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쉐도우 슈발리에 (7/16)

6. 쉐도우 슈발리에

수도에 도착한 바로 그날 저녁, 루키우스는 대공과 함께 수도 근처에 있는 체터필드 가의 별장 성으로 향했다.

그곳에선 매년 체터필드가의 남자들이 모여 여는 사냥대회가 열렸는데 일주일 동안 치르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렇게 겉보기에는 지극히 건전한 행사였지만 밤은 달랐다.

수도에서 불러들인 이름난 고급 창녀들이 순혈 미소녀나 미동을 꼬리에 달고 찾아들었고 환락의 파티가 새벽까지 이어졌다.

대공을 비롯해 체터필드 가의 남자들 모두가 온갖 변태 짓을 해댔고 당연히 그들을 섬기는 시종들 또한 함께 어울릴 때가 많았다.

하지만 루키우스는 분위기가 무르익는다 싶을 때 바로 몸을 뺐고, 대공은 언제나 그랬듯 말리지 않았다.

그 덕분에 늦은 밤 어두운 숲을 서성일 시간이 많았고, 생각은 자연스럽게 스칼렛과 보냈던 시간으로 흘러갔다.

달콤한 피, 달콤한 피부, 달콤한 입술.

온천에서의 밤에 보았던 하얀 음부와 새빨간 속살.

그동안 외모 때문에 셀 수도 없이 많은 레이디들에게 유혹을 받았고 그중에는 심지어 그의 침대에 나신으로 숨어서 덮치려 했던 여인들도 여럿 있었다.

그러다 보니 여인의 몸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본래 체모가 나질 않는 것인지 속옷을 벗겼을 때 드러난 하얀 음부가 어찌나 야살스럽던지 그의 눈꺼풀 안쪽에 콕 박혀 지워지질 않았다.

음부 안에 숨은 새빨간 속살은 혀로 핥으니 달콤했고 뿜어나오는 꿀마저 혀를 녹였다.

루키우스는 매일 밤 그 맛을 곱씹으며 허덕였다.

그래서인지 시종들을 위해 준비된 최상급 블러드 팩조차 구역질이 일었다.

안 되겠다 싶어 파티에 왔다가 집요하게 유혹해오는 창부의 생혈을 빨아보려 했지만, 송곳니가 나오질 않아 포기해야만 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고 났더니 수도로 오는 길이 너무나 즐거웠다.

‘스칼렛. 마이 스칼렛을 드디어 볼 수 있겠군.’

물론 그동안 쌓아온 연륜 덕분에 표정은 완벽하게 숨길 수 있었지만, 마음이 들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8일째, 약속했던 11시를 훌쩍 넘어 12시 30분.

여왕의 집무실에 딸린 접견실은 때아닌 한파가 몰아닥치는 중이었다.

체터필드 대공은 지난 일주일 동안 너무 심하게 논 탓에 컨디션이 좋질 않았는데 여왕이 단장을 이유로 부디 기다려 달라는 전갈을 해오자 이를 벅벅 갈았다.

“두꺼비처럼 생겼다더니 단장은 무슨. 차라리 베일을 덮어쓸 것이지. 점심을 먹고 쉬어야 할 시간인데 이런 짓을 하다니 무례한 계집이로군.”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공과 함께 온 십여 명의 고위 관료들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에 빠져 숨소리조차 낮추고 있었다.

여유로워 보이는 건 루키우스뿐이었다. 그에겐 워낙 흔한 일이라 대공이 앉은 소파 뒤에 시종 무관답게 뒷짐을 지고 선 채 접견실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제는 까마득한 오랜 옛날처럼 느껴지지만, 고작 넉 달 전까지 살아있었던 그러다 폭탄 테러에 휘말려 불운하게 세상을 뜬 여왕의 취향이 이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미처 몰랐는데 이국의 조개와 보석을 광적으로 좋아했던 여왕답게 벽난로 위에 걸린 거울에 붙은 장식과 벽에 발린 벽지에 박힌 문양마저 그것들로 되어있었다.

누군지 몰라도 일일이 수작업하느라 꽤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을 것 같았다.

아마도 만들면서 적어도 50년은 넘게 쓰일 곳이니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자신을 세뇌했을 거다. 여왕도 그랬기에 이곳에 돈을 처바른 걸 테고.

고작 32살이란 나이에 죽으리라곤 상상조차 못 했을 여왕을 떠올리다가 이젠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스칼렛이란 사실이 떠올라 울적해졌다.

얼굴에는 늘 그랬듯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조금이라도 빨리 스칼렛을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강해 괴로울 지경이었다.

고작 며칠 동안 떨어져 있었던 것뿐인데 기분상으로는 일 년도 넘게 보지 못한 것만 같았다.

하아-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다가 흠칫 놀라 얼른 표정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하지만 보기에는 그저 한 마리 광견 같지만, 눈치 하나는 사냥개 수준인 체터필드 대공이 넘겨 들을 리 없었다.

대공은 흘끔 루키우스를 눈짓하더니 접견실 문을 노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피 한 잔 못 먹고 나온 모양이군. 감히 내 시종 무관을 이리 고생시키다니 그 두꺼비 계집에게 쓴맛을 보여줘야 할 텐데 어떡할까?”

그러면서 두 손을 얹고 있는 지팡이로 바닥을 탁탁, 두드리는데 꼭 사냥용 총에 화약을 장전한 뒤 내려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스칼렛에게 손댔다가는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루키우스는 목구멍까지 기어 올라온 말을 삼키며 그저 침묵을 지켰다.

다행히 대공이 주변의 고위 관료들에게 의견을 묻기 전에 접견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왕 폐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러더니 바로 문이 열리며 로드 슈발리에, 티베리우스가 들어섰다.

당혹스럽게도 그는 망토부터 시작해 위아래 모두 검은색 제복 차림이었는데 방안을 한 번 둘러보더니 옆으로 물러서며 말했다.

“들어오셔도 됩니다. 마이 퀸.”

그러고 나서야 역시나 검은 드레스 차림의 스칼렛이 나타났다.

접견실의 창을 통해 들이치는 햇살 아래 허리까지 흘러내린 붉은 머리카락이 불붙은 듯 타올랐다. 분장을 말끔하게 지운 하트 모양의 말간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언제나 그의 눈을 현혹시키는 가느다란 목덜미는 검은 레이스로 쌓여 있어 더욱 고혹적으로 느껴졌고 검은색 때문인지 상대적으로 피부가 순백으로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루키우스는 그녀의 전신을 눈으로 훑고 또 훑었다. 가볍게 화장까지 해서인지 숨이 막힐 만큼 아름다웠다.

적당한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더니 그게 설마 오늘일 줄은 몰랐다. 저러고 등장했을 때 슈발리에들이 들떠서 난리를 쳤을 광경을 떠올리니 구역질이 치밀었다.

‘씨발. 다들 스칼렛의 눈에 들어보겠다고 온갖 쇼를 하기 시작하겠군.’

몹시도 울컥해 흘끔 옆을 바라보니 고위 관료들 모두가 입을 떡 벌린 채 바라보고 있었다. 가장 충격을 받은 건 체터필드 대공으로 그는 손으로 입가를 쓸며 낮게 신음했다.

“두꺼비라 들었는데….”

스칼렛은 기대했던 반응인지 생긋 웃더니 걸어 들어오며 말했다.

“좀 더 빨리 오고 싶었는데 북궁에 있는 여왕들의 무덤을 참배 갔다가 살펴보니 너무나 부실하게 관리되고 있기에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다가 늦어버렸네요. 이해들 하세요.”

그러더니 대공의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스칼렛이 앉은 소파 뒤로 마치 병풍처럼 티베리우스와 두 명의 슈발리에들이 둘러섰고, 한쪽에는 이리나가 두 손을 모은 채 자리를 지켰다.

모두가 검은색 옷차림을 하고 있다 보니 접견실의 화사한 분위기에 비해 너무 이질적이라 압도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스칼렛은 소파에 편하게 등을 기대더니 조용히 말했다.

“자, 내가 누군지는 다들 아실 테니 각자 소개를 좀 해보시죠.”

마치 제집에 찾아온 손님을 맞는 듯한 말투였다.

물론 이곳 남궁은 여왕의 집무실을 비롯해 왕실 도서관과 외교문서를 관리하는 보관실 등이 모여 있어 전통적으로 여왕이 꽤 오랜 시간 머무는 곳이긴 했다.

그래도 스칼렛은 아직 대관식도 올리지 못한 예비 여왕이었고 도착한 지 겨우 8일째였다. 그런데도 너무 말투가 당당해서 대공조차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어험. 제 소개부터 드리지요. 전 재상직을 맡은 대공 윌리엄 체터필드라고 합니다. 제 어머니가 플로라 여왕이시니 먼 친척인 셈이지요.”

그렇게 말한 대공은 스칼렛이 빤히 바라보자 멋쩍었는지 덧붙였다.

“뭐, 저를 선한 이웃쯤으로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재상 집무실이 있는 동궁이 여왕의 저택 옆에 있거든요. 그러니 우린 이웃인 셈입니다. 이웃을 잘 둬야 만사가 편한 법이죠.”

그리고는 대공은 껄껄 웃었다. 제가 한 말이 세상 무엇보다 재미난 농담이라는 듯.

스칼렛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말했다.

“그렇군요. 선한 이웃이라. 하긴 혈혈단신인 상황에 당신처럼 나이 어린 분이 절 돕겠다고 이리 애써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실례지만 여왕 폐하. 제 나이가 벌써 쉰아홉입니다. 젊어 보인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어리다는 말은 또 처음 듣는군요.”

대공은 황당해하며 대답하곤 주변에 둘러선 고위 관료들과 눈을 맞추며 웃음을 날렸다. 들러리처럼 선 고위 관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따라 웃었다.

스칼렛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그것참 신기하네요. 여왕의 아들은 성년이 되면 무조건 수도를 떠나야 한다고 들어왔는데요. 그래서 당연히 18살이 안 됐을 줄만 알았지 뭐예요.”

잠자코 듣고만 있던 루키우스는 하마터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가까스로 이를 악물며 웃음을 삼키는데 스칼렛이 흘끔 그를 바라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눈이 마주쳤고, 루키우스는 맑디맑은 에메랄드 눈동자 가득 담겨 있는 따스함에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졌다.

반면 평소 젊어 보이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대공은 자존심이 단단히 상한 모양이었다.

살기를 뿜어내며 지팡이로 바닥을 몇 번이나 내리찍으며 분을 삼키더니 노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수도에 남은 건 국정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제 어머니께선 말년에 심한 관절염에 시달리셨거든요. 또한, 재상직에 오른 것도 차대 여왕께서 돕기를 청하셨기 때문이고요.”

스칼렛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공의 뒤쪽에 선 고위 관료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마음을 다해 섬기시던 여왕이 폭탄 테러를 당해 돌아가셨는데 왜 수사는 지지부진한 것이며 게다가 하나같이 상복도 입고 있지 않다니 어째선가요?”

“그건 바로 다음 여왕을 맞아야 했기 때문이지요. 개인적으로야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국정을 제대로 굴리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수사는….”

체터필드 대공이 눈을 부라리며 목소리를 높이려는 찰나, 스칼렛이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됐습니다. 수사 진행 상황은. 쇼핑가는 길에 우연히 왕실 수사대장을 만났는데 아는 게 하나도 없기에 해고했습니다. 새 수사대장은 앨버트 레오폴드로 결정했고요.”

“레이디 스칼렛! 아직 대관식도 올리지 못하셨으면서 국정사를 제멋대로 결정하시면 안 됩니다!”

체터필드 대공이 잡아먹을 듯 소리쳤다.

스칼렛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도 그런 줄만 알았지 뭐예요. 그래서 광장에서 여왕의 이름을 막 외쳐보고 그런 건데. 뭐랄까 제 로망이었거든요. 재상님도 그런 거 있으시죠? 로망.”

“그 로망이 뭐 어쨌다는 겁니까?”

“카지노에 놀러 가는 길에 우연히 왕실 변호사를 만났거든요.”

“왕실 수사대장도 우연히 만나시더니 왕실 변호사도 우연히 만났다는 겁니까?”

“그러게요. 어쨌거나 그분 말이 대관식은 형식적일 뿐 전대 여왕이 숨을 거둔 순간부터 그 뒤를 이을 계승자가 모든 권한을 이어받기에 광장에서 외친 말이 다 실효라지 뭐예요.”

“그래서 뭡니까? 공표문이라도 쓰셨단 겁니까?”

대공이 기가 막힌 듯 물었다.

스칼렛은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왕실 변호사실 서기가 일을 아주 잘 하더라고요. 뚝딱뚝딱 초야권과 결혼 허가권 폐지안을 쓰더니 사인 하라기에 넙죽 사인 해줬죠. 지금쯤 수도에 있는 모든 광장에 걸렸을 거예요.”

그리고는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맞다. 오페라 보러 가는 길에 우연히 왕실 은행장도 만나서요. 이야기를 나눠보니 대출 이자가 원금의 20%라지 뭐예요. 아무래도 실수로 0을 하나 더 붙인 것 같아 빼라고 했답니다.”

“레이디 스칼렛! 재상인 저와 상담도 없이 어찌!”

“그렇죠? 이런 건 건당 해결 보수를 먼저 정해야 끝까지 할 맛이 나는데 말이죠. 음, 건당 금화 천 개 어떨까요?”

“이 늙은이가 귀가 이상한가 봅니다. 여왕위가 무슨 직업도 아닌데 해결 보수라니요?”

“재상님, 월급 받으시잖아요. 왕실 은행장에게 물어보니 상여금이랑 보너스도 때마다 꼬박꼬박 챙겨가신다던데요? 그런데 여왕은 공짜로 일하다니 그게 말이 돼요?”

“마이 퀸! 여왕에겐 이 나라가 재산입니다. 또한, 여왕 명의의 토지에서 수확되는 농산물 판매 대금과 수도에 있는 건물의 대여 수익금, 여왕의 이름을 빌려주고 만든 제품에서 나오는 로열티만으로도 제 월급은 가볍게 뛰어넘습니다.”

“문제는 당신 허락을 받아야만 쓸 수 있다는 거 아닌가요? 왕실 변호사한테 듣고는 정말 놀랐네요. 차곡차곡 쌓이는 그 돈의 이자를 관리비 명목으로 챙겨가신다는 것도 놀랐고.”

스칼렛은 생글거리며 말하고는 느긋하게 소파에 등을 기대더니 덧붙였다.

“어쨌거나 은행장과 둘만 이야기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 오늘 석간신문에 발표하라고 했습니다. 새 여왕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로 시작된대요. 왕실 은행장이 뭘 좀 아시더라고요.”

체터필드 대공은 온몸으로 살기를 뿜어내며 이를 으드득, 갈았다. 레오폴드 공작 이후 그를 이렇게까지 노엽게 만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오가며 타닥타닥, 전기 불꽃이 튀었다.

지켜보던 루키우스는 너무 초조해져 손을 들어 제 입가를 쓸었다.

변경에서 살던 그녀가 이토록 재빠르게 귀족들조차 반기를 드는 문제를 치고 나올 줄은 미처 몰랐다.

아무래도 레오폴드 성의 언덕 위에서 리처드 공자가 귀띔해준 게 확실했다.

‘굉장하군.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은 하기가 쉽지만 그걸 실행에 옮긴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인데.’

속으로 중얼거리다 보니 뱃속 깊숙한 곳에서 웃음이 솟구쳤다.

그동안 그가 데려온 소녀들은 죄다 대공의 위엄에 주눅이 들어 여왕으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묻지도 못했다. 그저 재상에게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을 뿐.

루키우스는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답답해했고 때론 죄책감에 휩싸이곤 했었다.

그런데 스칼렛은 달랐다. 정말 완벽하게 달랐다.

가슴 속에 쌓여가던 감정이 탁 풀어지면 속이 시원해졌다. 덩달아 표정까지 풀리려 해 굳히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스칼렛이 흘끔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루키우스는 저도 모르게 마주 미소 지었다.

순간 달콤했다.

다음 순간 체터필드 대공의 시선이 둘에게 동시에 와닿았다.

스칼렛이 아차 싶은 얼굴로 황급히 눈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레이디 스칼렛. 이토록 영민하게 움직이시니 감개무량하군요. 하지만 여왕께서 연달아 숨을 거두시고 이제 남은 건 오로지 당신뿐이니 저희 신하들의 심려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대공의 가느다란 입술을 타고 뱀처럼 교활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대 여왕들을 죽인 정체 모를 적이 저 또한 노리고 있다는 거군요. 뭐, 각오는 하고 왔습니다.”

스칼렛의 대답에 대공은 엉뚱하게도 루키우스의 팔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제가 루키우스더러 당신을 모셔오라 보낸 건 유사시 주인을 지킬만한 힘과 검술 실력이 있기 때문이지요. 몸싸움에도 능하고 눈치도 빠르고요.”

“어머, 그런가요? 몰랐네요. 괴한들에게 기습당했을 때 그는 절 데리고 도망쳤을 뿐이라서요.”

“빠른 판단력 또한 루키우스의 재주죠.”

“그래서요? 대공께서 아주 좋은 풋맨을 두신 걸 자랑할 자리는 아닌 듯싶은데요.”

그렇게 말하는 스칼렛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오는 길 내내 그와 있었던 일들이 하나둘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그걸 감추기 위해서인지 손을 입가에 대며 교태롭게 웃기까지 했다.

루키우스는 괜히 마음이 복잡해져 이를 악물며 바닥만 노려봤다.

체터필드 대공은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를 낚아 올릴 타이밍을 재는 듯 잠자코 있더니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입을 열었다.

“루키우스를 당신의 쉐도우 슈발리에로 삼으시지요.”

루키우스는 너무 놀라 눈을 부릅떴다. 기쁨과 근심이 동시에 일어났다.

스칼렛의 곁에 머무는 건 그의 소원이었지만, 뱀과 같은 대공이 정말로 스칼렛의 신변이 걱정돼서 권할 리는 없었다.

“대공 전하. 이번에 뽑힌 근위대의 수준은 아주 높기에 굳이 제가 쉐도우 슈발리에로 봉사할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만.”

황급히 말하자 대공이 고개 돌려 교활함이 흘러넘치는 눈빛으로 말했다.

“루키우스.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너만 한 뱀파이어가 있을 리 없지. 부디 레이디 스칼렛을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지켜드리도록 해라.”

순간 루키우스는 자신의 발목에 저주로 인한 명령의 족쇄가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태어났을 때 걸린 대공에 대한 절대복종의 맹세 이외에는 처음 받은 명령이라 힘겹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더러웠다.

최초의 족쇄를 풀지 않은 채 몸과 마음을 바치라니 그건 곧 그를 스칼렛을 잡을 장기말로 쓰겠다는 선언이었다.

루키우스는 대공의 어깨너머로 스칼렛과 시선을 맞추며 거절하라는 눈짓을 해댔다. 스칼렛은 곤혹스러운 눈빛으로 흘끔 그를 바라보더니 표정을 굳혔다.

체터필드 대공은 스칼렛을 바라보며 다시 권했다.

“부디 그래 주시지요. 그래야 이 늙은이가 밤에 발을 뻗고 잘 수 있을 듯합니다.”

스칼렛은 천천히 기다란 속눈썹을 깜빡거리더니 이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웃의 뱀파이어를 탐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게 만드시다니 죄를 짓게 만드시는군요. 그렇다고 재상께서 그토록 권하시는 걸 거절할 수도 없으니 제 곁에 두도록 하죠.”

루키우스는 안 된다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체터필드 대공의 뱀 같은 눈짓에 깊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충심으로 모시겠습니다. 마이 퀸.”

***

스칼렛은 대공과의 면담이 끝나자 녹초가 되어 집견실을 나섰다.

지금까지 풋맨으로 일해왔으니 바로 몸을 뺄 순 없는지 루키우스는 대공의 뒤에 선 채 함께 배웅했다.

“아마 오늘 밤부터는 합류할 겁니다. 내일부터 여왕으로서의 공식 일정이 시작되니까요.”

마차에 오르는데 티베리우스가 슬쩍 귀띔했다.

“공식 일정이라뇨? 난 지난 일주일 내내 충분히 여왕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한 것 같은데요.”

스칼렛이 어리둥절해 묻자 티베리우스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물론 그러시죠. 제가 말씀드리는 공식 일정이란 건 뭐, 내일 하루 지내보시면 아실 겁니다.”

그러면서 짓는 미소가 너무 의미심장해 더 캐묻고 싶었지만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파 조용히 마차에 올랐다.

이리나가 눈치를 챘는지 손을 쭈물거리며 마사지를 해주었지만, 졸음이 마구 쏟아졌다.

체터필드 대공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도 없이 회의를 이어가느라 밤잠을 설쳤더니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가서 일단 눈을 좀 붙이자.’

오로지 그 생각만 하며 마차를 타고 여왕의 저택으로 돌아왔는데 수도 최고의 재단사라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밥도 못 먹고 몇 시간을 꼬박 기다렸다는 안나 부인의 귀띔에 어쩔 수 없이 수치를 재는 둥 마는 둥, 옷감을 고르는 둥 마는 둥 하며 대충 끝내고 나니 앨버트 레오폴드가 찾아왔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역시나 앨버트 레오폴드는 제 형인 리처드 레오폴드와는 닮은 점이 하나도 없었다.

오동통한 뺨을 가진 둥글둥글한 얼굴과 마구 헝클어진 밀짚 색 금발 그리고 마시멜로로 빚어낸 듯한 살집 좋은 몸까지.

그런데도 티베리우스가 귀띔해준 대로 보기보다 유능한 건 사실인 모양이었다.

불과 4일 전, 대관식이 있던 날 밤 사라진 전 전대 여왕에 대해 조사를 해오라 일렀는데 상당한 두께의 보고서를 들고 나타났다.

“여왕 폐하. 직접 보고하라 하셔서 급히 찾아왔습니다. 말씀하셨던 대로 같은 날 사라진 마구간 지기의 신원에 대해 조사를 좀 해봤는데 좀 수상한 점이 드러나더군요. 일단….”

조목조목 늘어놓는 그의 보고는 한마디로 마구간 지기가 비록 생긴 것은 번듯했지만 사실은 돈만 주면 뭐든 하는 나쁜 놈이라는 거였다.

스칼렛은 그와 함께 점심 겸 저녁을 먹으며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전전대 여왕은 누군가의 사주로 접근한 나쁜 남자에게 납치된 거군요.”

앨버트 레오폴드는 식은땀을 닦는 시늉을 하며 대답했다.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을 목격한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동궁에서 이어지는 대로에서 검은 마차에 오르는 걸 봤다더군요. 마부는 회색 망토 차림이었고요.”

“그게 다예요?”

“행적은 그 길로 끊어졌습니다. 땅으로 꺼진 것처럼 다시 나타나지 않고 있죠. 다만 우리 수사팀 중 한 명이 이 일의 배후에 시크릿 풋맨이 있다는 소문이 돈다고 보고했습니다.”

“시크릿 풋맨?”

“체터필드 대공가에서 대대로 더러운 일을 하는 순혈 뱀파이어를 뜻합니다. 그 정체를 아는 건 오로지 대공뿐이고, 대공이 원하는 방식으로 적을 제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를 잡는다면 대공을 재상직에서 끌어내릴 최고의 카드가 되겠군요. 잘됐네요. 그쪽으로 계속 파보도록 하세요.”

그렇게 회의 겸 식사를 끝내고 나니 해가 졌다.

사실 자기엔 무척 이른 시간이었다.

하지만 스칼렛은 더는 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더 만날 사람은 없었기에 이리나의 시중을 받으며 가볍게 목욕을 마쳤다. 그런 뒤 비단으로 만들어진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거의 기다시피 방으로 돌아왔다.

너무 피곤해 그대로 침대로 뛰어들려 했지만, 그냥 보아넘길 이리나가 아니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들었던 잔소리를 또다시 듣고 말았다.

“유어 그레이스. 머리를 말리고 주무셔야죠. 이렇게 아름다운 머리를 학대하시면 안 됩니다.”

어쩔 수 없이 스칼렛은 침실 옆에 있는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몹시도 화려한 화장대가 놓여 있었는데 본 적 없을 정도로 깨끗한 거울과 더불어 화장대 위에는 온갖 화장품이 즐비하게 들어차 있었다.

물론 그중 하나도 손대지 않았지만, 모양도 색도 다 예뻐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긴 했다.

‘밖에 나가면 이런 것들을 잔뜩 살 수 있다고 시종 무관이 그랬었지. 하루라도 쇼핑하러 다녀올 걸 그랬나?’

새삼 아쉬워져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는 사이 이리나가 두꺼운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열심히 빼내더니 곧이어 양털 빗으로 정성스럽게 빗질을 해줬다.

스칼렛은 빗질이 기분 좋아 꾸벅꾸벅 졸다가 불쑥 루키우스가 슈발리에의 검은 제복을 입고 들어서는 통에 잠에서 확 깨어났다.

흰색에 가까운 금발과 순백의 피부 그리고 잘생긴 얼굴이 검은색 제복 때문에 소름 끼칠 정도로 근사해 보였다.

다른 슈발리에들과 똑같은 제복일 텐데 차원이 다른 옷을 입고 선 것만 같았다.

“마이 퀸. 침실을 좀 점검하겠습니다.”

루키우스는 가볍게 인사를 하더니 성큼성큼 화장대 뒤쪽에 보이는 문을 통해 침실로 들어갔다.

“유어 그레이스. 계속 그렇게 입을 벌리고 계시면 침이 흐를 겁니다.”

이리나가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소곤거렸다.

그제야 스칼렛이 자신이 입을 떡 벌린 채 루키우스를 바라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어찌나 창피한지 꾹 입을 다물고는 침실을 흘끔거렸다.

루키우스는 진지한 얼굴로 아주 능숙하게 이불을 걷어보기도 하고 베개를 눌러보기도 하는 등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다 시선을 느낀 듯 바라보려 하기에 얼른 눈을 감고 조는 척을 했다.

심장이 콩콩 뛰었다.

그가 대공의 명령으로 스칼렛이 하려는 모든 걸 감시하기 위해 온 것을 알지만 그래도 기분이 들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 빌어먹을 이웃의 뱀파이어는 탐해선 안 되는데….’

하지만 접견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자꾸 시선이 루키우스에게로 흘렀다.

온통 차가운 시선으로 가득 찬 그곳에서 루키우스만이 유일하게 따스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선 모른 척해야 했지만 그랬다간 얼어 죽을 것만 같았다.

“루키우스를 당신의 쉐도우 슈발리에로 삼으시지요.”

대공의 목소리에선 교활함이 줄줄 흘러넘쳤지만, 스칼렛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독이 든 줄 알면서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오후 일을 곱씹다가 진짜로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몸이 갑자기 확 앞으로 넘어가려는데 커다란 손이 어깨를 잡으며 지탱했다.

“이리나. 제가 모시도록 하죠.”

루키우스의 목소리와 함께 이리나가 물러서나 싶더니 크고 강한 두 팔이 스칼렛을 가볍게 안아 들었고 이내 너른 가슴이 느껴졌다.

마치 엄마에게 안긴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걸 만끽하며 루키우스의 품으로 파고들자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랫동안 그러고 있고 싶었는데 침실이 너무 가까웠다.

루키우스가 침대에 부드럽게 눕혀줬고, 스칼렛은 너무 아쉬워 옆으로 드러누우며 루키우스의 손을 슬쩍 잡아끌었다.

그가 멈칫하나 싶더니 이내 스칼렛이 원하는 대로 등 뒤에 누워 품 안에 그러 안았다.

단단하면서도 온기가 느껴지는 그의 가슴이 등에 맞닿았다.

스칼렛은 눈을 감은 채로 그의 팔을 끌어 허리에 두르게 하고는 잠꼬대하듯 읊조렸다.

“잘 자요.”

루키우스가 설탕처럼 달콤하게 소곤거렸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마이 퀸.”

그러더니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스칼렛은 그의 손을 마치 곰 인형처럼 끌어안고는 어찌나 노곤한지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

너무 일찍 잠자리에 든 까닭인지 뒤척이다 눈을 번쩍 떴다.

꽤 이른 새벽인지 캄캄해도 너무 캄캄했다.

스칼렛은 살짝 어리둥절해 주변을 두리번대다 사방에 두꺼운 레이스 커튼이 처진 것을 알고는 조심스레 걷어보았다.

그러고 나니 눈앞이 확 밝아졌다. 조금 떨어진 곳에 놓인 사이드 테이블 위에 작은 전등이 커져 있었다.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루키우스가 누웠던 자리를 만져보니 아주 차가웠다.

‘옆에서 자라 했더니 그냥 간 모양이네.’

하긴 루키우스도 마음이 복잡할 것 같았다. 족쇄에 걸려 있으니 대공이 원하는 대로 첩자 노릇을 해야 할 테고.

어쩐지 씁쓸해져 살짝 한숨을 내쉬는데 잔뜩 억누른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스칼렛은 바짝 긴장하며 침대에서 내려섰다.

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을 향해 천천히 발길을 옮기고 보니 화장대와 옷장이 있는 드레스 룸이 아닌 응접실 쪽이었다.

문을 열고 응접실을 들여다보니 미처 몰랐는데 바로 옆, 창 쪽으로 길고 좁은 방이 숨듯이 만들어져 있었다.

방의 모양처럼 좁고 긴 문은 살짝 열려 있었는데 안에 등불을 켜둔 탓에 흐릿한 빛이 새어 나왔다.

이제는 또렷해진 기묘한 숨소리는 바로 그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후우- 하아….”

푹 젖은 듯한 한숨이 귓가를 울렸다.

스칼렛은 긴장감이 지나쳐 폐가 터질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며 슬그머니 문틈 사이를 들여다봤다.

창가에 놓인 침대 위에 루키우스가 바지만 입은 채 앉아 있었다.

창틀에 놓인 등불이 쏟아져 내려 떡 벌어진 어깨와 근육들의 음영이 더욱 진해진 탓에 그의 상반신은 마치 신이 빚은 듯 아름다웠다.

숨결과 함께 오르내리는 거대한 흉근도 두꺼운 팔뚝도 두툼한 목덜미도 손을 뻗어 만져보고 싶을 만큼 근사했다.

“스칼렛. 마이 스칼렛.”

애절한 목소리와 함께 그의 배꼽 아래 놓인 커다란 손이 위아래로 빠르게 움직였다. 대체 뭘 쥐고 저러는 건지 쿨쩍쿨쩍, 물소리가 굉장했다.

스칼렛은 멍하니 바라보다 그의 손 위로 반질대는 귀두가 쑥 밀려 나오는 걸 보고는 그제야 그가 뭘 하는 건지 깨달았다.

‘사내들은 자신을 스스로 위로할 줄 안다더니.’

말만 들었지 본 건 처음이라 너무 놀라 조용히 뒷걸음질 치려다가 중심을 잃으며 비틀거렸고 반사적으로 문을 잡으려다 확 열어젖히고 말았다.

윽!

루키우스와 눈이 딱 마주쳤다.

“아, 저기. 그게 그러니까….”

스칼렛이 할 말을 못 찾아 허둥대는 사이 루키우스는 제 성기를 쥐고 있던 손을 거뒀다.

순간 그의 성기가 불빛 아래 온전히 드러났다. 덩치가 꽤 좋으니 예상은 했었는데 커도 너무 컸다.

언니들이 덩치 좋은 남잔 거기가 아이 팔뚝만 한다고 하기에 말도 안 된다고 웃어넘겼는데 그게 농담이 아니었다.

더 황당한 건 스칼렛의 시선 때문인지 성기가 더 부푸는 것 같더니 시퍼런 핏줄까지 불뚝 섰다.

그러니 도망가야 하는데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루키우스는 심장을 녹일 듯한 미소를 흘리더니 입고 있던 바지를 좀 더 끌어 내려 스칼렛의 주먹만 한 고환을 끌어냈다.

그걸 손에 쥐고 주무르나 싶더니 쉬고 있던 손을 들어 성기를 감아쥐었다.

“하아- 스칼렛.”

좀 더 커진 목소리와 함께 다시금 쿨쩍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빠르게 오르내리는 그의 손등 위로 시퍼런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단단한 복근과 팔뚝이 긴장과 흥분으로 꽉 조여드는 것이 보였다. 그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턱에 매달리나 싶더니 뚝뚝, 그의 복근 위에 떨어졌다.

울룩불룩한 복근 위로 미끄러져 내리는 땀방울이 몹시도 야살스럽게 느껴졌다.

스칼렛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 모든 걸 지켜봤다.

이윽고 루키우스가 고개를 뒤로 젖혀 탄성을 토해냈다.

“후- 하아- 스칼렛….”

이젠 애절하다 못해 애원처럼 느껴졌다.

스칼렛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 느낌에 입술을 깨물었고 그 순간, 루키우스가 신음을 삼켰다.

읏!

그의 성기가 울컥, 희고 질척한 액을 토해냈다. 어찌나 힘차게 뿜어냈는지 그의 어깨까지 튀어 올랐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뿜어내고 또 뿜어냈다.

그래도 여전히 빳빳하게 서 있는 성기를 바라보다 스칼렛은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저 그가 수음하는 걸 지켜본 것뿐인데 온몸이 저릿했다.

루키우스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라보았고 빨려들 것 같은 강렬한 시선이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쾌감에 절은 그의 눈동자는 진득한 어둠을 품은 파랑이었다.

스칼렛은 시선에 범해지는 기분에 가쁜 숨을 할딱였고, 루키우스는 바지를 추스르더니 침대를 내려와 그녀에게 다가섰다.

이내 정액으로 젖은 커다란 손이 그녀의 턱을 가볍게 잡아 들어 올렸다.

“꿀 냄새가 나네요. 나의 여왕님.”

루키우스는 느른한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스칼렛은 그제야 자신의 몸 상태를 깨닫고는 얼굴을 붉혔다. 그를 바라보는 사이에 속옷이 흠뻑 젖을 정도로 다리 사이가 미끄덩거리는 것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몹시도 민망해 눈을 내리깔자 루키우스가 턱을 쥔 채로 엄지만 들어 그녀의 입술 위를 문지르나 싶더니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다.

쓴맛과 비릿한 맛이 혀 위에 확 번졌다.

하지만 역겹지 않았다. 그저 이상야릇한 기분이 밀려들어 숨이 더욱 가빠졌다.

스칼렛은 살며시 그의 엄지를 혀로 할짝거리며 눈을 들어 다시 시선을 맞췄다.

루키우스의 입가에 매혹적인 미소가 흠뻑 고였다.

스칼렛은 유혹하듯 그의 엄지를 쪽, 빨아들였지만 야속하게도 루키우스는 손을 거두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눈높이를 맞추며 소곤거렸다.

“스칼렛. 난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의 애인이 되진 않을 겁니다.”

그러더니 그녀를 번쩍 품 안에 안아 들었다.

루키우스는 성큼성큼 걸어 침대로 다가가더니 그녀를 부드럽게 뉘었다. 스칼렛이 뭐라 말도 못 하고 빤히 바라보자 루키우스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말했다.

“주무세요. 마이 퀸. 내일부턴 바쁠 테니까요.”

스칼렛은 루키우스가 뒤로 성큼 물러서는 것을 한쪽으로 거둬놨던 레이스 커튼이 다시 드리워지는 것을 말없이 지켜봤다.

그러다 그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알고는 옆으로 돌아누워 몸을 한껏 웅크렸다.

갑자기 침대 위가 싸늘하게 느껴졌다. 체터필드 대공에게 한 방 먹였다고 부풀어 올랐던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저절로 눈이 침대 머리맡에 놓아둔 가족이 그려진 액자로 향했다. 보자마자 눈시울이 따가워 오나 싶더니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갑자기 너무 외로워졌다.

‘루키우스가 이곳에 올 때처럼 당연히 사랑해줄 거라고만 생각했어. 바보처럼.’

스칼렛은 손등을 물며 울음을 참았다. 그래도 눈물은 흘러나왔지만, 집에서 그랬듯 꾹꾹 소리를 참고 또 참았다.

지독한 밤이었다.

***

루키우스는 창가에 기댄 채 희미하게 들려오는 스칼렛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뱀파이어의 청력은 인간보다 몇 배나 뛰어나다 보니 그녀가 혹시라도 들킬까 봐 꾹꾹 눌러 참으며 우는 걸 알 수 있었다.

“흐느껴 우는 소리조차 예쁘군.”

마음 같아선 가서 달래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오늘 오후 루키우스는 저택에 들러 쉐도우 슈발리에로 일하게 됐음을 전하고는 간단한 짐을 꾸렸다. 그러고 있는데 대공이 그의 방으로 들이닥쳤다.

그동안 대공이 뱀파이어 시종의 공간에는 발을 들이는 법이 없었기에 루키우스와 작별인사를 하겠다고 와있던 큰 숙부 내외와 사촌 동생들이 다들 놀라 급하게 물러나야만 했다.

루키우스는 기분이 상했지만, 풋맨답게 담담한 얼굴로 대공을 맞았고, 대공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창가로 가서 뒷짐을 지고 서더니 뜬금없이 말을 꺼냈다.

“그 계집은 쥐다. 절 잡으려 들까 봐 찍찍대면서 난리를 쳐대고 있지. 그러니 전과 똑같은 방법을 쓰긴 힘들어졌다. 그렇다고 고지가 눈앞인데 손가락 물고 구경만 할 순 없지.”

그러더니 돌아서선 루키우스와 시선을 맞추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루키우스. 네가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되어줘야겠다. 그 계집에게 골치 아픈 여왕위 따위 재상에게 넘기고 원래 살던 변경으로 떠나자고 꼬드겨라.”

저주로 인한 명령의 족쇄에 직접 내려지는 명령이었다.

루키우스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고 대공은 씩 웃더니 다가와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물론 아마칼리 여왕의 직계인 여잘 안으려면 고역이겠지. 그러니 굳이 잠자리를 가질 필욘 없다. 중요한 건 그 계집이 친여왕파와 더는 놀아나지 못하는 것이니.”

아무래도 무려 천 년 전에 있었던 아마칼리 여왕과 뱀파이어 왕태자의 악연을 뱀파이어들이 지금까지 마음에 품고 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이건 명령은 아니었고 그래서 루키우스는 고개를 까닥이며 의례적인 대답을 했다.

“배려 감사드립니다.”

대공은 그 답이 마음에 든 듯 그의 어깨를 다시 한번 두들기고는 방을 나섰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고개만 돌려 바라보며 말했다.

“루키우스. 난 새해 첫날에 대관식을 올리고 싶구나. 얼마 전에 아주 좋은 모피를 샀거든. 그걸로 왕의 망토를 만들면 아주 멋질 것 같다.”

즉, 뭐가 됐든 올해가 가기 전에 스칼렛을 설득시키라는 의미였다.

루키우스는 알았다는 시늉을 했고 대공은 그제야 가버렸다. 그러자마자 바로 큰 숙부 부부가 들이닥쳤다.

“루키우스. 방금 대공 어르신이 하신 말씀이 대체 무슨 소리니?”

좀처럼 당황하는 일이 없는 큰 숙모가 놀라서 묻자 큰 숙부가 진정하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쉿. 대공께서 설명하지 않은 일을 캐물으면 쓰나. 들어도 못 들은 척을 해야지.”

그리고는 루키우스에게 말했다.

“루키우스. 넌 엔네야드 가의 당주야. 어떤 일이 있어도 정치에 있어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 알지?”

루키우스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지금까진 직접 뭔가를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야심 만만한 대공의 시종으로 일하다 보니 간접적으로 더러운 음모에 힘을 보탠 적이 부지기수였다.

그래도 지금까진 그 사실을 애써 부정하며 지내왔지만 이젠 그럴 수 없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대공은 마지막 여왕이 스스로 사퇴하도록 만들기 위해 모략을 꾸미고 있었을 거다.

하지만 스칼렛이 강하게 나오자 당황했고, 그러다 내민 카드가 바로 루키우스였다.

이유는 단 하나.

‘스칼렛의 약점이 됐군. 그녀가 날 좋아하기 때문에 내가 약점이 된 거야.’

루키우스는 접견실에서 스칼렛이 보이던 미소에 날아오를 것처럼 기분 좋아하던 자신이 끔찍했다. 사랑하는 여잘 지킬 힘 따위 없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루키우스?”

큰 숙부가 걱정스러운 듯 되불렀다. 간곡한 목소리였지만 희미하게 짜증이 느껴졌다.

아툼가의 당주이자 체터필드 대공가의 버틀러였던 루키우스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큰 숙부는 그 모든 지위를 다 물려받기를 원했었다.

하지만 작은 숙부가 당주직만은 안된다고 펄펄 뛰어 결국 큰 숙부는 대공가의 버틀러에 만족해야만 했다.

그래도 역시나 미련은 못 버리겠는지 엔네야드 가의 원로장이 된 것이 얼마 전이었다. 당주에게 조언이란 이름으로 무엇을 하라 강요하는 고집불통 노인들의 무리인 원로회의 수장.

그러므로 루키우스는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압니다. 큰 숙부님. 엮이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밤이 되어 들어선 여왕의 침실에서 스칼렛은 그의 손을 잡아끌며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새삼 그녀가 고작 열여덟 살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들 만큼 위엄있는 여왕인 척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속내는 다른 모양이었다.

루키우스는 상처 입은 작은 동물처럼 그의 품으로 파고드는 스칼렛을 그러안고 가능한 모든 곳에 입을 맞추며 오랜 시간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한없이 사랑스럽고 연약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시선은 목덜미로 흘렀고 그는 그 어떤 여인을 봐도 꿈쩍도 하지 않던 송곳니가 저절로 길어지는 것을 알고는 괴로워졌다.

더 난감한 건 뻐근할 정도로 단단해지는 하반신이었다.

결국, 여왕의 침실을 나와 응접실에 그를 위해 마련된 방으로 향했다. 진득하게 쌓였던 욕망은 기분과는 달리 열점 아래에서 미지근하게 끓어댈 뿐이었다.

마구잡이로 문질러대도 좀처럼 사정하지 못할 것 같아 포기하려 했을 때, 거짓말처럼 스칼렛이 나타났다.

불빛에 하얀 레이스 잠옷 안에 숨은 아름다운 몸선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줄도 모른 채 그녀는 녹수정 같은 눈동자를 빛내며 빨갛고 통통한 입술을 벌린 채 그를 지켜봤다.

하아-

루키우스는 스칼렛의 시선을 한껏 즐기며 쾌감을 토해내던 그 순간이 다시 떠올라 마른세수를 해댔다.

그녀가 울고 있는데 이런 생각이나 곱씹고 있다니 꼭 짐승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에게 거절당했다고 울고 있는 스칼렛이 무척 귀엽기도 했다.

‘확실히 어리긴 어려. 내가 첫사랑일까? 그나저나 눈가가 발갛게 부어오르겠군. 피부가 하야니 꽃물 든 것처럼 예쁘겠지. 혀로 핥으면 기분 좋을 것 같은데….’

속으로 중얼거리다 제 생각에 놀라 창틀에 뒤통수를 쿵쿵 몇 번이나 찧었다.

그렇게 겨우 생각을 날려 버리고 나니 울다 지쳐 잠이 든 듯 스칼렛의 울음소리가 멎었다.

루키우스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내일부터 여왕의 공식 일정이 시작된다던 티베리우스의 귀띔을 떠올렸다.

수없이 많은 귀족과 관리들이 스칼렛을 만나러 온다는 의미인데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있다가는 사교계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거다.

“이런! 얼음찜질이라도 해줘야 하나?”

허둥대며 침대에서 내려서던 루키우스의 머릿속에 사촌 여동생 칼리아가 툭하면 눈가에 붙이고 다니던 이파리가 떠올랐다.

아마칼리 여왕이 만들어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아무르 나무의 이파리는 신기하게도 따스한 것에 닿으면 반대로 차가워져 부은 것을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었다.

문제는 이 밤중에 그걸 어디서 구하느냐였다.

루키우스는 사촌 여동생이 있을 대공의 저택까지 다녀올까 고민하다가 쉐도우 슈발리에가 너무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대신 동궁을 떠올렸다.

그곳에 있는 시종 무관실에는 약 상자가 있었고, 아무르 나무의 이파리도 봤던 기억이 있었다.

루키우스는 서둘러 제복을 걸치고는 조용히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문을 두고 양옆에 의자를 둔 채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슈발리에 두 명이 깜짝 놀라 눈을 떴다가 루키우스인 걸 알아보고는 보란 듯이 다시 졸기 시작했다.

딱히 체력이 달려서 그런 건 아닌 듯싶었다. 사실 순혈 뱀파이어들은 불과 한두 시간의 잠으로도 충분히 본래 체력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

그보단 각 가문에서 시종으로 활약하며 바쁘고 화려하게 지내왔을 텐데 온종일 지루한 무술 훈련을 하다 보니 밀려오는 피곤함일 듯싶었다.

루키우스는 혹시라도 깨울까 봐 발소리까지 죽이며 정문이 아닌 뒷문 쪽에 있는 회랑으로 향했다.

여왕의 저택부터 말이 오가는 도로를 따라 움직이자면 동궁은 꽤 먼 거리에 있었지만, 궁을 복잡하게 연결하는 회랑을 잘만 이용하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물론 이런 재주는 오로지 뱀파이어만의 것으로 귀족의 신분으로 관리가 된 인간들은 수십 년을 일해도 길을 외우지 못해 헤매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루키우스는 공식적으로는 재상의 시종 무관이었으므로 1년도 되지 않아 모든 길을 파악했고, 지붕이나 담을 이용해 시간을 확 단축할 수 있는 법도 바로 알아냈다.

그렇다고 시종 무관이 예의 없이 아무 데나 넘어 다닐 수 없어 자제해왔는데 쉐도우 슈발리에가 됐으니 이제 꺼릴 것이 없었다.

루키우스는 회랑을 달리다가 아래쪽 건물의 지붕 위를 달려 다음 회랑으로 넘어가는 식으로 휙휙 달빛이 쏟아지는 길을 달려갔다.

변경으로부터 번져오는 가을이 궁에도 도착했는지 바람이 조금 쌀쌀했다.

그걸 만끽하며 보폭을 넓혀 머리 위쪽의 회랑 난간에 매달리는 순간,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틀렸습니다. 이번 여왕은 전대 여왕들과는 전혀 달라요. 아무리 유혹해도 씨알도 안 먹힙니다. 연애 경험이 없는 건 확실한데도 철벽이에요. 제 이름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지 모르겠네요.”

흘끔 난간을 막은 나무 벽을 채운 꽃 모양의 구멍 중 하나로 들여다보니 슈발리에의 검은 제복을 입고 선 아이렛이 보였다.

“그래서 대공께서 그토록 귀애하던 루키우스를 쉐도우 슈발리에로 떠나보내셨군. 뭐, 그렇다면 전략을 바꿔야겠네. 애초에 우리 목적은 여왕이 아니었잖은가?”

맞은편에 선 건 체터필드 대공의 오른팔로 알려진 필립 후작이었다.

여전히 쥐처럼 생긴 인상이었는데 뒤로 올백을 하던 머리를 앞으로 내려 인상이 더 교활해졌다.

“압니다. 그래서 여왕이 목욕하는 틈에 짐을 좀 뒤져보려고도 했고요. 하지만 그 여자의 집을 봤다면 그냥 포기하라고 하셨을 겁니다. 애들은 득실거리지 하인은 하나도 없지.”

“아니야. 분명 여왕이 뭔가 가지고 있을 거야. 대공이 폭 빠져 계신 분이 그리 말씀하셨으니 확실한 정보라네.”

“대체 그게 뭔지 대충 형태라도 알아야 찾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닙니까? 사실 여왕은 새벽에 돌아왔을 때 옷차림 그대로 나왔습니다. 가족사진 액자 하나만 챙겨서요.”

“확실한가? 행여라도 그걸 카운테스 레오폴드가 손에 넣었다면 낭패야. 대공께선 절대 용서하지 않으실 걸세.”

“절대 아닙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여왕은 그녀를 아주 제대로 엿 먹이고 보란 듯이 빠져나왔거든요. 훔칠 틈 따위 없었습니다.”

“으흠. 그렇다면 아직 헐버트 공작가에 그대로 있을지도 모르겠군.”

“저택을 제외하고 그 집에 귀한 물건이 단 하나라도 남아 있을지 의문이네요. 대접한다며 내온 찻잔마저 이가 나갔더군요. 담긴 피는 최하급이라 티베리우스만 겨우 마셨을 정도예요.”

“어쩌면 헐버트 공작이 그것의 가치를 모르는지도.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 중 하나일 뿐이니 다락방에 처박아 두고 있을 가능성도 있겠지.”

필립 후작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사람을 풀어 그 댁의 골동품을 사들이라고 해야겠군. 그렇게 가난하다고 하니 뭐든 내다 팔 테니까.”

“좋은 생각이십니다.”

아이렛은 맞장구를 치며 같이 걸음을 옮겼다.

루키우스는 둘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가만히 매달려 있다가 이내 소리가 잠잠해지고 나서야 회랑 위로 뛰어올랐다.

휴-

이 정도 시간을 매달려 있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잔뜩 긴장해서인지 어깨가 뻐근했다.

루키우스는 어깨를 돌려 근육을 풀며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 듯이 빠르게 걸으면서도 머릿속은 이곳으로 향했을 때보다 더 복잡해졌다.

‘헐버트 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이 대체 뭐기에 카운테스 레오폴드와 필립 후작이 찾으려 드는 거지?’

의아해하던 그의 머릿속에 문득 스칼렛이 목에 걸고 있는 호리병 목걸이가 떠올랐다.

되짚어 보니 암시장에서 만났을 땐 스칼렛은 그 목걸이를 걸고 있지 않았다. 목덜미에 이를 박고 흡혈까지 했으니 착각은 아니었다.

그러다 연못가에서 우연히 씻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 달빛에 반짝이는 목걸이가 기이할 정도로 눈길을 끌어 신기해했었다.

그러므로 액자를 챙기러 갔을 때 헐버트 공작이 따라 나가 스칼렛에게 호리병 목걸이를 선물로 준 것이 분명했다.

솔직히 귀족가의 레이디가 착용하기엔 너무 초라해 공작가와 후작가가 혈안이 되어 찾을만한 물건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서 더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루키우스는 손톱만 한 호리병 안에 대체 어떤 보물을 담을 수 있는지 고민하며 시종실로 들어섰다. 다들 잠든 시간이라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아무르 나무의 이파리를 챙겨 나왔다.

왔던 길과는 다른 길을 이용해 여왕의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다가서고 보니 마치 어린아이처럼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자는 스칼렛이 보였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바로 눕히고는 이불을 덮어주고 보니 예상대로 눈가에 붉은 물이 들어 퉁퉁 부었다.

루키우스는 살며시 눈꺼풀에 입을 맞추고는 아무르 나무 이파리를 붙여 주었다.

차가운지 순간 스칼렛이 표정을 찡그렸지만, 이내 시원해지는지 고른 숨을 길게 내쉬며 표정이 편안해졌다.

“푹 자요. 마이 스칼렛.”

들릴 리 없는 인사를 건네고는 루키우스는 스칼렛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스칼렛의 달콤한 피에 홀려 그동안 눈에 들어오지 않아 제대로 보질 않았는데 역시나 시선을 끄는 독특함이 느껴졌다.

슬그머니 손을 뻗어 호리병을 검지로 쓸어보니 놀랍게도 손끝에 심장이 있는 듯 맥동이 세차게 뛰어댔다.

안에 든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뱀파이어의 피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건 알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호리병을 잡아보려 했는데 기이하게도 잡히질 않았다.

‘어째서?’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스칼렛의 피부에 달라붙은 듯 꼼짝도 하질 않았다.

으음-

스칼렛이 낮게 신음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황당하게도 굳은 것처럼 붙어 있던 목걸이가 자연스럽게 반대 방향으로 흘러내렸다.

“맙소사. 아마칼리 여왕의 주술에 걸린 목걸인가 보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루키우스는 제 목소리에 흠칫 놀라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서서는 가림막을 이용해 사방을 단단히 막았다.

그런 뒤 황급히 침실을 나서 문을 닫았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쓰러지듯 눕고 나니 그제야 손끝만이 아니라 심장까지도 미친 듯이 박동 중인 걸 깨달았다.

당혹스러워하며 박동이 느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응접실의 문이 열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루키우스는 재빠르게 등불을 불어 끄곤 문가로 다가섰다. 누가 됐든 여왕의 침실로 들어가려 한다면 그의 방문 앞을 지나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윽고 나타난 건 이리나였다.

“이 새벽에 무슨 일입니까?”

루키우스가 문을 나서며 묻자 이리나는 화들짝 놀란 듯 바라보더니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루키우스 님! 안 주무시고 뭐 하세요?”

“쉐도우 슈발리에는 졸 뿐이지 자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쉐도우죠.”

“그런가요?”

이리나는 어울리지 않게도 애교스럽게 웃더니 옆구리에 끼고 있는 바구니를 내보였다.

“안나 부인이 내일 아침을 대비해 레이디 룸에 가져다 놓으라고 하셔서요.”

“아, 시종들은 벌써 기상 시간입니까?”

“아뇨.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았어요. 하지만 안나 부인에게 제가 단단히 책이 잡혔는지 이 시간에 깨우더라고요.”

“여왕께 말씀드리도록 하시죠. 감히 레이디스 메이드에게 그런 짓을 하다니.”

“에이, 그랬다간 일만 더 복잡해져요. 유어 그레이스께선 무척 상냥한 분이시지만 그렇다 해도 제 신분이 바뀌는 건 아니니까요.”

이리나는 그렇게 말하곤 침실로 들어가려 했다. 루키우스는 손을 들어서 막았다.

“밤에는 레이디스 메이드의 출입도 금지됩니다. 오로지 여왕이 허락하신 분과 쉐도우 슈발리에만이 드나들 수 있거든요.”

“음. 그럼 어쩌죠? 이걸 가져다 놔야 하는데.”

“제게 주십시오. 제가 가져다 두죠.”

“그러실래요? 그냥 화장대 옆에 내려놓아 주시면 돼요. 고마워요.”

이리나는 방긋 웃으며 바구니를 내밀었고 루키우스는 흰 천이 덮인 바구니를 받아든 채 그녀가 다시 응접실을 나가기를 기다렸다.

기분 탓인지 자꾸 머뭇대는 것 같았지만 이내 문이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루키우스는 그제야 침실로 들어가 안쪽에 있는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그곳에 있는 화장대 옆에 내려두고 그냥 나오려다가 멈칫했다.

‘안에 든 것을 확인해야지. 쉐도우 슈발리에의 임무 중 하나잖아.’

아차 싶어 황급히 바구니를 덮고 있는 흰 천을 걷었다.

달빛 아래 텅 빈 바구니가 드러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