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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왕으로 취직했습니다(1권) (2/16)

1. 여왕으로 취직했습니다

동이 텄다. 스칼렛은 금화가 든 돈주머니가 묵직하게 허벅지를 누르는 걸 즐기며 날듯이 걸어 집으로 향했다.

살롱 블랙 로즈에서 맛난 소고기를 실컷 먹은 데다 주머니 두둑한 손님들이 줄줄 잘도 찾아 든걸 보면 아무래도 순혈 뱀파이어에게 물린 것이 행운을 몰아다 준 모양이었다.

‘오늘도 이럴 수 있다면 기꺼이 또 물리겠어.’

속으로 히죽거리는 사이 녹슨 철제 장식이 보기 딱한 철문이 나타났다.

열어줄 문지기 따윈 없으므로 힘을 주어 밀고 들어서니 손질을 한 적이 없어 울창한 나무 사이로 3층짜리 저택이 보였다.

무려 400년 전, 왕실에서 너무 가난해 제대로 살 집도 없는 헐버트 공작을 위해 지어 준 저택은 그 뒤 제대로 수리 한 번 하지 않아 모든 것이 지나치게 낡았다.

그래도 좋은 자재를 가져다 쓴 덕분인지 외풍이 조금 심한 것과 가끔 비가 샌다는 점을 제외하면 살 만했다.

뭐가 됐든 잘 곳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걸어 들어가던 스칼렛은 저택 앞에 흑마 네 마리가 매인 화려한 마차가 떡하니 선 것을 보곤 우뚝 멈춰 섰다.

심지어 주변에 주인 없는 흑마들이 흩어져 손질을 제대로 하지 않아 무성한 잡초들을 뜯어 먹고 있었는데 등에 얹힌 안장이나 등자를 보니 기사의 것이 분명했다.

‘대체 뭐지?’

황당해하고 있는데 붉은 장미와 왕관이 서로 얽힌 여왕의 인장이 떡하니 박힌 저택의 현관문이 열리더니 곤혹스러운 표정을 한 아버지가 나타났다.

“이제 오니?”

스칼렛은 이 시간이면 편안한 가운 차림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어야 할 아버지가 특별한 날만 입는 외투를 입고 크라바트까지 맨 차림인 것을 보곤 살짝 당황했다.

“손님이라도 왔어요?”

그렇게 말하며 빠르게 걸어 아버지 앞에 서는데, 한 남자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황당하게도 오늘 새벽, 스칼렛의 피를 쭉쭉 빨아먹던 순혈 뱀파이어 남자였다. 어제와는 달리 블랙과 화이트로 이뤄진 제복 차림이라 그런지 미모가 더욱 눈부셨다.

그렇다 해도 피차 좋지 못한 소동이 벌어진 상황이었으므로 스칼렛은 얼굴을 팍 구기며 한마디 하려 했다.

“고소하려고 온 모양인데 당신도 내 피를…….”

“귀가가 너무 늦군요. 레이디 스칼렛 케이틀린 아마칼리.”

남자가 스칼렛의 말을 뚝 잘라먹으며 노기 어린 목소리로 읊조렸다.

스칼렛은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온 이름은 한 번도 불린 적이 없는 스칼렛의 공식 이름이었다.

초대 헐버트 공작은 아마칼리 여왕의 아들이었지만 오로지 여자에게만 왕위를 물릴 것이며 따라서 남자는 성년이 됨과 동시에 수도를 떠나도록 정한 법령 때문에 이 변방으로 쫓겨났다.

하지만 그의 핏줄에서 태어난 여자들은 왕위 계승권을 인정했고 따라서 스칼렛 또한 태어나자마자 아마칼리란 성을 부여받았다.

물론 그건 스칼렛이 왕위에 올랐을 때만 쓸 수 있는 이름으로 왕실 승계 위원회의 주관 아래 천 년 전부터 내려오는 족보에 공식명으로 기록되었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그런 이름을 감히 입에 담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스칼렛은 아버지를 바라봤고, 아버지는 겁먹은 얼굴로 말했다.

“스칼렛. 저기 말이다. 그제 밤 여왕께서 승하하셨다는구나.”

스칼렛은 어리둥절해졌다. 스칼렛의 왕위 계승서열은 24위로 살아서 여왕이 될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 순위였다.

게다가 70년이란 세월을 제위에 머물렀던 플로라 여왕의 뒤를 이은 새로운 여왕의 나이는 22살, 여왕위는 오로지 미혼의 여성만 계승할 수 있으므로 3위조차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난데없는 여왕의 죽음이라니 황당했다.

아니, 따져보면 머나먼 친척이겠지만 얼굴조차 본 적 없는 여왕의 죽음을 전하러 어젯밤 그 대소동을 벌인 건가 싶어 황당해졌다.

“으음. 참으로 슬픈 소식이기는 하지만…….”

스칼렛이 말끝을 흐리며 남자를 바라보자 그는 주먹 쥔 손을 제 심장에 가져다 대며 정중하게 허리를 구부리며 말했다.

“저는 재상을 맡고 계신 체터필드 대공의 풋맨이자 시종무관인, 루키우스 엔네야드라고 합니다.”

스칼렛은 비로소 알게 된 그의 이름에 놀라 천천히 두 눈을 끔뻑거렸다.

개인 시종 중 하나인 풋맨은 귀족의 부를 과시하는 수단 중 하나로 외모가 평가 기준의 전부였다.

그 때문에 귀족들이 제 곁에 잘 생기고 키 큰 풋맨을 두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건 상식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풋맨이 엔네야드란 성을 달고 있다니 정신이 멍해졌다.

“엔네야드라면 뱀파이어 왕족 아닌가요?”

스칼렛이 황당해하며 묻자 루키우스는 희미하게 웃더니 대답했다.

“까마득한 옛날이야기입니다.”

“서브네임은요?”

“……전 아툼가의 당주입니다.”

그러자마자 곁에 조용히 서 있던 스칼렛의 아버지가 세차게 숨을 들이켰다.

아마칼리 왕조가 시작되기 전 이 땅의 주인은 뱀파이어였다.

그들 중 가장 존귀하다 추앙받던 가문은 최초의 뱀파이어 엔네야드가 낳은 아홉 아이 중 장자인 아툼의 혈족으로 뱀파이어들이 왕으로 섬겼다.

그건 인간 세상의 주종관계와는 전혀 다른 의미였는데 그 사실이 알려진 건 마지막 뱀파이어 왕이었던 세레우스가 대마녀 아마칼리에게 복종의 저주를 받으면서였다.

기록에 따르면 도를 넘어선 광기 어린 사랑에 지쳤던 아마칼리는 그저 세레우스를 밀어내기 위해 저주를 내렸을 뿐이었지만, 황당하게도 뱀파이어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건 마치 진한 먹물을 우유에 떨어뜨린 것과 비슷했다.

아툼가를 시작으로 엔네야드의 차남인 세트가가 아마칼리에게 무조건 복종을 맹세했고 그런 식으로 피가 옅어지는 순서대로 번져나갔다.

결국 세레우스는 살해당했고, 500년이 넘게 인간을 다스려오던 뱀파이어의 지위는 땅으로 추락했다.

그런데도 암시장의 술집을 찾는 뱀파이어들은 곧잘 자신들의 왕을 그리워하는 노래를 부르며 망국의 서러움을 달랬다.

그러다 보니 엔네야드라든가 아툼이란 명칭은 신화 속에나 존재할 줄 알았지 이렇게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 가능할 줄은 몰랐다.

‘세상에 맙소사. 체터필드 대공이 누군지는 몰라도 권세가 어마어마하구나. 감히 뱀파이어의 왕을 제 풋맨으로 두다니.’

스칼렛이 얼떨떨해하며 이마를 만지작거리자 루키우스가 속내를 읽었는지 부드러운 동작으로 어깨를 떠밀며 말했다.

“일단 들어가시죠. 당신의 슈발리에들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큰 힘도 아니었는데 살며시 닿은 손길이 어찌나 달콤한지 스칼렛은 자석에 끌리듯 발길을 옮겨 응접실로 들어섰다.

그러자마자 보라색 망토를 두르고 청색 제복을 입은, 루키우스만큼은 아니지만 역시나 놀랍도록 잘생긴 남자들이 일제히 스칼렛을 바라봤다.

그들은 뭔가를 확인하듯 루키우스에게 눈짓했고, 루키우스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마이 퀸.”

스칼렛은 너무 황당해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뭐라고….”

기막혀하며 아버지를 바라보는데, 대답은 루키우스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레이디 스칼렛. 이 나라의 여왕이 되어주셔야겠습니다.”

마치 중범죄자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듯한 엄숙한 목소리였다.

***

루키우스는 스칼렛 앞에 무릎을 꿇고 복종의 동작을 하는 슈발리에들을 내려다보며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마이 퀸.”

미리 약속되어 있었던 듯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슈발리에 특유의 멋진 동작 시연이 펼쳐졌지만, 표정들은 굉장했다.

로드 슈발리에를 맡은 데다 천성이 본래 강직한 티베리우스와 주인의 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온 가이우스를 제외한 나머지는 실망감을 감추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자고로 슈발리에란 여왕을 지키는 근위 기사단임과 동시에 여왕의 애인 후보기도 하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긴 어젯밤, 루키우스가 스칼렛의 농락에 꼼짝없이 당한 것도 예상을 배반하는 소녀의 외모 때문이었다.

체터필드 대공의 친모인 플로라 여왕을 비롯해 그가 보아온 아마칼리의 핏줄은 하나같이 뛰어난 미모를 자랑했다.

하지만 스칼렛은 아니었다.

아마칼리의 혈통답게 허리까지 늘어지는 붉은색 머리카락과 맑은 초록색 눈동자는 인정해줄 만했다.

하지만 얼굴 가득 주근깨투성이에 눈 밑은 시커멨고 눈꺼풀이 지나치게 두꺼워 두꺼비 같은 데다 입술은 검붉은 색이라 보기 딱할 정도였다.

‘물론 피 맛은 굉장했지만. 하아- 그토록 달콤한 피는 처음이었어.’

루키우스는 여전히 혀끝에 남아 있는 피 맛의 감미로움에 제 입술을 씹었다.

아마칼리 혈통의 피를 입에 댄 자는 결코 헤어나지 못한다고 하더니 그 소문이 사실일 줄은 몰랐다.

난데없이 몽둥이에 맞아 기절하는 바람에 가까스로 멈췄지만 피 맛에 홀려 사내의 본성이 거칠게 폭주한 건 그의 인생에 있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실 타고난 외모와 신분 덕분에 그에게는 온갖 사교계의 꽃들이 목을 내밀며 물어달라 청하는 일이 무척 잦았다.

그럴 때마다 내키면 피를 빨곤 했지만, 당연히 뒤따라야 할 성욕이 일지 않아 혹여 자신에게 문제가 있나 생각했던 것이 우습게도 문제없음으로 증명된 셈이었다.

아니, 그 바람에 더 큰 문제를 안게 된 상황이었다.

그는 체터필드 대공의 풋맨이자 시종 무관이었고 따라서 여왕은 절대 손대선 안 되는 금기였다.

그러니 잊어야 했다. 철저하게 없었던 일로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루키우스는 스스로를 다잡으며 자꾸 그녀의 목덜미로 향하려는 시선을 돌려 당혹감으로 인해 커다래진 스칼렛과 눈을 맞췄다.

“레이디 스칼렛. 이 나라의 여왕이 되어주셔야겠습니다.”

진중하게 운을 떼자 스칼렛이 숨이 턱 막힌 얼굴로 외쳤다.

“저기 죄송한데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닌가요? 저는 고작 서열 24위라 제 앞으로 무려 23명의 레이디가 계실 텐데요.”

그리고는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슈발리에들을 눈짓하며 말했다.

“저기 그만 일어나셔도 될 것 같은데요.”

기다렸다는 듯이 슈발리에들이 일어섰고 티베리우스가 성큼 스칼렛에게 다가서더니 살짝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로드 슈발리에, 티베리우스 앙커스라고 합니다. 충심으로 모시겠습니다.”

“앙커스? 뛰어난 무사들을 배출하는 것으로 유명한 뱀파이어 가문 맞죠?”

스칼렛이 생각을 더듬는 얼굴로 읊조렸다. 루키우스는 깜짝 놀랐다.

순혈 뱀파이어 대부분이 수도에 머물고 있기에 이런 변방에선 명가의 이름은커녕 존재 자체를 아는 이가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도 앙커스가를 알아보다니 놀라운 정보력이었다.

티베리우스 또한 그런지 고개를 까닥이며 말을 이었다.

“알아주시니 영광입니다. 마이 퀸. 사실 제 실력은 저희 가문에서도 보잘것없는 상황이었는데 연달아 여왕 음해 사건이 터지면서 이번이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연달아? 그게 무슨 의미죠?”

스칼렛은 당황한 어투로 묻고는 제 아버지인 헐버트 공작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 또한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제야 루키우스는 이 부녀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쩐지 헐버트 공작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더라니….’

서북 해안이 왕국 내에서 가장 변방에 속하는 만큼 수도에서의 소식도 가장 느린 모양이었다.

아니면 누가 다스리거나 말거나 큰 차이가 없다 보니 소식이 전해졌다 해도 이곳 신문에 기사 한 줄로 끝났을 수도 있었다.

플로라 여왕 이후 제위에 오른 여왕은 사치와 향락이 지나치게 심해 원성이 자자했고 그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여왕들은 왕위에 머문 기간이 짧은 만큼 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어쨌거나 루키우스는 두 사람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담담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석 달 전, 왕위 계승서열 10위 내의 레이디들을 위한 티파티 도중 폭탄 테러가 터져 여왕 폐하를 비롯한 레이디 전원이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자마자 헐버트 공작이 신을 찾으며 비틀거렸고 스칼렛은 손을 뻗어 제 아버지를 부축해 소파에 앉히더니 물었다.

“그런 일이 있는 줄 전혀 몰랐네요. 참담한 소식이긴 하지만 제 앞에 있을 스물세 분의 레이디는 어쩌시고 저에게 오셨나요?”

“아시다시피 미혼의 여성들만이 승계권이 있다 보니 스물세 분 중 조건에 부합되는 분은 당신까지 총 네 분이더군요. 즉, 당신은 서열 4위인 상황이었습니다만 현재는 1위가 되셨죠.”

“그러니까 석 달 전에 제가 알던 여왕이 돌아가신 뒤 그사이에 무려 세 명이 다 죽었다는 거네요. 또다시 폭탄 테러라도 터진 건가요?”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서열 1위의 레이디께선 중압감을 이기지 못했는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고 서열 3위의 레이디께선 우울증 때문에 슬프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2위의 레이디는 왜 빼먹어요?”

“그분은 대관식을 마치고 난 밤, 행방불명 되셨습니다. 그분의 마구간 지기가 사라진 데다 찾지 말아 달라는 편지까지 남겨져 있어 스스로 행방을 감추셨다고 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도망쳤단 거네요.”

스칼렛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심란한 얼굴로 루키우스와 눈을 맞춰왔다.

“레이디들의 나이는요?”

“서열 1위셨던 레이디의 나이는 20세, 2위 셨던 레이디는 24세. 그리고 서열 3위셨던 레이디는 17살이셨습니다. 연달아 여왕을 잃으면서 수도는 지금 큰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전대 여왕께서 왜 자살하셨는지는 파악된 건가요?”

“불과 그제 밤에 벌어진 일이라 조사 중이지만 적어도 타살은 아니라는 결론이 난 거로 알고 있습니다.”

“타살 여부가 아니라 암살 여부가 파악되는 게 먼저 아닌가요? 협박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가능성도 커 보이는데요.”

스칼렛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루키우스는 하마터면 낮게 휘파람을 불 뻔했다.

지금까지 세 차례에 걸쳐 루키우스는 계승권이 있는 소녀들에게 승계 소식을 전했다. 그녀들은 모두 여왕이 된다는 기쁨에 들떠 상황을 파악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건 루키우스의 주인인 체터필드 대공이 기대하던 바였고 그랬기에 루키우스는 그들을 수도로 데리고 가는 내내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소녀는 다를 모양이었다. 똑똑한 여왕이라니 체터필드 대공의 실망이 무진장 클 것 같았다.

루키우스는 왠지 모르게 흐뭇해졌지만, 아닌 척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

“왕실 수사대의 무능은 왕위에 오르셔서 독촉하셔도 됩니다. 레이디 스칼렛.”

순간 스칼렛의 얼굴이 구겨졌고 듣고만 있던 티베리우스가 끼어들었다.

“마이 퀸. 이번 슈발리에들은 전대와는 달리 목숨을 걸고 지켜드릴 거니 암살 위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이 퀸이라고 부르지 말아 주시겠어요? 여왕이 될지 안 될지 결정을 한 것도 아니니까요.”

스칼렛의 대답에 루키우스는 얼른 말했다.

“레이디 스칼렛. 죄송하지만 당신이 거절하면 심히 곤란해집니다. 당신이 마지막 계승권자거든요.”

그러자마자 스칼렛의 시선이 창밖으로 흘렀다.

무심한 표정이었지만 루키우스는 순간적으로 그녀가 자신을 데리러 온 자들이 더 있는지 확인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아무래도 강제로 끌고 가려고 온 건지 아니면 모셔가려고 온 건지 계산 중인 모양이었다.

루키우스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갑자기 심란해져 입안이 말라왔다.

그동안 체터필드 대공은 계승권을 지닌 소녀들이 스스로 왕위에 오르기를 거절하기를 내심 원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모든 소녀는 무척 기뻐하며 왕위에 올랐고 대공은 그런 소녀들에게 스스로 퇴위하라 압박했다.

하지만 여왕이 된 소녀들은 들은 척도 하질 않고 도리어 그를 재상직에서 밀어내려고 애를 썼다.

그 결과는 지난 석 달간 벌어진 여왕 음해 사건이었다.

루키우스는 그 사태를 지켜보면서 모든 사건의 뒤에는 체터필드 대공이 원하는 방법으로 적을 제거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는 ‘시크릿 풋맨’이 있음을 눈치챘다.

한 번도 본 적 없고, 체터필드 대공가의 버틀러를 맡은 큰 숙부조차 모른다고 하지만 시크릿 풋맨이 존재한다는 건 대공가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니 만약 스칼렛이 왕위 계승을 거부하면 대공은 바로 시크릿 풋맨을 보내 사고로 위장하여 없애려 들 공산이 컸다.

“마이 레이디. 여왕이라는 자리가 물론 중임이기는 하지만 국정사는 재상이신 체터필드 대공께서 맡아서 하실 겁니다. 그러니….”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달래려 하는데 스칼렛이 불쑥 물었다.

“돈은 얼마나 받나요?”

“네?”

“그러니까 여왕이 되면 수고비나 사례금을 얼마나 받냐고요. 제가 이 집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으므로 공짜로 여왕을 할 순 없거든요.”

스칼렛은 그렇게 말하고는 손가락으로 이것저것 꼽아보더니 덧붙였다.

“적어도 달마다 금화 500닢은 받아야 할 것 같은데요.”

“500닢? 스칼렛. 그 돈이면 우리 식구가 석 달을….”

곁에 앉아 있던 스칼렛의 아버지가 허둥대며 끼어들었지만, 스칼렛은 손을 들어서 막더니 도전적으로 선언했다.

“한 푼도 못 깎아줘요. 제가 챙겨야 할 동생이 좀 많거든요.”

루키우스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여왕으로 취직하겠단 겁니까?”

“달마다 받으면 월급제니 그런 셈이겠네요. 뭐, 사실 제가 여기저기 와달라는 데가 많아서요. 굳이 여왕으로 취직하지 않아도 갈 곳은 많답니다.”

“맙소사. 레이디 스칼렛. 여왕이 되시면 제국에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는 겁니다.”

“그럼 제가 왕궁을 팔아도 된다는 거예요?”

“아니. 왕궁을 왜 팝니까? 어디서 묵으시려고요.”

“뭐, 나야 어디서든 자면 될 일이죠. 나머진 알아서들 자면 될 테고. 어린애들도 아닐 테니.”

그러면서 어깨를 으쓱거리는 스칼렛을 보아하니 정말로 왕궁을 팔아먹을 기세였다.

루키우스는 어젯밤에 이어 다시 한번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어 정신이 아득해졌다.

‘망할! 아주 돈독이 제대로 올랐군. 어제도 수고비로 금화를 5닢이나 받아가더니만.’

하지만 중요한 건 그녀를 수도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고, 왕실에선 그러기 위한 모든 권한을 그에게 주었으니 답할 말은 하나였다.

“좋습니다. 달마다 금화 500닢. 여왕의 품위 유지비 목록에 끼워 넣도록 하죠.”

“계약금 조로 일단 한 달 치 지금 지급해 주세요.”

스칼렛이 냉큼 외쳤다. 루키우스가 입을 떡 벌리자 스칼렛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못 주겠다면 가서 마련해서 오시고요. 아, 어젯밤 돈을 너무 쓰셨으려나? 하긴 어제 마신 그 술 한 잔 가격이 꽤 되긴 하죠.”

그러면서 싱긋 웃는데 안 주면 이대로 가족들과 도망쳐버리겠다는 협박으로 느껴졌다.

루키우스는 스칼렛의 짐작대로 그 살롱을 무탈하게 나오기 위해 돈주머니 안에 든 돈을 죄다 털어 줘야 했기 때문에 무일푼이었다.

그동안 대공의 풋맨과 재상의 시종 무관을 겸직하다 보니 돈이 부족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지금의 주머니 사정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하지만 꾹 참고 얼이 나간 얼굴로 서 있는 티베리우스에게 물었다.

“비상금 얼마나 가지고 계십니까?”

“급하게 출발하느라 달리 여행비를 챙기지를 않아서 많지는 않습니다만.”

티베리우스는 황급히 제 돈주머니를 꺼내 건네며 말했다.

루키우스는 별수 없이 다른 슈발리에들을 바라봤다. 그들 모두가 칼에 찔린 듯한 표정으로 돈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루키우스는 날강도가 된 심정으로 슈발리에들의 돈주머니를 털었다. 그런 뒤 모자란 금액은 제가 차고 있던 에메랄드 장신구를 더해 채웠다.

스칼렛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루키우스가 내민 금화를 하나하나 세고 에메랄드를 감정이라도 하는 듯 지긋이 들여다보더니 선심이라도 쓰는 얼굴로 말했다.

“금화가 아니면 안 쳐주려 했는데 이 정도 보석이라면 어쩔 수 없네요.”

그러더니 금화와 에메랄드가 든 주머니를 제 아버지에게 건네고는 손을 탁탁 털더니 말했다.

“출발하죠. 바로. 제 동생들이 깨어나면 한바탕 대소동이 날 테니까요.”

“맙소사. 스칼렛. 인사는 하고 가렴. 여왕이 되면 바빠서 얼굴 보기도 힘들어질 텐데!”

스칼렛의 아버지가 황망한 얼굴로 외쳤다.

“아뇨. 아버지. 동생들이 울고불고 난리 치기 시작하면 그걸 어느 세월에 다 달래겠어요. 오늘이 다 가도 모자랄걸요? 밤새워 일하고 와서 그렇지 않아도 피곤해 죽을 지경인데.”

스칼렛은 경쾌하게 대답하더니 그제야 떠오른 듯 루키우스를 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보너스 건도 논의했어야 했는데 그게 빠졌네요. 그래야 여왕으로서 큰일을 해결할 맛이 날 것 같거든요.”

루키우스는 악문 잇새로 대답했다.

“그건 나라의 금고를 쥐고 계시는 체터필드 대공과 상담하시죠.”

스칼렛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죠. 받으려면 제대로 단단히 한몫 챙겨 받아야 할 테니 품위 유지비 목록에 끼워 넣기는 힘들겠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말씀대로 바로 떠나실까요?”

“그러죠. 아! 맞다. 물건 하나만 챙기고요. 그건 가져가야 할 것 같아서.”

스칼렛은 그렇게 말하더니 부리나케 응접실을 나갔다. 뒤이어 스칼렛의 아버지가 허둥지둥 따라 나갔다.

“스칼렛. 얘야. 진짜로 이대로 떠날 거냐? 응?”

애절하게 외치며.

이내 응접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루키우스는 저도 모르게 속내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쯧, 한 달 만에 암살당할 수도 있단 걱정은 전혀 안 드나 보군.”

그러다 흠칫 놀라 입을 다무는데 곁에 서 있던 티베리우스가 말했다.

“과연 그럴까요?”

루키우스는 반사적으로 그를 바라보곤 살짝 당황했다.

티베리우스의 눈길은 닫힌 문 너머로 향해 있었다. 마치 미래를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과 더불어 혼잣말 같은 읊조림이 이어졌다.

“앞으로가 기대되네요. 진정한 여왕을 모시게 되었으니.”

***

방으로 돌아온 스칼렛은 언젠가 떠돌이 화가가 그려준 온 가족이 담긴 그림을 찾아 제 방에 놓인 물건들을 마구 뒤집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손이 너무 떨려 물건들을 제대로 잡기조차 힘이 들었다.

‘떨지 마. 안돼. 나약한 걸 들키면 안 돼.’

스칼렛은 두 손을 깍지끼고 떨림을 가라앉히려고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 그러고 있는데 문이 열리더니 첫째 동생인 마크와 둘째 동생인 앤이 뛰어 들어왔다.

“대체 무슨 일이야?”

마크가 외쳤다.

“언니. 그 기사님들 죄다 왕실에서 온 거 맞아?”

앤이 걱정이 담뿍 담긴 어투로 물었다.

“쉿! 애들 다 깨우겠다.”

스칼렛은 손가락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그러자 마크가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리며 툴툴댔다.

“지금 다 깨워도 모자랄 분위기 아냐?”

스칼렛은 숨을 크게 들이켜고는 마크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제법 단단하게 여문 어깨를 꽉 잡아 쥐며 말했다.

“잘 들어 마크. 내가 떠나고 나면 바로 살롱 블랙로즈로 달려가서 마담에게 바젤 공국으로 신분 세탁해서 떠나려면 인당 얼마나 드는지 물어봐. 그곳에 정착하는 비용도 포함해서 말이야.”

“뭐야. 누나. 중범죄라도 지은 거야? 그래서 왕실에서 잡으러 온 거냐고.”

마크가 황당해하며 물었다. 스칼렛은 어깨를 더욱 세게 잡아 쥐어 말을 끊고는 앤에게 말했다.

“앤. 아까 아버지에게 금화 330닢과 에메랄드 장신구를 드렸어. 그걸 받아서 저축해. 장신구는 암시장 크레타 할머니에게 팔아달라고 맡기고. 스칼렛의 부탁이라고 하면 잘 쳐주시실 거야. 그리고 달마다 금화 500닢을 보낼 테니까 그것도 다 저축하도록 하고.”

“언니. 왜 그래? 대체 무슨 일이야. 나 무서워.”

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우물거렸다. 스칼렛은 앤을 품에 끌어안았다.

“착하디착한 내 동생. 잠을 줄여가며 네가 동생들 양말 다 꿰매놓고 구멍 난 옷도 수선하고 그러는 거 다 알아. 그래서 이런 일까지 시키게 돼서 정말 미안해. 하지만 한 푼이라도 절약해 바젤 공국으로 가급적 빨리 도망쳐야 해. 그게 우리 가족 모두가 살길이야.”

그러자 앤이 울음을 터트렸다.

“언니. 정말 잡혀가는 거야? 여왕이 언니를 죽이래?”

스칼렛은 앤의 등을 토닥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 설명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언뜻 듣기에 여왕이 된다는 건 대단한 명예로 보일 법했다.

하지만 루키우스가 흘린 정보를 종합해보면 이건 죽으러 가는 길이었다.

수도의 누군가가 아마칼리 여왕의 핏줄을 말살해 새로운 왕조를 열려고 준비 중인 것이 분명했다.

가장 최악의 상황은 그 누군가가 관리들의 우두머리인 재상이며 왕실의 금고를 쥐고 있는 데다가 뱀파이어 왕을 풋맨으로 두고 있는 체터필드 대공일 경우였다.

‘아까 루키우스란 남자가 언뜻 보인 표정으로 봐선 가능성이 높아. 아니면 좋겠지만.’

스칼렛은 너무 심란해 입술을 짓씹다가 허벅지에 느껴지는 묵직함을 깨닫고는 얼른 제 돈주머니를 꺼내 앤의 손에 쥐여줬다.

“이건 오늘 내가 번 돈. 일단 밀린 블러드 팩 외상부터 갚아. 아! 우기 오기 전에 지붕에 타르타르 한 번 덧바르는 거 잊지 말고. 맞다. 지난번 꼬맹이들이 깨 먹은 창도 수리해야 하는데.”

처리해야 할 자질구레한 일들을 떠오르는 대로 줄줄 늘어놓고 있는데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아버지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스칼렛. 얘야. 도망쳐라.”

그러더니 마크와 앤을 번갈아 보고는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말했다.

“동생들이 깨어났더라. 둘이 가서 돌봐주렴.”

마크와 앤은 남기를 바라는 눈치였지만 아버지의 저런 모습은 처음이라 그런지 군말 없이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아버지는 아까보다 배는 더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칼렛.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 일단 몸을 피해라.”

스칼렛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랬다간 아버지도 동생들도 체스판 위의 폰처럼 마구 이용당할 거예요. 수도에 아무런 연고가 없으니 정치모략에 이용당하기 딱 좋죠.”

“무슨 소리냐. 내 아무리 이런 변방에 살고 있다 해도 작위가 공작이다. 넌 공녀고, 네 동생들도 공작가의 아이들이야.”

“대공의 풋맨, 루키우스가 제가 계승권을 포기하면 곤란해진다면서 설득하려 했을 때 그의 눈빛은 걱정으로 가득했어요. 거절해도 거절하지 않아도 살해당할 거라는 걱정이요.”

“확실하니? 그는 뱀파이어 왕이니 아마칼리의 혈통을 그리 좋아하지 않을 거고….”

“아버지. 암시장 상인들이 절 두고 최고라 치는 재주가 뭔지 아시잖아요. 사람 가려 볼 줄 아는 재주가 없었다면 진즉 칼 맞아 죽었을걸요?”

“맙소사.”

아버지는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스칼렛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안아 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눈을 맞췄다.

“가서 암살당하지 않게 최대한 버틸게요. 그러니 마크와 앤이 하라는 대로 탈출 준비를 하세요. 어느 정도 준비가 됐다 싶으면 핑계를 대서 이곳으로 돌아올게요.”

스칼렛의 단호한 말투에 아버지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리나 싶더니 진한 슬픔이 덧씌워졌다. 간신히 울음을 참는 얼굴로 아버지는 손을 들어 스칼렛의 얼굴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 분장이나 지우고 가렴. 여인의 미모는 최고의 무기 중 하나란다.”

“기회 봐서 지울 거예요. 미모가 무기가 될지 독이 될지 판가름이 나는 대로요.”

스칼렛은 가볍게 대답하고는 일어섰다.

그만 가봐야겠다 싶어 물러서는데 찾고 있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창가에 보란 듯이 놓여 있는 걸 보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내가 정신이 반쯤 나가긴 나간 모양이네.’

그런 생각을 하며 집어 드는데 아버지가 항상 목에 걸고 다니던 손톱만 한 크기의 도자기 호리병 목걸이를 벗더니 그걸 내밀었다.

“이걸 가져가렴. 스칼렛.”

“이건 아버지가 애지중지하시는 물건 아네요?”

스칼렛은 거절할 생각으로 손조차 내밀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버진 벌떡 일어서서 스칼렛의 손에 그걸 쥐여주며 작디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선조이신 초대 헐버트 공작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온 목걸이란다. 언젠가 네가 시집을 가면 주려고 했었지.”

“호리병 안에 뭔가 든 거예요?”

“대마녀이자 초대 여왕이신 아마칼리의 피가 들어있다고 전해져 온다. 너도 알지? 천 년 전, 전쟁에서 여왕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뭔지?”

“짐승처럼 자신을 탐하던 최후의 뱀파이어 왕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대마녀 아마칼리는 자신의 피에 저주를 걸었고 그 피를 흡혈한 왕이 복종의 맹세를 함으로써….”

스칼렛은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배웠던 아마칼리 여왕사를 떠오르는 대로 읊조리다가 그녀의 묘비명을 기억해냈다.

수많은 학자가 그 의미를 풀기 위해 천년이 다되어가는 오늘날까지도 그걸 주제로 학회가 열릴 정도로 왕국 최고의 수수께끼인 단 한 줄의 문장.

-아타 논 베르다 수칼레 아르카디움-

천 년 전 고대어로 ‘저주는 오로지 내 피로 인해 풀릴 것이다’란 뜻이었다.

순간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스칼렛은 제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미친 듯이 뛰어대는 심장을 내리눌렀다. 그래도 숨이 가빴다.

“모두 그건, 그건….”

심지어 말까지 더듬자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래. 맞다. 다들 그 의미를 여왕의 핏줄 중 누군가가 축복의 힘을 가지고 태어나 행할 일이라고 해석하고 있지. 하지만 아니란다.”

“이런 걸 수도에 가지고 갈 순 없어요. 행여라도 들키는 날엔….”

“걱정하지 마라. 이 목걸이는 신비롭게도 헐버트 가의 핏줄만이 목에 걸 수 있고 또한 벗을 수 있단다. 또한, 오로지 헐버트가의 직계만이 호리병을 열 수 있다고 전해져 온단다.”

“그런 거라면 안심이네요.”

스칼렛은 숨을 크게 들이켜고는 호리병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어떻게 쓸지는 알 수 없어도 이것이 왕국을 발칵 뒤집어 놓을 무기임은 틀림없었다.

“이보다 더 굉장한 보물을 지닌 레이디는 다시 없겠는걸요.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방긋 웃자 아버지는 눈시울을 붉히더니 아닌 척 늠름하게 말했다.

“스칼렛. 수도에 가면 순혈 뱀파이어 천지일 거다. 지금 온 슈발리에만 봐도 알겠지만, 극상의 외모와 인간을 뛰어넘는 체력, 지력을 무기로 주인으로 섬기는 자들을 위해 뭐든 하지.”

“그럴 것 같네요. 루키우스만 봐도 대충 짐작이 가요.”

“그래. 그러니 네 이웃의 뱀파이어를 탐하지 말라는 계명을 마음에 항상 품고 다니도록 해라. 알겠지?”

아버지의 간절한 어투에 스칼렛은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약속할게요.”

그러자 말릴 틈도 없이 아버지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더니 주먹 쥔 손을 심장에 대어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여왕 폐하. 다시 뵙는 그 날까지 부디 무탈하시길.”

스칼렛은 무척 당황해 일으켜 세우려다가 그만뒀다. 대신 성큼 돌아서선 씩씩하게 걸어 방을 나섰다.

훗날 그 어떤 비극적인 소식이 들려올지라도 부디 아버지가 지금 이 순간, 당당했던 그녀의 뒷모습을 떠올리기를 바라며.

***

루키우스는 스칼렛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왕실 마차 앞을 서성였다.

출발하기 전 체터필드 대공은 지나가는 말투로 필립 후작에게서 여왕납치를 계획 중인 자들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는 소릴 했다.

여왕이 죽으면 보좌하던 슈발리에도 자동 해산되고 새로운 슈발리에를 꾸리는 것이 법도라 홀로 떠나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루키우스는 대공가의 경호 부대를 요청했다.

그러자 대공은 킬킬킬, 불길하게 웃어대며 말했다.

‘난 다른 여왕들처럼 그 애 또한 조용히 입성하기를 바란다. 죽든지 말든지 퇴위를 하든지 어쩌든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게끔 말이야. 그러니 납치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지.’

루키우스는 좀 황당했다.

제아무리 레이디 스칼렛이 아마칼리 왕조의 마지막 계승권자라 해도 천 년 동안 이어온 미혼 여성 승계 원칙을 깬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걸 잘 알 텐데도 저렇게 자신 있게 말하다니 매사에 여우처럼 교활한 대공답지 않은 언사였다.

솔직히 역겨웠지만, 풋맨의 지위에 걸맞게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그런 뒤 로드 슈발리에로 내정된 티베리우스에게 비밀리에 쪽지를 보내 납치 정보를 알렸다.

그래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강직한 성격답게 티베리우스는 달리는 요새라 불리는 왕실 전용 마차를 끌고 쉬지 않고 달려 오늘 새벽, 헐버트 공작가 정원에 나타났다.

하지만 강철처럼 단단하다는 티크 나무로 만든 몸체에 섬세한 쇠 그물로 지붕을 둘렀다 하더라도 쇠화살 같은 타격 무기를 이겨낼 리 만무했다.

루키우스는 허리춤에 보이지 않게 넣어둔 단검을 매만지다 집에 두고 온 자신의 검을 떠올리고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체터필드 대공의 풋맨이 되던 날, 큰숙부에게 선물 받은 소드 브레이커는 이름 그대로 톱니 날이 달려 있는데 어찌나 날을 잘 세워놨는지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는 명검이었다.

‘차림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도 그걸 들고 왔어야 했는데….’

스칼렛의 성격을 보면 딱히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으니 더더욱 아쉬웠다.

아무래도 슈발리에들에게 남는 검이 없나 물어볼까 싶어 걸음을 옮기는 순간 머리 위쪽에서 주먹만 한 돌이 날아들었다.

루키우스는 반사적으로 손으로 받아냄과 동시에 날아온 방향을 확인하고는 얼굴을 팍 구겼다.

저택 2층에 있는 긴 창이 활짝 열려 있었고 창턱에 열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새총을 들고 서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족이었다.

물론 격이 다르긴 했다.

엔네야드가를 비롯한 명문 뱀파이어가는 뱀파이어끼리의 신성한 결합을 통해 태어난 ‘순혈’을 시조로 뒀지만, 그 외는 ‘죽음의 키스’를 받아 뱀파이어가 된 인간을 시조로 삼았다.

창가의 소년 또한 그런 자의 핏줄인 모양인지 태양이 스며들어 얼룩덜룩해진 피부와 지루한 갈색 눈동자를 지녔다.

그러니 순혈 앞에 주눅이 들 만도 하건만 소년은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표정을 지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우리 누나에게 손댔다가는 죽여버릴 거야!”

“하! 누나라….”

루키우스는 심드렁한 얼굴로 돌을 등 뒤로 집어 던지며 말을 이었다.

“알몸으로 내 침대에 기어들어 와 유혹한다 해도 넘어가 줄지 모르겠군. 도리어 그런 짓을 한 죄로 내 손톱에 찢기지 않으려고 싹싹 비는 건 몇 번 봤다만.”

소년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뭔가 욕설이라도 뱉을 듯 펄쩍 뛰는 순간 소녀의 것으로 보이는 가느다란 팔이 튀어나와 소년의 입을 틀어막으며 뒤로 잡아끌었다.

“놔. 앤. 이거 놓으라고!”

소년이 발버둥 치며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크. 이러지 마! 이러면 언니가 슬퍼할 거란 말이야!”

아마도 앤이란 이름일 소녀의 외침이 뒤이어 퍼져 나왔다.

루키우스는 저들이 대체 누굴 말하는 건지 의아해하며 시선을 돌리다가 3층 창가에 다닥다닥 붙어 선 아이들을 보았다.

막 잠자리에서 일어난 건지 잠옷 차림의 꼬맹이들은 모두 뱀파이어였다.

‘허. 헐버트 공작가의 재력이 바닥이라고 들었는데 꽤 많은 뱀파이어 하인을 거느리고 있나 보군. 그런데 왜 아무도 우릴 대접하러 나오질 않은 거지?’

그러다 문득 스칼렛이 어제오늘 챙겨야 할 동생 타령을 하던 말이 떠올랐다.

인간 귀족이 뱀파이어 여인을 첩으로 들여 죽음의 키스를 받은 아이를 낳는 건 주변에서 흔하게 봐왔다. 그러니 스칼렛의 아버지 또한 담백하게 생겼다 해도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아까 그 소년을 비롯해 창가에 선 꼬맹이들은 다들 외모가 천차만별이었다.

금발이 있는가 하면 붉은 머리도 있었고 검은 눈에 검은 머리를 한 바다 건너 이국의 땅에서 온 듯한 아이도 보였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고작 열여덟 살인 스칼렛의 동생이라고 하기엔 숫자가 너무 많았다.

그야말로 혼란스러워하고 있는데 저택의 현관문이 벌컥 열리더니 스칼렛이 길고 풍성한 붉은 머리를 흩날리며 손에 달랑 액자 하나를 든 채 나타났다.

아까 응접실에서는 미처 몰랐는데 햇살 아래 드러난 그녀의 드레스와 망토는 몹시도 낡아 보기 민망했다.

그런데도 스칼렛의 전신에선 위엄이 흘러내렸다. 좋은 말로도 예쁘다고 말해줄 수 없는 얼굴에서도 우아함이 뿜어져 나왔다.

그건 루키우스만의 느낌이 아니었던지 이미 흑마에 타고 있던 티베리우스를 비롯한 슈발리에들이 황급히 뛰어내려 주먹 쥔 손을 가슴에 대며 허리를 조아렸다.

스칼렛은 그들을 향해 아주 자연스럽게 미소 지으며 루키우스의 앞에 와서 섰다. 그리고는 고개 들어 올려다보기에 루키우스는 뭔가 할 말이 있나 싶어 눈을 맞췄다.

아마칼리의 혈통답게 햇살을 받은 스칼렛의 눈동자는 맑은 녹색 위로 금빛 안개가 살랑거렸다.

‘아름답군. 엔네야드가에서 본 그 어떤 에메랄드보다도 더 황홀한 녹색이야.’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스칼렛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물었다.

“마차 문을 열어주려던 거 아네요?”

루키우스는 제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걸 느꼈다.

이렇게 당황한 건 어린 시절 아버지의 슈트를 실수로 태워 먹은 이후 처음이었다. 그제야 허둥지둥 문을 열자 스칼렛이 풋, 가볍게 웃더니 소곤거렸다.

“우리 약속하죠. 이 마차에 오르는 순간 어젯밤 일은 잊기로요.”

순간 루키우스는 옆으로 돌아가려던 제 목에 힘을 주며 끄덕거렸다.

“그러죠. 마이 레이디.”

스칼렛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짓더니 고개 젖혀 저택의 3층을 올려다봤다.

덩달아 바라본 루키우스는 여전히 그곳에 잠옷 차림의 뱀파이어 꼬맹이들이 다닥다닥 붙어 선 것을 보았다.

다들 스칼렛과의 이별이 슬픈지 그 짧은 새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가장 어린아이는 저보다 조금 큰아이에게 안겨 우는 중이었다.

스칼렛은 그 아이들을 눈으로 한 번씩 훑더니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마차에 올랐다.

루키우스는 문을 잡은 채 경고하듯 말했다.

“지금부터 수도까지 멈추지 않고 달릴 겁니다. 작별인사를 못 했다면 지금이라도 하러 갔다 오시죠.”

스칼렛은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피곤하니까 빨리 출발하죠.”

루키우스는 왠지 안타까워져 3층에 옹기종기 모여 선 뱀파이어 꼬마들을 향해 저도 모르게 손을 흔든 뒤 그런 제 행동에 무척 당황해 서둘러 마차에 올라탔다.

문을 닫자 기다리고 있던 슈발리에 한 명이 마부석에 올라탔다. 티베리우스가 말을 몰아 마차의 창가로 다가왔다.

루키우스는 출발해도 좋다는 신호로 손을 들어 보였다. 티베리우스가 고개를 까닥이더니 말을 몰아 대열의 앞쪽으로 나갔다.

“전속력 전진!”

잠깐 사이 푹 쉰 힘 좋은 흑마 네 마리가 마차를 끌고 기운차게 뛰어나갔다.

그래도 명색이 공작가라 그런지 오는 길에 있는 산을 넘자마자 놓인 도로부터 이곳 저택까지 이어지는 길은 잘 다듬어져 있어 말들이 오가기 아주 좋았다.

순식간에 헐버트 공작의 저택이 등 뒤로 사라져갔다.

스칼렛은 뒤돌아보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무심한 얼굴로 빠르게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앞서 제위에 올랐던 세 명의 소녀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녀들은 처음에는 좀 울다가 이내 그에게 호감을 내보이며 그의 신상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애인이 있는지 약혼녀가 있는지 좋아하는 색깔은 무엇인지.

루키우스는 사교계의 꽃들이 자주 던지는 질문이라 대충 정해놓은 답안을 그대로 읊어줬고 그것만으로도 그녀들은 그와 친해졌다고 착각하며 행복해했다.

하지만 스칼렛은 슬픈 표정조차 짓지 않고 그를 바라보지도 않았으며 초조함을 드러내지도 않고 있었다.

결국, 침묵을 견디다 못한 루키우스는 벽 쪽에 설치된 서랍장을 열며 물었다.

“레이디. 뭔가 드시겠습니까? 간단한 간식거리도 있는데요.”

그리고는 안에 든 것을 그제야 눈으로 확인하고는 살짝 당황했다.

서랍장 안에 든 건 타르트와 쿠키 그리고 유리병에 담아 꽉 밀봉된 다양한 과일 주스들이었다.

죄다 여왕을 염두에 둔 탓인지 터무니없이 작고 귀여웠다.

이십여 년 전, 아버지와 한 달 간격으로 전염병에 걸려 돌아가시기 전까지 루키우스의 어머니는 체터필드 대공가의 디저트 파티시에였다.

어머니가 만드는 디저트는 대공뿐 아니라 귀족들의 눈과 입을 사로잡았고 당시 일곱 살이었던 루키우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다.

그래서인지 세월이 훌쩍 흘러 이제는 성인이 되었는데도 디저트를 보면 저절로 얼굴 근육이 부드러워졌다.

루키우스는 낭패다 싶어 턱 근육에 힘을 줬지만 조금 늦은 듯싶었다.

스칼렛의 눈동자가 동그래지나 싶더니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리며 웃음을 삼키는 기색이 역력했다.

루키우스가 당황해 헛기침하자 스칼렛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침은 드셨어요?”

“슈발리에들이 새벽에 도착하는 바람에 어수선해서 그럴 틈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던 루키우스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신기하게도 인간들은 뱀파이어가 오로지 흡혈만을 통해 배를 채운다는 고정 관념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체터필드 대공마저도 루키우스가 뭔가를 먹는 걸 보면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곤 했다.

하지만 뱀파이어에게 흡혈이란 물을 대신할 뿐이라 따로 식사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인간처럼 세끼를 먹을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먹긴 먹어야 했다.

“아까 저택 창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뱀파이어 아이들이 동생이 맞나 보군요.”

루키우스가 묻자 스칼렛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릎 위에 엎어 놓은 액자를 내보이며 말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제 동생들 맞아요.”

“그게 무슨?”

루키우스는 반사적으로 그녀가 내민 액자를 바라보며 묻다가 숨을 삼켰다.

그곳에는 도저히 한 가족이라고 부르기 뭐한 대가족이 그려져 있었다. 저도 모르게 숫자를 세어보니 스칼렛과 스칼렛의 아버지를 빼고 무려 21명이었다.

아까 저택에서 본 대로 생김새가 저마다 달랐고 머리 색도 눈동자 색도 달랐다. 언뜻 새총을 쐈던 소년처럼 보이는 아이도 스칼렛 바로 옆에 서 있었다.

그렇게 모두 다른데 다들 환하게 웃고 있었다. 화가가 일부러 그렇게 그리기도 힘들었을 정도로 모두의 표정이 정말 환했다.

비로소 루키우스는 이 나라에선 본 적이 없지만 얼마 전 읽은 바다 건너의 강대국 페란의 자선 사업 사례집을 떠올렸다.

“설마 뱀파이어 고아들을 거둬서 동생으로 삼은 겁니까?”

스칼렛은 피식 웃더니 액자 속 제 동생들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동생으로 삼은 게 아니라 아버지가 자식으로 삼은 거예요. 비록 변방의 공작이긴 하지만 그것이 상류계급의 의무라고 생각하시거든요.”

“희귀한 분이시군요. 수도에선 상류계급의 의무란 제가 거느린 뱀파이어들에게 넉넉히 피를 주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루키우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저도 모르게 비난 조가 된 것 같아 흠칫 놀랐다.

귀족 앞에서 제 생각을 내보이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고 하물며 스칼렛은 여왕이 될 존재였다.

하지만 스칼렛은 흘려듣는 표정을 짓더니 서랍장 안에 든 손가락만 한 치즈 케이크를 꺼내 건넸다.

“받으세요. 같이 먹죠. 저도 아직 아침 전이거든요.”

그러더니 제 몫도 꺼내 먼저 입에 물었다. 꽤 맛있는지 살며시 눈을 감으며 음미하는 표정이 귀여웠다.

루키우스는 군침이 돌아 치즈 케이크를 입에 쏙 집어넣고는 혀 위에서 사르르 녹아드는 치즈의 맛을 음미했다.

최근에 여왕의 요리사들이 대거 교체되었다고 하더니만 새로운 파티시에의 솜씨가 기가 막혔다.

그야말로 감탄하다가 눈을 뜬 스칼렛과 시선이 맞았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았는데도 정말 맛있다는 감탄사를 눈빛을 통해 주고받았다.

스칼렛은 방긋 웃더니 이번에는 레몬 타르트를 꺼내 그에게 한 조각을 건네고는 다른 한 조각을 제 입에 쏙 밀어 넣었다.

새콤달콤한 맛이 혀 위에서 춤을 췄다.

창을 통해 비춰드는 햇살 아래 스칼렛의 녹색 눈동자 위로 금빛 안개가 반짝거렸다.

루키우스는 심장이 간지러운 묘한 느낌을 받으며 타르트를 꿀꺽 삼켰다. 그러자 스칼렛이 서랍장을 눈짓하며 말했다.

“이번에는 당신이 골라봐요.”

고개를 끄덕이던 루키우스는 스칼렛의 검붉은 입술 아랫부분이 물감을 지운 것처럼 녹아 잘 익은 딸기색이 얼핏 드러난 것을 알아차렸다.

눈동자처럼 예쁜 색이라 저도 모르게 시선을 주자 스칼렛이 손으로 가리며 허둥댔다.

“아! 나오기 전에 덧바르고 나왔어야 했는데….”

“그게 무슨? 마이 레이디. 혹시 분장이라도 하고 계신 겁니까?”

루키우스가 황당해하며 묻는데 별안간 마차 지붕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 반사적으로 고개 젖혀 올려다본 루키우스는 날카로운 화살촉이 지붕을 뚫고 박힌 것을 보았다.

“하! 씨발. 정보가 사실이었군.”

황급히 단도를 꺼내 들며 팔을 뻗어 스칼렛을 끌어안는 순간 마차가 정지했고 티베리우스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왕을 보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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