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59. 오르테가의 시녀들
왕궁 시녀를 선발하는 시험장의 문이 열렸다. 깨끗한 드레스를 입은 다섯 명의 시녀가 둥글게 반원을 그리며 앉고, 그 앞에 수십 명의 지원자가 나란히 섰다.
“훌륭한 시녀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명심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면접관이 말했다. 깐깐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높낮이가 일정해 서늘한 목소리에 지원자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12번 지원자.”
한 소녀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탐탁지 않은 시선이 소녀에게 쏟아졌다. 면접을 보는 시험관은 물론이거니와, 옆에 있던 지원자들조차 소녀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소녀의 몰골은 빈말로도 왕궁 시녀 면접을 보러 온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으니까.
소녀가 입고 있는 옷은 아카데미 교복이었다. 심지어 구겨지고 더러워져 엉망진창이었다.
치마는 축축하게 젖어 거무스름한 얼룩이 들었고, 블라우스는 여기저기 찢어져 너덜너덜했다. 뒤집어쓴 물이 상하기라도 했는지 퀴퀴한 냄새까지 났다.
“지원자.”
“네.”
“준비된 질문을 하기 전에 이것부터 묻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 차림새는 어찌 된 것입니까? 왕궁 시녀 면접이 우습나요?”
“아닙니다.”
“도대체가…….”
면접관이 한차례 힐난을 쏟아내려던 찰나, 누군가 불쑥 말했다.
“그냥 질문부터 하세요.”
멀리 떨어진 의자에 혼자 앉아 있던 시녀였다.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인데도 어쩐지 깐깐한 면접관보다 더한 위엄이 느껴졌다.
소녀는 그 사람이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면접관이 뜨끔한 얼굴로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상급자인 것 같았다.
“그럼 12번 지원자? 훌륭한 시녀의 자질에 대해서 말해 볼까요. 출신이나 성적은 조건일 뿐, 그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지요.”
천천히 움직이던 면접관이 소녀의 정면에 멈춰 섰다.
“그게 무엇인지 말해 보세요.”
“충성심과 품위 그리고 인내심입니다.”
“충성심부터 설명하세요.”
“시녀는 몸과 마음을 바쳐 왕가에 충성해야 하며, 때로는 모시는 왕족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합니다.”
“품위는?”
“시녀는 왕족의 일상을 함께하는 자입니다. 그런 시녀에게 품위가 부족하다면, 그는 왕족의 명예에 누가 됩니다.”
소녀는 또박또박 잘 대답했다. 하지만 품위를 말하면서 자신의 차림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기에, 입술을 꾹 깨물고 붉어진 얼굴을 조금 수그렸다.
면접관이 그런 소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좋아요. 그다음은요?”
세간에 알려진 답은 여기까지였다. 충성심과 품위. 오르테가 최고의 권력자 중 하나인 코델리아 시녀장이 강조하는 왕궁 시녀의 기본 소양. 이 두 가지만 말하면 기본 점수는 받을 수 있었다.
소녀에겐 그 이상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 대면 면접이 아주 중요했다. 여기서부터 면접관들이 주는 가산점과 특별 임명권이 발동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떨어지면 끝장이야.’
소녀는 짧게 심호흡하고 마지막 질문에 대답했다.
“왕궁은 무섭고 위험한 곳이라 들었습니다.”
암암리에 퍼진 이야기였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해 불신이 팽배하고, 그 안에서 상처받은 자들이 드러내 눈물짓지 못해 가슴부터 썩어 가는 곳. 왕궁에 깔린 한숨은 철보다 무겁고, 시녀들의 눈물이 강이 되어 흐른다고요.”
면접관이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여, 왕궁 시녀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인내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녀의 말은 자칫 왕궁을 악마들의 소굴인 양 비난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멈추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에, 소녀는 굴하지 않고 끝까지 말을 이었다.
“죽을 만큼 아프고 지독하게 외로워도 끝까지 견뎌 내는 사람. 두려움이나 유혹을 마주하고도 말없이 눈 감을 줄 아는 사람. 참고, 참고…… 또 참을 수 있는 사람.”
그게 바로 훌륭한 시녀의 덕목이다. 소녀가 설명을 마치자 면접관이 물었다.
“당신은 그 마지막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입니까?”
“네.”
“왜 그렇게 생각하지요?”
“가진 게 없어서요.”
“뭐라고요?”
“저는 돌아갈 집이 없어요. 가진 게 없으니 잃을 것도 없고, 기댈 사람도 없어요.”
소녀는 가난한 사람이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할 수 있었던 건 익명의 후원자로부터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졸업과 동시에 기숙사를 나왔지만, 갈 데가 없었어요. 제 출신 때문에 아무 데서도 저를 받아 주지 않았거든요.”
“지원자.”
“저는 어릴 때 노예선에서 구출되었고, 보육원에서 자랐어요.”
시험장에 묵직한 침묵이 가득 찼다. 다른 지원자들이 질문에 대답했을 때는 짧게나마 조언을 해 주거나 웃음을 보이던 면접관들이 모두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질문을 던졌던 면접관이 등을 돌렸다.
“시험은 끝났습니다.”
소녀는 대면 면접을 통과했다.
마지막 날 제일 늦은 시간에 지원서를 넣은 데다 차림새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도, 면접관들은 그녀를 합격자 명단에 넣어 주었다.
솔직히 의외였다. 원서를 넣고도 진짜 합격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던 탓이다. 왕궁 밖으로 쫓겨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소녀는 한때 노예였고, 그것 때문에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이쪽이란다.”
소녀는 한 시녀의 안내를 받아 교육관으로 향했다. 면접관이 소녀의 차림새를 지적했을 때 그냥 준비된 질문부터 하라고 말했던 시녀였다. 그녀는 그때 멀리 떨어진 의자에 혼자 앉아 시험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높은 사람이겠지. 밉보이면 안 되니까 함부로 입을 열지 말자. 그렇게 다짐한 소녀가 입을 꼭 다물었다.
앞서 걷는 시녀에게선 시원하고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왕궁 시녀들은 다 기숙사 사감 선생님처럼 올림머리에 목까지 올라오는 원피스만 입는 줄 알았는데, 그녀는 긴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풀어 내리고 진주색 드레스에 화려한 허리띠를 하고 있었다.
“기본 교육 과정이 끝나면 인력이 부족한 곳에 배정될 거야. 시녀라고는 해도 왕궁 살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있어야 하니까, 일을 게을리하지 말렴.”
“네, 명심하겠습니다.”
“공교롭게도 지금 제일 인력이 부족한 곳은 코델리아 시녀장이 일하는 본성인데, 견딜 수 있겠어?”
“할 수 있어요.”
“그래, 응원할게.”
시녀의 목소리엔 은근한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소녀는 그녀가 자신을 비웃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애송이 주제에 감히 코델리아 시녀장의 본성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으냐고, 우습게 여기지 말라는 경고일지도 모른다.
함부로 입을 열지 말자. 그냥 고분고분하게 구는 거야. 소녀는 또 한 번 그렇게 다짐했다.
그런데 교육관 안에 있는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두 번이나 다짐했던 게 무색하게도 작은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우와……!”
새하얀 커튼이 휘날리는 예쁜 방이었다. 푹신한 침대와 커다란 책상, 책장엔 소녀가 익혀야 할 왕궁 예절과 역사서 등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씻고 옷부터 갈아입어야겠구나.”
소녀를 안내해 준 시녀가 옷장을 열어 진주색 원피스를 꺼냈다. 드레스에 가까운 원피스였다. 새 속옷과 구두, 허리띠까지 맞춰 꺼내 놓은 그녀가 소녀에게 말했다.
“내 이름은 율리아 아르테야.”
“네? 율리아…… 아르테 님이요?”
소녀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율리아 아르테.
오르테가의 보옥.
햇살을 등지고 선 율리아의 모습은 소녀가 매일 기숙사 침대 머리맡에 붙여 놓고 바라보던 그림 속의 그녀와 똑같았다. 삼류 화가에게서 산 초상화였기에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분위기만은 그대로 닮아 있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선망했는지 모를 거라고, 당신처럼 되고 싶어서 죽도록 공부했다고. 나 같은 아이들에게 학비를 보내 주던 익명의 후원자가 왕궁 시녀들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때부터 얼마나 여기 들어오고 싶어 했는지.
“율리아 님처럼 브레웨 훈장을 받고 싶었는데…….”
소녀가 결국 눈물을 떨구었다. 뚝 떨어진 제 눈물을 보고 지레 놀라 더러운 소매로 벅벅 문질렀지만,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려 울음을 감출 수 없었다.
* * *
“좋겠네. 추종자도 생기고.”
코코가 퉁퉁 부은 눈 위에 얼음주머니를 올리고 투덜거렸다.
“배은망덕한 것! 학비는 내가 대 줬는데 왜 율리아처럼 되고 싶다는 거야? 이왕 선망의 대상으로 삼으려면 날 골라야지. 내가 이 왕궁에서 제일 높은 시녀인데!”
“코코, 꼴사나워요.”
“뭐? 인내심? 시녀들의 눈물이 강이 되어 흐른다고? 이 안에서 십 년만 썩다 보면 영혼이 메말라서 눈물은커녕 땀도 안 난다고 말해 줘야겠네. 걘 어디서 그런 걸 주워들었대?”
“그거 다 코코가 쓴 자서전에 있던 말…….”
“닥쳐. 그 계집애는 기본 교육 과정 끝나자마자 알렉사 보조로 넣어 버려.”
율리아가 의외라며 물었다.
“왜요? 코코가 데려다 가르치려던 거 아니에요? 브레웨 아카데미 성적표 보고서는 꼭 합격시키라고 당부했잖아요. 그 덕분에 바빠 죽겠는데 면접 시험장까지 다녀왔단 말이에요.”
“알렉사한테 필요한 애니까.”
코코가 율리아에게 보고서 하나를 보여 주었다. 최근 외성 관리를 맡게 된 알렉사가 올린 정기 보고서였다.
“음.”
율리아가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고 보고서를 훑어보았다.
글씨는 엉망진창에 꼭 필요한 수치만 대충 휘갈겨 써 놓은 게, 꼭 게으른 기사단장이 부하한테 일 시킬 때 건네는 쪽지 같았다.
“걘 보조가 필요해. 똘똘하고 글씨 잘 쓰고, 일 잘하는 보조.”
코코가 얼음주머니를 얼굴에서 떼어 냈다. 하얀 얼굴이 잠깐 빨갛게 보일 정도로 찜질을 했더니 부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눈은 왜 그렇게 부은 거예요?”
“어젯밤에 술을 좀 마셨더니…….”
“누구랑요?”
“티타니아.”
율리아가 짧게 신음했다. 일에 지친 레위시아가 여장하고 코코를 꾀어내 밤새 유흥을 즐긴 모양이었다.
“변장이라도 하고 다니셔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은퇴하겠다고 했더니…… 죽을 때까지 마실 기세였어.”
코코가 얼음주머니를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코델리아 힌치는 얼마 전 아버지로부터 정식으로 가문의 후계자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힌치 백작은 남부 독립 전쟁과 상인연합 재건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후작 작위를 받았고, 오르테가 최고의 귀족 가문이 된 만큼 후계자가 절실했다.
“완벽하게 잘 자란 자식이 있는데, 왜 다른 데서 후계자를 데려다 키워야 하냐고…….”
맞는 말이었다. 코코도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래서 그녀는 한동안 밤잠을 설쳐 가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율리아.”
“네.”
“너는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