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탐해버릴래
레이스 커튼 때문에 사방이 캄캄한 듯하면서도 은근히 밝았다.
해가 이미 중천에 뜬 모양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스칼렛은 기지개를 켜며 눈을 비비적대다 눈꺼풀에 뭔가 붙어 있는 것을 알았다.
손을 들어 만져보니 이파리 같은 거였다. 떼어내 보니 자세히 보이진 않아도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눈가를 만져보니 울어서 퉁퉁 부었어야 할 눈꺼풀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루키우스가 걱정돼서 붙여 준 모양이네. 다정하기도 하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보니 심장이 저릿했다. 몰랐는데 어젯밤 루키우스가 애인은 될 수 없다며 밀어낸 것이 상당히 충격이었나 보다.
하지만 루키우스의 결정이 옳았다. 그가 애인이 된 순간 체터필드 대공에게 덜미를 잡힌 거나 다름없었다. 대공의 명에 복종하는 저주에 걸려 있는 한은 그랬다.
“네 이웃의 뱀파이어를 탐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킨다는 게 이리 힘들 줄이야.”
스칼렛은 입술을 짓씹으며 제 목에 걸린 호리병을 만지작댔다.
‘만약 이걸 루키우스에게 먹이면 어떻게 될까?’
기분 같아선 당장에라도 그러고 싶었지만, 함부로 쓸 물건이 아니었다.
풀려난 뱀파이어들이 인간을 공격하기라도 하면 천 년 전 아마칼리 여왕이 겨우 얻어낸 평화가 물 건너가는 거였다.
에휴-
괜히 한숨을 내쉬고는 침대 사방을 두른 가림막을 걷으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한발 앞서 누군가가 기다렸다는 듯이 확 걷어버렸고, 그러자 두어 발자국 떨어진 곳에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선 것이 보였다.
“존엄하신 여왕 폐하의 시중을 들기 위해 온 아나이스 공작부인, 박스터 후작 부인 그리고 레이디 블란치이십니다.”
안나 부인이 성큼 앞으로 나서더니 귀부인들을 소개했고, 그녀들은 치마를 양손으로 잡고 한쪽 무릎을 구부리며 각자 소개를 하더니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스칼렛은 얼떨떨해하며 침대에서 내려섰고 아나이스 공작부인이 다가와 입고 있는 잠옷을 한 번에 벗겼다.
속에 입은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그녀 앞에 나신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공작부인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옆으로 물러섰고 속 드레스를 든 박스터 후작 부인이 다가섰다.
스칼렛은 엄청나게 민망해하면서 재빨리 입혀주는 대로 속 드레스를 몸에 걸쳤고 그러자 뒤쪽에 서 있던 메이드가 세숫물이 담긴 화려한 도자기 대야가 놓인 거치대를 밀고 다가왔다.
레이디 블란치는 수건을 들고 옆에 섰고 스칼렛은 귀부인들과 열 명이 넘는 메이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수를 해야만 했다.
‘미쳤어. 다들 할 일이 그렇게 없나?’
속이 드글드글 끓었지만, 일단은 참았다. 그렇게 세수를 마치자 드레스 룸으로 끌려 들어갔다.
화장대 앞에 앉자 공작부인이 그동안 손도 대지 않은 화장품 몇 개를 집어 들며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말하는 듯 진지하게 설명을 했다.
“이것은 장미의 땅이라 불리는 페란에서 온 장미수랍니다. 옆에 있는 건 요정들이 산다고 믿는 바젤 공국에서 온 것으로 아침이슬을 머금은 연꽃에서 추출한 연꽃수고요.”
스칼렛은 그냥 되는 대로 골라 손에 부어 척척 발랐고 공작부인의 눈이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마이 퀸. 두들겨 주셔야 제대로 흡수가 되지요.”
그런 식으로 엄청난 잔소리를 들으며 기초화장을 마치자 이번에는 후작 부인이 화장대 위에서 색조 화장품을 하나하나 조심스레 골라내더니 화장 붓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자아. 여왕 폐하. 눈을 감아보세요. 일단 눈화장부터 시작하죠.”
이러다 굶어 죽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랜 시간 화장을 했다.
그도 모자라 레이디 블란치가 다양한 스타일의 검은 드레스를 가지고 등장했다. 일주일 전엔가 수치를 재가더니 수도 최고의 디자이너는 손놀림도 놀랍도록 빠른 게 분명했다.
어제 티베리우스가 여왕의 공식 일정 어쩌고저쩌고하며 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스칼렛은 속으로 이를 벅벅 갈면서 손을 들어 드레스가 더 들어오려는 걸 막았다.
“됐어요. 레이디 블란치. 죄다 똑같아 보이는데 뭐가 이리 많은지 모르겠군요. 이건 낭비에요.”
“어머나. 마이 퀸. 드레스마다 레이스가 죄다 다른걸요. 다 같은 검정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모두 다르답니다. 자, 손을 줘보세요. 그저 드레스에 피부만 가져다 대도 아실걸요?”
그러더니 레이디 블란치는 기어코 드레스를 하나씩 꺼내 들고 스칼렛의 피부색에 가장 어울리는 검은 드레스를 골라줬다.
스칼렛은 무척 귀찮아하며 입어 보고는 앞서 안나 부인이 가져온 드레스와 확실한 차이가 느껴져 무척 놀랐다.
그렇게 빈틈을 보이자마자 레이디 블란치는 연달아 다른 드레스도 권했다.
“이제부턴 공식 일정이 꽉 들어차 있으니 세 벌 정도 골라두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이 퀸.”
결국, 스칼렛은 인형처럼 계속해서 옷 갈아입기를 해야만 했고, 레이디 블란치는 제 마음에 쏙 드는 드레스들을 골라내고서야 물러가겠다는 말을 꺼냈다.
이윽고 안나 부인이 귀부인들을 끌고 나가버리자 스칼렛은 기절할 것 같은 기분에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러고 있노라니 이리나가 조용히 들어섰다.
“유어 그레이스. 식사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스칼렛은 너무 기뻐 벌떡 일어나 앉으며 크게 외쳤다.
“밥 시간이다!”
그러고 보니 이리나 옆에 루키우스가 서 있었다.
루키우스는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는데 눈이 마주치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웃음기를 지웠다. 뭔가 놀란 듯, 심란한듯한 시선이 묘했다.
‘응? 왜 저러고 보지?’
스칼렛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문득 그의 입술 사이로 슬쩍 길어진 송곳니를 보고는 상황을 눈치챘다. 아무래도 배가 고파진 모양이었다.
기분 같아선 한 모금 빨라고 목덜미를 내밀고 싶었지만, 뱃가죽이 등에 붙을 지경이라 일단 식사를 해야만 했다.
‘아니, 빨라고 해도 안 빨 것 같기도 해. 애인은 안 된다고 선을 그었잖아.’
갑자기 가슴이 덜컥거려 얼른 침대에서 일어섰다.
루키우스와 이리나와 함께 1층으로 내려가니 시종 무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조금 초조해 보였는데 스칼렛이 나타나자 반색을 하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푹 주무셨습니까? 유어 하이니스.”
그러더니 왼쪽에 있는 응접실을 손짓하며 속삭였다.
“인사를 하시겠다고 오신 귀족분들이 상당히 많으십니다. 그러니 부디 식사는 천천히 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인사요? 밥 먹으면서 인사도 받아야 해요?”
“전통입니다. 워낙 공무가 많으니 귀족들을 따로 만나볼 시간이 부족하니까요. 그냥 밥 먹으면서 그들의 소개를 들으시면 됩니다. 굳이 인사를 일일이 받으실 필요 따윈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더러 초면인 사람이 인사를 하러 왔는데 아는 척도 하지 말라고요?”
어이없다는 듯 스칼렛이 묻자 시종 무관은 도와달라는 듯 루키우스를 바라봤다.
스칼렛도 덩달아 바라보자 등 뒤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던 루키우스는 난감한 듯 웃더니 조용히 말했다.
“마이 퀸. 문안 인사를 온 귀족들은 통성명하고자 온 것이 아니라 새 여왕의 얼굴을 보고자 온 겁니다. 본격적인 소개는 대관식 날 열릴 공식 무도회 때 하시게 될 거고요.”
“즉, 귀족들이 날 구경하러 온 거다?”
“정직하게 말해서 그렇습니다. 지난 9일간의 일로 인해 사교계의 최대 관심사는 여왕님이시거든요. 하루라도 빨리 얼굴을 봐둬야 다른 귀족들과 만났을 때 체면이 섭니다.”
“다들 만나서 내 뒷담화를 할 거란 소리군요. 코가 어떻고 이마가 어떻고 머리 스타일이 어쩌고저쩌고.”
“맞습니다.”
“이런 젠장.”
“네. 젠장맞을 일이죠.”
루키우스는 그렇게 대답하곤 녹을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스칼렛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아 얼른 시선을 돌리고는 시종 무관에게 말했다.
“좋아요. 가죠.”
***
두 벽면과 천장이 온통 유리다 보니 응접실은 아주 환했다.
스칼렛은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으니 더울까 싶어 살짝 긴장했지만, 막상 걸어 들어가서 보니 천장에 바람을 일으키는 처음 보는 물건이 달려 있어 생각보다 시원했다.
“페란 너머에 있는 쟌이란 나라의 장인이 만들어 올린 선풍기란 물건입니다. 바깥과 이 안의 온도 차를 이용해 돌아가도록 만든 거죠.”
너무 신기해 고개 젖혀 올려다보고 있자 루키우스가 슬쩍 귀띔을 해줬다.
스칼렛이 반사적으로 바라보고는 미소를 짓자 루키우스가 지나가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드레스가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아, 고마워요.”
스칼렛은 기뻐하며 대답했지만 이미 루키우스는 뒤로 성큼 물러선 뒤였다. 대신 이리나가 다가오더니 응접실 정 가운데 놓인 식탁으로 안내를 했다.
식탁은 화려한 벽지가 발린 벽 쪽에 놓여 있었는데 슈발리에 두 사람이 무슨 장식처럼 붙듯이 서 있었다.
그들이 목례를 하기에 받아주고는 의자에 앉고 보니 최신 유행 스타일인 것인지 과일이 잔뜩 그려진 다소 커다란 식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너무 바빠 침실 앞에 있는 응접실에서 거치대로 날라온 단순한 은 식기를 이용해 식사를 해 와서인지 너무 과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귀족들의 시선을 의식해 최고급 식기를 내놓은 모양이었다. 웃긴 건 이걸 지시한 게 체터필드 대공일 거란 사실이었다.
왕실 담당 변호사와 만났을 때 대공이 재상이란 신분을 이용해 여왕에게 나가는 모든 돈을 지나칠 정도로 꼼꼼히 관리한다 들었으니 확실했다.
‘흐흠- 세상 두려울 것 없어 보이는데 그래도 귀족 눈치를 보긴 보나 보네.’
속으로 중얼거리며 한쪽에 놓인 식탁보를 집어 들면서 그 감촉이나 색깔이 최고급인 걸 확인했다. 심지어 수건마저 어제 쓰던 것과 질이 달랐다.
“어이가 없네.”
스칼렛은 코웃음을 쳤고, 그러는 사이 이리나가 컵에 물을 따라 내밀었다. 받아들고 천천히 마시면서 응접실 안을 살피니 저택의 측면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문이 보였다.
문도 벽도 죄다 유리로 만들어져 있어 그 너머로 귀족으로 보이는 이들이 줄을 선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보안 때문인지 입구에는 티베리우스가 서 있었고 바깥에서 슈발리에 몇 사람이 칼을 찬 채 서성이고 있었다.
시종 무관이 다가가더니 티베리우스에게 뭐라 뭐라 속삭였고, 그러는 사이 쉐프가 달군 숯이 담긴 화로와 납작하고 넓은 팬 그리고 식자재가 든 거치대를 밀고 들어왔다.
루키우스가 가까이 오기 전 빠르게 살폈고, 허가를 받고 나서야 다가온 쉐프는 아침 인사를 다소 과하게 건네더니 즉석에서 요리를 시작했다.
스칼렛은 쉐프마저 이러다니 황당했지만, 잠자코 그가 내줄 요리를 기다렸다.
버터를 올린 오믈렛이 익어가며 고소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신선한 양송이를 잘게 조각내 듬뿍 뿌린 수프가 담긴 그릇이 눈앞에 놓였다. 냄새도 좋고 아주 먹음직해 보여 무척 즐거워하며 숟가락을 들고 한 입 크게 떠넣었다.
그러자마자 티베리우스가 유리문을 열었다.
줄 서 있던 귀족들이 들어서는 인기척이 들려오더니 잠시 후 식탁 근처에 서 있던 시종 무관이 낮지도 높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앙베르 공작과 공작 부인이십니다.”
반사적으로 그들을 바라본 스칼렛은 입에 한가득 떠넣었던 수프를 그대로 뿜어냈다.
풋!
두 사람 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했는데 그걸 무섭도록 하얀 분을 발라 감췄다.
안타깝게도 기다리는 사이 땀을 흘렸는지 모두 드러났고, 솜씨 좋은 하인이 그려준 듯한 진한 눈썹과 아이라인 그리고 새빨간 입술이 너무 도드라졌다.
스칼렛은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입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수프를 공작 부부가 빤히 바라보는 걸 깨닫고는 황급히 정신을 챙겼다.
“으음. 안녕하세요?”
냅킨을 들어 입가를 닦으며 어색하게 웃으니 공작 부부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대답했다.
“안녕하십니까? 여왕 폐하.”
“안녕하세요? 환영합니다. 여왕님.”
으흠!
시종 무관이 모두 정신 차리라는 신호를 보냈고 공작 부부는 엉덩이에 불이 붙은 사람들처럼 잽싸게 퇴장했다.
스칼렛은 다시 숟가락을 들고 수프를 입에 떠넣으려 했지만 아까 그릇에다 뿜어내고는 다시 먹는다는 게 영 그랬던지 시종 무관이 다가와 잽싸게 치웠다.
“아, 저기 아직 못 먹었는데….”
애절하게 말했지만 시종 무관은 못 들은 척 굴며 대신 오믈렛이 담긴 접시를 놔주었다.
수프를 잃은 슬픔을 벌충하려는지 위에 채를 썬 치즈가 듬뿍 올라가 흐물흐물 녹는 모양새가 맛깔스러웠다.
스칼렛은 신나며 포크로 오믈렛을 뚝뚝 잘라 치즈와 함께 입안 가득 물었다. 치즈와 버터 그리고 달걀이라는 앙상블이 혀 위에서 주르륵 녹아 흘렀다.
“하아. 맛있어.”
손을 들어 볼을 감싸며 감탄하다 어느 틈에 식탁 앞쪽에 또 다른 귀족 부부가 선 것을 보았다.
둘 다 대단히 충격적인 걸 본 사람처럼 눈은 휘둥그레 입은 떨 벌어진 상태라 스칼렛은 그대로 사례에 걸렸다.
쿨럭거리며 미친 듯이 기침을 해대자 이리나가 황급히 물을 따라 건넸고 그걸 받아 마셨지만, 기침이 계속 이어졌다.
결국, 루키우스가 다가서더니 그 큰 손으로 등을 썩썩 쓸어내려 주었다. 거짓말처럼 루키우스의 손길에 기침이 겨우 가라앉았다.
그러는 사이 시종 무관이 헛기침을 크게 하더니 소개를 했다.
“알몬드 백작과 백작부인이십니다.”
“죽을 뻔했네.”
스칼렛이 평소와 같이 중얼거리며 물잔을 내려놓고 앞을 보니 그 짧은 새 또 다른 사람들이 서 있었다.
이번에는 부부가 아니라 일란성 쌍둥이 형제였는데 인간치고는 잘생긴 얼굴에 키도 크고 사내다워 사교계에선 인기 좀 끌 것으로 보였다.
“패트릭 백작과 그 형제분이십니다.”
시종 무관의 외침에 쌍둥이 형제답게 둘은 마치 거울을 세워놓은 것처럼 동시에 똑같은 동작으로 인사를 했는데 꼭 서커스처럼 재밌었다.
스칼렛이 방긋 웃으며 바라보자 그들은 거리의 마술사처럼 동시에 어디선가 장미꽃을 꺼내 들더니 식탁으로 성큼 다가오려 했지만, 루키우스가 바람처럼 앞을 가로막았다.
“죄송합니다만 이 이상은 보안상 접근 금지입니다.”
형제 모두 키가 제법 컸지만, 루키우스가 족히 한 뼘은 더 큰 데다 덩치도 더 좋았다.
그래서인지 둘 다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루키우스에게 장미꽃 두 송이를 건네고는 다시 한번 동시에 절을 해 보이고는 물러갔다.
루키우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장미꽃을 살펴보고는 식탁에 다가서더니 스칼렛에게 건네주며 소곤거렸다.
“미혼 남성 귀족에게 미소를 짓지 마세요. 쓸데없는 스캔들이 돌 수 있습니다.”
스칼렛은 물잔에 장미꽃을 꽂으며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스캔들 날 걸 두려워하면 평생 결혼 못 하겠죠. 저 정도 외형이면 내 사회적 파트너로 고민해볼 만하기도 하고요. 작위가 좀 낮긴 하지만 사랑으로 극복하면 될 일이겠죠.”
순간 루키우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스칼렛은 못 본 척 시선을 돌리고는 손을 들어 식어버린 오믈렛을 치우게 했다. 그 짧은 사이 오믈렛 위의 치즈가 보기 흉하게 굳어버린 모양새가 꼭 자신의 마음 같았다.
‘나 왜 이러니? 루키우스가 날 생각해서 물러나겠다고 한 건데 못된 소리나 해대고.’
그래서인지 그다음으로 나온 건 집에서도 아주 특별한 날만 먹곤 하던 생크림과 다양한 과일을 듬뿍 올린 와플이었지만 도무지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결국, 먹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마치고 맞은편 응접실로 자리를 옮기자 이리나가 귀신같이 상황을 눈치채고는 따뜻한 차와 스콘을 준비해 내놨다.
따뜻한 차는 역시 마음의 보약이었다.
스칼렛은 한결 기분이 나아지는 것을 느꼈고 덕분에 스콘을 먹을 기운도 생겼다.
막상 입에 넣고 보니 배가 고픈 것이 느껴져 통째로 쑤셔 넣고 씹고 있는데 시종 무관이 소매통이 넓고 긴 자주색 가운을 입은 교수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이분들은 대학에서 추천받아 뽑혀온 여왕님의 교육 담당관들입니다. 내일부터 아침 식사 후 정오까지 남궁 도서관에서 왕국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소양 교육을 받으시게 될 겁니다.”
시종 무관은 가볍게 소개했지만, 그들이 품은 분위기는 그렇지가 않았다.
다들 옆구리에 책을 끼고 대부분 두꺼운 안경을 착용했는데 한 명을 빼곤 다들 지루한 표정과 고압적인 자세를 지니고 있어 교수라기보다는 교관처럼 보였다.
암시장에서도 이런 분위기의 사람들이 꼭 엄한 말을 늘어놓곤 해서 기피 대상 1호였다. 살롱 언니들 또한 꼭 좀비랑 하는 거랑 비슷하다며 괴로워했었다.
스칼렛은 그 사실을 떠올리며 우물거리며 바라보다가 시종 무관이 재빠르게 데리고 나가려 하기에 씹던 걸 꿀꺽 삼키고는 물었다.
“잠깐만요. 소양 교육이라니 정확히 뭘 공부한단 거죠?”
“여왕직을 수행하기 위해 당장 필요한 지식입니다. 레이디를 위한 교양학과 사교술, 외교 사절과의 면담을 위한 간단한 외국어 공부와 아마칼리 여왕사와 정치사 그리고….”
시종 무관의 설명과 함께 교수들이 자신이 맡은 과목명이 나올 때마다 고개를 까닥이며 담당 교수임을 몸짓으로 알렸다.
스칼렛은 귀 기울여 듣다가 교수 중 유일하게 선한 표정과 구부정한 자세를 지닌 백발의 할아버지가 고개를 까닥이자 손을 번쩍 들었다.
“스탑!”
시종 무관이 깜짝 놀라 말을 멈췄고 스칼렛은 백발의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맡으신 과목이 뭐라고요?”
백발의 할아버진 쓰고 있는 안경을 밀어 올리며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아마칼리 여왕사와 정치사입니다. 물론 지루하다고들 하십니다만 사실 과거에 미래의 열쇠가 있는 법이죠. 여왕 폐하.”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왕립대학 고대 역사학 교수인 헤더 브라운입니다. 브라운 교수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좋아요. 브라운 교수님.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스칼렛은 방긋 웃으며 말하고는 다른 교수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모두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만 저는 여러 개를 중구난방으로 배우는 것보단 하나라도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성격입니다. 브라운 교수님과 공부가 끝나면 연락드리도록 하죠.”
입에 침 한 번 안 바르고 떠오르는 대로 변명을 늘어놓자 시종 무관이 쩔쩔매며 말리려 들었다.
“여왕 폐하. 공부 과목은 재상께서 정하신 것으로….”
하지만 스칼렛이 눈에 힘을 주어 바라보자 말끝을 흐리더니 울상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여왕 폐하. 그렇게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교수들을 끌고는 응접실을 나갔다.
그리하여 드디어 쉬나 싶었더니 시종 무관이 다시 들어오더니 두루마리를 펼쳐 들며 말했다.
“사실 아침에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기상이 늦으시는 바람에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의 일정입니다. 2시에는 왕국을 위해 일하고 있는 각 부서의 장들을 만나보시게 될 거고요.
4시 티 타임 때는 왕실의 레이디들이 함께하실 예정이며 6시에는 보고를 요청하신 분들이 차례로 오실 예정입니다.
왕실 수사대를 맡은 앨런 레오폴드 경을 필두로 은행장이신 레넌 경 그 뒤 왕립 변호원의 변호사이신 니콜라스 경께서 방문하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따라서 본래 그 시간에 잡혀 있던 귀족원의 로베르토 경과의 만남은 저녁 식사를 하면서 진행하게 되겠습니다.
식사 뒤에는 궁중 예법과 공식 무도회를 위한 춤 교육이 잡혀 있습니다.”
스칼렛은 아찔한 기분에 말없이 차를 홀짝이다가 시종 무관이 두루마리를 접자마자 물었다.
“설마 매일 이렇게 진행돼요?”
시종 무관은 곤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것이 보통입니다. 사실 어제까진 처음에 말씀드렸다시피 오는 길에 쌓인 피로를 마음껏 푸시라고 드린 휴가 기간이었습니다. 대관식을 치르고 나면 더 바빠질 겁니다.”
“대관식이 언젠데요?”
“다음 달, 대사제께서 정하신 길일에 열릴 예정입니다.”
“다들 그랬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넉 달 전 여왕의 죽음 이후 제위에 올랐던 세 사람 모두 대사제가 정한 길일에 대관식을 치렀는지 궁금해서요.”
“그랬습니다만….”
“그렇다면 길일이 아니라 흉일로 잡으라고 해야겠네요. 무려 2명이 죽고 한 명이 행방불명인 상황이니.”
스칼렛이 장난처럼 던진 말의 무게가 상당했던지 시종 무관도 주변에 둘러선 모든 슈발리에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심지어 스칼렛을 위해 빈 잔에 차를 따르던 이리나마저 멈칫하며 눈을 부릅뜨고 바라봤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루키우스였다. 피가 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입술을 깨무는데 보는 사람이 다 아플 정도였다.
스칼렛은 일부러 하하하, 소리 내 크게 웃었다.
“다들 표정들이 왜 그래요? 걱정 마요. 난 절대 쉽게 밟혀 죽지 않을 거니까.”
그리고는 커다란 스콘을 집어 들며 말했다.
“이거 정말 맛있네. 이리나. 좀 더 가져올 수 있어요?”
기운찬 목소리에 그제야 다들 인상을 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기쁘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죠. 유어 그레이스. 기다리세요. 혹시 타르트 종류도 있으면 챙겨올게요.”
스칼렛은 방긋 웃으며 대답을 대신했고 그러다 루키우스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근심 가득한 눈빛이었지만 따스했다. 심장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고작 눈빛 하나에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이 짜증스러워 스콘을 한 번에 입에 밀어 넣고 보란 듯이 우물거렸다. 남자들은 여자가 그러면 당혹스러워하니까.
하지만 근처에 선 슈발리에들과는 달리 루키우스의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스칼렛은 입에 든 것을 꿀꺽 삼키며 마음을 정했다.
‘안 되겠다. 내 이웃의 뱀파이어를 탐해버릴래.’
***
늦은 밤, 루키우스는 스칼렛이 잠자리에 들자 조용히 2층으로 향했다.
교대 근무 중인 슈발리에 두 사람을 제외하곤 나머진 각자 방에 있을 시간이라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복도 끝에 있는 방문을 작게 두들겼다.
문이 열리자 기다리고 있었던 듯 티베리우스가 검은 제복 차림으로 맞았다. 루키우스는 재빠르게 들어선 뒤 문을 닫고는 물었다.
“세이턴가의 당주는 만나보셨습니까?”
티베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쪽에 놓인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앉으라는 손짓을 하고는 자신은 침대에 앉았다.
루키우스는 권한대로 의자에 앉으며 방을 둘러봤다. 티베리우스의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 업무용으로 쓰이는 탁자와 책상 그리고 침대와 옷장이 전부였다.
지금까지 보아온 슈발리에들이 각 가문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방을 최고급으로 꾸미는 것과는 달라도 참 많이 달랐다.
‘신이 스칼렛을 예뻐하시는 모양이군. 이런 남자가 로드 슈발리에가 되어주다니.’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데 티베리우스가 불쑥 말을 꺼냈다.
“말씀하신 대로 헬레나라는 여인이 27년 전 레이디 아비드를 따라 레오폴드 성으로 떠났더군요. 그리고 7년 뒤 갑작스러운 병고로 죽는 바람에 이리나가 뽑혀서 떠났고요.”
루키우스는 고개를 끄덕여가며 듣다가 티베리우스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는 물었다.
“뭔가 더 알아내셨군요.”
티베리우스는 착잡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헬레나와 이리나는 자매라더군요. 세이턴가의 당주 말로는 다른 아이를 뽑아서 보내려 했는데 이리나가 제 언니는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사람이 아니라면서 부득불 자신이 가겠다고….”
“한마디로 복수를 하러 떠났단 거군요. 이거 생각보다 일이 심각해지는 것 같네요.”
“복수하려 했지만, 카운테스 레오폴드가 눈치채고 저주의 족쇄를 잔뜩 걸어 막아놓았다는 게 진실 아닐까요?”
“글쎄요. 제가 보기엔 족쇄에 걸린 척해서 여왕의 마음을 끌려고 했던 것 같은데요. 레오폴드 성에서 이리나를 처음 봤을 때 좀 의아했거든요.”
“무엇이 말입니까?”
“이리나의 느릿한 동작이나 혈색 없는 얼굴은 분명 족쇄에 잔뜩 걸린 뱀파이어였지만 눈빛이 지나치게 맑았습니다. 족쇄에 걸리면 정신도 흐려진다고 들었거든요. 제 작은 숙부님께.”
“엔네야드 가의 대학자이신 헤레이스 박사 말씀이시군요. 그렇다면 틀릴 리도 없고. 하지만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카운테스 레오폴드는 놔두고 왜 여왕님 곁에 머무는 걸까요?”
티베리우스의 의문에 루키우스는 목걸이에 대해 말을 할까 고민하다가 일단 레오폴드 성의 감옥에서 발견한 혈서와 브로치를 꺼내 내밀었다.
“그 답은 여기 있는 것 같습니다.”
티베리우스는 혈서를 받아들고는 읽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리처드 공자가 헬레나 세이턴의 아들인 겁니까? 차대 레오폴드 공작이 될 남자가 순혈의 아들이라니! 도대체 뱀파이어라는 걸 어떻게 숨겨온 걸까요?”
“그건 따로 조사를 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고. 중요한 건 제가 이걸 발견한 게 카운테스 레오폴드가 가둔 서탑이라는 겁니다. ”
“…몰래 건네려고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네. 맞습니다. 제가 아는 카운테스 레오폴드는 무척 얌전한 분이셨거든요. 그런 분이 그토록 거칠게 굴면서 이리나나 리처드 공자 몰래 이 사실을 알려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하긴 식당에서 얼핏 들은 바로는 카운테스 레오폴드가 누군가가 귀공을 죽이겠다는 걸 우겨서 살렸다면서 한탄을 했었죠. 이거 아무래도 사람을 보내 그녀에게 이유를 물어야겠네요.”
“아뇨. 첩자가 숨어들기 쉬웠다면 카운테스 레오폴드가 도와달라 수도의 친척에게 청하기도 쉬웠겠죠. 잘못 움직였다가는 일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리나는 이곳에 와있고, 리처드 공자는 그 언덕에서 여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같은데요”
티베리우스는 그렇게 말하며 혈서와 브로치를 돌려주려고 손을 뻗다가 갑자기 우뚝 동작을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받아들려던 손을 거두며 루키우스가 물었다. 티베리우스는 대답 대신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인 등잔을 들더니 브로치를 가져다 비췄다.
브로치에 달린 것이 보석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밀랍을 넣고 굳힌 가짜였던 모양이었다. 이걸 만든 이는 그 안에 공들여 여백을 파낸 손톱만 한 크기의 서류를 넣어놨다.
가끔 왕성 근처 장에서 보던 그림자극처럼 빛이 브로치를 통과해 벽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루키우스도 티베리우스도 벽 위에 크게 떠오른 사각의 종이를 보며 처음에는 뭔지 몰라 그저 바라만 봤다.
그러다 이내 그것이 성전에서 발급하는 출생 신고서임을 알았다.
이걸 만든 이는 신묘한 손재주를 지녔는지 타이핑된 문장 아래 휘갈겨진 사제의 사인과 아기 부모의 사인까지 고스란히 떠올랐다.
사제의 이름은 도미니크, 아버지의 이름은 클라우스 세이턴, 어머니의 경우는 악필이라 알아보기가 힘이 들었다.
하지만 루키우스의 눈에 익은 사인이었다. 정부 공식 문서에 자주 등장했고, 지금도 재상의 명령에 따라 서류를 정리할 때면 종종 눈에 띄는 사인이었다.
“플로라 니마 아마칼리.”
소리 내 읊조리자 티베리우스가 황급히 브로치를 손에 움켜쥐며 등잔을 원래 자리에 내려놓았다.
둘 다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질 않았다. 대대로 여왕은 슈발리에를 애인으로 삼는 것이 불문율이었고, 여왕의 남편조차 그것을 묵인하는 것이 도리였다.
게다가 인간과 순혈 뱀파이어 사이에는 아이가 생기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보니 남편의 아이가 아닌 슈발리에의 아이를 가져 문제가 된 적은 알려진 바로는 없었다.
하지만 플로라 여왕은 임신했고 심지어 낳은 뒤 귀족인 남편의 아이로 철저하게 위장까지 해버린 모양이었다.
“플로라 여왕의 애인이었던 슈발리에는 여왕이 죽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죠. 그걸 두고 순혈들은 다들 바보 같다고 비웃었는데 이제 보니 둘은 진정한 부부였네요.”
티베리우스가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루키우스는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체터필드 대공이 환갑에 가까운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30대로 보이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설마 여왕의 아들이 뱀파이어일 리 없다고 확신을 하다 보니 의심할 생각조차 못 했다.
아니, 세간의 소문처럼 그동안 대공이 피를 마시는 모습을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다는 이유가 더 컸다.
하지만 특이점이 있긴 했다.
체터필드 대공은 물 대신 우유를 마셨다. 그가 직접 관리하는 농장에서 만드는 특별한 우유였는데 하도 비싸서 최측근조차 맛보게 해주는 법이 없었다.
‘아무래도 그 우유에 뭔가 비밀이 있나 보군.’
짐작은 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피를 대신할 특별한 음료가 있다는 것은.
“이거 아무래도 최대한 조용히 그들을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만약 공식적으로 대공이나 차기 공작의 정체가 밝혀진다면….”
티베리우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루키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에 하나, 둘의 정체가 세상에 공개된다면 그렇지 않아도 노예처럼 취급받는 뱀파이어의 삶이 더 고단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모른 척하기엔 체터필드 대공도 리처드 공자도 둘 다 권력의 정점에 서 있었다.
“일단 리처드 공자도 대공처럼 물 대신 우유를 마시는지부터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정체를 감추는 비법이 바로 그거란 의미일 겁니다.”
“날이 밝는 대로 사람을 풀도록 하겠습니다.”
티베리우스는 조용히 대답하며 혈서와 브로치를 내밀었다.
루키우스는 안주머니에 조심스레 담고는 조용히 복도로 나섰다.
***
스칼렛이 머무는 4층으로 돌아온 루키우스는 생각이 너무 복잡해 성큼성큼 응접실을 지나 제 방으로 향했다.
침대에 몸을 던지듯 누웠는데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스칼렛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키우스. 아흣! 루키우스.”
처음에는 잠꼬대하는 줄 알았는데 목소리가 끓어질 듯 굴다 이어지는 것이 묘하게 색스러웠다.
‘악몽이라도 꾸는 건가? 아니, 아니야. 저 소리론 색몽이겠군.’
루키우스는 그녀의 꿈에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을까 떠올리다가 결국 침대에서 내려섰다.
살그머니 침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어제와 마찬가지로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은 등불이 은은하게 사방을 밝히고 있었다.
침대에는 두툼한 레이스 커튼이 가림막 삼아 둘려 있었는데 스칼렛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희미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하아…. 아읏!”
간드러진 교성에 루키우스는 제 송곳니가 길어지는 것을 알았다. 혀로 송곳니의 뾰족한 끝을 할짝거리며 서 있으려니 급기야 훌쩍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응, 루키우스… 흐흑……”
루키우스는 제 하반신이 단단해지는 것을 애써 모른 척하며 상냥하게 물었다.
“여왕님. 악몽이라도 꾸시는 겁니까?”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울 듯 말 듯 뱃속을 살살 긁어내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응, 흐으….읏!”
루키우스는 안 되겠다 싶어 살며시 침대를 두른 커튼을 걷어 올렸다.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등불에서 비쳐드는 은은한 불빛에 스칼렛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베개를 높이 쌓아 등을 받히고는 보란 듯이 두 다리를 활짝 벌린 채 손으로 자신의 음부를 문질러대고 있었다.
잠옷 때문에 다리 사이가 가려져 팔이 움직이는 것만이 보일 뿐이었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이곳에 오기 전 온천에서의 달밤에 루키우스는 스칼렛의 매력을 충분히 보았고 여전히 눈꺼풀 안쪽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체모가 없어 하얗게 빛나던 음부는 꿀처럼 달콤했고 의무적으로 받았던 잠자리 교육에서 들었던 것과는 달리 여인의 흥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흥분을 불러 왔다.
몇 번 만지지도 않았는데 사정할 만큼.
“후우- 루키우스.”
스칼렛이 제 손을 거두더니 조금 젖은 제 검지를 쪽, 빨고는 말을 이었다.
“이거 잘 안 되네요. 당신은 정말 잘하던데.”
그러면서 미소 짓는 입술은 빨면 과즙이 나올 것 같은 붉은색이었고,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음욕으로 달아올라 바닥을 알 수 없는 늪처럼 진하고 어두웠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그저 가면일 뿐이라는 건 가늘게 떨리는 어깨로 알 수 있었다.
온 힘을 다해 유혹하면서도 영 어색해 쩔쩔매는 소녀가 가면 뒤에 웅크리고 숨어 있었다.
루키우스는 고개를 젖혀 천장을 올려다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어쩌다 이런 야생마를 좋아하게 된 거지?”
하지만 오래 웃고 있을 틈 따윈 없었다. 스칼렛의 따스하고 조그마한 손이 바지에 달린 지퍼를 내리더니 드로우즈 위로 반쯤 선 그의 성기를 쓰다듬었다.
“빨…아도 돼요?”
여전히 그 말을 하기가 무척 어려운지 뒷말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그런데도 용감하긴 왜 이리 용감한 건지 그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스칼렛은 바지와 드로우즈를 한꺼번에 끌어 내렸다.
고작 몇 번 쓰다듬었다고 불끈 성이 난 성기가 꺼덕거리며 그녀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스칼렛은 도전적으로 바라보더니 손으로 성기를 잡고는 말릴 틈도 없이 귀두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마치 한여름에 얼음을 빨 듯 혀로 할짝거리는데 몹시도 간질간질했다.
루키우스는 뱃속이 드글드글 끓기 시작하는 걸 느끼며 성기를 잡은 스칼렛의 손을 제 손으로 덮고는 위아래로 움직이며 소곤거렸다.
“입을 좀 더 벌려서 삼킬 수 있는 데까지 삼키세요. 마이 퀸.”
스칼렛은 마이 퀸이라는 말에 움찔거렸지만 시키는 대로 쑥 삼켜줬다. 귀두에 목젖이 와닿았고 축축하고 따뜻한 혀가 기둥을 맴돌았다.
혀도 작았고 손도 작았고 입안도 좁았지만, 척추가 저릴 만큼 흥분이 차올랐다.
“움직여요. 후우- 앞뒤로… 천천히. 입은…. 그래요. 그렇게 좀 더 크게 벌리고.”
착하게도 스칼렛은 다소 어색하긴 했지만 원하는 대로 움직이려고 애를 썼다. 그러다 귀두에 이가 긁혔고, 반도 들어가질 않았는데 너무 깊숙이 삼켰는지 헛구역질을 해댔다.
흐읍-
루키우스는 어설픈 구음에 괴로워졌다. 이 정도로 만족해야 했지만, 눈가에 열이 몰릴 정도로 격렬한 욕망이 타올랐다.
결국 뒤로 성큼 물러서서 스칼렛의 입안에서 성기를 빼냈다. 아까보다 더 단단해지고 길어진 성기가 배꼽에 닿을 듯 곧추서있었다.
스칼렛이 입술을 흠뻑 적신 채 당황한 듯 바라봤다. 루키우스는 손을 뻗어 엄지로 붉게 달아오른 입술을 닦아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마이 퀸. 날 미치게 만들려던 거라면 성공하셨네요.”
그리고는 스칼렛의 팔을 낚아채 뒤로 돌려세우고는 그대로 침대에 엎드리게 했다.
헉!
등 뒤에서 덮쳐든 그의 이가 목덜미에 파고들자 스칼렛이 신음을 토해냈다. 루키우스는 손을 내려 그녀의 잠옷을 찢듯이 끌어 올렸다.
열을 품어 뜨거워진 다리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으니 그의 성기를 빨면서 그런 건지 흠뻑 젖어 있었다.
루키우스는 음부 사이에 숨은 돌기를 검지로 문질러대며 다디단 피를 들이켰다.
무려 열흘 동안 꾸역거리며 삼켜온 블러드 팩의 기억이 사라지며 오로지 달콤함 만이 혀 위에서 춤췄다.
‘그래. 이거야. 바로 이 맛이야.’
흡혈이 주는 쾌감이 스칼렛의 혈관을 따라 빠르게 퍼져나가는지 다리 사이에서 미끄덩거리는 액체가 연거푸 쏟아져 내렸다.
처음일 그녀를 좀 더 배려해야 했지만, 너무 오래 참아왔다.
루키우스는 이를 거두고 불타오르는 붉은 머리를 감아쥐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아 동그란 엉덩이를 끌어 올렸다.
그렇게 단단히 붙들고는 그대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하지만 역시 처음이라 서툴러서인지 마음과는 달리 음부의 갈라진 틈 위로 쭉 미끄러졌다.
그것만으로도 쾌감이 이는지 스칼렛이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루키우스는 흥분이 지나쳐 짐승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제 성기를 잡아 쥐고 질구에 맞춘 뒤
다시 도전했다.
이번에는 귀두가 오물거리는 질구 사이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처음이라 그런지 미끄덩거리는 애액이 줄줄 흐르는데도 그녀의 안은 자꾸 그를 밀어내려 들었다.
“후우- 죽겠군.”
루키우스는 놀리듯 귀두 끝을 오물거리는 느낌에 안달하며 자꾸 무너지려는 그녀의 허리를 팔로 감고는 엎드렸다. 그리고는 다시 스칼렛의 목덜미에 이를 박고는 피를 빨아들였다.
아읏!
스칼렛이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느라 엉덩이를 들어 올리며 자지러졌다. 그 순간 루키우스는 단숨에 그녀 안으로 파고들었다.
성기 전체를 감싸오는 축축함과 뜨거움에 전신이 찌릿찌릿했다.
스칼렛의 작은 체구만큼이나 안도 좁았지만, 꽉 조여주는 느낌이 뒤통수를 달궜다. 동시에 입으로 빠는 듯 오물거리는데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루키우스는 이를 거두고는 쾌감에 절어 덜덜 떠는 스칼렛의 귓등을 혀로 할짝대며 달래듯 물었다.
“여왕님. 움직여도 될까요?”
“안돼. 이건…. 너무… 커요. 너무… 커. 터질 것 같아.”
스칼렛은 도리질 치며 도망치려는지 앞으로 기었다.
하지만 루키우스가 마치 감옥처럼 등 위를 덮고 있어 얼마 못 가 멈췄다.
루키우스는 놓칠세라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덮어 깍지를 끼고는 반쯤 빠져나온 성기를 쑥 다시 밀어 넣었다.
“으응…. 루키우스. 그만 해요. 못 견디겠어요. 하읏…”
스칼렛이 자지러지며 울먹이더니 살짝 고개를 비틀어 그와 시선을 맞췄다.
커다랗고 신비로운 초록색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하얀 피부 위에 꽃물이 든 듯 덩달아 눈가가 붉어졌다.
그걸 본 순간 머릿속에서 이성이 확 타버렸다.
“안 돼. 아으으으. 안 돼, 안 돼.”
스칼렛이 애원하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루키우스는 그의 성기를 꽉 조여물고 쭉쭉 빨아들이는 쾌감에 미친 듯이 허리를 흔들었다.
그가 퍽퍽 찔러 넣을 때마다 귀두에 내벽이 야살스럽게 휘감겼다. 온 신경이 극대화된 듯 고환을 적시는 그녀의 애액이 주는 감각마저 감미로웠다.
이따금 눈을 아래로 할 때마다 먹음직하게 늘어진 그녀의 가슴골 사이로 붉은 속살이 그의 성기에 끌려 딸려 나오는 것이 보였다.
만지지도 않았는데 꼿꼿이 선 붉은 젖꼭지와 번질거리는 기둥을 놓치기 싫다는 듯 움찔거리는 하얀 음부가 너무 야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흐읏… 찢어질 것 같아.”
스칼렛이 두 팔에 얼굴을 묻으며 훌쩍거렸다.
“괜찮아요. 여왕님. 하아… 이리로…. 아이도 나오잖아요. 게다가 뻐끔거리며 날… 맛있다는 듯 삼키고 있는걸요. 후으….”
루키우스는 밀려오는 신음을 겨우 삼켜가며 달랬다. 물론 그러면서도 푹푹 쑤셔대는 건 멈추지 않았다.
스칼렛은 고개 돌려 원망스러운 듯 바라봤고 그러다 어느 순간 짤막한 신음을 터트리며 다시 엎드렸다.
그때부터 그녀의 숨소리가 확 달라졌다.
“하으응. 어떡해…… 어떡해.”
쩔쩔매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루키우스는 쫀득한 속살 사이에 숨은 까끌까끌한 부분이 귀두에 걸리는 감각을 느꼈다.
무릎으로 선 채 허리를 잘게 떨며 귀두로 격렬하게 문질러대자 스칼렛의 교성이 더욱 커졌다.
퍽퍽퍽퍽!
그의 치골이 동그랗고 하얀 엉덩이에 철썩대며 부딪쳤다. 점점 붉게 달아오르는 살결을 내려다보다 그녀를 번쩍 들어 그대로 앉았다.
그의 허벅지 위에 앉은 그녀의 몸이 무게로 인해 쑥, 아주 깊숙이까지 그의 성기를 품었다. 쾌감에 못 이겨 허리를 휘는 스칼렛의 가슴을 두 손으로 쥐고는 마구 주무르자 조임이 더욱 강해졌다.
스칼렛이 죽을 것 같이 신음하며 고개를 젖히기에 그대로 키스했다.
도망치려는 조그만 혀를 쭉쭉 빨다가 송곳니를 박아넣자 그녀의 몸이 덜덜 떨렸다.
루키우스는 그녀의 가슴을 터질 듯 잡아 쥐며 침대의 반동을 이용해 올려쳤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만족스러울 때까지.
쫀득한 속살이 쭉쭉 빨아대는 감각이 더욱 강해졌고 스칼렛의 숨소리는 정말 달았다. 초록색 커다란 눈동자 가득 오로지 그만을 비추고 있다는 사실이 짜릿했다.
루키우스는 입술을 거두고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후으. 여왕님. 기분이 너무 좋아 미칠 것 같군요. 이렇게 좋다니….”
그러자 스칼렛의 숨결이 더욱 달아졌다.
루키우스는 참지 못하고 하얗고 가녀린 목덜미에 이를 박으며 그녀를 꿰뚫을 듯 파고들었다.
침대가 둘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듯 무너질 듯 삐걱거렸다. 질퍽거리는 애액과 체액이 뒤섞이며 찔꺽대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루키우스. 너무 깊…어요. 너무…깊어.”
가쁜 숨을 내뱉으며 애원하던 스칼렛은 버둥거렸고 그러다 다리가 더욱 크게 벌어졌다. 그러자마자 귀두 끝에 탱글탱글한 속살이 느껴졌다.
세게 찌르면 터질 것 같은 느낌에 취해 몇 번 비비적댄 것만으로 욕망이 터져나갔다.
루키우스는 참지 못하고 피를 쭉 들이켰다.
눈앞이 하얘질 만큼 굉장한 쾌감이 전신을 강타했다.
사정하면서 삼킨 피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상의 맛이었다.
세상에 이런 맛이 있었나 싶을 만큼 목구멍을 타고 흘러드는 피가 그의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들었다.
“마이 퀸. 마이 스칼렛.”
이를 거두고 다정하게 속삭이며 허리를 흔들어 고인 욕망을 모두 뿜어냈다.
스칼렛이 쓰러질 듯 그의 가슴에 등을 기대며 바들바들 떨었다.
아흣!
그의 정액이 몸 안에 흡수되며 주는 감각에 취한 건지 허리를 틀며 신음하는 그녀를 보다 보니 뿌리 끝까지 뻐근해졌다.
루키우스는 그녀의 허리를 잡고 들어 올려 성기를 빼낸 뒤 침대에 바로 눕혔다.
스칼렛은 작은 새처럼 할딱거리며 멍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쾌락으로 물들어 진해진 녹음의 눈동자 위로 황금빛이 어른거렸다.
루키우스는 다시 한번 반한 기분을 만끽하며 중얼거렸다.
“나의 음란한 여왕님. 솔직히 당신 몸이 너무 작아 걱정스러웠는데….”
스칼렛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싶은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루키우스는 싱긋 웃으며 몸을 숙여 열을 머금어 붉은 꽃이 핀 것 같은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잘 젖으시네요. 넘칠 정도로.”
스칼렛이 얼굴을 확 붉히더니 허벅지를 모아 비비적댔다. 다리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제 꿀을 숨기려는 듯.
루키우스는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눈가를 혀로 핥아 맛보며 속삭였다.
“또 꿀을 흘리기 시작하셨군요. 아까워라.”
다시금 서버린 성기를 손으로 쥐고는 그녀의 음부에 대고 문질러댔다.
그러면서 엄지로 통통하게 부푼 클리토리스를 조물거리자 발갛게 부푼 질구가 그의 것을 다시 삼킬 듯 뻐금거렸다.
그 감각이 짜릿해 성기가 혈관까지 불뚝 설 정도로 단단해졌다.
후우-
마른 한숨을 내쉬자마자 스칼렛이 허둥대며 그의 가슴을 떠밀었다.
“설마 다시 하려는 건 아니죠?”
물론 민다고 밀릴 그가 아니었다.
“힘드시면 그만하죠. 하지만 일단 좀 보고 싶네요. 다친 데는 없는지.”
루키우스는 미소 지으며 그녀의 발목을 잡아 들어 올렸다. 새빨간 속살이 미처 흡수하지 못한 정액을 줄줄 흘리며 먹음직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걸 보니 눈이 돌아 그대로 쑥, 성기를 밀어 넣었다.
읏!
스칼렛이 시트를 잡아 쥐며 안달을 하더니 기가 막힌 듯 노려봤다.
“다친 데를 본다더니!”
루키우스는 대답 대신 그녀의 길고 쭉 뻗은 종아리를 핥아 올리다가 발목에 이를 박았다. 피를 조금 들이켜자 스칼렛이 바로 자지러졌다.
그녀의 몸 안이 반응한 듯 그의 성기를 오물거리며 안달을 해댔다.
후으-
루키우스는 그 감각을 만끽하며 정중하게 물었다.
“여왕님. 제가 피를 너무 많이 빨아서 벌충할 만큼 제 체액을 삼키셔야 할 것 같은데 어쩔까요? 타액보단 정액이 효과가 빠르죠. 내일도 종일 바쁘실 텐데.”
스칼렛이 헐떡거리며 바라보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먹였다.
“도대체 몇 번이나 하려고….”
루키우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반한 여자는 놀랍도록 영리했다.
이젠 절대 놓지 못할 정도로.
***
루키우스와 밤을 보내고 난 다음 날 아침, 스칼렛은 침대 밖에서 들려오는 짤막하지만 높은 비명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밤새 시달린 몸이 어찌나 힘겨운지 덮고 있던 이불을 겨우 젖히며 일어나 앉으니 베개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던 루키우스가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소곤거렸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여왕님. 귀부인들이 시중을 들려고 왔군요.”
스칼렛은 너무 놀라 잠이 확 달아났다. 마치 깜짝 상자를 들고 선 기분으로 살며시 고개를 돌리니 젖혀진 레이스 커튼 너머로 세 명의 귀부인들이 보였다.
셋 다 충격에 빠진 얼굴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레이디 블란치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암시장에서 꽤 오래 지내오면서 표정을 통해 감정을 읽는데 능숙해진 스칼렛은 레이디 블란치가 루키우스에게 굉장한 호감을 지니고 있었으며 지금 그것이 박살 나 얼이 나갔음을 알았다.
스칼렛은 숨을 들이켜며 할 말을 찾아 우물거렸고 오로지 루키우스만이 이 엄한 상황에 태평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든 가운을 좀 가져다주시겠습니까?”
그러자마자 보이지 않게 서 있던 안나 부인이 잽싸게 비로드 천으로 만들어진 가운을 가져다주었다.
루키우스는 그걸 받아들더니 커튼을 다시 내려달라는 손짓을 했다. 이내 커튼이 내려가자 루키우스는 침대에서 내려서서 건장한 나신 위에 가운을 걸치며 말했다.
“여왕의 침실에 귀부인이 들기 전 미리 고하는 것이 예법인데 영 무례하군요. 이렇게 다짜고짜 쳐들어오다니. 이거 아무래도 교체를 해야겠는걸요.”
마치 들으란 듯 또렷한 목소리였고 밖에서 안나 부인이 당황해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키우스는 신경도 쓰지 않는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는 스칼렛의 콧등에 자신의 코를 비비적대며 소곤거렸다.
“생각보다 체력이 약하시네요. 여왕님. 오늘 밤은 기절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는 커튼을 젖히고 나가버렸다.
스칼렛은 바보처럼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두 손에 얼굴을 묻으며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이웃의 뱀파이어를 탐하지 말라던 계명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어. 오늘 밤도 또 이런단 거야? 이런 걸 계속했다간 몸이 못 버틸 것 같은데….’
하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커튼 밖에 귀부인들이 서 있으니 창피해도 일어나야만 했다.
스칼렛은 호흡을 가다듬고 루키우스처럼 별거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흘끔 몸을 살피니 밤새 루키우스에게 이곳저곳을 물린 잇자국이 미처 아물지 못해 붉은 꽃처럼 남아 있었다.
특히나 가슴은 더 대단했다. 젖꼭지에 몇 번이나 이를 박았던 흔적이 있었고 하도 빨아대서 진한 핑크빛이던 것이 적갈색이 되어있었다.
‘세상에. 이런데도 아픔을 하나도 못 느끼다니. 그저 심하게 빨아대서 남은 통증만 느껴져.’
속으로 중얼거리곤 스칼렛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뻔뻔하게, 최대한 뻔뻔하게.’
몇 번이고 다짐하며 가림막을 젖혔다. 귀부인들이 여전히 눈이 동그래져선 서 있었다. 스칼렛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당혹스럽게도 곧바로 허벅지를 타고 미적지근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반사적으로 내려다보니 오늘 새벽까지 루키우스가 쏟아부은 그것이었다. 미처 몸 안에 흡수되지 못한 것이 흘러내린 모양이었다.
윽!
엄청나게 당황하는데 귀부인들이 눈을 내리깔며 곱게 인사를 하더니 아나이스 공작부인이 상냥하게 말했다.
“마이 퀸. 따뜻한 욕조에 약초를 풀어 몸을 좀 담그셔야겠군요.”
그러더니 안나 부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당장 레이디스 메이드를 불러 준비시키도록 해요. 최대한 빨리.”
고맙게도 안나 부인은 군소리 없이 후다닥, 침실을 나갔고 아나이스 공작부인은 속 원피스를 들어 스칼렛에게 입혀주었다.
“다시 침대에 누우세요. 목욕 준비가 될 때까지.”
“아, 아뇨. 괜찮은데요. 일단 좀 닦을 걸 주실 수 있을까요?”
스칼렛이 머쓱해하자 박스터 후작 부인이 다 안다는 듯 호호호,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뱀파이어들이 잠자리에서 거친 거야 다들 안답니다. 애정이 넘칠수록 사내의 정을 넘치게 부어댄다는 것도요. 사랑받고 계시네요.”
그러자마자 레이디 블란치가 견디지 못한 듯 그대로 뛰쳐나갔다.
스칼렛은 황망하게 바라봤고 박스터 후작 부인이 쯧쯧, 가볍게 혀를 차더니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재상의 시종 무관을 노리는 레이디들이 아주 많았죠. 그동안 누구와도 잠자리를 하지 않으셔서 다들 몸이 달았었거든요.”
그러더니 스칼렛에게 위로하듯 말했다.
“걱정 마세요. 내일이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마음을 추스르고 돌아올 테니까요.”
아나이스 공작부인 또한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스칼렛에게 말했다.
“마이 퀸. 저희는 목욕이 끝나시면 다시 오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러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스칼렛은 무척 곤혹스러워했지만 둘 다 자신들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며 정중하게 절을 하고는 물러갔다.
홀로 남겨진 스칼렛은 지친 기분으로 다시 침대에 털썩 옆으로 드러누웠고 그러자 제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몸 중에서도 유달리 하얗고 말간 손목 안쪽의 피부 위로 희미하게 잇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바로 오늘 새벽이 떠올랐다.
“색깔이 비슷해서 그런가 아에리우스 꽃의 향이 나는 것 같네요.”
루키우스는 그렇게 소곤거리며 손목에 여러 번 입을 맞추다가 살며시 흡혈했고 스칼렛은 제 몸이 반사적으로 그의 것을 삼킬 듯 빨아들이는 것을 느꼈다.
“하! 이거… 무척…. 좋군요. 너무… 좋아서.”
듣기 좋은 신음을 흘리던 루키우스는 그녀의 몸 위에서 미친 듯이 날뛰었다.
박고 또 박고, 퍽퍽 올려치는 사나운 몸짓에 몸이 두 조각이 날 것 같았지만 동시에 쾌감이 어마어마했다.
“스칼렛. 마이 스칼렛.”
짐승처럼 거칠게 그녀를 탐하면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는 왜 그리 단지 달콤한 디저트를 먹는 것보다 더 맛있는 목소리였다.
스칼렛은 허벅지 안쪽에 여전히 고여 있는 쾌감이 다시 기어오르는 느낌에 다리를 하나로 모아 배 안쪽에 힘을 주었다.
어이없게도 새벽까지 품고 있었던 단단한 것이 그리워져 간질거렸다.
암시장 살롱 언니들이 첫날밤은 너무 힘들고 아파서 기분 좋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했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솔직히 몸이 버티질 못해 기절까지 했지만, 루키우스와의 잠자리는 너무 좋았다.
‘또 하고 싶어.’
속으로 중얼거리며 슬며시 제 하반신으로 손을 뻗는데 불쑥 이리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어 그레이스. 목욕 준비가 되었습니다.”
스칼렛은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고는 놀라서 눈이 동그래진 이리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빨리 목욕을 해야겠어요. 머릿속까지 탈탈 아주 깨끗하게.”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