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시작은 북부의 한 귀족이었다. 그는 오르테가의 풍요로운 자원과 자유로운 분위기에 취해 잔뜩 들뜬 얼굴로 왕궁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산책하던 샤트린 공주와 마주쳤고,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 뒤엔 수습 시녀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일행과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하! 저 넨장맞을 공주를 차지하는 놈은 아주 팔자가 피겠구나!”
“이봐, 자네 아들이 품기엔 썩 높은 여자야.”
안내를 맡았던 수습 시녀들이 한꺼번에 얼굴을 굳혔다. 북부인이 쓰는 어휘가 워낙 투박하고 가끔은 반대의 의미를 뜻하는 경우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이번에는 도저히 못 들은 척 넘길 수가 없었다.
한 수습 시녀가 홱 뒤를 돌았다. 그러곤 그 귀족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뭐요?”
“저희가 듣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감히 저희가 존경하며 사랑하는 샤트린 공주 전하께, 지금 뭐라고요?”
“칭찬이외다!”
“칭찬이요? 희롱이 아니고요?”
“거, 내가 뭐랬다고 이러시오?”
“말을 왜 그따위로 하시냐고요!”
“뭐라고?”
귀족이 발끈 화를 냈다. 딸보다 어린 시녀에게 말투를 지적받으니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었다.
“오르테가의 시녀들은 원래 이렇게 시건방진가? 바이칸에서도 이런 취급을 받은 적이 없거늘! 귀빈을 대할 때는 서로의 문화적 차이를 껴안으라고 배우지 못했소?”
말문이 막힌 수습 시녀가 바르르 떨었다. 그게 아니라고, 그쪽이 말을 기분 나쁘게 한 거라고 항변했으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려 조금도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때 소녀가 동기의 손을 잡아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 그러곤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그 귀족에게 말했다.
“문화적 차이라는 말로 무례를 포장하지 마세요. 그쪽은 감히 오르테가의 공주 전하를 실없는 농담거리로 삼았고, 내 동기는 해야 할 말을 했어요.”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졌다. 그쪽에서도 귀족의 동료들이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잘못한 건 아직 철없는 너희 시녀들이라며, 먼저 사과하라고 타일렀다.
“농담거리로 삼은 게 아니라 칭찬한 거요. 이분은 북부의 어른인데, 그냥 잘못했다고 하면 넘어가 주실 테지. 응? 원래 이럴 때는 어린 사람이 숙여야 하는 거야.”
“어른의 잘못을 젊은이에게 뒤집어씌우는 게 북부의 문화인 모양이죠?”
“뭐라고?”
“그렇다면 잘못했네요. 그쪽 어른의 잘못이지만, 새파랗게 어린 제가 사과할게요.”
소녀의 눈에서 차가운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드레스는 정말 아름다웠다. 어쩐지 코코의 취향이 진하게 묻어 나오는 것 같았지만, 율리아는 모르는 척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사람이 달라붙어 그녀의 몸에 드레스를 맞추었다. 완성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며, 그때 또 한 번 들러서 마지막 점검을 하자고 제안했다.
“이제 끝났어?”
“힘드세요, 백작님?”
“아니. 괜찮은데…… 걱정되는 일이 있어서.”
“무슨 걱정이 있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곧 결혼식을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다 해결해 줄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지만.”
앳된 얼굴의 수습 시녀들을 떠올린 율리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드레스 가봉이 끝나자마자 왕궁으로 다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았다.
오늘 아이들이 안내를 맡은 북부의 귀족은 독립 왕국의 신흥 귀족들이었다. 그중엔 한때 용병이었던 자도 있고, 군인이었던 자도 있었다.
그들은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제는 무력보다 상업에 몸을 던져야 한다는 걸 깨닫고 오르테가에 줄을 대고자 찾아온 기회주의자였다.
예절이나 법도로부터 자유로운 편에 속해, 안심하고 안내를 맡겼는데.
‘아무래도 불안해.’
수습 시녀들의 맹랑한 눈빛이 떠올랐다. 율리아 앞에서는 얌전한 강아지처럼 굴지만 돌아서자마자 앙칼진 맹수가 되던 소녀도.
“끝났습니다. 고생하셨어요, 백작님.”
“고마워.”
할 일을 마치고 가게를 나서려는 율리아에게 트루디가 요란하게 달려왔다.
“배, 백작님!”
불길한 예감은 왜 늘 피해가질 않는지.
“왕궁에서 싸움이 났대요!”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 버린 율리아에게, 트루디가 두 눈을 질끈 감고 고자질을 마쳤다.
“수습 시녀님들이 북부에서 오신 손님들을 상대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싸우고 있다고…….”
“마차.”
“대기시켰어요!”
“따라와.”
가게 문을 열고 나서는 율리아의 치맛자락이 크게 휘날렸다. 고자질하러 올 때까지만 해도 불안해 어쩔 줄을 모르던 트루디는 그제야 안심했다는 얼굴로 씩씩하게 달려가 마차 문을 열었다.
“아저씨, 빨리요! 빨리 왕궁으로요!”
율리아와 트루디가 마차에 오르고 문이 닫히자마자 바퀴가 힘차게 구르기 시작했다.
노발대발하던 북부의 귀족들은 율리아의 이름을 듣고는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얼어붙었다.
“율리아 아르테라고?”
그들은 지금까지 수습 시녀들을 상대로 싸우던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율리아를 뜯어 보았다. 꼭 이야기 속에만 나오는 사람을 실제로 마주한 것처럼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수습 시녀 중엔 울음을 터뜨린 아이도 있었다. 무리를 지어 자신을 보호하는 물고기처럼 한데 모여 서로를 지키던 아이들은 율리아가 도착하자마자 슬금슬금 그녀의 곁으로 가더니 눈물을 닦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위로해 줄 법도 한데, 율리아는 아이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녀는 그냥 북부의 귀족들에게 다가가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곤 이렇게 물었다.
“제 제자들이 무슨 실례를 했기에 이렇게 화를 내고 계시죠?”
“제, 제자라고요?”
“오르테가의 전통 있는 가문에서 추천한 아이들이에요. 귀한 손님이시니 특별히 안내를 부탁했죠.”
“크흠!”
그들은 겸연쩍어 했다. 율리아의 말에 숨은 뜻을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수습이라고 우습게 본 모양인데, 이 아이들의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지도 못하면서 손님이라는 이유로 으스대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물론 가문이 전부는 아니었다.
“제가 손수 가르치는 제자들이고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귀빈께 무슨 실수를 했다면 제게 말씀하세요.”
그들은 감히 율리아 아르테에게 언성을 높일 수 없었다. 시녀들의 잘못을 일러바칠 수도 없었다.
율리아 아르테는 북부 패전국 연합이 바이칸과의 전쟁에서 고전하고 있을 때, 오르테가와 블라이스의 이름으로 전쟁 자금을 보낸 장본인이었다. 심지어 바이칸의 미래를 예언자처럼 예측하고 그들에게 정보를 공유해 준 은인이기도 했다.
크세노의 바이칸을 무너뜨리고, 데네브라의 바이칸으로 다시 세운 여자.
“사소한 오해가 있었을 뿐입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귀족들이 한껏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앞에서 산책하던 공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을 만난 게 기뻐서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뱉었어요. 결혼 안 한 아들이 한 놈 있어서……. 북부에서는 아주 좋다는 말을 하고 싶을 때 나쁜 단어를 섞어 쓰기도 하거든요. 어린 시녀님들이 오해했나 봅니다.”
“오해요.”
“예, 그것참…… 왕실을 사랑하는 좋은 시녀를 두셨습니다.”
그들이 먼저 수습 시녀들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눈이 빨갛게 부은 아이를 달래며 손을 내밀었다.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귀족이 먼저 머리를 숙이고 사과하며 악수를 청하자, 시녀들은 울먹이면서도 그들의 손을 잡았다.
“미안합니다, 시녀님들.”
억지로 하는 사과이건, 입에 발린 거짓말이건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율리아는 그들이 정중하게 사과하는 모습을 눈여겨보았다. 간신히 화를 삭이며 사과를 받아들이는 아이들의 모습도 눈여겨보았다.
* * *
“죄송합니다.”
수습 시녀들이 깍듯이 머리를 숙였다. 손님들을 다 보내고 난 뒤, 아이들은 율리아에게 사고를 쳐서 죄송하다며 용서를 빌었다.
“저희를 믿고 맡기셨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서…….”
“왕궁에 오는 사람들은.”
율리아가 차분하게 그들의 말을 끊었다.
“전부 감시자라고 생각해.”
수습 시녀들이 입을 꼭 다물었다. 귀빈을 대접하긴커녕 말로 패싸움을 했으니, 당장 왕성에서 쫓겨나도 할 말이 없었다.
율리아가 계속 말을 이었다.
“너희의 말씨, 차림새, 눈빛과 태도. 뭘 얼마나 알고 있는지, 뭘 얼마나 배우고 익혔는지, 누구를 섬기며 누구를 위해 움직이는지. 매일, 어디에서, 누구에게나 감시를 받는다고 생각해야 해. 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한 번의 시험을 치른다고 생각해야 하고.”
왕궁 시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왕궁을 대표하는 얼굴이라는 건 그냥 듣기 좋게 꾸며 낸 허울일 뿐이야. 너희는 이제부터 칼날 위에서 사는 거야. 중심을 잃는 순간 너희가 죽거나, 다른 사람이 죽을 수도 있겠지.”
“……명심하겠습니다.”
아이들은 쫓겨날까 봐 겁을 먹은 상태였다. 율리아가 그들을 데려온 곳은 넓은 응접실이었는데, 한쪽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저들끼리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어깨가 겹치도록 가까이 붙어서는 누구 하나 나서지도 못한 채 울상을 지었다.
아이들이 괴롭히던 소녀도 그 한가운데에 껴 있었다.
늘 겉돌기만 하던 소녀가 무리의 중앙에서 동기들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소녀를 밀어내는 아이는 없었다.
소녀의 오른손은 노예 운운하던 귀족 아이가, 왼손은 크게 말다툼을 했던 아이가 잡았다. 그게 무슨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꽉 잡고 놓지 않았다. 누가 보면 살벌하게 싸우던 앙숙이 아니라, 둘도 없는 벗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율리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봄바람 같은 미소였다. 잔뜩 긴장했던 아이들이 멍하니 고개를 들고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반쯤 돌린 채 어깨를 떨며 웃었다.
소녀가 망설이다 물었다.
“시녀님?”
율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잘했어.”
“네?”
“하녀들한테 다 들었어. 내 전속 하녀는 왕궁 안에 모르는 사람이 없거든. 손님들의 무례를 당당하게 지적한 것도 모자라 샤트린 전하의 명예를 지켰다고 하던데?”
수습 시녀들이 어색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 크게 혼이 날 줄로만 알았는데, 칭찬을 듣다니. 눈동자에 눈물이 빠르게 차오르더니 금세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모시는 왕족을 대신할 때는 절대 굽히지 않는 거야. 잘했어.”
“시녀님……!”
“너희는 전부 합격이야.”
율리아가 그들에게 다가가 자랑스럽다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아이들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어린애처럼 율리아에게 안겨 우는 아이도 있었다. 저들끼리 껴안고, 서로의 팔에 매달려 울었다.
소녀도 울고 있었다.
독한 녀석이라 혼자 안 울 줄 알았는데, 양팔에 동기를 하나씩 매달고 제일 큰 소리로 울었다.
“내가 왕궁에 들어오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공부했는데…… 너희 때문에 쫓겨날 뻔했어. 내가,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그러게 왜 나섰어. 이 멍청아! 지켜 줄 가문도 없는 게! 그냥 우리 뒤에서 찌그러져 있었어야지!”
“너무 화가 났단 말이야! 제까짓 게 뭔데 우리 공주님을 노려? 제까짓 게 뭔데 우리 왕궁을 우습게 봐!”
“난 네가 제일 무서웠는데…….”
그날 이후 레위시아 국왕의 수석 시녀 율리아 아르테가 수습 시녀로 들어온 이름 높은 가문의 아가씨들을 쥐잡듯이 잡아 한꺼번에 울렸다는 소문이 퍼졌다.
또 북부의 귀족들이 그 어린 시녀들에게 크게 혼이 나, 왕궁 구경은커녕 만찬에 초대도 받지 못하고 서둘러 궁 밖으로 나갔다는 소문도 함께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