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마이 레이디, 마이 스칼렛 (4/16)

3. 마이 레이디, 마이 스칼렛

카운테스 레오폴드가 사는 성까지는 꼬박 3일을 달려야 하는 거리였다.

이른 아침 출발한 일행은 울창한 숲길을 거의 쉬지 않고 달려나갔다. 마차는 괴한의 공격으로 버리고 온 터라 어쩔 수 없이 스칼렛은 루키우스의 말에 짐짝처럼 실린 채 이동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이번에는 안장이 얹혀 있어 하반신을 딱 붙이고 갈 필요는 없다는 거였다.

하지만 달리는 내내 루키우스가 자꾸 귓가와 목덜미에 색스러운 숨결을 내뿜는 통에 참 불편했다.

참다못해 머리카락을 뒤로 부채처럼 펼쳐 좀 가려볼까 했더니 걸리적거린다며 기어코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한쪽 어깨로 넘겨줬다.

일부러인 것인지 어젯밤 그가 이를 박은 오른쪽 목덜미가 햇살 아래 훤히 드러났다.

스칼렛은 차마 뭐라 말도 못 하고 속으로 끙끙 앓았다.

눈앞으로 가을로 물들어가는 아름다운 숲길이 펼쳐지고 있는데도 자꾸 생각이 어제로 돌아갔다.

‘어휴. 먼저 키스 따위를 하는 게 아니었는데….’

어젯밤은 달빛이 마술을 부린 게 분명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루키우스의 새파란 눈이 어찌나 예쁜지 깔아 눕혀진 엄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고 말았다.

마음에 드는 남자와의 첫 키스는 초콜릿이랑 비슷하다더니 살롱 언니들에게 들었던 대로 살살 녹여 먹는 맛이 있었다.

그러니 거기까지만 즐겼어야 했는데 상대가 뱀파이어라는 걸 깜빡했다.

혀를 깨물리고 나니 미칠 듯이 달아오르는 몸이 제멋대로 날뛰면서 다리 사이가 애절해졌다. 뭔가로 가득 채워야 만족이 될 것 같은 낯선 감각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직여 허벅지를 묵직하게 눌러오는 그것을 제 다리 사이에 품으려고 하다가 루키우스의 속삭임에 정신이 들었다.

‘대공에게 날 달라고 청해요. 지금의 난 당신을 안을 수가 없으니.’

으-

어제도 그랬지만 다시 떠올리니 역시나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흡혈로 인해 정신이 흐려졌다지만 남자가 그런 말을 할 정도로 흐트러지다니 무진장 창피했다.

그것도 왕궁에 도착하는 즉시 적이 될지도 모르는 남자를 상대로 방심하다니 입맛이 썼다.

살롱 언니들은 뱀파이어한테 밤새도록 물려도 받아낼 건 다 받아내던데 이럴 줄 알았으면 시간 날 때 그 비법이나 좀 들어두는 걸 그랬다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그렇게 괴로워하는 스칼렛과는 달리 루키우스는 어젯밤 일은 말끔히 잊은 듯 굴었다. 그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건 어떻게서든 레오폴드 성으로 가지 않을 방법인 것 같았다.

가는 중간중간, 루키우스는 계속해서 슈발리에 몇 명을 보내 다른 길을 탐색게 했다. 하지만 그들이 들고 온 소식은 죄다 똑같았다.

길에 접근하자마자 공격을 받거나 공격을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검은 복면의 기사단을 봤다는 거였다.

루키우스는 그런데도 포기를 못 하겠는지 밤마다 티베리우스와 함께 스칼렛만이라도 몰래 빼돌릴 방법을 찾아 골몰했다.

스칼렛은 모닥불가에 누운 채 그런 루키우스를 바라보다가 잠이 들곤 했다.

솔직히 루키우스는 이 짧은 여행이 지독히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스칼렛은 나름 재밌었다.

애초에 살던 변경 마을에서 벗어난 게 처음이다 보니 모든 것이 구경거리였다.

말 달리다가 이따금 나타나는 농가에서 끼니를 때우는 것도 신났고, 밤마다 블란치가의 가이우스란 슈발리에가 만들어 주는 스튜 또한 꿀맛이었다.

애초에 배부르면 뭐든 심각하게 고민하는 법이 없다 보니 루키우스가 좀 안쓰럽기도 했다.

‘체터필드 대공의 성격이 지랄 맞은 게 분명해. 그러니 저 정도의 남자가 저렇게 절절매지.’

그리하여 4일째 저녁, 일행은 숲이 아닌 다소 큰 마을에 도착해 그곳 여관으로 향했다.

스칼렛은 불과 반나절만 달리면 레오폴드 성이라 들었기에 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의문은 곧 풀렸다.

“마이 레이디. 세수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은 꼴로 카운테스 레오폴드를 만났다간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비록 초라하긴 해도 여기가 이 근방에서 가장 큰 여관이라 하더군요.”

루키우스는 그렇게 설명하고 나니 뒤쪽에 서 있던 여관 주인의 딸이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유어 그레이스. 이 여관에는 노천 온천이 딸려 있습니다. 그곳으로 안내해드리죠.”

“온천? 온천이 뭐예요?”

스칼렛이 처음 들어본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루키우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가보면 아실 겁니다. 뭐, 여인들은 죄다 좋아하더군요. 한 분도 빠짐없이.”

***

루키우스의 말이 맞았다. 온천은 환상적인 곳이었다.

일일이 끓여서 욕조에 부어야만 즐길 수 있었던 뜨거운 물이 계속해서 솟아오르고 기분까지 좋게 만드는 따스한 수증기가 살랑살랑 피어올랐다.

당연히 분장이 지워졌고 시중을 들겠다며 곁에 있던 여관 주인의 딸은 소스라치게 놀라는 눈치였지만 신분 차이 때문인지 딱히 캐묻지는 않았다.

스칼렛은 손가락이 팅팅 불 때까지 온천을 즐겼고, 배가 너무 고파 현기증이 날 때가 되어서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다시 분장하려 했더니 여관 주인의 딸이 펄쩍 뛰었다.

“아무리 좋은 피부라 해도 진한 화장은 독입니다. 온천부터 묵으시는 방까지는 바로 갈 수 있으니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하셔도 충분합니다! 식사도 제가 방으로 가져다드릴게요.”

결국, 스칼렛은 오랜만에 본래 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난 채 방에서 홀로 식사를 했다.

메뉴는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메추라기 구이였는데, 가느다란 뼈 사이사이에 밴 양념이 너무 맛있어서 정신없이 먹어 치웠다.

당연히 잠이 쏟아졌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가 눈을 뜨니 어스름한 새벽이었다.

혼자였고 산속 마을이라 그런지 새소리만이 들려왔다. 조금 멍한 얼굴로 누워 있다가 물소리가 들려와 일어나 앉았다.

덮고 잔 이불은 두툼하고 따스했지만 역시나 산속이라 그런지 공기가 무척 찼다. 저절로 어젯밤 기분 좋게 즐긴 온천이 떠올랐다.

‘아침 먹고 바로 출발하겠지? 온천이란 거 다시 만나기 힘들 것 같은데….’

이대로 떠나기는 너무 아쉬워 스칼렛은 어제 왔던 길을 되짚어 방을 나섰다.

아직 해가 뜨질 않아 꽤 쌀쌀했지만 이내 따스한 수증기가 느껴지면서 노천 온천이 나타났다.

다가가서 일단 따스한 물에 얼굴을 씻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고개 돌려 바라보니 루키우스였다.

루키우스는 당황한 듯 멈춰 서더니 이내 정신을 차린 듯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마이 레이디.”

“이렇게 일찍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혹시 온천 즐기러 온 거예요?”

스칼렛이 마주 서며 묻자 루키우스는 온천을 흘끔 바라보곤 말했다.

“즐길 수 있다면 좋겠군요. 여기 온천은 수도에서도 꽤 유명하거든요. 하지만 아닙니다. 교대로 보초를 서고 있는데 지금이 제 차례라 이곳까지 돌아보던 중이었습니다.”

“내가 망봐줄 테니 잠깐이라도 몸을 좀 담가보지 그래요?”

“……당신 앞에서 옷을 벗으란 겁니까?”

“누가 당신 벗은 몸 구경하재요! 온천이 엄청 좋아서 한 말이라고요!”

스칼렛이 정색을 하며 외치자 루키우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괴한의 습격 이후 4일 내내 딱딱하게 굳은 표정만 하고 있더니 오랜만에 본 웃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좀 자주 웃어요. 루키우스.”

스칼렛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루키우스가 웃음을 거두며 지긋이 바라봤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자철석이 끌리는 것처럼 저절로 몸이 움직였고 루키우스 또한 성큼 다가섰다.

입술이 마주 닿았고 바로 키스가 이어졌다. 두툼한 혀가 밀려드나 싶더니 그의 송곳니에 혀가 깨물렸다.

피가 빨려 나가는 달콤한 느낌과 함께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스칼렛은 호흡이 곤란해져 현기증이 일어 비틀거렸고 루키우스는 그제야 입술을 거두더니 말릴 틈도 없이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꿀꺽꿀꺽-

두어 번 피를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몸이 찌릿찌릿해.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닌 것만 같아.’

스칼렛은 흐느적거리며 그가 단단히 붙들고 선 손에 몸을 맡겼다.

“이런! 무척 예민하군요.”

루키우스는 이를 거두더니 한 손으로 몸에 두르고 있던 망토를 바닥에 던지고는 그 위에 스칼렛을 눕혔다.

어스름 새벽이라 사방이 어두운데 루키우스의 파란 눈동자만이 은빛으로 반짝였다.

마치 어둠 속의 맹수처럼 선명한 은빛이 그녀의 얼굴과 입술 그리고 목덜미를 훑더니 이윽고 가슴으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가슴을 쥐어오는 손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여관 주인의 딸이 준비해준 잠옷 안에는 입은 것이 없어 그의 손이 품은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아-

루키우스는 깊은 한숨을 몰아쉬더니 몸을 숙여 스칼렛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마이 레이디. 당신을 안을 순 없지만 만져 드릴 순 있습니다. 아니, 만질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죠. 사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그러고 싶어 미칠 것 같았거든요.”

스칼렛은 볼 안쪽을 깨물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순혈 뱀파이어의 유혹에 저항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들어왔다. 그때 막연히 아마칼리의 혈통이니까 자신은 예외일 거라 믿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안 되는데. 이 남자는 대공의 풋맨이니 절대 안 되는데….’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승낙의 표시로 두 팔을 내밀어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루키우스는 작게 소리 내 웃더니 그녀를 망토째로 번쩍 안아 바로 서며 말했다.

“당신 방으로 가도록 하죠. 이곳은 너무 추우니.”

그리고는 묻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 그녀의 방을 잘도 찾아 들어섰고 곧바로 침대에 뉘었다.

스칼렛은 어쩐지 부끄러워져 그의 목을 감은 팔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루키우스는 속내를 읽은 듯 소곤거렸다.

“괜찮습니다. 나 또한 누군가를 이렇게 원하는 건 처음이거든요.”

그러더니 살며시 귓불을 깨물고는 혀를 내밀어 핥아댔다.

살짝 피가 난 느낌이 들었지만 지독한 쾌감이 스며들어 귀를 타고 뭔가 따스한 기운이 목덜미로 내려오는 것만 같았다.

스칼렛은 루키우스의 목에 둘렀던 팔을 풀어 침대에 늘어뜨렸다.

그녀의 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아는 듯 따스한 기운이 가슴에 이르자 루키우스는 망설임 없이 잠옷을 끌어 내려 한껏 부푼 살덩이를 드러냈다.

루키우스는 젖꼭지를 혀로 핥더니 입을 크게 벌려 이를 박나 싶더니 앞서와 마찬가지로 바로 이를 거두고는 혀를 내밀어 정성스럽게 젖꼭지를 핥아댔다.

스칼렛은 손등을 깨물며 따스한 기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놀랍게도 지난 18년 동안 그저 살덩이에 불과했던 젖가슴이 낯선 뭔가로 돌변하는 것만 같았다.

그의 혀 놀림에 젖꼭지가 단단해지더니 그곳부터 쾌감이 샘물처럼 흘러넘쳐 배꼽에 고였다.

뱃속 깊은 곳이 뜨거워지는 기분에 안달하자 루키우스는 잠옷을 그곳까지 끌어내리더니 이번에는 배꼽 바로 아래 납작한 그곳에 이를 박았다.

이제 뜨거운 정도가 아니라 데일 것 같은 열기가 그곳에서 터져 나와 그 아래로 용암이 되어 흘러내렸다.

다리 사이가 무섭도록 뜨거워지며 음부에 불이 붙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차갑고 단단한 것을 본능적으로 원하며 푹 젖어가는 느낌이 너무나 또렷했다.

“그만, 그만 해요. 루키우스!”

스칼렛은 더는 참을 수 없어 그의 머리를 밀어대며 안달을 해댔다. 하지만 루키우스는 조금도 밀리지 않고 그저 이를 거두더니 달래듯 배꼽을 핥아댔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쾌감이 지나쳐 스칼렛은 울음을 터트렸다. 감당할 수 없는 열락에 흐느껴 울고 있노라니 울림 좋은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스칼렛. 날 봐요.”

친근한 부름에 눈을 뜨니 루키우스가 무릎으로 선 채 상의에 입은 것들을 벗어던지고 있었다. 재킷과 조끼, 속에 받쳐 입은 흰 셔츠가 순식간에 옆으로 날아갔고 막 고개를 내민 태양 아래 그의 상반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옷 위로도 충분히 근육질의 몸이 드러난다 생각했는데 드러난 몸은 예상치를 뛰어넘었다.

커다란 몸집에 어울리는 떡 벌어진 어깨와 근육으로 꽉 짜인 탄탄한 흉곽, 가슴 사이 푹 팬 골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근사했다.

그 아래로 이어지는 복근은 여덟 가닥으로 예쁘게 나뉘어 있어 그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선명할 정도로 꿈틀거렸다.

스칼렛은 멍하니 그의 몸을 관찰하다 뱃속이 뜨거워지는 기분에 마른 숨을 토해냈다. 몸이 본능적으로 그를 갈구하고 있었다.

사내다운 힘이 그녀를 꿰뚫고 집어삼키기를.

저도 모르게 허벅지를 붙이며 비비적대자 루키우스가 입안이 말라오는지 빨간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핥으며 바지의 단추를 푸르고 지퍼를 내렸다.

언뜻 안쪽에 입은 짙은 색의 속옷이 두둑하게 부푼 것이 눈에 들어왔다. 왜인지는 몰라도 동그란 모양으로 젖어있기까지 해서 엄청 야했다.

스칼렛은 차마 더는 볼 수 없어 시선을 옮겨 천장을 바라봤다. 문득 자신의 음부가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살롱 언니들은 그곳이 소담스러운 털로 가려져 있었지만, 스칼렛의 경우에는 털이 한 가닥도 나질 않아 고스란히 다 드러났다.

그것이 작은 콤플렉스였는데 이 상황이 되고 보니 어쩐지 심란해졌다.

‘보고 이상하다고 그러면 어쩌지?’

고민하고 있는데 루키우스가 한 손을 그녀의 머리 옆에 두고 몸을 지탱하며 키스를 해왔다.

몸이 한껏 달아올라서인지 키스조차 소스라치게 뜨거웠다.

저절로 숨이 가빠왔고, 루키우스는 그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거두고는 자신이 이를 박았던 곳에 새가 쪼는 듯한 입맞춤을 하며 아래로 몸을 내렸다.

스칼렛은 손등을 물며 신음을 삼키다가 다리가 크게 벌어지며 그사이에 루키우스가 얼굴을 묻는 순간 더는 참지 못하고 짤막한 비명을 내질렀다.

민망하게도 데일 듯 뜨거운 혀가 음부의 갈라진 틈 사이로 파고들더니 쓰임새를 알 수 없었던 돌기를 힘껏 빨아댔다.

“흐아-!”

괴상한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빠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그의 이가 잘근잘근 가볍게 돌기를 씹어댔다.

“안 돼. 안 돼!”

미친 듯이 발버둥 치며 그의 머리를 필사적으로 밀어내려 했다. 이상하다고 비웃을까 봐 걱정했지 설마 입을 대고 빨 줄은 몰랐다.

눈앞에 열꽃이 폭탄처럼 터졌다. 그가 돌기를 혀로 한 바퀴 감을 때마다 허리가 저절로 펄쩍거렸다.

스칼렛은 불이 붙은 것 같은 숨을 뿜어내며 끙끙 앓았고 그러다 쑥, 혀가 질구 안으로 밀려들자 기절하는 줄만 알았다.

그동안 질구로 들어올 수 있는 건 하나뿐이라 생각해와서인지 너무 충격적이라 숨조차 쉬기가 힘이 들었다.

그도 모자란 듯 루키우스는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애액을 쭉쭉 빨아 삼켰다.

스칼렛은 뒤로 몸을 빼야 한다고 머릿속으로는 생각하면서도 그 느낌이 좋아서, 그의 높은 콧날에 돌기를 비비적대면서 얻는 쾌감이 너무 엄청나서 저도 모르게 허리를 들이밀었다.

점점 더 애절해졌고 뭔지도 모르면서 꿰뚫리고 싶은 강렬한 열망이 솟구쳐 허덕였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안달을 하다가 치골 위를 덮은 도톰한 살 위에 이가 박히는 순간 새하얗게 타오르는 빛 속에 삼켜졌다.

읏!

온몸이 저절로 바짝 조여들더니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쾌감이 등줄기를 따라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모공 하나하나에 전기가 오르는 듯 짜릿한 기분을 만끽하며 그대로 침대에 축 늘어졌다.

스칼렛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멍하니 누워만 있었다. 루키우스가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더니 말했다.

“실제로 몸을 겹치면 훨씬 더 좋을 겁니다. 이것보다 훨씬 더요.”

그 목소리에선 갈증이 느껴졌고 해소되지 못한 욕망이 진득하게 고여 있었다.

스칼렛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앉으며 말했다.

“나만 좋았잖아요. 이번에는 내가 빨….”

막상 말하려고 보니 너무 민망한 단어라 도저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저절로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허둥대며 눈을 아래로 하니 지퍼 사이로 보이는 그의 드로우즈가 푹 젖은 것이 보였다.

“당신을 탐하면서 나도 즐겼습니다. 아주 좋았어요.”

루키우스는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하더니 손을 내밀어 그녀의 턱을 가볍게 받쳐 시선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날 빨아주겠다는 말 기억해두죠.”

그러더니 뭐라 할 틈도 없이 가볍게 볼에 입을 맞췄다.

스칼렛은 두툼하면서 사내다운 그 입술이 조금 전까지 자신의 아래를 빨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몸을 떨었다. 지저분하다는 느낌보다는 너무 야해서 졸도할 것 같았다.

“슬슬 다들 일어날 시간이니 그만 가보겠습니다.”

루키우스는 속내를 다 안다는 듯 싱긋 웃더니 침대에서 내려섰다. 그러더니 바닥에 떨어진 제 옷을 하나씩 주워 몸에 걸쳤다.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는 몸이 천에 가려지는 걸 지켜보며 스칼렛은 숨을 삼켰다.

정말 창피하게도 그의 나신을 모두 보고 싶다는 비밀스러운 욕망이 솟구쳤다.

‘미쳤나 봐. 나 정말 왜 이러니?’

자신에게 야단을 쳐댔지만, 솟구친 욕망은 제멋대로 날뛰며 ‘좀 더’를 외치고 있었다.

“있다 뵙죠. 아침이 준비되면 여관 주인의 딸을 보낼 테니 그때 나오십시오. 식사 후 바로 출발할 겁니다.”

루키우스는 그렇게 말하더니 생각났다는 듯 다가섰다.

스칼렛은 심장이 쿵쾅거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올려다봤고 루키우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망토를 두고 갈 순 없어서요.”

그제야 자신이 여전히 그의 망토를 깔고 앉아 있다는 사실이 떠올라 얼른 물러서다가 지금 자신이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하얀 피부 위에 그가 문 자국이 붉게 남아 있어 자신이 보기에도 너무 야했다.

스칼렛은 너무 당황해 저도 모르게 팔로 가슴을 감쌌고, 루키우스는 망토를 걷어 제 몸에 두르다 말고 눈을 빛내더니 다시 덮쳐들었다.

그대로 키스가 이어졌고 뭔가 묘한 맛이 날 줄 알았던 그의 타액에선 희미한 민트 맛이 날 뿐이었다.

스칼렛은 신음하며 키스를 즐겼고 루키우스는 아플 정도로 혀를 빨다가 입술을 거두더니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그의 목울대가 피를 삼키며 만들어내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고개를 든 루키우스는 시선을 맞추더니 혀로 피가 살짝 묻은 제 입술을 할짝거리며 말했다.

“순혈 뱀파이어의 체액에는 인간의 몸이 피를 좀 더 잘 만들도록 만드는 힘이 있죠. 가장 효과가 좋은 건 정액이지만 당신에게 차마 그걸 먹일 순 없으니 참아주세요.”

그러더니 다시 키스를 해왔다.

피 맛은 나지 않았다. 민트 맛이 좀 더 강해진 타액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었다. 몇 번이나 삼키고 나서야 루키우스는 입술을 물렸고 코끝으로 그녀의 귓불을 비비적대며 속삭였다.

“마이 레이디. 마이 스칼렛.”

그리고는 늦은 듯 재빨리 방을 떠났다.

스칼렛은 침대에 그대로 드러누워 문이 닫히는 걸 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아- 조금 전 말은 연인이나 할 법한 말이네. 어쩌면 좋아.’

***

루키우스가 일러준 대로 아침을 먹자마자 바로 레오폴드 성을 향해 출발했다. 스칼렛은 달리는 내내 표정을 굳힌 채 침묵을 지켰다.

솔직히 무척 심란했다. 루키우스는 체터필드 대공의 풋맨이니 만약 스칼렛이 그에게 마음을 준 것이 알려진다면 이용당할 게 뻔했다.

‘이미 가족만으로도 내 약점은 충분한데 약점을 더 늘려선 안 돼!’

속으로 분장을 하면서 한 다짐을 곱씹고 있는데 나무들이 지나치게 울창해 길이 확 좁아지는 바람에 말 달리던 속도가 확 떨어졌다.

좌우에 바짝 붙어서 쫓아오던 슈발리에들 또한 뒤로 물러서며 일렬로 말을 몰아 쫓아왔다.

“감기 기운이라도 있는 겁니까?”

루키우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스칼렛은 손으로 귀를 감싸고 싶은 기분을 애써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건강해요. 애초에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온 것도 아닌걸요.”

“만약 내가 헐버트 공작이었다면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을 암시장에 내보내진 않았을 겁니다.”

“아버지가 가라 해서 간 게 아니라 내가 알아서 간 거예요. 그리고 아버님이 내가 암시장에서 심부름꾼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안 건 사실 얼마 되지 않았고요. 한 2년쯤 됐나?”

“이렇게 분장을 하고 다니는데도 모르셨다니 둔하신가 보군요.”

“에이, 설마 이러고 오갔겠어요? 암시장 크레타 할머니네에서….”

스칼렛은 별생각 없이 쫑알대다 아차 싶어 말끝을 흐렸다.

크레타 할머니는 암시장의 대모나 다름없는 분으로 온갖 약초를 이용해 사람을 치료하기도 하고 신비한 약물을 만들기도 하는 마녀였다.

겉보기는 무서웠지만 속은 무척 따스해 어린 스칼렛이 처음 암시장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이것저것 뒤를 봐주신 분이었다.

암시장에서 험한 일을 당하지 않게끔 분장술을 가르쳐 준 것도, 타고난 사교술을 이용해 중개업을 하도록 권유한 것도 모두 그분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마크나 앤의 입을 통해 상황을 전해 듣고는 나서서 바젤 공국으로의 탈출을 준비하는 데 힘을 보태고 계실 가능성이 컸다.

적 앞에서 그런 할머니의 이름을 생각 없이 내뱉다니 심장이 철렁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스칼렛은 아무렇지 않은 척 밝디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재미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카운테스 레오폴드 이야기나 좀 해봐요. 카운테스란 공작 작위를 가진 여인을 뜻하는 말 맞죠?”

하지만 루키우스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말을 몰며 길을 재촉할 뿐이라 스칼렛은 좀 멋쩍어져 주변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긴 붉은 단풍나무만 심어놨나 보네요. 온통 붉은색 천지라니 놀랍네. 아! 혹시 아마칼리 여왕을 기리기 위해 심은 건가?”

일부러 쾌활하게 외치자 루키우스가 마지 못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마이 레이디. 실망시켜 드려 죄송합니다만 친여왕파니 뭐니 해도 일단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무리입니다. 만약 이들이 제 목숨을 걸고 나섰다면 지난 석 달 동안 줄줄이 여왕이 죽어 나가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러더니 스칼렛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는 소곤거렸다.

“카운테스 레오폴드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주지 말아요. 마이 스칼렛. 당신이 수도에 도착하지 않는다면 체터필드 대공은 당신 가족을 범인으로 몰 겁니다. 온갖 지저분한 수를 써서요.”

경고와도 같은 속삭임에 스칼렛은 말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착하군요.”

루키우스는 그렇게 말하곤 그녀의 목덜미에 짤막한 입맞춤을 했다.

스칼렛은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고 그 순간 공기가 농밀해지며 둘 사이의 긴장감이 손에 잡힐 듯 강렬해졌다.

말고삐를 잡느라 앞으로 내밀고 있는 루키우스의 두 팔과 맞닿은 피부에서 델 듯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스칼렛이 숨이 가빠와 헐떡이자 루키우스가 못 참겠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목덜미에 뜨거운 숨결을 흩뿌렸다.

천만 다행히도 앞서 달려가던 티베리우스가 말을 멈추며 뒤를 돌아봤다. 루키우스 또한 말을 멈춰야 했고 뒤에서 달려오던 슈발리에들 또한 곧 도착했다.

“레오폴드 본성이 보입니다.”

티베리우스는 그렇게 말하며 앞을 가리켰다. 루키우스는 말을 몰아 티베리우스의 옆에 가서 섰다.

스칼렛은 울창한 단풍나무로 가려져 있던 전경이 갑자기 확 걷히며 들꽃으로 무성한 언덕 아래 거대한 호수가 있는 것을 보았다.

레오폴드 성은 호수 한가운데 위치한 섬에 세워져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앞문과 뒷문 모두 도개교가 놓여 있었다.

다만 뒷문 쪽 도개교는 올라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수도로 직행할 수 있다는 바로 그 길인 듯싶었다.

어쨌거나 내려져 있는 앞문 도개교 위에는 뱀파이어와 인간이 두루 섞여 걸어서 혹은 짐수레를 끌고 오가고 있어 상당히 분주했다.

“함정이 맞는 것 같군요.”

티베리우스가 중얼거리자 루키우스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칼렛은 뭐라 할 말이 없어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성의 구조를 살폈다.

서북 해안의 수비를 총괄하는 변경백이라는 작위에 걸맞게 뾰족한 첨탑을 인 8개의 성이 나선형 길을 따라 서 있었다.

유사시 말이나 마차를 타고도 가장 꼭대기 성까지 쉽게 올라갈 수 있는 구조로 성벽에는 최신형 포탄이 열 맞춰 선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전투를 위해 지은 성이란 의미니 내부가 미로란 소리였고, 그렇다는 건 길잡이 없이 혼자 멋대로 움직였다간 낭패란 거였다.

가능하면 수도에 도착하기 전 조금의 정보라도 입수하는 편이 현명한 상황인데 엄두도 못 낼 것 같았다.

스칼렛은 갑자기 가슴이 무거워져 입술을 짓씹었다.

불과 지난해까지만 해도 파티나 그 비슷한 일로 출장 가는 살롱 언니들을 따라 귀족들의 저택을 자주 드나들었었다.

그중에는 스칼렛이 사는 저택처럼 생긴 곳도 있었지만 가끔은 눈앞에 보이는 성 같은 곳도 있었다.

그곳에서 하는 일이라곤 소소한 심부름뿐이라 시간 대부분을 하인들 사이에서 보냈고 그도 아니면 성 탐험을 하는 데 썼다.

덕분에 이것저것 알게 된 것이 참 많았다. 어느 가문의 누가 도박질로 집안을 말아먹었는지, 누가 바람이 나서 이혼 소송에 걸렸는지 뱀파이어 명가가 왜 명가인지 등등.

그러다 살롱 바람잡이만으로도 돈이 충분히 벌리기에 그만뒀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실수였다.

만약 지금도 다녔다면 여왕 암살 사건에 대한 뉴스를 듣고도 남았을 터였다.

후-

저도 모르게 한숨을 폭 내쉬자, 티베리우스가 착각했는지 다정함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마이 퀸.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단 시간 내에 저곳을 통과해 수도로 모실 테니까요.”

그러더니 도개교 쪽으로 이어지는 길로 말고삐를 돌리며 외쳤다.

“입성한다!”

외침과 동시에 루키우스 또한 말고삐를 내리쳤다.

스칼렛은 말갈기를 꽉 움켜쥐며 반동에 대비했다. 허벅지 아래서 말 근육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언덕 아래를 뛰어 내려가니 가속력이 붙어 바람이 좌우로 힘차게 갈라져 이리저리 튕겨 나왔다.

스칼렛은 두 눈을 감고 온몸으로 불어 드는 바람을 만끽했다. 어깨 위에 늘어뜨렸던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말려 확 날아올랐다.

그러고 있는데 루키우스가 갑자기 한쪽 팔로 허리를 둘러 제 몸에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그의 심장이 귀에 와 닿은 그의 가슴 아래서 심할 정도로 빠르게 뛰어대는 것이 느껴졌다.

갑자기 왜 그러나 싶어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달리는 속도가 워낙 빨라 그저 안긴 채로 가만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티베리우스가 탄 말이 도개교 근처에 도착했고 뒤쪽에서 따라오던 슈발리에 중 누군가가 뿔나팔을 꺼내 힘차게 불어댔다.

뿌우-.

놀라울 정도로 멀리까지 울려 퍼지는 맑은 고동 소리에 도개교 위를 꽉 채웠던 사람들이 재빨리 좌우로 갈라섰다.

티베리우스는 속도를 멈추지 않고 도개교 위로 올라섰고 루키우스 또한 그랬다.

무섭도록 빠르게 도개교를 그대로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성의 수비대가 뛰어나왔다.

티베리우스는 그들 바로 앞에서 말을 멈춰 세우더니 크게 외쳤다.

“카운테스 레오폴드께선 어디 계신가? 여왕께서 오셨으니 직접 맞이하라 이르도록!”

그러자마자 아마도 수비대장일듯한 남자가 어려 보이는 대원에게 뭐라 뭐라 일렀고 그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미친 듯이 나선형의 길을 따라 뛰어 올라갔다.

그 사이 수비대원들은 차례로 도착하는 슈발리에들을 맞아 말에서 내리도록 도왔다.

스칼렛에게도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소년 대원이 다가와 말고삐를 잡더니 내려오는 걸 도우려고 손을 뻗었다.

“아, 고마워요.”

스칼렛이 방긋 웃으며 그 손을 잡으려는 순간 루키우스가 가볍게 뛰어내리더니 소년을 밀치며 스칼렛의 허리를 번쩍 안아 내려줬다.

소년 대원은 뻘쭘한 얼굴로 뒤로 물러섰고 스칼렛은 왠지 모르게 창피해져 미간을 구겼다.

“루키우스. 과도하게 날 챙길 필요는 없어요.”

루키우스는 싱긋 웃더니 말했다.

“마이 레이디. 과도하다뇨. 존엄한 여왕의 몸에 손댈 수 있는 건 오로지 허락받은 자들뿐입니다.”

“그 허락을 본인이 내린 건 아니고요?”

“엄밀히 따지자면 재상인 체터필드 대공이 내린 거죠. 전 그저 재상의 시종 무관이란 신분으로 그분을 대신하는 거니까요.”

“아하! 그렇군요. 재상의 대리.”

스칼렛은 불퉁한 얼굴로 돌아섰다. 그가 체터필드 대공의 사람이란 걸 다시 한번 확인받은 것만 같아 기분이 영 그랬다.

루키우스가 당황한 얼굴로 손을 뻗어 손목을 낚아챘다. 스칼렛이 반사적으로 바라보자 루키우스가 뭔가 말할 듯 입을 열었다.

“마이 레이디. 전 그저….”

하지만 한발 앞서 나선형 길 아래쪽에 있는 높고 긴 철문이 열리더니 아마칼리의 혈통을 상징하는 붉고 풍성한 머리와 초록색 눈을 가진 중년의 여인이 나타났다.

“마이 퀸!”

기쁨에 들떠 있었지만, 목소리는 근엄했고 풍기는 분위기 또한 그랬다.

‘흠- 플로라 여왕의 사촌 동생이라고 하니 내 친척뻘인 건 확실한데. 참 융통성 없게 생기셨네. 게다가 눈에 왜 황금빛이 돌질 않지? 신기하네.’

스칼렛이 여인을 훑어만 보고 있자 루키우스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우아하게 팔을 휘둘러 절하며 말했다.

“그동안 무고하셨습니까? 체터필드 대공 각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오랜만이네요. 루키우스 엔네야드 경.”

카운테스 레오폴드는 묘하게 가시 돋친 어투로 답하더니 스칼렛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오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며칠 전 슬픈 소식이 도착하여 다시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며 기도를 올리던 중이었는데 새로운 희망을 보니 무척 기쁩니다.”

스칼렛은 기묘할 정도로 뼈만 남은 차가운 손에 움찔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인사했다.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헐버트 공작의 장녀 스칼렛이라고 합니다.”

간단한 인사에 루키우스가 바로 끼어들었다.

“레이디 스칼렛 케이틀린 아마칼리십니다.”

“알아요.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신 분의 이름을 내 모를 리 없지. 이리 오시죠. 마이 레이디. 언제 오시나 계속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카운테스 레오폴드는 스칼렛의 등에 팔을 둘러 철문 쪽으로 떠밀며 말했다. 자연스럽게 뒤로 떠밀린 루키우스가 황급히 외쳤다.

“로드 카운테스. 송구하오나 지금 저흰 수도로 가는 길입니다. 한시가 급하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가요? 새로운 여왕께서 레오폴드 성에 오셨는데 식사 한 끼 대접하지 않고 보내란 말인가요? 게다가 이분의 옷차림을 보세요. 이런 옷차림으로 수도에 입성했다가는 두고두고 입방아에 오르내릴 겁니다.”

카운테스 레오폴드는 무섭게 화를 냈다. 순간 스칼렛은 루키우스의 편을 들까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굳이 수도에 빨리 갈 이유 따윈 없었다.

‘여기 이 아줌마라면 체터필드 대공의 손아귀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마음을 정한 스칼렛은 카운테스가 이끄는 대로 얌전히 철문 너머로 들어섰다.

밖에서 봤을 땐 마구간이나 그런 곳으로 통할 듯싶었는데, 막상 안은 저택의 입구처럼 온갖 치장이 다 되어 있었다.

긴 창이 돌로 만들어진 벽을 환하게 밝혔고 높은 천장 위에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다.

반질반질한 나무 복도에는 검은색과 흰색으로 이루어진 메이드 복장의 시녀들이 한 줄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다.

그들 중 레이디스 메이드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여인이 다가오더니 한 발을 뒤로 빼고 절하며 인사를 했다.

“환영합니다. 유어 그레이스.”

스칼렛이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받는 시늉을 하고 나자 카운테스가 말했다.

“이분을 신분에 걸맞은 차림으로 단장시켜 드리도록 해. 끝나는 대로 귀빈실로 모시고 오도록 하고.”

그리고는 스칼렛의 손을 꽉 움켜잡으며 소곤거렸다.

“레이디 스칼렛. 날 믿어요. 체터필드 대공으로부터 반드시 구해드릴게요.”

카운테스는 스칼렛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손을 놓고 뒤로 훌쩍 물러서더니 그제야 들어선 루키우스와 티베리우스에게 손짓하며 외쳤다.

“그대들은 나를 따라오도록 해요.”

그러더니 척척 걸어 복도 끝에 있는 문을 열어젖혔다.

스칼렛이 눈앞을 지나가는 루키우스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레이디스 메이드가 숨듯이 선 벽에 달린 문을 열며 말했다.

“유어 그레이스. 이쪽으로 오시죠.”

스칼렛은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기다 고개 돌려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루키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 표정이 어찌나 근심에 가득 차 있는지 스칼렛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고, 루키우스가 따라서 미소 지었다.

그렇게 미소를 주고받니 어쩐지 머쓱해졌다.

스칼렛은 슬며시 뒷걸음질 쳐 잽싸게 벽에 달린 문 너머로 들어섰다.

언뜻 루키우스가 입술을 안으로 말며 웃음을 삼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도 참 귀여웠다.

***

루키우스는 무척 심란해하며 스칼렛과 카운테스 레오폴드가 사라진 철문을 노려봤다.

왜 저렇게 화를 내는지 알 수가 없어 속이 상했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언덕에서 도개교까지 내려올 때의 광경이 생생해 기분이 묘했다.

정말이지 그 순간의 스칼렛은 너무 아름다웠다.

바람결에 날아오르는 붉은 머리카락은 불꽃처럼 화사했고 햇살에 고스란히 드러난 목덜미가 무섭도록 하얗고 순결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그녀와 비슷한 나이의 소년이 손을 뻗는 걸 본 순간 머릿속에 불길이 이는 느낌이었다. 부끄럽게도 손대지 말라고 엄포를 놓을 만큼.

하지만 정작 스칼렛의 표정이 어두워진 건 체터필드 대공의 이름이 나왔을 때였다. 아니, 그 전에 이곳으로 올 때 암시장의 크레타 할머니란 이름을 말하다 말고도 그랬다.

‘왠지 아차 싶은 느낌이었는데….’

갑자기 입안이 말라왔다. 스칼렛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적이라 규정짓고 경계 중이군.”

소리 내 중얼거리자 그 말이 철퇴처럼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오늘 새벽,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떠나 올 때 언뜻 봤던 스칼렛의 후회 어린 표정도 아침 식사를 하면서 짓던 근심 어린 눈빛도 비로소 이해가 갔다.

루키우스는 아찔한 기분과 동시에 억울함이 밀려 올라왔다.

물론 그는 체터필드 대공의 풋맨이자 재상의 시종 무관이었고, 그가 시키는 대로 계승권에 이름이 올라있는 레이디들을 수도에 데려다 놓긴 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이유는 천 년 전의 일 때문이었다.

최초의 아마칼리 여왕에 의해 마지막 뱀파이어 왕이 저주를 받으면서 순혈 뱀파이어들은 서로가 보이지 않는 그물망으로 엮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엔네야드가 출신의 학자들은 결혼을 통해서건 죽음의 키스를 통해서건 이 땅에 존재하는 뱀파이어의 근원이 최초의 뱀파이어인 엔네야드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즉, 엔네야드가는 그물망의 첫 지점에 서 있는 셈이었고 하필 가장 핵심인 아툼가의 장자인 왕이 저주를 받는 바람에 모든 뱀파이어가 인간에게 복종해야만 하는 상황에 빠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현 아툼가의 당주인 루키우스는 어디까지나 중립을 지켜야만 했다.

만약 그가 주인이란 이유로 체터필드 공작을 지지하거나 혹은 반대한다면 왕국의 모든 뱀파이어들이 그 의견에 복종할 거란 의미였다. 그들이 의식하건 의식하지 않든 간에.

“미치겠군.”

루키우스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입술을 짓씹었다. 이런 사정을 앉혀 놓고 구구절절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루키우스 님.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무래도 뒤따라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요.”

티베리우스가 조용히 물었다.

루키우스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 돌려 티베리우스와 슈발리에들을 바라봤다.

당황스럽게도 아이렛을 제외한 전원이 주인 앞에 선 기사의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럴 때면 뱀파이어란 종족은 역시 한 그루의 나무란 생각이 확실히 들었다. 무려 천 년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그를 왕으로 대하는 것을 보면.

루키우스는 어쩐지 어깨가 묵직해져 오는 기분에 힘겨워하며 입을 열었다.

“일단 카운테스 레오폴드의 비위를 맞춰주기로 하죠.”

그리고는 성큼 문지방을 넘었다.

수도에서도 화려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레오폴드가의 살림을 그대로 옮겨왔는지 크리스털 수백 개로 만들어졌을 것 같은 샹들리에가 눈에 딱 들어왔다.

슬쩍 단도를 날려 카운테스 레오폴드의 머리 위에 떨어뜨리고 싶은 생각을 애써 지우며 루키우스는 복도 중간쯤에 서 있는 스칼렛에게 다가섰다.

카운테스가 준비시킨 모양인지 다양한 연령대의 메이드들이 스칼렛을 둘러싸고 있었다.

“당신들은 이쪽이에요.”

카운테스 레오폴드가 복도 끝에 서선 문을 열며 손짓했다.

티베리우스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바로 그곳으로 향했고 루키우스도 마지못해 뒤따르면서 스칼렛을 바라봤다.

스칼렛은 처음에는 모르는 척하려 드나 싶더니 이내 시선이 맞자 미소를 지었다. 부드럽고 따스한, 그의 걱정을 모두 날려 버리는 달콤한 미소였다.

‘체터필드 대공의 사람이라 경계하면서도 날 싫어하지는 않는 모양이군.’

루키우스는 무척 기뻐 마주 미소 지었고 스칼렛은 눈웃음까지 치더니 아차 싶었는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메이드를 따라 복도 중간에 있는 계단을 통해 사라졌다.

루키우스는 이대로 뒤따라 갈까 잠시 고민했고, 그러자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죠?”

고개 돌려 보니 카운테스가 복도 끝에 있는 나무문을 열고 선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루키우스가 걸음을 빨리해 문 앞에 서자 카운테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당신은 여전하네요. 체터필드 대공이 지켜보라고 명령하면 사냥 매처럼 구는 걸 보니.”

그리고는 어서 지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문 너머로 들어서니 양쪽에 사람 키보다 더 높은 벽난로가 붙어 있는 데다가 높은 천장 끝까지 이어지는 긴 창이 한쪽 벽면을 채우고 있는 거대한 홀이 나왔다.

카운테스는 접견실로 쓰일법한 그곳을 그대로 지나쳐 한쪽에 있는 문을 열고 이끌었다.

이번에는 창 하나 없는 어두운 복도가 보였고 전투를 대비한 성답게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일부러인지 카운테스는 입도 벙긋하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고 그러다 불쑥 나타난 계단을 성큼성큼 올랐다.

나선형의 좁디좁은 길을 따라 빙글빙글 이어지던 계단의 끝에는 문이 있었고 그곳에 서고 나서야 카운테스 레오폴드가 말문을 열었다.

“다 왔어요. 당신 주인 때문에 이 성에 갇히다시피 지내게 됐는데 어찌나 좁고 스산한지 아주 죽을 맛이랍니다. 내 아들 리처드가 없었다면 난 아마 미쳐버렸겠죠.”

루키우스는 이미 미친 것 같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그저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그러자 카운테스가 차갑게 웃었다.

“주인이 한 짓을 두고 사냥개를 탓할 생각은 물론 없어요. 순혈이란 결국 불쌍한 똥개일 뿐이니까.”

그러더니 문을 열고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루키우스는 불과 5년 전만 해도 참 순해 보였던 여인이 꽤 독해진 것에 놀라워하며 문지방을 넘었다.

하지만 그곳은 문과 맞은편 벽에 싱글 침대가 놓인 것이 전부인 작디작은 방이었다. 방에는 창이 두 개나 달려 무척 환했지만, 굵직한 쇠창살이 박혀 있었다.

“이게 무슨!”

황급히 돌아섰지만, 카운테스가 한발 앞서 잽싸게 문을 닫아걸었다. 육중한 자물쇠가 채워지는 소리와 함께 카운테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개를 가두도록 특수 설계된 거니까 문을 부수려고 해도 소용없으니 헛짓은 하지 말아요.”

루키우스는 힘을 주어 소리쳤다.

“나를 가둔 걸 대공께서 아시면 당신도 당신의 가족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카운테스 레오폴드는 히스테릭한 웃음을 터트리더니 말했다.

“그러게 누가 아마칼리의 피를 탐하라 했나요? 당신이 레이디 스칼렛을 흡혈한 순간부터 당신 인생은 꼬인 거예요. 엔네야드 경. 그래도 그걸 풀 기회를 드리지요. 침대에 얌전히 있어요.”

잠시 후,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루키우스는 있는 힘을 다해 문을 발로 차봤지만, 카운테스의 단언대로 흔들림조차 없었다. 결국, 문에 등을 대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스칼렛….’

심장이 터질 듯 조여왔다. 체터필드 대공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게 됐다는 걱정보다도 그녀의 안위가 걱정스러웠다.

“제길. 역시 이곳으로 오는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이미 늦었다.

***

스칼렛은 루키우스와 미소를 주고받은 그 순간을 곱씹으며 계단을 올랐다.

걱정에 물들어 있다가 그녀의 미소 한 방에 확 풀어져 환하게 빛나던 루키우스의 얼굴이 어찌나 예뻤던지 눈꺼풀 안에 새겨진 모양이었다.

‘내가 못 살아. 적이 될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 나 대체 왜 이러니?’

속으로 비명을 질러대며 빙글빙글 계단을 돌아 한참을 오르고 나니 드디어 문이 나왔다.

문 너머로는 온갖 예술품으로 가득 찬 복도가 이어졌고 단장을 위한 드레스 룸은 아마도 성의 1층으로 연결될 중앙 계단 근처에 있었다.

스칼렛은 별 기대 없이 들어섰다가 룸의 색다른 풍경에 놀라 입을 떡 벌렸다.

살롱 언니들의 메이드로 다양한 귀족의 집을 방문했지만, 드레스 룸은 하나같이 다 비슷했는데 이곳은 가림막부터 시작해 욕조와 화장대 그리고 거울까지 죄다 머나먼 이국의 것이었다.

게다가 한쪽에는 스칼렛을 위해 준비된 듯 보이는 이브닝드레스가 몇 벌이나 걸려 있었는데 고가의 레이스를 아낌없이 쓴 탓에 고상하면서도 화사했다.

“히야- 이거 한 벌만 집에 보내면 좋겠네. 앤이 꼬맹이들 원피스를 몇 벌은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스칼렛이 가장 레이스가 풍성하게 달린 드레스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리고 있는데 레이디스 메이드가 다가오더니 말했다.

“그 드레스는 로브 아라 프랑세즈 스타일로 진주와 장미를 주조로 한데다 소매는 보시는 것처럼 앙가장뜨, 준비된 페티코트는 팔발라랍니다. 이 중 가장 고가의 드레스로 수도에서 주문 제작한 제품이지요.”

스칼렛은 볼을 부풀렸다. 비록 공녀로 자랐지만, 집안이 워낙 가난해 암시장에서 나도는 낡은 드레스만 사다 입은 터라 정식 명칭 따윈 하나도 몰랐다.

하지만 차마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볼 수가 없어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레이디스 메이드를 바라보자, 그녀는 자글자글한 주름을 접으며 웃더니 덧붙였다.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이 옷으로 하시겠습니까? 피부가 하얘서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요.”

스칼렛은 뭘 입든 상관없다 싶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레이디스 메이드가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죄송합니다만 대체 왜 그런 화장을 하고 계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스칼렛은 뜨끔했다. 크레타 할머니에게 분장술을 배운 이후로 그 누구도 그걸 꿰뚫어 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단박에 알아보다니 놀라웠다.

“아, 음- 그게 그러니까….”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자 레이디스 메이드가 말했다.

“걱정 마세요. 유어 그레이스. 저희 주인마님도 진한 화장으로 얼굴을 감추고 계신답니다. 돌아가신 부군께만 얼굴을 보여드리겠다는 약속을 하셔서요. 낭만적이죠?”

그러고 있는데 장식장이 놓인 벽이 밀리더니 스칼렛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이는 한 남자가 나타났다.

까마귀 깃털처럼 까만 머리에 금빛이 감도는 검은 눈, 전에 봤을 때는 마스크를 쓰고 있어 얼굴을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눈이 마주치자마자 확신할 수 있었다.

‘어제 숲에서 기습해 왔던 바로 그 남자네. 나더러 체터필드 대공에게 살해당할 거라고 경고하던.’

스칼렛이 너무 놀라 숨을 삼키는데 레이디스 메이드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외쳤다.

“리처드 공자님! 이 무슨 무례한….”

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리처드 공자는 다가와 레이디스 메이드의 손목을 덥석 잡더니 문으로 밀려 말했다.

“잠깐만 나가 있어 줘요. 중요한 대화를 좀 나눠야 하거든.”

그리고는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는 젊은 메이드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들은 그것만으로도 신호가 됐는지 군말 없이 줄줄이 방을 나섰다.

결국, 레이디스 메이드가 질렸다는 얼굴로 리처드 공자의 손을 뿌리쳤다.

“너무 오랜 시간은 안 됩니다. 마님께서 같이 오신 손님들과 기다리고 계시니까요.”

“그래. 그래. 알았어. 최대한 빨리 끝낼게.”

리처드 공자는 그녀를 마구 떠밀며 말하더니 빠르게 문밖으로 내몰았다.

그렇게 둘만 남겨지자 리처드 공자는 돌아서더니 한 손을 우아하게 휘저으며 허리를 구부려 인사했다.

“레이디 스칼렛. 제 소개부터 올리죠. 전 카운테스 레오폴드의 장남 리처드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바로 서며 말을 이었다.

“촌수를 따져보면 우린 아마 8촌쯤 될 겁니다. 어머니께서 아마칼리의 혈통이시거든요.”

“네. 그렇게 듣긴 했어요. 플로라 여왕의 사촌 동생이셨다고. 그런데 아마칼리 혈통의 황금색 번쩍임이 보이질 않아서 좀 의아했네요.”

“아! 모르셨군요. 아마칼리 혈통의 미혼 여성이 아이를 낳으면 황금빛이 사라집니다. 모두 다는 아니고 확률은 반반이라더군요. 그런데도 수도에 있을 땐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았죠.”

리처드 공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더니 한쪽에 놓인 의자를 손짓했다.

“앉아서 이야기할까요?”

스칼렛은 손을 들어 거절했다. 그가 친여왕파라 해도 루키우스의 충고대로 속내는 오로지 자신의 안위일 수 있었다.

“아뇨. 서서 하죠. 용건만 간단히 듣고 싶은데요.”

“이거 씩씩한 여왕님이 되실 것 같네요. 그렇다면 용건만 말씀드리죠. 어제 숲에서 봤을 때도 말했지만 이대로 수도로 가시면 체터필드 대공에게 살해당할 겁니다.”

“저는 그렇게 보지 않아요. 절 죽일 거라면 수도로 가는 길에 손을 썼겠죠. 그러니 그는 날 여왕위에 올릴 거예요.”

“흐음- 더러운 개에게 피를 빨리니 정신을 못 차리겠나요? 가는 길에 죽는 거나 대공의 꼭두각시가 되는 거와 같다는 생각은 안 드시나 보군요.”

리처드 공자가 비아냥거렸다. 연못인지 아니면 온천인지는 몰라도 루키우스와 뒹굴던 모습을 몰래 엿본 모양이었다.

스칼렛은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어딜 가나 꼭 있지. 자신들은 거리에서 싸질러도 사내답다고 우기면서 여자에겐 그것이 더럽다 조롱하는 개새끼들이….”

그러자마자 리처드 공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얼굴을 붉히며 창피해하기는커녕 욕설을 흘릴 줄은 상상도 못 한 모양이었다.

스칼렛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공자와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잘 들으세요. 리처드 공자. 내가 원하는 건 내 가족의 안전과 무사예요. 그것만 보장된다면 난 꼭두각시 여왕이 되어도 좋고,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넘긴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리처드 공자는 숨을 들이켜더니 팔을 가슴에 대고 깊숙하게 허리를 숙였다.

“마이 레이디. 당신을 감히 시험해본 저를 부디 용서하시길. 당신의 마음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알아야만 했습니다.”

그저 변명에 불과했지만, 스칼렛은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는 이해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용서하죠. 그래서? 당신이 제시하고자 하는 안은 무엇인가요?”

리처드 공자는 바로 서더니 아까와는 달리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가문에선 아마칼리 여왕께서 정하신 오로지 미혼의 여성만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그 법이 지켜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이 본 왕조의 근원이 되는 약속이니까요.”

“그래요. 알아요. 체터필드 대공이 새 왕조를 열고 싶어 한다는 것도 짐작이 가고. 그래서? 뱀파이어 왕을 풋맨으로 둘 정도로 권세 있는 대공의 의지를 어떻게 꺾겠단 건데요?”

스칼렛은 귀족 특유의 말버릇대로 빙빙 돌려서 말하는 것이 답답해 재촉하듯 물었다. 리처드 공자는 어색하게 웃더니 조심스레 대답했다.

“제 어머님께선 당신과 저와의 결혼이 유일한 해답이라고 생각하십니다.”

“어째서요?”

“말씀드렸다시피 제 어머닌 아마칼리의 혈통이시고 만약 결혼하시지 않았다면 플로라 여왕의 뒤를 이었을 분은 바로 제 어머니셨습니다. 그런 제가 만약 당신과 결혼해 딸을 낳는다면….”

“굳건한 혈통이 뒷받침되니 체터필드 대공이 대를 이어야 한다는 논의 자체가 사라지겠군요. 하지만 만약 제가 딸을 낳지 못한다면요?”

“사실 그건 차후의 문제입니다. 저와의 결혼 자체가 이미 혈통의 결합이니 대공이 당신을 함부로 죽이려 들진 못하겠죠.”

“다시 말하지만 난 내 가족의 안위가 우선이에요. 만약 내 가족을 볼모로 잡고 협박한다면 난 대공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어요.”

“당신이 나와의 결혼을 약속한다면 바로 사람을 보내 당신 가족을 이 성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리처드 공자의 제안은 무척 마음에 들었지만, 스칼렛은 망설였다.

정말 우습게도 오늘 새벽, 루키우스가 귓가에 흘려 넣던 달콤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마이 레이디. 마이 스칼렛.’

동시에 가슴이 뭉근하게 아파 왔다. 암시장 살롱의 언니들이 자주 말해주던 증상 그대로니 이유는 분명했다.

루키우스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그는 체터필드 대공의 사람이었고 아마칼리의 저주에 묶인 뱀파이어였다. 혼자라면 그조차 모두 감당했을 테지만, 가족을 생각하면 포기해야만 했다.

스칼렛은 숨을 크게 들이켜고는 리처드 공자에게 말하려 했다.

‘좋아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혀를 타고 말이 튀어 나가기 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더는 못 기다립니다. 주방에서 연락이 왔는데 서빙이 시작됐답니다. 여왕님께서 오셔야 다들 식사를 시작할 거라고요!”

“알았어요. 들어오도록 해요.”

리처드 공자는 못마땅한 얼굴로 외치더니 스칼렛의 손을 덥석 잡아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

“대답은 식사 후에 듣도록 하죠.”

그러더니 조용히 아까 들어왔던 벽에 달린 비밀 문을 통해 사라졌다.

스칼렛은 지친 기분에 털썩 화장대 앞에 놓인 스툴에 주저앉았다. 그러자마자 레이디스 메이드가 들어섰다.

“유어 그레이스. 서두르셔야 합니다.”

팔을 걷어붙이며 거절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우렁찬 목소리였다.

스칼렛은 졌다는 시늉을 하며 힘겹게 일어섰다.

“네. 네. 원하는 대로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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