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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여왕을 보호하소서! (10/16)

9. 여왕을 보호하소서!

곤한 잠에 빠져 있던 스칼렛은 간질거리는 느낌에 낮게 신음하며 눈을 떴다. 그러자마자 밤새 시달려 퉁퉁 부은 젖꼭지를 핥고 있는 루키우스가 보였다.

“하으- 루키우스. 이제 그만 해요. 충분하다고요.”

툴툴대자 루키우스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더니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침입니다. 마이 퀸. 대관식 날이죠.”

스칼렛은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가 순백으로 빛나는 잘생긴 얼굴을 감탄하며 바라봤다. 그러자 루키우스가 쿡, 작게 웃더니 몸 위로 올라왔다.

“금방 끝내겠습니다. 피곤하면 다시 주무셔도 좋습니다.”

그러더니 말릴 틈도 없이 쑤욱, 쑥! 길쭉하면서 단단한 것이 깊숙이 밀려 들어왔다.

“밤새 넓혀 놨는데도 여전히 좁네요. 후으….”

스칼렛은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낮고 긴 신음에 뱃속이 저릿해졌다. 몸이 오싹오싹 달아올랐다.

“맛있어 죽겠어요? 엄청나게 빨아대네.”

루키우스는 작게 소리 내 웃더니 허리를 둥글게 돌렸다. 단단한 귀두가 자궁을 비비적거리자 높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아흣!

그게 신호라도 된 듯 퍽, 퍼억 루키우스가 허리를 튕겼다.

밤새 탐해져 퉁퉁 부은 음부가 애액을 줄줄 흘리며 허겁지겁 그의 성기를 삼켰다. 여린 몸속이 단단한 것으로 마구 문질러지자 내벽이 꽉 조여드는 느낌이 강해졌다.

“후우…. 당신 안이… 얼마나 날 쭉쭉 빨아대는지. 하아. 씨발….”

루키우스가 그녀의 안을 음미하며 설탕보다 달콤하게 읊조렸다. 내벽이 저릿해지더니 페니스를 삼킬 듯 찰싹 달라붙어 안으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스칼렛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시트를 움켜쥔 채 그가 밀고 들어올 때마다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좀 더 깊숙이, 좀 더 깊숙하게 그를 탐하고 싶었다.

온몸이 녹아버리고 싶었다.

루키우스가 그녀의 허리를 잡으며 무릎으로 섰다. 하반신이 공중에 붕 떠오르며 결합이 더욱 싶어졌다.

허리를 뒤로 젖히고는 아래에서 위로 올려치는 체위 때문인지 아찔한 절정이 몰려왔다.

스칼렛은 눈을 감고 바들바들 떨며 온 힘을 다해 그를 조였다.

루키우스는 험악할 정도로 강하게 그녀의 내부를 찔러대며 낮게 신음했다.

“하아. 스칼렛. 마이 스칼렛.”

신음에 끌려 눈을 뜬 스칼렛은 루키우스를 바라봤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꽉 쪼여진 강해 보이는 복근, 그의 머리 색과 똑같은 치골을 덮은 털과 자신의 안을 쉴 새 없이 오가는 두꺼운 성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가 밤새 쏟아부은 정액과 그녀가 뿜어낸 애액이 처덕처덕 발라진 굵은 성기가 새어드는 햇빛에 번질거렸다.

‘너무 야해.’

그렇게 생각한 순간 루키우스가 무릎 뒤를 밀며 그녀의 발목을 어깨에 걸고는 납작 엎드렸다.

가슴이 무릎에 눌리며 숨이 턱 막혔다.

성기가 쑤욱, 쑥 아주 깊숙한 곳까지 밀려 들어왔다. 이 체위가 루키우스는 마음에 드는지 어제부터 셀 수 없이 반복했는데도 여전히 힘겨웠다.

유난히 두꺼운 귀두가 질구까지 빠져나갔다가 강하게 박혔다.

짐승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는 루키우스의 표정은 쾌감에 절어 있었다. 소름 끼치도록 잘생긴 남자가 제 흥분을 이기지 못해 아랫입술을 짓씹는 것이 보기 좋았다.

후으-

이따금 내뱉는 낮은 신음이 달콤하게 그녀의 얼굴에 흩뿌려졌다.

스칼렛은 솟구치는 열락에 버거워하며 고개를 뒤로 젖혔고, 그러자마자 드러난 목덜미에 이가 박혔다.

피가 빨렸다.

쾌감이 전신에 내리쳤다.

뜨거운 것이 몸속 깊숙한 곳에서 탁, 터졌다.

루키우스가 그제야 이를 거두더니 느긋하게 허리를 움직이며 남은 정액을 마저 토해냈다.

“아쉽군요. 만족할 때까지 해볼 날이 오긴 할는지.”

천천히 그가 물러났다. 그의 어깨 위에 얹혀있던 다리가 바닥에 살며시 닿았다.

몸속 가득 채우고 있던 것이 미끄러져 나가는 것뿐인데도 오싹오싹한 감각이 휘몰아쳐 스칼렛은 손등을 물어 신음을 삼켰다.

루키우스가 즐거운 듯 내려다보며 소곤거렸다.

“무척 좋으셨나 보군요. 저도 그랬습니다.”

그러더니 일어나 앉으며 바깥을 향해 말했다.

“여왕께선 바로 씻으셔야 할 것 같으니 목욕 준비를 하세요.”

역시 순혈답게 안나 부인이 소리도 없이 들어서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러겠습니다. 엔네야드 경.”

대답과 함께 발소리가 멀어졌고 루키우스는 가림막을 걷고는 나신으로 일어섰다.

다행히 한 달 전처럼 귀부인들이 서 있진 않았다. 그동안 안나 부인이 미리 들어와 기척을 살핀 뒤 들였던 모양이었다.

‘다행이야. 레이디 블란치가 봤다가는 그대로 기절했을 거야.’

스칼렛은 멀어져가는 루키우스의 나신을 눈으로 훑으며 중얼거렸다.

잘 발달한 근육은 상반신뿐 아니라 하반신까지 이어져 바짝 올라붙은 엉덩이와 옴폭 파인 보조개 그리고 말처럼 탄력 있어 보이는 허벅지는 보는 것만으로도 마른 한숨이 흘러나오게 했다.

그가 파고들면서 저 허벅지와 엉덩이가 얼마나 강한 힘을 자아내며 꿈틀거리는지 몸으로 경험하는 중이었다.

하아-

저도 모르게 입안이 말라와 혀로 입술을 핥고 있는데, 가운을 걸치던 루키우스가 슬쩍 돌아보더니 풋, 작게 웃음을 흘렸다.

스칼렛은 얼굴을 확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미쳤어. 미쳤어. 나 좀 봐. 이건 변태도 아니고 왜 만날 넋을 놓고 보는 거냐고!’

속으로 마구 절규했지만, 이미 늦었다.

루키우스는 계속해서 웃어대며 침실을 나섰다. 그의 웃음소리가 멀어지자 이리나가 들어오더니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목욕 준비가 다 됐습니다. 가실까요?”

스칼렛은 여전히 귓가에 울리는 루키우스의 웃음소리를 잊으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리나.”

***

대관식은 동서남북 4대 궁의 정중앙에 있는 대신전에서 열렸다. 아마칼리 여왕 시절에도 건재하던 이미 오래된 건축물로 말만 들었지 와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마블이 멋지게 들어간 장밋빛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은 천장이 무지하게 높았고 왕궁 내에서 가장 높은 첨탑을 이고 있었다.

스칼렛을 들어서자마자 정면에 있는 벽면이 길고 까마득하게 높은 세 개의 유리창으로 되어있음을 보았다.

유리창은 다른 창처럼 투명한 유리가 아닌 색유리를 끼워놓았는데 조각조각을 이어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아름다운 성화를 만들어냈다.

게다가 빛이 쏟아져 내리니 제단이 색색으로 일렁이며 어딘지 모르게 성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굉장해.”

저도 모르게 읊조리며 고개를 젖혀 성화가 박힌 색유리 창을 올려다보던 스칼렛은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다.

벽뿐 아니라 돔 형태의 까마득히 높은 천장에도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편안하게 누운 수염이 성성한 노인이 내민 손을 향해 한 남자가 닿을 듯 손을 내밀며 날아들고 있었다.

“천지창조라는 제목입니다.”

잽싸게 스칼렛을 받쳐주며 루키우스가 귀띔했다. 스칼렛이 다소 괴상한 제목에 의아한 듯 바라보자 루키우스가 말을 이었다.

“제 작은 숙부님 말씀에 따르면 뱀파이어들이 이 세계의 주인이던 시절 이전의 작품이라더군요. 잊힌 인간 문명이 남긴 작품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아직도 생생하다니 놀랍네요.”

“보기엔 물감으로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색색의 돌을 가루 내 박은 거라고 하더군요. 뱀파이어 학자들에 따르면 원작이 따로 있고 그걸 옮긴 거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루키우스는 자상하게 설명하더니 손짓을 하며 덧붙였다.

“대기실로 가시죠. 여왕 폐하. 들어가셔야 귀족들이 이곳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스칼렛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치렁치렁 늘어지는 드레스 자락을 몇 겹이나 접어 양손에 쥐어 들고는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 서서 이렇듯 태평하게 말을 나누고는 있지만 몇 번이나 여왕을 잃은 경험이 있다 보니 경계가 삼엄했다.

왕궁 수비대가 며칠 전부터 밤마다 불을 밝히며 대신전을 통제했고, 오늘은 티베리우스와 슈발리에들까지 모두 합세해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각지에서 올라온 귀족들을 검문 중이었다.

후-

좁디좁은 대기실에 들어서니 어쩐지 답답했다. 벽에 걸린 붉은 비로드 천과 모피로 만들어진 망토 때문인 것도 같았다.

어찌나 긴지 여동생 앤이 봤다면 이불 몇 채는 만들겠다며 툴툴댔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루키우스가 밀어주는 의자에 앉고 나니 이리나가 들어서며 물었다.

“여왕 폐하. 목마르진 않으세요? 따뜻한 티를 좀 가져다드릴까요?”

“허브차를 가져다줘요.”

스칼렛은 가볍게 대답했고 이리나는 바쁘게 가버렸다. 그러고 나자 루키우스가 경계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하아. 저런 이리나가 적이라니….”

스칼렛이 한숨 쉬듯 중얼거리자 루키우스는 살짝 눈살을 찡그리더니 말했다.

“마이 퀸. 이리나는 카운테스 레오폴드에 의해 수십 개의 족쇄에 걸린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척한 것뿐이죠. 당신에게 동정을 사기 위해서요.”

“윽. 역시 그랬나요?”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동생 중 하나가 처음 발견했을 때 바보 같았어요. 알고 보니 그게 아니고 순혈의 아이라 하인으로 삼고 싶었던 귀족이 무리하게 족쇄를 걸어놔서더라고요. 근데 이리나는 아니었고….”

“스칼렛! 그걸 알면서 데리고 왔단 겁니까?”

“…그땐 당신이 내 곁에 있어 줄 줄 몰랐거든요. 한 명이라도 곁에 두고 싶었어요. 설령 거짓이라도 다정하게 구는 누군가를요.”

“맙소사. 스칼렛.”

루키우스는 아픈 표정을 지으며 두 팔을 내밀어 스칼렛을 끌어안았다. 두근대는 심장 소리가 좋았다.

스칼렛은 숨을 들이켜며 그의 체향을 즐기다가 노크 소리에 황급히 그에게서 물러섰다.

“유어 하이니스. 손님이 오셨습니다.”

시종 무관이었다.

“들여보내요.”

스칼렛이 돌아서며 대답하자마자 문이 열리더니 놀랍게도 화려한 옷차림의 리처드 레오폴드가 들어섰다.

“마이 퀸!”

질릴 정도로 빠르게 다가서더니 리처드 공자는 깊숙하게 허리를 숙여 절하고는 다가와 당황해서 바라보고 있는 스칼렛의 손을 덥석 잡았다.

“건강해 보이시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그러더니 손등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경도 건강해 보이니 기쁘군요.”

스칼렛이 그동안 익힌 궁중 예법대로 점잖게 말하자 리처드 레오폴드는 손을 꼭 잡고 바로 서더니 말했다.

“동생이 아무 말도 안 했나 보군요. 레오폴드 공작입니다. 여왕 폐하. 지난주 제 어머니께서 제게 작위를 물려주셨고 오늘 아침 도착하자마자 귀족원에 등록했거든요.”

그러면서 부드럽게 웃는데 새까만 눈동자 위로 황금빛이 어른거렸다.

‘아마칼리 혈통 고유의 색깔. 대체 어떻게 이 남자가 뱀파이어란 거지?’

스칼렛은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겉으로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드립니다. 레오폴드 경. 레오폴드가의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는 그가 꽉 쥐고 있는 제 손을 놔달라고 눈짓했다.

리처드 레오폴드는 아쉬운 표정으로 손을 놓더니 스칼렛의 뒤에 우뚝 서 있는 루키우스를 보며 눈살을 구겼다.

“한데 재상의 시종 무관께서 어찌 이 자리에 계시는지 의아하군요.”

스칼렛은 왜 이리 험악한 목소리일까 의아해하며 입을 열었다.

“엔네야드 경은….”

하지만 루키우스가 그 목소리를 누르며 선언이라도 하듯 다소 크게 말했다.

“그동안 무고하셨습니까? 로드 레오폴드. 최근에 쉐도우 슈발리에로 임명받아 여왕을 모시고 있습니다.”

“쉐도우 슈발리에라고?”

리처드 레오폴드가 기막힌 듯 읊조렸다.

스칼렛은 리처드 공자와 루키우스를 번갈아 바라보고는 볼을 부풀렸다.

‘으음. 리처드 레오폴드가 뱀파이어란 사실을 루키우스가 알고 있단 걸 알 리는 없을 것 같은데 왜 이러는 거지?’

아무래도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싶었지만, 딱히 리처드 레오폴드의 편을 들 생각 따윈 없었다.

솔직히 가족이 인질로 잡혀 있지만 않다면 대놓고 아마칼리 여왕의 보물을 찾는 이유가 뭐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레오폴드 공작. 인사가 끝났으면 이만 물러가도록 하세요. 성스러운 대관식을 앞두고 심기를 어지럽히고 싶지 않군요.”

스칼렛이 다소 차갑게 말하자 리처드 레오폴드는 살짝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마이 퀸. 저는 그저 당신께 언덕 위에서 한 약속을 상기시켜드리고자 온 겁니다.”

그러더니 재킷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받아들고 보니 곱게 접힌 손수건이었다. 천도 좋지 않았고 누렇게 색까지 바랬지만 수건을 따라 수 놓인 레이스는 진귀했다.

“앤이 보냈군요. 내 귀여운 앤이.”

스칼렛은 수건을 가슴에 품으며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사실 울고 싶어졌다. 상냥한 척하고 있지만, 리처드 레오폴드가 내민 건 비수와도 같았다. 언덕 위에서 한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는.

“여왕위에 오르게 된 것을 축하한다며 밤새 만들어서 보낸 겁니다. 그 외에도 동생분들이 선물을 다들 준비해 줬는데 다 들고 올 수가 없어서 우선 그것만 가져왔습니다.”

리처드 레오폴드는 화사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어쩐지 사내가 여인을 유혹할 때의 눈빛이라 스칼렛은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나중에 가지러 사람을 보낼게요.”

“이제 제가 곁에 있을 테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내일이라도 당장 가져다드리죠.”

리처드 레오폴드는 가볍게 대답하더니 다리를 뒤로 빼고 정중하게 절하고는 물러났다.

“그럼 무도회에서 뵙도록 하죠.”

그가 나가고 나자 대기실 안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아직도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겁니까?”

등 뒤에서 루키우스가 물었다.

스칼렛은 숨을 크게 들이켜고는 천천히 돌아섰다.

대관식을 위해 스칼렛이 흰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공단 드레스를 입은 것처럼 루키우스 또한 흰색과 은색으로 된 제복 차림이었다.

검은색도 소름 끼치게 잘 어울리더니 흰색 또한 순백의 피부와 어우러져 눈부시게 근사했다. 짙푸른 파란색 눈동자마저 빛을 품은 듯 청량감이 느껴졌다.

“없어요. 그냥….”

스칼렛이 말끝을 흐리며 눈을 내리깔자 루키우스가 성큼 다가와 가볍게 끌어안으며 소곤거렸다.

“그냥 뭡니까? 단순히 섭정의 지위를 약속한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요.”

스칼렛은 그의 가슴에 살며시 머리를 기댄 채 숨을 들이켰다. 그의 심장박동 소리가 듣기 좋았다. 이러고 언제까지고 있고만 싶어졌다.

“내 사랑스러운 여왕님. 말해봐요. 대체 뭘 약속한 겁니까?”

스칼렛은 대답 대신 루키우스를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리처드 레오폴드와 언덕에 올랐을 땐 그저 루키우스를 떠날 보낼 생각뿐이었다. 그랬기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루키우스가 욕심이 나 미칠 지경이었다. 제 남자로 삼고 싶어서, 계속 곁에 두고 싶어서 안달했었다.

하지만 그런 제 마음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되면서 내 것이라고 욕심을 내 본 적이 없었다. 줄줄이 딸린 동생들이 언제나 먼저였으니까.

“스칼렛….”

루키우스가 안타깝다는 듯 마주 안고는 달래듯 흔들어대며 중얼거렸다. 스칼렛은 숨을 크게 들이켜고는 그의 가슴에 대고 우물거렸다.

“대관식의 마무리에서 짤막한 답사를 할 때 리처드 레오폴드를 내 섭정으로 삼는다는 선언을 하기로 약속했어요.”

루키우스가 흔들던 동작을 뚝, 멈췄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는 있는 겁니까?”

“최근에야 이해했어요. 언덕 위에서만 해도 난 그저 변경 마을에서 처음으로 여행을 떠난 어린 소녀에 불과했으니까. 설마 그게 내가 그 남자의 꼭두각시라고 선언하는 건 줄은 몰랐죠.”

“지킬 필요 없습니다. 대관식을 치른 순간 당신은 공식적으로 모든 귀족의 위에 군림합니다. 그 약속을 어긴다 해도 리처드 레오폴드가 뭐라 할 수 없을 겁니다.”

“내 가족이 잡혀 있어요.”

“빼내겠습니다. 이미 제가 푼 사람이 레오폴드 성으로 향하고 있어요. 상황을 보고 탈출시킬 방법을 찾아낼 겁니다.”

“고마워요. 루키우스. 정말이지 가능하다면 당신의 꼭두각시가 되고 싶네요. 탐욕스러운 체터필드 대공이나 음흉한 레오폴드 공작이 아니라. 혹시 여왕 중 그런 사람은 없었어요?”

“한때는 그랬죠. 아마칼리 여왕부터 그 뒤로 이어진 몇 대에 걸쳐서 뱀파이어 섭정을 두는 것이 관례였죠.”

루키우스는 진중하게 대답하다가 아차 싶은 얼굴로 황급히 말했다.

“이야기를 돌리지 말아요. 약속을 깨요. 제발!”

스칼렛은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 들어 그와 시선을 맞췄다.

“리처드 레오폴드의 꼭두각시가 되더라도 날 사랑해 줄 거죠?”

“스칼렛!”

루키우스가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그가 말을 더 잇기 전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리나입니다.”

스칼렛은 바로 대답했다.

“들어와요.”

루키우스는 마지 못한 얼굴로 그녀에게서 물러섰다.

“제발 하지 말아요. 제발.”

거의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와 얼굴에 스칼렛은 소리 내 웃었다.

“누가 들으면 내가 당신을 덮치려 하는 줄 알겠는걸요. 혹시 그런 여왕은 없었어요?”

루키우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어떤 말로도 스칼렛이 거절하리란 걸 깨달았는지 눈빛이 매서웠다.

스칼렛은 모르는 척 돌아서서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이리나가 찻주전자가 담긴 거치대를 밀며 다가오더니 물었다.

“유어 그레이스. 차를 따를까요?”

고개를 끄덕이자 향긋한 허브향이 대기실에 가득 찼다.

천천히 한 모금 삼키자 기분이 좀 나아졌다.

등 뒤의 루키우스가 뿜어내는 노기가 너무나 뜨겁긴 했지만.

하아-

스칼렛은 허브차를 홀짝이며 손에 쥐고 있던 앤이 보내온 수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수건에 둘린 레이스를 한 땀 한 땀 뜨면서 온갖 걱정을 다 했을 텐데 싶어 씁쓸했다.

“이 실 값 마련하느라 제 저금통을 털었겠군.”

굳이 묻지 않아도 아는 사실에 한숨짓다가 문득 촘촘하게 뜨인 레이스 문양이 알파벳이란 걸 알아봤다.

살짝 당황하며 레이스에 수 놓인 알파벳을 빠르게 연결해 읽어나가니 문장이 완성됐다.

-언니. 우린 R이 떠나자마자 바로 성을 떠나 수도로 갈 거야. 가서 연락할게. A-

스칼렛은 기쁨과 동시에 현기증을 느꼈다. 상황이 이렇다면 굳이 리처드 레오폴드를 섭정의 지위에 올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대공의 시크릿 풋맨이 누군지 알아낼 때까진 한 장의 카드라도 더 손에 쥐고 있어야만 했다. 비록 그것이 비수를 감추고 있는 조커 카드라 해도.

‘루키우스는 펄펄 뛸 테지만 어쩔 수 없네. 내 가족의 안전이 확정될 때까진 위험을 감수하는 수밖에. 아니, 아니지. 그럴 거면 두 장의 카드를 손에 쥐어도 되겠어.’

속으로 중얼거리다 이내 허브차의 마지막 한 모금을 꿀꺽 삼키고는 읊조렸다.

“두 장. 좋아. 결정했다.”

***

대관식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붉은 카펫을 중심으로 양쪽에 자리를 잡고 있던 귀족과 왕족들이 모두 일어섰다.

뒤에서 앞으로 갈수록 작위가 높았고 여왕과의 혈연이 가까워졌기 때문에 맨 앞자리는 당연한 듯 체터필드 대공이 앉아 있었다.

리처드 레오폴드는 플로라 여왕의 사촌 동생을 어머니로 두고 있다 보니 2열이었다.

물론 대공이 앉은 오른쪽이 아닌 왼쪽에 자리를 잡아 대공과 전대 레오폴드 공작의 악연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만약 스칼렛이 섭정직에 임명한다고 선언하면 2차전의 시작이겠군. 1차전은 전대 레오폴드 공작이 쫓겨나면서 승패가 갈렸으니. 지루한 사교계에선 다들 대환영할 테지.’

루키우스는 어쩐지 답답해 오는 가슴에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지금 선 곳은 옥좌 바로 옆으로 오늘을 위해 특별히 뽑힌 8인의 슈발리에 중 한 명이었다.

영광스러운 일이었지만 동시에 슬픈 일이기도 했다. 스칼렛이 옥좌에 앉는 순간, 대공은 왕위를 노리고 그를 바짝 조이기 시작할 테니.

“모두 일어서시오. 여왕께서 납십니다!”

대신전 문가에 서 있던 시종 무관의 쩌렁쩌렁한 외침과 동시에 붉은 카펫 위에 스칼렛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리까지 늘어지는 붉은 머리를 그대로 늘어뜨린 스칼렛은 미혼을 상징하는 흰 공단 드레스와 제 키의 열 배는 넘는 길고 긴 망토를 걸쳤는데 무섭도록 아름다웠다.

하트 모양의 사랑스러운 얼굴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가느다란 두 팔은 다소곳이 배 위에 모으고 있었다.

맑디맑은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오로지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대신전이 추구하는 청빈함과 거리가 먼 체형의 대사제가 앞으로 나와 모두를 축원하는 손동작을 해 보이자 행진이 시작됐다.

스칼렛이 지나가는 열에 선 모든 이들이 허리를 깊숙이 숙여 예를 표했다. 아마칼리 여왕의 계승 족보에 적혀 있는 마지막 소녀라는 점 때문인지 표정들이 죄다 경건했다.

체터필드 대공이 왕궁에서 대단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곤 해도 대놓고 여왕들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를 수 없는 이유기도 했다.

마치 그들의 마음을 안다는 듯 스칼렛은 가능한 많은 이들과 시선을 맞추며 걸어 나왔고 제단 아래쪽에 서 있는 대사제에게 다가갔다.

대사제 앞에는 미리 준비된 붉은 방석이 있었고 스칼렛이 그곳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보조 사제가 잽싸게 1800개의 다이아몬드와 42개의 에메랄드 그리고 50개의 루비가 박힌 여왕의 관을 청금석 쟁반에 받쳐 들고 대사제 곁에 섰다.

대사제는 관을 높이 들어 올리며 축복 기도문을 외웠다.

“신이여. 우리의 여왕을 지켜주소서. 그녀에게 승리와 행복과 영광을 주시고 오랫동안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우리 여왕의 적을 쓰러지게 하소서. 간교한 계략을 좌절시키고….”

역시 대사제다 보니 목소리만은 낭랑하여 제단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고 마지막 기도의 축언과 함께 머리에 왕관이 씌워졌다.

“위대한 여왕 아마칼리의 축복이 새로운 여왕께 임하기를!”

동시에 제단 양쪽에 대기하고 있던 합창단이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가락에 맞춰 대사제의 기도문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스칼렛은 늠름하게 일어서더니 제단 위로 걸어 올라왔다. 루키우스는 망토를 들어 그녀가 옥좌에 앉기 편하도록 도왔다.

그렇게 그녀가 착석하고 나자 대사제가 다가와 이 왕국의 주인임을 상징하는 왕홀과 아마칼리 여왕의 가호가 이 왕궁을 보호함을 상징하는 아무르 나뭇잎으로 둘러싸인 볼을 건넸다.

그걸 양손에 나눠 든 스칼렛은 긴장된 얼굴로 정면을 응시했다.

“신이여 여왕을 보호하소서!”

마지막 노랫말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고, 근사한 리듬과 함께 끝을 맺었다.

서 있던 모든 이들이 조용히 자리에 앉았고, 루키우스는 리처드 레오폴드가 기대감에 가득 찬 얼굴로 스칼렛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았다.

그동안 몇 번이나 대관식에 참석했던 까닭에 이제 스칼렛이 짤막한 화답의 말을 할 시간임을 알고 있었다.

루키우스는 슈발리에답게 바른 자세를 유지한 채 숨을 삼켰다.

스칼렛이 수도에 입성한 지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얼마나 열심히 일해왔는지 곁에서 지켜보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노력과 노력의 결과가 몽땅 리처드 레오폴드의 것이 될 순간이었다.

기분 같아선 옆구리에 차고 있는 칼을 들어 베어버리고 싶었다. 그랬다간 스칼렛과 스칼렛의 가족들이 위험해질 수 있으므로 참을 뿐이었다.

“나 스칼렛 케이틀린 아마칼리는 이 나라를 사랑과 평화의 정신으로 다스리고자 하나….”

스칼렛의 목소리가 대신전 가득히 울려 퍼졌다. 낭랑하게 이어지던 목소리는 망설임을 머금고 잠시 끊어졌다.

‘젠장. 진짜로 신이 있다면 제발 여왕을 보호하소서.’

루키우스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이를 악물었다.

이내 스칼렛은 숨을 크게 들이켜더니 좀 더 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직 나이가 어려 나라를 다스릴 지식이 부족한바 리처드 레오폴드 공작을 내 섭정으로 삼고자 합니다.”

선언과 동시에 리처드 레오폴드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체터필드 대공은 어이없게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무표정을 유지했다.

나머지 귀족들과 왕족들은 제 귀를 의심하는 얼굴로 스칼렛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스칼렛은 그 시선을 당당히 받아내며 말했다.

“또한! 뱀파이어 섭정을 두어 인간과 완전한 화합을 꿈꾸셨던 아마칼리 여왕의 초심을 본받고자 루키우스 아툼 엔네야드를 제2 섭정으로 임명합니다. 두 사람은 앞으로 나오세요.”

루키우스는 순간 멍해졌다. 이제 성당 안에 자리한 모든 이들의 시선은 그에게로 쏠려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체터필드 대공이었다.

리처드 레오폴드에 관한 정보는 미리 입수해 알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설마 이것은 예상 못 했는지 경악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걸 보니 웃음이 솟구쳤다. 하긴 스칼렛이 이토록 대담한 결정을 내린 건 아까 대기실에서 그가 던진 한마디 때문이었다.

초대 아마칼리 여왕 시대에는 뱀파이어 섭정을 따로 뒀었다던 그 사실 하나를 그대로 믿고 수를 던진 거였다.

그래서 대공은 충격에 빠진 거였고 다들 그런 얼굴이었다.

정말 소리 내어 미친 듯이 웃고 싶어졌지만 차마 그럴 수 없어 이를 악물어 삼키는데 한 계단 아래에 서 있던 슈발리에가 슬쩍 그를 떠밀며 말했다.

“나가시죠. 엔네야드경.”

루키우스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리처드 레오폴드가 옥좌가 놓인 제단 아래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황급히 나가 그의 옆에 마찬가지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니 리처드 레오폴드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개자식. 여왕에게서 떨어지라 경고했는데 무시하다니 죽고 싶은가?”

루키우스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여왕께서 저를 곁에 두셨습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리처드 레오폴드의 얼굴이 구겨졌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돌려 말했지만, 스칼렛이 선택한 남자가 누군지 말해준 셈이었다.

그러는 사이 스칼렛이 옥좌에서 내려와 둘의 앞에 섰다.

“지식과!”

리처드 레오폴드에게 왕홀이 건네졌다.

“지혜로!”

루키우스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아무르 나뭇잎이 둘린 볼을 받았다.

“이 나라를 잘 이끌 수 있도록 두 분의 섭정이 함께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차례로 죽어간 여왕들 또한 간절히 바랐을 평화를 이뤄낼 수 있게요.”

스칼렛은 엄숙하게 말하고는 일어나라는 손짓을 했다.

루키우스는 리처드 레오폴드와 속도를 맞춰 일어섰고 연이은 손짓에 돌아서서 모두를 바라봤다.

이제 귀족들과 왕족들의 얼굴은 놀라움과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주변에 보이지 않게 서 있어야 할 순혈 뱀파이어 시종들은 모습을 드러낸 채 기뻐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여왕들은 모두 실질적인 왕과 다름없는 체터필드 대공에게 감사를 표하며 그를 의지해 국정을 이끌겠다는 말을 거의 토씨 하나 변함없이 외치곤 했다.

지난번 자살로 비극적인 생을 마감한 여왕조차 자신의 힘으로 이 나라를 이끌겠다는 선언을 덧붙이기는 했지만, 그저 말에 불과했다.

하지만 스칼렛이 지난 한 달 넘게 보여준 능력 때문인지 모두 이번 여왕은 그전처럼 체터필드 대공의 손아귀에서 놀아나지 않으리란 믿음이 샘솟는 모양이었다.

그저 악귀처럼 인상을 쓰며 스칼렛을 노려보고 있는 체터필드 대공의 눈치를 보느라 표현을 못 할 뿐이었다.

“신께서 이 나라에 임하시길! 아마칼리 여왕의 축복이 만백성에게 고루 가 닿기를!”

스칼렛은 모두의 반응을 읽었는지 당차게 외쳤다.

말을 맺음과 동시에 ‘신이여, 여왕을 보호하소서’라는 합창이 다시 시작됐다. 아까보다 훨씬 더 경쾌하고 더 크게 울려 퍼지는 곡이 대신전에 메아리쳤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신이여! 여왕을 보호하소서!”

그와 동시에 더는 참을 수 없게 된 귀족들이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여왕 만세!”

스칼렛은 손을 들어 화답하고는 다시 붉은 카펫을 걸어 행진해 나갔다.

루키우스는 옆으로 물러섰고 리처드 레오폴드 또한 비켜섰다. 스칼렛이 지나가고 나자 둘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서서는 가운에 짓눌릴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지혜라. 여왕께서 아무래도 말을 바꿔서 하신 것 같군.”

리처드 레오폴드가 툴툴댔다.

“레오폴드 경. 지금 우린 싸울 때가 아닙니다. 옆에서 불길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루키우스의 말에 리처드 레오폴드는 체터필드 경을 흘끔 보더니 얼굴을 구겼다.

“불길 정도가 아니라 용암이군. 체면 지킬 여유조차 없나 보네.”

“전면전을 각오해야 할 겁니다. 게다가 아직 전 체터필드가에 묶여 있어서요.”

“대놓고 이중 첩자란 걸 자랑하는 건가?”

“전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오로지 스칼렛 여왕을 섬길 뿐이죠. 그럼 전 이만. 쉐도우 슈발리에로서의 본분을 다해야 하거든요.”

루키우스는 가볍게 대답하고는 스칼렛을 따라 뛰어나가는 슈발리에들의 뒤를 따랐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굳건하게 유지되어 온 길고 거대한 문이 열리자 동서남북으로 둘러선 왕궁이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거대한 원형 광장이 나타났다.

대신전은 광장 한가운데 서 있었고 왕궁과 왕궁 사이에 만들어진 대로가 네 방향으로 이어졌는데 놀랍게도 인파로 가득했다.

성당 안에서의 외침을 들은 듯 그들은 손에 들린 아마칼리를 상징하는 붉은 꽃다발을 흔들며 여왕 만세를 외치는 중이었다.

스칼렛은 대성당 앞 계단 참에 선체 그들 모두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고 그러자 사람들이 꽃다발을 던져 올렸다.

순식간에 붉은 꽃비가 쏟아져 내렸다. 사람들의 함성이 더욱 커졌다.

“여왕 만세!”

루키우스는 다른 슈발리에들과 빠르게 뛰어가 그녀를 둘러싸며 한쪽에 정차된 마차에 태웠다.

티베리우스와 몇 명의 슈발리에들이 말에 올라타고 앞장을 서고 그 뒤를 마차가 따랐다. 루키우스는 쉐도우 슈발리에답게 스칼렛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상당히 많은 사람이 몰려서인지 마차 뒤에는 왕궁 수비대가 아닌 다른 슈발리에들이 말을 타고 따라왔다.

“굉장한 인기십니다.”

루키우스가 중얼거리자 창에 가까이 앉아 밖을 향해 손을 흔들던 스칼렛이 피식 웃었다.

“부러워요?”

루키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앞에 나서는 것보단 조용히 뒤에서 모략을 꾸미는 것을 좋아합니다.”

“알아요. 그래서 당신에게 지혜를 기대하는 거예요. 근데 섭정직에 있으면서 쉐도우 슈발리에 일을 할 수 있나요? 흠- 다른 사람을 뽑아야 하려나?”

“원래대로라면 그래야겠지만….”

루키우스가 말끝을 흐리자 스칼렛이 눈을 맞췄다.

그저 서로 바라보고 있었을 뿐인데 갑자기 스칼렛이 볼을 붉혔고 공기가 농밀해졌다.

“아…. 난. 그러니까….”

쩔쩔매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몰라도 당황하는 얼굴이 몹시도 귀여웠다. 루키우스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어차피 제2 섭정이니 제가 겸임하도록 하죠. 대공의 풋맨을 할 때 시종 무관을 겸직한 바 있으니 가능할 겁니다.”

“그러면 난 좋긴 한데 피곤하지 않겠어요? 나 정말로 일을 맡길 생각이거든요. 체터필드 대공은 악행은 둘째치고 뭐든 설명 없이 일하려 들어서요. 슬슬 한계가 왔거든요.”

“대공은 일부러 그러는 겁니다. 당신이 지쳐 나가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말한 루키우스는 슬쩍 팔을 내려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살며시 스칼렛의 안쪽 손목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리며 읊조렸다.

“그냥 솔직하게 저랑 즐길 시간이 줄어드는 게 싫다고 말해주시죠. 저도 그렇거든요. 낮에는 여왕일지라도 밤에는 내 여자가 되어주세요.”

스칼렛의 볼이 더욱 붉어졌다. 심지어 눈가까지 발갛게 달아올랐다. 입안이 말라오는지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핥는데 몹시도 요염했다.

루키우스는 손목 위를 가볍게 쓸어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하며 그 감촉을 즐겼다.

비록 제2 섭정일지라도 스칼렛이 허투루 일을 줄 리는 없으니 꽤 힘들 거란 건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감촉을 포기할 순 없었다. 잠을 줄여서라도 곁에 있어야만 했다. 더구나 리처드 레오폴드를 생각하면 절대 떨어질 수 없었다.

“빨리 세 번째 밤이 왔으면 좋겠군요.”

그가 낮게 소곤거리자 스칼렛이 제 이마에 손을 짚으며 읊조렸다.

“당신이 그러니까 기절할 것 같아요.”

“그렇군요. 나의 음란한 여왕님. 피부가 달아오르는 게 느껴지는군요.”

루키우스는 피식 웃고는 잡고 있던 그녀의 손목에 입을 맞췄다. 열기를 품은 피부가 입술에 착 감겼다.

스칼렛이 기절할 것처럼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몹시도 귀엽게.

조금이라도 흡혈을 할까 고민하는데 아쉽게도 마차가 멈췄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스칼렛은 황급히 표정을 굳히더니 마차에서 내리며 소곤거렸다.

“제 가족이 성을 탈출해서 오는 길이에요. 좀 알아봐 줘요.”

루키우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왕을 위해 깔린 카펫 위에 내려서니 눈앞으로 서궁이 보였다.

왕궁의 정문을 통해 들어오면 바로 보이는 서궁은 공식 무도회와 각종 행사를 위해 쓰이는 곳으로 왕궁 앞 대광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탑이 있기도 했다.

루키우스는 다른 슈발리에들과 함께 바로 그 탑으로 스칼렛을 안내했다. 스칼렛을 에스코트해 테라스에 서고 보니 눈 아래로 정문 앞 대광장이 펼쳐졌다.

그곳은 대성당과 마찬가지로 붉은 꽃다발을 든 시민들로 꽉 차 있었다. 스칼렛이 손을 들어 화답하자 모두가 여왕 만세를 외치며 꽃다발을 흔들어댔다.

루키우스는 슬쩍 뒤로 빠졌고 그러자 티베리우스가 옆에 와서 서며 중얼거렸다.

“보안을 강화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까 나오다 보니 체터필드 대공이 필립 후작을 불러 뭔가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더군요.”

“또다시 대공가의 시크릿 풋맨에게 일을 시키려는 모양이군요. 뭐, 제가 가서 대공을 살살 달래며 상황을 좀 살펴보도록 하죠.”

“소문 일 줄 알았는데 실제로 존재하는가 보군요. 시크릿 풋맨이란 자가.”

“저도 본 적은 없습니다만 아툼가에서는 존재한다고 다들 믿습니다. 시크릿 풋맨이란 존재 덕분에 아툼가가 귀족들의 정치 모략에 휘말리지 않고 중립을 지켜올 수 있었거든요.”

루키우스는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

티베리우스가 그렇게 운을 떼더니 주변을 빠르게 살펴 가까이 선 슈발리에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대공가의 발렛인 톰이란 소년이 재미난 말을 하더군요. 여왕의 시녀 중 한 명이 밤에 몰래 체터필드 대공을 만나러 왔었다고요.”

“여왕의 시녀?”

“흑발에 하얀 피부, 보라색 눈동자를 지닌 굉장한 미녀였다고 하더군요.”

“이리나? 이리나가 대공을 만났다? 그것도 한밤중에?”

“저도 놀라서 다시 확인했는데 이리나가 맞는 것 같습니다. 사실 톰이 그녀를 본 건 지극히 우연이었거든요. 잠이 안 와서 대공의 서재 근처 정원을 걷다가 본 거라더군요.”

“톰 녀석. 또 몰래 과일을 따 먹으러 숨어든 모양이군요. 순혈인 제 아버지의 피가 진한 체형인데도 피보다 과일을 좋아하다 보니 종종 그래서 야단을 맞곤 하죠. 그래서요?”

“정원에서 바로 이어지는 서재로 들어갔고 대략 한 시간 뒤에 나왔는데 뒤따라 나온 대공이 계속 입을 맞추며 가지 말라고 애원을 하더랍니다.”

“…기이하군요.”

루키우스는 너무 황당해 터져 나오는 신음을 누르며 중얼거렸다. 티베리우스는 그답지 않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하필 그런 남자랑….”

그러더니 당황한 듯 머쓱하게 웃었다.

루키우스는 티베리우스가 이리나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고는 씁쓸하게 바라봤다.

그러고 있는데 탑까지 한 번에 오르내릴 수 있는 도르래가 걸린 새장이 올라오더니 시종 무관이 나타났다.

“여왕 폐하는 아직 인사 중이십니까? 더 계시다간 식사 때를 놓치실 것 같습니다만.”

루키우스는 알았다는 시늉을 하고는 테라스에 서 있는 스칼렛의 등 뒤에 다가섰다.

“마이 퀸. 이동하실 시간입니다.”

그러자 스칼렛이 시선은 여전히 앞으로 한 채 말했다.

“루키우스. 사람들을 좀 봐요.”

루키우스는 스칼렛의 어깨너머로 광장을 내려다보고는 그들이 여전히 환한 얼굴로 붉은 꽃다발을 흔들고 있음을 알았다.

“난 저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는데 어쩜 다들 저렇게 환호를 하는 걸까요?”

“당신이 저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그 자체가 흔한 일이 아니죠.”

“난 내 목숨을 건지기 위해 저 사람들을 이용했어요. 광장에서 모두가 나를 기억하게 만들어야 산다는 레오폴드 공작의 조언에 따라 이용했는데….”

“그렇게 치면 광장에서 당신이 구원한 뱀파이어 연인도 우리에 갇혀 채혈소로 끌려가던 사람들도 당신을 이용한 셈일 겁니다. 당신도 그들도 서로 이용해 목숨을 건진 거죠.”

루키우스의 말에 스칼렛은 가볍게 소리 내 웃더니 소곤거렸다.

“제 가족들이 저들 사이에 있어요. 레오폴드 성에서 잘 탈출해서 어제 도착했대요.”

루키우스는 숨을 들이켜며 광장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손톱만 한 크기로 보이는지라 대체 어떻게 알아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뭐가 됐든 다행이었다. 리처드 레오폴드가 쥔 최고의 카드가 이로써 날아가 버린 셈이었다.

그가 안도하듯 스칼렛 또한 그런지 몹시도 밝은 얼굴로 선 자리에서 펄쩍 뛰며 손을 흔들어댔다.

사람들이 붉은 꽃을 던져 올렸고 환호가 더욱 커졌다.

스칼렛은 계속 손을 흔들며 뒤로 물러서더니 이윽고 더는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지자 돌아서며 그와 눈을 맞췄다.

“제2 섭정님. 그렇다면 이용이란 말 말고 뭐라 해야 할까요?”

조금 전 가족 이야기 따위 조금도 나누지 않은 것 같은 목소리였다.

“서로를 도운 거죠. 마이 퀸. 당신이 그들을 같은 눈높이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고요. 그래서 대공이 당황하는 겁니다. 그에겐 오로지 귀족만이 인간이거든요.”

루키우스는 얼른 장단을 맞췄다.

“내가 섭정 하난 잘 뽑은 것 같네요.”

그러면서 미소짓는 스칼렛이 어찌나 달콤해 보이는지 루키우스는 저절로 길어지는 제 송곳니를 혀로 할짝거리며 마주 미소 지었다.

“여왕 폐하. 뭐하십니까? 어서 오시죠.”

시종 무관이 등 뒤에서 소리쳤다. 스칼렛은 알겠다는 듯 손을 들어 보이더니 루키우스를 지나치며 살며시 속삭였다.

“식사 후에 비는 시간이 좀 있을 거예요.”

***

대관식과 더불어 준비된 공식 무도회는 오후 6시에 시작됐다. 검은 드레스로 갈아입은 스칼렛은 전통대로 루키우스의 에스코트를 받아 무도회장으로 들어섰다.

입구에서 홀로 내려가는 계단참에 루키우스와 나란히 서니 홀 여기저기 흩어져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귀족들이 하나둘 올려다봤다.

스칼렛은 다소 딱딱하게 느껴지는 구두를 또각거리며 루키우스와 팔짱을 끼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풍성하게 펼쳐지는 종 모양의 치마가 아닌 몸 선을 따라 흐르는 머메이드 라인 드레스다 보니 어쩐지 어른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목부터 가슴 바로 위 라인까지 살이 은근히 비치는 검은 레이스라 더욱 그랬다.

“레이디 블란치에게 잔소리를 좀 해야겠군요. 이렇게 야한 드레스를 입혀서 모두의 앞에 세울 생각을 하다니.”

루키우스는 못마땅한지 툴툴댔지만, 스칼렛은 아까 저택에서 이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을 때 그의 표정을 떠올리곤 피식 웃었다.

‘난 당신이 당장에라도 잡아먹고 싶다는 듯 보는 시선이 오싹오싹해서 도리어 좋았는데.’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데 루키우스가 흘끔 보더니 말했다.

“마이 퀸. 저 이외의 다른 남자를 보고 그렇게 유혹하듯 웃지 마세요. 정원으로 끌고 나갈지도 모릅니다.”

“거기 뭐가 있는데요?”

“곳곳에 남녀가 몸을 숨기기 좋은 은밀한 장소가 잔뜩 있답니다. 심지어 신음을 숨길 수 있도록 연주곡을 틀어놓지요.”

“……공식적으로 단체 플레이를 허용한다는 거네요.”

스칼렛이 중얼거리자 루키우스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어요? 혹시 단체 플레이라고 안 해요?”

스칼렛이 바라보며 묻자 루키우스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러다 예의에 어긋나고 싶었던지 주먹으로 입을 꾹 누르며 연거푸 헛기침을 해댔다.

그 모습이 몹시도 귀여워 멍하니 바라보다가 스칼렛은 그의 웃음소리가 좀 잦아들자 소곤거렸다.

“당신이야말로 딴 여자 앞에서 그러고 웃지 말아요.”

루키우스는 웃음을 삼키는 게 대단히 힘들었던 듯 다소 크게 숨을 들이켜더니 달콤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마이 퀸. 난 이제 당신의 피밖에는 삼키지 못합니다. 당신이 날 거절한다면 난 죽을 겁니다.”

스칼렛은 무척 당황해 눈을 부릅떴다.

“루키우스. 그래선 안 되잖아요. 만약 내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땐 구역질이 치밀더라도 블러드 팩을 먹어야겠죠. 정 안되면 수혈을 받든가.”

“그냥 농담 삼아 하는 말이 아니군요.”

“네. 마이 퀸. 진심입니다. 순혈에게 이런 현상은 오로지 반려로 맞고 싶은 이에게만 나타나죠.”

“루키우스. 지금 얼렁뚱땅 나한테 평생 함께하자고 고백하는 거예요?”

스칼렛의 핀잔에 루키우스가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근사한 걸 기대하셨습니까? 다음에는 반지라도 준비해놓고 말씀드리죠.”

그때 계단의 끝에 이르렀고, 사람들 사이에서 리처드 레오폴드가 나타나 허리를 구부려 인사를 했다.

“마이 퀸. 제가 옥좌까지 에스코트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루키우스가 팔짱을 풀며 속삭였다.

“제가 바짝 뒤에서 쫓아가도록 하죠.”

스칼렛은 어쩔 수 없이 리처드 레오폴드의 팔짱을 끼었다.

색색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레이디들과 블랙앤화이트의 연미복 차림의 귀족들이 좌우로 물러서며 길을 만들었다.

스칼렛은 리처드 레오폴드가 이끄는 대로 걸어가며 눈이 마주치는 대로 인사를 했다. 대부분 아침 식사 때의 간단한 알현이나 관료 회의 또는 티파티 때 봤던 사람들이었다.

암시장에서 한 번 본 손님은 절대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보니, 보자마자 이름이 떠올랐고 생각나는 대로 호명을 하자 다들 대단히 기뻐했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며 거대한 홀을 걸어나가자 끝에 길고 넓은 열 개의 계단 끝에 옥좌가 놓여 있었다.

스칼렛은 리처드 레오폴드와 함께 계단을 올랐고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옥좌에 앉았다.

“재상과 춤이 끝나고 나면 저에게도 춤출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리처드 레오폴드가 정중하게 물러서더니 말했다.

스칼렛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하죠. 레오폴드 섭정.”

리처드 레오폴드는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계단을 내려갔고, 뒤따라온 루키우스가 옥좌 바로 옆에 바짝 붙어섰다.

스칼렛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두 다리를 살짝 기울인 자세로 앉아 무도회 홀을 내려다봤다.

걸어오면서도 느꼈지만 상당히 컸다.

천장에 걸린 샹들리에는 열 개가 넘어 휘황찬란했고, 벽을 따라 놓인 길고 긴 식탁에는 다양한 종류의 핑거푸드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순혈 뱀파이어 시종과 메이드들이 쟁반에 샴페인이 담긴 목이 긴 잔을 들고 손님들 사이를 오가고 있었고, 한쪽에선 현악 연주단이 들릴 듯 말 듯 낮게 곡을 연주 중이었다.

스칼렛은 그들 모두를 눈으로 훑다가 방금 내려온 길게 휘어지는 계단 뒤쪽으로 문이 달린 것을 보았다.

언뜻 문에 달린 창 너머로 지는 햇살에 물들어가는 정원이 보였는데, 단체 플레이를 위해서인지 색색의 등을 달아놓아서 나름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

“여왕 폐하. 재상 체터필드가 만수무강을 기원할까 합니다만.”

불쑥 체터필드 대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내린 스칼렛은 그가 귀족들 사이를 해치며 앞으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아니, 귀족들이 그에게 닿을까 봐 무척이나 염려하며 잽싸게 비켜서고 있었다. 밥 먹는 걸 건드려도 사달이 난다더니 길 갈 때 막아서도 그러는 모양이었다.

스칼렛이 고개를 끄덕이자, 체터필드 대공은 근처에 선 시종이 들고 있는 쟁반에서 두 개의 샴페인 잔을 집어 들더니 물었다.

“이 잔을 받아주시겠습니까?”

스칼렛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루키우스가 빠르게 내려가 대공에게서 잔을 받아서 올라왔다. 그걸 건네며 루키우스는 살며시 귀띔했다.

“그냥 입에 댔다가 떼세요.”

스칼렛은 알았다는 눈짓을 하고 잔을 들어 올렸다.

체터필드 대공 또한 높이 들어 올리더니 주변을 둘러봤다. 모든 귀족과 레이디들이 급히 잔을 들고 따라 하자 대공이 크게 외쳤다.

“스칼렛 여왕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모두가 따라 했고 대공이 가장 먼저 잔을 입에 대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역시나 하나도 빠짐없이 대공처럼 잔을 비웠다.

스칼렛은 입술에 대는 시늉만 했다가 당황해서 대공의 흉내를 내 꿀꺽 한입에 털어 넣었다. 암시장에서 마셔본 술이 다 그렇듯 엄청나게 쓸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달콤했다. 복숭아 맛도 살짝 났다.

“후우. 이거 꽤 맛있네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루키우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마이 퀸. 그래도 술입니다. 더는 마시지 마세요. 춤을 추게 되면 열이 오를 겁니다. 토할 수도 있고요.”

그러더니 손에 들린 잔을 가져갔다.

스칼렛은 괜히 더워지는 기분에 손부채질하며 홀을 내려다봤고 대공을 비롯한 사람들 모두가 빈 잔을 내려놓는 중이었다.

그러는 사이 시종 무관이 계단을 몇 개쯤 올라서더니 크게 외쳤다.

“존경하옵는 여왕 스칼렛 케이틀린 아마칼리께서 첫 춤을 선보이시겠습니다.”

스칼렛은 긴장하며 일어섰고 사람들이 가외로 물러서서 가운데를 비웠다. 체터필드 대공이 계단 아래로 다가오더니 에스코트할 준비를 했다.

“긴장을 푸세요. 마이 스칼렛. 대공은 춤의 대가입니다.”

루키우스가 소곤거렸다.

“당신을 섭정이 아니라 재상으로 임명해버릴 걸 실수했네요.”

스칼렛은 슬쩍 치맛자락을 다듬는 척하며 대답하곤 계단을 내려가 체터필드 대공의 손을 잡았다.

“마이 퀸.”

대공은 점잖게 절하더니 손등에 키스했다.

환갑이란 나이가 무색하게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데다가 외모 또한 그럭저럭 봐줄 만하다 보니 느끼함은 없었다. 하지만 그게 도리어 능글맞게 느껴졌다.

“재상님.”

스칼렛은 구역질을 삼키며 대답하고는 그와 손을 잡고 플로어 가운데로 나섰다. 조용히 흐르던 연주가 멎더니 지휘자가 지휘봉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딱딱딱.

세 번 울리고 나자 음악이 시작됐다.

스칼렛은 대공의 손을 잡고 그동안 연습해온 대로 빙글빙글 춤을 췄다.

섰을 땐 온통 까만 인어 라인 드레스였지만 움직일 때는 접힌 부위에 숨은 붉은색 시폰이 확 펼쳐지도록 되어있다 보니 둘러선 레이디들의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세상에. 너무 예쁘네요.”

“저거 분명 아드리안의 작품일 거예요.”

“수도 최고의 디자이너라는 아드리안? 예약이 3년 치가 밀렸다고 들었는데 역시 여왕은 여왕이네.”

스칼렛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칭찬 일색의 목소리에 새삼 레이디 블란치에게 감사했다.

그저 밋밋한 검은 드레스 대신 파격적인 이 드레스를 강하게 제안한 건 바로 그녀였다.

레이디 블란치는 스칼렛의 대관식은 다른 말로 하면 사교계의 공식 데뷔라면서 제아무리 여왕이라 할지라도 모든 레이디들이 그렇듯 처음에 주목을 크게 받아야 이후가 편하다고 주장했다.

오로지 튀는 게 살길이다.

그것이 레이디 블란치가 내세운 핵심이었는데 지금 상황을 보니 통했다. 문제는 이게 쭉 가느냐였는데 그건 알 수 없었다.

“레이디 스칼렛. 사람들 주목을 받고 싶어 심히 안달 난 모양이군요. 뭐든 얌전한 게 없다니.”

체터필드 대공이 빠르게 돌고 도는 와중에도 숨찬 기색 하나 없이 말했다.

“그러는 재상님은 사람들에게 미움받고 싶어서 그러시는 건가요? 지난 한 달 넘게 수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재상님에 대해 좋게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군요.”

“그것참 억울하군요. 여왕 폐하께선 그저 옥좌에 앉아 사랑받기만 하면 되지만 재상이란 직위는 손을 더럽혀야만 일이 된답니다.”

“재상님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네요. 조건 없는 사랑이란 없답니다. 사랑이란 주고받는 거죠. 그냥 받기만 하려고 든다면 나쁜 놈이죠. 그도 모자라 강탈해간다면 범죄자고요.”

스칼렛은 술기운이 오르는지 빙글빙글 돌 때마다 어질어질했지만 지지 않고 외쳤다.

체터필드 대공은 받아칠 말이 없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입을 꾹 다문 채 춤을 이어갔다.

이윽고 춤이 막바지에 이르러 몸을 엇갈리는 동작을 하며 서서히 속도를 줄여가는데 대공이 불쑥 말했다.

“제위를 기념하여 그대가 앨버트 레오폴드와 애타게 찾고 있는 여왕 암살 사건의 주모자에 대해 알려드리지. 범인의 이름은 루키우스 아툼 엔네야드요.”

스칼렛은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하질 않았다. 이내 음악이 잦아들었고 스칼렛은 대공과 바짝 서며 춤을 끝냈다.

체터필드 대공은 그때를 놓칠세라 조용히 말했다.

“물론 믿기지 않겠지. 평소의 녀석은 정중하고 예의 바른 좋은 남자이니. 하지만 그 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아주 특별한 족쇄에 묶어 놨거든. 먹잇감이 걸리면 킬러로 돌변하게끔.”

스칼렛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머릿속에 앨버트 레오폴드로부터 몇 번이나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 떠올랐다.

시크릿 풋맨.

대공의 족쇄에 묶여 있는 루키우스를 쉐도우 슈발리에로 받아들일 때 각오한 바였지만, 이런 상황은 상상조차 하질 못했다.

체터필드 대공은 입꼬리만 들어 올려 사악하게 웃었다.

“얼굴을 보니 시크릿 풋맨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나 보고만. 맞소이다. 루키우스가 바로 시크릿 풋맨이지. 물론 녀석은 자신이 그런 줄 전혀 모르지. 그래서 난 녀석을 총애한다오.”

그리고는 물러섰다.

스칼렛은 멍하니 선 채 대공이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마이 퀸. 괜찮으십니까?”

어느 틈엔가 루키우스가 뒤에 와 서 있었다.

“술이…. 올랐나 봐요.”

스칼렛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고는 그대로 계단 뒤쪽에 있는 문으로 향했다.

루키우스가 잽싸게 곡 연주를 다시 시작하라 손짓했고 둘러서 있던 귀족과 레이디들이 중앙으로 나와 멋진 왈츠를 추기 시작했다.

스칼렛은 그 모두를 뒤로한 채 빠르게 걸어 정원으로 나섰다.

앞서 봤던 대로 색색의 등이 걸려 있어 곳곳에 있는 커다란 새장 모양의 휴식공간과 사이사이에 있는 나무들을 밝혔다.

어스름하게 빛이 닿는 곳은 죄다 갈대가 우거져 있었는데 가을이라 그런지 풀벌레 소리가 청아했다.

스칼렛은 그저 보이는 대로 그 모두를 지나쳐 가장 안쪽에 있는 거대한 나무 뒤에 숨었다. 등을 기대고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그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던 무수히 많은 별이 보였다.

‘체터필드 대공은 악귀야. 악귀가 분명해.’

저도 모르게 울먹이고 있는데 불쑥 루키우스가 나타났다.

“스칼렛. 몸이 안 좋습니까?”

걱정스럽게 묻는데 어찌나 눈빛이 다정한지 대공의 말이 다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괜찮아요. 이러고 좀 쉬면 좋아질 거예요.”

스칼렛은 그렇게 대답하며 루키우스를 끌어안았다.

평소엔 그의 쇄골 아래까지밖에는 머리가 닿지 않는데 무도회를 위해 신은 구두 때문인지 이번에는 쇄골 위까지 머리가 닿았다.

그랬더니 좀 더 안기는 느낌이 좋아 스칼렛은 볼을 그의 쇄골에 비비적대며 감촉을 즐겼다. 루키우스가 두 팔을 허리에 둘러 꽉 안나 싶더니 정수리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스칼렛. 대공에게 무슨 소릴 들은 겁니까?”

스칼렛은 풋, 웃었다. 역시 놀랍도록 눈치가 빠른 남자였다.

하지만 진실을 말할 순 없었다. 이토록 다정한 남자가 꼭두각시처럼 부려져 수많은 소녀를 죽음으로 밀어 넣었다는 사실을 알면 가만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숨겨야 했다. 최소한 시크릿 풋맨의 족쇄를 푸는 방법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비밀로 해야만 했다.

‘안 그랬다간 이 남잔 내 곁을 떠날 거야. 혹시라도 날 죽일까 봐서.’

속으로 다짐하고는 일부러 비아냥을 섞어가며 대답했다.

“어떤 말을 했을지 짐작이 가지 않아요? 그 인간 입에서 나올 소리야 뻔하죠.”

“혹시 날 빌미로 협박한 건 아닙니까?”

“아뇨. 절대 아니에요.”

“…키스해도 됩니까?”

“그보단 흡혈이 좋겠어요. 아깐 갑자기 대공을 당신을 부르는 바람에 방해받아서 이만 박고 말았잖아요.”

스칼렛은 가볍게 말하며 고개 들어 루키우스와 눈을 맞췄다. 짙푸른 눈동자 위로 어른거리는 은빛이 어둠 속에서 별처럼 반짝거렸다.

루키우스는 부드럽게 웃더니 코로 귓불을 비비적대며 말했다.

“이만 박고 끝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만.”

“그럼 저택으로 돌아가죠. 여기서 단체 플레이를 하고 싶진 않으니.”

“리처드 레오폴드가 춤추자고 했잖습니까? 기다릴 텐데요.”

“알게 뭐예요. 그딴 남자. 생긴 것만 보고 덤빌 레이디들이 꽤 많을 텐데.”

“좋습니다. 그럼. 가죠.”

그렇게 말하더니 루키우스는 덥석 손을 잡고는 정원 가외에 있는 회랑으로 이끌었다.

“여기서 저택까지 걸어서 가긴 멀지 않아요?”

스칼렛이 놀라서 묻자 루키우스가 척척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멀죠. 너무 멉니다. 그렇다고 마차를 부르고 어쩌고 하기엔 제 인내심이 부족하고요. 하지만 동궁은 저 회랑을 이용하면 10분이면 갈 수 있습니다. 그곳에 제 거처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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