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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화 (319/319)

280화

60. 다시, 시작

눈을 뜨니 코앞에 카루스가 있었다.

꿈인가. 그는 결혼식 전날까지 몹시 바빠 얼굴조차 볼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향긋한 아카시아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저택으로 돌아와 혼자 침대에 누웠던 율리아는 지난 밤 내내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오랫동안 뒤척거렸다.

율리아가 잠들지 못할 거라 예상한 트루디가 자정이 넘은 시간에 방으로 찾아와 뜨거운 수건으로 마사지를 해 주었지만, 그마저도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결국 술을 두어 잔 마신 뒤에야 간신히 눈을 붙였다.

얕고 불안한 잠이 이어졌다. 꿈을 꾸고 깨고, 또 꿈을 꾸고 깨어야 했다.

처음엔 오래된 과거를 꿈꾸었다. 어릴 때 배에 팔렸던 보육원 동기들의 꿈을 꾸고, 굶주려 구걸하던 날의 꿈을 꾸고, 바실리를 동경하던 첫 번째의 율리아가 되기도 했다.

꿈은 곧 과거에서 벗어나 상상의 길에 올랐다.

보석을 삼킨 이후로는 기다리지 않았던 아버지가 갑자기 보육원에 나타나 율리아에게 용서를 빌었다. 늦어서 미안하다고, 엄마가 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며 이제부터 우리 셋이 행복하게 살 거라고 말했다.

꿈속의 율리아는 살아 있는 아버지와 배를 타고 여행을 떠나기도 했고, 코코와 자매처럼 아옹다옹하며 살다가 힌치 백작에게 입양되기도 했다.

누가 그랬던 것처럼 오르테가 최초의 공작이 되어 국왕 못지않은 권력을 손에 넣었고, 대륙 최고의 부자가 되어 보기도 했다.

상상이니까, 꿈이니까. 그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다시 어릴 때의 자신이 떠올랐다. 굶주림에 지쳐 처음으로 죽은 해적의 주머니를 뒤지던 날. 구역질할 때마다 눈물이 한주먹씩 쏟아졌지만, 율리아는 끝까지 그의 주머니를 뒤졌다.

미안하다고 계속 중얼거리면서 제발 동전 하나라도 나오기만을 빌었다.

푸른 바다의 환초가 그녀의 손에 있었다. 그때는 아주 작았을 때인데, 꿈속의 그녀는 이미 다 자란 성인이었다.

율리아는 바닷가에 서 있었다. 손바닥에 위에 올려져 있던 보석은 바다와 똑같은 색깔로 반짝반짝 빛났다.

발끝에 파도가 와 닿았다. 물이 빠지며 모래가 함께 쓸려 내려가 발가락 사이를 간질였다. 율리아는 자신의 삶이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저만치 멀어진 것 같다가도 계속 찾아와 그녀를 끌어당기는, 아홉 번의 삶.

율리아는 손바닥 위의 보석을 차가운 바닷물에 내려놓았다.

금세 파도가 밀려와 모래와 함께 보석을 삼켰다. 흰 거품이 발목을 간질이고 물러나자, 보석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안녕.

그녀는 인사하고 싶었다.

첫 번째의 율리아에게, 두 번째의 율리아에게. 세 번째와 네 번째, 다섯 번째의 율리아에게도.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그리고 여덟 번째의 율리아까지.

안녕이라고.

과거를 버릴 수는 없었다. 잊을 수도 없었다. 언젠가는 남들처럼 흘려보낼 수 있다고 약속하지도 못하겠다.

율리아는 자신의 과거를 담아 두기로 했다. 꼭꼭 담아 두고 때때로 꺼내 보면서 소중히 여길 것이다.

“마지막이니까.”

눈을 뜨니 정말로 카루스가 코앞에 있었다. 그가 환히 웃으며 율리아의 이마에 키스했다. 침대 위에 어지럽게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더니 잠이 덜 깬 그녀의 뺨과 콧날에, 입술에 키스했다.

“뭐가 마지막이야.”

“제가…… 뭐라고 했어요?”

“마지막이라고.”

카루스가 율리아를 품에 안고 일으켜 앉혔다. 그의 몸에 기대앉아 있으려니, 몽롱했던 머릿속이 점차 맑아졌다.

율리아가 그게 아니라며, 카루스에게 말했다.

“잘못 말했어요.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인데.”

“뭐가 시작인데.”

“안 가르쳐 줄 거예요.”

오늘은 우리 결혼식인데 아침부터 이렇게 치사하게 굴 거냐며, 카루스가 짐짓 화난 척을 했다. 율리아는 하나도 무섭지 않으니 빨리 준비나 하러 가자고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트루디가 밤새 한숨도 못 잤대. 눈 밑이 아주 퀭해.”

“아니, 자기가 왜.”

“악몽에 시달렸다던데? 네가 자길 쫓아내는 꿈을 꿨대. 이제 우리가 결혼하고 나면 내가 쫓아낼지도 모르니까 이참에 새 일자리를 구해 보라고 놀렸더니…….”

“울렸어요?”

“흠.”

“사람이 왜 그래요. 남의 하녀를 울리기나 하고.”

그 당돌한 애가 울다니. 율리아가 별일이라며 혀를 찼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정말로 눈이 토끼처럼 빨개진 트루디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율리아가 웃으며 물었다.

“도대체 왜 울었어? 넌 쓰지도 않은 금화가 한 상자나 있는 부자잖아. 여기서 쫓겨나도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 없을 텐데…….”

“싫어요.”

“응?”

“백작님 돌아가실 때까지 모실 거예요. 아니, 저보다 더 오래 사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나중에 백작님 늙으면 병시중도 다 할게요. 그러니까 저 쫓아내지 마세요!”

“누가 쫓아낸대?”

“제독님이……!”

역시 트루디는 참지 않고 카루스를 고자질했다. 율리아가 그를 흘깃 노려보자, 더 신이 나서는 자기가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서러웠는지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바람이 불어 커튼이 크게 휘날렸다. 그 모습을 보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트루디가 율리아에게 다가와 바깥에서 마차가 대기하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알렉사 시녀님이 모시러 왔어요. 준비는 왕궁에서 하고, 그다음에 배로 이동할 거래요. 그러니까 어서 마차에 오르세요.”

“무슨…… 시녀 결혼식 준비를 왕궁에서 한담.”

“어서요, 늦겠어요!”

트루디가 율리아를 문밖으로 밀어냈다. 하얀 왕궁 마차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진짜 아카시아 냄새가 났다.

왕궁에 도착한 뒤엔 샤트린의 궁으로 끌려갔다. 그냥 간 것도 아니고, 끌려갔다는 표현이 옳았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율리아의 항의는 샤트린의 번쩍번쩍한 눈빛 앞에선 아무 힘이 없었다.

샤트린이 율리아를 자신의 드레스 룸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내 시녀들이 얼마나 끝내주는 애들인지 한번 겪어 봐.”

“네?”

“얘들아!”

공주궁의 시녀들은 이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며 히죽히죽 웃었다. 드레스는 이미 완성되어 도착해 있었고, 율리아는 그들에게 이끌려 안으로 들어갔다.

알렉사가 샤트린에게 다가와 말했다.

“저도 이만 준비하러 가 보겠습니다.”

“내가 당부한 거, 안 잊어버렸지?”

“그럼요.”

샤트린의 궁에서 빠져나온 알렉사가 마차에 올랐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걷거나 뛰어서 갔을 텐데, 오늘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알렉사가 탄 마차는 율리아와 함께 타고 온 마차와는 다른 것이었다. 뒤에 넓은 짐칸이 따로 달려 있어 훨씬 크고 길었다.

마부가 반갑게 인사하며 말했다.

“물건은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본성을 제외한 모든 궁에 한 번씩 다 들러야 해.”

“예? 지금요?”

“빨리 출발하지. 시간이 별로 없어.”

“아, 알겠습니다.”

당황한 마부가 다급히 말을 몰았다. 마차가 빠른 속도로 다음 건물을 향해 달렸다. 알렉사는 자신의 드레스를 탁탁 털어 구겨진 곳은 없는지 확인했다. 그러곤 한쪽에 고이 챙겨 두었던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엔 공단으로 만든 파란 코스모스가 들어 있었다.

꼭 생화처럼 아름다웠다. 얇은 꽃잎은 바람이 불 때마다 춤추듯 흔들리고, 노란 수술도 꽃가루가 묻어날 것같이 어여뻤다. 알렉사가 그 꽃을 조심스레 가슴에 달았다.

“다 왔습니다, 시녀님!”

첫 번째로 도착한 곳은 수습 시녀들이 기본 교육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기거하는 기숙사 건물이었다. 알렉사가 마차에서 내리자, 똑같은 디자인의 진주색 드레스를 입은 수습 시녀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알렉사 시녀님, 저희는 준비 끝났어요!”

“벌써? 결혼식까진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

“돕고 싶어서요. 돕게 해 주세요. 네?”

“그럼 일단…….”

알렉사가 수습 시녀들에게 마차에 실려 있는 상자를 나눠 주었다. 그들은 상자 안에서 파란 코스모스 장식을 발견하곤 작은 비명을 지르며 서로의 가슴에 달아 주었다.

“이걸 왕궁의 모든 시녀에게 나눠 주고 와.”

“전부요?”

“그래.”

“맡겨만 주세요!”

수습 시녀들이 상자를 품에 안고 흩어졌다. 거리가 먼 궁으로 가는 아이는 마차를 타고, 가까운 궁으로 가는 아이는 종종걸음으로 움직였다.

바람이 불어 시녀들의 치마가 둥글게 부풀었다. 또 한 번 작은 비명을 지른 아이들이 상자를 들지 않은 손으로 치마를 꾹 누르며 각자 다른 방향으로 걸었다.

바람에 꽃잎이 날리듯 어여쁜 광경이었다.

해가 머리 위 하늘에서 살짝 기울었을 무렵, 율리아 아르테와 카루스 란케아의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율리아는 왕궁에서 샤트린 공주과 함께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준비를 마친 레위시아와 코코가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하려 작은 소란을 피웠지만, 결혼식을 준비한 건 샤트린이었기에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차를 타고 바닷가로 이동한 뒤엔 꽃으로 장식된 나룻배를 타고 군함을 향해 움직였다.

새파란 바다 위에 거대한 군함이 나란히 서 있고, 희고 작은 나룻배가 율리아를 실어 날랐다.

수많은 사람이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부둣가엔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러 나온 오르테가의 백성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얇고 긴 치마가 바람에 휘날렸다. 두 겹, 세 겹으로 휘날리며 둥글게 부푼 치맛자락은 그녀를 바다 위에 내려앉은 새처럼 보이게 했다.

율리아가 탄 배가 군함에 닿자, 백성들이 한꺼번에 소리를 질렀다.

꽃으로 장식된 밧줄이 내려와 작은 배를 통째로 들어 올렸다. 카루스가 율리아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율리아가 그의 손을 잡았다.

와아아아!

이번엔 군함 위에서 환호성이 쏟아졌다. 카루스의 부하들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두 갈래로 나뉘어 길을 만들었다. 그들 사이사이엔 똑같은 디자인의 드레스를 입은 왕궁 시녀들이 가슴에 파란 코스모스를 달고 서 있었다.

꿈처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파란 하늘과 흰 구름, 파란 바다와 흰 파도, 그리고 파란 코스모스를 달고 있는 하얀 옷의 시녀들.

왕궁 시녀들이 치마를 두 손으로 잡고 율리아를 향해 살짝 무릎을 굽혔다. 왕족을 제외한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우를 보이며 그녀를 마중했다.

율리아는 카루스의 손을 잡고 그 길을 따라 걸었다.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시녀들이 축하한다고 속삭였다. 수습 시녀들도 눈물 그렁그렁한 얼굴로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카루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왠지 널 빼앗아 가는 나쁜 놈이 된 기분이야.”

길 끝 단상 위에 레위시아가 서 있었다. 그의 곁엔 코코와 알렉사가 서 있었다.

코코의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용케 떨어지진 않았지만, 툭 치면 와르르 쏟아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레위시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의 눈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알렉사는 두 사람이 울까 봐 제가 더 불안해하고 있었다.

아홉 번째의 율리아가 결혼을 한다.

율리아의 눈에도 물기가 고였다. 지금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결혼식이 갑자기 커다란 의미가 되어 다가왔다.

행복했다.

어쩌면 나는 이 순간을 위해 그렇게 많은 과거를 짊어져야 했던 게 아닐까. 이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그렇게 오래 떠돌아야 했던 게 아닐까.

잊히기 싫어서 누구와도 마음을 나누지 않았는데, 너무 깊은 마음은 결국 인연이 되고 운명으로 남는 게 아닐까.

“진짜 시작이에요.”

율리아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란 걸 깨달은 카루스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먼 길이었다.

눈보라 치는 산에서 여기까지.

그리고 이제는 정말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율리아가 크게 심호흡하고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를 따라 카루스도 한 걸음을 내디뎠다.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음악과 함께 터질 듯한 환호성이 쏟아졌다.

오르테가의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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