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뱀파이어 왕의 꽃, 아에리우스
길고 좁은 식탁이 놓인 홀은 스칼렛이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귀족의 식당보다도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금색이 감도는 베이지색 천에 손으로 수놓은 꽃들이 가득한 천들이 아낌없이 창을 장식하고 있었고 식탁보는 장인이 수십 년에 걸쳐 만든다던 식탁 전용 레이스였다.
바닥에는 푹신하고 질 좋은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식탁 위에 놓인 식기와 은제 도구들 또한 장인의 손길이 느껴졌다.
죄다 암시장에서 수년 전 본 적이 있는 물건들로 만약 이것들이 정식 수입 제품이라면 스칼렛이 아는 가격의 몇 배라는 의미였다. 언뜻 계산해봐도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인테리어를 보면 안주인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법인데 아무래도 카운테스 레오폴드는 옛날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허영심 가득한 여자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는 건 리처드 공자와 결혼 심각한 고부 갈등을 각오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어휴. 내가 혼기가 차긴 했어도 시댁 일은 머나먼 미래에나 고민하게 될 줄 알았는데.’
속으로 중얼거리며 식탁으로 다가가니 카운테스를 비롯해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티베리우스를 비롯한 슈발리에 전원이 일어섰다.
스칼렛은 머쓱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웃으며 카운테스의 손짓대로 그의 오른편으로 다가갔다.
“이렇게 꾸미니 아마칼리 혈통이 가진 아름다움이 비로소 드러나는군요.”
카운테스의 찬사에 스칼렛은 이를 악물며 웃음을 참았다.
분장을 한 번 더 덧바르고 왔으니 얼굴이 더더욱 굉장해졌을 텐데 이렇게 넉살 좋은 칭찬이라니 해도 너무했다.
혹시 본인이 분장 중이라 그런 건가 묻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애써 미소로 화답하고 앉으려는데, 카운테스가 인상을 찡그리며 등 뒤에 선 누군가에게 눈짓했다.
반사적으로 돌아본 스칼렛은 흠칫 놀랐다.
찰랑거리는 흑발과 보라색 눈동자를 지닌 메이드 차림의 미소녀가 한쪽 다리를 절뚝이며 빠르게 다가오더니 의자의 긴 등받이를 잡더니 바라봤다.
“앉으세요. 메이드가 굼떠서 죄송합니다.”
카운테스가 말했다.
스칼렛은 얼떨떨해하며 의자에 앉았고 보기와는 달리 힘이 좋은지 미소녀가 등받이를 확 밀어주어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고마워요.”
살며시 속삭이자 미소녀는 미소가 아닌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고맙다는 말을 생전 처음 들어본 것 같은 반응이었다.
그러자 카운테스가 노기 섞인 목소리로 읊조렸다.
“쓸모없는 똥개 같으니라고….”
스칼렛은 기가 막혀 카운테스 레오폴드를 노려봤지만, 그녀는 서 있는 모두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하며 착석하느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손님의 신분으로 계속 표정을 굳힐 수만도 없어 테이블 위에 놓인 냅킨을 집어 드는데 문득 맞은편 자리는 비어 있고 바로 옆에는 티베리우스가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키우스는 어디 앉았나 냅킨을 무릎에 펼치며 슬쩍 살폈지만 황당하게도 보이질 않았다. 그러다 아이렛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잽싸게 시선을 돌렸다.
“저기 루키우스 어디 갔어요?”
스칼렛은 티베리우스에게 슬쩍 물었다.
“전 여왕님을 따라간 줄만 알았습니다. 카운테스의 하인이 안내한 방으로 오질 않아서요.”
티베리우스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작디작은 목소리로 우물거리듯 대답했다. 스칼렛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입술을 깨물었다.
‘나에게 말도 없이 사라질 남자가 아닌데. 대체 어딜 간 거지?’
그러고 있는데 리처드 공자가 불쑥 나타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는 스칼렛과 눈을 맞추며 미소 지었다.
“레이디 스칼렛. 다시 만나니 반갑네요. 그 드레스, 아주 잘 어울립니다. 예뻐요.”
스칼렛은 마지 못해 미소 지어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식사가 시작됐다. 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모를 현악 4중주단의 연주가 들려오는 가운데 리처드 공자는 끊임없이 스칼렛에게 말을 시켰다.
스칼렛은 예의상 장단을 맞췄고 그럴 때마다 카운테스 레오폴드의 입가에 과할 정도의 함박웃음이 드리워졌다.
그렇게 분위기는 그럭저럭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
그러다 아까의 미소녀가 물병을 들고 다가와 스칼렛의 잔을 채워주려고 했다.
스칼렛은 저도 모르게 바라봤고 그녀의 동작이 상당히 힘겨워 보인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온몸에 무거운 추라도 달린 것처럼 끙끙 앓으며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어디 많이 아픈 것 같은데 의사를 불러 줄까요?”
혹시 지독한 몸살감기라도 걸린 건가 싶어 묻자 소녀는 무척 당황하며 물병에 든 물을 그대로 식탁에 쏟아 버렸다.
순식간에 차디찬 얼음물이 폭탄 터지듯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스칼렛은 잽싸게 냅킨을 들어서 막았고 리처드 공자는 의자를 뒤로 물리며 피했지만, 카운테스는 고스란히 물을 뒤집어썼다.
다행히 티베리우스가 앉은 곳까지 물이 튀진 않아서 홀라당 젖은 건 카운테스뿐이었다.
“아. 괜찮으세요?”
스칼렛은 냅킨을 내리며 카운테스에게 얼른 물었다. 그녀는 손으로 젖은 얼굴을 털어내더니 고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 불찰이네요. 마이 퀸. 흉한 꼴을 보였군요.”
그러더니 손가락을 튕겨 한쪽에 대기하고 있던 남자 시종을 불러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끌고 가서 기절할 때까지 매질해. 그런 뒤 피 한 방울 주지 말고 가둬 두도록.”
스칼렛은 숨을 크게 들이켜며 바로 옆에 얼어붙은 듯 서 있는 소녀를 바라봤다.
비로소 순혈 뱀파이어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티끌 하나 없는 하얀 피부와 은색이 감도는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동작이 너무 느릿해서 뱀파이어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당혹스러웠다. 게다가 인간이 아니니 감기에 걸릴 리도 없는데 이렇게 아파 보이다니 황당했다.
그러다 문득 어젯밤 루키우스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순혈 뱀파이어에게 너무 많은 명령을 내리게 되면 족쇄처럼 그것이 작용해 동작이 굼떠진다던.
그러자마자 분노가 차올랐다.
“카운테스 레오폴드 님. 그 명령, 거두어주시죠.”
스칼렛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막 카운테스의 명령을 받고 뒤로 물러서려던 남자 시종이 멈칫 섰다. 카운테스 레오폴드가 사납게 눈을 치켜뜨며 바라보더니 물었다.
“마이 레이디. 실례지만 무슨 명령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러더니 여전히 얼음 동상처럼 서 있는 뱀파이어 소녀를 눈짓하며 덧붙였다.
“설마 이 몹쓸 똥개에 관해 이야기를 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그 순간 벽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시종과 메이드를 비롯해 식탁 위에 앉은 슈발리에들의 시선이 스칼렛에게 꽂혔다.
이런 상황에서 입을 잘못 놀렸다간 카운테스 레오폴드가 적으로 돌아설 게 분명했다.
루키우스의 말에 따르면 친여왕파의 수장 같은 존재였으니 그렇지 않아도 아군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 이 사람마저 등을 돌리게 만든다는 건 대실수였다.
그렇다 해도 할 말은 해야 했다. 가족의 안전이 무엇보다 소중했지만, 그것을 위해 부당하게 처벌받는 소녀를 못 본 척할 순 없었다.
스칼렛은 식탁 아래 놓인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레오폴드 공작가가 이곳으로 본가를 옮긴 지 몇 년 안 됐다고 들었는데 그사이 아주 촌스러워지셨네요.”
싸늘한 목소리로 운을 떼자 카운테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스칼렛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긴 이곳에 있는 인테리어들도 다들 한물간 것이긴 하네요. 저 커튼은 7년 전에 유행한 스타일이고 이 식탁보는 대략 10년. 이 식기는 그래도 최신이지만 그거 아세요? 가품이 아닌 진품에는 오로지 손으로 만져서만 알 수 있는 표식이 있는 거. 어디 보자. 가품이 확실하네요.”
암시장에서 보고 배워온 지식 그대로 하나하나 짚어가자 죄다 맞았는지 카운테스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리처드 공자가 제발 그만하라는 눈길을 애타게 던졌다.
하지만 스칼렛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촌스러운 건 순혈 뱀파이어에게 족쇄를 잔뜩 걸어놓은 거네요. 그래놓고는 행동이 굼뜨다고 타박하다니 혹시 가학 취미가 있으세요? 아무래도 침실에 가면 채찍이 잔뜩 걸려 있을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날린 말에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카운테스 레오폴드가 벌떡 일어서더니 뺨을 때릴 듯 손을 치켜들었다.
“비렁뱅이로 소문이 자자한 헐버트의 딸년이 감히 날 모독해!”
“어머니. 그만두세요! 그분은 여왕이십니다!”
리처드 공자가 황급히 일어서서 카운테스를 부둥켜안더니 그대로 잡아끌어 식당을 나섰다.
닫히는 문 너머로 카운테스 레오폴드가 악다구니를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처드 공자가 필사적으로 달래는 목소리도. 그러다 황당한 말이 얼핏 들려왔다.
“내가 이런 모욕까지 당할 이유가 뭐니? 분명 저년이 대공의 개에게 물려 미친 게야. 서탑에 가둬 둔 그 개를 그냥 죽일 걸 그랬어. 내가 살려둬야 한다고 고집을 피울 게 아니었어!”
듣자마자 스칼렛은 그것이 루키우스에 관한 이야기임을 눈치챘다. 심장이 철렁한 기분에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티베리우스가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아무래도 루키우스 님이 갇혀 있는 것 같군요.”
스칼렛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탑이면 서쪽일까요?”
그러면서 식탁에서 물러서는데 그때까지도 그 자리에 서 있던 뱀파이어 소녀가 작디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엔네야드 경께서 어디 계신지 제가 알아요.”
***
루키우스는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고 좁디좁은 방을 이리저리 끝도 없이 서성였다. 창살을 잡아당겨 보고 문을 부숴보려고 애를 썼지만, 카운테스의 경고대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참다못해 단도를 꺼내 문고리를 파내려고도 해봤지만, 어찌나 단단하게 만들어졌는지 칼날이 뚝 부러졌다.
“젠장….”
결국, 지쳐 침대로 가 털썩 주저앉았는데 뭔가가 따끔했다.
루키우스는 깜짝 놀라 일어서서 위에 깔린 모포를 걷어냈다. 그러자 풀을 채워 넣어 만든 낡은 매트리스 위에 고가로 보이는 보석 브로치가 놓여 있었다.
그걸 집어 들고 보니 브로치를 고정하는 핀에 드레스 자락을 뜯어낸 것처럼 보이는 천 조각이 끼워져 있었다. 빼내서 펼쳐 드니 피로 쓴 혈서였다.
[리처드 레오폴드는 내 아들이다. 설령 날 죽인다 해도 그 사실은 변치 않는다. -ᾝ-]
루키우스는 낮게 신음했다.
마지막에 적힌 약자는 순혈 뱀파이어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은어로 이 글을 남긴 사람의 이름이 헬렌 또는 헬레나이고 명문 세이턴가의 혈족임을 뜻했다.
그가 알기론 세이턴 가는 카운테스 레오폴드의 본가인 아비드 후작가를 모시는 가문이었다. 아무래도 카운테스 레오폴드가 시집올 때 데리고 온 순혈 뱀파이어 여인이 레오폴드 공작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은 모양이었다.
그런 일이야 워낙 흔해서 놀랄 것도 없었지만 문제는 여인이 자기 아들 이름에 당당하게 레오폴드란 성을 붙였다는 점에 있었다.
귀족들은 뱀파이어의 피가 섞인 자식이 제 가문의 이름을 쓰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들은 뱀파이어 쪽 어머니나 아버지의 이름을 따랐다.
즉, 자식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그랬기에 귀족가에 소속되어 다른 순혈 뱀파이어들 사이에 섞여 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순혈보다 외모도 능력도 한참 뒤떨어지다 보니 거의 평생을 하급 시종의 지위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루키우스 또한 체터필드 대공가에서 숱하게 그런 뱀파이어들과 마주쳤고 연민의 감정으로 돌보아온 아이들도 몇 명 있었다.
그러므로 리처드 레오폴드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덮기 위해 이 여인이 살해까지 당했다면 왕실 수사대가 나서야 할 정도로 엄중한 상황이었다.
“리처드 레오폴드. 리처드 레오폴드.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루키우스는 제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황급히 브로치와 천을 입고 있던 망토에 달린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루키우스!”
놀랍게도 열린 문 너머에 선 건 스칼렛이었다.
그사이 단장을 했는지 수도에 있는 레이디들에게 뒤처지지 않을 만큼 화사한 드레스 차림이었는데 깊숙이 파인 옷깃 사이로 풍만한 가슴이 고스란히 드러나 농염함마저 느껴졌다.
“마이 레이디! 어떻게 알고 오신 겁니까!”
루키우스가 반색하며 빠르게 다가서자 스칼렛이 아침보다 더 진한 검붉은 색으로 물든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미안해요. 난 당신이 갇혀 있는 줄도 모르고 식사를….”
어찌나 다정한 목소리인지 루키우스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허리를 그러 안으며 입을 맞췄다.
보드랍고 통통한 입술이 놀라움으로 열리며 그를 반겼다. 망설임 없이 혀를 밀어 넣고 당황한 듯 굳은 말캉한 살덩이를 강하게 빨았다.
츱-
둘의 혀가 엮이는 소리가 그녀가 선 계단에 울려 퍼졌다.
스칼렛이 다리에 힘이 풀린 건지 두 팔을 들어 그의 팔뚝을 잡았다.
루키우스는 그녀의 허리를 번쩍 들어 키를 높였고 자연스럽게 따스한 온기가 감도는 작은 손이 그의 목에 감겼다.
시간을 잊고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숨결을 빨아들이고 다디단 타액까지 모두 삼키고도 부족해 살짝 혀를 깨물어 피를 빨았다.
이윽고 루키우스는 만족스러워하며 그녀를 바닥에 내려줬다.
스칼렛은 숨이 모자란 듯 헐떡거렸다. 오동통한 입술이 그의 침으로 푹 젖어 반짝거리는 것이 묘하게 예뻤다.
“이제 보니 검붉은 색 분장을 지우는 재미가 있군요. 꼭 깜짝 상자 같네요.”
루키우스는 엄지를 들어 그가 신나게 빨아먹는 바람에 딸기색이 드러난 입술을 닦아주며 미소 지었다.
스칼렛은 작게 몸을 떨더니 그의 엄지를 확 깨물더니 소곤거렸다.
“뒤에 누가 있는지 좀 보시죠.”
그제야 스칼렛의 뒤쪽에 순혈 뱀파이어 소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동안 피를 제대로 못 먹은 듯 지나치게 창백하고 말랐는데 조금 전 광경 때문인지 볼이 꽤 붉었다. 눈이 마주치자 소녀는 제 볼을 두 손으로 감싸며 살짝 넋 나간 목소리로 말했다.
“두 분 너무 잘 어울리세요. 멋져요.”
그러더니 화들짝 놀란 듯 손을 마구 저어대며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아뇨. 아뇨. 엔네야드 경. 소문은 절대 안 낼 거예요. 믿으셔도 돼요.”
소녀의 호들갑에 스칼렛이 풋,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루키우스는 눈살을 구기며 물었다.
“날 아나?”
소녀는 배시시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아홉 살 때 체터필드 대공과 함께 아비드가의 연회장에 오신 걸 뵈었었죠. 아! 전 세이턴가의 이리나라고 해요.”
“세이턴가? 그렇다면 혹시 헬렌 또는 헬레나란 이름의 여인을 아나?”
“아, 그분은 제 전에 마님을 모시던 분이었어요.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제가 후임으로 이곳에 오게 됐죠.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나요?”
이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기에 루키우스는 순간 망설였다. 하지만 역시나 잘 모르는 여자에게 감옥에서 발견한 것을 꺼내 보여줄 순 없었다.
“그냥 전에 파티에서 만난 적이 있어서 문득 떠올라서 말이지.”
그러자 스칼렛이 손을 들어 가로막았다.
“자, 통성명은 여기까지. 티베리우스가 슈발리에들을 데리고 후문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만 가야 해요.”
“카운테스 레오폴드를 구워삶기라도 한 겁니까? 죽어도 안 보내줄 것처럼 보였는데.”
루키우스가 신기해하며 묻자 스칼렛은 쓴웃음을 짓더니 돌아서며 말했다.
“비슷해요. 가죠.”
이리나의 안내로 계단을 내려와 미로와 다름없는 복도를 빠르게 걸어나갔다. 창이라곤 하나도 없는 데다가 천장이 너무 높아 관속에 누운 아늑함이 느껴졌다.
어쩌면 이 성의 모체를 지은 것이 뱀파이어일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이 들 무렵 불쑥 문이 나타났고 그 너머에는 자연 그대로의 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만든 정원이 펼쳐졌다.
강하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 잔디밭은 진한 초록으로 빛났고 한가운데 위치한 나지막한 동산 위에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서 있었다.
동산을 빙 둘러 넓고 단단한 돌길이 놓여 있었는데 마차 바퀴와 말굽으로 인한 상처가 난 걸 보니 수도로 이어지는 전용 도로가 분명했다.
루키우스는 환호했지만 이내 수풀에 가려져 있던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성의 수비대로 보이는 100명이 넘어 보이는 남자들이 열을 맞춰 서 있었는데 뒤쪽의 신호에 맞춰 순식간에 수도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아 섰다.
상당히 훈련이 잘되어 있는 듯 가장 앞 열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더니 석궁을 겨누었고 그 뒷줄은 칼을 빼 들었다. 삼 열부터는 위협하듯 들고 선 창으로 바닥을 내리치며 발을 굴렀다.
‘한때 여왕의 사냥개라 불리던 레오폴드가답군. 수준이 상당히 높아.’
루키우스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 머리를 굴렸다.
그러고 있는데 수비대가 좌우로 갈라지나 싶더니 한 남자가 그 사이로 걸어 나왔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새까만 눈을 지닌 남자로 어디선가 본듯한 인상이었다.
“리처드 공자.”
등 뒤에 서 있던 스칼렛이 낮게 신음하듯 읊조렸다. 이리나가 겁먹은 듯 두 손으로 제 머리를 감싸며 덜덜 떨었다.
“어떡해. 마님이 단단히 화가 나셨나 봐.”
루키우스는 순혈 뱀파이어답지 않은 반응에 무척 놀라워했다.
창백한 것도 마음에 걸렸는데 이건 정도가 심했다. 다수의 명령이 족쇄처럼 발목에 걸려 있어선가 싶었지만 그러기엔 눈빛이 너무 또렷했다.
‘족쇄가 너무 많으면 따라서 정신도 흐려질 텐데….’
그러는 사이 티베리우스가 성벽에 난 외길을 이용해 다른 슈발리에들과 함께 말을 타고 달려왔다.
“루키우스 님!”
티베리우스는 무척 기뻐하며 외치더니 말을 멈춰 세우고는 뛰어내렸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티베리우스는 도로를 가로 막고 선 성의 수비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되면 전면전밖에는 수가 없겠는걸요. 저희가 싸우는 사이 여왕을 모시고 혼자 빠져나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루키우스도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스칼렛이 옆으로 와서 서더니 끼어들었다.
“제가 리처드 공자와 이야기를 좀 나눠볼게요. 굳이 피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으니까요.”
순간 루키우스는 눈을 부릅떴다.
“리처드? 저 앞에 선 남자 이름이 리처드입니까?”
“맞아요. 리처드 레오폴드. 차기 공작 상속자예요. 왜요? 아는 사람이에요?”
스칼렛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키우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그저 말로만 들었을 뿐, 본 건 처음이군요. 3년 전 열일곱의 나이로 왕립대학을 졸업한 수재인 데다 무예 또한 뛰어나 사교계의 총아로 소문이 자자했죠.”
줄줄 읊다 보니 망토 속 혈서가 엄청나게 무겁게 느껴졌다.
설령 인간인 제 아버지의 피를 짙게 물려받았다 해도 뱀파이어는 뱀파이어였다. 그런 자가 심지어 차기 레오폴드 공작이 될 거라니 대체 뱀파이어란 걸 어떻게 숨겨온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답을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제가 가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저들이 노리는 건 당신인데, 보냈다가 그대로 끌고 가버리면 끝장이니까요.”
루키우스의 말에 스칼렛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카운테스 레오폴드가 나왔다면 그랬겠지만, 리처드 공자는 그러진 않을 거예요. 나에게 청혼을 했고 그 답을 듣고 싶을 뿐이겠죠.”
“청혼! 안됩니다.”
루키우스가 기막혀하며 외치자 스칼렛이 웃음을 터트렸다.
“나에게 여왕의 남편은 정치적 이익에 따른 사회적 파트너라고 말해줄 때는 언제고 왜 그렇게 펄쩍 뛰어요?”
“그건 그렇지만….”
루키우스는 말문이 막혀 이를 악물었다. 머릿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스칼렛의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레오폴드가와의 결혼은 좋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필사적으로 거절하게 만들 이유를 찾아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스칼렛이 그의 팔뚝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소곤거렸다.
“걱정 마요. 난 저 남자와 결혼 못 하니까. 저 남자의 가족과 우리 가족은 절대 아름다운 관계가 될 수 없을 것 같거든요.”
그러더니 옆에서 우물쭈물하고 있는 이리나에게 말했다.
“이리나 세이턴 양. 난 당신을 수도로 데리고 갈 거니까 가지 말고 여기 있도록 해요.”
순간 이리나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루키우스 또한 무척 놀랐다.
“마이 레이디. 그건 주인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론 순혈 뱀파이어 족쇄의 근원은 아마칼리 여왕이고, 귀족들에게 그들을 관리할 권한을 허락한 것뿐이라 들었는데 아닌가요?”
“맞습니다만….”
“그렇다면 이젠 내가 여왕이니 그 권한을 돌려달라 할 수 있겠죠. 리처드 공자는 레오폴드가의 차기 공작이니 그걸 승인할 위치에 있고요. 거절할 순 있겠지만 시도는 해봐야죠.”
“아니, 잠깐. 분명 논리적으로는 그렇지만….”
루키우스는 탑에 갇혔다가 알아낸 사실을 털어놓으려다 말끝을 흐렸다. 리처드 공자는 아무도 다치지 않고 이곳을 빠져나가게 해줄 유일한 열쇠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루키우스. 안 잡아먹힐 테니까.”
스칼렛은 루키우스가 너무 걱정스러워 그러는 줄 알았는지 배시시 웃더니 리처드 공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리처드 공자와 스칼렛은 사이좋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언덕을 올라갔다.
꼭대기에 있는 느티나무 아래 도착한 둘은 서로 마주 보고서더니 마치 다정한 연인처럼 웃음을 터트리며 뭐라 뭐라 대화를 주고받았다.
“모신 지 고작 일주일 만에 절 놀라게 만드시네요. 새로운 여왕님이.”
티베리우스는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슈발리에들에게 신호해 대열을 갖추도록 했다. 아마도 분위기를 보아하니 무사히 수도로 갈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든 모양이었다.
반면 루키우스는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기분에 이를 악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리처드 공자가 보란 듯이 스칼렛의 귀밑머리를 뒤로 넘겨줬을 때는 분노가 차올라 송곳니가 길어졌다.
“왕이시여.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유어 그레이스께선 청혼을 거절하셨고, 리처드 공자가 절대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하셨거든요.”
이리나가 가늘디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루키우스가 깜짝 놀라 바라보자 이리나는 허둥대더니 제풀에 꺾인 듯 고백하듯 덧붙였다.
“마님이 하도 무서우셔서 저도 모르게 입술 모양만 봐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있게 됐거든요. 그래서 두 분이 하시는 말씀을 알 수 있어요.”
그러더니 제 두 팔을 번쩍 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보세요. 족쇄도 풀렸어요. 전 이제 여왕님의 것이에요.”
루키우스는 물리적인 족쇄가 아니다 보니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닌 데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당혹스러웠다.
그저 지금까진 족쇄의 권한은 오로지 아마칼리 혈족의 피를 이은 인간만이 가진다고 알고 있었는데 귀족과 순혈 사이에 태어난 자 또한 가능하단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논리적으로는 그랬는데 왠지 모르게 찝찝한 기분이 들어 눈을 돌려 다시 언덕 위를 바라보니 이야기가 끝이 났는지 스칼렛이 홀로 걸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신호를 받은 건지 성의 수비대가 무기를 거두고 열을 맞춰 후문 쪽으로 뛰어갔다.
리처드 공자는 느티나무 아래 선 채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뱀파이어 특유의 시력 때문에 루키우스는 공자의 얼굴에 감도는 감정을 읽을 수가 있었다.
스칼렛을 꽤 마음에 들어 하고 있으며 청혼을 거절당한 걸 아쉬워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 조만간 재도전할 가능성도 농후해 보였다.
생각만으로도 갑자기 속이 쓰려 와 얼굴을 구기는데 리처드 공자가 고개 들어 그를 바라봤다.
순간 시선이 맞았다. 인간이라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맙소사. 순혈의 피가 상당히 진한가 보군. 이거 방심할 대상이 아니겠는데.’
루키우스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리처드 공자가 쏘아보는 눈길을 그대로 받아냈다. 그러자 분이 차올랐는지 공자는 천천히 입을 움직여 뭔가 말을 했다.
“스칼렛에게 다신 손대지 마. 그랬다간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주마.”
옆에 선 이리나가 대신 읽어주고는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궁중에서야 자주 있는 일이죠. 수컷끼리 으르렁대는 건.”
루키우스는 이리나에게 속삭이듯 말하고는 리처드 공자에게 보란 듯이 다리를 뒤로 빼고 팔을 크게 휘두르며 궁중식 인사를 올렸다.
리처드 공자의 표정이 멀리서도 알아볼 만큼 구겨졌다. 루키우스는 훗, 코웃음을 치고는 돌아섰다.
조금 기다리니 스칼렛이 성큼성큼 걸어 언덕을 내려왔다.
“아마칼리 여왕이 본래 대마녀였다더니 사실이었나 보군요. 대체 저 남자에게 무슨 주술을 건 겁니까?”
루키우스는 그녀를 반갑게 맞이하며 말했다.
“주술은 무슨. 리처드 공자가 사교계의 총아였다던 당신의 말을 듣고는 그런 남자가 혹할만한 제안을 한 것뿐이에요. 그게 통한 거고요.”
스칼렛은 겸연쩍은 미소를 짓더니 울퉁불퉁한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게 뭡니까?”
“나중에요. 루키우스. 어서 떠나야 해요. 리처드 공자 말이 카운테스가 하도 히스테리를 부려서 약을 먹여 재워놓긴 했는데 깨어나자마자 수비대에게 전투 명령을 내릴 거라더군요.”
“그렇다면 빨리 떠나야겠군요.”
루키우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휘파람을 불어 슈발리에들 사이에 서 있던 말을 불렀다. 성의 마구간 지기가 잘 돌봐줬는지 기운차게 뛰어온 흑마가 뛰어와 바로 앞에 섰다.
“그 아가씬 제가 태우도록 하죠.”
연이어 티베리우스가 말을 몰고 다가오더니 말했다.
루키우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이리나를 번쩍 들어 티베리우스 앞에 태워줬다. 이리나는 무척 부끄러워하면서도 막상 말에 타자 눈을 빛내며 신나 했다.
“따뜻하고 보드랍네요.”
“잘 보셨군요. 착한 말이니 갈기만 잘 잡고 있으면 됩니다.”
티베리우스는 그렇게 타이르고는 말머리를 돌려 슈발리에들의 무리로 달려갔다.
“이리나는 꼭 우리 앤 같아요.”
루키우스가 말 위에 올려주자 스칼렛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앤?”
뒤따라 올라타며 루키우스가 물었다.
“제 여동생이요. 둘째 동생인데 사려 깊고 착하고 그러면서도 밝아요. 순혈이 아니라 이리나처럼 예쁘진 않지만 사랑스럽죠.”
“고작 며칠인데 몇십 년쯤 못 본 것처럼 말하는군요.”
“동생이 없나 보네요.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전염병으로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친형제는 없지만 대신 사촌 형제들이 잔뜩 있습니다. 막내가 올해 네 살인데 이제 막 난 송곳니 때문에 강아지처럼 물어대며 절 괴롭히는 중이죠.”
“말만 들어도 귀여울 것 같네요.”
그렇게 말하던 스칼렛은 슈발리에들 무리에 접근하자 입을 다물었다. 루키우스는 그들 사이에 말을 멈춰 세우고는 앞을 바라봤다.
그들이 선 돌길을 가로막고 있던 후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리처드 공자의 명령인지 수비대가 창을 제 옆에 두고 선 채 좌우로 나뉘어 서 있었다.
맨 앞에 선 수비대원이 대가 길고 가는 팡파르를 들고 선 것을 보니 아무래도 환송 예식이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이거 좀 황당하군요. 아깐 죽일 듯이 굴더니 이젠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작별인사라니.”
티베리우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읊조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슈발리에들에게 이리저리 손짓을 해 보였다.
스칼렛과 루키우스가 탄 말을 중심으로 맨 앞에 세 마리의 말이 뒤쪽에 나머지 만들이 다섯 마리씩 열을 맞춰 늘어섰다.
맨 앞 중간에 있는 티베리우스의 신호로 행진이 시작됐다.
평소 들어보던 것이 아닌 다소 특이한 음색을 지닌 팡파르가 우렁차게 울렸다.
수비대가 창을 들어 땅을 치며 좌우로 박자 맞춰 움직였다.
동산을 빙 돌아 수비대를 눈앞에 두니 이윽고 후문 너머 도개교가 보였다.
정문과는 달리 도개교를 따라 꽃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는데 뱀파이어들이 아에리우스, 즉 별의 꽃이라 부르는 하얀 꽃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루키우스는 전율했다.
엔네야드 가의 인정받는 학자인 작은 숙부님 말론 뱀파이어 왕을 상징하는 아에리우스 꽃은 비바람에도 꿈쩍하지 않을 정도로 질기지만 특별한 가락을 들으면 떨어져 내린다고 했었다.
그렇게 말로만 들은 걸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무척 신기했다.
“아름답네요. 이곳에 오기 전 내려다봤을 땐 이런 광경은 보이지 않았는데 꼭 마법 같지 않아요?”
스칼렛이 취한 듯 몽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짜 마법은 우리가 저 나무 아래 가는 순간 시작될 겁니다.”
루키우스는 작은 숙부가 들려준 이야기의 뒷부분을 떠올리며 소곤거렸다.
이윽고 선두에 선 티베리우스가 도개교 위에 올라섰다. 뒤이어 스칼렛과 루키우스를 태운 흑마가 들어섰다.
그 순간 흐드러지게 쏟아지는 하얀 꽃잎들이 붉은색으로 물들어갔다. 흰색과 붉은색이 섞여 진한 분홍색으로 변해가자 스칼렛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너무 예쁘네요!”
뒤쪽에 서 있던 슈발리에들 또한 놀란 듯 탄식했다.
“왕의 꽃이군. 소문으로만 듣던! 놀랍군. 놀라워!”
우스운 건 성의 수비대원들이 터트린 탄성이었다.
처음 보는 광경에 넋이 나갔는지 신을 찾는 자마저 있었다. 그러다 수비대장일듯한 자가 매섭게 주의를 주어 목소리는 뚝 끊어졌다.
루키우스는 그 모든 목소리를 무시한 채 천천히 말을 몰며 스칼렛에게 말했다.
“아에리우스는 뱀파이어 왕의 꽃입니다. 아툼가의 직계가 꽃나무 밑을 걸으면 이처럼 붉게 물들기에 순혈 뱀파이어들은 제 성의 입구에는 반드시 이 꽃나무를 심었다더군요.”
“레오폴드 성이 본래 순혈 뱀파이어의 것이었나 보네요.”
“그런 것 같습니다. 성의 내부가 미로처럼 생긴 것도 뱀파이어 성의 특징이거든요.”
“어머, 정말요? 나 그런 성을 여러 개 봤는데. 하지만 이 꽃나무는 본 기억이 없어요. 아니, 봤다 해도 이렇게 꽃비를 뿌리지 않는 한 몰랐을 것 같긴 하지만.”
“아까 수비대원이 불어댄 팡파르의 독특한 음색 때문에 떨어져 내리는 겁니다. 아에리우스 고유의 특징이지요. 저도 사실 처음 들었고요.”
“뭐가 됐든 굉장하네요. 꽃잎 하나하나가 죄다 물들어가다니. 하늘은 새파랗고 꽃잎은 휘날리고. 정말 예쁘네요.”
스칼렛은 고개 젖혀 얼굴 가득 꽃비를 맞으며 말했다.
“그래요. 참 예쁘군요.”
루키우스는 스칼렛의 희고 가는 목덜미와 보일락말락 그녀의 가슴께로 늘어진 작은 호리병 목걸이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분홍색 꽃잎들이 목덜미와 목걸이에 내려앉았다가 나풀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지긋이 보고 있노라니 꽃잎이 마치 그를 놀리는 것만 같았다. 보란 듯이 그녀의 피부를 희롱하는 모양새가 그랬다.
루키우스는 제 송곳니가 슬며시 길어지는 것을 알았다. 앞에는 티베리우스가 뒤에는 슈발리에들이 오고 있는데 이를 박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하아-
한숨과 함께 떨어져 내리던 꽃들이 돌풍에 휘말린 듯 파르르 돌며 위로 날아올랐다. 수천, 수십만 개의 꽃잎이 만들어낸 벽들이 사방에 세워졌다.
루키우스는 당황해 말을 세웠고 스칼렛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 목덜미에 엎드리더니 고개를 살짝 돌려 시선을 맞췄다.
“아에리우스 꽃이 당신의 엉큼한 마음을 읽었나 보네요.”
“엉큼하다니 그게 무슨?”
“당신이 날 먹고 싶다는 신호를 보내자마자 꽃들이 벽을 만들었잖아요. 뱀파이어 왕의 꽃이 맞긴 맞나 보네요.”
“신비로운 힘을 가졌다고 전해져 내려오긴 하지만 이런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만.”
루키우스는 정색하면서도 솔직히 기뻤다.
뭐가 됐든 그녀와 단둘이 있을 수 있다는 자체가 좋았다. 리처드 공자로 인해 피어올랐던 불안한 마음이 한결 누그러졌다.
스칼렛은 그 속내를 읽은 듯 쓴웃음을 짓더니 제 머리카락을 잡아 한쪽 어깨로 넘겨 목덜미를 드러내며 말했다.
“어서 먹어요. 다들 무슨 일인가 하고 불안해하고 있을 것 같으니.”
루키우스는 예의상 거절의 말을 하려다가 마음을 돌렸다. 왕궁에 도착하면 당분간 얼굴조차 보기 힘들 테니 흡혈 기회가 언제 올지 감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희귀한 기회인지라 스칼렛의 허리를 그러 안고는 희고 가는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달콤한 피가 입안으로 스며들었다.
따스하고 감미로운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전신에 활력이 느껴졌다.
쾌감이 차오르는지 스칼렛이 작게 몸을 떨며 헐떡거렸다.
루키우스는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다가 그대로 손을 앞으로 해 훤히 드러난 가슴골 사이로 밀어 넣었다.
그가 그동안 경험했던 대로 단단하게 조여져 있던 앞자락은 사내의 손길을 쉽게 받아들여 공간을 내줬다.
오늘 새벽, 그의 눈을 사로잡았던 탐스러운 살덩이가 손안 가득 잡혔다. 그가 부드럽게 애무하자 손바닥에 닿은 젖꼭지가 단단해지며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만으로도 자극이 심했던지 스칼렛이 안달을 하며 신음했다.
루키우스는 그녀의 피부가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손바닥으로 살며시 젖꼭지를 문질러댔다. 그러면서 피를 빨아대자 쾌감이 피어오르는지 스칼렛이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루키우스는 뻐근해 오는 제 욕망을 느끼며 다디단 피를 꿀꺽 삼켰다.
그 순간 스칼렛이 고개를 젖히며 안달을 했다. 그러다 뭘 봤는지 소리쳤다.
“굉장해!”
루키우스는 저도 모르게 이를 거두고는 입가에 묻은 피를 혀로 할짝대며 허공을 올려다봤다.
분홍색으로 변했던 꽃잎 위로 은빛이 반짝거렸다. 순혈 뱀파이어의 눈동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그것은 분명 어떤 징조를 뜻했는데, 루키우스가 아는 선에서는 해독할 길이 없었다.
‘이거 아무래도 작은 숙부님께 여쭤봐야겠군. 그분이라면 무슨 징조인지 아실 테지.’
그런 생각을 하며 루키우스는 다시금 스칼렛의 목덜미에 이를 박고 한 모금 들이켰다. 동시에 그녀의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아읏-!
아픔과 쾌감이 한꺼번에 밀어닥치자 스칼렛이 신음을 토해냈다. 쓰러질 듯 그의 가슴에 등을 기대는 걸 보니 살짝 간 모양이었다.
루키우스는 즐거워하며 천천히 이를 거뒀다. 아쉬웠지만 그녀의 가슴에서 손도 빼냈다.
후우-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자마자 은색으로 빛나던 꽃잎들이 마치 땅에서 바람이 불어 올라가는 것처럼 하늘로 솟구쳤고, 이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근사한 광경에 스칼렛이 짤막한 탄성을 내질렀다. 루키우스는 그녀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
“스칼렛. 수도에 가자마자 체터필드 대공에게 날 당신의 시종 무관으로 삼겠다고 해요.”
하지만 스칼렛은 말이 없었다. 그저 말없이 꽃비를 바라볼 뿐이었다.
루키우스는 애가 탔지만, 다시 물어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마치 별빛이 새벽의 햇살에 삼켜지듯 꽃잎은 조용히 땅으로 내려앉았고 꽃비도 서서히 잠잠해졌다.
이윽고 꽃비가 멈추자 티베리우스를 비롯한 모두가 멍하니 선 것이 보였다. 죄다 아에리우스가 보여준 마법에 홀렸던 모양이었다.
이내 티베리우스가 뒤를 흘끔 보더니 모두를 확인하고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 그는 도개교 너머로 수도까지 쭉 뻗어 있을 돌길을 바라보며 손을 번쩍 들었다.
소리 없는 신호에 모두가 집중했다.
“꽉 잡아요. 마이 레이디.”
루키우스가 소곤거리자 스칼렛은 말 갈기를 꽉 잡아 쥐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루키우스는 그녀의 허리를 확 끌어당겨 바짝 몸을 붙였다. 그러면서 슬쩍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비비적댔다.
스칼렛이 간지럽다는 듯 어깨를 이리저리 움직여댔다.
루키우스는 작게 소리 내 웃고는 앞을 바라봤다. 티베리우스가 손을 내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마자 루키우스는 말고삐를 세게 내리쳤다.
둘을 태운 흑마가 돌길을 힘차게 박차며 달려나갔다. 반동이 강했던 듯 스칼렛이 움찔 떨며 그에게 더욱 바짝 등을 붙였다.
마치 손아귀에 작은 새가 들어앉은 듯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절대 놓고 싶지 않은 온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