키는 모습도 귀엽긴 하지만요.”
“거짓말. 남자들은 조신하게 오물오물, 콩알만큼만 먹는 여잘 좋아하잖아요.”
“편견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당신 먹는 모습이 충격이긴 했어요. 그런데 보다 보니 점점 즐거워지더군요. 당신처럼 열정적으로 음식을 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거든요.”
“지금 놀리는 거죠?”
“놀리긴요. 스칼렛. 자, 아 해요. 마저 먹어야죠.”
루키우스는 작게 웃으며 대답하더니 조각난 와플 조각을 내밀었다. 스칼렛이 얌전히 받아 입에 무는데,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여왕 폐하. 급히 보고 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시종 무관이었다. 스칼렛은 흘끔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는 아직 자유 시간이 30분가량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일주일에 반나절에 불과하다 보니 그 시간마저 아까웠지만 별수 없었다.
“들어와요.”
스칼렛은 몸을 일으켜 루키우스의 맞은편 의자에 얼른 가서 앉으며 말했다.
시종 무관이 바로 문을 열고 들어서더니 가볍게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건넸다.
“식사 중에 정말 죄송합니다. 마이 퀸. 지금 막 서궁에 페란에서 온 외교사절단이 도착했기에 보고 드리러 왔습니다.”
“페란이요?”
스칼렛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페란은 바다 건너 위치한 강대국으로 순혈 뱀파이어 술탄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사실 페란을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가 순혈 뱀파이어의 지배하에 놓여 있기에 그들에게 있어서 아마칼리 왕국은 가급적 멀리하고 싶은 나라일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새로운 여왕이 제위에 오른다 해도 수도 곳곳에 있는 각 나라의 대사관에서 일하는 외교관이 인사를 오는 것이 보통이었고 이번에도 역시나 대관식 이후 다들 그랬다.
“단장은 누굽니까?”
역시나 외교학에는 스칼렛보다 능한지 루키우스가 바로 물었다.
“페란의 술탄 아흐메드의 따님이신 아이란 공주님이십니다.”
그러자마자 루키우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란 공주가 단장이란 말입니까?”
“그러합니다. 특이하게도 인간 여인으로 이루어진 스무 명가량의 사절단과 아마도 정예부대일 듯한 순혈 뱀파이어 무사 50명을 끌고 왔습니다. 엄청난 양의 상자와 함께요.”
“상자? 무슨 상자인지는 압니까?”
“모르겠습니다. 그저 꽤 무거운 듯 마차 하나에 한 대씩이었습니다. 여왕님을 알현하고 싶다 해서 일단 서궁에 있는 알현실로 모셨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빨리 가봐야겠군요.”
루키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 무관이 다시 절하더니 물러나겠다.
“저는 로드 슈발리에님께 달려가 마차를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문이 닫히자 스칼렛은 얼른 물었다.
“아이란 공주란 분 알아요?”
“사촌 동생입니다. 제 고모님이 페란의 술탄에게 시집을 가서 낳은 딸인데 올해 스물이니 당신보다 두 살 위겠군요. 하지만 술탄이 워낙 예뻐하다 보니 생각이 많이 어립니다.”
“브라운 교수님 강의에서 페란의 술탄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데 하렘에 둔 부인만 100명이라 하니 딸이 한둘이 아닐 텐데 아이란 공주란 분이 뭔가 대단히 특출난가 보네요.”
“술탄이 아이란 공주를 예뻐하는 이유는 제 고모님을 사랑해서입니다. 정략결혼이 아니라 사랑에 빠져 결혼한 유일한 상대거든요. 그러니 둘 사이에 태어난 아이한테 애정이 깊겠죠.”
“혹시 엔네야드가에서 다른 왕실로 시집간 사람이 그분 말고도 또 있나요?”
“많습니다. 순혈 중의 순혈 가문이다 보니 천 년 전부터 결혼을 통해 다른 왕가와 화합을 도모했었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러고 있죠.”
“루키우스. 당신 해외 나가면 왕으로서 대우받겠군요. 그렇죠?”
“그렇겠죠. 뭐, 그래 봤자 전 대공의 허락 없이는 이 땅에서 나갈 수가 없습니다만.”
루키우스는 가볍게 대답하더니 문득 떠오른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흠. 그러고 보니 큰 숙부님이 아이란 공주더러 당분간 이 나라에 발을 들이지 말라 했었는데….”
“왜요?”
“아이란 공주가 툭하면 절 자신의 나라인 페란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졸라대서요. 큰 숙부가 엔네야드가의 원로장인데 융통성이 상당히 부족하거든요.”
그렇게 설명한 루키우스는 우유를 따른 잔을 내밀며 덧붙였다.
“자, 마시고 있어요. 이리나를 불러올 테니. 단장을 빨리해야겠군요.”
스칼렛은 잔을 받아 들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루키우스가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자마자 스칼렛은 오믈렛이 담겨 있던 접시를 들고 아래를 매만졌다.
예상대로 빨간 접시와 똑같은 색깔의 쪽지가 잡혔다. 그걸 뜯어내니 앤의 글씨가 적힌 하얀
면이 보였다.
[언니. 우린 다 잘 지내고 있어. 마크랑 안톤이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하기 시작했어. 앨버트 수사관 아저씨는 여전히 우리 여관에 투숙하면서 출퇴근을 하고 계셔.
그리고 수요일 날, 언니 애인이란 분이 우리 카페에서 헤레이스 박사란 분과 오셔서 브라운 교수님이란 분을 뵙는 것을 봤어. 물론 그때와는 다르게 날 전혀 못 알아보더라고.
일단 이곳에서 계속 일할 생각인데 앨버트 아저씨가 자꾸 귀찮게 해. 당장 그만두라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어휴. 이 아저씨 의외로 되게 질겨. 건강해. A]
스칼렛은 어리둥절했다. 헤레이스 박사가 누군데 브라운 교수님을 만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그보단 앤이 남자 이야기를 이렇게 자연스럽게 늘어놓는 것이 신기했다.
‘설마 우리 앤이 앨버트 레오폴드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걸까? 배 통통한 빵집 주인처럼 생긴 그 남자를?’
어쩐지 재밌다 싶어 킥킥대며 쪽지를 잘 접어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둔 그림 액자 사이에 끼워 넣었다.
처음에는 그림 한 장 덜렁 있을 뿐이라 세워놓기가 불편했지만, 루키우스가 딱 맞는 나무 액자를 사다 줘서 장식해놓기가 좋았다.
더불어 그림과 액자 사이에 쪽지를 숨기기도 알맞았다.
다시 액자를 내려놓자마자 노크 소리와 함께 이리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어 그레이스. 이리나입니다.”
스칼렛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돌아섰다. 언뜻 호리병 목걸이가 가운 밖으로 나와 있기에 숨기듯 가운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런데도 영 마음이 안 좋았다. 공원에서 리처드 레오폴드의 어머니란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날이 갈수록 시중받기가 불편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밀어냈다간 괜히 리처드 레오폴드의 원성을 살까 봐 그대로 곁에 두고는 있었다. 다만 예전처럼 미주알고주알 마음에 있는 말을 하지는 못했다.
“들어와요.”
다소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자 이리나가 들어섰다.
“좋은 오후입니다. 유어 그레이스. 드레스 룸으로 가실까요?”
언제나 그렇듯 이리나는 화사하게 웃으며 드레스 룸을 손짓했다.
순간 스칼렛은 소름이 돋았다. 아무래도 이리나는 말로만 듣던 요부였다.
암시장 크레타 할머니가 누누이 몇 번이나 강조하며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것이라고 타이르던 겉과 속이 완벽하게 다른 존재.
그땐 그래 봤자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가볍게 웃어넘겼는데 왜 크레타 할머니가 그들은 인간의 형상을 취했을 뿐 뱀파이어보다 더 먼 종족이라고 엄하게 다그쳤는지 알 것 같았다.
리처드 레오폴드가 대놓고 결혼하겠다고 선언을 했으니 정체가 드러났다고 무방할 이 상황에도 전과 다름없이 행동하는 것 자체가 기이했다.
하지만 리처드 레오폴드의 친모기도 하니 그런 속내를 대놓고 말할 수도 없어 잠자코 걸음을 옮겼다.
“빨리 단장해줘요.”
사무적으로 말하며.
***
서궁까지 이동하는 마차 안. 루키우스는 스칼렛을 끌어당겨 등 뒤에서 안더니 귓등에 코를 비비적대며 체향을 즐겼다.
토요일 밤부터 일요일 반나절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흡혈과 패팅을 즐길 시간마저 부족해 마차 창에 커튼을 달았더니 그때부턴 타자마자 이러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후우. 당신 피부에 내 체향이 배었군요. 아주 좋은데요. 내 거란 표식 같아서.”
루키우스의 속삭임에 스칼렛은 볼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허리에 두른 그의 팔뚝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여인의 피부와는 달리 속까지 꽉 차 있는 근육질의 팔은 만지는 느낌이 아주 근사했다.
물론 이렇게 다정하게 있는 건 대략 수요일까지로 목요일쯤 되면 루키우스는 흡혈과 패팅의 충동을 참지 못하고 타자마자 한껏 흡혈한 뒤 그녀에게 자신의 타액을 삼키게 했다.
그러다 한계에 이르는 건 토요일이었다. 밤부터 그녀를 안을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집요할 정도로 다리 사이를 주무르며 스칼렛의 몸을 달궜다.
웃긴 건 그 때문에 빼곡한 일정이 힘겨워진다고 잔소리를 하면서도 타자마자 그의 손길이 덮쳐들 때 거부한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나 되게 밝히는 여잔가 봐. 루키우스랑 자는 게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걸까?’
불쑥 그런 생각이 들어 머쓱해졌다. 스칼렛은 목덜미에 와닿는 그의 입술을 즐기며 떠오르는 대로 물었다.
“루키우스. 헤레이스 박사가 누구예요?”
“제 작은 숙부님이십니다. 엔네야드 가의 대학자시죠. 소개해드린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분을 어떻게 아십니까?”
루키우스의 날카로운 지적에 스칼렛은 아차 싶었다.
루키우스가 행여라도 알게 될까 봐 앤과 비밀 쪽지를 주고받는다는 걸 숨겨왔는데 그걸 제 입으로 털어놓을 뻔했다. 무진장 당황스러웠지만, 겉으로는 아닌 척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앨버트 레오폴드 수사관에게서 보고를 받던 중에 우연히 그 이야기가 나왔어요. 당신이 헤레이스 박사란 분을 만나는 걸 지나가다 봤다고.”
“아. 그렇군요. 당신이 좋아하는 조식 카페에서 만났거든요. 브라운 교수님을 소개해드리느라. 아마칼리 여왕사에서 궁금한 게 있다고 하셔서 말이죠.”
“그래서요?”
“글쎄요. 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까지는 못 들었습니다. 제가 일이 너무 많아서 바로 들어와야 했거든요.”
“하긴 요즘 당신 평일에 계속 야근 중이죠?”
“저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습니다. 재상의 악행을 뜯어고치겠다는 당신의 열정에 감복해 스스로 움직이고 있어요. 당신에게 반한 귀족 출신 관리들이 너무 많아 놀라울 정도죠.”
루키우스는 그렇게 읊조리더니 목덜미에 입을 맞춰왔다.
“스칼렛. 난 당신에 비해 내가 너무 부족한 것 같아 두렵습니다.”
스칼렛은 부드럽게 쏟아지는 입맞춤이 간지러워 웃음을 터트렸다.
“맙소사. 루키우스! 그건 내가 할 소리거든요!”
그렇게 외치며 허리를 비틀어 시선을 맞췄다.
달빛을 머금은 청량한 하늘빛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빨려드는 느낌을 만끽하며 스칼렛은 새가 쪼듯 가볍게 입을 맞췄다.
루키우스가 화답하듯 그녀를 의자에 뉘며 혀를 밀어 넣었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 몸을 잇고 있었던 것이 무색하게 뜨거운 키스가 오갔다.
스칼렛은 루키우스의 목을 끌어안으며 정신없이 진한 키스를 나눴다.
“스칼렛. 마이 스칼렛.”
입술이 잠깐 떨어질 때마다 높은 코를 비비적거리며 달게 소곤거리는데 귀가 녹을 것 같았다.
그렇게 달콤함에 푹 빠져 있는데 마차가 멈췄다.
루키우스가 아쉽다는 얼굴로 입술을 거두더니 물러나 앉았다.
스칼렛은 머리를 매만지며 맞은편 자리로 가려 했다. 하지만 한발 앞서 벌컥 마차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선 건 리처드 레오폴드였다.
오늘도 역시나 근육질의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는 검은 슈트 차림이었는데 대신 한쪽 어깨에는 하얀 눈 호랑이의 털을 둘러 멋을 잔뜩 냈다.
루키우스만큼은 아니지만, 키도 크고 근육질에 조각 같은 얼굴이라 외양은 참으로 봐줄 만했지만 눈빛이 글러 먹었다. 드글드글 욕정이 들끓는 눈동자는 언제봐도 속이 거북했다.
“마이 퀸. 마차 바퀴에 고장이라도 난 줄 알았습니다. 하도 천천히 달려와서 말입니다.”
리처드 레오폴드는 부드러운 표정과는 달리 날 선 목소리로 말했고 스칼렛은 질렸다는 얼굴로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려섰다.
“섭정 레오폴드. 이젠 시종 무관이 할 일까지 대신하시는군요. 참으로 놀랍네요.”
“그는 지금 아이란 공주에게 여왕께서 도착하셨다는 걸 알리러 뛰어갔습니다. 오느라고 고생했으니 좀 쉬시라고 손님용 별궁으로 안내하겠다는 것도 거절하고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리처드 레오폴드는 스칼렛의 손을 잡아 팔짱을 꼈다. 어쩔 수 없이 그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계단을 오르며 스칼렛은 조용히 물었다.
“흠- 뭐가 그리 급한 건지 모르겠네. 페란이랑 딱히 외교 분쟁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러면서 흘끔 뒤를 보니 루키우스와 마차 뒤에서 따라온 티베리우스를 비롯한 슈발리에들이 바짝 붙어 쫓아왔다.
“아이란 공주가 가지고 온 예물로 봤을 때 아무래도 뭔가 굉장한 걸 요구할 것 같습니다.”
리처드 레오폴드는 스칼렛이 루키우스를 본 것만으로도 기분이 상하는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예물? 아. 시종 무관이 묵직한 상자들을 잔뜩 들고 왔다더니 보물상자였나 보군요. 근데 대체 뭘 얼마나 가지고 왔기에?”
스칼렛은 바닥에 끌리는 드레스 자락을 잡아 올리며 물었다.
“금낙타상이 75개, 에메랄드와 루비 그리고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가 든 상자가 50개 그리고 페란 너머의 구자국 여인들이 만든 최고급 비단 옷감이 백 필이 주요 예물입니다.”
“헉. 그것 말고도 또 더 있단 거예요?”
“여인의 장신구와 페란의 장미로 만든 화장품과 향수 등이 100상자입니다. 그걸 죄다 알현 홀에 뚜껑을 열어 늘어놓았습니다.”
“……체터필드 대공이 기뻐서 날뛰고 있겠군요. 외교 사절이 들고 온 선물의 1%가 재상의 것이라니 그 법 어떻게 수정 안 돼요?”
“여왕 폐하. 지금 귀족원에 제안한 법안 수정만 해도 스무 개가 넘습니다. 그것들부터 처리한 후 도전하시죠.”
리처드 레오폴드는 가볍게 대답하고는 서궁으로 들어서는 문 앞에서 멈춰 서더니 허리를 구부려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마이 퀸.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스칼렛은 얼굴을 찡그렸다. 오늘은 좀 그냥 넘어가나 했는데 역시나 또 재촉이다.
쪼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슬슬 짜증이 솟구쳤다. 그렇다 해도 암시장에 온 지랄 맞은 손님을 상대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니 스리슬쩍 넘겨야 했다.
“어제도 말했지만, 여왕위가 안정된 다음에요. 게다가 요즘 부부보다 더 오래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러면서 좀 친해지면 결혼해서도 행복할 것 같지 않아요?”
“글쎄요. 전 회의하다 말고 당신을 책상 위에 엎어놓고 흡혈하고 싶은 생각뿐이라서 일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는 리처드 레오폴드의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반짝거렸다.
스칼렛은 더는 참지 못하고 훗, 코웃음을 쳤다.
“그놈의 송곳니. 정체를 감추느라 드러내지도 못하면서.”
리처드 레오폴드의 검은 눈이 사납게 번질거렸다. 그녀가 거칠게 말할 때마다 욕정 한다더니 당장에라도 어디론가 끌고 갈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손을 뻗었다.
“나에게 박히고 싶어서 이러는 겁니까?”
다행히 그의 손에 잡히기 전 상황을 눈치챈 듯 루키우스가 빠르게 다가와 스칼렛 앞을 가로막았다.
슈발리에 아이렛이 리처드 레오폴드 옆으로 다가서며 황급히 말했다.
“마이 로드. 안됩니다.”
정신이 번쩍 든 듯 리처드 레오폴드의 사나웠던 기운이 훅, 가라앉았다.
그는 손을 거두고는 이를 으드득거리더니 스칼렛을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바라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진짜 사람 미치게 만드는군….”
낮게 읊조리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기는 동작에서 초조함이 묻어 나왔다.
스칼렛은 움찔 떨며 말라오는 입술을 혀로 핥았다. 아주 제대로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어 초조해졌다.
리처드 레오폴드의 시선이 끈적하게 그녀의 혀에 달라붙었다.
“들어가시죠. 마이 퀸.”
루키우스가 여차하면 방어할 듯 긴장된 자세로 스칼렛을 감싸듯 앞으로 밀었다. 스칼렛은 얼른 걸음을 옮겼다.
아치형의 지붕 안쪽에 있는 출입구 양편에 선 경비병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복도가 보였고 알현실로 들어가는 문은 활짝 열려 그 너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슈발리에들은 바로 그 문을 통해 들어갔지만, 스칼렛은 루키우스와 단둘이 그곳이 아닌 문 바로 뒤에 있는 작은 통로를 이용해 알현실의 뒤쪽에 있는 대기실로 향했다.
오로지 여왕과 여왕이 허락한 이들만 들어갈 수 있는 그곳은 다수의 소파와 탁자가 놓여 있었고 창이 많아 쉬기에 좋았다.
평소라면 앉아서 조금이라도 쉬었을 텐데 아이란 공주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하니 그럴 틈이 없었다.
“잠깐. 스칼렛.”
그대로 알현실로 나가려는데 루키우스가 팔뚝을 잡아 말렸다. 스칼렛은 고개만 돌려 바라보곤 숨을 크게 들이켰다.
루키우스의 짙푸른 눈동자가 걱정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조금 전 대체 뭡니까? 리처드 레오폴드더러 뱀파이어냐고 혹시 대놓고 묻기라도 한 겁니까?”
“…그가 먼저 고백했어요. 자신의 친부가 체터필드 대공이고 친모가 이리나 아비스래요. 헬레나 아비스가 카운테스 레오폴드인 척 살아왔다고. 그리고 진짜 레오폴드 부인은 전대 레오폴드 공작에게 살해당했대요. 헬레나와의 사랑을 깨려 해서.”
스칼렛은 차마 루키우스를 마주 볼 수가 없어 시선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그동안 몇 번이나 말해주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청혼에 대해서도 말해야 할 것 같아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루키우스는 기가 막힌 듯 짤막한 한숨을 내쉬더니 손을 들어 스칼렛의 턱을 잡아 들어 올려 눈을 맞추며 으르렁거렸다.
“그 정보를 대가로 그 개자식이 당신에게 원한 게 뭡니까?”
“그게 그러니까….”
스칼렛은 우물거렸고 천만 다행히도 알현실 쪽의 문이 열리더니 티베리우스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여왕 폐하. 얼른 나오셔야겠습니다.”
“네! 나갈게요!”
스칼렛은 기운차게 대답하고는 루키우스에게 말했다.
“나중에 이야기해요.”
루키우스는 마지 못한 듯 그녀를 놔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칼렛은 살았다 싶어 재빨리 티베리우스에게 달려갔다. 티베리우스는 문을 활짝 열더니 지나가도록 비켜주었다.
스칼렛은 옷매무새를 다듬고는 늠름하게 걸어 밖으로 나갔다.
기다리고 있던 시종 무관이 우렁차게 외쳤다.
“아마칼리 왕국의 여왕이신 스칼렛 케이틀린 아마칼리께서 납십니다!”
***
루키우스는 입술을 짓씹으며 귓가에 맴도는 스칼렛의 목소리를 곱씹었다.
‘그가 먼저 고백했어요! 자신의 친부가 체터필드 대공이고 친모가 이리나 아비스래요. 헬레나 아비스가 카운테스 레오폴드인 척 살아왔다고. 그리고 진짜 레오폴드 부인은 전대 레오폴드 공작에게 살해당했대요. 헬레나와의 사랑을 깨려 해서.’
아마도 그동안 내내 말할까 말까 고민했던 듯 단숨에 튀어나온 정보는 사실 놀랍지는 않았다.
대관식 이후 루키우스는 티베리우스와 조사를 계속했고 그러다 21년 전에 마담 레오폴드의 유모가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없이 내쫓긴 사실을 알아냈다.
어렵사리 수소문해 그녀를 만나본 결과 티베리우스와 함께 내린 결론은 그 무렵 진짜 레오폴드 공작부인이 살해당하고 헬레나로 바뀌었다는 거였다.
그 사실을 알아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아비스가의 당주로부터 이리나가 10살 때 사생아를 출산했다는 정보가 흘러들어왔다.
본래 순혈 뱀파이어들은 일찍 몸이 성숙하기 때문에 출산이 가능하긴 했지만 그 나이에 임신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랬기에 아무도 아이를 낳을 때까지 임신 사실을 알지 못했고 태어난 아이는 기를 형편이 안돼 아버지인 체터필드 대공에게 보내졌지만 가는 길에 불운하게도 마차 사고에 휘말렸다.
만약 그 아이가 살아있다면 20살, 현재 리처드 레오폴드의 나이와 일치했다.
그 직후 헬레나가 병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이리나가 레오폴드가로 떠났으니 결론은 하나였다.
체터필드 대공이 신왕조를 열기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를 해왔다는 것. 그 시작은 본인은 악역을 자처하며 아들이 있는 레오폴드가를 친여왕파의 수장으로 세운 거였다.
그다음으론 스칼렛을 레오폴드 성으로 몰아넣어 결혼이란 카드를 제시해 손에 넣으려 했다.
하지만 스칼렛은 청혼을 거절했고 대신 리처드 레오폴드를 섭정으로 삼았다. 그러자 대공은 루키우스를 들이밀어 스칼렛이 익숙한 평범한 삶으로 유혹하라 명령했다.
티베리우스와 짚어 본 대공의 계획은 이랬고, 지금까지의 흐름은 대공이 구상한 퍼즐대로 끼워 맞춰져 가는 중이었다.
리처드 레오폴드는 저돌적인 여왕을 잘 보좌하는 유능한 섭정으로서 귀족들에게 좋은 점수를 따고 있으니 스칼렛이 양위를 한다 해도 모두의 동의를 끌어낼 확률이 지극히 높았다.
그러므로 이제 남은 건 루키우스가 스칼렛을 꼬드겨 여왕위에서 내려오도록 만드는 것뿐이었다.
물론 루키우스는 그럴 마음이 없었고, 다행히도 체터필드 대공은 명령을 성실하게 수행하는지 조용히 불러서 다그치진 않았다.
이렇게 왕궁의 기류를 타고 흐르는 반역의 음모를 알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스칼렛에게 말하지 않은 건 여전히 대공과 리처드 레오폴드가 인간처럼 보이는 이유를 알아내지 못해서였다.
그 때문에 이리나가 대공과 체터필드 가의 서재에서 시간을 보낼 때마다 도청을 시도 중이었는데 아직까진 건진 것이 없었다.
체터필드 대공은 제 딸뻘인 이리나에게 단단히 빠져 있었고, 리처드 레오폴드를 왕으로 만들려는 것 또한 이리나가 원해서였지 딱히 그가 원해서는 아니란 사실이 알아낸 전부였다.
그런데 이 모든 걸 리처드 레오폴드가 스칼렛에게 털어놓다니 경악스러웠다. 그도 다 아는 사실을 대가로 대체 스칼렛에게 무슨 협박을 한 건지 분이 솟구쳤다.
“이 개새끼를 더는 그냥 둬선 안 되겠어. 딱 잘라 말을 해둬야지.”
루키우스는 그대로 대기실을 나섰다.
아까 스칼렛에게 송곳니까지 드러내며 흥분했으니 아직 알현실에 들어가지는 못했을 것 같았다. 아마도 누구든 끌어다가 어딘가 틀어박혀 흡혈하고 있을 게 뻔했다.
루키우스는 날 듯이 복도를 걸으며 평소에는 무딘 채로 묻어두고 있는 감각을 끌어 올렸다. 굳이 최대치까지 밀어 올릴 필요도 없이 리처드 레오폴드의 맥박이 느껴졌다.
아무리 순혈의 피가 짙게 나타났다 해도 인간이다 보니 유달리 그 맥박은 또렷했고, 뛰는 속도로 봐선 흡혈 중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루키우스는 박동을 쫓아 모퉁이를 돌았다. 그곳은 정원 사이에 놓인 회랑이었는데 맞은편에 보이는 건 시종들이 머무는 별관이었다.
그대로 회랑을 따라가려다가 리처드 레오폴드와 함께 있는 자의 맥박이 아주 희미한 걸 알았다.
그렇다는 건 함께 있는 존재가 순혈 뱀파이어란 의미였다.
조금 놀랐지만 대체 누굴까 호기심이 일어 회랑의 칸막이를 뛰어넘어 리처드 레오폴드가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방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긴 창이 있었고 슬쩍 안을 들여다보니 긴 소파 위에 다소 기묘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리나가 창을 향해 앉아 있었는데 리처드 레오폴드가 그녀의 손목에 이를 박고 피를 흡혈 중이었다.
이리나가 친모라고 듣긴 했지만 이런 광경은 흔한 것이 아니었다. 뱀파이어들이 제 어미의 피를 젖 대신 빠는 건 유아 시절로 생후 3개월까지였다.
그런데도 저렇게 다 큰 아들에게 자신의 피를 먹이다니 좀 황당했다.
루키우스는 당혹스러운 기분에 턱을 벅벅 문지르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한발 앞서 이리나가 기척을 느낀 듯 고개 들어 바라봤다.
시선이 딱 맞았다.
헉!
황당하게도 동공이 뱀처럼 세로로 서 있는 데다가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마치 뱀파이어 왕의 꽃 아에리우스가 붉은색으로 물들었다가 은색으로 바뀌어버렸던 것처럼 진한 은색이었다.
루키우스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고, 이리나는 뱀이 먹잇감을 발견했을 때처럼 눈동자를 고정하더니 입만 놀려 말했다.
“내 사랑하는 아들 리처드. 말해보렴. 존경하는 우리의 왕께선 요즘 어떠시니? 또 대공이 험악한 짓을 하진 않지?”
리처드 레오폴드는 이를 거두더니 중얼거렸다.
“네. 그는 약속을 지키고 있어요.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루키우스는 진즉에 대공의 명령대로 스칼렛의 가족을 모두 죽였을 거예요. 그리고는 아무것도 기억 못 했겠죠. 그랬다면….”
“그랬다면 레이디 스칼렛의 심장이 산산조각이 났겠구나. 그치?”
“그랬겠죠. 여왕은 루키우스를 무척 사랑하니까요. 정말 다행이에요. 난 스칼렛의 지금 모습이 좋거든요. 강하고 사랑스럽고 가끔 날 미치게 하지만 결혼하고 나면 달라지겠죠.”
“그래. 지금까지 네게 안겨서 굴복하지 않은 여인이 없었으니 레이디 스칼렛 또한 그럴 거야. 지금은 그저 엔네야드 경이 전부라 뭘 몰라서 그러는 거니 이해하렴.”
이리나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리처드 레오폴드는 지친 듯 이리나의 무릎을 베고 눕더니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는 손동작을 했다.
그 순간 루키우스의 눈에 희한한 것이 들어왔다. 리처드 레오폴드의 손에 묻어나는 건 붉은 색이 아닌 흰색이었다.
‘흰색 피!’
그야말로 충격에 빠져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리처드 레오폴드가 느른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노력하고 있어요. 오늘도 루키우스의 체향이 뒤범벅이 되어 나타났지만, 모른 척해줬고요. 기분 같아선 당장 끌고 들어가 내 냄새가 흠뻑 배일 때까지 안고 싶었는데….”
“참으렴. 여자에겐 천천히 느긋하게 다가가야 도망가지 않는 법이란다. 그 못난이 앨버트를 떠올려보렴. 녀석이 지금까지 변변찮은 여자 하나 없는 건 성급함 때문이란다.”
“앨버트는 그저 제 일을 너무 좋아하는 것뿐이에요. 고작 한 달 차이인데도 절 형이라며 꼬박꼬박 불러주는 것도 기특하고요. 그 녀석은 가만 보면 아버지를 너무 닮았어요.”
“아버지라니! 네 친부는 대공이다. 전대 레오폴드 공작은 그저 네 양육자일 뿐이야. 그건 그렇고 아들아. 우리의 왕께서 대공의 꼭두각시가 되었을 때 부르는 이름이 뭐라고 했었지?”
“시크릿 풋맨이요.”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시크릿 풋맨. 우리의 왕이 시크릿 풋맨이라니 가슴이 찢어지는구나.”
이리나는 똑똑히 들어두라는 듯 은빛 눈을 빛내며 사납게 읊조렸다. 루키우스는 충격에 빠져 뒷걸음질 쳤다.
‘시크릿 풋맨? 내가 시크릿 풋맨이라고?’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심장이 오그라들며 쾅쾅 날뛰었다.
숨이 턱 막혀 토할 것 같았다.
그야말로 정신없이 회랑으로 뛰어들어 대기실로 돌아왔다.
완벽하게 혼자가 되자 그동안 이상하게 생각해왔던 일들이 하나둘 떠오르며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갑자기 재발한 기면증은 다섯 달 전 폭탄 테러 사건 직전에 시작됐다.
최근 들어 발생한 기면증 증상은 스칼렛과 데이트를 했던 날이었는데 정신 차려 보니 그의 손톱에는 기이하게도 핏물이 배어 있었다.
공원에서 스칼렛이 그의 무릎베개를 베고 누웠을 때 그저 화장실에 다녀온 게 전부인데 머리가 너무 엉망진창이라 다시 땋아줘야만 했었다.
며칠 전 브라운 교수와 헤레이스 숙부를 서로 소개해주고 돌아오던 길에 우연히 마주친 앨버트 레오폴드는 그를 보자마자 하얗게 질려서는 카페로 뛰어갔다.
그러더니 그곳의 여점원을 찾아내 무사한지 확인을 하는데 그 모습이 영 이상했지만, 시간이 없어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 다시 떠올려보니 스칼렛과 그곳에 갔던 날 서빙을 봤던 소녀였다.
죽음의 키스를 받은 자를 조상으로 둔 뱀파이어답지 않게 청색이 도는 흑발과 맑은 갈색 눈동자 그리고 노란색 꿀 빛 피부가 무척 예쁜 소녀였다.
그 소녀는 스칼렛에게 아주 상냥했고, 스칼렛은 무척 반가운 듯한 얼굴로 그녀를 맞았다.
결국 이 상황에 대한 해답은 하나뿐이었다.
앨버트 레오폴드는 그가 시크릿 풋맨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스칼렛 또한 그럴 것 같았다. 그리고 아마도 그 소녀는 스칼렛의 여동생일 확률이 높았다.
대관식 날 가족들이 수도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말한 뒤로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는 걸 보면 확실했다.
“씨발….”
이가 으드득 갈렸다. 노기가 솟구치며 손톱이 튀어나왔다. 한 번도 사람을 벤 적이 없다 자랑스러워했는데 이제 보니 피투성이였다.
이 사실을 엔네야드가의 원로장이자 대공가의 버틀러인 큰 숙부가 모를 리 없었다. 절대 정치 모략에 힘을 보태지 않는다는 엔네야드가의 비밀 언약 따위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갑자기 가문에 해가 될까 두려워 조심스럽게 조사를 진행해온 자신이 바보스러워졌다.
루키우스는 소파의 등받이에 손톱을 날렸다.
“체터필드 대공. 날 진짜로 꼭두각시처럼 가지고 놀다니!”
분기가 치솟아 뱀파이어의 본성 그대로 미친 듯이 베고 또 베고 그걸 반복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와 팔을 붙잡았다.
“루키우스 님!”
티베리우스였다. 루키우스는 헉헉대며 손톱을 다시 접어 넣고는 제가 한 짓을 보았다. 그 짧은 새 소파의 등받이뿐 아니라 소파까지 죄다 찢겨 안에 든 것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괜찮으십니까?”
티베리우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기에 고개를 끄덕이자 비로소 팔을 놔줬다.
“죄송합니다. 잠깐 이성을 잃었습니다.”
루키우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른 소파 손잡이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그동안 사교계를 드나들며 감정을 누르는 것에 익숙하다 보니 표정 관리는 할 수 있었지만 침통한 심정은 그대로였다.
그가 목숨보다 소중하다는 가족들을 죽일 뻔했는데도 곁에 두다니 그의 사랑스런 여왕님은 대범한 건지 무모한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아니, 차마 떠나보내지 못할 정도로 서로가 푹 빠져 있으니 그녀로서는 모르는 척하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을 것도 같았다.
그 마음을 짚어보니 애절해져 두 손으로 벅벅 마른세수를 해대자 티베리우스는 다가와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루키우스 님이 안 계시면 여왕께서 불안해하시는 거 아시잖습니까? 어서 알현실에 들어가 보십시오. 여긴 제가 치우도록 하죠.”
루키우스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맞는 말이었다.
큰 숙부가 아이란 공주더러 이 나라에 오지 말라고 못을 박은 건 툭하면 제 지참금을 털어서라도 그의 자유를 사겠다는 말을 버릇처럼 해대서였다.
그런데 리처드 레오폴드가 늘어놓은 선물의 규모를 봤을 때 아무래도 공주의 지참금이 분명했고 부디 그러지 않기를 빌지만, 여왕에게 그의 자유를 청하러 왔을 가능성이 컸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술 한잔 사죠.”
온 힘을 다해 의연하게 말하고는 루키우스는 알현실로 향했다.
하지만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마치 지옥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스칼렛에게서 떨어져야 해.’
끔찍한 결정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
아이란 공주는 루키우스의 사촌 동생답게 극상의 미인이었다.
허리까지 툭 떨어지는 플래티넘 블론드의 직모와 짙푸른 청색으로 빛나는 커다란 눈, 새빨간 입술까지 요정이 튀어나온 것 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두 살 위라고는 들었는데 분위기로 봐선 훨씬 어려 보였다. 다만 먹는 걸 말리는 이가 아무도 없었던지 체형이 참으로 푸짐했다.
어쩌면 순백의 피부라 확장되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입고 있는 옷 때문일지도 몰랐다.
통이 넓은 바지, 상반신에 딱 달라붙는 짧은 상의 그리고 하늘거리는 얇은 천을 머리부터 시작해 몸에 휘휘 감았는데 그래서인지 답답해 보였다.
아무래도 레이디 블란치를 소개시켜 줘야 할 것 같았다. 옷차림만 바뀌어도 저 미모가 확 살 것 같았다.
게다가 순혈답게 티끌 하나 없는 순백의 피부가 너무 보들보들해 보여서 저걸 살리면 누구라도 눈을 못 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스칼렛은 다른 건 몰라도 저 피부는 참 부럽다고 생각하며 슬쩍 홀의 정중앙을 바라봤다.
앞서 리처드 레오폴드가 말한 대로 각종 보물이 잔뜩 든 상자가 그녀 앞에 무슨 호위 부대처럼 놓여 있었다.
체터필드 대공은 옥좌가 놓인 단상 애래 서선 그 상자들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는데 그가 가장 탐내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건 커다란 시계가 담긴 상자였다.
스칼렛은 이리나가 언뜻 들려줬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옥좌에 앉았고, 아이란 공주가 인사를 하기는커녕 누군가를 찾는 듯 두리번대는 것을 보았다.
본능적으로 그 대상이 루키우스임을 깨달은 스칼렛은 비로소 옥좌 뒤쪽이 허전한 것을 알았다.
“왜 안 나오지?”
왠지 불안해져 고개 돌려 굳게 닫힌 대기실 문을 바라봤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열릴 기미가 안 보였다.
스칼렛은 살짝 당황하며 앞을 바라봤고 다행히 티베리우스가 상황을 눈치채고 조용히 대기실 쪽으로 향했다.
지나치는 티베리우스에게 눈으로 고맙단 인사를 하고는 알현 홀을 살폈다.
아이란 공주 뒤쪽으로 터번을 쓴 근육질의 순혈 뱀파이어 무사들과 아마도 수행원일 굴곡이 굉장한 몸매와 예쁘장한 얼굴을 지닌 인간 여자들이 병풍처럼 둘러 서 있었다.
한편, 그들을 응대해야 할 이 왕국의 외교국 관리들은 불룩한 배를 내보이며 벽에 줄줄이 붙어서 있었는데 온 이들이 모두 낯선지 표정들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저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는 광경이었지만 공주의 뒤에 선 인간 여자들이 안 보는 척하면서 아주 빠르게 쓱, 가벼운 시선으로 주변을 살피는 것이 눈에 딱 들어왔다.
‘공주가 달고 온 수행원들은 좀 독특하네. 암시장에서 마주쳤다면 국경 수비대에서 가끔 보내던 첩자라 생각했을 것 같아.’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리처드 레오폴드가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슈발리에들이 슬쩍 자리를 지켜줬고 리처드 레오폴드는 옥좌가 놓인 단상 밑까지 걸어와 재상과 맞은편에 섰다.
다행히 화가 좀 풀린 건지 표정이 평온했다.
스칼렛은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러고 있는데 루키우스가 나와 옥좌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마자 아이란 공주가 기다렸다는 듯 활짝 웃더니 두 팔을 벌려 우아하게 절을 하며 말했다.
“페란의 술탄 아흐메드의 딸인 아이란이라고 합니다. 여왕을 뵙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서서는 루키우스를 흘끔거리며 말을 이었다.
“제가 이곳에 온 건 여왕님께 간절한 청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스칼렛은 어째 분위기가 수상쩍다 싶었지만,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하기도 뭐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보세요. 아이란 공주.”
“저는 그러니까….”
아이란 공주는 매우 긴장한 듯 하얀 볼을 발갛게 물들이더니 두 손을 꽉 잡으며 용감하게 외쳤다.
“루키우스 아툼 엔네야드 경을 제게 주셨으면 합니다!”
스칼렛은 숨을 들이켰고, 알현실에는 침묵이 흘렀다.
루키우스가 스칼렛의 애인이란 사실은 궁의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자고로 여왕의 유일한 기쁨에 대해 모두가 묵인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다 보니 모두의 표정이 곤혹스러웠다. 기뻐하는 건 체터필드 대공과 리처드 레오폴드뿐이었다.
아이란 공주는 제가 한 말에 스칼렛이 침묵하자 당황했는지 보물상자를 손짓하며 말을 이었다.
“이것은 술탄께서 마련해놓으신 제 지참금입니다. 이걸 드릴게요. 이 정도로 부족하다 하시면 술탄께서 두 배로 드리겠다 하셨습니다.”
“아이란 공주님! 전….”
루키우스가 황당했던지 앞으로 나서려 했다. 스칼렛은 손을 들어서 막고는 아이란 공주에게 물었다.
“공주님. 루키우스 섭정은 소나 말이 아닙니다. 거금을 준다고 사고파는 가축이 아니에요.”
“이 나라는, 이 나라는 루키우스 오라버니에게 저주를 걸어 꼭두각시 인형처럼 부리잖아요! 그게 뭐가 다르죠?”
아이란 공주의 당찬 목소리에 스칼렛은 현기증을 느꼈다.
아무리 둘러대려 해도 순혈 뱀파이어를 강제복종 시켜 주인인 귀족이 제 입맛에 맞게 마치 말이나 소처럼 다루는 건 진실이었다.
게다가 바로 그 때문에 리처드 레오폴드와 결혼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러자 아이란 공주는 신이 나서 더욱 크게 떠들었다.
“주변국에서 왜 이 나라를 그냥 지켜보는지 알긴 아세요? 바로 엔네야드가 때문이에요.
우리 순혈 뱀파이어들은 혈족을 무엇보다 중시하기 때문에 참고 있어요. 당신들이 엔네야드가를 인질로 잡지 않았다면 진즉 이 나라는 박살 났을 거라고요!”
그런데도 스칼렛은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술을 깨물며 숨을 들이켰다.
솔직히 인질이란 말이 맞았다. 이것저것 따지느라 아마칼리 여왕의 피를 루키우스에게 건네주지도 못하면서 잡아둘 생각만 하고 있으니 정답이었다.
‘게다가 그를 두고 결혼까지 고민 중이면서.’
갑자기 울컥해 눈시울이 붉어졌다. 필사적으로 입술을 짓씹으며 눈물을 참는데 아이란 공주가 두 손을 모으며 애원했다.
“제발 여왕님. 난 당신이 좋은 분인 걸 알고 있어요. 그러니 부디 루키우스 오라버니를 제게 주세요. 페란의 술탄께선 대환영이라고 하셨어요. 따로 영지도 주신다고 하셨다고요. 그리고….”
줄줄 이어지려던 말은 루키우스가 앞으로 불쑥 나서며 외친 말에 의해 끊어졌다.
“그만하십시오. 아이란 공주님. 외교 결례입니다.”
아이란 공주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더니 시무룩한 얼굴로 우물거렸다.
“오라버니는 정말 너무하세요. 오죽하면 제가 달려왔겠어요. 그 마음도 모르시고….”
그러자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던 체터필드 대공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공주님. 루키우스 엔네야드 경은 본래 제 풋맨이자 시종 무관이었답니다. 제가 잠시 여왕님을 보위하라 빌려드린 거죠. 그러니 저와 이야기를 따로 나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칼렛은 기막혀 옥좌를 내리치며 외쳤다.
“재상 체터필드! 루키우스 엔네야드 경은 내 섭정입니다! 그리고 빌려주다뇨. 조금 전 아이란 공주의 말을 듣고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전 그냥 사실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체터필드 대공은 히죽거리며 대답하더니 알현실을 둘러봤다. 마치 동의를 구하듯. 그러자 리처드 레오폴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여왕 폐하. 재상의 주장은 정당합니다.”
스칼렛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저 둘이 서로 적일 거로 생각하고 레오폴드 공작을 섭정으로 앉힌 내가 미친년이지.’
하지만 여기서 물러섰다가는 루키우스가 정말 가축처럼 팔려갈 판국이라 가만있을 순 없었다.
스칼렛은 살며시 눈을 뜨곤 옥좌에 편안하게 등을 기대며 한쪽 다리를 보란 듯이 꼬고는 아이란 공주를 지긋이 내려다봤다.
암시장 살롱 마담들이 신분만 믿고 젠체하는 귀족들의 기를 꺾을 때 취하던 바로 그 표정과 동작이었다.
과연 통했는지 아이란 공주는 숨까지 죽이며 두 손을 조몰락거렸다. 마치 어린 시절 나쁜 일을 저지르곤 엄마에게 들킬까 봐 초조해하던 스칼렛처럼.
그러자 문득 엔네야드가의 원로장이 아이란 공주더러 이 나라에 발을 들이지 말라 했다던 루키우스의 귀띔이 떠올랐다.
이제 보니 그 이유가 외교상의 분쟁을 염려해서였나 보다.
그러자 답이 나왔다.
“아이란 공주. 하나만 묻죠. 아까 전부터 계속 술탄의 약속에 대해 말하는데 당신 어머니께선 뭐라 하시던가요?”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일부러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네? 어머니요!”
아이란 공주는 정곡을 찔린 듯 숨을 꼴깍 삼키더니 의연한 척 대답했다.
“당연히 어서 데려오라 하셨어요. 그분은 루키우스 오라버니를 무척 예뻐하시거든요. 비록 고모와 조카 사이지만 친아들처럼 귀애하셨다 하셨어요.”
“흠- 그렇다면 당신의 외숙부께서 제게 한마디라도 귀띔하셨을 것 같은데 이상하네요.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거든요.”
“어, 어느 외숙부님이요?”
“엔네야드가의 대학자이신 헤레이스 박사님이요. 그분이 아마칼리 여왕사에 있어서 전문가시랍니다. 이모저모로 잘 배우고 있죠.”
스칼렛이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늘어놓자 옥좌 옆에 서 있던 루키우스가 웃음을 참으려는 듯 흠, 짤막한 헛기침을 했다.
순간적으로 바라보고 시선을 맞출 뻔했지만, 가까스로 못 들은 척하며 아이란 공주에게 가볍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두 분이 서로 만난 지도 오래겠군요. 박사님을 당장 불러들이도록 하죠. 사랑하는 조카님이 오셨다고 하면 바로 달려오실 테니. 아예 당신의 큰 외숙부도 부를까요?”
“헉! 큰 외숙부님은…. 나중에 아주 나중에 뵈어도 될 것 같은데요.”
“그럼 안 되죠. 있다 저녁에 열릴 환영 만찬에 두 분 다 모시도록 할게요. 행복한 상봉을 위해.”
“아뇨. 아뇨. 정말로…. 안 그러셔도 되는데.”
아이란 공주는 우물쭈물하며 뒤로 물러서더니 냉큼 절을 하며 말했다.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여왕님. 환영 만찬은 안 하셔도 돼요. 제가, 제가 배탈이 나서요.”
그리고는 도망치는 공주를 향해 스칼렛은 크게 외쳤다.
“어머나. 이 보물들을 죄다 박사님께 보여드려야겠네. 아주 좋아하시겠어.”
그러자마자 막 알현실 출입문을 나서던 공주가 뒤따르던 호위대에 울먹이며 말했다.
“상자를 모두 거둬 와라.”
명령과 동시에 공주가 거느리고 온 우람한 근육질의 호위 무사들이 뛰어나와 상자를 척척 닫더니 하나씩 어깨에 짊어지고 빠르게 빠져나갔다.
인간이라면 감당하지 못할 무게였지만 역시나 단련된 순혈 뱀파이어 무사들은 급이 달랐다. 이내 상자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자 체터필드 대공이 잔뜩 구겨진 얼굴로 말했다.
“여왕 폐하. 정당한 제 권리를 침해하시는군요.”
스칼렛은 아주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재상. 조금 전 공주의 말을 콧구멍으로 들으셨습니까? 주변국에서 함부로 침략하지 못하는 이유가 엔네야드가 덕분이라면 당주인 루키우스 섭정은 이 나라 최고의 병기입니다.”
체터필드 대공의 입이 떡 벌어졌다.
리처드 레오폴드가 그다음에 이어질 말을 예측한 듯 말릴 듯 입을 열기에 스칼렛은 잽싸게 덧붙였다.
“만약 그 병기를 함부로 유출하거나 제멋대로 다룬다면 그건 곧 반역죄로 다스릴만합니다. 아무래도 이걸 공론화시켜 명시를 해야겠습니다.”
리처드 레오폴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공의 얼굴이 벌게졌다.
관리들과 슈발리에들을 비롯해 순혈 시종들이 즐비하다 보니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지만 속으로 욕설을 퍼붓고 있다는 것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다.
스칼렛은 대공을 향해 싱긋 웃어 보이고는 옥좌에서 일어섰다.
“공주가 떠났으니 더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겠군요. 다들 물러가세요.”
***
대기실로 돌아온 스칼렛은 제 심장이 쿵쿵 뛰어대는 걸 알았다. 아무리 태연한 척하려 해도 몸은 체터필드 대공을 상대할 때마다 바짝 긴장하며 소름 돋아 했다.
그걸 알아차린 건지 널찍한 가슴이 등 뒤에서 폭 감싸더니 두꺼운 팔뚝이 허리에 감겼다.
“마이 퀸. 지난달에는 절 섭정으로 삼으시더니 이젠 나라의 최종병기로 만드시는군요.”
놀리는 목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입술이 목덜미에 와닿았다.
스칼렛은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억지인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당신을…. 소처럼 팔아버리고 싶진 않았으니까.”
“섭정으로서의 의견을 드리자면 억지가 아닙니다. 실제로 엔네야드 가문이 이 나라의 종으로 묶여 있기에 전쟁 억제력이 유지되는 거니까요.
과거 엔네야드가의 순혈 뱀파이어를 섭정으로 삼았던 건 바로 그런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그걸 공론화시키는 건 참아주세요. 이런 건 관습의 영역에 남겨두는 것이 좋거든요.”
“…개인적인 의견은요?”
“스칼렛. 날 위해 싸워줘서 고맙습니다. 아이란 공주는 올해 스무 살이긴 하지만 기저귀를 차고 있을 때부터 봐와서 그런지 제게는 어리디어린 동생일 뿐이라서요.”
달콤한 목소리와 함께 목덜미에 키스가 몇 번이고 쏟아졌다.
스칼렛은 이대로 녹아버리고 싶었지만, 아이란 공주의 진실한 외침이 여전히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를 잡아뒀으니 죽어도 리처드 레오폴드와의 결혼은 못 할 짓이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야.’
그렇게 마음을 정한 스칼렛은 살며시 읊조렸다.
“루키우스….”
“왜 그리 애절하게 부르십니까?”
“할 말이 있어요.”
“뭡니까?”
이제 키스는 귓등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못 참겠다는 듯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저기 나 당신 아이를 가지고 싶은데요.”
그러자마자 키스가 뚝 멎었다. 그러더니 아무 말도 없었다.
스칼렛은 머쓱해져 천천히 돌아섰다.
루키우스의 얼굴이 창백했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요? 당신 아이라면 까무러칠 정도로 예쁠 것 같은데.”
하지만 말도 없이 루키우스는 기다란 속눈썹이 천천히 위아래로 우아하게 움직였다.
“루키우스. 순혈 뱀파이어와 인간 사이에 아이를 가지는 게 몹시 어렵다는 건 알지만 방법을 찾아보기로 해요.”
스칼렛이 애원하듯 말하자 루키우스가 숨을 들이켜더니 물었다.
“혹시 리처드 레오폴드에게 청혼받았습니까?”
스칼렛은 미간을 구겼다. 정말이지 이 남자는 왜 이리 눈치가 빠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 있는데 루키우스가 터트릴 듯 강하게 끌어안더니 소곤거렸다.
“스칼렛. 순혈 뱀파이어의 비밀을 하나 알려드리죠.”
“뭔데요?”
“순혈 뱀파이어와 인간 사이에 아이가 생길 확률이 낮은 게 아닙니다. 우린 아이를 만드는 씨앗을 내보낼지 말지를 조정할 수 있어요. 여인의 가임기와 맞아떨어지면 임신은 쉽습니다.”
“정말요! 그럼 임신시켜 줘요!”
스칼렛이 반색을 하며 외치자 루키우스가 허탈하게 웃더니 들릴락 말락 작디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하아- 이 야생마를 정말 어쩌면 좋을까?”
그리고는 그녀를 놔주더니 시선을 맞췄다.
“안 됩니다.”
“왜 안 돼요?”
“아침에도 말했지만 그렇게 되면 1년 동안 아무와도 결혼할 수 없습니다. 현재 당신이 미혼이기 때문에 많은 귀족가에서 부군의 자리를 노리고 얌전히 당신 말을 따르는 거라고요.”
“그렇다면 내가 레오폴드 섭정과 결혼해선 안 되겠네요. 그들이 다 떨어져 나갈 테니까.”
스칼렛의 단언에 루키우스는 쓰게 웃었다.
“당신 말대로 레오폴드 섭정이 체터필드 대공의 아들이라면 그와의 결혼이 당신의 살길입니다. 적어도 리처드 레오폴드가 당신에게 반해 있는 건 사실인 것 같으니.”
“전에는 그들이 적이라며 경계하라고 조언하더니 지금은 왜 이래요?”
“당신이라면 그들을 체스판의 말처럼 움직여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요.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내가 지켜본 바로는 충분히….”
그렇게 대답하던 루키우스는 손으로 거칠게 머리를 헝클며 입을 꾹 다물었다. 눈빛이 깊어지는 걸 보니 짙푸른 하늘에 비가 내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토록 괴로운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봐서 스칼렛은 한숨을 폭 내쉬고는 물러섰다.
“알았어요. 일단 가죠. 티베리우스가 무슨 일인가 하고 달려오기 전에.”
그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미안합니다. 스칼렛. 내가 이런 못난 남자라….”
문을 여는데 등 뒤에서 루키우스의 슬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칼렛은 울고 싶어졌지만 그랬다간 루키우스를 더 슬프게 만들 것만 같아 꾹 참고는 문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몹시도 몹시도
울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