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롤로그 (1/16)

프롤로그

늦은 밤, 괜찮은 손님이 없나 거리를 어슬렁대던 스칼렛의 눈에 술집에 앉아 있는 남자의 너른 등이 딱 들어왔다.

‘오- 맛있게 생긴 등짝이네.’

후드를 푹 뒤집어쓴 회색 망토 차림인데도 불구하고 여실히 드러나는 등 근육의 리드미컬한 움직임이 무척 근사했다.

슬며시 그가 앉아 있는 술집으로 들어서자 2미터에 가까운 키와 그에 걸맞은 몸집 그리고 통나무처럼 두꺼운 근육질의 팔이 눈에 쏙 들어왔다.

연이어 그가 고개를 번쩍 들며 한 잔 더 달라는 듯 빈 맥주잔을 술집 주인을 향해 흔들어 보였고 그 순간 스칼렛은 숨을 들이켰다.

귀족은 아닌지 짧게 쳐서 뒤로 깔끔하게 빗어 넘긴 흰색에 가까운 금발 머리는 베일 듯 선명했고 우뚝 솟은 코와 살짝 수염이 덮인 턱까지 흠잡을 곳이 하나 없었다.

거장의 조각 같은 완벽한 얼굴에 순백의 피부와 프러시안블루색의 눈동자를 지녔으니 세상 모든 여자가 죄다 부러워할 미형이었다.

하지만 모든 조건 중 최고는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돈주머니였다. 질 좋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 분명해 보였는데도 축 늘어지는 걸 보니 금화가 잔뜩 든 게 틀림없었다.

‘세상에. 다 갖췄네. 다 갖췄어.’

스칼렛은 심장이 뛸 정도로 흥분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남자는 아무래도 모르는 모양이지만 이 술집은 아마칼리 왕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암시장의 입구에 있었다.

왕국의 수도보다 이웃 나라가 가깝다 보니 온갖 이국적인 물건들이 밀수되어 팔리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찾는 손님들도 부유층이 많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손님들을 위해 가무와 미녀를 제공하는 살롱이 줄지어 들어섰고 스칼렛은 살롱에 돈주머니 두둑한 손님들을 엄선해 데려다주고 수고비를 받았다.

만약 그 손님이 지금 눈앞의 남자처럼 여자가 안기고 싶은 미남이라면 살롱의 간판 언니들로부터 감사비도 따로 챙겨 받았다.

그러므로 지금 눈앞의 남자는 한마디로 걸어 다니는 돈주머니였다.

“혼자 오셨나요?”

스칼렛은 남자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조용히 물었다.

한창 식사 중이던 남자가 눈살을 구기며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순간 스칼렛은 프러시안블루색 눈동자 위로 은빛 안개가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아차!

당황한 순간 술집 주인이 맥주가 아닌 블러드 팩이 담긴 컵을 남자 앞에 내려놨다.

비로소 스칼렛은 그가 뱀파이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천사가 환생한 게 아닐까 싶은 아버지 덕분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뱀파이어 동생들을 두고 있다 보니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렇게 예쁘게 생긴 뱀파이어는 처음이라 좀 당혹스러웠다.

아무래도 학교에서 배운 아마칼리 여왕사에 주구장창 등장하는 순혈 뱀파이어인 모양이었다. 대마녀였던 초대 아마칼리 여왕에게 복종의 저주를 받아 현재는 수도의 지체 높은 귀족의 하인 신세로 전락해버린 희귀한 존재들.

‘그렇다 해도 월급을 두둑이 받나 보네. 하긴 충격적일 정도로 잘생겼으니 돈을 주고서라도 고용하고 싶긴 하겠어.’

하지만 놀라고만 있을 때는 아니었다.

인간인 스칼렛과는 달리 동생들은 매일 피를 두 팩 이상은 마셔야 했고 그걸 사기 위해선 하루에 적어도 금화 다섯 닢은 벌어야만 했다.

“흐음- 이곳까지 와서 팩에 든 피라니 뭘 모르시네요. 보들보들한 여인의 목에 이 한 번 콱 박아볼 생각 없어요? 피도 달큰하고, 아래도 쫙 빨아주는 좋은 언니를 알고 있는데.”

스칼렛이 평소 하던 대로 목소리를 낮추며 슬쩍 말을 던지자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 재보는 눈치더니 이윽고 외형에 어울리는 울림 좋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람을 하나 찾고 있는데 혹시 도울 수 있나?”

“제가 이 동네 마당발입니다. 누굴 찾으시는데요?”

스칼렛이 반색을 하며 묻자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

“헐버트 공작의 무남독녀, 스칼렛 헐버트. 공작 말로는 술집 근처에서 일한다고 하던데 이곳에 와보니 가게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묻기도 뭐하다 싶은 상황이거든.”

하마터면 스칼렛은 박장대소를 할 뻔했다.

열 살 무렵 이곳 암시장에서 자질구레한 심부름으로 일을 시작해 8년이 지난 지금까지 별별 일을 다 해왔지만, 눈앞에 본인을 앉혀두고 찾아달라고 말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대체 이 극상의 미남께서 왜 자신을 찾는지 궁금했지만 일단 돈부터 벌고 보자 싶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어디서 일하는지를 알고 있으니 안내해드릴 순 있는데 수고비가 좀 비싼데 괜찮으시겠어요?”

“얼마지?”

“금화 다섯 닢입니다. 헐버트 공녀가 일하는 곳은 암시장 깊숙한 곳에 있거든요. 눈 밝은 길잡이가 없이는 엉뚱한 곳으로 들어서서 길 잃기 십상이죠.”

“암시장? 헐버트 공녀가 암시장에서 일한다고?”

“뭘 그리 놀라십니까? 헐버트 공작가는 가난한 데다 학교에 다닐 아이들이 잔뜩 있는 대가족이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걸요. 장녀인 공녀도 귀족 놀이만 하고 있을 순 없었겠죠.”

스칼렛이 남 일처럼 줄줄 말을 늘어놓자 남자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제 돈주머니에서 금화 다섯 닢을 꺼내 건넸다.

“뭐, 좋아. 어쨌거나 난 공녀를 찾아야 하니 안내해주게.”

스칼렛은 그 돈을 잽싸게 받아쥐고는 벌떡 일어섰다.

“가시죠.”

***

스칼렛은 휘파람을 불며 소풍 가듯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물론 수고비에 걸맞게 곧바로 가지 않고 일부러 복잡한 길을 뱅뱅 돌았다.

물론 갈 곳은 이미 정했다. 살롱 블랙로즈.

그곳 마담은 종족을 가리지 않고 홀라당 벗겨 먹는 재주가 있으니 생긴 것도 특상인 데다 돈주머니까지 두둑한 이 남자를 뼈째 발라먹기에는 적당했다.

다행히 남자는 스칼렛의 그런 속내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는지 쫄래쫄래 잘도 쫓아왔다. 그러면서 자꾸 낮은 신음을 냈다.

“흐음- 이거 아무리 암시장이라지만…….”

스칼렛은 너무 익숙해 무심히 지나치던 거리에 비로소 시선을 줬다.

개미굴이라 불릴 정도로 복잡한 암시장에 빼곡히 들어찬 가게들 대부분은 이웃 나라에서 몰래 들여온 밀수품을 팔았는데 목숨 걸고 국경을 넘나드는 건 바로 뱀파이어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길에 뭔가를 짊어지거나 들고 오가는 뱀파이어들이 무척 많았고 그들을 반겨 맞는 인간 가게 주인들 또한 꽤 자주 보였다.

물론 이런 건전한 광경만 있는 건 아니었다.

배고픔을 못 이겨 거리로 나온 인간 거지들과 역시나 피에 굶주린 뱀파이어 거지들이 가게와 가게 사이의 빈틈을 차지하고 앉아 구걸 중이었다.

또한, 곳곳에 돈주머니가 두둑해 보이는 기름기 좔좔 흐르는 남자들이 제 딸뻘로 보이는 인간 소녀나 뱀파이어 소녀를 옆에 끼고 근처 여관으로 보란 듯이 들어서고 있었다.

아무래도 남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건 저들 때문인 것 같았다.

“허. 손님. 그동안 수도만 계셨나 보네요. 귀족과 젠트리라 불리는 무역상들이 부를 독점하니 변방에 사는 저희 같은 자유민들은 먹고 살길이 막막하거든요. 그러니 뭐든 할 수밖에요.”

스칼렛이 툭, 던진 말에 남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자넨 인간이잖은가. 초대 아마칼리 여왕이 들으시면 까무러치시겠군.”

“아, 물론 펑펑 우시겠죠. 저런 꼴 보기 싫어 마지막 뱀파이어 왕에게 저주를 걸었을 테니. 그래도 어쩐답니까? 입에 풀칠은 해야죠.”

스칼렛의 심드렁한 대답에 남자는 더는 대화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찝찝한 침묵을 유지하면서도 스칼렛은 꿋꿋하게 돌고 돌아 대략 30분 만에 살롱 블랙로즈에 도착했다.

“설마 레이디 스칼렛이 매춘부는 아니겠지?”

남자는 블랙로즈의 입구를 장식한 야릇한 느낌의 검은 레이스를 눈짓하며 물었다.

“매춘부라뇨, 손님. 이곳은 고급 살롱으로 단지 돈주머니가 두둑하다고 아가씨들을 품을 수 있는 곳이 아니랍니다. 아가씨가 허락해야 가능하죠.”

스칼렛은 남자가 도망칠까 봐 걱정스러워 얼른 블랙로즈의 문을 넘어서며 말했다. 남자는 마지 못해 뒤따라 들어오며 헛웃음을 흘렸다.

“고급 창관이란 소리군. 그래서 레이디 스칼렛이 고급 창녀란 건가?”

“딱 잘라 말씀드리는 데 아닙니다. 스칼렛은 굳이 몸을 팔지 않아도 될 만큼 재주가 비상해서요. 암시장 마담들이 죄다 탐을 내는 재주라 그것만으로도 돈푼깨나 만진답니다.”

“대체 무슨 재주기에…….”

남자가 황당해하며 물었지만, 스칼렛은 대답 대신 블랙로즈 가장 안쪽에 있는 별채 앞에 멈추어 서선 조용히 문을 열었다.

“이 안에 있단 건가?”

남자가 묻자 스칼렛은 그의 등을 떠밀며 툴툴댔다.

“질문도 참 많으시네. 이럴 줄 알았으면 질문비를 받는 건데 그랬네요.”

남자는 떨떠름한 기색으로 방으로 들어섰고 스칼렛은 잽싸게 뒤따라 들어가 한쪽에 놓인 장식장으로 다가섰다.

그곳에는 나중에 어마어마한 비용이 청구될 이국의 술이 얼음이 담긴 통 안에 담겨 있었다. 스칼렛은 술병을 들어 옆에 놓인 목이 긴 잔에 가득 따랐다.

융통성 없어 보이는 손님을 위한 투명한 미약이 잔 입구에 발라져 있어 이런 상황에 딱 맞았다.

“일단 이거부터 한잔하시죠.”

그러면서 잔을 건네자 그걸 받아든 남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바젤 공국의 특산품인 곡주로군. 관세가 상당해서 쉽게 맛볼 수 없는 술일 텐데…….”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한 모금 마시고는 숨을 들이켰다.

“순도가 높군. 최고급 술이잖아.”

그런 남자를 바라보며 내색하지 않았지만, 스칼렛 또한 놀라고 있었다.

수많은 손님을 이곳으로 안내해왔지만, 최고급 곡주를 바로 알아맞힌 남자는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모시는 주인이 엄청난 부자인 게 틀림없었다.

그러자 불안해졌다. 이런 남자가 자신을 찾는다니 혹시 아버지가 수도의 귀족에게 빚을 져서 그걸 받으러 온 건가 싶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스칼렛이 암시장에서 벌어들이는 돈의 액수는 날마다 달랐지만 그래도 가족들 입에 풀칠하고도 남는 정도였으니 그럴 이유가 없었다.

‘뭐, 여기서 가진 돈 탈탈 털리고 나서도 날 찾는다면 마담에게 내가 누군지 알려주라고 하면 될 일이지. 그러고도 날 찾아온다면 진짜 중요한 용무가 있는 걸 테니까.’

그러고 있는데 어렴풋이 들어선 문과 맞은편에 있는 문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가볍고 경쾌한 걸 보니 이 살롱 최고 미녀인 카트린느 언니인 모양이었다.

하긴 평범한 뱀파이어와의 밤조차 인간과 비교가 안 되는 쾌락을 맛보게 해준다는데 순혈이라면 상상도 못 할 수준일 거다.

게다가 종족이 달라서인지 뱀파이어와 밤을 보내고 임신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순혈이라면 더더욱 드물 테니 마음껏 즐길 수도 있었다.

그러니 언니들은 모두 제가 가겠다고 난리를 쳤을 테고 스칼렛에게 감사비를 얼마나 낼 수 있는지를 놓고 승자를 정했을 게 분명했다.

‘카트린느 언니는 통이 크니까 다른 언니들이 엄두도 못 낼 감사비를 내놓았을 테지.’

스칼렛은 속으로 히죽 웃고는 남자에게 말했다.

“이곳에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전 바빠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리고는 남자가 잡을세라 잽싸게 방을 나섰다.

스칼렛은 빠르게 정원을 걸으며 마담에게 수고비를 얼마나 달라고 해야 할지 셈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카트린느 언니의 비명이 들려왔다.

스칼렛은 화들짝 놀라 얼른 되돌아갔다.

“언니!”

문을 벌컥 열며 소리치고 보니 카트린느 언니가 남자 손에 목이 잡힌 체 허공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남자는 2미터에 가까운 키와 덩치만큼 힘도 좋은지 카트린느 언니를 한 손으로 들고 서 있었는데 힘겨운 기색은커녕 담담한 표정이었다.

“경비원 부르기 전에 당장 놔줘요!”

스칼렛은 방으로 뛰어들어가 남자를 확 밀쳤다. 하지만 남자는 온몸이 돌덩이인지 밀리기는커녕 카트린느 언니의 목을 잡아 쥔 손을 흔들며 물었다.

“다시 묻지. 헐버트 공녀는 어디 있지?”

그러자 카트린느 언니의 손이 서서히 올라갔다. 스칼렛은 자신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내 남자의 빙하처럼 차가운 눈길이 스칼렛에게 향했다.

“아는 건 너뿐인가 보군.”

절대 눈앞의 스칼렛이 자신이 찾는 여자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하는지 남자는 카트린느 언니를 방 밖으로 집어 던지고는 스칼렛을 잡으려 들었다.

“잠깐만요. 손님. 진정하시고. 일단 진정하시고요!”

스칼렛은 생쥐처럼 방안을 뱅뱅 돌아 요리조리 도망치면서 필사적으로 외쳤다.

“이런 망할! 당장 멈춰 서지 못해!”

남자는 더더욱 성을 내며 어떻게든 잡으려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제 목을 틀어쥐며 우뚝 멈춰 섰다.

스칼렛은 가쁜 숨을 달래며 남자를 바라봤다. 순백의 피부가 불그스름해진 걸 보니 이제야 미약의 효과가 퍼진 모양이었다.

“살았다.”

저도 모르게 읊조리며 벽에 등을 기대고 그대로 주저앉다가 엄청나게 당황했다.

남자가 단정하게 빗어 뒤로 넘긴 제 머리를 손으로 흐트러트리며 흡혈 충동으로 인해 길어진 제 송곳니를 붉디붉은 혀로 할짝대고 있었다.

미약이 순간적으로 강하게 퍼지면서 아무래도 식욕과 성욕이 동시에 찾아온 모양이었다. 자고로 건강한 뱀파이어 남자라면 당연한 상황이기에 스칼렛은 허둥지둥 벽을 짚고 일어섰다.

“저기, 조금 전 그 언니 불러올게요. 아니, 취향이신 분 말씀만 해주시면…….”

하지만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덮쳐들었다.

날카로운 이가 목덜미에 콱 박혔다. 그동안 언니들에게 들었던 대로 아픔 따윈 없었다.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쾌감이 목덜미를 타고 기어올라 혀끝에 고였다.

하아-

고개를 젖히며 탄식하자 남자가 힘껏 피를 빨아들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목울대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울렸고 남자는 이를 거두더니 거친 숨을 토해냈다.

“너 뭐야?”

스칼렛은 영문 모를 그 질문에 답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바라만 봤다. 그러자 남자의 딱딱하게 굳어 있던 입매가 부드러워졌다.

“피를 빨린 게 처음인가 보군. 하긴 생긴 것만 봐선 이런 피를 지니고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 하겠는걸.”

그러더니 목덜미를 손등을 쓸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피부 결이 좋군. 얼굴은 내 취향이 아니지만, 눈동자가 마음에 들어.”

스칼렛은 볼 안쪽을 질끈 깨물었다.

그동안 얼굴을 일부러 괴상하게 만들어 질 나쁜 불한당들을 잘 피해왔는데 설마하니 상관없단 식으로 나오는 남자가 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극상으로 예쁘게 생긴 미남이 그럴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아무래도 얼마 전 마을 사제님이 암시장 어귀에서 ‘네 이웃의 뱀파이어를 탐하지 말라’는 계명을 외치고 있기에 그들이야말로 최고의 손님이라 받아쳤다고 벌을 받는 모양이었다.

‘난 키스조차 아직인데! 흑-’

격렬하게 후회하고 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다시 그녀의 목덜미에 이를 박으며 피를 빨아들였다.

“후- 이거 정말 달군. 굉장해.”

이따금 입술을 거둘 때마다 울림 좋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고 그녀의 얼굴을 덮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손이 허리를 쓸어내리다가 이내 엉덩이를 주물러대기 시작했다.

스칼렛은 남자의 하반신이 무섭도록 부풀어 올라 아플 정도로 강하게 허벅지를 내리누르는 걸 느끼며 몸을 빼보려 애썼지만, 워낙 덩치 차이가 커서 어림도 없었다.

정말이지 무서웠지만, 더 무서운 건 남자의 손길과 흡혈 때문에 몸이 저절로 들뜨는 감각이었다.

왜 평소 건조하던 다리 사이가 축축해지더니 미끄덩거리는 뭔가가 흘러나오는 건지 알 길이 없었고 배 속이 비비 꼬이며 뭔가를 원하는 감각이 기어 올라오는 것 또한 낯설었다.

감당할 수 없는 기분에 코를 훌쩍이는데, 남자의 어깨너머로 불쑥 카트린느 언니가 나타났다.

언니의 손에 들린 건 몽둥이였고, 이내 남자는 짤막한 신음과 함께 쓰러져 기절했다.

“괜찮니, 스칼렛?”

거구의 남자에게 짓눌려 옴짝달싹 못 하는 스칼렛을 끌어내며 언니가 물었다. 스칼렛은 속이 바들바들 떨려왔지만, 아닌 척 의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언니는 그 속을 다 안다는 듯 스칼렛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깐 미안했어. 이 남자가 어찌나 무섭게 구는지 나도 모르게 널 가리켰지 뭐니. 용서하렴.”

“용서하고 말 것도 없어요. 그렇게 험악하게 구는데 당연한 거죠.”

“어휴. 넉살도 좋지. 뭐, 됐어. 이 남자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넌 그만 가보렴.”

언니의 다정한 제안에 스칼렛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서려다 현기증을 일으켰다. 저녁도 제대로 못 먹은 데다 피를 잔뜩 빨리면서 빈혈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이런! 스칼렛. 안 되겠다. 주방으로 가자. 마침 좋은 소고기가 들어와 있으니까 그걸 구워 먹으면 좀 나아질 거야.”

언니가 부축하며 다급하게 외쳤다.

‘신난다. 고기다! 고기!’

스칼렛은 속으로 만세를 외쳤다. 살롱 블랙로즈의 손님은 수준이 상당히 높아서 주방 요리사의 수준이 뛰어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바로 그 요리사가 만들어 줄 스테이크라니 입에 침이 가득 고였다.

스칼렛은 언니 몰래 조용히 침을 꼴깍거리며 일부러 다리에 더욱 힘을 풀며 힘없이 읊조렸다.

“고마워요. 언니. 그런데 고기가 얼마나 있어요? 입맛만 버리는 건 싫은데.”

카트린느 언니는 피식 웃더니 스칼렛을 끌고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알았어. 실컷 먹게 해줄게. 내가 누구니? 이 살롱 간판이다. 간판.”

약속을 받자마자 스칼렛은 폴짝 뛰다시피 바로 서서는 언니의 손을 잡고 외쳤다.

“뭐해요. 그럼 어서 가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