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괴성을 지르던 기사들도 입을 꽉 다물고 자세를 바로 했다. 옷도 안 입은 채 점잖은 척 율리아에게 길을 비켜 준 그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카루스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칼을 내리곤 알렉사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실력이 많이 늘었군.”
언제 창을 버렸는지, 빈손이 된 알렉사도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독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다가왔다. 그러곤 두 사람이 혹시 상처를 입진 않았는지 눈으로 살폈다. 다행히 작은 생채기만 나 있을 뿐, 둘 다 멀쩡해 보였다.
“할 얘기가 있어서 왔는데, 왜 이렇게 매일 싸우고 있는 거예요.”
“할 얘기라니?”
“샤트린 공주 전하께서 우리 결혼식 준비를 직접 하시겠대요.”
카루스가 들고 있던 목검을 툭 떨어뜨렸다. 율리아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도대체 누가 그렇게 소문을 내고 다녔는지 모르겠네요. 그렇죠? 조용히 치르려고 했는데. 뭐라더라. 군함을 아카시아로 가득 채우려면 얼마만큼의 꽃이 필요하냐고요?”
“아니…….”
“덕분에 남부가 들썩거릴 만큼 성대한 결혼식의 주인공이 되었어요.”
“왜? 그게 왜 그렇게 되는데?”
“우리 결혼식으로 악귀처럼 몰려드는 구혼자들을 물리치겠대요.”
“그러니까 그게 왜 그렇게 되는데?”
“구혼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생각해 보겠다는 일종의 선전포고죠.”
참 샤트린다운 발상이라고, 카루스가 중얼거렸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취향으로는 데네브라에게도 지지 않는 공주는 율리아의 결혼식으로 욕구불만을 해소하려는 게 틀림없었다.
알렉사가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승전 연회조차 생략했으니 몸이 근질근질하실 겁니다. 백성들을 위한 축제는 일주일이나 진행하며 국경일로 지정하기까지 했는데, 왕궁은 조용했거든요. 코코와 국왕 전하께서 율리아가 돌아오면 생각해 보겠다고 한사코 고집을 부려서…….”
“어쩔 수 없네요.”
율리아가 카루스에게 당부했다.
“저는 수습 시녀 교육을 맡게 되어서 당분간 바쁠 것 같아요. 카루스 님이 샤트린 공주님과 상의해서 준비해 주실래요?”
“그건 어렵지 않은데…….”
카루스가 저만치 멀어진 기사들을 보며 씩 웃었다.
“마침 노는 놈들도 있군.”
그가 도망치는 기사들을 잡으려 걸음을 뗐다. 싸울 때는 살벌하게 그를 노리던 알렉사가 어느새 한마음이 되어 기사들을 쫓았다.
* * *
가뜩이나 자리 없는 부두에 거대한 유람선이 닻을 내렸다는 소식이 들렸다. 북부와 바이칸에서 온 귀족들이었다. 그중엔 후계 서열에서 밀려난 왕족도 몇 섞여 있었다.
율리아는 오랜만에 자신의 저택에서 잠들었다가 아침이 되자마자 그 소식을 들었다.
둥근 쟁반에 새 수건과 따뜻한 물을 챙겨 온 트루디가 수다스럽게 입을 열었다.
“엄청 비싼 옷을 입고, 엄청 거드름을 피우면서 내리더래요. 처음 보는 양식의 옷을 입은 사람이 많았는데, 오르테가의 따뜻한 날씨에 적응을 못 해서 지금이 이른 봄이 맞냐고 묻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고 들었어요.”
“얼마나 많이 왔대?”
“수행원들까지 헤아리면 수백은 되겠죠? 고급 여관엔 이제 자리가 없어서 친분 있는 귀족들에게 별장을 빌린다나 봐요.”
율리아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늘하늘한 침대 커튼을 손수 걷어 낸 그녀가 옆자리에서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는 카루스를 흔들었다.
“일어나요. 언제까지 잠만 잘 거예요?”
“…….”
“계속 자는 척하면 혼자 왕궁으로 가서 식사할 거예요.”
“왜 그러는 거야.”
카루스가 마지못해 일어났다. 바쁘다며 왕궁에서 돌아오지 않는 율리아를 저택에서 매일 기다렸던 그는, 아침이 되자마자 다시 출근하려는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수습 시녀 교육이 그렇게 바쁘고 중요한 일이야?”
“그럼요.”
“그런 건 그냥 알렉사한테 맡기지 않고.”
“알렉사한테 맡겼다간 시녀들이 훈련복을 입고 연무장에서 체력 단련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코델리아 시녀장은?”
“코코한테 맡기면 전부 울면서 왕궁을 뛰쳐나가겠죠.”
트루디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도, 그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면서. 하녀들 사이에 꽤 오랫동안 회자된 이야기라고 했다.
“어찌나 고소해하던지! 수습 시녀님들은 도대체 왜 그렇게 하녀들한테 못되게 구는 걸까요?”
“트루디, 이따가 나랑 같이 왕궁으로 가서 이번에도 그런 수습 시녀가 있는지 알아보고 와.”
“맡겨만 주세요!”
트루디는 오랜만에 왕궁 하녀들을 모아 놓고 다과회라도 열어야겠다며, 간식을 챙기러 주방으로 달려갔다.
트루디가 가져온 물에 손을 뻗는 율리아에게 카루스가 다가왔다. 그는 침대에 앉은 채로 율리아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의 긴 팔이 허리를 감싸고, 그의 턱이 율리아의 어깨에 걸쳐졌다.
“넌 좀 쉬어야 해.”
“내가 너무 무리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물어보면 할 말은 없지만.”
카루스는 율리아가 이보다 더 많은 일을 한꺼번에 해치울 수 있는 능력자란 걸 알고 있었다. 바이칸 황실에서 3년이란 세월을 보낸 그녀는 전보다 더한 괴물로 성장했다.
“수습 시녀 교육을 아무한테나 맡길 수가 없어서 그래요. 우리 왕국엔 남은 왕족이 몇 없고, 시녀는 더 없잖아요.”
그렇다고 아무나 들일 수도 없었다. 레위시아와 샤트린은 아직도 그들을 이간질하려는 귀족들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2년 전 선왕의 왕비가 시름시름 앓다 죽은 뒤부터는 원로원에 남겨진 4왕자에게 접근하려는 자들도 많았다.
율리아는 텅 빈 왕궁을 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자꾸 들러붙는 카루스를 떼어 내고 왕궁에 도착한 율리아는 레위시아를 찾기 전에 수습 시녀들의 기숙사로 향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를 알아본 하녀들이 반갑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뒤에서 트루디가 나타나자, 하녀들은 아예 한쪽으로 쪼르르 달려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인사를 나누었다.
율리아는 수습 시녀들이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는 식당으로 향했다.
안에서 잔뜩 독 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노예 출신은 티가 난다고 말하는 거야. 아무리 잘해 주려고 해도, 아무리 우리와 똑같이 생각하려고 해도,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내가 무슨 짓을 했는데요.”
“피해자인 척하잖아. 불쌍한 척, 가난한 척, 착한 사람들의 동정심을 이용해서 뭔가를 더 얻어 내려고! 그게 얼마나 비겁한 일인 줄 알아? 우리는 뭐 귀족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냐고?”
“제가 노예선에 팔린 게 제 잘못은 아니죠.”
“누가 그렇대? 그냥 네 말대로 동등하게 경쟁하자고. 그러자고!”
“동등?”
일대 다수의 싸움이었다. 교복을 입고 면접을 보러 왔던 소녀가 혼자였다. 소녀는 아름답게 치장한 동기들 사이에 서서 꽉 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당신들이 동등하다고요? 그렇게 대놓고 노예 출신이란 말을 흘리고 다니면서, 동등하다고요?”
“다를 게 뭐야. 네 말대로 우리 모두 시험을 쳐서 들어온 건데.”
“가문의 힘, 입김, 비싸고 명망 높은 선생님과 전직 시녀님들의 입궁 지도, 각종 뇌물에 전담 하녀들까지……. 동등하다고요?”
수습 시녀들은 아직 어렸다. 열아홉 혹은 스물. 이제 갓 성인이 된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율리아는 식당 문에 기대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엿들었다.
한 수습 시녀가 잔뜩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우리가 귀족인 게 너한테 잘못이니?”
소녀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었다. 그러다 이렇게 말했다.
“불쌍한 척한 적 없어요.”
“뭐?”
“날 불쌍하다고 손가락질하고 수군거린 건 그쪽이잖아요. 쟤는 옷이 없어서 저딴 걸 입고 왔나 봐. 쟤는 시녀가 되겠다는 애가 손이 저게 뭐야. 어디서 허드렛일이라도 했나 봐. 시녀는 왕궁의 얼굴인데, 저 가난해 보이는 애를 내세우면 꼴사나워서 어떡해……. 이렇게 말했잖아요.”
“내가 언제…….”
“동정심을 이용해서 비겁하게 합격할 생각 없어요. 이 왕궁에 진심으로 날 불쌍해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거든요.”
그러자 처음 소녀에게 시비를 걸었던 수습 시녀가 픽 웃으며 말했다.
“평민은 그래도 괜찮은데, 노예는 좀 그렇지.”
소녀의 얼굴이 창백했다.
“어디서 뭐 하다 굴러들어 왔는지 알 게 뭐야.”
“전 노예가 아니에요. 어릴 때 노예 상인에게 붙잡혀서 노예선에 팔렸을 뿐이고, 오르테가에는 노예 제도가 없으니까……!”
“너 때문에 우리까지 격이 떨어지고 있다는 걸 알아야지!”
더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만.”
율리아는 일부러 소리 나게 식당 문을 열었다. 그러곤 거침없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의 구두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울리며 또각또각 소리를 냈다.
화들짝 놀란 수습 시녀들이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 급하게 헛숨을 들이켜거나 당황한 얼굴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 아이도 있었다.
소녀의 얼굴에서 오래전의 자신이 겹쳐 보였다. 다른 아이들의 얼굴에선 크리스틴과 마조람 후작 부인, 샤트린 공주를 비롯해 왕궁에서 그녀를 괴롭혔던 많은 사람이 떠올랐다.
왠지 웃음이 났다.
“왕궁의 법도를 익혀 훌륭한 시녀가 되길 바랐는데.”
율리아가 노래하듯 말했다.
“입만 산 싸움꾼들이 모여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