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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화 (315/319)

276화

공주궁 정원으로 들어선 율리아의 눈에 화려한 테이블이 죽 늘어서 있는 게 보였다.

도톰한 숄을 걸친 샤트린과 시녀들이 정원에서 작은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율리아가 맡겨 놓은 수습 시녀들은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차 시중을 들었다. 제법 능숙하게 찻잎을 다루는 아이도 있었고, 긴장감 때문에 우왕좌왕하는 아이도 있었다.

샤트린이 율리아를 발견하곤 손을 번쩍 들고 흔들었다.

“율리아!”

“공주님, 뭐 하시는 거예요?”

“네 결혼식 예행연습.”

왜 다들 내 결혼식 얘기뿐일까. 율리아가 샤트린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물었다.

“제 결혼식이 언제인데요?”

“어? 아카시아가 필 무렵이라던데?”

“누가 그래요?”

“코코가.”

코코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율리아가 눈썹을 가운데로 모으고 생각에 잠겼다.

샤트린이 웃으며 물었다.

“카루스 란케아도 그러던데?”

“카루스 님이요?”

“군함 하나를 아카시아로 장식하려면 얼마나 많은 꽃이 필요하겠냐고, 내 시녀장한테 물어봤대.”

“언제요?”

“얼마 안 됐어.”

설마 비밀이었던 거냐며 샤트린이 제 입을 손바닥으로 살짝 때렸다. 하지만 이 왕궁 안에서 이렇게 큰 행사가 비밀리에 진행될 수는 없으니,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다고 스스로 변명하기도 했다.

샤트린이 손짓으로 한 시녀를 불렀다.

“얘, 거기 너. 이리 와서 손님께 차를 대접해 봐.”

수습 시녀 하나가 서둘러 이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율리아와 코코가 눈여겨보았던 그 소녀였다.

소녀는 어설픈 자세로 차를 준비했다. 순서는 맞는데, 처음 해 보는 티가 역력해 책을 보고 달달 외운 게 눈에 보였다.

샤트린의 시녀들은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모든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소녀는 눈대중으로 보고 따라 했을 뿐, 아직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우아함은 갖추지 못했다.

율리아와 샤트린의 시선이 소녀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오르테가에 하나밖에 없는 공주와 수석 시녀 율리아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생각에, 긴장한 소녀가 주전자를 쥔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찬 바람이 불었다. 차를 따르는 소녀의 얼굴이 창백했다. 다른 시녀들은 값비싼 숄이나 털 장식 조끼를 입고 있는데, 소녀는 드레스 위에 수수한 조끼를 두 겹 겹쳐 입고 있었다.

굳은살이 박여 거칠어 보이는 손가락엔 작은 화상 자국이 있었다. 아직 물집이 잡혀 있는 걸 보니 얼마 되지 않은 상처였다.

샤트린이 입꼬리를 한쪽만 씰룩거리며 물었다.

“네가 걔구나?”

“네?”

“수습들 사이에서 괴롭힘당한다던 아이가.”

샤트린이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공주가 상스럽게 욕을 하자 깜짝 놀란 소녀가 둥근 눈을 더 동그랗게 떴다.

“출신 때문인가? 나이가 어려 철이 없는 건 알겠는데, 왕궁에 들어와서 한다는 짓이 고작 약한 아이 하나를 골라서 괴롭히는 거라고? 그러고도 시녀가 되겠단 말이야?”

율리아가 의외라는 얼굴로 샤트린을 바라보았다. 이런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던 공주가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말해 봐. 누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저, 저는…….”

“아주 그냥 머리채를 잡아서 가문까지 질질 끌고 갈 테니까.”

소녀가 우물거리며 샤트린과 율리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답답해진 샤트린이 한 차례 더 보챘지만, 소녀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율리아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수습 시녀는 교육이 진행되는 동안 왕궁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어. 누가 네게 어떤 방식으로든 폭력을 썼다면 우리에게 고발해도 된단다.”

“수습이 아니게 된 뒤에는요?”

소녀가 물었다.

“전부 제 책임이 되나요?”

율리아가 이번에는 살짝 웃음 지으며 대답해 주었다.

“왕궁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는.”

상대가 명백히 죄를 짓지 않는 이상은 자신의 책임이란 소리였다.

천천히 눈을 깜박이던 소녀가 샤트린에게 푹 고개를 숙였다.

“마음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제가 차 시중을 처음 들게 되었을 때, 아무것도 몰라서 저지른 실수예요. 앞으로는 조금 더 조심하겠습니다.”

샤트린이 입을 다물었다.

“저는 괴롭힘당하지 않았어요.”

소녀가 힘주어 말했다.

“제 동기들은 전부 좋은 친구들이에요.”

흥미가 식어 버린 샤트린이 물러나란 뜻으로 손을 흔들었다. 소녀는 공주와 율리아에게 다시 인사를 하고는 수습 시녀들이 서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수습 시녀들이 어색해하며 소녀에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소녀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아이도 있었다.

소녀는 그들 사이에 난 자리로 가서 당당하게 섰다. 율리아와 샤트린을 앞에 두고서는 긴장해서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치던 아이가 동기들 사이에선 맹수와도 같은 존재감을 내뿜었다.

샤트린이 찻잔으로 입을 가린 채 율리아에게 속삭였다.

“웃기는 애네.”

“코코가 점찍은 아이예요.”

“조용하고 영리하길래 너랑 닮았나 했더니, 코델리아 시녀장이었나?”

“열흘 동안 어떠셨어요?”

“쟤들 중 네 명은 레위시아를 노리고 왕궁에 들어왔고, 다섯 명은 관리직 시녀가 되어서 가문에서 독립하고 싶대. 나머진 아직 결정하지 못한 것 같고…… 저 웃기는 애는 속을 모르겠어.”

“흠.”

율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저들 중 누구를 집으로 돌려보낼지 고민할 때였다.

샤트린이 은근슬쩍 다가와 그녀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나저나 결혼식 준비는 누구한테 맡길 거야?”

“네에?”

“코델리아 시녀장은 바쁘잖아. 왕궁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나한테 맡겨야지! 알렉사는 결혼식 준비 같은 건 해 본 적도 없을 거고 국왕 전하께 부탁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 나밖에 없어! 그렇지?”

“공주님.”

“본식 드레스부터 연회용 드레스에, 초대장에 그릴 초상화 화가도 서둘러 섭외해야 하고, 연회 음식은 어떤 풍으로 할 건지……. 아! 식장에 음악은 꼭 미리 맞춰 봐야 해. 소리라는 건 공간을 많이 타거든. 테이블은 요즘 유행하는 꽃무늬 레이스를…….”

“샤트린 공주님.”

율리아가 기어이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다들 왜 그렇게 제 결혼식에 집착하는 거예요?”

샤트린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어깨가 닿을 정도로 율리아에게 몸을 붙인 그녀가 욕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질 수 없어서 그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봄이 되자마자 대륙 여기저기에서 별의별 놈들이 다 온다고 하잖아. 그중 절반은 레위시아 전하께 청혼하러 오는 거고, 나머지 절반의 절반은 나한테 청혼하러 오는 거겠지. 그러고도 남는 놈들은 젊고 미혼인 권력자를 찾을 거야.”

“아니, 무슨…….”

발정기에 영역 투쟁하는 동물들도 아니고.

율리아가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꿀꺽 삼키자, 샤트린이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무혈 제독에게도 붙을 거야.”

“카루스 님한테요?”

“너도 마찬가지고.”

오르테가엔 미혼인 왕족이 둘이나 있다. 하물며 오르테가에서 가장 유명한 귀족인 코델리아 시녀장과 카루스 란케아, 율리아 아르테와 알렉사 콴이 모두 미혼이다.

율리아와 카루스가 약혼하긴 했지만 가까운 사람들만 참석했던 작은 행사였기에, 외국에서 오는 손님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샤트린이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질 수 없지. 네 결혼식을 최대한 성대하게 열어서, 그 결혼 장사꾼들을 한 방에 퇴치하는 거야!”

“왜 하필 제 결혼식이에요.”

“결혼할 사람이 너밖에 없잖아.”

“다들 그동안 연애도 안 하고 뭐 했담.”

“국왕 전하는 일이 많아 바쁘고, 코델리아 시녀장은 일 시키느라 바쁘고, 알렉사는 연애를 너무 많이 해서 바쁘고, 나는 왕궁 살림하느라 바쁘고…….”

율리아가 데네브라와의 약속을 지키느라 바이칸에서 3년을 보내는 동안 오르테가 왕궁은 넘쳐나는 구혼자들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을 상대하며 퇴치하는 건 샤트린의 역할이었다.

“난 너무 지쳤어.”

샤트린이 율리아의 손을 꼭 잡더니 간절히 부탁했다.

“율리아, 내가 준비하게 해 줄래?”

율리아가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공주궁의 시녀들이 한꺼번에 다가와 그녀에게 번쩍거리는 눈빛을 보냈다. 그들의 눈에서 오랜만에 맞이하는 경사에 잔뜩 흥분한 기색이 느껴졌다.

율리아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요.”

공주궁이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샤트린의 목청이 제일 컸다. 그녀는 시녀들을 꽉 끌어안고 오르테가에서 가장 아름답고 성대한 연회를 준비하자며 소리를 질렀다.

* * *

해안가 모래밭에 한 무리의 기사들이 둥근 원을 그리며 모였다. 그들은 차가운 바닷바람에도 모두 윗옷을 벗고 있었다. 갈색으로 탄 피부에 성난 근육이 꿈틀거렸다.

“이겨라! 이겨! 쓰러뜨려!”

“그래, 거기…… 거기야! 잘한다!”

긴 나무창이 한 바퀴 돌아 모래사장을 긁었다. 허공으로 튀어 오른 모래가 비처럼 쏟아졌다. 그렇게 시야를 빼앗은 여자가 창으로 상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목검을 든 남자가 빠르게 몸을 뒤로 물렸다.

“비겁하다!”

“비겁하긴? 여긴 모래사장이야! 허튼 소리하려거든 꺼져!”

기사들의 목소리가 우렁찼다. 그들은 반으로 나뉘어 창을 든 여자와 목검을 든 남자를 응원하고 있었다. 대련이 길어질수록 응원이 싸움으로 번지고 있긴 했지만, 내깃돈까지 거하게 걸려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알렉사, 알렉사!”

“카루스, 카루스!”

분위기가 점점 과열되었다. 두 손으로 나무 창을 돌리던 알렉사가 카루스에게 말했다.

“봐주지 말고 최선을 다하시죠.”

“너야말로 오늘따라 몸이 무거운데?”

“과식해서 그렇습니다.”

알렉사가 웃으며 창을 휘둘렀다. 순수한 힘을 제외하면 카루스에게 무엇하나 밀리지 않는 그녀는 오늘에야말로 승부를 결정짓겠다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카루스도 마찬가지였다. 힘과 속도에서는 앞서는 게 분명한데, 무기를 다루는 기술만은 알렉사를 따라갈 수 없었던 그는 이번 대련에서 반드시 승리하려 마음먹었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흰 모래사장을 밟고 달렸다. 응원하던 기사들이 괴성을 질렀다. 두 사람이 뛰어오를 때마다 모래가 튀었다. 무기와 무기가 부딪치고, 나무가 패였다.

길이가 긴 창이 카루스의 목 옆으로 들어오고, 그가 내지른 칼은 알렉사의 가슴에 닿을 듯했다.

그때 율리아가 나타나 말을 걸었다.

“두 분…… 뭐 하세요.”

두 사람이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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