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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화 (314/319)

275화

수습 시녀들을 공주궁에 맡겨 놓고, 율리아는 열흘 동안 레위시아를 보필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봄을 맞은 오르테가에 배가 한꺼번에 몰려와 어부들이 부두에 빈자리가 없다며 아우성이었다. 책상 위에 쌓인 탄원서를 읽던 레위시아가 번쩍 고개를 들고 말했다.

“배가 왜 이렇게 많이 오는 건데? 무역선이야 그렇다 치고, 유람선? 유람선이라고? 이것들이…… 도대체 남부에서 뭘 하려고 이 난리인 거야?”

율리아가 담백하게 대꾸했다.

“전하께 청혼하러 오는 거겠죠.”

“하.”

레위시아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벅벅 긁었다.

“이 넓은 대륙에 미혼인 왕이 나 하나도 아니고, 데네브라 섭정왕도 남편 없이 혼자잖아! 카루스 그 자식도 아직 미혼이라고!”

“제독께선 약혼하셨잖아요.”

“너 꼭 남의 일인 것처럼 말한다? 기분 나쁘게.”

“저희 약혼이 전하의 심기를 거슬렀다니…….”

“거슬렀지. 그래서 결혼은 절대 허락 안 해 줄 거야. 왕궁 시녀는 왕족의 허락이 있어야 결혼할 수 있는 거 알지? 나한테 잘하라고 해. 안 그러면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죽게 만들 테다.”

“진심이세요?”

“거짓말 같아?”

“그럼 오르테가 왕궁에 독신의 저주가 깃들었다고 소문이 나겠네요. 전하께서 그렇게 심술을 부리시면 카루스 님은 질 수 없다며 전하와 주위 사람들을 괴롭힐 거고, 우리는 아무도 결혼하지 못한 채 독신으로 다 함께 늙어갈 거예요.”

“와, 너 요새 성격 나빠졌다?”

“여기 들어온 게 언제인데, 저도 배우는 게 있겠죠.”

“누구한테 뭘 배워?”

“전하께 말로 사람 속 긁는 법을…….”

레위시아가 내가 언제 그랬냐며 벌떡 일어나 따지기 시작했다. 그의 언성이 높아지자 무슨 일인가 싶어 궁금해진 보좌관들이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두 번의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자, 꽥꽥 소리를 지르던 레위시아가 재빨리 근엄한 얼굴을 하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어조를 낮추어 말했다.

“아르테 백작의 말이 옳다.”

뭐가 옳다는 거예요.

율리아가 그를 말 없이 노려보았다.

“그건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고…….”

보좌관들이 저게 무슨 뜻이냐고 율리아에게 물었다. 왕이 하는 말인 만큼 중요한 명령일 거라 착각한 모양이었다.

율리아가 그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녀도 레위시아처럼 근엄한 얼굴이었다.

“각국에서 들어온 무역선과 유람선이 부두를 장악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의논 중이었습니다. 부두 확장 공사가 마무리될 때까지는 남부 함대 기지를 일부 개방하고, 관광객들이 오르테가에서 마음껏 여흥을 즐길 수 있도록 편의를 봐줘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아!”

보좌관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죠! 왕족이나 부유한 귀족층이 오는 거니까요. 금화를 물 쓰듯이 쓰고 갈 겁니다. 우리한테는 좋은 일이고 말고요.”

과연 전하의 혜안을 따라갈 수가 없다며 보좌관들이 레위시아를 치켜세웠다. 그는 괜히 아부하지 말라며 쑥스러운 얼굴로 웃었고, 보좌관들은 그런 그를 흐뭇하게 바라보곤 집무실 밖으로 물러났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레위시아가 율리아에게 말했다.

“카루스랑 결혼해도 평생 내 밑에서 일할 거지?”

“성격 나쁘다면서요.”

“그럴 리가 있나. 내 수석 시녀는 대륙에서 제일 영리하고 마음이 선하며, 선구자적 지혜를 갖춘 인재인데.”

“제가요?”

“내가 가족보다 더 믿고 아끼는 사람이지. 오르테가의 보옥이라는 말도 아까워. 율리아 아르테는 남부의 구원자야!”

율리아가 집무실에서 뒤돌아 나가며 말했다.

“흠, 괜히 아부하지 마세요.”

그녀의 옆얼굴이 익숙했다. 못된 고양이처럼 얄미운 미소. 남겨진 레위시아가 허탈한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왕의 집무실에서 빠져나온 율리아는 곧장 샤트린의 궁으로 향했다. 마차를 타고 갈 수도 있었지만, 날씨가 좋아 그냥 걸었다.

지나가던 병사들이 그녀를 발견하곤 멈춰 서서 인사를 건넸다.

“아르테 백작님, 어디 가십니까?”

“공주궁에 가려고.”

“마차를 불러 드릴까요?”

“괜찮아.”

왕궁에서 봄이 온 걸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곳은 선왕의 왕비가 기거하던 왕비궁이었다. 병사들은 그곳 정원에 노란 봄꽃이 피었다며, 결혼식은 거기서 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율리아는 그냥 웃었다. 카루스와 그녀가 약혼한 건 지난가을이었다.

바이칸에서 돌아온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건 코스모스로 가득한 저택이었다. 그녀의 바닷가 저택에 색색의 코스모스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카루스와 코코의 작품이었다. 두 사람은 여름 동안 색이 예쁜 코스모스 씨앗을 잔뜩 모아 저택 여기저기에 뿌렸다. 꽃밭을 만들기 위해 정원사를 따로 고용하기까지 했다.

가을이 되자마자 꽃이 피기 시작했다. 율리아의 저택은 비탈진 바닷가에 세워져 있었다. 저택 입구에서부터 정원을 지나 바닷가 해변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수의 코스모스가 바람을 타고 춤을 추었다. 꽃의 파도였다.

율리아는 그곳에서 청혼받았다.

이제 네가 없으면 단 하루도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달콤한 고백이 이어졌다. 카루스는 긴장하고 있었다. 율리아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파도를 따라 물결치는 코스모스 속에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졌다.

꽃 한 송이 사 줄 돈조차 없던 그는 늘 길가에 핀 꽃을 한 아름 따다가 율리아에게 선물하곤 했다.

돈도 안 되는 걸 왜 자꾸 가져오냐고 구박하면, ‘네 엄마는 좋아했는데.’라고 말하며 쑥스러워하던 아버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없는 세상에선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오직 율리아 때문에, 그가 사랑하는 여자가 세상에 남겨 놓은 아이 하나 때문에 꾸역꾸역 목숨을 붙들고 있었다.

카루스의 얼굴에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졌다가, 이내 환영은 사라지고 사랑하는 남자의 얼굴만 남았다.

“날 사랑해요?”

아무리 사랑해도 그런 말로 어린애처럼 보채는 건 유치하다고 생각했는데, 자꾸만 같은 걸 물어보게 되었다. 그는 그때마다 같은 대답을 반복하면서도 조금도 지루해하지 않았다.

“이상하죠. 이렇게까지 당신을 사랑하는 내가 낯설어요. 그런 내가 점점 좋아지기까지 해요. 당신은 나를 이 세상에 발 디디게 하는 유일한 사람이에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서 나를 이해하게 됐어요.”

“율리아.”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어린애 같은 사람인지, 당신을 사랑하는 게 얼마나 나를 성장하게 하는지…….”

당신을 사랑해서 살고 싶어졌다. 영원히 변치 않을 거라는 말로 운명을 묶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 말뿐인 약속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왔지만, 사랑엔 말로 하는 약속이 꼭 필요하다는 것도 이제 안다.

“우리 결혼해요.”

마침내 율리아의 입에서 떨리는 고백의 말이 흘러나왔다.

카루스는 태양을 닮은 노란색 코스모스를 하나 꺾어 그녀의 귀에 꽂았다. 그러곤 다가오는 봄에 오르테가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자고 말했다.

이후 두 사람이 약혼했다는 소문이 오르테가를 뜨겁게 달구었다.

코코와 레위시아는 왕궁을 개방해서 성대한 연회를 열자고 했지만, 바이칸에서 막 돌아온 율리아에겐 산더미 같은 일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들만 초대해 작은 연회를 열었다. 율리아는 카루스에게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와 꼭 닮은 반지를 선물했고, 카루스는 율리아에게 푸른 바다의 환초와 꼭 닮은 반지를 끼워 주었다.

가을은 금세 지나 어느 때보다 따뜻한 겨울이 되었다. 율리아는 다시 레위시아의 수석 시녀가 되었다.

3년이나 섭정왕 데네브라의 시녀장이었던 사람을 왕의 측근으로 둘 수는 없다며 반대하는 자들이 많았지만, 율리아가 전쟁 당시 세웠던 공훈을 생각하면 공작 작위를 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레위시아가 화를 내자 조용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율리아는 오래전의 마조람 후작보다 더 큰 권력을 손에 넣었다.

그녀는 견제의 대상이었으며, 두려움의 상징이기도 했다. 레위시아 국왕을 왕좌에 앉힌 장본인이자 왕궁을 움직이는 숨은 실세이며, 섭정왕 데네브라의 측근이고, 남부에서 가장 강력한 무력을 가진 무혈 제독의 연인이었다.

격변의 시기를 겪고 있는 오르테가는 그사이에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승전 이후 대륙에서 가장 부유해진 국가는 오르테가였다.

좁은 영토에 반해 풍부한 자원과 사계절 따스한 날씨, 드넓은 영해의 소유권. 오르테가는 레위시아 국왕의 치세 아래 대륙 최고의 부국이 될지도 몰랐다.

율리아는 그런 왕국의 젊은 실세였다. 레위시아가 권력을 내려놓고 몸을 낮추는 왕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녀는 언젠가 왕보다 더 큰 힘을 손에 쥐고 흔들 수도 있었다.

“아르테 백작.”

지나가던 귀족이 율리아를 붙들고 말을 걸었다.

“조만간 결혼식을 올릴 거라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어디서 들으셨어요?”

“사교계에 소문이 파다합니다. 초대장을 쟁취하려는 자들이 벌써 줄을 서고 있다던데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저희 가문엔 당연히 초대장을 넉넉하게 보내 주시겠지요?”

그는 한때 마조람 후작의 파벌이었으나 과감하게 그들을 배신하고 뛰쳐나와 레위시아의 발밑에 엎드린 자였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어마어마한 전쟁 지원금을 내놓으며 과거의 오점을 지우려 노력했다.

율리아는 그가 청한 악수를 기꺼이 받아 주었다.

“다들 제 결혼식을 이렇게 기대해 주시니, 열심히 준비해야겠네요.”

“오르테가의 경사지요.”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귀족이 능청스레 속삭였다.

“후작 작위를 거절한 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젊으시니, 오래 지나지 않아 또 기회가 오겠죠. 어쩌면 오르테가에 최초의 공작이 나타날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결혼식 기대 하겠습니다.”

그와의 인사를 마치고, 율리아가 공주궁 앞에 섰다.

낮은 담 안쪽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이 그녀를 알아보곤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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