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오후의 피크닉 (11/16)

10. 오후의 피크닉

루키우스는 스칼렛을 데리고 동궁 2층에 있는 시종 무관실로 들어섰다. 무도회 때문인지 오늘은 아무도 머무는 이가 없는 듯 거실에 딸린 두 개의 방 너머는 인기척이 없었다.

그렇다 해도 문 열면 바로 보이는 거실은 위험했다.

루키우스는 당장에라도 스칼렛을 덮치고 싶은 기분을 누르며 집무실로 들어섰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문을 닫아걸자마자 책상에 그녀를 떠밀어 엎드리게 했다.

“스칼렛, 좀 거칠게 해도 이해해요. 당신이 춤추는 걸 지켜보며 좀 많이 흥분했거든요.”

혹시라도 도망칠까 다정하게 읊조리면서도 그의 손은 스칼렛의 드레스를 걷어 올리고 있었다. 보기에는 몸선을 따라 흐르는 머메이드 라인 스커트였는데 밀어 올리니 숨어 있는 부분이 드러나면서 플레어로 변해 걷어 올리기가 무척 쉬웠다.

이내 아까 그를 몹시도 흥분시켰던 살이 다 비치는 검은색 망사스타킹이 드러났다. 설마하니 이런 걸 신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던 터라 눈을 의심했는데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여왕 중 이런 파격적인 스타킹을 신은 건 당신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게 읊조리며 망사스타킹을 손으로 잡아 뜯어 벌렸다. 쭉, 찢어지며 하얀 레이스 속옷에 싸인 탐스러운 엉덩이가 드러났다.

흣!

스칼렛이 무척 놀란 듯 짤막한 비명을 내질렀다.

루키우스는 사과의 말을 하려 했지만, 혀가 움직이질 않았다. 구멍 난 까만 스타킹과 하얀 피부가 어우러지니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야해 보였다.

“씨발. 이건 진짜….”

당장에라도 사정할 것 같은 느낌에 괴로워하며 황급히 바지를 열었다. 오는 길에 이미 잔뜩 발기한 성기가 끈적한 액을 흘리며 성을 내고 있었다.

예의 바르게 대할 여유가 부족해 그대로 속옷을 찢듯이 끌어내렸다.

“스칼렛. 미안합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의 한쪽 허벅지를 책상 위로 확 밀며 그 사이로 파고들었다.

오는 길에 그와 마찬가지로 흥분이라도 한 건지 다리 사이로 다디단 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귀두를 살짝 밀어 넣으니 따뜻하고 축축한 질이 휘감겨오며 온몸이 저릿했다.

“후우… 젠장. 이러면 진짜 안 되는데…”

자신을 야단쳤지만 그를 기다렸다는 듯 질구가 오물거리는 느낌에 몸이 제멋대로 반응했다.

그대로 뿌리 끝까지 푹 쑤셔 넣자 질벽이 성기에 찰싹 달라붙어 움찔거렸다.

기절할 것처럼 달콤한 감각에 뒤로 빼내자 아쉬운 듯 오물거리며 다시 삼키려고 쭉쭉 빨아댔다.

“하아. 씨발…”

루키우스는 더는 참지 못하고 격렬하게 그녀 안을 오가며 조여무는 감각을 탐했다. 정말 다행히도 고통보다는 괘감이 더 강한지 스칼렛이 허리를 비틀며 안달을 해댔다.

하읏!

신음조차 감미로워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성기처럼 단단해진 고환이 그녀의 부드러운 엉덩이를 때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쫙쫙 빨아댄다 싶더니만 이내 찔걱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후욱. 후욱-

점점 몸이 달아오르고 숨이 달아올라 전신 질주라도 하는 것처럼 숨이 터져 나왔다. 송골송골 이마에 땀이 맺혀 스칼렛의 몸 위로 떨어져 내렸다.

하반신만 드러냈을 뿐 여전히 상반신은 고아한 검은 레이스 드레스로 덮여 있어 아름다웠다.

솜씨 좋게 틀어 올린 새빨간 머리와 그 아래로 살며시 드러나는 하얀 목덜미까지 눈이 부셨다.

루키우스는 참지 못하고 엎드려 그녀의 목덜미 뒤에 이를 박았다.

“아으으으으….”

스칼렛이 그대로 자지러졌다. 그의 성기를 꽉 움켜쥐며 쭉, 빨아들이는 감각이 더욱 강해졌다.

이제는 넣고 뺄 여유조차 사라져 깊숙이 찔러넣고 허리를 흔들었다. 위아래로 마구 흔들어대니 스칼렛이 교성을 질러댔다.

엄청난 쾌감이 밀려오는지 기절할 듯 흘러나오는 교성을 들으며 루키우스는 흡혈했다. 다디단 피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쭉, 빨아 들이켜며 내내 참아왔던 욕망을 터트렸다. 그녀의 몸 안을 흠뻑 적시는 감각이 감미로웠다.

하아-

루키우스는 이를 거두고는 계속해서 몸을 흔들었다.

여전히 흥분감이 어마어마했다. 몇 번 문지르지도 않았는데 사정으로 인해 줄어들었던 성기가 금세 부풀어 올랐다.

“으읏! 너무…. 커.”

스칼렛이 책상 위에 흩어져 있던 서류 더미를 움켜쥐며 울음을 토해냈다. 루키우스는 그녀의 목덜미를 혀로 핥으며 살살 달랬다.

“괜찮습니다. 여왕님. 언제나 잘 받아먹으셨잖습니까?”

그러면서 손을 앞으로 해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레이스 아래로 단단해진 젖꼭지가 느껴졌다.

문지르다 보니 입안에 침이 고였다. 마치 케이크 위의 딸기처럼 스칼렛의 젖꼭지는 흡혈할 때마다 세상 진귀한 것을 빨고 있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후우….”

한계까지 발기했다는 느낌이 오자 루키우스는 몸을 연결한 채 스칼렛을 확 돌려 책상 위에 바로 뉘었다.

“루키우스… 조금만…조금만 쉬었다가…. 제발.”

스칼렛이 헐떡이며 말했지만, 루키우스는 대답 대신 몸을 숙여 레이스 위로 발기한 그녀의 젖꼭지를 이로 갉아댔다.

하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그의 손에 가득 찰 정도로 탐스러운 가슴을 보고 싶어졌다.

“이 드레스 다시 입으실 일이 있을까요?”

루키우스는 정중하게 물었다.

“입지 않아도 찢는 건 안 돼요.”

스칼렛이 힘겹게 일어나 앉더니 제 손으로 드레스를 벗었다.

루키우스는 그녀의 엉덩이를 손으로 꽉 눌러 하반신을 깊숙이 이은 채 천천히 허리를 흔들며 그 광경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마치 선물 상자를 열어보는 기분이었다.

가느다란 팔이 열심히 움직이더니 그를 환장하게 만드는 하얀 목덜미와 봉긋한 가슴이 드러났다.

그 뒤로 가느다란 팔과 군살 하나 없이 납작한 배가 어서 탐해달라는 듯 등불이 뿜어내는 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하지만 하반신은 여전히 연결된 상태라 허리까지 내린 게 다였다.

“루키우스. 일단 좀 빼줘요.”

스칼렛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말했지만, 루키우스는 이미 한계였다.

“미안해요. 여왕님. 하지만 더는 못 참겠군요.”

거칠게 그녀를 책상 위에 누이며 쫑긋 선 젖꼭지에 이를 박았다.

아읏-!

스칼렛이 허리를 휘며 안달을 해댔다. 그녀 안이 달달 떨리며 그의 성기를 삼킬 듯 우물거렸다.

그녀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강하게 잡아 쥐고는 미친 듯이 날뛰었다.

“망가져… 이러다 망가질 것 같아….”

스칼렛이 울며불며 애원해대기에 멈추려 했지만, 붉어진 눈가를 본 순간 눈이 홱 돌았다.

분명 책상 위에서 하고 있었는데 정신 차려 보니 그 옆에 놓인 소파 위였다.

소파 팔걸이에 스칼렛을 엎어놓고 빼지도 않고 미친 듯이 흔들어대며 사정을 하고 나서야 흥분이 좀 가라앉았다.

“이거 내가 너무 거칠게 해댔군요.”

무척 미안해하며 성기를 빼내고 보니 그녀의 음부에서 질펀하게 싸지른 정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걸 보니 다시 속절없이 성기가 빳빳하게 일어섰다.

저도 모르게 손으로 성기를 만지작거리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고환까지 뻐근해지며 그녀를 살살 달래 다시 행위를 이어갈 욕심이 확 부풀어 올랐다.

그런 줄도 모르고 스칼렛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더니 완전히 구겨져 허리에 걸려 있는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는 그대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등불이 뿜어내는 부드러운 빛이 그녀의 나신 위로 내려앉았다.

그 잠깐 사이 그가 만들어낸 잇자국이 가슴 부위에 빼곡했다. 그에게 흔들리며 저절로 풀린 땋은 머리가 아무렇게나 흘러내렸는데 그마저도 예뻤다.

그를 환장하게 만들려는지 소파 아래로 떨어진 한쪽 다리와 등받이에 얹힌 다리 사이로 새빨간 속살이 드러났다.

마구잡이로 문질러져서인지 볼록 선 클리토리스가 먹음직해 보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스칼렛은 제 팔로 눈가를 가린 채 교성을 지르느라 팍 쉰 목소리로 읊조렸다.

“오늘 당신 짐승 같아요. 세상에 어떻게 네 번을 연속으로…. 암시장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루키우스는 아주 천천히 다가갔다. 혹시라도 도망갈까 봐 매우 조심스럽게. 하지만 그녀 다리 사이에 자리 잡고 앉자 더는 거칠 것이 없었다.

“이제 푹 쉬셨죠? 마이 퀸.”

스칼렛이 놀란 듯 팔을 내리며 바라봤다. 녹음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어둑한 빛을 뿜었다.

루키우스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활짝 웃어 보이고는 쑥, 제 성기를 밀어 넣었다. 동시에 엎드리며 하얀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아응-!

다디단 교성이 귓가를 울렸다.

***

스칼렛은 목이 너무 말라 무거워진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이미 아침인지 창을 통해 들이치는 햇볕이 따가웠다.

눈부셔하며 옆을 보니 사이드 테이블 위에 물이 가득 담긴 물잔이 놓여 있었다. 그걸 들고 단숨에 들이켜고 나니 저절로 만족스러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

그러면서 둘러보니 모든 것이 너무 낯설었다. 가림막도 없었고 단순한 옷장과 책상이 놓인 것이 전부였다. 방 크기도 본가에 있는 자신의 방만 했다.

여기가 어딘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다 문득 옆에 누워 있는 루키우스를 보았다.

곤히 잠든 얼굴이 무척 아름다웠다. 그제야 어젯밤 그와 함께 동궁의 시종 무관실로 왔던 것이 떠올랐다.

‘맞다. 초저녁에 이곳에 와서는 오늘 새벽까지 짐승처럼 몸을 섞었지.’

스칼렛은 이불 위로 드러난 두툼한 승모근과 떡 벌어진 어깨 그리고 자고 있는데도 형태가 분명한 울룩불룩한 팔 근육을 눈으로 훑다가 얼굴을 붉혔다.

오늘 새벽 더는 못 하겠다고 온 힘을 다해 그를 깨물었는데 아무래도 그게 팔뚝이었던 모양이었다.

또렷하게 남아 있는 작은 치열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어젯밤은 폭풍이었다. 집무실 책상이랑 소파에서 몸을 섞고 난 뒤 욕실에서 씻겨준다며 데리고 가더니 또 덮쳤다. 그런 뒤 침대에 와서 또 했다.

너무 버거워 울음을 터트렸더니 달래준다며 음부를 인정사정없이 빨아댔다. 물론 그러고 나서 또다시 몸을 겹쳐야만 했다.

결국 견디다 못해 기절하듯 잠드는데 자장가처럼 루키우스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인간 여인의 체력은 약해도 너무 약하군요.”

그런데도 몸에 끈적이는 감각이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수건을 적셔다가 닦아준 모양이었다.

“이러니 내가 화를 못 내지.”

스칼렛은 쉰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침대에서 내려서려 했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리며 다시 주저앉았다.

그러자마자 두꺼운 팔뚝이 다가와 허리를 그러 안으며 뒤로 끌어당겼다.

“스칼렛. 몸은 좀 어떻습니까?”

루키우스가 잠에 취한 목소리로 물었다. 스칼렛은 그대로 그의 옆구리에 드러누우며 고개만 돌려 눈을 맞췄다.

새벽까지 욕정을 품어 어둑하던 짙푸른 눈동자가 구름 걷힌 듯 맑고 청명했다.

“당신은 잘 잤어요?”

“아주 푹 잤습니다. 지난 다섯 달 동안 이렇게 푹 잔 건 처음입니다.”

루키우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하더니 일어나 앉으며 스칼렛을 제품에 그러 안고는 목덜미에 코를 비비적댔다.

“오늘은 일정이 없으니 나랑 같이 있어요. 시종 무관에게는 이미 말해뒀습니다.”

순간 스칼렛의 머릿속에 어제 오후, 서궁의 가장 높은 첨탑에 올랐을 때가 떠올랐다.

수많은 사람이 여왕 만세를 외치며 붉은 꽃다발을 흔들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하얀 꽃다발을 흔드는 몇 명이 있었다.

처음에는 신기해하며 바라봤는데 이내 꽃다발을 든 이들이 입고 있던 망토를 젖히며 얼굴을 드러낸 순간 앤과 마크를 비롯한 동생들이 보였다.

오랜 세월 함께 지내와서인지 정말 재밌게도 손톱보다도 작은 얼굴인데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스칼렛은 너무 기뻐 두 팔을 번쩍 들고 펄쩍 뛰었고, 동생들은 스칼렛이 알아봤다는 걸 바로 눈치채고는 똑같은 동작으로 펄쩍펄쩍 뛰었다.

덩달아 사람들까지 두 손을 번쩍 들고 뛰어대는 통에 광장이 쿵쿵, 요란하게 울렸다.

여.왕.만.세!!!!!

스칼렛은 아차 싶어 동작을 멈추며 뒤를 흘끔 보았다.

천만 다행히도 루키우스와 티베리우스는 뭔가 심각한 이야기에 빠져 있었고 다른 슈발리에들은 저들끼리 수다를 떠느라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스칼렛은 안도하며 다시금 동생들을 바라봤고, 그 애들은 흰 꽃다발을 이리저리 움직여 몇 개의 기호를 만들어 보였다.

암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끼리 손님 몰래 정보를 주고받기 위해 쓰는 신호로 단순했지만 쓸 만했다.

‘앤, 트윙클 카페, 아르바이트로군. 아! 그 짧은 새 일자리까지 구한 거구나!’

스칼렛은 알아들었다는 신호로 팔을 들어 둥글게 휘저었다. 동생들은 바로 알아듣고는 흰색 꽃다발을 하늘로 던져 올리고는 조용히 사라졌다.

그러니 온몸이 무척 쑤셔 온종일 잠만 자고 싶었지만 이건 황금 같은 기회였다.

하지만 루키우스에게 그 사실을 밝히기가 난처했다. 만남 자체가 위험하다며 슈발리에들을 잔뜩 불러와 호위하겠다고 난리를 칠 것만 같았다.

그냥 나중에 슬쩍 귀띔을 해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을 정한 스칼렛은 신난 듯 외쳤다.

“우리 왕궁 밖으로 놀러 나가요. 나 전부터 구경하러 가고 싶긴 했거든요. 너무 바빠 엄두도 못 냈지만.”

루키우스가 입꼬리를 휘며 웃었다.

“체력이 좋군요. 오늘 새벽엔 더는 못한다고 울더니. 뭐, 좋습니다. 둘만 있을 수 있다면 어디든 좋죠.”

“체력이 좋은 게 아니라 이런 날이 없어서 기운 내는 중이거든요! 어쨌거나 그럼 내친김에 아침도 나가서 먹어요. 아, 근데 나 입을 게 없네요.”

“안나 부인에게 챙겨 보내라 했으니 거실에 와있을 겁니다. 그래도 드레스 차림은 안되니 이곳에 드나드는 메이드에게 사복을 좀 빌려오도록 하죠.”

루키우스는 들뜬 목소리로 말하더니 침대에서 내려섰다.

햇살에 순백이지만 여자와는 확실히 다른 단단하고 건강한 느낌의 피부가 매끄러운 빛을 냈다.

스칼렛은 감탄하며 바라보다 근육에 묻혀 묵직하게 드러나는 그의 날개뼈에 손톱자국이 몇 개나 나 있는 것을 보았다.

평소라면 키 차이 때문에 닿지도 않을 높이였지만 욕실에서 벽에 등을 기댄 채 그에게 탐해지며 만든 게 분명했다.

파고드는 힘이 너무 엄청나 부서질 것 같은 감각에 그의 등을 마구 긁어댔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후으… 왜 이렇게… 조이는 겁니까? 날 터트리고 싶어서 그…래요?’

미친 듯이 신음하던 루키우스의 목소리도.

“나의 여왕님. 고 자그마한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대단히 궁금하군요.”

바지 단추를 잠그다 말고 고개 돌려 바라보며 루키우스가 물었다.

“알면 다쳐요.”

스칼렛은 황급히 머릿속 기억을 날려버리고는 최대한 뻔뻔한 표정으로 말했다.

루키우스는 풋, 가볍게 웃더니 면으로 만든 헐렁한 셔츠를 빠르게 걸쳤다. 그리고는 다가와 볼에 입을 맞추더니 소곤거렸다.

“욕실이 어딘지는 기억하죠? 가서 씻고 있어요. 옷을 빌려오도록 하죠.”

그리고는 나가 버렸다.

스칼렛은 기지개를 쭉, 켜고는 고개 돌려 창밖을 내다봤다.

동궁 2층이라더니 창밖으로 늦가을의 정취가 묻어나는 붉은 물이 든 단풍나무가 한가득 보였다. 그렇게 가려진 나무 사이로 언뜻 왕궁을 두른 높은 성벽과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아름다웠지만 어쩐지 새장 같은 느낌이다.

“새장 맞지. 루키우스의 처지를 떠올리면 확실히 새장이야.”

혼잣말하고 나니 어젯밤 대공에게서 들은 악독한 말이 떠올라 심장이 저릿했다. 어제 그러고는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은 채 가버렸으니 알아서 양위하라는 의미일 거다.

스칼렛은 그 생각을 곱씹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권력욕에 취한 나머지 체터필드 대공은 가장 기본적인 걸 잊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가 처음부터 여왕 따윈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걸.

그저 원하는 건 가족의 안위뿐 이었다. 그들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휘둘리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래서 그 언덕에서 리처드 레오폴드에게 섭정직을 제안한 거였다. 적당한 때를 봐서 그에게 양위하기 위해.

그런데 그가 원하는 건 루키우스의 말에 따르면 왕관이 아니라 목걸이였다.

“대체 이 안에 든 게 정확히 뭘까?”

스칼렛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다가 브라운 교수가 해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오르콘이라는 희귀 금속으로 만들어졌으니 불에 비춰보라던.

루키우스는 사방에 눈이 달렸으니 절대 시도도 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이곳은 현재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들어올 때를 떠올려보면 비밀방이 분명했다.

스칼렛은 침대에서 내려서 허리에 힘을 주고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여전히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시간이 없었다.

한쪽에 젖혀진 커튼을 힘을 주어 확 친 뒤,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인 등잔의 불을 켰다. 목걸이를 벗어서는 등잔 앞에 가져다 댔다.

불투명해 보이던 도자기가 반투명해지더니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은 깔끔한 흰 벽에 손으로 쓴 듯한 우아한 필기체가 떠올랐다.

-아타 논 베르다 수칼레 아르카디움-

순간 맥이 탁 풀렸다. 뭔가 대단한 게 들었을 줄 알았는데 고작 아마칼리 여왕의 묘비명이 새겨져 있을 줄은 몰랐다.

“아! 그래서 아버지가 이 안에 아마칼리 여왕의 피가 담겼다고 한 거구나.”

어쨌거나 안에 든 게 뭔지는 알았다고 씁쓸해하고 있는데, 문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스칼렛은 잽싸게 목걸이를 다시 한 뒤 등불을 끄고는 몸을 던져 커튼을 젖혔다. 그런 뒤 욕실로 뛰어가려고 다리를 놀리는 순간 허리에 힘이 쑥 빠졌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자마자 출입구로 쓰이는 서가가 옆으로 밀리며 루키우스가 나타났다.

“저런!”

놀랍도록 빠르게 침대에 들고 온 옷을 던지더니 얼른 다가와 그녀를 안아 들었다.

“다치지 않았습니까?”

스칼렛은 너무 창피해서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루키우스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제가 목욕 시중을 들어야겠군요.”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그러안으며 스칼렛은 기겁했다.

“됐어요. 루키우스. 나 혼자 충분히 씻을 수 있어요.”

“또 넘어지면 곤란합니다. 밖에서 마음 졸이고 있느니 제가 씻겨드리는 게 낫죠.”

그러더니 스칼렛을 책상 위에 살며시 내려놓고는 옷을 벗어 던졌다.

“당신은 왜 벗어요?”

스칼렛이 눈이 동그래져서 묻자 루키우스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씻다가 젖으면 안 되니까요. 아시다시피 욕조가 없으니 물이 많이 튀거든요.”

순간 스칼렛은 오싹했다.

밤새도록 몇 번이나 본 미소다. 육식수가 제가 찍은 먹잇감이 도망칠까 봐 유혹하듯 뿜어내는 달콤한 미소.

“루키우스. 정말로 나 혼자 씻으면 안 돼요?”

저도 모르게 입안이 말라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으며 애원하자 루키우스가 홀린 듯이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며 말했다.

“안됩니다. 마이 퀸. 제가 아주 잘 씻겨드리죠.”

그리고는 삐죽 솟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몹시도 야살스럽게.

***

쾌청한 날씨였다. 공기는 맑았고 잘 정돈된 길을 따라 서 있는 가로수는 단풍이 들어 아름다웠다.

스칼렛은 루키우스와 손을 꼭 쥔 채 화려하고 다채로운 물건을 파는 상가들이 꽉 찬 거리를 걸어 모퉁이에 있는 아늑해 보이는 카페에서 멈춰 섰다.

오가다 본 카페들이 그렇듯 카페 앞에는 의자와 식탁이 놓여 있었고 벽을 대신하는 칸막이 창들이 다 열려 있어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붉은색과 금색을 주조로 하다 보니 화려했지만 정갈했다.

안쪽에는 주방으로 통하는 문이 그대로 보이는 사각의 바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에는 나이 지긋해 보이는 바텐더가 커피를 내리고 있었고 블랙앤화이트의 메이드 복장을 한 웨이트리스들이 주문한 요리를 가지고 오가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트윙클 카페입니다. 조식을 잘하기로 유명하죠. 궁에서 제대로 구경 온 적도 없으시다면서 이곳을 알다니 놀랍네요.”

그렇게 말하며 루키우스는 노천에 놓인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스칼렛은 맞은편에 앉으며 앤을 찾아 지나치는 메이드들을 흘끔거렸다.

하지만 눈에 띄질 않아 실망하는데, 불쑥 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세요. 손님. 메뉴판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그러더니 메뉴판이 눈앞에 놓였고 스칼렛은 너무 좋아 소리 지르고 싶은 걸 애써 참으며 슬쩍 웨이트리스의 얼굴을 확인했다.

정말 앤이었다. 블랙 화이트의 메이드 복이 몹시도 잘 어울려 무척 귀여웠다.

“손님. 제가 메뉴 추천을 좀 해드릴까요?”

앤 또한 무척 기쁜지 생글거리며 물었다.

스칼렛은 얼른 메뉴판을 펼쳤다.

“네. 추천해주세요.”

앤은 잽싸게 메뉴판의 페이지를 넘겼고 스칼렛은 그곳에 붙어 있는 쪽지를 보았다.

-언니. 화장실 들어가는 문 옆에 창고가 있어. 그리로 와.-

“저희 카페 요리사의 특선 메뉴로 이국의 향신료를 이용해 간을 한 감자를 생크림과 섞어 만든답니다. 숙녀들께선 다 좋아하세요.”

앤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스칼렛이 그 메뉴의 제목을 읽고 있는 것처럼.

스칼렛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이거로 주세요.”

그리고는 메뉴판을 보고 있는 루키우스에게 말했다.

“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나머진 당신이 알아서 좀 주문해줘요.”

루키우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죠. 다녀와요.”

그러면서 미소 짓는데 당신이라 부른 말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스칼렛은 그런 루키우스가 너무 귀여워 옆으로 다가가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자주 좀 나와야겠네요. 달링.”

루키우스가 허를 찔린 듯 눈이 휘둥그레져서 바라봤다. 그 표정이 어찌나 재밌는지 스칼렛은 후후, 작게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언니. 아니, 손님. 어 그러니까 화장실은 음, 건물 돌아가서 있습니다.”

앤이 무척 놀란 듯 말까지 더듬으며 안내를 했다.

들은 대로 건물을 돌아가다 모퉁이에서 흘끔 뒤를 바라보니 루키우스가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짙푸른 눈동자가 어둑어둑했고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는데 기분 탓인지 오싹했다. 그런데 좋아서 오싹한 것이 아니라 뭔가 느낌이 기이했다.

‘평소랑 똑같은데 왜 다른 느낌이지?’

스칼렛은 저도 모르게 팔뚝에 돋은 소름을 문지르고는 고개 돌려 쭉, 걸어갔다.

앤 말대로 조금 더 가니 화장실이 나왔고 그 옆에는 창고로 들어가는 문이 일었다. 미리 열어둔 듯 틈이 있기에 밀고 들어가니 큰 남동생인 마크가 기다리고 있었다.

“스칼렛 누나!”

마크가 펄쩍 뛰며 반겼다.

“마크!”

스칼렛은 마크를 덥석 끌어안으며 외쳤다. 그리고는 조금 물러서서 마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키커 컸구나! 덩치도. 보기 좋다.”

“집에서 레오폴드 성까지 가는 내내 맛있는 걸 잔뜩 먹은 데다 도착해서도 계속 먹어댔더니 키랑 몸무게가 부쩍 늘더라고. 아버지도 놀랍다고 하실 정도로.”

“그런데 어떻게 빠져나올 생각을 했어?”

“레오폴드 공작이 떠나기 전전날이었나? 그 성 주인 아줌마가 공작이 떠나자마자 도망치라고 하더라고. 우릴 인질로 잡아두려고 부른 거라면서.”

“헉! 그 성질머리 고약한 여자가 그런 말을 해줬다고?”

“음. 그 아줌마, 일부러 까탈스럽게 굴 뿐 사실 대개 소심한 분 같던데. 뭐, 그건 그렇고 그 아줌마가 순혈 뱀파이어라는 게 우린 더 충격이었어. 아버진 쓰러지시려고 하더라니까.”

“뭐야!!!”

스칼렛은 기절할 듯 놀라서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마크는 손가락으로 귀를 막는 시늉을 하더니 히죽거리며 말했다.

“역시 누나도 몰랐었구나. 역시 내가 눈치가 빠르다니까.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바로 눈치챘지. 도통 물을 안 마시더라고. 사람 같지 않게.”

“거짓말. 그 사람 공작위까지 지녔던 여인이야. 전대 레오폴드 공작의 정실부인이라고!”

“다들 그래서 내가 몰래 그 아줌마 방에 숨어들어서 피 마시는 것도 확인했어. 그러다 걸려서 도망치란 소릴 들은 거라고. 성에 몹쓸 하인이 너무 많아 몰래 말할 틈만 노리고 있었대.”

“맙소사.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래?”

스칼렛은 현기증을 일으키며 이마를 비비적대다가 그걸 논할 때가 아님을 떠올리고는 마크를 보고 물었다.

“그건 그렇고 여기까지 꽤 먼 거리인데 안 힘들었어?”

“아버지만 힘들어하셨어. 나머진 뭐. 알잖아. 누나. 우리 뱀파이어들이 체력이 좀 좋은 거. 대신 누나가 주고 간 돈은 오는 길에 블러드 팩 사 먹느라 거의 다 써버렸어.”

마크가 꽤 미안해하며 말하기에 스칼렛은 어깨를 툭, 치며 대답했다.

“잘했어. 어차피 탈출비로 쓰라고 준 거니까.”

그러고 있는데 창고 문이 열리더니 앤이 들어섰다.

“언니!”

스칼렛은 앤을 품에 꼭 끌어안고는 등을 토닥였다.

“그래. 고생했다. 덕분에 한시름 놨어. 정말 고맙다.”

그리고는 빠르게 몸을 살피며 덧붙였다.

“너도 건강해 보이는구나. 이거 우리 동생님들 죄다 잘 먹고 지내셨나 보네.”

“덕분에. 근데 언니. 아까 그 남자는 뭐야? 언니 데리러 왔던 대공의 풋맨이라던 순혈 뱀파이어 맞지? 근데 왜 그렇게 살벌하게 굴어?”

“살벌해? 에이, 아냐. 루키우스가 얼마나 다정다감한 사람인데. 생긴 것보다 성격이 더 끝내준다니까.”

“아니야. 언니 가고 난 뒤에 나더러 언니 동생이냐고 집요하게 캐물었어. 내가 아니라고 주문이나 해달라고 하니까 히죽 웃더니 찾았다며 읊조리는데 진짜 무서웠다니까.”

“찾았다고?”

“응. 찾았대. 뭘 찾았는지 모르겠지만.”

앤의 겁먹은 목소리에 스칼렛은 숨을 삼켰다. 갑자기 체터필드 대공이 무도회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물론 믿기지 않겠지. 평소의 녀석은 정중하고 예의 바른 남자니까. 하지만 그 얜 내가 어렸을 때부터 아주 특별한 족쇄에 묶어 놨거든. 먹잇감이 걸리면 킬러로 돌변하게끔.’

순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도망쳐야 해.”

스칼렛은 날카롭게 읊조렸다.

“뭐?”

마크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스칼렛은 황급히 마크와 앤의 손을 양손에 잡아 쥐고는 창고를 나서려 했다.

“너흴 죽이러 올 거야.”

재빠르게 밀던 문이 누군가의 강한 힘으로 확 열렸다.

“마이 디어 스칼렛. 이곳에 계셨습니까?”

루키우스였다. 분명 그였지만 표정도 목소리도 달랐다.

스칼렛의 마음을 다독여주던 따뜻한 파란색 눈동자는 한기로 차올라 얼음처럼 차디찼다. 목소리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 도리어 무서웠다.

“루키우스.”

스칼렛이 울먹이며 읊조리자 루키우스가 히죽 웃으며 손바닥을 내보였다. 그러자마자 칼처럼 날카로운 손톱이 돋아 올랐다.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린 앤이 다리 힘이 풀린 듯 비틀거렸다. 마크가 안 되겠다 싶었던지 앞으로 나서려 들었다.

스칼렛은 앤의 손을 강하게 잡아 쥐고 마크는 뒤로 떠밀며 빈틈을 노리며 외쳤다.

“루키우스. 정신 차려요! 진짜 당신이 그 안에 있는 거 알아. 제발 정신 차려요!”

루키우스는 손톱을 혀로 할짝대며 차갑게 웃었다.

“재밌군요. 진짜 나는 바로 여기 서 있습니다. 뱀파이어란 자고로 이래야죠. 인간에게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대하는 뱀파이어라니 구역질이 치밉니다.”

그러더니 휘두를 때 손을 치켜들며 덧붙였다.

“자. 비키세요. 오늘은 두 사람만 처리하죠. 돌아가서 대공께 싹싹 빌도록 해요. 잘못했다고. 뭐, 내일 하고 싶으면 해도 좋아요. 내일도 두 사람을 찾아내 죽일 거니까.”

“사과, 사과할게요. 지금 가서 시키는 대로 뭐든 할 테니까 우릴 보내줘요.”

“안 됩니다. 마이 디어. 대공은 예상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는 당신의 심장이 고통으로 터져버리기를 원하십니다. 당신 때문에 10년은 늙은 것 같다고 그러시거든요.”

루키우스는 그렇게 말하며 창고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스칼렛은 동생들과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동안 루키우스의 덩치도 몸집도 무척 사내답다고 생각해왔는데 지금 이 순간은 아예 거대한 산이 된 것만 같았다.

“누나. 내가 막을 테니 앤 데리고 도망쳐.”

마크가 악문 잇새로 소곤거렸다.

스칼렛은 대답 대신 쥐고 있는 손을 쭈물거리며 신호를 보냈다. 앤에게도 그랬다.

어린 시절, 암시장에서 일할 땐 몸집이 너무 작아 일당으로 받은 돈을 덩치 큰 녀석들에게 빼앗길 때가 종종 있었다.

그때 셋은 나름 도망치는 방법을 고민해서 만들어냈고 그건 아주 여러 번 셋의 돈을 지켜줬다. 이젠 목숨을 지켜줄 차례였다.

스칼렛은 눈으로 빈틈을 확인하며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하나.

앤이 살며시 무릎을 구부리며 뛸 준비를 했다.

둘.

마크가 이를 부드득 갈더니 몸을 맞췄다.

셋!

스칼렛은 둘의 손을 확 던지듯 놓고는 그대로 몸을 날려 앞으로 슬라이딩을 했다. 마크는 위로 앤은 옆으로 동시에 달려나갔다.

루키우스가 다리 사이로 지나가는 스칼렛 때문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앤과 마크를 놓쳤다.

잽싸게 빠져나간 둘은 미끄러져 나온 스칼렛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는 창고 밖으로 뛰었다.

필사적으로 골목길을 달려나갔다. 하지만 역시나 루키우스는 순혈 뱀파이어였다.

무섭도록 빠르게 달라붙었고 이대로 잡히나 싶은 순간 지나치려던 모퉁이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와 셋과 루키우스 사이를 가로막았다.

퍽!

엄청난 굉음과 함께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돌아본 스칼렛은 왕실수사대장인 앨버트 레오폴드가 우산을 들고 선 것을 보았다. 그걸 휘둘러 머리라도 친 것인지 루키우스는 앞으로 쓰러져 기절한 상태였다.

“루키우스!”

스칼렛은 깜짝 놀라 뒤돌아 달려갔다. 그대로 루키우스에게 다가가 그를 살피는데 마크와 앤이 뛰어와 양팔을 잡았다.

“언니. 뭐 하는 거야. 가야 해!”

“누나. 이러지 말고 가자!”

그러고 있는데 앨버트 레오폴드가 다급하게 말했다.

“마이 퀸.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시크릿 풋맨은 한 번 정한 목표물은 반드시 제거합니다. 그러니 꾀를 써야 합니다!”

그러더니 허둥지둥 코트를 벗었다. 황당하게도 안에 몇 번이나 겹쳐 입고 있었는지 두 개를 벗었는데도 여전히 코트 차림이었다.

“두 분 모두 이걸 입으세요. 어서!”

앨버트 레오폴드가 각각 코트를 건네자 마크와 앤은 받아들긴 했지만 당황한 듯 스칼렛을 바라봤다.

“입어. 빨리! 이 사람 내 부하야!”

스칼렛이 황급히 외치자 동생들이 후다닥, 코트를 걸쳤고 앨버트 레오폴드가 말했다.

“도망치는 척하다가 공격을 받아들이세요. 이 코트에는 특수한 장치가 되어있어서 죽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줄 겁니다.”

앤과 마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고 앨버트 레오폴드는 안됐다는 듯 바라보며 덧붙였다.

“엔네야드 경이 가버릴 때까지 숨을 참는 걸 잊지 마시고요.”

그러더니 스칼렛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저기, 잠깐! 앨버트. 수사관. 이거 좀 놓고….”

스칼렛이 손을 뿌리치려 하자 앨버트 레오폴드는 그녀를 잡아끌며 말했다.

“여왕님께선 저와 가시죠. 괜히 휘말리면 안 됩니다.”

스칼렛은 동생들이 걱정스러웠지만, 루키우스가 깨어날 듯 신음하는 걸 보고는 마음을 돌렸다.

“저쪽 모퉁이에 가 있을게. 상황 봐서 움직여.”

마크와 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스칼렛은 앨버트 레오폴드와 빠르게 그곳을 벗어나 가까운 모퉁이 너머로 몸을 숨겼다. 그러자마자 루키우스가 깨어났는지 뜀박질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코앞으로 앤과 마크가 휙, 지나갔고 두어 발자국 뒤에 루키우스가 따라붙었다. 하지만 그저 재미를 위해 거리를 둔 것 같았다.

“아하하하. 달려. 좀 더 빨리 달리라고!”

골목길에 음산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루키우스가 확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칼처럼 날카로운 손톱이 앤과 마크의 등을 갈랐다.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동생들이 넘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스칼렛은 너무 놀라 저도 모르게 달려가려 했지만, 리처드 레오폴드가 꽉 잡으며 말렸다.

“마이 퀸. 기다리세요. 제발. 지금 끼어드시면 동생들은 정말 죽습니다.”

스칼렛은 속이 타올랐지만 애써 참았다. 앨버트 레오폴드의 말이 맞았다. 지금 달려간다고 한들 루키우스를 막을 힘 따윈 없었다.

루키우스가 미친 듯이 웃어대며 동생들의 등을 손톱으로 가르고 또 가르는 것이 보였다. 그러더니 손톱에서 줄줄 흐르는 피를 혀로 맛보고는 퉤, 뱉어냈다.

“더러운 잡종의 맛이로군.”

그러더니 벌떡 일어서선 손톱을 다시 집어넣고는 두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읊조렸다.

“후. 기분 좋군. 그 계집이 사과 따윈 못 한다고 고집을 부려주면 좋은데….”

스칼렛은 입술을 깨물며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삼켰다.

‘체터필드. 이 개자식. 루키우스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얼굴을 붉히고 있는데 앨버트 레오폴드가 소곤거렸다.

“가시죠. 여왕 폐하. 한 바퀴 빙 돌아서 저쪽으로 가면 엔네야드 경도 가버리고 없을 겁니다.”

스칼렛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앨버트 레오폴드와 뒷걸음질 쳐 그곳을 벗어났다.

길을 건너 동생들이 쓰러져 있는 골목길에 서 있는 건물을 크게 돌아 위쪽에서 걸어 내려가니 앤과 마크가 일어나 앉아 끙끙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괜찮아?”

황급히 달려가 보니 둘 다 등이 정말 굉장한 상태였다.

칼처럼 날카로운 손톱으로 얼마나 휘갈긴 것인지 천이 다 찢겨 살이 드러났는데, 그 살 또한 마구 찢어져 뼈가 드러났다.

그런데도 말짱한 얼굴로 그저 좀 아픈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라 신기했다.

앨버트 레오폴드가 다가가 마크의 코트를 벗기기에 스칼렛도 얼른 앤의 코트를 벗겨줬다. 그러고 보니 둘 다 등이 말짱했다.

“흠씬 두들겨 맞은 것 같아.”

마크가 얼굴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스칼렛은 코트를 뒤집어 보곤 방금 본 다 찢긴 등이 그대로 있는 걸 알고는 숨을 들이켰다.

“이거 굉장하네요. 어떻게 이런 걸 다 만드셨어요?”

“엔네야드 경이 쉐도우 슈발리에가 된 것을 보고는 조만간 일이 터지겠구나 싶어 만들어 둔 겁니다. 그동안 여왕 음해 사건을 수사하면서 시크릿 풋맨의 살인기술을 연구해왔거든요.”

“맙소사. 루키우스가 시크릿 풋맨이란 사실을 알고도 나에게 보고하지 않았단 거예요?”

“외람되지만 마이 퀸. 두 분이 연인 사이란 건 왕궁의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증거도 없이 엔네야드 경의 정체를 밝히는 건 무모한 짓이니까요.”

“대체 언제부터 안 거예요?”

“그동안은 그저 짐작이었습니다. 혹시 그제 보고 드렸던 자살하신 전대 여왕님의 쉐도우 슈발리에인 타비우스를 기억하십니까? 살해당할까 봐 걱정돼 체포했다고 말씀드렸었지요.”

“기억나요. 그런데요?”

“타비우스가 어제 오후 시크릿 풋맨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제가 달려갔을 땐 가까스로 숨이 붙어 있었는데 시크릿 풋맨의 정체를 말해주더군요.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앨버트 레오폴드가 고백처럼 읊조리는 말소리에 스칼렛은 숨을 삼켰다. 어제 오후 루키우스가 흡혈을 하려다 말고 갑자기 대공이 불러 갔던 일이 떠올랐다.

고작 한 시간 정도 자리를 비웠을 뿐이라 가서 야단이라도 맞고 온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타비우스를 죽이러 갔던 모양이었다.

“맙소사….”

스칼렛은 손으로 제 입을 막으며 밀려 올라오는 울음을 삼켰다. 그러자 앨버트 레오폴드가 씁쓸하게 바라보더니 말했다.

“여왕 폐하. 두 가지 길을 제안하겠습니다. 첫째는 깨어난 엔네야드 경을 제가 체포하는 길입니다. 그 경우 모든 직위에서 해임될 겁니다. 또한 그 분께 본인의 정체를 말해줄 겁니다.

둘째는 여왕께서 이대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엔네야드 경에게 돌아가는 길입니다. 대공을 체포할 기회를 잡을 때까지 제가 가족분들 곁에 머물며 지켜드릴 겁니다.”

“…설마 루키우스가 지금 자신이 한 일을 전혀 기억 못 하는 건가요?”

“제가 분석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엔네야드 경과 시크릿 풋맨은 완벽하게 다른 존재입니다. 꼭두각시 상태라고 해야 할까요? 손만 빌렸을 뿐 진짜 범인은 체터필드 대공입니다.”

“고맙네요.”

“네?”

“고마워요. 앨버트 수사관. 당신이 이렇게 철저하게 수사를 해주지 않았다면 난 이대로 내 가족과 도망쳤을 거예요. 사랑하는 남자를 버려둔 채. 정말 최악의 짓을 했겠죠.”

“여왕 폐하.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전 그저 여왕께서 맡겨주신 제 임무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뭐, 그건 그렇고 돌아가실 거라면 빨리 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앨버트 레오폴드의 권유에 스칼렛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내 가족들을 잘 부탁해요.”

그리고는 눈이 동그래져서 서 있는 마크와 앤에게 말했다.

“난 그만 가볼게. 시종 무관에게 말해서 일요일마다 앤이 일하는 카페에서 조식을 주문배달 시키도록 할 테니 할 말은 냅킨에 적어서 보내.”

“응. 조심해 누나.”

마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내가 안내할게.”

앤이 서둘러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스칼렛은 앨버트 레오폴드에게 조심하라는 눈짓을 해 보이고는 앤과 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

허둥지둥 아까 화장실로 가던 그 골목길로 돌아와 모퉁이 너머를 보니 정말로 루키우스가 그곳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뭔가 대단히 심란한 얼굴로.

‘정말로 기억을 못 하는가 보구나. 세상에. 그동안 몇 번이나 꼭두각시 살인을 해온 걸까. 그 악귀 같은 남자에게 조종당해.’

가슴이 몹시도 아파 입술을 깨무는데 옆에 있던 앤이 놀란 듯 읊조렸다.

“우와. 꼭 다른 사람 같아.”

스칼렛은 숨을 크게 들이켜고는 일부러 씩 웃으며 말했다.

“무서웠겠지만, 이해해줘. 나 정말 저 사람 좋아해.”

“알았어. 언니. 나도 뱀파이언데 꼭두각시로 놀아나는 거야 잘 알지. 가봐. 아까 그 아저씨 말대로 언니가 어딜 갔나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아.”

앤이 등을 떠밀며 말했다.

스칼렛은 미소 지어 보이고는 뛰느라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빗어 내리며 루키우스에게 다가갔다.

“오래 걸렸죠? 미안해요. 예쁜 걸 잔뜩 파는 상점이 있어서 구경하다가 그만.”

“아닙니다.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았어요. 볕이 좋아서 그런지 여기 앉아서 깜빡 졸았습니다. 어째 오래 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그래요? 지금 당신 등짝이 따끈따끈하겠네요. 기대서 누워 있으면 딱 맞겠네.”

“그럼 밥 먹고 근처 공원에 가서 쉬도록 하죠. 풀밭이 잘 가꿔져 있어서 아주 좋거든요.”

루키우스는 그렇게 말하며 음식이 왜 안 나오나 싶은 얼굴로 카페 안을 살폈다. 다행히 앤이 눈치채고 잽싸게 요리를 들고 나타났다.

이내 식탁 가득 둘이 주문한 요리가 놓였다.

페란의 특산품인 진한 장미 티와 진하게 우린 홍차가 각각 스칼렛과 루키우스 앞에 놓였다.

햇살 아래 채소가 듬뿍 들어간 감자 샐러드와 잘 구운 토스트, 오믈렛과 베이컨 그리고 과일과 생크림이 잔뜩 올라간 잘 구워진 와플이 반짝반짝 빛났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 같아서 주문했습니다. 같이 먹죠.”

루키우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와플을 썩썩 썰더니 포크로 작은 조각을 찍어서는 생크림을 듬뿍 찍어서는 내밀었다.

스칼렛은 조금 당황했지만 이런 기회가 흔하지 않을 것 같아 입을 크게 벌려 한입에 받아먹었다.

“바삭바삭, 쫀득쫀득. 여기 조식 맛집 맞네요!”

루키우스는 다정하게 웃더니 와플 조각을 입에 넣고는 씹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우아하게 먹었다.

정말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남자였다. 망국의 왕이라 해도 타고난 품위 같은 것이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루키우스가 풋,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스칼렛. 당신이 그렇게 봐주는 걸 난 좋아하지만, 지금은 식사를 해야 할 것 같군요. 요리가 식어가고 있으니까요.”

스칼렛은 얼굴을 확 붉히고는 입에 든 것을 얼른 삼켰다.

루키우스는 입술을 안으로 말며 웃음을 누르면서 와플을 썰어 다시 내밀었다.

“당신 먹어요. 난 내가 먹을 테니.”

스칼렛은 툴툴대면서도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루키우스는 뿌듯하게 바라보더니 말했다.

“어렸을 때 새를 키우고 싶어 했었거든요. 모이 먹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그래서 지금 나에게 모이를 주고 있단 거예요?”

꿀꺽 삼키며 묻자 루키우스는 이번에는 오믈렛을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죠. 사실 오늘 밤은 기절하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도 있고요.”

순간 스칼렛은 사례가 걸려 쿨럭댔다. 루키우스가 피식 웃더니 한쪽에 놓인 물병을 들어 물을 따라 내밀었다. 그걸 단숨에 들이켜고 나니 무척 개운했다.

비로소 아까 도망치면서 땀을 꽤 흘렸다는 것이 떠올랐다.

갑자기 오싹해졌다.

만약 앨버트 레오폴드가 아니었다면 이러고 앉아 있지도 못했을 거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닌 상태라 해도 도저히 동생들의 피가 묻은 손을 받아들일 자신 따윈 없었을 테니까.

“루키우스. 사랑해요.”

스칼렛은 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루키우스의 눈이 기쁨으로 차올랐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맑은 눈동자가 귀엽고 사랑스럽고 동시에 안타까워서 스칼렛은 살며시 허리를 숙여 새가 쪼듯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정말 사랑해요.”

“나도 사랑합니다. 스칼렛.”

따뜻한 목소리와 함께 그의 커다란 손이 뒤통수를 누르며 굵은 혀가 입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여린 점막을 사납게 훑고 혀가 아플 정도로 빨아대는 아주 격정적인 키스였다.

스칼렛은 사랑받는 감각을 만끽하며 문득 깨달았다.

‘이 남자가 내 피 외에는 삼키지 못하는 것처럼 나 또한 이 사람 없이는 살 수 없을 거야.’

***

공원은 그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거의 몇 년 만에 와봤지만, 초록의 잔디가 구불구불한 능선을 따라 펼쳐졌고 여기저기 아름드리나무가 심겨 있어 그 아래 누워 쉬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루키우스는 근처 상점에서 산 피크닉 매트를 깔고 앉아 벌렁 드러누운 스칼렛에게 무릎베개를 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두 가닥으로 땋아 내린 머리가 그 짧은 사이 마구 헝클어져 있었다. 분명 카페에 앉을 때만 해도 잔머리 하나 나온 것이 없었는데 기이했다.

“머리를 매만져야겠군요. 제가 다시 땋아드려도 될까요?”

정중하게 묻자 스칼렛이 피식 웃더니 말했다.

“우리 지금 연인 놀이 중 아녔어요? 달링?”

“그렇다면 굳이 묻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게 대단히 많겠군요.”

루키우스는 반색하며 허리 숙여 그녀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스칼렛이 입술을 벌리더니 얌전히 그의 혀를 빨아들였다.

다소 진한 키스를 오랫동안 나누고는 고개를 들자 스칼렛이 다시 눈을 감으며 말했다.

“머리나 따줘요. 호색한. 뒤통수 찌르지 말고.”

루키우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키스하다가 반쯤 발기한 것이 그녀의 뒤통수에 닿아 있었다.

“스칼렛. 당신 키스가 너무 야했어요.”

가볍게 말하며 그녀의 머리를 묶은 끈을 풀고는 손으로 살살 머리카락을 빗어 내렸다. 손가락에 와닿는 부드러운 감각은 마치 비단 같아 굉장히 느낌이 좋았다.

스칼렛은 그의 손길이 좋은지 미소를 지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루키우스는 기분 좋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며 그 감각을 즐겼다.

그렇게 완벽한 순간이었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아까 카페에서 스칼렛을 기다릴 땐 깜빡 존 시간이 다소 길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젯밤, 스칼렛의 체향과 혈향에 취해 푹 잔 것이 무려 다섯 달 만이었던 이유는 정체불명의 기면증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이런 식으로 깜빡 졸다가 어느 순간 의식이 끊겨 며칠을 그대로 자버렸다. 몇 년 전에도 이런 적이 있어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다시 재발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번에는 거의 한 달 간격으로 일이 벌어졌다. 다행히도 재상의 시종 무관이다 보니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대공은 그의 기면증에 대해서 관대했고, 빨리 낫기를 바란다며 의사까지 소개해 줬었으니까.

의사는 그가 대공의 풋맨으로 지내느라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 생긴 일종의 신경증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대공의 곁을 떠난 지금은 더는 재발하지 않을 거라 신경도 쓰질 않았는데 아무래도 아닌 모양이었다.

‘제길. 이거 안 좋은걸. 스칼렛에게 미리 이야기를 해두는 게 좋겠어.’

그런 생각에 입을 여는데 누워서 눈을 감고 있던 스칼렛이 툭, 물었다.

“루키우스. 카운테스 레오폴드를 안지 얼마나 됐어요?”

“대공의 풋맨으로 임명된 것이 열다섯 살 때였으니 13년 전이군요. 왜 그러십니까?”

“그 여자에게서 뭔가 이상한 거 눈치 못 챘어요?”

“뭘 말입니까?”

“누가 그러는데 그 여자 순혈 뱀파이어래요. 레오폴드 성에서 사라진 순혈 뱀파이어 이름이 뭐랬죠?”

“헬레나 아비스였죠. 설마 카운테스 레오폴드가 헬레나에게 살해당했고 그녀가 카운테스인 척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게 가능성이 가장 크니까요. 만약 그녀가 헬레나 아비스라면 아들인 리처드 레오폴드는 입을 다물었을 거예요. 이리나 또한 제 언니를 보호하기 위해 뭐든 하려 했을 거고요.”

“이리나를 여전히 착하다 보시는군요. 스칼렛. 나도 드릴 정보가 있습니다. 며칠 전 체터필드 대공의 개인 서재에 이리나가 찾아갔었다는군요. 상당히 뜨거운 사이로 보였다고 합니다.”

루키우스가 소곤거리자 스칼렛은 숨을 삼키더니 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이리나가요? 맙소사. 이리나는 대공에게 고작 아홉 살 때 강간당했어요. 그런데 말도 안 돼.”

“스칼렛. 우리 순혈 뱀파이어는 일찍 성숙해집니다. 아홉 살이라곤 해도 인간으로 치면 15살 정도 될 겁니다. 물론 어리긴 하지만 인간 중에는 그 나이에 결혼하는 이도 있잖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하긴 암시장 크레타 할머니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긴 하네요. 내가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나긴 하지만 나이가 아직 어려 요부는 알아보지 못한다고.”

“요부라. 그 말로는 부족합니다. 이리나는 사교계의 온갖 여인들을 다 지켜봐 온 저에게도 기이한 존재거든요. 대쪽같은 티베리우스조차 이리나에게 마음을 줄 정도랍니다.”

“티베리우스가요? 후- 정말 이리나는 미스터리 하네요. 나도 솔직히 그녀가 뭔가 대단한 꿍꿍이가 있다기보다는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거라는 근거 없는 생각이 들긴 해요.”

스칼렛은 혼잣말하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루키우스는 그사이 다 빗어 내린 머리를 정성껏 땋아 내린 후 돌돌 갈아 말아 올렸다. 사촌 여동생 칼리나가 하도 졸라 몇 번 해줬던 건데 생각보다 괜찮은 모양이 만들어졌다.

그걸 끈으로 정성스레 묶고 있는데 스칼렛이 눈을 번쩍 뜨더니 말했다.

“루키우스. 이런 가정은 어때요? 그들이 원하는 것 또한 체터필드 대공의 몰락이라는.”

“그런 거라면 당신에게 사실을 밝혔겠죠. 이리나는 헬레나가 카운테스 레오폴드인 척하고 있는걸 흠잡아 협박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리처드 레오폴드도 한통속일 가능성이 크고요.”

루키우스가 대답하자마자 스칼렛이 벌떡 일어나 앉더니 얼굴을 마주 봤다.

“그렇다면 남는 답은 하나네요. 리처드 레오폴드, 체터필드 대공, 헬레나 아비스, 이리나 아비스 이 중에서 보스는 이리나다!”

그렇게 외치는데 그가 땋아 올렸던 머리 타래가 확 풀리며 엉망으로 늘어졌다.

“아! 이런. 역시 사촌 여동생의 머리와는 다르네요. 그 앤 당신만큼 머리숱이 많지 않아서.”

그가 쩔쩔매자 스칼렛이 웃음을 터트리더니 두 팔을 벌려 목을 끌어안으며 체중을 실어왔다. 그대로 밀려서 피크닉 매트 위에 드러누운 루키우스는 그의 배 위에 올라앉으며 계속해서 웃어대는 그녀를 넋을 놓고 바라봤다.

아름드리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 아래 그의 여자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미소도 따뜻한 눈빛도. 머리는 아까보다 더 엉망진창이었지만.

“사랑해요. 스칼렛.”

저도 모르게 읊조리자 스칼렛이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맞춰왔다.

이곳에는 연인들이 수두룩하게 피크닉을 오기 때문에 전혀 눈치 보지 않고 루키우스는 키스를 반기며 자그마한 혀를 마음껏 빨았다.

그렇게 한참을 키스를 나누고 입술을 거두자 스칼렛이 진녹색 눈동자를 빛내며 속삭였다.

“루키우스. 나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요.”

뜬금없는 요구에 루키우스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손으로 쓸며 놀리듯 물었다.

“당신은 빠는 것보단 빨리는 게 더 취향 아녔어요?”

“가서 아이스크림이나 사 와요. 딸기 아이스크림으로. 그럼 빨게 해줄 테니까.”

“여기서?”

“말했죠. 단체 플레이는 내 취향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얼른 가서 사 와야겠군요. 그렇지 않아도 나도 슬슬 목이 타던 참이었으니.”

루키우스는 피식 웃으며 일어나 앉았다.

스칼렛은 다시 한번 진하게 키스를 해오더니 코를 비비적거리며 말했다.

“어서 다녀와요.”

마치 어서 빨리고 싶다는 듯 감미로운 목소리로.

***

스칼렛은 날 듯이 공원을 빠져나가는 루키우스를 눈으로 쫓으며 말했다.

“이제 나오시죠. 레오폴드 공작.”

그러자 나무 뒤에서 리처드 레오폴드가 걸어 나오며 대답했다.

“이런. 제가 있는 걸 알고 계실 줄은 몰랐군요.”

스칼렛을 돌아앉아 그를 바라봤다. 루키우스와 그녀가 그런 것처럼 리처드 레오폴드 또한 평범한 서민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명가의 공작이 미행하는 재주가 있으신 줄은 몰랐네요. 아까 루키우스랑 키스할 때 욕만 하지 않으셨어도 몰랐을 텐데.”

“앨버트가 계절에 어울리지 않은 코트 차림으로 여왕님을 졸졸 쫓아가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따라온 것뿐입니다.”

그렇게 대답한 리처드 레오폴드는 권하지도 않았는데 피크닉 매트에 앉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만지려 했다.

스칼렛은 얼른 뒤로 몸을 물리며 피했고 리처드 레오폴드는 목적을 잃은 제 손을 거두며 얼굴을 찡그렸다.

“마이 퀸. 엔네야드 경에게는 관대하시면서 왜 제겐 머리카락 한 올 허락하지 않으려 하십니까?”

“저 사람은 연인이니까요. 당신은 내 섭정일 뿐이고.”

“허 참. 시크릿 풋맨이라니 상대가 좋지 않은 것 같은데요. 아까 지붕에서 지켜보다 기겁을 했습니다. 앨버트 녀석이 당신을 구하려고 그런 잔꾀를 쓸 줄도 몰랐고요.”

“앨버트 수사관은 내 충성스러운 신하죠. 하지만 당신은 어떤가요? 우리 대화를 다 엿들으셨으니 이렇게 된 거 그냥 까놓고 말 좀 해보시죠.”

“저 또한 여왕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

“개소리 그만하시고 내가 당신을 죽여야 할지 살려야 할지 결정을 좀 하게 해주시죠.”

“스칼렛. 난 당신이 이럴 때마다 오싹해집니다. 지금까지 내게 이런 기분이 들게 만든 여자는 없었어요.”

“내 이름 부르며 너무 싸대다 보니 망각하신 모양인데 허락도 없이 이름을 막 불러대시면 곤란하죠.”

“그래요. 인정하죠. 나조차 어이없을 정도로 수음을 해댔어요. 그 폭포에 숨어서 지켜본 당신의 나신을 떠올리며. 당신이 바위틈에 숨기고 간 속옷은 내 정액으로 찌들었죠.”

“이제 보니 여기 개새끼가 또 한 마리 있었네.”

“당신이 날 자극하니 진실을 말한 겁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스칼렛. 우리 결혼합시다.”

“레오폴드 공작. 당신 정신이 나갔나 보군요.”

스칼렛은 어이없어하며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루키우스가 가버린 방향으로 걸어가려 했는데 리처드 레오폴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운테스 레오폴드, 아니 이제는 마담 레오폴드라 불리는 공식적인 내 어머니의 진짜 이름은 헬레나 아비스입니다. 진짜 공작부인은 21년 전 살해됐죠.”

스칼렛은 우뚝 멈춰 섰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대로 가야 했지만, 진실을 듣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별수 없이 돌아서서 리처드 레오폴드와 눈을 맞췄다. 까맣고 까만 눈동자 위로 황금빛이 감돌았다. 정답을 말해주려는 듯이.

“당신 친부는 레오폴드 공작이 아니라 체터필드 대공이군요.”

스칼렛이 떨리는 목소리로 읊조리자 리처드 레오폴드가 어둑하게 웃었다.

“그거 압니까? 난 지금까지 흡혈하고 싶은 충동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송곳니가 나오질 않아 블러드 팩만 마셔왔죠. 그런데 당신은 달라요. 곁에만 있어도 송곳니가 솟구치거든.”

“친모는 누구죠?”

“체터필드 대공이 자매를 따먹었을까 봐 묻는 겁니까? 다행히 아버진 그 정도 변태는 아닙니다. 이리나 아비스. 그녀가 내 친모죠. 헬레나는 날 키워줬고요.”

“레오폴드 공작은 왜 당신을 아들이라고….”

“그 남잔 헬레나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걸 눈치채고 발악을 하는 부인을 죽여버릴 만큼요. 덕분에 난 그분 밑에서 부족함 없이 자랄 수 있었죠.”

리처드 레오폴드는 그렇게 대답하더니 가볍게 일어서선 스칼렛 앞에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스칼렛. 나와 결혼해요. 내 친모는 뱀파이어 왕국의 부활을 꿈꾸고 있고 내 친부는 날 왕으로 만들 생각뿐이죠. 그 둘에게 맞설 수 있는 건 나와의 결혼뿐입니다.”

“…체터필드 대공은 귀족들의 지지를 끌어내 당신을 왕으로 앉히려고 그동안 악역을 자처한 거군요.”

“맞습니다. 민심은 곧 천심. 권력으로 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미혼 여성 승계 전통을 깬다는 건 불가능하죠. 그래서 오랫동안 이 일을 준비해왔는데 당신은 변수 그 자체더군요.”

“내가 루키우스를 섭정으로 앉히면서 대공이 머리끝까지 화가 났나 보군요.”

“맞습니다. 그러니 스칼렛. 살길은 나와의 결혼뿐이에요.”

리처드 레오폴드의 경쾌한 대답에 스칼렛은 숨을 삼켰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진실이었다.

만약 이 남자와 결혼한다면 대공은 가족들에게 손을 대지 못할 거였다. 리처드 레오폴드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자기 아버지와 싸워 줄 테니까.

그러므로 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여왕이니 남편과 애인을 따로 둘 수 있다고 해도 솔직히 싫었다. 루키우스 이외의 남자에게 안기는 일 따위.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좋습니다. 오래 기다리진 못하겠지만.”

리처드 레오폴드는 가볍게 대답하더니 키스를 하려 했다. 스칼렛은 뒤로 성큼 물러섰고 리처드 레오폴드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말했다.

“입술만이라도 만질 수 있게 허락해줬으면 좋겠군요. 적어도 입술을 쓰다듬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스칼렛은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대공에게 말해 시크릿 풋맨에게 내린 명령을 거둬달라고 한다면요.”

“그런 거라면 키스 정도는 허락하시죠.”

“개소리 말아요.”

“이것 참. 협상에 어찌 이리도 능숙하신지.”

리처드 레오폴드는 쓰게 웃더니 손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당신이 내 것이 되고 나면 굳이 엔네야드 경의 손에 피를 묻힐 이유 따윈 없으니 아버지께 잘 말씀드려보죠.”

스칼렛은 다가오는 손을 탁, 쳐내며 말했다.

“말씀드리는 정도로는 어림도 없어요.”

“알았습니다. 당신이 원한 대로 관두도록 만들죠. 자, 이젠 됐죠? 제발 쓰다듬게 해줘요.”

리처드 레오폴드의 애원에 스칼렛은 별수 없이 방어하려고 들었던 손을 치웠다. 그러자마자 루키우스만큼이나 커다랗고 따듯한 손이 입술에 와닿았다.

“부드럽군요. 통통하고. 하아- 어서 빨리 내 걸 물리고 잔뜩 싸주고 싶군요. 당신이 다 삼키지 못해 질질 흘리는 걸 보고 싶거든요. 내 상상과 똑같을까요?”

엄지로 입술을 덧그리며 토해내는 더러운 말에 스칼렛은 움찔 떨었다.

리처드 레오폴드는 이내 손을 떼고는 입술을 만진 엄지를 혀로 할짝거리며 맛을 보더니 음욕이 차올라 번질거리는 까만 눈을 빛내며 말했다.

“스칼렛. 날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아요. 내가 갈증 때문에 미쳐버리기 전에 결정해요.”

그러더니 훌쩍 나무 뒤로 사라졌다.

스칼렛은 입술을 짓씹으며 노려보다가 희미하게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알고는 쓰러지듯 피크닉 매트에 드러누웠다.

두 팔을 대자로 벌리고 누워 바라본 하늘은 새파랬다. 루키우스의 눈동자처럼.

‘만약 리처드 레오폴드와 결혼한다면 대공에게 루키우스의 족쇄를 풀어달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몰라. 더는 시크릿 풋맨으로 쓰지 못하도록.’

그러고 있는데 하늘을 가리며 루키우스가 딸기 아이스크림과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든 채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기다리다 지친 모양이군요.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너무 많아 줄을 오래 서야 했어요.”

스칼렛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루키우스가 옆에 앉더니 딸기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스칼렛은 받아들고는 냉큼 입에 물었다. 리처드 레오폴드 때문에 더러워졌던 기분이 달콤하게 녹아버렸다.

“맛있네요.”

신나 하며 외치자 루키우스가 키스를 해왔다. 아주 가볍게 혀를 엮고 쪽, 빨아들이더니 입술을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달지도 않고 딸기도 씹히고.”

그러면서 웃는데 그렇지 않아도 잘생긴 얼굴이 햇살 아래 눈부시게 빛났다.

정말이지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되는 것 중 하나가 피부였다. 잡티 하나 없는 데다가 빛을 머금은 순백의 피부는 예뻐도 너무 예뻤다.

게다가 오늘에서야 알게 된 사실은 인중까지 잘 생겼다는 거였다.

문득 암시장 크레타 할머니가 인중이 잘생긴 남자가 정이 깊다고 알려주던 것이 떠올랐다. 더불어 여자를 만족시킬 정도로 그쪽 힘도 좋다고 하셨던 것도.

‘근데 루키우스는 좋은 정도가 아니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지. 인중이 미치도록 잘생겨서 그런가?’

스칼렛은 딸기 아이스크림의 다디단 맛을 음미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또 그러고 보는군요. 내 얼굴이 그렇게 좋습니까?”

루키우스가 풋, 작게 웃으며 물었다.

스칼렛은 딸기 아이스크림을 혀를 내밀어 빙그르르 돌려먹고는 소곤거렸다.

“둘만 아이스크림 먹을 곳 근처에 혹시 없어요?”

루키우스는 얼굴을 가까이 대더니 아랫입술을 살며시 물었다가 떼며 물었다.

“빨리고 싶어 미치겠다는 표정이군요. 후회할 텐데….”

“있어요. 없어요?”

“있습니다. 가본 적은 없지만.”

그렇게 대답한 루키우스는 벌떡 일어서더니 들고 있던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얼결에 받아드니 놀랍게도 스칼렛을 번쩍 안아 어깨에 짊어지더니 빈손으로 피크닉 매트를 전광석화의 속도로 접어 옆구리 끼웠다.

루키우스는 거의 달리는 속도로 공원을 빠져나갔고 아이스크림을 양손에 꼭 쥔 채 스칼렛은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말아요. 스칼렛. 여기서 덮치고 싶어지니까.”

농담 같은 경고에 스칼렛은 더욱 크게 웃어댔다.

자꾸 눈물이 고이려는 걸 꾹 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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