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왕국의 수도, 레노바티오 (6/16)

5. 왕국의 수도, 레노바티오

스칼렛은 열심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루키우스에게 대담한 척 목덜미를 드러내며 흡혈을 하라고 유혹했지만 속은 바들바들 비 맞은 새처럼 떨렸다.

‘아마도 이게 마지막일 테니까….’

그래서 꾹 참고 드레스 앞자락으로 기어드는 사내다운 커다란 손 또한 받아들였다.

가볍게 주무르다 그저 젖꼭지를 손바닥으로 쓸 뿐인데도 머릿속이 텅 빌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니 그의 진 파랑 눈동자 위로 은빛이 어른거리는 것처럼 새파란 하늘 가득 은빛이 몇 땀씩 수 놓인 분홍색 꽃잎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걸 보니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뱀파이어 왕을 상징하는 꽃, 아에리우스. 이토록 아름다운데 볼 때마다 루키우스를 떠올리며 가슴 아파하게 될 것만 같았다.

“스칼렛. 수도에 가자마자 체터필드 대공에게 날 당신의 시종 무관으로 삼겠다고 해요.”

루키우스가 속내를 읽었는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스칼렛은 대답할 수 없었다. 수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 그녀가 내린 결정에 루키우스가 휘말리지 않기를 바랐다.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키자 결국 루키우스는 포기하는 것 같았다. 아쉬운 한숨을 조용히 내쉬는 것을 보면.

밤새도록 말을 달려 수도로 향하는 길 내내 둘은 거의 말을 나누지 않았다.

잠깐씩 멈춰 쉴 때마다 루키우스는 상냥하게 대해줬지만, 어색한 침묵은 계속됐다.

만약 둘 뿐이었다면 어찌할 바를 몰라 괴로웠겠지만, 다행히도 레오폴드 성에서 데리고 온 이리나 덕분에 그럭저럭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유어 그레이스. 굳이 리처드 공자님을 섭정으로 삼으실 필요 있을까요? 엔네야드 경도 충분히 그 역할을 해내실 기량이 되시는 것 같은데요.”

두 번째로 쉬는 시간, 이리나는 스칼렛의 머리를 땋아주며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스칼렛은 깜짝 놀라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루키우스는 티베리우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다른 슈발리에들은 자신들이 타고 온 말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근처 시냇가에 모여 있었다.

스칼렛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물었다.

“이리나.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봐도 돼요?”

“언덕 위에서 두 분의 입술이 움직이는 걸 읽었을 뿐이에요. 마님이 자꾸 저에게 하지도 않은 명령을 내렸다면서 야단치실 때가 많아서 언제나 멀리서 그분 입술을 읽어둬야 했거든요.”

이리나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는지 해맑게 대답했다.

스칼렛은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그 내용을 루키우스나 다른 누군가에게 말했나요?”

“아니요. 유어 그레이스. 전 수다쟁이가 아니랍니다.”

“좋아요. 비밀을 지켜줘요. 그리고 섭정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귀족으로 치면 후견인이고, 후견인은 귀족 작위를 가진 사교계를 잘 아는 사람으로 정하는 것이 법도예요.”

“하지만 공자님께서도 아직 공자에 불과할 뿐인데요?”

“맞아요. 그래서 이번 달 내로 어머니로부터 작위를 승계받으라고 했어요. 그는 기꺼이 그러겠다고 했고요. 루키우스의 말에 따르면 사교계의 총아라고 하니 조건은 완벽한 셈이에요.”

“유어 그레이스. 제가 하고 싶은 말은요. 그러니까 대공을 그 뭐냐 엿….”

“리처드 공자랑 대공을 엿 먹일 방법을 논하는 걸 들었나 보네요. 왜요? 공자가 내놓은 안보다 좋은 의견이 있어요?”

“아뇨. 그분은 엿…먹을 만하지만, 대단히, 대단히 무서운 분이신 거 아시죠?”

“체터필드 대공을 만나 본 적 있나 봐요?”

“세이턴가가 모시는 아비스가의 파티 때 오신 적이 있어요. 어린아이는 출입금지인데도 불구하고 호기심이 일어 몰래 구경하러 갔다가 대공의 눈에 들었지요.”

“이리나. 지금 밤 시중을 들었다는 의미에요? 대체 몇 살 때?”

“9살 때였어요. 지금도 그때 일을 악몽으로 꾼답니다. 책에 나오는 악마보다도 무서웠거든요.”

“하! 그 썩을 놈. 어린애한테 그런 짓을 하는 놈은 발로 거길 죽어라 차줘야 하는데. 이리나. 내 기회 봐서 꼭 그래 줄게요.”

“유어 그레이스. 말씀만으로도 기쁘네요. 당신은 정말 상냥한 분이세요. 엔네야드 경께서 반하실 만해요.”

이리나는 작게 소리 내 웃으며 말하더니 대체 어디에 넣어둔 것인지 모를 손바닥만 한 거울을 내밀었다.

“다 땋았습니다. 어떠세요?”

스칼렛은 거울을 통해 분장이 제법 많이 지워진 제 얼굴과 리본까지 엮어 복잡하게 땋아진 머리 타래를 살폈다. 허리까지 늘어지는 머리가 어깨 위로 올라가다니 놀라웠다.

“손재주가 아주 좋네요.”

“감사합니다! 유어 그레이스.”

이리나가 해맑게 웃었다. 마주 웃던 스칼렛은 시선을 느끼곤 반사적으로 앞을 바라봤다.

루키우스가 뭔가 호소하고 싶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왜 이리나에게 그러는 것처럼 자신에겐 웃어주지 않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스칼렛은 모르는 척 시선을 돌리고는 거울을 다시 이리나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체터필드 대공에 대해 좀 더 말해줘요. 사소한 버릇이라도 좋으니, 아는 대로.”

“그저 소문으로만 들은 것들이 다인데요.”

“상관없어요. 나에게 지금 필요한 건 깨알 같은 정보니까.”

“그렇다면 어디 보자. 체터필드 대공은 시계 수집가예요. 고대의 시계만 보면 천금을 주고서라도 산다고 하고요. 또. 굉장히 젊어 보이는데 그 이유가 뱀파이어의 피를 매일 마시기 때문이라고도 하고요. 맞다! 마구간 지기와 도망친 여왕님이 남기고 간 편지에 대공이 너무 무서워서 하루라도 더는 왕궁에 머물고 싶지 않다고 적혀 있었대요.”

“이리나. 시골이나 다름없는 레오폴드 성에 머물면서 그런 걸 다 어떻게 알아요?”

“리처드 공자님께선 주기적으로 수도를 방문하시는데 그때마다 제가 하우스 메이드로 따라가거든요. 가장 최근에 간 것이 지난달이에요.”

“굉장하네요. 그래도 그렇지. 그래 봤자 며칠 머무를 뿐일 텐데 그 정도 정보를 가지고 있다니.”

“굉장한가요?”

이리나는 기쁜 듯 웃었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덕분에 쉬는 시간은 휙 지나갔고, 일행은 다시 출발했다.

이미 새벽이었고 스칼렛은 루키우스의 가슴에 편하게 등을 기댄 체 단잠을 잤다.

너른 품 안과 은근히 느껴지는 그의 심장박동 때문인지 따스한 물이 가득 담긴 욕조에 몸을 담근 것처럼 몽롱하고 편안했다.

이따금 관자놀이에 내려앉는 루키우스의 입맞춤 때문에 자꾸 잠에서 깼지만 그건 그거대로 좋았다.

으응-

일부러 그의 겨드랑이 쪽에 머리를 비비적대며 파고들 때면 낮게 흘러나오는 색스러운 한숨 또한 달콤했다.

‘정말 헤어지기 싫다.’

자꾸 헛된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눈가를 따갑게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깊은 잠에 폭 빠졌다.

“마이 레이디. 수도 레노바티오에 도착했습니다.”

루키우스의 속삭임에 스칼렛은 잠에서 깨어났다. 계속해서 숲길을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선 곳은 산 중턱이었다.

해가 뜨며 사방에 드리워졌던 어둠이 서서히 걷혀가고 있어 무척 눈이 부셨다.

손 그늘을 만들어 앞을 바라보니 눈 아래로 높디높은 산을 병풍처럼 두른 거대한 원형 도시가 보였다.

잘 정비된 도로가 만든 직사각형의 구간마다 색색의 지붕을 인 다양한 건물들이 들어차 있었다.

방사선으로 뻗어 있는 도로는 마치 태양광선처럼 밖에서 안으로 좁혀 들어갔는데 한가운데에 뾰족 첨탑을 수십 개나 인 으리으리한 왕성이 서 있었다.

멀리서 봐도 주변 건물을 몇십 개는 합친 크기니 가까이 다가가면 더욱 클 것 같았다.

“내가 신호하면 일제히 나팔을 불도록. 정문을 향해 대로를 따라 전속력 전진한다.”

티베리우스가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모두에게 말했다.

스칼렛은 자꾸 감기려는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리다 이리나가 티베리우스가 아닌 아이렛의 말에 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말이 지칠까 봐 옮겨 다니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순간적이었지만 둘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받는 것을 보았고, 눈치채일까 봐 표정을 지우는 광경이 이어졌다.

‘으음. 좋지 않네. 아무래도 이리나를 내 곁에 바짝 붙여놔야겠어. 아이렛이 가지고 놀지 못하게.’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다가 티베리우스가 뿔나팔을 꺼내 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깐!”

스칼렛이 황급히 소리치자 티베리우스가 입에 댔던 뿔나팔을 내리며 바라봤다.

루키우스가 황급히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스칼렛은 대답 대신 찬찬히 왕궁을 살폈다.

리처드 공자가 일러줬던 대로 성의 왼편에 정문보단 조금 작은 측문이 보였고 너무 멀어 또렷이 보이진 않았지만, 흰색 바탕에 붉은색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측문을 기준으로 오른쪽으로는 사람이 왼쪽으로는 뱀파이어가 산다고 들었어요. 그러니 난 저 측문을 이용해 왕성으로 들어갔으면 해요. 두 종족 모두의 여왕이라는 상징으로요.”

스칼렛은 손을 들어 측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루키우스가 당혹스러운 듯 낮게 신음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마이 레이디.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두 종족 모두가 당신이 여왕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저 측문으로 가는 길은 깨끗하지 않습니다.”

“상관없어요. 애초에 수도를 원형 도시로 만든 건 모두에게 열려 있으며 모두가 평등하다는 아마칼리 여왕의 건국 이념을 담은 거 아닌가요? 그러니 난 저 길을 이용하겠어요.”

“하지만….”

“루키우스 아툼 엔네야드 경.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에요.”

스칼렛이 딱 잘라 말하자 앞쪽에 서 있던 티베리우스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차올랐다. 등 뒤의 루키우스는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이윽고 영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이 레이디. 무례하게 굴어 죄송합니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러더니 손짓을 했다. 티베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몰아 왕성까지 곧게 이어지는 대로로 들어섰다.

경쾌한 말발굽 소리가 박자를 맞추는 가운데 티베리우스가 뿔나팔을 꺼내 힘껏 불었다.

대로를 오가던 마차와 사람들이 죄다 멈춰 서더니 좌우로 물러섰다.

티베리우스는 한가운데 뻥 뚫린 길을 앞서 달리며 계속해서 뿔나팔을 불어댔다.

사람들의 시선이 사방에서 날아들어 화살처럼 꽂혔다.

스칼렛은 허리를 곧게 세우며 마치 자신이 말을 모는 것처럼 앞을 똑바로 바라보며 일부러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계속해서 직진하던 티베리우스가 말 머리를 틀었다.

루키우스가 아주 부드러운 몸짓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며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고 뒤에서 따라오던 슈발리에들이 일제히 나팔을 꺼내 들었다.

처음에는 화려한 카페와 상점이 즐비한 거리가 펼쳐지다가 마치 색이 빠지는 것처럼 점점 무채색의 건물이 이어지나 싶더니 낡은 건물과 남루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뿔나팔 소리에 얼어붙었고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던지 멍한 얼굴로 바라봤다.

스칼렛은 살짝 고개 돌려 그들을 바라보곤 볼을 부풀렸다.

‘맙소사. 대공의 폭정으로 빈부격차가 심해졌다더니만….’

어째 리처드 공자가 귀띔을 해주었을 때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나빴다. 차라리 스칼렛의 마을과 암시장 사람들이 더 활기차고 생기가 넘칠 것만 같았다.

어느덧 측문으로 향하는 길이 다가왔는지 티베리우스가 모퉁이를 돌아 왕성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뿔나팔을 세차게 힘주어 불었다.

뿌웅-!

그것이 신호였는지 뒤따르던 슈발리에들이 일제히 나팔을 불기 시작했다.

맑으면서도 허스키한, 귀에 거슬리는 것이 아닌 뭔가 경건한 느낌이 들게 하는 음색이 측문까지 이어지는 대로 가득 울려 펴졌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오가던 모든 이들이 걸음을 멈추며 좌우로 물러섰고, 느릿느릿 오가던 짐마차들도 재빨리 물러서 길을 만들었다.

사실 그저 서 있다 해도 상관은 없었다. 대로가 워낙 크고 넓어서 통행 방향을 가르기 위해 그려진 노란색 선 위를 달려도 충분했다.

이윽고 측문이 보였다. 문 옆에는 채혈소를 상징하는 흰 바탕에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을 꽂은 3층짜리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건물 앞 광장에는 처벌장이 만들어져 있었고 뱀파이어로 보이는 귀족의 하급 하인 복장의 남녀가 등을 마주한 채 쇠사슬에 묶여 앉아 있었다.

모든 것이 리처드 공자가 말해준 그대로였다.

“잠깐!”

스칼렛은 손을 번쩍 들며 힘차게 외쳤다.

루키우스가 깜짝 놀라 말고삐를 당겼고 말이 놀라 크게 앞발을 구르며 크게 울부짖었다.

스칼렛은 혼비백산했지만, 루키우스가 고삐를 잡은 팔로 버텨준 덕분에 말에서 떨어지는 불상사는 없었다.

티베리우스가 덩달아 말을 멈춰 세우며 뿔나팔을 크게 한 번 불자 슈발리에들이 불던 뿔나팔 소리가 뚝, 끊겼고 그들 또한 달리던 걸 멈췄다.

말들이 놀라 울어대는 걸 달래가며 티베리우스를 비롯한 모두가 스칼렛을 바라봤다.

“마이 레이디. 왜 멈추라 하신 겁니까?”

루키우스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스칼렛은 대답 대신 손을 들어 광장에 묶여 있는 남녀 뱀파이어를 가리켰다.

입고 있는 옷이 더러워진 건 둘째치고 정말 무섭도록 창백해서 피부가 회색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저들은 왜 저러고 있는 건가요?”

루키우스는 숨을 크게 들이켜더니 고백하듯 나직하게 대답했다.

“벌을 받는 겁니다. 정해진 기간 단 한 방울의 피도 마시지 못하기에 저렇게 탈색된 거고요.”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목에 걸린 푯말을 보니 주인의 허락 없이 결혼하려 한 죄로군요. 아시다시피 인간과 뱀파이어 사이에서 난 아이는 귀족들이 가치 있는 재산으로 여겨 관리하거든요.”

“맙소사. 사랑에 빠져 결혼하겠다는데 허락을 받아야 해요? 게다가 그것이 죄라고 저렇게 묶어 놓고? 내 기억으로는 플로라 여왕 때 귀족들이 가진 초야권조차 폐지했다 들었는데요?”

“……그 법은 부활했습니다. 그때 결혼에 대해 하인을 소유한 귀족이 허가권을 갖도록 법령을 새로 제정했고요.”

“대체 누가 그런 망할 짓을 했어요?”

스칼렛이 험악하게 물었지만, 루키우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가 그럴 줄 예상했기에 스칼렛은 바로 말했다.

“루키우스. 날 내려줘요.”

루키우스는 망설이나 싶더니 먼저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더니 스칼렛의 허리를 번쩍 안아 땅에 내려줬다.

티베리우스를 비롯한 슈발리에들이 황급히 땅에 내려서서 그녀를 호위하기 위해 바짝 다가섰다.

이리나가 언덕에서 들은 것이 있어서 짐작이 가는지 무척 초조한 얼굴로 눈을 맞춰왔다.

스칼렛은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를 지어 보이곤 광장으로 걸어가 남녀 뱀파이어 사이에 섰다. 그렇게 서서 내려다보니 그들을 묶어둔 쇠사슬과 쇠사슬을 지탱하는 걸쇠가 보였다.

둘 다 시체처럼 창백했지만, 이따금 팔이나 머리가 움직이는 걸 보니 살아있긴 한 모양이었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레이디가 죄인에게 다가서자 신기했던지 뿔나팔 때문에 멈춰 섰던 사람들이 하나둘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열 명, 스무 명…. 백 명.

스칼렛은 좀 더 많은 구경꾼이 모이기를 기다리며 쇠사슬을 노려봤다.

그러다 언뜻 죄인을 감시하는 보초일 듯 보이는 군인들이 보였는데 스칼렛의 등 뒤에 버티고 선 슈발리에들을 알아봤는지 그저 머뭇대며 바라볼 뿐이었다.

스칼렛은 그들을 못 본 척 구경꾼이 충분해졌다고 판단이 든 순간 옆으로 손을 내밀었다.

“로드 슈발리에! 나에게 검을 줘요.”

티베리우스는 처음으로 불린 그의 직책명에 무척 놀랐는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자신의 검을 손에 쥐여줬다. 진검답게 깜짝 놀랄 정도로 무거웠다.

스칼렛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을 굳힌 채 칼집에서 검을 빼 들었다. 이제는 성큼 머리 위로 떠오른 태양 아래 검의 날이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나 스칼렛 케이틀린 아마칼리는 위대한 초대 여왕 아마칼리의 뜻을 지키고자 오늘부로 뱀파이어 영지민에 대한 귀족의 초야권과 결혼 허가권을 폐지한다.”

온 힘을 다해 소리친 스칼렛은 검을 들어 쇠사슬을 베었다.

검술은 어린 시절 소양 삼아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 전부라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상당한 명검이었던지 종잇장 베이듯 쇠사슬이 두 쪽이 나 바닥에 떨어졌다.

광장에 모여 있던 사람과 뱀파이어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심지어 이들을 지키던 군인마저 웃음을 터트리며 손뼉을 쳐댔다.

풀려난 뱀파이어들은 그제야 정신이 든 듯 힘겹게 고개를 들고 스칼렛을 바라봤다.

스칼렛이 미소 짓자 그들은 눈을 부릅뜨더니 돌아서서 서로를 마주 봤다.

피 한 방울 먹지 못해 힘겨울 텐데도 서로를 덥석 끌어안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스칼렛은 흐뭇해져 돌아섰고 티베리우스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기억하는 슈발리에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렛! 이 두 사람을 돌봐줘요. 저들의 주인이 뭐라 하면 나에게 보내고.”

아이렛이 두 눈을 부릅뜨더니 황당한 듯 입을 떡 벌렸다. 하지만 티베리우스가 사납게 눈짓하자 마지 못한 듯 뱀파이어 연인에게 뛰어갔다.

스칼렛은 검을 다시 칼집에 담으며 충격에 빠진 얼굴로 서 있는 루키우스를 향해 걸어갔다. 티베리우스가 달려와 검을 받아들려 했다.

그대로 그의 손에 검을 넘기려던 스칼렛은 문득 대로를 따라 다가오는 수레를 보았다.

그 수레에는 흉포한 짐승들을 가두는 데나 쓰일 것 같은 거대한 강철 우리가 놓여 있었는데 황당하게도 그 안에 든 건 뼈만 앙상한 어린아이와 여자들이었다.

“저게 대체 뭐죠?”

스칼렛은 너무 놀라 루키우스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루키우스는 고개 돌려 수레를 확인하더니 창백해진 얼굴로 읊조렸다.

“빚을 지고 도망쳤던 사람들을 잡아 온 겁니다.”

“짐승도 아닌데 우리에 넣어서요? 그런데 왜 채혈소로 끌고 들어가는 거죠?”

“돈 대신 피를 뽑거든요.”

“가만둬도 죽을 것 같은 저 사람들에게서요? 대체 누구에게 빚을 졌기에 사람 목숨을 돈보다 천하다 여기는 건가요?”

“저들은 나라에서 운영하는 은행에서 돈을 빌렸다가 갚지 못해 도망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저들을 풀어주라 하세요. 난 여왕이니 그 돈을 감면해주도록 하죠.”

“안 됩니다. 그 결정권은….”

루키우스는 차마 말을 잊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스칼렛은 너무 기가 막혀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

“이제 보니 저 왕성에 개새끼가 한 마리 있나 보네요. 나랏돈을 가지고 은행이라 이름 붙인 사채업을 하는 개새끼가. 사악함에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이건 악마가 와서 울고 가겠네.”

말이 끝나자마자 광장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너무 화가 나 깜빡 잊고 있었는데 광장에 모여들었던 구경꾼이 여전히 그대로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 아까보다 사람이 배로 더 늘었다. 소문이 난 모양인지 골목길에서 이쪽으로 뛰어오는 인파가 꽤 많았다.

스칼렛은 살짝 당황해 볼을 긁적거렸고 루키우스가 착잡한 얼굴로 바라보며 뭔가 말할 듯 입을 열었다. 스칼렛은 재빨리 손을 들어서 막았다.

“됐어요. 그 개새끼야 들어가서 잡으면 될 일이니.”

그러는 사이 수레가 코앞으로 다가왔고, 스칼렛은 손을 들어 수레를 모는 이에게 멈춰 서라 신호했다.

그저 채혈소 일꾼일 남자는 스칼렛의 옷차림에 놀랐는지 시키는 대로 얌전히 따랐고, 스칼렛은 수레 뒤로 발길을 옮겨 쇠 우리에 달린 철문에 자물쇠가 달린 것을 확인했다.

스캉!

검이 날을 세우며 그대로 자물쇠가 뚝 잘렸다.

스칼렛은 검을 다시 칼집에 넣고는 문을 열고 외쳤다.

“집으로 돌아가세요. 다시 누군가가 잡으러 온다면 여왕의 명으로 모든 세금이 감면됐다고 대답하세요.”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미친 듯이 박수를 쳐대며 환호했다. 그러다 누군가가 여왕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고, 무섭도록 빠르게 만세 합창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여왕 만세!

여왕 만세!

여왕 만세!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는 벼락 치듯 크게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안에 갇혀 있던 여인들과 아이들은 처음에는 겁먹은 눈치였지만 사람들이 기뻐서 날뛰며 외치는 함성에 안심이 됐는지 하나둘 수레에서 뛰어내렸다.

그들은 스칼렛이 누군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고마움에 감격하며 절하기에 바빴고 이제는 대로까지 가득 채운 사람들 무리 사이로 조용히 사라졌다.

여왕 만세!

합창은 계속되고 있었고, 스칼렛은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 것을 모른 척하며 루키우스를 바라봤다.

너무나 가슴 아프게도 루키우스는 가볍게 밀기만 해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일순 그에게 입을 맞추고 달래주고 싶었지만, 스칼렛은 꾹 참으며 말했다.

“이제 당신 주인에게 가서 이르세요. 이 왕국의 주인이 도착했다고.”

***

루키우스는 티베리우스를 향해 걸어가는 스칼렛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레오폴드 궁에서부터 입고 온 화사한 드레스는 분명 여인의 옷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꼭 갑옷처럼 느껴졌다.

일국을 지배하는 당당한 장군과도 같은 기백이 그녀의 몸을 둘러싸고 넘실거렸다. 광장 안에 모여든 시민들의 시선은 개선장군을 맞이한 것 같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왕 만세!”

노도와 같은 함성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루키우스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기며 이를 악물었다. 조금 전 스칼렛이 내린 명을 수행해야만 했다. 아니, 그녀가 말하지 않았다 해도 그가 할 일이었다.

‘이제 당신 주인에게 가서 이르세요. 이 왕국의 주인이 도착했다고.’

한마디 한마디에 칼날이 숨어 있는 듯 한없이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눈빛은 그렇지 못했다.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살며시 물기를 머금었고 그를 향해 전혀 다른 말을 호소했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루키우스는 폭풍과도 같은 감정에 휩싸여 스칼렛을 계속 눈으로 좇았다.

이내 티베리우스의 앞에 선 스칼렛은 그에게 들고 있던 검을 건넸다. 티베리우스가 받아들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다른 슈발리에들은 티베리우스가 명한 것도 아닌데 그녀의 주변을 둘러싸며 경계를 강화했다.

모두가 조금 전 눈앞에서 펼쳐진 엄청난 상황에 다들 압도된 얼굴이었다. 심지어 아이렛마저 스칼렛이 명한 대로 고분고분 따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궁에 여왕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는지 측문 쪽에서 황실 마차가 빠른 속도로 달려 나오는 것이 보였다.

마차 옆에서 속도를 맞춰 달리고 있는 백마에는 몇 번인가 얼굴을 본 적 있는 여왕의 시종 무관이 타고 있었다.

그들을 보자마자 속에서 웃음이 차올랐다.

일단 대공 앞에 데려다 놓은 뒤 어떻게든 그녀 곁에 머물며 지켜줄 생각이었는데 다 바보 같은 고민이었다.

그동안 데리고 왔던 소녀들은 모두 대공의 바람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왕성에 들어갔고 대관식조차 조용히 치러지다 보니 죽거나 실종되어서야 비로소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하지만 스칼렛은 수도에 사는 대부분 시민이 어떻게든 돕고 싶어 하던 이들을 단박에 구해내 여왕 만세 합창을 끌어냈다.

그도 모자라 이제 오로지 여왕만이 오를 수 있는 황실 마차를 타고 앞에는 시종 무관을 뒤에는 슈발리에들을 줄줄이 달고 왕궁의 본성까지 달려갈 거였다.

강직한 티베리우스는 대공으로부터 절대 소란을 피우지 말라는 엄명을 받았을 테지만 잊었다는 듯 굴며 오로지 여왕을 모시는 슈발리에들만이 불 수 있는 뿔나팔을 불어댈 테고.

‘티베리우스 말이 맞았어. 스칼렛은 진짜 여왕이로군. 격이 달라.’

루키우스는 고개를 젖혀 무심해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풋, 작게 웃고는 휘파람을 불어 근처에 있는 화단의 풀을 뜯어 먹고 있던 자신의 말을 불렀다.

말에 올라타 고삐를 잡으며 슬쩍 옆을 보니 스칼렛이 시종 무관의 인사를 받으며 마차로 향하고 있었다.

시선이 느껴졌는지 스칼렛이 고개 돌려 그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스칼렛은 아프게 웃어 보였다. 꼭 작별인사를 하는 것 같은 표정이라 루키우스는 심장이 저릿해지는 기분이었다.

더는 바라보기가 힘들어 루키우스는 말고삐를 세차게 내리쳤다.

순식간에 광장에서 멀어져 그대로 대로를 따라 빠르게 달려 측문을 통과했다. 여왕의 뿔나팔을 불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문지기들은 가로막지 않았다.

이윽고 언제봐도 거대한 왕성이 눈앞에 펼쳐졌다.

천 년 전 이곳에 서 있던 뱀파이어 왕의 성 위에 아마칼리 여왕을 비롯해 뒤를 이은 여왕들이 쉬지 않고 증축을 해대다 보니 왕성 내부는 넓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수십 층 높이의 회랑이 복잡한 미로처럼 연결되어 제각각 다른 공간으로 이어졌고 그러다 보니 본궁까지 이어지는 길은 하늘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으레 머리 위를 채우고 있는 회랑에는 신경 써본 적이 없는데 오늘은 달랐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여왕은 어딨는 거지?’

‘또 저 녀석이 여왕을 모시고 왔군.’

무언의 목소리가 아프게 피부를 찔렀다.

반사적으로 흘끔 위를 올려다본 루키우스는 귀족들과 관리들 그리고 변호사나 무역업으로 성공한 젠트리들이 회랑의 난간에 붙듯이 선 것을 보았다.

아마도 광장의 대소동과 관련된 뉴스를 듣고는 여왕이 오기를 기다리는 중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는 건 체터필드 대공 또한 마찬가지일 거란 의미였다.

‘지금쯤 대공이 미쳐 날뛰고 있겠군. 이거 들어가자마자 뭔가 집어 던지겠는걸. 잘 피해야겠어.’

그러면서도 긴장이 되기는커녕 왠지 모르게 이 상황이 흐뭇해져 그저 웃음만 자꾸 나왔다.

그렇다고 소리 내 웃기도 뭐해 이를 악물어 삼키며 쭉쭉 앞으로 달려 본성 바로 앞에서 방향을 틀었다.

해가 왕성 위로 얼굴을 내밀었으니 지금쯤 체터필드 대공은 재상의 업무를 보기 위해 관리들의 집무실이 모여 있는 동궁에 있을 시간이었다.

다시 한참을 달리자 오랜 세월 동궁 앞을 지켜온 정의의 여신 테미스의 오닉스 동상이 보였다.

테미스는 손에는 천칭을 들고 다른 손에는 칼을 들고 동궁 1층에 있는 재판소에 드는 모든 이들에게 정의의 가호를 내리는 신이었다.

물론 그 정의가 오로지 귀족만을 위한 것임을 뱀파이어를 비롯한 왕궁의 백성들이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하지만 오늘 다시 본 테미스는 어딘지 모르게 스칼렛을 떠올리게 했다. 마치 오랜 세월 정의를 버리고 도망쳤던 그녀가 이제 돌아온 것만 같았다.

“아! 다녀오셨군요.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네요.”

대공이 데리고 다니는 시종 중 가장 막내 격인 발렛 톰이 동궁 앞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체터필드 가의 남자와 아툼가의 순혈 뱀파이어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로 올해 열세 살인데 뱀파이어의 피가 우세한지 체격이 상당히 좋아 일찍부터 시종이 된 아이였다.

루키우스는 말에서 뛰어내리며 물었다.

“대공께선 안에 계시지?”

톰은 말의 고삐를 잡아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다리고 계세요. 그런데….”

언제나처럼 기운차게 대답하던 톰은 말끝을 흐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노발대발하고 있다는 말을 차마 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루키우스는 손을 뻗어 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 동궁으로 들어섰다.

동궁은 수십 층의 높이였지만 대공은 승강기라 불리는 나무 상자를 탐탁지 않아 해 본래라면 최상층에 있었어야 할 재상의 집무실은 1층에 있었다.

덕분에 오가기가 쉬웠고 동시에 불려가 재상에게 험악한 고함을 듣기도 쉬웠다.

루키우스는 그런 재상의 집무실 문 앞에 서서야 살짝 긴장했고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섰다.

본래 집무실 앞에는 비서실이 있었고 재상이 그곳에 있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역시나 오늘도 펜을 손에 꼭 쥔 비서 세 사람이 보였다.

하지만 서류를 끄적이는 대신 그들은 집무실 문 앞을 서성이며 쩔쩔매는 중이었다.

“시종 무관님! 드디어 오셨군요!”

제1 비서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반색을 했다.

“네. 다녀왔습니다.”

루키우스가 의무적으로 웃어 보이자 무섭도록 깡마른 제3 비서가 다가와 완벽한 방음을 자랑하는 집무실에 들릴 리도 없는데 작디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들어가 보세요. 조금 전 웬 하인이 코피가 터져 기어 나왔거든요.”

아마도 대공이 여왕의 저택에 심어둔 하인이 광장 소식을 전하러 왔던 모양이었다. 정보비와 함께 대공의 지팡이로 얻어맞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채.

‘분이 좀 풀렸겠군.’

루키우스는 살짝 안도하며 집무실 문 앞에 서선 그곳에 달린 특수한 장식을 잡아당겼다.

온갖 비밀이 오가는 방이다 보니 방음 설비가 지나치게 좋아 노크를 해도 방 안에 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에 설치한 장비로 곧바로 들어와도 좋다는 신호가 둔탁하게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호가니로 만들어진 거대한 책상을 등지고 선 채 창밖을 바라보는 대공의 뒷모습이 보였다.

창 너머는 언제나 그렇듯 눈부신 색으로 덮여 있었다. 초록의 잔디로 덮인 정원과 사각의 정원의 귀퉁이를 따라 놓인 붉은 지붕을 인 회랑 그리고 언뜻 보이는 파란색 하늘.

일명 재상의 정원이라 불리는 사유의 공간이었지만 대공이 그곳을 거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바라보는 일도 극히 드물었다. 아니, 오늘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 계집아이가 이제야 도착했더군.”

체터필드 대공은 짚고 선 지팡이를 살짝 들었다 내리치며 말했다.

“네. 대공 전하. 오는 길에 여왕파로 추정되는 기사들이 습격을 해오는 바람에 카운테스 레오폴드의 성에서 이어지는 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카운테스 레오폴드라. 여전히 내 골칫덩이로군. 그래서?”

“리처드 레오폴드가 청혼하는 게 목적이었던 모양이지만 레이디 스칼렛은 거절했습니다.”

“거꾸로는 아니고? 듣자 하니 두꺼비를 닮은 계집이라던데. 그래서 광장에 와서 그 대소동을 피운 건가? 꾸역꾸역, 자신의 생김새에 걸맞은 서커스를 해 보이느라?”

“적합한 표현이십니다. 서커스 구경이라도 온 것처럼 사람들이 잔뜩 몰려들었거든요.”

루키우스는 대공의 심사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맞장구를 쳤지만, 대공의 표정은 도리어 구겨졌다.

그가 원한 건 온 줄도 모를 정도로 존재감 없는 여왕이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혹시 그 계집이 뭐라 말을 전하라던가?”

대공이 음습한 목소리로 물었다.

루키우스는 살며시 숨을 삼키고는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왕국의 주인이 도착했다고 전하라더군요.”

대공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재밌군. 재밌어. 정말 재밌군. 처음부터 퇴위는 없다고 선언이라도 하는 건가?”

그러더니 돌아서서 비로소 루키우스를 바라봤다.

여전히 불가사의한 외모였다.

환갑이 가까워져 오는 나이지만 30대 중반으로 보이는지라 사교계의 레이디들은 그가 순혈 뱀파이어의 피를 매일 한 잔씩 마시기 때문이라고 수군댔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순혈 뱀파이어들은 수명이 인간보다 길다 보니 인간이나 죽음의 키스를 받아 태어난 뱀파이어들과는 달리 그저 아주 천천히 늙어갈 뿐이었다.

물론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40대 초반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고 그러다 죽을 무렵이 되어서야 확 늙긴 했다.

그렇지만 그건 순혈 뱀파이어라는 종족의 특성일 뿐이니 피를 통해 전이된다는 건 불가능했다.

루키우스는 오는 길에 언뜻 이리나가 스칼렛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던 걸 떠올리며 대공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동안 무고하셨습니까?”

“고작 며칠인 걸 뭘 그렇게 묻나. 물론 자네만큼 데리고 다닐 맛이 나는 풋맨이 달리 없어 어젯밤 파티는 좀 그랬지.”

“호레이스가 뭔가 실수라도 했습니까?”

“전혀. 자네가 추천한 세컨드 풋맨답게 잘생기고 매너 좋고 레이디들에게 호감도 잔뜩 사더군. 하지만 난 자네처럼 금욕적인 게 좋아. 계집들이 안달 난 걸 구경하는 재미란 게 있거든.”

“호레이스에게 몸가짐을 주의하라고 이르겠습니다.”

“됐어. 자네가 돌아왔으니. 기억하겠지만 내일부터 일주일 동안 우리 가문의 사냥대회가 시작이잖은가. 자네가 안 오면 이번은 참석을 못 한다고 할까 고민 중이었다네.”

대공은 그렇게 말하며 웃다가 갑자기 스칼렛이 떠오른 듯 이마를 찌푸리며 혼잣말을 했다.

“흠- 그 두꺼비 계집이 나 없다고 또 애먼 짓을 할 수도 있겠군.”

그러더니 루키우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왕의 시종 무관에게 전갈을 넣도록 해. 일주일 동안 쇼핑을 시키고, 극장, 카지노, 경마장. 돈은 상관없으니 다른 여왕들에게 했던 것 이상으로 실컷 놀게 해주라고 전하도록.”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또 하실 말씀은?”

“실컷 놀리고 난 다음에는 평소대로 스케줄을 잡으라고 해. 놀고 싶어 미칠 지경을 만들어야 얌전히 내 말을 듣겠지. 아! 대회에서 돌아오는 대로 만날 수 있게 약속을 잡아두고.”

“바로 전갈을 넣겠습니다.”

루키우스는 사무적으로 대답하고는 살짝 절하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그러자 각자의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세 명의 비서들이 동시에 벌떡 일어섰다.

대공의 심기가 불편할 땐 실수로라도 늦게 일어났다가는 그대로 지팡이가 날아들다 보니 몸에 밴 버릇이었다.

루키우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제1 비서에게 대공의 말을 고스란히 전하고는 덧붙였다.

“다음 주 목요일 오전 중으로 재상께서 여왕을 만나고자 하시니 약속 시각을 받아오시고요. 아시겠지만 오늘 저녁에 사냥대회를 위해 출발해야 하니 그 전에 여왕 접견 시간을 잡아둬야 할 것 같습니다.”

제1 비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로 뛰어나갔다. 평소라면 밖에 있을 발렛을 불러 시켰을 일이었는데 대공에게 욕먹는 것이 무척 두려운 모양이었다.

루키우스는 무심히 비서실을 나서려다가 제2 비서와 제3 비서가 애절한 얼굴로 바라보는 것을 보고는 멈칫했다.

대공이 대단히 심기가 불편할 땐 오로지 루키우스만이 사고 없이 접근할 수 있다 보니 그런 모양이었다.

“뭐, 딱히 짐을 싸러 본가에 갈 필요는 없으니 시종 무관실에 가서 쉬다가 오겠습니다. 약속이 잡히면 알려주십시오. 대공께는 제가 전하도록 하죠.”

그제야 두 비서의 얼굴이 좀 나아졌고, 루키우스는 재빨리 비서실을 나섰다.

그 길로 향한 곳은 같은 동궁 2층이었다.

루키우스는 대공의 풋맨임과 동시에 공식적으로는 재상의 시종 무관이었다. 따라서 사무실이 할당되었는데 2층의 꽤 넓은 공간이었다.

혼자서 쓸 수도 있었지만, 거실과 그에 딸린 침실 두 개는 체터필드가에서 오가는 시종들에게 양보했다.

대신 시종 무관 집무실과 숨겨진 비밀방은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비밀방은 집무실 붙박이 책장 뒤에 있었는데 샤워실이 딸린 데다 벽의 두 면이 창으로 되어있어 밝고 환했다.

며칠 만인데 꽤 오랜만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루키우스는 책장에 다가가 다소 복잡한 방법으로 책들을 빼냈고 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방으로 들어서자 저절로 어깨가 축 늘어졌다.

후-

그대로 침대에 쓰러지듯 눕고 나니 여행의 피로감이 확 몰려왔다. 저절로 문이 닫히자 방 안 가득 침묵이 차올랐다.

비로소 그의 입술에 고여 있던 단어가 흘러나왔다.

“마이 퀸. 마이 스칼렛.”

그랬을 뿐인데 송곳니가 길어지며 하반신에 힘이 들어갔다. 이대로 문을 박차고 여왕의 저택으로 뛰어가고 싶은 충동이 엄습했다.

루키우스는 일어나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러댔다.

‘씻고 피라도 한 잔 마시면 좀 나아지겠지.’

하지만 생각만으로도 이미 역겨워졌다. 스칼렛이 아닌 다른 이의 피를 삼켜야 한다는 사실이. 그걸 자각한 루키우스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다시 드러누웠다.

“젠장….”

절망감이 그를 삼켰다.

***

스칼렛은 마차에 올라 조그마한 창 너머로 루키우스가 말을 타고 측문 너머로 모습을 감출 때까지 지켜봤다.

‘왕궁의 주인 운운한 말이 엄청난 충격이었던 게 분명해.’

가급적 그가 전하기 쉽도록 고르고 고른 말인데 별 차이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수레에 탄 사람들을 본 순간 이성이 뚝, 끊어져 개새끼 운운했으니 고상한 척하긴 다 글렀다.

어쩐지 씁쓸해져 한숨을 폭 내쉬고 있는데 마차 문이 열리더니 이리나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이밀며 물었다.

“유어 그레이스. 저도 타도될까요? 로드 슈발리에 님께서 시녀이니 같이 타는 게 바르다고 하셔서.”

“아! 물론이죠. 어서 타요. 이리나. 경황이 없어서 당신을 잊고 있었네.”

스칼렛은 황급히 손짓했다.

이리나가 올라타 마차 문을 닫자 대열 정비가 끝이 났는지 티베리우스가 뿔나팔을 우렁차게 불어댔다.

시종 무관이 화답하듯 맨 앞에서 말 고삐를 세게 내리치자 마부가 연이어 말고삐를 내리쳤고 이내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바로 뒤에서 슈발리에들이 2열 종대로 따라오며 내는 말발굽 소리가 뿔나팔의 경건한 소리와 어우러져 경쾌하게 들려왔다.

스칼렛은 좀 황당했다. 코앞이 왕궁인데 어딘가 행진이라도 할 것처럼 너무 본격적이었다. 광장의 백성들에게 잠깐이라도 멋져 보이려고 그러나 싶어 피식 웃다가 측문을 넘어선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뭐가 이렇게 커!”

멀리서 봤을 때도 거대하단 생각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다녀본 모든 성이 성문을 넘어서면 바로 보였기에 커다란 성 하나가 우뚝 서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역시나 여왕의 본성쯤 되면 차원이 다른 모양이었다.

별궁으로 보이는 수십 층 높이의 성들이 길을 따라 여기저기 흩어져 서 있었는데 성과 성을 연결하는 회랑이 복잡하게 위아래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것도 딱히 아래를 받치는 구조물 없이도 허공에 떡하니 잘도 걸려 있다는 점이 충격이었다. 게다가 만날 닦기라도 하는지 어제 만든 것처럼 반짝이는 점 또한 놀라웠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누군가가 잔뜩 재주를 부려 짜 넣은 레이스 같겠어. 진짜 굉장하다.’

스칼렛은 정신없이 올려다보며 구경을 하다가 문득 회랑에 있는 난간 너머로 수많은 사람이 다닥다닥 붙어 서선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다들 옷차림이 무진장 좋은 걸 보니 귀족이나 젠트리인 모양이었다. 검은색과 흰색으로 이루어진 제복을 입은 사람들은 아마도 관리들인 것 같았다.

여왕을 섬기는 나라다 보니 남녀의 성비가 엇비슷한 듯 여자 관리들도 상당히 많아 보였다.

“다들 광장에서의 소식을 들었나 봐요. 일하다 말고 다들 유어 그레이스를 보려고 나와 있는 것 같네요.”

이리스가 창밖을 올려다보더니 중얼거렸다.

스칼렛은 멋쩍게 웃으며 창가에서 물러섰다. 솔직히 속이 좋지 않았다. 이렇게 거대한 성의 주인이 될 줄도 몰랐고, 성에서 일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 상상도 못 했다.

그동안 일하던 암시장이 세상에서 가장 큰 줄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니었다. 이곳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규모였다.

그러고 아찔해하는 사이 쭉 직진하던 마차가 크게 원을 그리며 방향을 트나 싶더니 드디어 멈춰 섰다.

뿔나팔 소리가 멈추자 문이 열렸고, 스칼렛은 시종 무관의 손을 잡고 마차에 달린 접이식 계단을 내려갔다.

고개를 들고 앞을 보니 고딕 양식의 우아한 장식으로 벽면을 채운 4층 높이의 저택이 보였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여왕이 일상생활을 하는 저택인 모양이었다.

스칼렛은 온 가족을 불러다 함께 살아도 방이 남을 것 같은 넓이에 황당해하며 땅에 발을 디뎠다.

그런데 폭신했다. 반사적으로 아래를 보니 레드 카펫이 놓여 있었다.

저도 모르게 카펫을 따라 시선을 밀어 올리니 눈앞의 계단을 지나 저택의 현관까지 이어졌다.

카펫 양옆으로는 성에서 일하는 시종과 메이드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는데 모두 순혈 뱀파이어들인지 외모가 출중했고 키도 컸다.

‘대체 몇 명이야? 오십 명은 넘겠는걸?’

볼을 부풀리며 바라보다가 시종 무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마이 퀸.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라도 있으신가요?”

스칼렛은 황급히 손을 젓고는 얼른 걸음을 옮겼다.

슬쩍 뒤를 보니 티베리우스를 비롯한 슈발리에들을 말에서 내려선 채 따라올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들어올 수 없는 건지 주먹 쥔 손을 가슴에 댄 채 허리를 숙이고 절을 하고 있었다.

티베리우스라도 같이 가줄 줄 알았던지라 어쩐지 아쉬웠다. 그래도 이리나가 바짝 뒤를 쫓아오고 있어 그나마 안심이었다.

가급적 앞만 보려고 애를 쓰며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시종들은 정중하게 절을 하고 메이드들은 치마를 살짝 들며 무릎을 구부려 인사했다.

“환영합니다. 마이 퀸.”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그저 웃어 보이며 인사를 받아주고는 본성의 현관문 앞에 도착하자 진이 다 빠졌다.

그곳에 서 있던 문지기들이 겹쳐 들고 있던 창을 치우며 길을 텄고 그 너머로 황당하게도 레드 카펫이 다시 연결됐다. 그리고 역시나 양옆에는 시종과 메이드들이 서 있었다.

‘맙소사. 설마 순혈 뱀파이어의 절반이 이 저택에서 일하는 건 아니겠지?’

기겁하며 문을 넘어서자 거대한 홀이 나타났다.

카펫 위를 걸으며 슬쩍 보니 헐버트 공작가에서 손님을 맞을 때 그러하듯 좌우에 있는 응접실의 문이 활짝 열려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저 스치듯 보는 것만으로도 규모가 비교도 되질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왼쪽에 있는 응접실은 마치 온실처럼 벽부터 천장까지 모두 창인지 햇살로 가득 차 있어 따뜻해 보였다.

오른쪽에 있는 응접실은 흰색과 황금색을 주조로 하는 벽난로와 가구들이 놓여 있어 놀랍도록 화려했다.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져선 홀 한가운데 있는 중앙 계단 앞에 이르자 바짝 틀어 올린 머리와 검은색 드레스를 갖춰 입은 여인이 다가와 한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환영합니다. 여왕 폐하. 저는 하우스 키퍼인 안나라고 합니다.”

보통 저택은 버틀러가 관리하는데 여왕이 주인인 점 때문에 하우스 키퍼가 이 수많은 뱀파이어 시종과 메이드들을 관리하는 모양이었다.

“반가워요. 안나 부인. 앞으로 잘 부탁드리죠.”

스칼렛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안나 부인은 싸늘한 미소를 짓더니 이내 시선을 스칼렛의 어깨너머로 향했다.

뒤를 눈짓한 스칼렛은 이리나가 두 손을 모은 채 쩔쩔매는 얼굴로 선 것을 보았다.

“이쪽은 이리나 세이턴 양이에요. 내가 데리고 온 레이디스 메이드예요.”

스칼렛이 소개하자마자 안나 부인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하지만 차마 여왕에게 대놓고 뭐라 할 순 없는지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

“곤란하네요. 이미 레이디스 메이드를 맡을 아주 유능한 시녀가 준비되어 있습니다만.”

스칼렛은 훗, 코웃음을 쳤다. 아무래도 안나 부인이란 여잔 체터필드 대공이 여왕을 괴롭히기 위해 심어둔 수하쯤 되는 것 같았다.

“안나 부인. 지금 난 당신에게 소개한 것이 아니라 세이턴 양의 지위에 대해 말해준 거예요. 지금 내가 정한 레이디스 메이드의 능력에 대해 왈가왈부하겠단 의미인가요?”

스칼렛의 고압적인 어투에 안나 부인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황급히 말했다.

“아닙니다. 유어 그레이스. 어찌 제가 감히 그러겠습니까.”

“좋아요. 한 번만 더 나에게 그런 식으로 말했다간 하우스 키퍼의 직위에서 물러날 것을 각오하세요.”

“주의하겠습니다. 유어 그레이스.”

“자, 내 방이 어디죠? 이 드레스를 벗고 좀 쉬고 싶군요. 배가 고프니 방으로 아침 식사를 준비해서 가지고 오도록 해요. 물론 여기 있는 세이턴 양의 몫까지. 목욕 준비를 좀 해두고.”

스칼렛이 명령을 아주 많이 내려본 사람처럼 힘을 주어 말하자 안나 부인은 다소곳한 표정을 지으며 중앙 계단을 손짓했다.

“안내하겠습니다.”

몸을 미친 듯이 조여대던 드레스를 벗고 먹는 식사는 꿀맛이었다.

스칼렛은 크림을 넣고 만든 오믈렛을 세 번이나 시켜서 먹었고 왕국 최고의 티 마스터라는 아저씨가 타준 밀크티도 다섯 잔이나 마셨다.

이리나 또한 레오폴드 성의 요리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이라며 아주 맛있게 밀크티를 연거푸 마셔댔다.

마치 또래 친구가 생긴 기분이라 스칼렛은 이리나에게 슬쩍 물었다.

“이리나. 대체 몇 살이에요?”

순혈 뱀파이어들은 제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 무척 궁금했다.

이리나는 스콘에 클로티드 크림을 척척 발라 스칼렛 앞에 놔주면서 대답했다.

“올해 30살이 되었답니다. 유어 그레이스.”

“뭐라고요!”

스칼렛은 마시던 밀크티를 그대로 뿜을 뻔했고, 저도 모르게 물었다.

“그럼 체터필드 대공은 현재 몇 살이란 소리예요?”

그녀가 아홉 살 때 대공에게 험한 일을 당했던 사건이 떠올라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스칼렛은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는 황급히 손을 저어댔다.

“미안, 미안해요.”

이리나는 작게 소리 내어 웃더니 말했다.

“진짜 상냥하세요. 유어 그레이스. 대공은 곧 환갑일 거예요. 제가 그 일을 당했을 때 그분의 나이는 39살이었거든요.”

“그 자식 개새끼 맞네. 그 나이면 이미 결혼도 해서 다 큰 애도 있을 나이잖아.”

스칼렛은 스콘을 들어 입에 쑤셔 넣으며 성을 냈다. 그런데 스콘이 너무 맛있어서 분노가 휙 사라졌다.

“세상에. 이 버터 맛!”

행복해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시종 무관이 들어섰다.

“유어 하이니스. 재상께서 다음 주 목요일 날 오전 중으로 면담을 청하십니다.”

“재상? 체터필드 대공을 말하는 건가요?”

스칼렛이 얼굴을 찡그리며 묻자 시종 무관은 안됐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합니다. 몇 시로 할까요?”

스칼렛은 고민하며 찻잔을 들어 마지막 한 모금을 삼켰다.

‘다음 주 목요일이라. 리처드 공자에게서 들은 정보대로라면 오늘 당장 불러다 놓고 기를 팍팍 죽이려 들었을 텐데 무려 8일 뒤? 아무래도 짧은 휴가라도 다녀오는 모양이군.’

속으로 중얼거리다 보니 머릿속에서 박수가 터졌다.

‘이건 다시 없을 기회야!’

리처드 공자는 광장에서 스칼렛이 뭘 하든 반드시 법문화시켜야 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그렇게 말하는 공자의 표정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수도에 갈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스칼렛은 모르는 척 넘어갔다.

암시장에서 일하면서 얻은 진리 중 하나는 뭐든 공짜는 없다는 거였다. 더구나 미리 조건을 제시하지 않으면 혹독하게 대가를 치르게 될 수 있음을 몸으로 배워왔다.

그래서 고민 중이었는데 수도에 체터필드 대공이 없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귀족은 아니지만, 충분히 의지할 수 있는 남자가 곁에 있었다.

“혹시 로드 슈발리에, 티베리우스를 불러올 수 있어요?”

스칼렛이 묻자 시종 무관은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지금 바로 부를까요?”

“티베리우스가 혹시 복도에 서 있어요?”

“아뇨. 아닙니다. 쉐도우 슈발리에를 제외한 모든 슈발리에는 이 저택의 2층에 머물게 되어있습니다. 여왕의 안전을 위해서요.”

“쉐도우 슈발리에는요? 설마 천장에서 지낸다거나 하는 건 아니죠?”

“쉐도우 슈발리에는 낮이든 밤이든 여왕으로부터 50미터 이상 떨어지면 안 됩니다.”

“설마 잠도 같이?”

“아닙니다. 여왕의 침실로 통하는 응접실에 침대를 두고 그곳에서 자죠. 밤에는 그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여왕에게 접근할 수 없습니다.”

“일거수일투족을 같이 한다는 말이군요. 그래서 제 쉐도우 슈발리에는 누군가요?”

“그건 유어 하이니스께서 결정하실 사안입니다.”

시종 무관의 대답에 스칼렛은 저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루키우스를 떠올리고는 황급히 고개를 마구 저어댔다.

‘나 왜 이러니? 잊어야 해. 그 남잔 잊어야 할 적이야.’

“유어 하이니스?”

시종 무관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스칼렛은 동작을 멈추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방긋 웃으며 말했다.

“가서 티베리우스를 불러오세요. 아, 그리고 안나 부인에게 일러 나와 내 레이디스 메이드가 입을 검은 드레스를 준비하라 이르세요. 돌아가신 여왕을 추모하기 위함이니 얌전한 거로요.”

“검은 드레스를요? 유어 하이니스. 일단 수도에 오셨으니 이곳저곳 둘러보시고 그런 뒤 추모의 시간을 가지셔도 무방할 것 같은데요.”

“둘러본다? 어딜 둘러봐요?”

“수도 레노바티오는 타국에서도 꼭 방문하고 싶어 하는 즐길 거리, 먹거리, 쇼핑거리가 넘치고 넘칩니다. 왕국의 주인이 되셨으니 즐기셔야죠.”

“흐음. 그렇군요. 생각해보죠.”

스칼렛이 시큰둥하게 읊조리자 시종 무관은 뭔가 말할 듯 입을 우물거리더니 이내 포기한 듯 애써 웃으며 물었다.

“재상과의 약속은 어쩌시겠습니까? 다음 주 목요일 오전 중이라 했으니 10시가 가장 좋은 시간으로 보이는데요.”

“아뇨. 정오로 잡도록 해요.”

“유어 하이니스. 그 시간은 재상의 점심시간입니다. 그는 식사 중 방해받는 것을 지극히 싫어한답니다. 그러니 그 말을 전했다간 저는….”

시종 무관은 말끝을 흐리며 창백해졌다.

‘불쌍해라. 대공 성질이 얼마나 지랄 맞으면 저럴까? 하지만 크레타 할머니가 남자는 좀 기다리게 해야 심리적으로 누를 수 있다고 했는데….’

고민하던 스칼렛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라 말했다.

“그럼 10시로 잡도록 하죠. 물론 난 12시 넘어서 갈 거지만….”

시종 무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시뻘게지기를 반복하나 싶더니 이내 스칼렛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약속에 늦는 건 온전히 스칼렛이 감당할 문제지 자신이 책임질 일이 아니란 걸.

“그러겠습니다. 유어 하이니스.”

시종 무관은 살았다는 얼굴로 황급히 사라졌다.

“아랫사람들에게 참 상냥하시네요. 유어 그레이스.”

이리나가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며칠이나 왕좌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 때문에 괜한 피해 보는 사람은 없었으면 하거든요.”

스칼렛은 가볍게 대답하며 스콘을 들어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입안 가득 포슬포슬한 버터 맛이 확 번지는 걸 만끽하고 있노라니 이리나가 일어서며 말했다.

“전 가서 목욕 준비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다녀와요.”

스칼렛은 우물거리며 손을 들어 화답했다.

이리나가 가버리고 난 뒤 몇 분 지나지 않아 티베리우스가 들어섰다.

“마이 퀸. 부르셨다 해서 왔습니다.”

“잘 왔어요. 이리 와서 앉아요.”

스칼렛은 클로티드 크림이 묻은 손가락을 쪽쪽 빨며 권했다.

티베리우스는 권한대로 스칼렛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고 다소 긴장한 얼굴로 바라봤다. 본능적으로 스칼렛이 또 폭탄을 던질 거란 걸 느끼는 모양이었다.

“로드 슈발리에. 왕실 수사대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대장이 누군지 여왕 암살 수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뭐 아는 거 있어요?”

스칼렛이 생긋 웃으며 던진 질문에 티베리우스는 아주 진중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사대장은 체터필드 가문의 남자로 재상의 조카라고 하더군요. 석 달 전 폭탄 테러 사건 직전에 임명됐고요. 그래서인지 수사는 지지부진합니다.”

“흠. 대장이야 그럴 거라 예상했어요. 하지만 수사대원은요? 그들이 모두 다 대공의 사람은 아닐 것 같은데요.”

“물론입니다. 마이 퀸. 제가 알기로는 친여왕파를 자처하는 젊은 귀족들이 상당수 일하고 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앨버트 레오폴드가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고 들은 적이 있군요.”

“앨버트 레오폴드? 리처드 공자와 혈연관계인가요?”

“한 달 차이 나는 이복동생입니다. 돌아가신 레오폴드 공작이 인간 하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본래 여왕의 사냥개라 불리던 레오폴드가의 재주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 같다고들 합니다.”

“여왕의 사냥개라. 그거 좋네요.”

스칼렛은 써먹을 카드를 발견한 듯싶어 되새김질해보곤 티베리우스에게 물었다.

“슈발리에 제복 중 상복으로 입을 만한 것이 있나요?”

“물론입니다. 슈발리에로 임명받자마자 바로 여왕의 행사에 맞춰 입을 제복부터 맞췄거든요.”

“잘됐네요. 그렇다면 한 시간 뒤에 상복을 입고 저택 앞에서 만나요.”

“어딜 가시려고 그러십니까? 이제 막 도착했으니 쉬셔야 할 것 같은데요.”

“저도 그러고 싶네요. 하지만 하늘이 제게 일주일이란 시간을 주셨으니 잘 이용해 먹어야죠.”

“왕실 수사대장을 만나시려고요?”

“네. 하지만 그 전에 여왕권에 대해 확인해줄 수 있는 법률가를 만나보고 싶은데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그렇다면 왕실 담당 변호사에게 안내해드리죠. 그가 여왕의 재산권을 관리하니 그런 것 또한 잘 알 겁니다.”

티베리우스가 정중하게 절을 하고 물러나자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 이리나가 들어섰다.

“목욕 준비가 끝났습니다. 유어 그레이스.”

스칼렛은 팔을 쭉 뻗어 스트레칭을 하며 혼잣말처럼 외쳤다.

“자, 전투 준비를 할 시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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