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밤의 연못은 가면을 벗는다 (3/16)

2. 밤의 연못은 가면을 벗는다

마차 지붕에 벼락이라도 내리친 듯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연이어 루키우스가 외모를 배반하는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하! 씨발. 정보가 사실이었군.”

그러더니 스칼렛이 반항할 틈도 없이 허리를 그러 안으며 제품에 끌어안았다.

스칼렛은 돌덩이처럼 단단한 근육질의 가슴이 얼굴을 내리누르는 통에 아프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예쁘장하게 생겨서 착각할 뻔했는데 성격은 남자네. 남자.’

그런 생각을 하며 몸에 힘을 풀고 있으려니 로드 슈발리에, 티베리우스의 외침이 들려왔다.

“여왕을 보위하라!”

그러더니 마차가 우뚝 멈춰 섰다.

순식간에 사방이 고요해졌다.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새소리가 바람을 타고 스며들었다가 흘러나갔다.

스칼렛은 루키우스가 구불구불한 칼날이 인상적인 단도를 앞세운 채 창밖을 살피는 것을 지켜보다가 머리 위에서 살기가 날아드는 것을 느끼고는 소리쳤다.

“위!”

그러자마자 지붕에 뭔가가 덜컥 걸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엄청난 소리를 내며 뜯겨나갔다.

물론 루키우스는 그걸 지켜만 보진 않았다.

스칼렛의 외침과 동시에 마차 문을 열더니 번개처럼 빠르게 밖으로 몸을 날렸다.

연이어 그는 스칼렛을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솜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 제 어깨에 걸치더니 그대로 앞으로 뛰어나갔다.

뛰어온 방향 쪽으로 얼굴이 향해 있어 스칼렛은 공격해온 이들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귀족 출신임을 상징하는 진홍색 망토를 두른 그들은 검은 기사복과 얼굴의 반을 가리는 검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드러난 눈동자 색도 머리 색도 저마다 달랐다.

하지만 모두 기사 훈련을 제대로 받은 듯 뱀파이어 슈발리에들과 검을 겨루는 솜씨가 능숙했다.

스칼렛은 숨을 삼키며 막상막하로 이루어지는 결투를 지켜봤고 그러다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루키우스만큼이나 체격이 좋은 그 남자는 까마귀처럼 새까만 머리와 새까만 눈동자를 지녔는데 햇살에 금빛이 어른거리는 걸 보니 아마칼리의 피가 섞인 친척이 분명했다.

칼솜씨 또한 가장 우월한지 공격해오는 슈발리에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막아내며 스칼렛을 향해 외쳤다.

“레이디 스칼렛. 이대로 끌려가시면 체터필드 대공에게 살해당하실 겁니다!”

스칼렛은 숨을 들이켰다.

‘아, 젠장. 제발 아니기를 바라던 최악의 상황이 맞구나. 왕국의 재상인 그자가 정말로 마지막 계승권자인 날 죽이고 새 왕조를 열려는 속셈인 거야.’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에 남자에게 자세히 캐묻고 싶었지만, 루키우스가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허벅지에 두른 팔에 단단히 힘을 주는 통에 포기해야만 했다.

그도 모자라 슈발리에들이 달려와 남자와의 사이를 잽싸게 막아섰고 티베리우스가 마차에 흑마를 묶어 놓은 끈을 자르더니 그중 한 마리를 끌고 달려와 루키우스에게 건넸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미리 약속되어 있었는지 루키우스는 스칼렛을 말 위에 먼저 앉히고는 뛰어올라 뒤쪽에 자리 잡았다.

단숨에 눈높이가 훅 올라갔고 다리 사이에 와 닿는 매끈한 감촉 아래에선 말의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눈앞으로는 숲 사이에 난 오솔길이 쭉 뻗어 있었다.

스칼렛이 뭐라 할 틈도 없이 루키우스는 말고삐를 부드럽게 당겼다. 그것만으로도 신호가 됐는지 흑마는 땅을 세차게 박차며 달려나갔다.

꺅!

스칼렛은 거센 반동에 깜짝 놀라 휘청거렸고 루키우스가 한쪽 팔로 허리를 둘러 제 몸에 바짝 끌어안으며 중심을 잡아줬다.

자연스레 엉덩이에 루키우스의 하반신이 와 닿았다. 갑자기 어젯밤 일이 떠오르며 무진장 불편해졌다.

“말 타본 적이 없으신 것 같은데 안장이 없어서 이렇게 붙어 앉아야 안전합니다.”

루키우스가 달래듯 속삭이더니 말고삐를 내리쳤다. 눈 깜짝할 새에 달리는 속도가 더더욱 빨라졌다.

아까 마차에 타고 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나무들이 뒤로 물결치며 멀어져갔다.

말의 근육이 만들어내는 율동 때문에 민망하게도 그의 하반신이 엉덩이에 자꾸 문질러졌다. 그러다 보니 건강한 사내라면 보일듯한 반응이 시작됐다.

스칼렛은 점점 단단해지면서 크게 부풀어 오르는 느낌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허리를 비틀다가 루키우스가 색기가 감도는 한숨을 내쉬는 통에 그만두고 말았다.

‘으음. 더 자극했다간 일 나겠어.’

결국, 스칼렛은 모르는 척하기로 결정을 내렸고 그러자마자 졸음이 밀려왔다.

어젯밤 그 소동을 겪고 난 뒤 꿋꿋하게 밤새도록 일을 했고 집에서 눈도 못 붙이고 떠나왔으니 당연했다.

그래서인지 꾸벅꾸벅 졸기를 수차례, 어느 순간 고개가 저절로 옆으로 넘어갔다.

달리는 말 위에서 이러다니 무척 위험하다 싶었지만, 곧바로 루키우스의 통나무처럼 단단한 팔뚝이 머리에 와 닿았다.

좀 딱딱하긴 해도 근육 특유의 온기가 느껴져 감촉이 나쁘진 않았다.

애초에 스칼렛은 잘 수만 있다면 어디서든 잘 수 있는 삶을 살아왔기에 금세 편안해졌다.

“아, 따뜻해.”

버릇대로 루키우스의 팔을 제 베개라도 된 듯 볼로 비비적대다가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굉장하군. 이 상황에 잠이 오다니.”

얼핏 루키우스의 읊조림이 들려왔지만,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스칼렛은 루키우스의 품에 폭 안긴 채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실컷 자고 눈을 떴을 땐 이미 해가 진 뒤였다.

바로 옆에는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스칼렛은 기사단의 보라색 망토를 깔고 덮은 채 바로 누워 있었다.

슬쩍 눈만 돌려 주변을 살피니 슈발리에들이 여기저기 앉아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거나 아마도 술이 들었을 작은 병을 돌려가며 마시고 있었다.

으음-

잠결인 척 낮게 신음하며 옆으로 돌아누워 보니 모닥불 맞은 편에 티베리우스와 루키우스가 나란히 앉아 나뭇가지로 땅 위에 뭔가를 그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쪽 길은 산사태가 나서 현재 막혔더군요. 아마도 그자들이 인위적으로 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므로 갈 길은 앞서 말한 대로 하나뿐인 상황인 것 같습니다.”

티베리우스가 소곤거리자 루키우스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손에 든 나뭇가지를 탁탁 쳐대며 신음하듯 말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카운테스 레오폴드의 영토로 토끼몰이를 하려는 것 같군요. 하긴 레오폴드 가는 대대로 친여왕파의 수장 같은 가문이었죠.”

“현재 공작위를 이어받은 분은 돌아가신 레오폴드 공작의 부인이라 들었는데요. 플로라 여왕의 사촌 동생이시라고.”

“플로라 여왕 같은 인자함을 기대해선 안 됩니다. 레오폴드 공작이 본가를 수도에서 이곳으로 옮긴 건 체터필드 대공 때문이었거든요. 그로 인한 화병으로 돌아가셨죠.”

“아. 기억납니다. 여왕의 아들은 성년이 되면 무조건 수도를 떠나는 것이 원칙인데 그걸 지키지 않는다며 체터필드 대공을 왕실 법정에 고소했다가 그리되셨죠.”

“그랬죠. 그러니 그녀의 성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결코 호의가 아닐 겁니다.”

루키우스는 두꺼운 나뭇가지를 한 손으로 꺾어 모닥불에 집어넣더니 스칼렛과 눈을 맞췄다.

“잘 주무셨습니까? 마이 레이디?”

스칼렛은 몰래 엿듣고 있었던 걸 언제부터 안 걸까 싶어 어색하게 웃으며 일어나 앉았다.

“아, 네. 회의 중이신 것 같아서 방해하지 않으려고….”

“전 또. 아까 그 좆같은 새끼가 던진 거짓말에 혹시나 마음이 흔들리신 건 아닌가 했네요.”

루키우스는 일부러인 게 분명한 미소 띤 얼굴로 좆이란 단어에 강세를 주며 말했다.

“어머나. 바람피운 애인 다그치듯 말씀하시네요. 우리가 그럴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스칼렛은 살벌한 미소로 받아주며 대답했다. 그러자 티베리우스가 허둥대며 끼어들었다.

“마이 퀸. 배고프시진 않습니까? 보잘것없지만 토끼 스튜를 끓여놨는데요.”

“그거 감사하네요. 토끼고기 못 먹어본 지도 오래됐는데.”

스칼렛은 작게 손뼉까지 치며 환호했다. 자느라 반나절 넘게 꼬박 굶은 셈이니 뱃가죽이 등에 붙을 지경이었다.

티베리우스가 알뜰하게 챙겨준 말린 빵을 스튜에 듬뿍 잘라 넣고는 스칼렛은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아주 맛있게 먹어 치웠다.

그러는 사이 루키우스는 뭔가 살펴볼 것이 있는지 말없이 일어나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칼렛은 토기 스튜를 배가 두둑해질 때까지 먹어댔고 냄비를 통째로 비우고서야 끝을 맺었다. 그러고 보니 슈발리에들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제가 너무 게걸스럽게 먹었나요?”

스칼렛이 냄비를 깔끔하게 닦은 마지막 빵조각을 씹으며 묻자 칼을 닦고 있던 티베리우스가 점잖게 말했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저 녀석들은 제 앞에서 공기만 먹고 사는 것처럼 구는 여인들만 봐서 저러는 겁니다. 그것이 연극일 거라고는 짐작도 못 할 만큼 애송이들인 거죠.”

그러면서 슬쩍 눈총을 쏴대자 슈발리에들이 정신이 든 듯 당황한 얼굴로 이리저리 흩어졌다.

스칼렛은 피식 웃었다. 루키우스만큼은 아니어도 다들 나름 근사한 외모와 사내다운 몸을 지닌 자들이니 그동안 어땠을지 안 봐도 뻔했다.

하긴 암시장을 찾는 음유시인들의 노래 중 가장 인기가 높은 건 끝내주게 잘난 뱀파이어 하인과 지체 높은 귀족 가문 여인의 이룰 수 없는 사랑 이야기였다.

특히나 음유시인들은 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존재하는 뱀파이어 명가의 이름을 들먹이며 그들의 외모를 찬탄하는 데 적어도 십분 이상을 할애했다.

그들이 어떤 지체 높은 귀족을 모시고 있으며, 어떤 재주를 지녔는지 설명을 곁들이며.

바로 그 노래 속 주인공들이 이곳에 나타난 셈이니 저들에게 스칼렛은 잘못된 만남이었다.

그렇다고 굳이 분장을 지워 그들에게 기쁨을 주고 싶진 않았기에 스칼렛은 슬쩍 제 피부를 문질러 보았다.

역시나 하루가 꼬박 지나 붓기가 많이 빠졌다. 이대로라면 내일 아침이면 제 얼굴형으로 돌아와 있을 확률이 지극히 높았다.

“저기 혹시 이 근처에 씻을 곳이 있을까요?”

일부러 몸을 긁적대며 묻자 티베리우스가 뒤를 눈짓하며 말했다.

“아까 정찰하던 중에 폭포 비슷한 게 있는 걸 봤습니다. 주변에 인가도 없으니 그곳에서 씻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만.”

“그래요? 얼른 가서 씻고 올게요.”

스칼렛은 좋아하며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티베리우스가 옆에 놓인 가방을 열어 도톰해 보이는 담요와 면으로 된 천이 접힌 것을 건넸다.

“새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깨끗이 세탁된 것이니 수건으로 쓰십시오.”

그러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 선 슈발리에를 보며 말했다.

“아이렛. 따라가서 망을 보도록. 그리 멀지 않으니 휘파람만으로도 충분히 신호가 될 거다.”

아이렛이라 불린 금발에 푸른 눈을 지닌 슈발리에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스칼렛이 바라보자 미소를 지었다.

스칼렛은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그 미소에 찝찝해졌지만, 뭐라 할 말이 없어 얌전히 뒤쪽에 있는 나무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폭포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가느다란 물줄기가 졸졸 떨어지는 낮은 절벽처럼 생긴 그곳은 물줄기가 모여 만들어진 커다란 연못이 있어 씻기는 편해 보였다.

게다가 물이 맑아서 그렇지 달빛에 어른거리는 물고기들의 크기를 봐선 깊이도 제법 깊었다.

스칼렛은 만족스러워하며 손을 넣고 휘젓다가 두어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아이렛을 바라봤다.

순혈 뱀파이어들은 오랜 세월 젊음을 유지하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팍 늙으니 나이는 가늠이 되질 않았지만, 눈빛을 보아하니 20대 후반쯤 되어 보였다.

혈기왕성한 사내를 등 뒤에 두고 씻으려니 영 내키지 않았지만, 아마칼리 혈족의 명령은 반드시 지키도록 만든다는 ‘여왕의 저주’를 믿어보기로 했다.

“굳이 이 근처에 있을 필요는 없으니 저기 보이는 나무에 가서 등 돌아 서주실래요?”

“기꺼이 그러죠. 마이 퀸.”

아이렛은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성큼성큼 스칼렛이 원한대로 숲 어귀에 있는 나무 사이에 가서 서더니 보란 듯이 등을 돌렸다.

스칼렛은 여왕의 저주가 통한 것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어 고민스러웠지만 차갑고 맑은 물에 몸을 담그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잽싸게 옷을 벗어 던졌다.

풍덩!

단박에 뛰어들자 이슬처럼 맑으면서도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피부에 부드럽게 감겨들었다.

스칼렛은 예상보다 훨씬 깊은 연못 위를 서너 번 맴돌며 만끽한 뒤 물가로 나와 상반신만 드러낸 채 치마 속에 숨겨 뒀던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주머니 안에는 분장에 사용되는 화장품과 약 그리고 그걸 깨끗하게 지우는데 쓰는 비누가 들어있었다.

수도에서는 어떨는지 몰라도 스칼렛이 사는 항구 마을에서 비누는 사치품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암시장의 잘나가는 살롱 언니들에겐 필수품이었고 덕분에 스칼렛은 계절마다 얻어쓰는 물건 중 하나였다.

“후- 향기 좋아.”

비누를 손에 문질러 거품을 만들자 친숙한 장미 향기가 번져 올랐다.

밀수품 중 하나인 장미 오일로 만든 건데 새벽에 막 핀 산뜻한 장미 향이 특징이었다. 그 향기를 한껏 들이키니 어젯밤부터 시작된 대소동이 꿈결처럼 느껴졌다.

스칼렛은 만족스러워하며 거품으로 얼굴부터 머리와 몸까지 열심히 문질러댄 뒤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 아래 서서 천천히 씻어냈다.

비누 거품에 든 장미 오일에는 해독 성분이 있어 얼굴의 부기가 마저 확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슬쩍 목덜미를 만져보니 오늘 아침까지 희미하게 남아 있던 잇자국이 완전히 사라졌다.

‘뱀파이어의 침에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는 뭔가가 든 모양이네. 신기해라.’

그런 생각을 하며 제 얼굴로 돌아오는 기분을 만끽하고 있는데 슈발리에가 서 있을 나무 사이에서 뭔가 두들겨 패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오더니 연이어 뭔가가 풀썩 쓰러졌다.

스칼렛은 깜짝 놀라 물줄기 사이로 몸을 숨기며 그곳을 바라봤지만, 달빛 아래 있어서인지 상대적으로 너무 어둡게 보여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불현듯 낮에 봤던 그들이 기습이라도 해온 걸까 싶어 바짝 긴장감이 일었다.

‘윽. 어떡하지? 옷을 집으러 움직여도 될까?’

***

루키우스는 스칼렛이 주변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입을 크게 벌리며 토끼고기 스튜와 빵을 먹어치우는 모습을 바라보며 몸을 떨었다.

‘내가 저런 여자에게 마음이 끌리다니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해. 아무리 피 맛이 달콤해도 그렇지.’

그러자 헛웃음이 입가에 고였다.

아까 둘이서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도망치면서 루키우스는 인생 최고의 고난을 겪었다.

둥글게 부푼 엉덩이는 자꾸 앞을 문질러대지 그의 팔에 기댄 덕분에 훤히 드러난 목덜미는 햇빛을 받아 뽀얀 빛을 내며 어서 먹어달라 유혹했다.

그도 모자라 스칼렛은 자꾸 그의 가슴팍으로 파고들며 끙끙거리는 데 미칠 지경이었다.

이대로 말을 멈추고 어딘가 보이지 않는 수풀로 끌고 들어가고 싶은 끔찍한 생각이 자꾸 떠올라 입안이 바짝 말라올 정도였다.

루키우스는 그런 자신의 욕정을 누르느라 필사적이었고 티베리우스가 슈발리에들을 이끌고 쫓아왔을 땐 대전투에서 승리한 기분까지 느꼈다.

하아-

갑자기 아까의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져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면서 흘끔 주변을 살피니 티베리우스를 제외한 슈발리에들이 다들 넋 나간 얼굴로 스칼렛을 보고 있었다.

후루룩 쩝쩝, 꺼억- 스칼렛이 만들어내는 온갖 소리가 그들 사이에서 독을 품은 안개처럼 퍼져 나갔다.

‘사내의 욕정이 뚝뚝 꺾여나가는 소리가 들려오는군. 제아무리 주인의 명령이라 해도 혹할만한 뭔가가 있어야 뭘 어쩌던가 할 텐데.’

루키우스는 갑자기 웃음이 솟구치는 기분에 벌떡 일어서서 근처 나무 사이로 들어섰다. 성큼성큼 한참을 걷고 나자 꾹 눌러 참았던 웃음이 팍 터졌다.

미친 듯이 웃다 보니 아까 자신의 바보 같았던 충동조차 우스워져 배를 잡고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그렇게 실컷 웃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후- 돌아가야겠군.”

루키우스는 차오른 숨을 길게 몰아쉬며 천천히 나무 사이를 걸어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만월이 가까운 탓에 달빛이 무척 강해 사방이 환했다. 루키우스의 발소리에 놀란 야행성 동물들이 도망치는 기척이 여기저기서 느껴졌다.

그 옛날, 인간들이 그랬던 것처럼 동물들은 여전히 뱀파이어를 두려워했다. 그들의 피는 먹지 못하기에 관심조차 없는데도 완벽하게 다른 종족으로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루키우스는 어린 시절 새를 무척 좋아했지만 언제나 도망치거나 미친 듯이 새장 안을 날다가 죽어버리던 일들을 떠올리며 정처 없이 걸었다.

그러다 달빛을 머금은 가느다란 물줄기 아래 한 여인을 보았다.

피부가 본래 하얀지 청색의 달빛 아래 은빛으로 반짝거렸고 허리까지 늘어진 머리는 어둠을 품어 진한 와인색을 띠고 있었다.

가느다란 팔다리에 어울리지 않는 풍만한 가슴과 둥글게 부푼 엉덩이가 눈에 확 들어왔다. 반면에 허리는 너무 가늘어서 한 줌도 되지 않아 보였다.

“요정인가?”

루키우스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그럴 리가 없다는 사실에 아차 싶어 돌아서려 했다.

바로 그 순간 그녀가 두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살짝 좌로 돌아섰다.

달빛 아래 하트 모양의 작은 얼굴이 환히 드러났다. 피부는 하얗고 말간 데다 동그란 이마와 오뚝한 코 그리고 오동통한 입술이 사랑스러웠다.

손으로 물기를 털어내자 치켜뜬 쌍꺼풀이 진 커다란 두 눈은 맑은 초록색이라 달빛 아래서도 강렬하게 빛났다.

언뜻 희고 가느다란 목덜미에 손톱만큼 작은 호리병 목걸이가 걸린 것이 보였다.

그걸 본 순간 심장이 쿵, 뛰었다.

루키우스는 돌아서려던 것조차 잊고 제 턱을 세게 문지르며 신음했다.

“뭐지? 보석도 아닌데 왜 저렇게 반짝이는 것처럼 보이는 건지 모르겠군.”

그러다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뒤늦게 떠올라 고개를 확 돌렸다.

쓸데없는 짓은 그만두고 야영 장소로 돌아가야겠다 싶어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데 나무가 만든 어둠 아래 서 있는 아이렛이 보였다.

다른 슈발리에들은 사교 파티에서 몇 번 본 것이 전부였지만 아이렛은 엔네야드 아홉 가문 중 세트가 출신인 데다 동갑내기로 어린 시절부터 아는 사이였다.

게다가 체터필드 대공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필립 후작의 풋맨이기도 하다 보니 이래저래 함께 한 일이 많았다.

하지만 우습게도 둘은 친해지질 못했다. 이유는 알지 못했다.

만날 때마다 루키우스의 지나친 금욕과 대공의 명령에 개처럼 복종한다는 사실을 비웃는 거로 봐선 그 점이 문제인 것 같았다.

그래도 어찌어찌 지내왔는데 아이렛이 평소보다 더욱 느끼한 얼굴을 달빛에 드러내며 뒤돌아서려는 걸 보니 기분 나쁜 예감이 피어올랐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루키우스가 그가 선 어둠 속으로 성큼 걸음을 옮기며 날카롭게 묻자 돌아보려던 아이렛이 멈칫하더니 그제야 알아차렸다는 듯 바라봤다.

인간과는 달리 뱀파이어는 밤조차 낮처럼 볼 수 있으므로 설령 달빛이 없어 어둡다 해도 별문제는 되지 않았다.

“뭐하긴. 우리의 사랑스러운 여왕님께서 목욕하는 동안 망을 봐달라 하셔서 충실히 그 명령을 수행하는 중이지.”

아이렛은 뻔뻔한 얼굴로 대답했다.

순간 루키우스는 심장이 세차게 뛰어오르는 걸 느꼈다.

‘스칼렛? 저 미녀가 스칼렛이라고?’

말도 안 된다 싶었지만 마차 안에서 검붉은색 입술 아래로 살며시 드러났던 딸기색 입술이 떠올랐다. 그때 스칼렛은 다시 바르지 않아 지워졌다며 쩔쩔맸었다.

루키우스는 숨을 크게 들이켜 제 동요를 숨기고는 말했다.

“그러면 얌전히 망이나 볼 것이지 왜 훔쳐보려 하는 건데?”

그러자마자 아이렛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더니 툴툴댔다.

“동정인 네가 알 리 없겠다만 남자란 시각적 자극을 받아야 서는 법이거든. 이렇게라도 해보려는 나 자신이 참 기특할 지경이라고.”

“하! 네 녀석이 말하는 동정의 범위가 뭔지 모르겠군. 여인의 몸에 사정을 몇 번이나 해봤냐를 자랑하기 전에 마음으로 사정한 적이 있는지를 따져보지 그래? 한 번이라도 있나?”

“어차피 노예 신세인데 마음으로 하고 말고를 따지는 네가 우습군. 마음으로 가면 어찌할 건데? 네 주인이 거절하면 넌 그 여자와 헤어져야 해. 그게 좆같은 우리 운명이라고.”

“바보 같군. 외교술이란 단어를 모르는 건가? 만약 나에게 그런 여자가 생긴다면 대놓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기꺼이 그 여자를 나와 엮어주도록 만들 거다.”

“역시 넌 마음에 안 들어. 체터필드 대공의 더러운 점을 고스란히 따라 하려 들다니.”

“손이 더러워지는 걸 두려워한다면 소중한 것도 지키지 못하는 법이지. 애초에 그게 싫어서 하지 않는다면 소중한 것이 아닐 테고.”

“빌어먹을. 그놈의 정론, 당장 닥치지 못해!”

아이렛이 성을 내며 주먹을 휘둘렀다. 루키우스는 가볍게 받아냈고 아이렛이 더더욱 화를 내며 무릎으로 올려 찼다.

슬쩍 몸을 뒤로 빼 피하는데 아이렛의 주머니에서 뭔가가 튀어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새끼손가락만 한 크기의 길고 가는 유리병으로 가운데가 막혀 있어 두 가지 종류의 약재를 담을 수 있었는데. 반은 비어 있고 나머지 반에는 분홍색 물이 들어 있었다.

루키우스는 한 번도 산 적이 없지만, 사교계의 꽃들이 먹이려고 든 적이 몇 번이나 있어 익숙한 물건이었다.

비로소 아이렛이 10대 시절처럼 난데없이 왜 주먹질을 해대는지 이해했다. 현재 아이렛은 즉효성 미약을 먹고, 흥분상태였다.

“나머지 반은 여왕의 몫이겠군. 그치?”

루키우스의 물음에 아이렛은 멈칫하더니 조금 전까지 장난처럼 휘두르던 주먹이 아닌 진심이 담긴 자세를 취하며 공격해 왔다.

아무래도 아이렛 본인의 의지가 아닌 그의 주인인 필립 후작의 명령에 따라 한 짓인 게 분명했다.

그동안 필립 후작은 체터필드 대공이 그저 즐거워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위에 오른 여왕의 마음을 농락할 사내를 보내는 걸 반복했으니까.

그렇다면 말로 설득은 불가능했다.

루키우스는 어린 시절부터 소양 삼아 연마해왔던 킥복싱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아이렛을 발차기 한 번, 주먹 한 방으로 기절시켰다.

그대로 털썩, 무릎을 꿇고 앞으로 쓰러지는 녀석을 받아 대충 근처 나무 아래에 던져놨다.

그러고 보니 스칼렛이 겁먹은 얼굴로 물줄기 아래 몸을 숨긴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본 장면이 꿈이 아닌 듯 달빛 아래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요염하고 고혹적이었다.

‘지금까지 본 모든 여왕 중 가장 미인이로군. 아이렛이 저 얼굴을 봤다면 강제로라도 하려 들었을지도.’

그렇게 중얼거리다 보니 문득 희고 가느다란 목이 눈에 들어왔다. 목에 걸린 호리병 목걸이에 무슨 마술이라도 걸린 건지 무척이나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분명 토끼 스튜를 미친 듯이 퍼먹는 걸 보고는 연기처럼 사라졌던 충동이 다시 불끈 일었다. 송곳니가 슬며시 길어지며 하반신이 뻐근해졌다.

루키우스는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혀로 송곳니를 할짝댔다. 달콤한 피, 달콤한 얼굴, 달콤한 몸. 뭐든 다 달콤할 것처럼 생겼다.

그렇게 끓어오르는 충동에 허덕이고 있는데, 스칼렛이 그가 선 어둠을 향해 조심스레 소리 내 불렀다.

“아이렛 님?”

***

스칼렛은 잽싸게 폭포 밖으로 뛰어나가 옷을 주워 입을까 고민하다 포기하고 어둠을 향해 조심스럽게 호명했다.

“아이렛 님?”

그러자 황당하게도 들려온 건 루키우스의 목소리였다.

“아이렛은 보냈습니다. 제가 있을 테니 안심하고 계속 씻으셔도 됩니다.”

스칼렛은 잠깐 망설였다. 솔직히 아이렛보다 루키우스가 그곳에 서 있는 것이 더 찝찝했다. 하지만 거품투성이라 그냥 나가기도 난처했다.

“하여간에 사내들이란….”

살롱 언니들이 곧잘 하는 말을 중얼거리며 연못으로 자리를 옮겨 마저 거품을 씻어냈다. 구석구석 깔끔하게 닦고 나자 기분이 아주 개운해졌다.

스칼렛은 물가에 놓아둔 수건을 꺼내 머리를 감싼 뒤 담요로 몸을 감았다. 그런 뒤 주머니를 열고 거울을 꺼내 들었다.

역시나 비누 덕분에 깔끔하게 분장이 지워져 본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암시장의 마담들이 가리고 다녀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할 정도의 미모였지만 스칼렛은 사실 자기 얼굴이라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솔직히 루키우스가 더 예쁘게 생긴 것 같은데….’

속으로 중얼거리며 슬쩍 거울에 달빛을 받아 나무 사이를 비추니 동그란 반사광에 루키우스의 널찍한 등이 드러났다.

스칼렛은 안도하며 빠르게 손을 놀려 다시금 분장을 시작했다.

피부를 얼룩덜룩하게 만들어주는 크림을 바른 뒤 눈꺼풀에 피부를 붓게 하는 약한 독이 섞인 아이섀도를 칠했다.

그런 식으로 꼼꼼하게 화장을 마치고 나니 적어도 3일은 끄떡없을 못난 얼굴이 완성됐다.

어제저녁 화장을 한 번 더 하려는 찰나에 루키우스를 발견하는 바람에 미처 이에 검은 칠을 못 한 게 아쉬웠다.

하긴 그것까지 했다면 슈발리에 중 몇 명은 도저히 이런 여왕은 섬길 수 없다며 도망쳤을 것 같았다.

스칼렛은 생각만 해도 즐거워져 쿡쿡, 소리 내 웃고는 수건과 담요를 벗어 던진 뒤 온몸에 달빛을 받으며 원피스를 다시 갖춰 입었다.

속옷은 주머니 안에 비상용으로 몇 벌이나 들어있기 때문에 갈아입고 입었던 것은 돌 사이에 끼워 넣었다. 변태보단 제발 쥐가 먼저 발견하기를 바라며.

“끝났어요.”

돌아서서 어둠을 향해 외치자 기다리고 있었던 듯 루키우스가 달빛 아래로 조용히 걸어 나왔다. 표정은 담담해 보였지만 눈동자가 파도처럼 일렁거려 살짝 위험해 보였다.

스칼렛은 멈춰선 채 그가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봤어요?”

루키우스가 허를 찔린 듯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손으로 거칠게 제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분장은 왜 하는 겁니까?”

“혹시 아이렛도 봤어요?”

스칼렛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되묻자 루키우스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고개를 저었다.

“녀석이 보려 하기에 실컷 패줬습니다.”

“흠- 등 돌리고 있으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아마칼리 여왕의 저주가 듣는 게 있고 안 듣는 게 있나 봐요?”

“여왕의 저주에 대해 제대로 모르시는군요. 명령은 곧 족쇄입니다. 다수의 명령이 내려지면 수십 개의 족쇄를 차게 되는 셈이죠. 그러면 어떨 것 같습니까?”

“…걷기가 힘들어지는 건 아니죠?”

“비슷합니다. 동작이 굼뜨게 되죠. 따라서 순혈 뱀파이어를 하인으로 거느린 귀족가에서는 오로지 하나의 족쇄만 채웁니다.”

“그게 뭔데요?”

“누가 주인이 될지 결정한 뒤 오로지 주인의 말에만 충성토록 맹세시킵니다. 다른 아마칼리 혈족의 명령 따윈 듣지 않게끔 족쇄를 채워놓는 거죠.”

“즉, 당신을 비롯한 슈발리에들이 내 명령 따윈 듣지 않는다는 거군요.”

“본질은 그렇지만 그들은 당신의 신하입니다. 따라서 우선순위에서 밀릴 뿐 효과는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렛이 보지 말라고 했는데도 보려 한 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목적이 있었다는 겁니다.”

“하아- 못생긴 여왕의 몸매 감상이 목적이라니 우습네요.”

“얼굴보단 몸매에 흥분하는 사내도 있는 거 모르십니까?”

“슈발리에가 여왕한테 흥분해서 뭘 어쩌겠다고요.”

스칼렛이 어이없어하며 웃자 루키우스가 얼굴을 찡그리더니 빤히 바라봤다. 그 시선에 담긴 답이 너무 분명해 스칼렛은 황당해하며 물었다.

“설마 슈발리에가 여왕을 막 덮쳐도 되는 거예요?”

“그랬다간 저주가 그의 심장을 얼려버릴 겁니다. 그저 여왕은 슈발리에를 제 침대로 데리고 갈 수 있습니다. 사실 슈발리에들의 궁극적인 목표기도 하죠. 여왕의 애인이 되는 것.”

“남편이 아니고요?”

“남편은 여왕의 정치적 이익에 따른 사회적 파트너입니다. 하지만 애인은 개인적 파트너죠. 현왕으로 불렸던 플로라 여왕 또한 평생을 함께한 슈발리에가 있었거든요.”

“즉, 아이렛은 얼굴이 안 되니 몸매라도 되면 의욕이 좀 날 것 같아서 훔쳐보려 했단 거군요.”

“그런 셈이죠. 하지만 녀석들이 당신의 진짜 얼굴을 본다면….”

루키우스는 말하다 말고 손을 들어 제 턱을 벅벅 문질렀다. 짜증 어린 표정에 스칼렛은 웃음을 터트렸다.

“왜요? 당신도 내 애인 후보가 되고 싶어서 그래요?”

***

루키우스는 제멋대로 움직이려는 혀를 다잡으려 이를 악물었다.

“왜요? 당신도 내 애인 후보가 되고 싶어서 그래요?”

스칼렛의 질문을 듣는 순간 자신의 지위조차 잊고 하마터면 그렇다고 대답할 뻔했다. 비로소 자신의 진심을 자각한 것 같았다.

외모와는 상관없이 스칼렛의 달콤한 피가 그의 몸 안으로 스며든 그때부터 뱃속에 자리를 잡고 앉아 틈만 나면 고개를 드는 충동의 이름.

‘이 여자를 내 것으로 삼고 싶다.’

그야말로 고뇌하고 있는데 스칼렛이 당황한 듯 그의 팔을 세게 때리며 말을 이었다.

“뭐가 됐든 난 당분간 내 얼굴을 드러낼 생각이 없어요. 이래저래 쓸모가 많다는 걸 몸으로 익혀왔거든요.”

아무래도 그가 진심으로 받아들일까 봐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루키우스는 기분이 팍 상했고, 스칼렛이 기분을 풀어주려는지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해줘요. 이 건에 대해선 따로 사례하도록 할 테니.”

그러더니 맹수에게 쫓기는 토끼처럼 빠르게 가버리려 했다.

루키우스는 기가 막혔다. 속이 부글부글 끓으며 제 송곳니가 슬그머니 길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광폭한 충동이 목덜미에 쭈뼛 서렸고 그건 곧 말이 되어 튀어 나갔다.

“사례는 됐고 그냥 피 한 번 빨게 해주시죠.”

마치 그 말에 발이 걸린 것처럼 스칼렛은 비틀거리더니 뒤돌아서서 얼굴을 마주했다. 곤혹스러운 그녀의 표정이 사랑스러웠다.

루키우스는 제 송곳니를 혀로 할짝대며 미소 지었다. 스칼렛이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좋아요. 피만 빨겠다고 약속한다면요.”

그러더니 일단 무사히 왕궁에 도착하면 어쩌고 하는 그런 말을 덧붙인 것 같지만 한발 늦었다.

루키우스는 몸 안에서 터져 오르는 본능 그대로 맹수처럼 그녀를 덮쳤다.

“꺅!”

짤막한 비명에 아랑곳하지 않고 스칼렛을 연못가의 부드러운 풀 위에 눕히며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장미 향이 솔솔 나는 부드러운 피부가 입술에 와 닿았고 쭉 들이켜자 심장이 저릴 정도로 달콤하고 신선한 피가 빨려 들어왔다.

쿵쿵쿵-

스칼렛의 심장이 미친 듯이 박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루키우스는 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이를 거두고는 헐떡이며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분장으로 괴상해진 얼굴이었지만 맑은 초록색 눈동자는 똑같았다.

눈으로 핥듯이 바라보다 시선을 그녀의 목덜미로 내렸다. 아까부터 시선을 끌었던 호리병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자력에 이끌린 듯 입을 맞추려고 하는데 스칼렛이 손을 뻗어 그의 목덜미에 두르더니 잡아끌었다.

강한 힘도 아니건만 마술에 걸린 듯 이끄는 대로 그녀의 검붉은 입술에 키스했다.

색깔 때문에 미처 몰랐는데 입술이 참 보들보들했다. 게다가 아까 봤던 대로 정말 통통해서 정신없이 아랫입술을 쭉쭉 빨다가 혀를 밀어 넣었다.

금세 피만큼이나 달콤한 맛이 느껴졌다.

루키우스는 정신없이 그녀의 입안을 휘저으며 키스를 즐겼다.

수많은 여인이 그에게 입을 맞추고 혀를 밀어 넣고 빨아댔지만 이런 감각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저 작고 몰캉한 살덩이를 빨고 있을 뿐인데 온몸에 전기가 튀는 기분이었다.

짜릿하면서도 달콤한 감각이 혀끝을 맴돌다가 바로 하반신으로 직격타를 날렸다. 루키우스는 애달픈 감각에 몹시도 괴로워져 그녀의 허벅지에 대고 슬며시 문질러댔다.

스칼렛이 마치 고양이처럼 갸릉갸릉 하며 신음했다.

루키우스는 입술을 거두고는 다시 그녀와 눈을 맞췄다. 스칼렛이 다소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툴툴댔다.

“피만 빤다고 약속해놓곤….”

“아, 그렇군요. 그걸 잊었군요.”

루키우스는 기쁘게 대답하고는 스칼렛과 다시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그녀의 혀를 제 혀로 돌돌 말아 끌어내 송곳니를 박았다.

그런 채로 쭉 빨아들이자 스칼렛의 숨소리가 달큼해졌다. 흡혈이 주는 쾌감이 그녀의 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게 느껴졌다.

따라서 몸이 달아오르며 바지 안을 두둑하게 채운 성기가 아플 정도로 단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루키우스는 그녀의 말캉한 허벅지에 대고 비비적거리며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달래려 애를 썼다.

하아-

욕정이 치솟는지 그녀가 다리를 활짝 열며 그를 자신에게로 끌어가려고 애를 썼다.

그 또한 제대로 탐닉하고 싶었지만, 족쇄처럼 작용하는 여왕의 저주가 그의 욕정을 내리눌렀다.

루키우스는 살며시 이를 거두고는 조그맣고 앙증맞은 그녀의 귓불을 핥으며 소곤거렸다.

“마이 레이디. 대공에게 저를 달라 청하세요. 지금의 난 당신을 안을 수가 없으니.”

그러자마자 스칼렛이 정신이 번쩍 든 듯 그를 두 손으로 밀쳤다. 하지만 체격 차이가 워낙 커서 그저 느낌뿐이었다.

루키우스는 작게 소리 내 웃으며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언뜻 화장이 묻어나는 기분이 들었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놔줘요.”

스칼렛이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루키우스는 몸을 일으켜 그녀 옆으로 물러섰다. 하지만 심장이 미친 듯이 박동 쳤다. 해소되지 못한 욕망으로 인해 갈증이 심해졌다.

‘딱 한 번만 더 피를 빨겠다고 하면 화낼까?’

진지하게 재고 있는데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듯 스칼렛은 일어나 앉더니 엉망이 된 제 머리를 빗어 내렸다.

물에 젖은 붉은 머리 위로 달빛이 내려앉아 반짝거렸다.

루키우스가 홀린 듯 바라보고 있는데 시선을 눈치챈 듯 고개 들어 눈을 맞춘 스칼렛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어떡해. 너무 귀여워.”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그대로 옆으로 쓰러져서 웃어대는데 루키우스는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왜 그러고 웃는 겁니까?”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기분에 일어서서 연못에 얼굴을 비춰보려 했는데, 한발 앞서 티베리우스가 나타났다.

“마이 퀸. 무슨 일이십니까? 하도 오질 않아 와봤는데….”

그러면서 빠르게 다가오던 티베리우스는 멀뚱히 선 루키우스를 뒤늦게 발견했는지 바라보고는 뭔가 말할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건 지나치게 큰 헛기침이었다.

“어험, 어험-!”

루키우스는 그가 웃음을 참느라 그러는 걸 깨닫고는 황급히 연못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환한 달빛 아래 꿈에 볼까 두려운 얼굴이 떠올랐다.

입술은 검붉은 색으로 얼룩덜룩했고 볼을 비롯한 눈가 주변까지 기묘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 와중에 피부에 시커먼 뭔가가 점점이 찍혀 있어 더 가관이었다.

‘젠장!’

루키우스는 엄청나게 당황하며 연못에 얼굴을 거의 박다시피 해서 세수를 했다. 하지만 대체 뭔 놈의 화장품인지 좀처럼 지워지질 않았다.

“이 비누 쓰셔야 지워져요.”

스칼렛이 옆으로 다가오더니 조용히 비누를 내밀었다.

루키우스는 차마 스칼렛과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손만 옆으로 해 받아들고는 거품을 내 다시 벅벅 문질렀다.

비누 효과가 좋은 건지 장미 향과 함께 얼룩덜룩한 색상이 지워져 나갔다. 하지만 가볍게 부어오른 건 도무지 가라앉질 않았다.

결국 포기하고 돌아서자 스칼렛이 수건을 내밀며 말했다.

“부은 건 자고 나면 가라앉을 거예요. 풀을 조합해 만든 독으로 딱히 열이 난다거나 하는 일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당신 피부가 그런 건 독 때문이란 거군요. 이런 것까지 발라가며 모습을 감출 이유가….”

루키우스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고작 18살인 그녀가 암시장에서 별 사고 없이 일해올 수 있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스칼렛은 속내를 읽은 듯 배시시 웃더니 루키우스의 팔을 가볍게 치며 말했다.

“가죠. 저쪽에서 티베리우스 님이 고뇌에 빠져 기다리고 있거든요. 아이렛이 왜 기절한 채 바닥에 뒹굴고 있는지 무척 궁금해하시는 것 같던데요?”

그러더니 조금 전의 달콤한 키스와 애무 따윈 말끔하게 잊은 듯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딱히 뭔가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괜히 심장이 아려와 루키우스는 멍하니 스칼렛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뭐해요? 빨리 와요.”

가다 말고 스칼렛이 고개만 돌려 소리쳐 불렀다.

루키우스는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 얼른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머릿속에선 그런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며 야단치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정신 차려! 루키우스. 스칼렛은 절대 대공에게 널 달라고 하지 않을 거다.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할 테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