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그대가 원하시는 대로
남궁의 왕실 도서관.
스칼렛은 들어서자마자 수업 시간이 15분 정도 남은 것을 확인하고는 뒤돌아섰다.
“루키우스.”
그러자마자 루키우스가 바로 눈치채고 스칼렛을 덜렁 들어 어깨에 떠메고는 성큼성큼 걸어 서가 깊숙한 곳으로 들어섰다.
적당히 출입구 쪽에서 멀어졌다 싶자 루키우스는 스칼렛을 내려주고는 곧바로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하읏!
흡혈이 주는 쾌감이 전신을 강타했다.
순식간에 다리 사이가 푹 젖어 들며 애액이 흘러내렸다. 지난 이 주 동안 시간 날 때마다 이랬더니 몸이 상당히 익숙해졌다.
“나의 음란한 여왕님. 정말 야하기도 하시지.”
루키우스가 이를 거두고 목덜미를 핥더니 달게 속삭였다.
스칼렛은 대답 대신 치마를 걷어 올렸다.
루키우스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따뜻한 눈빛으로 시선을 마주하더니 쪽,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음부에 와닿는 혀가 뜨거웠다.
추웁- 춥춥-
작은 살덩이를 빨아대는 두툼한 입술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너무 자극적이라 스칼렛은 손을 들어 제 입을 틀어막으며 안달을 했다.
“아으응….”
손가락 사이로 신음이 새자 루키우스가 혀를 질구 사이로 밀어 넣고는 할짝거렸다. 스칼렛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으며 그 감각을 만끽했다.
좋았다. 정말 좋았다. 루키우스의 커다란 손이 허벅지를 주물럭대는 것마저 자극적이었다.
‘하아. 하고 싶어.’
좀 더 강한 것으로 깊숙한 곳까지 마구 찔리고 싶다는 마음이 막 솟구쳤다.
하지만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벌써 한 달째, 내일 열릴 대관식 준비에 잠잘 시간마저 부족해 다시 잠자리하기는커녕 이렇게 서로를 확인하는 시간조차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헉!
루키우스의 굵은 손가락이 음부로 파고들었다. 스치기만 해도 자지러지는 내벽을 긁어대나 싶더니 무섭도록 빠르게 위아래로 휘젓기 시작했다.
찔걱찔꺽찔걱
애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눈앞이 하얗게 타올랐다. 더는 참지 못하고 스칼렛은 배 속을 바짝 조이며 절정에 올랐다.
바들바들 온몸이 떨렸고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쓰러졌다.
루키우스가 가볍게 받아안더니 진하게 키스를 해왔다.
굵은 혀가 마치 성기처럼 입안을 마구 범했다. 단단한 혀가 목구멍을 찔러대더니 송곳니가 혀끝에 박혔다.
그가 피를 빨아들였고 스칼렛이 밀려드는 쾌감에 억눌린 숨을 터트리는 순간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젠장-”
루키우스가 입술을 거두더니 잇새로 으르렁거렸다.
스칼렛은 그의 짙푸른 눈동자가 어둠을 품어 심연처럼 빛나는 것을 보았다. 순백의 피부와 검은 제복과 어우러져서인지 무척 예뻤다.
“그러고 보지 마십시오. 여왕님. 이대로 당신을 쓰러뜨리고 성이 찰 때까지 박고 싶어지니까요.”
루키우스는 귓가에 소곤거리더니 발소리가 들리자 얼굴을 구기며 한발 앞서 서가를 걸어나갔다.
“천천히 나오십시오.”
남겨진 스칼렛은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뒤따라 걸어 나갔다.
“안녕하세요? 브라운 교수님.”
일부러 서가를 빙 돌아 이제야 도착한 듯 굴며 크게 말했다.
중앙에 놓인 책상에 앉아 새로 들고 온 책을 살피고 있던 브라운 교수가 일어서더니 절했다.
“어서 오십시오. 여왕 폐하.”
그러더니 스칼렛이 맞은편에 앉자 따라 앉으며 말을 이었다.
“내일이 대관식이라 오늘 수업을 취소하실 줄 알았는데 이리 학구열이 넘치시다니 기쁩니다.”
‘이 시간이 아니면 루키우스와 단둘이 있을 때가 없어서요. 심지어 티타임 때까지 귀부인들이 몰려오신다지 뭐예요. 미망인들이 허벅지를 찌른다더니 왜 그런지 이제야 알겠다니까요.’
스칼렛의 머릿속에선 이런 대답이 떠올랐지만, 브라운 교수가 혼비백산할까 봐 대충 대답했다.
“신입 여왕에게 공부는 필수니까요.”
그러자마자 좀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루키우스가 입술을 안으로 마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웃음을 참는 눈치였다.
다행히 브라운 교수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듯 흐뭇해하며 말했다.
“여왕 폐하. 그럼 챕터 14장의 첫 줄을 좀 읽어보실까요?”
“아마칼리 여왕이 대마녀라 불리던 시절, 주술의 근원은 쇠와 기계장치로 되어있었다.”
스칼렛은 시킨 대로 소리 내 읽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쇠와 기계장치?”
그러자 브라운 교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오늘 옆구리에 끼고 온 책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마칼리 여왕이 남긴 주술서입니다. 우리가 아는 마녀들과 무엇이 다르기에 대마녀라 불렸는지 알 수 있지요.”
그러면서 펼친 책 페이지에는 놀랍도록 복잡한 모양의 도형들이 한가득 그려져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스칼렛을 보살펴 준 암시장 크레타 할머니를 비롯해 마녀란 존재는 약초나 벌레들을 이용해 정체불명의 약재를 만들어 이용했기에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도대체 이 도형을 가지고 뭘 하는 건데요? 그려요?”
“의견이 분분합니다. 남기신 일기장에 따르면 아마칼리 여왕은 뱀파이어에 의해 붕괴한 인간 문명의 생존자였다고 합니다. 마녀가 아니라 그땐 초소형 로봇 유전공학자라 불렀다더군요.”
“초소형 로봇 유전공학자? 그게 뭔데요?”
“모릅니다. 그 문명이 남긴 주술은 뱀파이어에 의해 깨끗이 삭제되었거든요. 어쨌거나 여왕은 로봇 유전공학이란 주술을 다루는데 천재였고, 뱀파이어 왕을 가르치기도 했죠.”
“헉! 아마칼리 여왕이 저주를 할 정도로 집요하게 들볶던 왕이 제자였군요! 빡칠 만하네.”
스칼렛이 제 이마를 치며 외치자 브라운 교수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쓰고 있던 안경을 올려 썼다.
“빡칠…. 여왕 폐하. 제가 늙어서 그런지 도통 무슨 뜻인지.”
“모르셔도 돼요. 그래서요?”
“뱀파이어 왕은 천재였던지라 배움에 아주 뛰어났습니다. 이 왕궁을 설계한 것도 왕이었고,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공중 회랑 또한 그가 만든 거라더군요.”
“공중 회랑이 그렇게 유명한 거였어요? 너무 당연한 듯 이용해와서 미처 몰랐네요.”
“사실 타국에는 공중 회랑보다는 왕의 분노가 더 유명하긴 하죠. 뱀파이어들이 다스리는 나라에선 아직도 그 주술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첩자를 보내온다고 하더군요.”
“왕의 분노가 뭔데요?”
“마지막 뱀파이어 왕이 이 나라를 다스리던 그때, 바다 건너 강대국 페란의 술탄이 수십만의 군대를 보내왔습니다. 이 성 앞까지 진군해 왔죠.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는데 뱀파이어 왕은 주술을 이용해 왕의 분노라는 무기를 만들어 그들을 향해 휘둘렀습니다. 전투는 대승했다더군요.”
“그런 게 있으면 정말 좋겠네요! 혹시 그거 누구한테 받아야 하는지 아세요?”
“여왕 폐하. 그건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이 성 어딘가에 있다고는 하는데 액체열쇠가 있어야만 한다더군요. 연금술사들이 액체열쇠를 만들려고 기를 쓰고 있지만 성공한 이는 없죠.”
브라운 교수의 설명에 스칼렛은 아쉬워하다가 문득 제 목에 걸려 있는 호리병을 떠올리고는 흠칫했다.
‘이 안에 든 게 설마 액체열쇠는 아니겠지?’
아버진 호리병 안에 아마칼리 여왕의 피가 담겨 있다고 했지만, 열어본 게 아니니 알 수 없었다.
갑자기 목에 다이아몬드 목걸이라도 걸린 듯 무게가 느껴졌고, 스칼렛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옷 속에 숨겨 지니고 있던 호리병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브라운 교수가 반사적으로 바라보더니 두꺼운 안경을 올려 쓰며 눈을 빛냈다.
“재미난 목걸이를 걸고 계시는군요.”
스칼렛은 당황했지만, 별거 아닌 척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선물 받아서 예의상 걸고 있는 것뿐이에요.”
“누구의 선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한 선물을 했군요.”
“네? 이거 싸구려 목걸인데요. 암시장 가면 흔하게 볼 수 있는 도자기로 만든 거예요.”
“아닙니다. 여왕 폐하. 그건 오르콘이라는 희귀 금속으로 만든 겁니다. 그만한 크기조차 무척 귀해서 아무리 싸게 쳐줘도 금 열 상자는 받을 겁니다.”
“금 열 상자요! 이게 그렇게 귀해요?”
“흙처럼 쓸 수 있는 금속이니까요. 왜 귀한지는 밤에 등불 앞에 두고 비춰서 보면 아실 겁니다.”
“설마 안에 든 게 보이는 건가요?”
“만든 이의 목적에 따라 다르다고 알고 있습니다. 뭐, 전 그저 책에서 읽은 것뿐입니다. 오르콘을 다루는 기술은 아마칼리 여왕 시대 이전부터 존재했거든요.”
“…이 목걸이에 대해 비밀로 해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여왕 폐하. 자, 그럼 다음 문장을 읽어보실까요?”
브라운 교수는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책을 집어 들었다. 스칼렛은 심장이 콩콩 뛰는 걸 느끼며 다음 문장을 읽었다.
“아마칼리 여왕은 뱀파이어로부터 돌려받은 세상을 자신이 알던 세상으로 돌려놓고자 하였으나 위대한 주술을 이해할 자가 없었고….”
***
수업을 마치고 남궁에서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스칼렛은 창밖을 내다보며 제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첫날을 제외하곤 무심하게 지나치던 왕궁의 회랑이 몹시도 신기해 보였다. 교수가 말해준 대로 빨리 가서 불빛에 목걸이를 비춰보고 싶었다.
“마이 퀸. 그러지 마세요.”
맞은편에 앉아 있던 루키우스가 불쑥 말했다.
스칼렛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져서 바라봤다. 그러자 루키우스가 손을 뻗어 팔을 잡더니 확 끌어당겨 제 무릎에 앉혔다.
워낙 힘이 좋다 보니 저항할 틈도 없었기에 그저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루키우스는 키스할 듯 얼굴을 가까이하며 소곤거렸다.
“스칼렛. 다시는 목걸이를 노출하지 말아요.”
스칼렛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어째 말투가 이 목걸이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만 같았다.
“저기 루키우스…. 이 목걸인….”
“압니다. 당신 이외는 제대로 만질 수도 없다는 걸. 그러니 그 목걸이는 아마칼리 여왕이 초대 헐버트 공작에게 준 선물이겠죠. 아마도 위대한 주술이 깃들어 있을.”
루키우스의 추측에 스칼렛은 숨을 삼켰다.
입안이 바짝 말라왔다.
그는 순혈 뱀파이어였고 이 목걸이에 아마칼리 여왕의 피가 담겨 있다면, 그를 옭아매고 있는 족쇄를 끓을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다.
‘말해도 될까? 그를 믿어도 되는 걸까? 그가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서라도 이 비밀을 지켜줄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만약 입장이 반대였다면 스칼렛은 이것이 열쇠라고 듣는 순간 강탈해서라도 제 발목에 매인 족쇄를 풀 것 같았다.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 마차가 저택 앞에 도착했는지 서서히 멈췄다.
루키우스가 안 되겠다 싶었던지 이마를 마주 대며 소곤거렸다.
“스칼렛. 대답할 수 없다면 대답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러더니 짤막하게 키스하고는 말했다.
“당신이 의지해야 할 건 나뿐이란 것만 잊지 마세요. 그리고 이리나를 조심하시고요.”
“이리나? 이리나가 왜요?”
스칼렛은 다급하게 물었지만, 루키우스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마차의 문이 열렸다.
문을 연 시종 무관이 당황한 얼굴로 바라봤다.
스칼렛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루키우스의 무릎에서 내려와 마차 밖으로 나왔다.
“다녀오셨습니까? 유어 그레이스.”
순혈 메이드와 마중 나와 있던 이리나가 반갑게 맞았다.
대관식 이후 열리는 공식 무도회 때문인지 다들 들뜬 분위기였다. 귀족들과 따로 그들을 위한 만찬이 준비되는 데다가 순혈만을 위한 작은 무도회도 열린다고 하니 당연했다.
스칼렛은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이리나가 대체 뭐가 문제지? 이렇게 좋은 레이디스 메이드 두기도 힘들 것 같은데….’
정말이지 루키우스를 앉혀놓고 캐묻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 따윈 없었다.
대관식에서 입을 드레스와 걸칠 모피 망토는 진즉에 완성됐지만, 내일 무도회를 위한 드레스들은 오늘에야 완성돼 도착했고 구두와 장신구 또한 그랬다.
평소 일정과 더불어 그것들을 고르는 시간까지 더해지니 순식간에 저녁이었다.
심지어 드레스와 구두를 골라주겠다며 온 레이디 블란치가 장신구의 앙상블을 외치는 바람에 무려 한 시간을 초과했고 본래 그 시간에 오기로 되어있던 앨버트 레오폴드가 나타났다.
스칼렛은 어쩔 수 없이 그를 저녁 식사에 초대해 보고를 들어야만 했다.
“오늘은 다소 슬픈 소식부터 전해드려야겠습니다.”
앨버트 레오폴드는 스칼렛이 따뜻한 수프를 한 숟가락 입에 떠넣자마자 엄숙하게 말했다.
‘내 이래서 밥 먹을 땐 보고를 받고 싶지 않았는데….’
저절로 얼굴이 구겨졌지만 차마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지난 한 달 내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난 뒤 내일 저녁에 열리는 공식 무도회를 위해 춤 연습을 해왔는데 여전히 서툴러서 건너뛸 수가 없었다.
“말해봐요.”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묻자 앨버트 레오폴드는 언제나 그랬듯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스칼렛이 하는 말을 죄다 받아적을 분위기를 팍팍 풍기며 입을 열었다.
“전대 여왕님의 슈발리에들 조사 과정에서 어젯밤, 타비우스라는 순혈 뱀파이어를 긴급 체포했고 그의 자택에서 전대 여왕님이셨던 레이디 올리비아의 유서를 찾아냈습니다.”
그렇게 설명을 하고는 차마 말을 잇기가 힘든지 텅 빈 수첩을 뚫어지라 바라보며 고백하듯 읊조렸다.
“여왕님의 추측이 맞았습니다. 자살 당한다고 쓰여 있더군요. 레이디 올리비아의 저택으로 가서 유서를 내밀자 그제야 그분의 여동생이 납치되었다가 풀려났다고 고백을 하더군요.”
스칼렛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가슴이 몹시 아팠다.
레이디 올리비아는 스칼렛과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은 아가씨였다.
18살이란 나이도 같은 데다 이곳 수도에 빵집을 열고 열심히 일해 작위뿐인 제 가족을 먹여 살리려 했다는 점이 똑같았고 그 가족을 제 목숨보다 귀하게 여긴다는 점도 그랬다.
또한, 마치 제가 왕인 듯 구는 체터필드 대공이 마뜩잖아 그를 재상직에서 물러나게 할 방법을 찾아 골몰했다는 것도.
그런 둘의 차이는 하나뿐이었다.
레이디 올리비아에겐 상황을 조곤조곤 알려주고 전적인 지지를 보낼 리처드 공자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스칼렛은 레이디 올리비아가 어떤 이유로 자살을 해야 했다면 억울해서라도 유서를 남길 거로 생각했고 그 짐작이 맞은 거였다.
“그래서 타비우스란 뱀파이어는 대체 왜 유서를 빼돌렸는지 말하던가요?”
마음을 추스르며 묻자 앨버트 레오폴드는 수첩에 펜을 콕콕 찔러대며 말했다.
“빼돌린 게 아니라 맡아뒀을 뿐이라더군요. 타비우스는 레이디 올리비아의 쉐도우 슈발리에였습니다. 죽기 전날 밤, 유서를 맡기며 진실을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넘기라고 했다더군요.”
“사실일까요?”
“그런 것 같습니다. 다른 슈발리에들을 인터뷰해 보았는데 유일하게 타비우스가 가장 분개에 차 있었거든요.”
“그런데 왜 긴급체포를 하셨어요?”
“살해당할까 봐요. 레이디 올리비아의 명령으로 가족들을 몰래 지켜보고 있었는데 회색 망토를 입은 남자에 의해 여왕의 여동생이 납치되는 걸 봤다고 증언했거든요.”
“대공의 시크릿 풋맨이군요. 하아- 잘하셨네요. 유용한 카드가 되겠어요. 잘 지켜주세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마이 퀸.”
앨버트 레오폴드는 그렇게 대답하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 몫으로 차려진 음식에 손도 대지 않은 채로.
스칼렛은 그의 심정이 이해가 돼 권하지도 못하고 그가 나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엘버트 레오폴드는 다시 돌아와 허둥대며 제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죄송합니다. 여왕 폐하. 제 형님께서 전해드리라고 한 걸 깜빡했네요.”
그러면서 내민 건 하트 모양으로 접힌 종이쪽지였다.
스칼렛은 하트 모양이 다소 의미심장했지만, 황급히 받아들고는 펼쳐 보았다.
-무사합니다.-
단순했지만 충분했다.
스칼렛은 너무 기뻐 손으로 입을 막으며 숨을 크게 들이켜 감정을 추슬렀다.
레오폴드 성의 언덕에서 리처드 공자에게 섭정직을 제안하며 대신 가족들을 모두 레오폴드 성으로 데리고 와 보호해달라고 협상했는데 해낸 모양이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이로써 우리 가족이 레이디 올리비아의 가족처럼 인질로 잡힐 일은 없어졌어.’
속으로 환호하고 있는데 앨버트 레오폴드가 말했다.
“뭔가 대단히 좋은 소식이 적혀 있나 보군요.”
“그래요. 좋은 소식이에요. 그대의 형님, 레오폴드 공작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스칼렛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고 앨버트 레오폴드는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는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여왕 폐하. 그럼 전 이만.”
식당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스칼렛은 갑자기 식욕이 돌아 다 식어버린 수프를 비롯해 준비된 요리를 모두 먹어 치웠다. 아주 오랜만에 그릇을 싹 비우자 시중들던 이리나도 쉐프도 아주 기뻐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남은 오늘의 일정은 춤 연습이었다.
춤 선생은 귀족 영애들에게 수년째 춤을 가르쳐온 여자로 순하게 생긴 인상과는 달리 아주 무서웠다.
대충 끝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고 한술 더 떠 춤 상대는 슈발리에들이었다.
대체 무슨 기준으로 뽑히는지는 몰라도 매일 다른 슈발리에가 나타났는데, 대부분이 여왕의 애인이 될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나같이 느끼할 정도로 접근해오거나 아니면 반대로 지나치게 남성성을 뽐내며 제멋대로 다루려 들거나 하는 식으로 스칼렛의 마음을 사려 들었다.
그러다 보니 저택 뒤쪽에 있는 춤 연습을 위한 거울이 사방에 박힌 댄싱홀에 들어가는 발걸음이 매우 무거웠다.
게다가 내일이 무도회니 춤 선생이 더더욱 매섭게 굴 게 뻔해 더욱 걸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막상 들어서고 보니 댄싱홀 한가운데 루키우스가 우뚝 서 있었다.
춤 연습을 위해 만나던 슈발리에들이 입고 있던 연미복 차림인 걸 보니 오늘의 상대는 루키우스인 모양이었다.
스칼렛은 기뻐서 폴짝 뛰었지만, 루키우스의 표정은 어쩐지 심란했다. 의아해하며 그와 마주 서자 춤 선생님이 손뼉을 치며 외쳤다.
“자! 여왕 폐하. 바로 시작하죠. 내일 무도회의 오프닝 댄스를 연습해보겠습니다!”
그리고는 커다란 나팔관이 달린 박스의 스위치를 눌렀다.
파이프 오르간처럼 웅장한 왈츠용 음악이 나팔관을 타고 흘러나왔다. 수도의 악기 장인이 만든 것으로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뮤직박스 기술 중 하나였다.
스칼렛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저와 춤추시겠어요?”
순간 루키우스의 눈동자 위로 은빛이 어른거리며 그의 입꼬리에 웃음이 걸렸다.
“기꺼이. 마이 퀸.”
루키우스의 리드는 아주 부드럽고 유연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춤춰온 것이 분명한 듯한 동작이라 스칼렛은 편하게 몸을 맡길 수 있었다.
덕분에 남자의 손에 의지해 한 바퀴 빙그르르 돌거나 하는 고난도 기술도 잘 해낼 수 있었다.
스칼렛은 신났고 너무 들떠서 계속해서 웃어대느라 루키우스가 몰래 말 걸 타이밍만 노리고 있었다는 걸 미처 몰랐다.
“쪽지에 뭐라 적혀 있었던 겁니까?”
홀 가득 음악이 쿵쾅거리고 있었지만, 귓가에 대고 소곤거리니 못 들을 수가 없었다.
스칼렛은 한 바퀴 돌아 그의 가슴에 등을 기대는 동작에서 재빠르게 대답했다.
“우리 가족이 레오폴드 성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이었어요.”
루키우스는 끊김 없이 스칼렛의 손을 잡고 확 밀어냈다가 다시 잡아들이는 동작을 이어가면서 소곤거렸다.
“레오폴드 공작에게 납치된 건 아니고요?”
스칼렛은 좀 황당해 춤추는 사이사이 그에게 접근할 때마다 말했다.
“그럴 리가요! 그에게 섭정의 지위를 약속하고 그는 내 가족을 보호하기로 서약했는걸요.”
루키우스 또한 자연스럽게 춤을 리드하며 대답했다.
“대체 왜 그랬습니까? 말했잖습니까. 친여왕파라 해도 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일 뿐이라고.”
“아까 식당에서 레이디 올리비아에 관한 이야기 들었잖아요. 내겐 가족이 무엇보다 소중해요.”
“스칼렛. 그 남잔 전대 레오폴드 공작과 헬레나 세이턴이라는 순혈 뱀파이어 사이에서 태어난 뱀파이어입니다.”
“뭐라고요!”
스칼렛은 너무 놀라 우뚝 멈춰 섰다. 그러자 춤 선생님이 손뼉을 치며 독려했다.
“여왕 폐하. 계속하세요! 내일을 위해서요!”
“계속하죠. 마이 퀸.”
루키우스는 정중하게 말하더니 다시 스칼렛을 빙그르르 돌리며 춤을 계속 춰갔다. 스칼렛은 방금 들은 이야기가 너무 황당해 계속 곱씹었다.
하지만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리처드 레오폴드는 사람처럼 보였고 아마칼리 혈통만이 가지는 황금빛 안개 같은 것이 눈동자 위에 흘러 다녔다.
그건 절대 조작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초대 아마칼리 여왕 같은 대마녀가 어딘가에 있다면 또 몰라도.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루키우스가 끌어안는 동작을 하면서 속삭였다.
“스칼렛. 이리나는 헬레나 세이턴의 여동생이에요. 헬레나는 리처드 공자를 낳고 카운테스 레오폴드에게 살해당한 것 같습니다.”
“이리나가요! 세상에. 맙소사.”
“놀랄 건 그게 아닙니다. 바로 그 둘이 아마칼리 여왕의 선물을 찾고 있어요.”
“어, 어째서….”
스칼렛은 더듬거리며 저도 모르게 손을 뻗는 춤 동작 대신 목걸이를 어루만지려 했다. 하지만 잽싸게 루키우스가 손을 잡아채 빙그르르 돌리고는 말했다.
“이런 말을 듣는다고 해도 다시는 손대지 말아요. 알았죠?”
스칼렛은 숨을 들이켰다. 이젠 춤을 추느라 힘겨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상황 자체에 멀미가 나기 시작했다.
“좀 쉬어야겠어요.”
멈춰 서며 외치자 춤 선생님이 음악을 끄더니 손뼉을 쳤다.
“멋지세요. 여왕님. 오늘 처음으로 아주 부드럽게 춤을 이어가셨습니다. 리드자가 좋아서인 것 같지만 어쨌거나 적어도 내일 재상님과의 오프닝 댄스는 잘하실 수 있겠어요.”
스칼렛은 온 힘을 다해 웃어 보이고는 후원으로 이어지는 문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너무 더워서 잠깐 땀 좀 식히고 들어올게요.”
“그러시죠. 여왕님. 10분 뒤에 다시 시작합시다.”
춤 선생님이 대답했다.
스칼렛은 댄싱홀 뒤쪽 문을 열고 날다시피 걸어나갔다.
해가 진지 오래라 정원은 달빛만이 가득했다. 솜씨 좋게 심어진 색색의 꽃들이 앞다투어 향을 피워올려 공기 사이로 은은함이 감돌았다.
스칼렛은 숨을 크게 들이켜며 놀란 가슴을 달랬다. 그러고 있노라니 등 뒤에서 루키우스가 다가서더니 품 안에 끌어안으며 소곤거렸다.
“스칼렛. 두려워하지 말아요. 티베리우스와 그들이 그걸 찾는 목적에 대해 조사 중이니까요. 그것이 밝혀지면 대처할 방법도 나올 겁니다.”
“루키우스. 내가 가족을 사지로 떠민 걸까요? 난 보호하려고 레오폴드 성으로 보낸 건데 만약 당신 말이 맞는다면….”
스칼렛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갑자기 울컥하더니 눈물이 솟구쳤다.
“쉿. 울지 말아요. 내가 좀 더 빨리 말해줬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사방에 대공이 뿌린 눈과 귀가 너무 많다 보니 확실한 증거가 잡힐 때까지 기다려 온 내 잘못이에요.”
루키우스가 달래듯 속삭였다.
스칼렛은 몸을 돌려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소리 내 울지도 못하고 그저 끅끅 참고 있으려니 부드러운 손이 머리를 쓸어내렸다.
“자. 자. 그만. 내일은 대관식이고 리처드 공자는 당신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테니 아직 가족을 어찌하진 않을 거예요. 그 전에 빼낼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죠.”
스칼렛은 엉엉 울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 루키우스 말이 맞았다. 지금은 울 때가 아니라 방법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나도 고민해볼게요.”
고개를 젖혀 시선을 맞추며 읊조리자 루키우스의 입술이 활처럼 휘었다.
달빛 아래 짙푸른 눈동자가 은빛으로 빛나더니 붉은 입술 사이로 두툼한 혀가 나와 스칼렛의 눈가를 핥았다.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루키우스가 단단히 허리에 팔을 감고 있어 꼼짝달싹 못 했다.
“나의 여왕님. 울 때면 물드는 이 눈가가 얼마나 예쁜지 아셔야 할 텐데. 뱀파이어 왕을 위해 핀다는 아에리우스 꽃처럼 분홍색 물이 들거든요.”
낮고 그윽한 목소리 아래 드글거리는 욕정이 느껴졌다.
스칼렛은 어쩐지 무서워져 어색하게 웃었다.
루키우스는 눈가에 새가 쪼듯 입을 맞추더니 소곤거렸다.
“당신을 안고 싶어 미치겠네요. 두 번째 밤은 대체 언제 올는지.”
그러더니 놔주었다.
스칼렛은 허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아 다리에 힘을 주며 바로 섰고 그러자마자 댄싱홀의 문이 열리며 춤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왕 폐하. 쉬는 시간 끝났습니다!”
이제 보니 뱀파이어의 뛰어난 청각으로 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놔준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그런 야한 말을 흘리다니 얼굴이 너무 달아올라 더울 지경이었다.
‘정말 짓궂다니까….’
스칼렛은 달아오른 제 얼굴을 식히기 위해 손부채질을 하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
루키우스는 도망치듯 멀어져가는 스칼렛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희미하게 근처에 숨어 있던 아이렛이 뒷걸음치는 기색이 느껴졌다.
본인은 들키지 않았다고 자신하는 모양이지만 스칼렛이 울고 있을 때 다가서면서 밟은 나뭇가지 소리가 너무 컸다.
충성 맹세 때문이라기엔 참 열심이었다. 필립 후작에게 뭔가 다른 걸 약속받았는지도 모르겠단 의심이 일었다.
이곳은 왕궁, 온갖 모략이 판을 치고 서로의 이익을 조금이라도 더 보장받기 위해 아귀처럼 날뛰는 자들이 즐비한 곳이니 가능했다.
겉보기에만 평화로운 공기를 들이켜며 앞을 보니 스칼렛이 댄싱홀의 문에 서서 돌아보고 있었다. 얼핏 불빛에 녹색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반짝였다.
“왜 저리 예쁘게 구시는지. 날 얼마나 미치게 하고 싶어서.”
아무래도 아이렛을 의식해 흘린 야한 말에 살짝 흥분한 모양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아이렛 때문이 아니라 제 속마음을 그저 드러낸 것뿐이었다.
루키우스는 마른세수를 하며 뻐근해 오는 하반신을 가라앉히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뱃속 깊숙이 지펴진 불은 지난 한 달 사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정말이지 함께 밤을 보내고 난 다음 날, 스칼렛이 갑자기 쓰러지지만 않았어도 참지는 않았을 거다.
처음에는 과도한 흡혈로 인한 혈액 부족인 줄 알았는데 스칼렛을 진찰한 의사는 갑자기 너무 강한 쾌락이 주어져 몸이 놀란 것이라 했다.
“뱀파이어의 정액은 말입니다. 피를 빠르게 재생시키는 힘도 있지만, 쾌감을 증폭시키는 힘도 있습니다. 경험이 없는 여왕의 몸이 놀라지 않도록 쾌감에 서서히 익숙해지도록 만드세요.”
루키우스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고, 오로지 스칼렛의 만족을 위해 애를 썼다.
그게 한계가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만 야한 말을 해도 귀가 빨개지는 스칼렛, 검술대련 때문에 상반신을 벗고 있었더니 넋을 놓고 바라보던 스칼렛, 시간을 쪼개 흡혈과 페팅을 즐길 때면 대범한 척하는 스칼렛.
그의 머릿속은 이제 온통 스칼렛뿐이었다.
궁의 모든 이들이 금욕적이라 부르던 두 달 전의 과거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후우-
루키우스는 애써 긴 한숨을 내쉬어 몸속의 불길을 빼내고는 빠르게 걸어 스칼렛에게 다가섰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바라보고 서 있었더니 왜 그러나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루키우스는 볼을 타고 흘러내린 귀밑머리를 넘겨주며 소곤거렸다.
“예뻐서 봤습니다.”
그러자마자 스칼렛의 볼에 꽃물이 들었다.
***
늦은 밤.
루키우스는 스칼렛의 침실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자마자 바로 일어섰다.
응접실 출입구를 지키는 슈발리에들에게 나간다고 넌지시 알리고는 회랑을 이용해 동궁에 있는 시종 무관실로 향했다.
들어서니 티베리우스와 함께 미리 만나기로 약속했던 작은 숙부가 서 있었다.
“루키우스. 오랜만이구나!”
무척 반색하는 작은 숙부는 언제나 그랬듯 활기로 넘쳤다.
엔네야드가는 대대로 뛰어난 학자를 배출하기로 유명했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이렇다 할 학자가 없었는데 작은 숙부가 나타나면서 그 명성을 다시 찾았다.
그랬기에 그가 일곱 살 때 당주직 계승권을 두고 큰 숙부와 다툼이 있었을 때 가문에선 장자 계승원칙을 내세우는 작은 숙부의 편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작은 숙부는 이름만 당주인 그를 무조건 지지해 온 엔네야드가의 거의 유일한 어른이었다.
“작은 숙부님!”
루키우스가 덥석 손을 잡으며 외치자 작은 숙부가 다른 손을 들어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넌 여전하구나. 웃는 것도 반기는 것도. 때가 묻지 않아서 좋다.”
“때가 묻지 않기는요. 재상의 시종 무관이 되면서 온갖 때가 다 묻었는걸요.”
“그거야 저주 때문이잖니. 그걸 두곤 때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저 조종당하는 것뿐이니.”
작은 숙부는 울적한 목소리로 읊조리더니 아차 싶었든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나에게 묻고 싶은 게 뭔데 여기까지 부른 거냐?”
루키우스는 여전히 자신의 것으로 되어있는 시종 무관실을 손짓했다.
“저곳으로 자리를 옮기시죠. 이곳은 누구나 드나들 수 있거든요.”
작은 숙부는 군말 없이 시종 무관실로 들어섰고 티베리우스는 망을 보겠다는 눈짓을 하며 문 앞에 섰다.
루키우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고마움을 표시하곤 문을 닫았다.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니 큰일인가 보구나.”
작은 숙부가 물었다. 루키우스는 당장에라도 털어놓고 싶었지만, 이곳 또한 믿음이 가질 않아 책장 뒤에 숨은 비밀방으로 안내했다.
그렇게 이중으로 숨고 나서야 비로소 입을 뗄 자신이 생겼다.
“작은 숙부님.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말아주십시오. 제가 사랑하는 여자의 목숨이 걸려 있거든요.”
“연인이 생긴 거냐? 그거 축하할 일이구나. 이성에게 하도 관심이 없어서 혹시나….”
작은 숙부는 기뻐하며 외치다 말고 말끝을 흐리더니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루키우스에 권하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루키우스는 그대로 선 채 빠르게 그간의 일을 말했다. 하나도 빠짐없이. 스칼렛 몰래 집으려고 해봤지만, 목걸이에 손조차 댈 수 없었다는 사실도.
그러다 문득 레오폴드 성에서 봤던 아에리우스 꽃이 떠올라 덧붙였다.
“작은 숙부님이 전에 말씀하셨던 대로였습니다. 제가 그 길에 들어서니 붉게 물들더군요. 그러다 제가 연인과 둘만 있고 싶어 하자 벽을 만들더니 꽃잎이 은빛으로 변했고요.”
“은빛이라고?”
작은 숙부의 표정이 확 변했다. 루키우스가 앞서 한 말에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는데 눈까지 휘둥그레진 걸 보니 충격에 빠진 것 같았다.
“왜 그러십니까? 아, 물론 은빛으로 변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만 대단히 아름다웠습니다. 마치 우리 순혈 뱀파이어들이 달빛을 받을 때 뿜어내는 은빛 같았거든요.”
“루키우스. 네가 말하는 연인이라는 여자가 혹시…. 여왕이니?”
“여기까지 말했는데 속이는 것도 무리겠죠. 맞습니다. 현재 여왕위에 오른 스칼렛 여왕입니다. 전 그녀의 쉐도우 슈발리에고요.”
“이런, 이럴 수가.”
작은 숙부는 무척 당황한 듯 손을 들어 입가를 쓸며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은빛 꽃잎이 뭔가 엄청난 상징입니까?”
루키우스가 답답해하며 묻자 작은 숙부는 얼이 나간 표정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천 년 전, 아마칼리의 저주를 받은 뱀파이어 왕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단다. 뱀파이어의 저주는 아마칼리의 피로 인해 풀릴 것이라고.”
“그건 아마칼리 여왕의 묘비에도 쓰여 있잖습니까. 아타 논 베르다 수칼레 아르카디움.”
“그래. 그렇지. 근데 말이야. 그 뒷말이 있단다.”
작은 숙부는 그렇게 말하더니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로지 아에리우스 꽃만이 그것을 알아볼진대, 은빛으로 빛날 것이라고 했단다. 으흠. 아무래도 그 안에 든 게 천년의 저주를 풀 열쇠인 것 같구나.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그러면서 말끝을 흐렸지만, 루키우스는 뒷말을 알 것 같았다.
‘설마 안에 든 것이 아마칼리 여왕의 피인가?’
현기증이 일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고동쳤다.
온 뱀파이어 일족이 이를 갈며 풀려나기만을 바라는 족쇄의 열쇠가 사랑하는 여인의 목에 걸려 있었다.
“루키우스. 여왕을 진심으로 사랑하니?”
작은 숙부가 조심스레 물었다.
루키우스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합니다. 아마도 그녀보다 제가 더 사랑할 겁니다. 오로지 그녀의 피밖에는 삼키지 못하게 됐거든요.”
“평생을 함께할 반려란 소리구나. 그렇다면 극도로 조심해야겠구나. 리처드 공자가 여왕의 목걸이를 찾기 위해 아에리우스 꽃을 깨워 시험했다는 생각이 들거든.”
“그렇군요. 이제야 이해가 가네요. 절 죽을 듯이 노려본 주제에 간다고 아에리우스 꽃을 깨운 이유를 잘 몰랐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던 루키우스는 문득 의아해졌다.
“그런데 여왕이 건 목걸이는 손조차 댈 수 없는데도 이리나가 계속 곁에 머무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실수로라도 벗기를 기다리는 게 아닐까? 그나저나 브라운 교수란 분이 여간 똑똑한 게 아니구나. 한눈에 오르콘을 알아보다니. 도자기 재질이 거의 비슷해 보여 전문가도 헷갈리는데.”
작은 숙부가 말했다. 그러더니 문득 떠오른 듯 손가락을 튕기며 물었다.
“혹시 그 브라운 교수 이름이 헤더 브라운이니?”
“그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왜 그러세요?”
“잘 됐구나! 일 년에 두 번씩 학자들끼리 개최하는 체스경기가 있거든. 그때 만나본 적이 있다. 좋은 대련 상대였지. 이거 조만간 체스 한판 두자고 전갈을 넣어야겠구나.”
“수도에 머무시게요?”
“네가 위험할 수도 있는데 연구실로 돌아간다고 손에 뭐가 잡히겠니? 내가 브라운 교수를 만나 이야기를 좀 나눠보마. 일단 그의 입을 봉하는 것도 필요한 것 같고.”
그렇게 작은 숙부와 대화를 마치고 난 뒤 티베리우스가 모는 마차에 태워 배웅했다.
루키우스는 쉐도우 슈발리에의 본분을 위해 조용히 다시 여왕의 저택으로 향했다. 올 때는 가벼웠던 발걸음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무거웠다.
한 달 전, 우연히 리처드 레오폴드와 체터필드 대공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된 뒤 그 둘이 인간인 척할 수 있는 비결에 대해 알아보려 뒷조사를 진행해왔다.
일차 조사에서 리처드 레오폴드 또한 물이 아닌 우유를 마신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문제는 매우 쉽게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이후 그 우유의 출처를 밝히기 위해 대공의 농장에 보낸 자들이 차례로 실종되면서 미궁에 빠졌다.
심지어 우유를 분석해보기 위해 슬쩍 해서 나오다가 걸려서 대공에게 그 자리에서 살해당한 자도 있었다.
루키우스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조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그 와중에 스칼렛이 리처드 레오폴드에게 편지를 받는 것을 보고는 더는 혼자 해결할 문제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래서 작은 숙부님을 불러 털어놓은 건데 스칼렛의 목걸이에 그런 비밀이 담겼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러자 작은 숙부님이 왜 브라운 교수를 만나보겠다고 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가 걱정할까 봐 차마 말은 못 한 거겠지만 단순히 족쇄를 푸는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고 짐작하신 듯싶었다.
“수수께끼가 풀리기는커녕 더 복잡해지는군.”
혼잣말을 읊조리며 멈춰 서자 그림자가 회랑 복도에 길게 늘어지는 것이 보였다.
까맣고 까만 그림자가 회랑 복도에 달린 하얀 백열등과 대비되면서 누군가를 연상케 했다.
속살이 살며시 비치는 까만 레이스로 둘러싸인 우윳빛 목덜미.
스칼렛이 보고 싶어졌다.
아주 격렬하게.
***
루키우스는 날듯이 여왕의 방으로 들어섰다. 응접실을 빠르게 지나 침실 문을 열고 침대로 다가서서는 조심스레 가림막을 걷었다.
그저 스칼렛의 얼굴만 보고 자러 갈 생각이었는데, 엎드려 있던 스칼렛이 눈이 부신 듯 고개 돌려 올려다봤다.
불빛에 붉게 물든 눈가가 발그스름하게 빛을 냈다. 아무래도 가족 걱정에 몰래 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루키우스는 핥고 싶은 충동에 허덕이며 말했다.
“안 주무시고 뭐 하십니까?”
“잠이 안 와서요.”
그러더니 베개에 다시 얼굴을 묻더니 유혹하듯 읊조렸다.
“재워줄래요?”
루키우스는 군말 없이 옷을 벗어 던졌다. 밤이슬에 젖은 재킷과 바지는 차가웠지만, 그 짧은 새 그의 몸은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모조리 벗어버리고는 나신이 되어 스칼렛의 등 뒤에 몸을 붙였다. 순식간에 발기한 성기가 보들보들한 허벅지에 닿자 끈적한 액을 토해냈다.
루키우스는 슬며시 문질러대며 잠옷 안으로 손을 밀어 올려 탐스러운 가슴을 움켜쥐었다. 터트릴 듯 주물럭대며 목덜미 뒤에 입을 맞추자 스칼렛이 바들바들 떨었다.
“저만큼 흥분하셨나 보네요. 다리 사이로 달콤한 꿀물을 질질 흘리시는 걸 보니.”
스칼렛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
루키우스는 보기 좋게 달궈진 귀를 입안에 넣고 빨아대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후우- 이렇게 젖꼭지를 단단히 세우고는 절 기다리신 겁니까?”
그러자마자 스칼렛의 목덜미까지 붉은 물이 들었다.
그동안 패팅을 이어가며 스칼렛이 거친 토크에 약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더 약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춤 연습을 하며 그가 건넨 정보가 마음에 걸려 몹시도 심란한 모양이었다.
사실 루키우스 또한 심란했다. 설마하니 스칼렛이 그 망할 리처드 레오폴드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으니까.
“스칼렛. 당신 가족은 내가 책임지고 데려올 테니 날 믿어요.”
그리고는 목덜미 뒤에 이를 박았다.
보드라운 피부가 감미로웠다. 달콤한 피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었다. 스칼렛이 시트를 잡아 쥐며 허리를 비틀었다.
“아응….”
루키우스는 가슴을 주물러대던 손을 내려 그녀의 다리 사이를 어루만졌다. 평소보다 배는 더 흠뻑 젖어 몇 번 어루만진 것뿐인데 손바닥이 미끈거렸다.
그 손을 그대로 아래로 끌어내려 그녀의 허벅지에 문지르던 제 성기에 처덕처덕 발랐다. 비록 넣지는 못하지만, 이것만으로도 흥분이 꽤 고조됐다.
“하아- 이건 이거대로…. 좋군요.”
그러면서 흔들어 사정하려 하려 했는데 스칼렛이 손을 뒤로 하더니 덥석 그의 성기를 잡았다.
흡!
루키우스는 허를 찌른 기분에 탄성을 토해냈고, 스칼렛은 그를 떠밀어 뉘며 일어나 앉더니 그의 허벅지에 올라탔다.
순식간에 밑에 깔린 체위가 된 루키우스가 당황하며 올려다보자 스칼렛이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루키우스. 허벅지 찌르는 짓 나 그만할래요.”
“대체 그게 무슨 소립니까?”
루키우스는 물었지만, 스칼렛은 대답 대신 그의 성기 위에 몸을 맞추더니 제 음부를 손으로 벌리며 그의 것을 품으려 했다.
체모가 없어 하얀 음부가 벌어지며 드러난 새빨간 속살이 그의 것을 먹어치우는 모습은 눈조차 깜빡이지 못할 정도로 야했다.
“후으…젠장. 스칼렛…. 날… 흡! 죽이려는 겁니까?”
루키우스는 당장에라도 사정할 것 같은 느낌에 발가락에 힘을 주며 힘겹게 버텼다. 사내의 체면이 있지 넣자마자 싸버리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인내심을 시험하는 듯 스칼렛은 아주 천천히 몸을 내렸고, 그러다 겨우 중간쯤에 이르러 울상을 지었다.
“루키우스. 나 더 못하겠어요.”
그러더니 뺄 듯 일어서는데 머릿속 이성이 뚝, 끊어졌다. 그대로 몸을 일으켜 스칼렛을 눕히며 단숨에 파고들었다.
달아오른 내벽이 오물거렸다.
퍽퍽퍽퍽
다정하게 대해야 한다는 걸 머릿속으로 인지하면서도 몸이 제멋대로 들떠 거칠게 박아 올리자 스칼렛이 그대로 자지러졌다.
“아읏. 안 돼. 망가져. 망…가져.”
그러면서 붉어진 눈가를 다시 물들이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미친 듯이 눈가를 혀로 핥고 빨아대며 허리를 털었다.
첫날밤의 감각이 꿈이 아니었던 듯 좁고 뜨겁고 입으로 하는 것처럼 빨아댔다. 그도 모자라 그가 귓가에 거친 숨을 몰아쉴 때마다 내벽이 꽉 조여들며 성기에 찰싹 달라붙었다.
“하아- 씨발. 이건 너무 좋아서…”
생각을 그대로 토해내며 눈을 아래로 하니 번질거리는 성기에 붙어 끌려 나오는 붉디붉은 속살이 보였다.
야살스럽게 휘감겨서는 빨아들이는 걸 보니 눈이 홱 돌았다.
그녀의 다리를 들어 어깨에 걸고는 쑥, 쑤욱 체중을 실어 밀어 넣었다. 터질 듯 탱글탱글한 것이 귀두에 와닿으며 쾌감을 높였다.
“루키우스. 너무 깊어요. 너무…. 깊어. 읏!”
스칼렛이 자지러지는 것이 너무 예뻐서 팔로 체중을 지탱하며 엎드렸다. 무게가 더욱 실리며 저절로 좀 더 성기가 깊숙이 박히자 스칼렛이 숨이 막히는지 헐떡거렸다.
달래주려 목덜미에 이를 박고 피를 빨았더니 기절할 것 같은 교성이 터졌다.
“안 돼. 안 돼. 그만!”
쾌감이 지나친지 스칼렛이 손으로 마구 그의 허벅지를 밀어댔다.
루키우스는 그 손을 잡아 깍지껴 침대에 못 박고는 미친 듯이 허리를 털어댔다. 둥글게 부푼 탐스러운 가슴이 위아래로 보기 좋게 흔들렸다.
파고들어도 파고들어도 성기를 조여 무는 내벽이 신기할 정도라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 스칼렛을 보니 맑은 초록색 눈동자가 음욕에 절어 진한 녹음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의 음란한 여왕님.”
미소 지으며 입을 맞추자 조그만 혀가 그를 반겼다.
빨갛고 통통한 혀를 달게 빨며 아까부터 솟구치는 사정감을 그대로 해방시켰다.
탁, 터져나가며 성기가 녹아버릴 것처럼 뜨거워졌지만 루키우스는 속도를 더욱 높였다. 살짝 힘이 빠졌던 성기가 다시 단단해지며 그녀의 내벽을 찢을 듯 부풀었다.
스칼렛이 놀란 듯 아랫배에 힘을 주자 조임이 엄청났다.
루키우스는 입술을 내려 아플 정도로 흔들리고 있는 그녀의 젖꼭지에 이를 박았다.
“루키우스!”
스칼렛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젖혔다. 쾌감이 엄청난 듯 두 눈을 꼭 감고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무척 예뻤다.
루키우스는 피를 조금 흡혈하고는 입맛을 다시며 이를 거뒀다.
“사랑합니다. 여왕님.”
격렬하게 올려치며 흘린 말에 스칼렛이 온몸을 조이며 절정을 맞았다.
아읏!
내벽이 오물거리며 그의 성기를 삼킬 듯 빨아대는 통에 참지 못하고 그대로 정액을 뿜었다.
그녀 안을 흠뻑 적시는 쾌감에 신음을 흘리던 루키우스는 어느새 눈을 뜨고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스칼렛과 시선을 맞췄다.
발갛게 달아오른 볼,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 조그맣고 빨간 혀가 입술을 할짝거렸다.
그가 절정을 맞는 걸 보며 흥분한 모양이었다. 남은 쾌감을 이어가려고 저절로 움직이는 가느다란 허리의 반동에 루키우스는 정중하게 물었다.
“내일 대관식인 건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만 주무셔야 할 텐데요.”
스칼렛은 입술을 깨무나 싶더니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알아요. 알지만… 아으으으으.”
표정과는 달리 그녀의 안에서 순식간에 부풀어 단단해지는 성기를 느끼고는 스칼렛이 허리를 비틀며 교성을 흘렸다.
루키우스는 입꼬리를 휘며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스칼렛에 애원하듯 바라보자 어깨에 걸치고 있던 그녀의 발목을 들어 살짝 깨물고는 소곤거렸다.
“좋습니다. 그대가 원하시는 대로 듬뿍 싸드리죠. 나의 음란한 여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