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코코가 정말 모르겠다고 중얼거렸다. 부은 눈에 다시 얼음주머니를 올린 그녀가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창가로 다가간 율리아가 밖을 내다보았다.
가을에 오르테가로 다시 돌아온 그녀는 겨울을 지나 또 한 번의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왕궁 정원에 꽃보다 어여쁜 새싹들이 자라났다. 이름 모를 어린싹들이 봄 내음을 맡으려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늘진 곳엔 아직 찬 기운이 남아 살얼음이 껴 있었지만, 햇살 내리쬐는 곳마다 뾰족뾰족한 풀들이 카펫처럼 깔렸다.
왕궁에 못 보던 얼굴이 많았다. 본관 경비를 서는 병사들은 전쟁 이후 군에 지원해 수년 동안 훈련을 받은 정예군이었다. 관리직 시녀의 비중이 크게 늘고, 왕족 전담 시녀는 그만큼 줄어들었다.
궁내부의 변화가 가장 컸다. 왕궁의 살림을 맡아 하는 곳이라는 이유로 모든 일을 내밀하게 처리하던 그들은, 음침한 곳일수록 구린 게 많아 보인다는 코코의 구박에 공개적으로 조직을 개편해야만 했다.
레위시아는 좋은 왕이었다.
완벽하고 강한 군주는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본관 문지기보다도 못한 검술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잠들기 전엔 매일 다른 분야의 스승을 데려다 조언을 구했다.
율리아가 레위시아를 좋은 왕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좋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그를 도우려 하기 때문이었다.
“코코.”
“왜.”
“그걸 왜 벌써 고민해요. 후작님은 아직 정정하신데.”
“아버지가 자꾸 내일 죽을 것처럼 엄살을 피우니까…….”
“제가 코코라면 둘 다 포기하지 않았을 거예요.”
코코가 들고 있던 얼음주머니를 놓쳤다. 툭 소리와 함께 떨어진 얼음주머니에서 물이 새어 나왔다.
“뭐?”
“힌치 후작님은 아직 젊어요. 브레웨 아카데미 학장님을 보세요. 여든이 넘었는데도 정정하시잖아요. 후작님께 노환이 찾아올 때까지는 왕궁 시녀장 자리를 지키다가, 그때쯤 가문으로 돌아가도 늦지 않아요.”
“아버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싫어할 것 같은데.”
“그런 고민할 시간에 몸에 좋은 약이나 지어 드려요.”
“그럴까.”
“그래도 마음에 걸리면 그땐 왕국 법을 뜯어고치면 되죠. 왕궁 시녀도 한 가문의 가주 노릇을 할 수 있도록.”
“그러다 우리가 다 은퇴할 때쯤에 시녀 출신 반역자가 나올 수도 있어.”
“은퇴하기 전에 다시 고쳐요. 시녀는 가문을 물려받을 수 없게.”
“나쁜 계집애네, 이거.”
“이제 알았어요?”
다 코코한테 배운 거예요. 율리아가 웃으며 건넨 말에, 코코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면접은 어땠니.”
“그냥…… 새삼스러웠어요.”
“뭐가?”
“제가 왕자궁에 처음 들어왔을 때, 코코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달까.”
“넌 진짜 이상한 계집애였어.”
그날을 떠올린 코코가 동그랗게 말아 놓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그녀의 머리엔 물망초 모양의 머리핀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율리아, 이번에 새로 들어오는 애들은 네가 교육해 봐.”
“제가요?”
“기본 교육 과정이 끝나면 관리직 시녀가 될지, 왕족 전담 시녀가 될지 선택해야 해. 아마 대부분은 관리직 시녀가 되려고 할 거야. 봉급이 안정적이고 권력 싸움에서 자유로운 편이니까.”
“왕족 전담 시녀는 인기가 없나 봐요.”
“있었지. 있었는데…….”
다 떨어뜨렸다. 코코가 짜증스레 말했다.
“전부 레위시아 전하를 노리고 들어온 애들이더라고. 앵무새처럼 꾸미고 나타나서는 온종일 향수만 뿌려 대니, 가르칠 수가 있어야지. 머리가 아파서 다 쫓아내 버렸어. 감히 그딴 마음가짐으로 왕궁에 발을 들였냐고,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었다간 육신에서 영혼을 뽑아 버리겠다고 협박했더니…… 울면서 뛰쳐나가 버렸어.”
다시는 그때와 같은 일을 겪고 싶지 않다며, 코코가 머리를 싸맸다. 그녀의 책상 위엔 이번 수습 시녀들의 지원서가 올려져 있었다.
“얘들은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면접장에서 만난 지원자들을 떠올린 율리아가 괜찮을 거라며 코코를 달랬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엔 다를 거예요.”
“확실해?”
“네, 제가 보기엔…….”
지원자 중 왕족 전담 시녀가 되려는 아이는 기껏해야 서너 명일 것이다. 꼬질꼬질한 교복을 입고 면접장에 나타난 아이도 거기 속해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얼마나 괴롭힘을 당했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던, 절박해 보이던 아이.
“괜찮아 보였어요.”
“그 애 말하는 거야? 내가 눈여겨보라고 했던?”
“제가 잘 가르쳐 볼게요.”
코코의 책상에서 지원서를 집어 든 율리아가 미소를 지우고 서류에 집중했다. 그녀의 눈빛이 순식간에 깊게 가라앉았다.
* * *
“레위시아 국왕 전하께서는 시녀를 줄줄이 데리고 다니는 걸 어릴 때부터 좋아하지 않으셨어. 유모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어린애 같다고 창피해하셨지.”
수습 시녀들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율리아의 눈치를 보며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했다.
“나도 오해했었어. 왕궁 시녀라는 건 그냥 값비싼 찻잎이나 고르면서 왕족의 곁을 장식하는 인형이 아닌가, 비난했거든.”
율리아가 수습 시녀들의 차림새를 눈으로 훑었다.
코코가 말했던 것처럼 알록달록 앵무새 같은 아이는 보이지 않았지만, 딱 달라붙는 옷을 입어 은근히 몸매를 드러내거나 코를 찌르는 향수를 뿌린 아이들이 있었다.
그녀는 코코처럼 드러내 놓고 화를 내지는 않았다. 다만 생각할 거리는 던져 줄 뿐이었다.
“시녀란 무엇인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너희들은 스스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야 할 거야.”
그렇게 말한 율리아가 수습 시녀들을 데리고 왕궁 정원을 가로질러 어느 궁 입구에 섰다.
아름다운 궁이었다. 한때는 오르테가 왕궁에서 가장 화려한 실내 장식을 자랑하던 곳이었으나, 최근 주인의 취향이 달라져 전보다는 훨씬 기품 있는 모습이 되었다.
“샤트린 공주 전하의 궁이야.”
율리아가 수습 시녀들에게 고갯짓으로 입구를 가리켰다.
“너희는 오늘부터 열흘간 공주 전하의 궁에서 선배 시녀들과 함께 생활하게 될 거야. 왕족을 가까이에서 모신다는 게 어떤 일인지 몸으로 배우고, 마지막 날에는 공주 전하께 평가받는 시간을 가질 거고.”
소풍 가듯 발랄하던 수습 시녀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하게 굳어졌다.
“저희가 바로…… 공주 전하의 궁에 들어간다고요?”
율리아 아르테가 코델리아 시녀장보다 훨씬 부드럽고 무른 사람이라고 생각한 그들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운이 좋았다면서 저들끼리 속닥거리고 있었다.
실제로 율리아는 코코처럼 완고하거나 무섭지 않았다.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고, 어려운 과제를 안겨 주지도 않았다.
그녀는 항상 물처럼 잔잔하고 평온해 보였다.
“저기, 율리아 수석 시녀님. 하나만 여쭤봐도 되나요?”
“그래.”
“열흘 동안 배운 걸 공주 전하 앞에서 평가받는다는 건…… 그러니까, 저희가 또 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말씀이세요?”
수습 시녀들의 얼굴에 불만이 피어올랐다. 그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서 면접까지 보고 들어왔는데, 또 평가라니. 게다가 하필이면 오르테가 왕족 중에서 가장 성격이 까탈스럽다는 샤트린 공주의 궁이라니.
“저희는 수습 기간만 지나면 정식 시녀가 되는 줄 알고…….”
“그럼 나중에 관리직 시녀로 지원하면 되겠네.”
율리아가 눈으로 웃었다.
“미리 말하지만, 나는 코델리아 시녀장님보다 사람 보는 눈이 높아.”
“네?”
“내 마음에 들려면 아주 많이 노력해야 할 거야.”
그때 공주궁 문이 열리며 샤트린의 시녀들이 걸어 나왔다. 가문으로 돌아가는 것조차 포기한 채 공주의 곁에 남겠다고 맹세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율리아를 보자마자 자연스레 그녀에게 길을 터 주며 옆으로 물러나 곱게 머리를 숙였다.
“율리아 수석 시녀님.”
“다들 오랜만이야.”
율리아가 그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불만으로 가득했던 수습 시녀들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샤트린 공주의 시녀들은 그들이 상상해 왔던 완벽한 시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드레스와 고급스러운 장신구, 작은 움직임과 말투 하나하나 모두 우아했다.
공주궁도 마찬가지였다. 구두를 신었는데도 푹신하게 느껴지는 카펫과 세 겹의 커튼으로 장식된 창문, 안쪽에선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율리아가 샤트린의 시녀들에게 말했다.
“이번에 들어온 수습 시녀들이야. 미리 연락했듯이, 열흘 동안 여러분 밑에서 공주 전하를 어떻게 모셔야 하는지 배우게 될 거고.”
“어머, 잘 가르쳐 드려야겠네요.”
샤트린의 시녀들이 눈으로만 웃었다.
“아주, 잘, 제대로 가르쳐 드려야겠네요. 수습 시녀라니 도대체 얼마 만에 보는 새 얼굴인지 모르겠어요.”
환영받고는 있는데 어쩐지 등에 소름이 돋았다. 수습 시녀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한 명 한 명 이름을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코코가 눈여겨보았다던 소녀는 맨 뒤에 서 있었다.
동기들과 비슷한 드레스를 입었는데도 아이는 저 혼자 수수해 보였다. 귀걸이나 목걸이, 그 흔한 머리 장식조차 하나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면접 때 엉망진창이었던 차림새를 떠올리면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색해 보였다. 드레스를 입는 게 처음이라 그런 것 같았다.
소녀에게서 자연스레 시선을 거둔 율리아가 샤트린의 시녀들에게 말했다.
“열흘 뒤에 올게.”
“맡겨 주세요.”
수습 시녀들이 매달리는 눈으로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뒤돌아 공주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