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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화 (317/319)

278화

“율리아 시녀님!”

“여럿이 하나를 놓고 행패나 부리고.”

언제더라. 레위시아에게 처음으로 경연장에 함께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을 때, 화를 내던 코코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짜증을 내면서도 굳이 경연장까지 따라와 율리아에게 시비 거는 귀족 자제들을 파리처럼 내쫓았다.

요즘 의도치 않게 자꾸 코코의 심정을 알게 되는 기분이었다.

“누굴 혼내거나 편들어 줄 생각은 없어.”

비록 자신이 평민 출신이라 해도 마찬가지라고, 율리아가 말했다.

“그동안 내가 너희를 너무 풀어 줬던 모양이야. 공주 전하의 궁에서 왕족을 모시는 법에 대해 깨닫길 바랐는데, 그것조차 실패한 것 같고.”

“시녀님, 저희는…….”

“샤트린 전하께서 말씀하셨지.”

율리아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선 조금의 웃음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국왕 전하의 눈에 들어 왕비가 되고자 하는 꿈을 꾸는 아이가 여럿, 가문에서 탈출하고자 관리직 시녀를 원하는 아이가 또 여럿, 그리고 아직 진로를 결정하지 못했다는 아이가 여럿이라고.”

수습 시녀들이 찔끔해서 고개를 숙였다.

샤트린은 율리아가 맡기고 간 수습 시녀들과 함께 열흘 동안 흥청망청 놀았다. 매일 만찬을 즐기고 음악회를 열었으며, 드레스를 입혀 보거나 춤을 추기도 했다.

한마디로, 왕궁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사치를 누리게 했다.

“공주 전하께서 왜 그러셨는지 알아?”

샤트린과 공주궁의 시녀들은 노련했다. 수습 시녀들을 구박하고 채찍질하는 대신 열흘 동안 향락에 빠져 살게 했다.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시녀의 본분을 다하는 자.”

옥석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신분 운운하면서 건달패처럼 모여 싸우는 게 시녀의 본분이야?”

“아니요.”

“신분 상승하거나 가문으로부터 도피하는 게 시녀가 되려는 이유라고?”

“아, 아니요.”

“그럼 왕궁에 왜 들어왔어?”

율리아가 물었다.

수습 시녀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거짓말을 하자니 너무 쉽게 간파당할 것 같고, 솔직하게 말하려니 쫓겨날 것 같았다.

솔직히 무서웠다. 무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건 커다란 착각이었다. 율리아 아르테는 그 대단했던 마조람 후작을 사형대에 세운 사람이었다.

오르테가를 지배하던 파벌 하나를 무너뜨린 잔인한 지략가.

그들은 가문에서 들었던 율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곤 떨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느라 무진 애를 썼다.

율리아가 다시 물었다.

“왜 왕궁에 들어왔는지 말해 봐.”

“저는…….”

그때 식당을 가득 채운 불편한 침묵을 뚫고, 따돌림당하던 소녀가 말했다.

“거울이 되려고 왔어요.”

분노로 꽉 눌려 있던 목소리가 어느새 평상시처럼 돌아와 있었다. 창백했던 얼굴도 발그레했다. 율리아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그녀를 동경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거울?”

소녀 특유의 맑은 목소리가 율리아의 귓가를 울렸다.

“빛을 비추면 더 환한 빛으로 돌려주고…… 귀한 사람은 귀하게, 추한 사람은 추하게 비춰 주는 거울이요. 왕궁 시녀는 그런 존재라고 들었어요. 왕족을 왕족답게, 왕궁을 왕궁답게 비추는 거울.”

소녀가 그렇게 말하곤 먼저 고개를 숙였다. 방금 식당에서 일어난 일은 모두 제 잘못이라며, 너그러이 용서해 달라고 간청했다.

“용서해 주세요, 율리아 시녀님.”

다른 수습 시녀들도 뒤늦게 소녀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그날 율리아는 수습 시녀들에게 오르테가 왕실 역사와 전통, 예법 등을 직접 가르쳤다. 그녀가 알려 주는 건 무척 어렵고 난해한 것들이었다.

율리아는 수습 시녀들이 수업 내용을 따라오지 못해도 봐주지 않았다. 같은 내용을 두 번 설명해 주지도 않았다. 대신 그와 관련된 책을 각자의 기숙사 방에 가져다 두도록 했다.

“시녀님, 이것도 시험에 나오나요?”

한 아이가 물었다. 율리아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시험을 어떤 식으로 치르게 되는지는 안 알려 줄 거야.”

“네에?”

“대신 너희들이 기본 교육 기간을 무사히 통과하면 어떤 상을 받게 될지 알려 줄게.”

마침 이번 봄에 예정된 행사가 있었다.

“너희는 내 결혼식 연회에서 각국에서 온 사절들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게 될 거야.”

“네? 결혼식이요?”

긴 수업으로 축 처져 있던 수습 시녀들의 분위기가 반짝 살아났다. 아이들은 결혼식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며 그녀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드레스는 누구한테 맡길 건지, 결혼식은 어디에서 할 건지, 국왕 전하께서는 허락하셨는지.

꼭 제 일처럼 흥분하며 설렘을 느끼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율리아가 꿍꿍이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 * *

결혼식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연회 전문가인 샤트린과 남다른 도량을 가진 카루스, 시녀가 된 뒤 처음으로 연회 준비를 해 보는 알렉사가 손을 잡고 종횡무진 뛰어다녔다.

결혼식 장소는 카루스의 주장대로 거대한 군함을 나란히 세워 놓은 선상으로 결정되었다. 오르테가는 어부들을 시작으로 해상 무역이 발달해 이루어진 국가이기에, 그의 선택은 많은 사람을 기쁘게 했다.

수백 장의 초대장이 만들어졌다. 열 명이 넘는 화가가 초대장 제작에 매달렸다. 진주색 카드에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실루엣이 그려졌다.

율리아의 결혼식 드레스는 코코가 직접 수배한 디자이너가 맡았다.

“오늘은 드레스 가봉이 있어서 바쁘니까 미리 연습할겸 너희끼리 손님을 맞이해 봐.”

“저희도 시녀님 결혼식 드레스 보고 싶은데…….”

“어차피 결혼식 날 보게 될 텐데, 뭐 하러?”

“그래도 먼저 보고 싶어요!”

수습 시녀들은 율리아를 무서워하면서도 좋아했다. 교육 일정을 촘촘하게 짰더니 한 사람을 따돌리거나 괴롭힐 시간이 없어져서인지, 분위기도 전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코코가 눈여겨보던 소녀는 조금씩 동기들 사이에 스며들고 있었다. 아직은 겉도는 느낌이 남아 있었지만, 어려운 공부를 다른 수습 시녀들에게 가르쳐 주면서 사이를 좁히고 있다고 들었다.

소녀가 물었다.

“오늘 오시는 분들은 어떤 손님이에요?”

“북부 독립 왕국에서 온 귀족들이라고 들었는데, 문화적으로 통하지 않는 부분이 많으니까 신경 써서 대화해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내일 보자.”

율리아는 수습 시녀들을 귀빈궁 입구까지 데려다준 뒤 드레스 가봉을 위해 자리를 비웠다. 그녀가 탄 마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수습 시녀들이 짧게 여러 번 심호흡했다.

“들어 봐, 얘들아. 이건 어쩌면 시험일지도 몰라.”

한 아이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동기들의 모두 제 말에 귀를 기울이자, 아이는 잔뜩 신이 나서 촉새처럼 떠들었다.

“귀빈궁은 외국에서 온 손님들을 접대하기 위해 개방됐잖아. 여기 오는 사람들은 왕족이거나 적어도 사절의 자격을 갖춘 신분 높은 귀족일 거라고! 그런 사람들에게 왕궁을 안내하는 일이야. 거기에 우리 같은 수습 시녀를 배치했다는 게 뭐겠어?”

“시험이구나!”

“분명 감시하는 사람이 있을 거야. 안 보이는 데서 우리를 지켜보면서 점수판에 숫자를 적어 넣고 있을 거라고!”

“혹시 샤트린 공주 전하의 시녀님들일까? 율리아 시녀님은 드레스를 가봉하러 가셨으니까…….”

“나 갑자기 떨리기 시작했어. 어떡하지? 손이 너무 차가워.”

“난 딸꾹질이 나려고 해.”

수습 시녀들이 어쩔 줄을 모르며 거울을 찾았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는 겉모습이라도 멀쩡해야 한다며, 차림새를 정돈하느라 난리였다.

그때 소녀가 입을 열었다.

“북부에서 누가 오든 너희보다 예쁘고 귀해 보이진 않을 테니까 염려 마요.”

“어?”

“오르테가의 잘난 귀족 아가씨들은 여느 독립 왕국의 공주님보다 어여쁘고 우아하거든요. 그러니까 꼴사납게 긴장하다 실수하지 말라고.”

“뭐…… 뭐야?”

칭찬은 칭찬인데 기분이 나빴다. 말투도 그랬다. 예의를 지키는 건지 아닌 건지 영 알쏭달쏭했다.

“야! 칭찬하려거든 칭찬을 하고, 욕을 하려거든 차라리 욕을 해! 그딴 식으로 말하면 헷갈려서 더 기분 나쁘니까.”

동기들이 앙칼지게 목소리를 높이자, 소녀가 슬그머니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곤 저만치 멀리서 다가오는 마차들의 행렬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뭐, 손님 오신다고요.”

북부에서 온 귀족들은 오르테가의 날씨에 적응하지 못했다. 지금이 봄이 맞냐고, 저기 피어 있는 게 정말 여름꽃이 아니라 봄꽃이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그들이 쓰는 언어도 알아듣기 어려웠다. 분명 같은 말을 하고 있는데, 순서가 이상하거나 억양이 달랐다. 가끔은 단어의 뜻이 다를 때도 있었다.

서로가 처음이었다. 북부의 귀족들은 오르테가에 적응하지 못해 너무 얇은 옷을 입거나, 너무 두꺼운 옷을 입기 일쑤였다. 오르테가의 시녀들은 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투박한 표현에 당황해 자주 얼굴을 굳히곤 했다.

그러다 결국 사건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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