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2화 (311/319)

272화

* * *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1, 2년이면 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그동안 율리아는 섭정왕 데네브라의 시녀장으로 바이칸 황성에 머무르며 그녀와의 약속을 철저하게 지켰다.

여섯 가문의 공작들은 율리아를 우습게 본 나머지 잘 훈련된 가문의 여성을 보내 그녀의 자리를 빼앗고자 했다. 하지만 율리아는 여우처럼 그들을 이용해 여섯 가문을 회유하거나 약점을 잡아 겉으로나마 데네브라에게 충성 맹세를 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리바이어던 함대는 완전히 오르테가의 소속이 되었고, 기사단도 대부분 카루스를 따라 이주를 마쳤다. 란케아 영지는 바이칸 유일의 독립적인 자치구로 인정받았다.

그렇게 약속했던 날이 다가왔다.

다시 가을이었다. 붉게 물든 가로수 길에 한 무리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덩치 큰 말을 타고 나타난 그들은 가벼운 여행복을 입고 있었다.

선두에 있던 한 사내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복덩이가 우릴 잊어버린 건 아니겠죠.”

바바슬로프였다.

그는 율리아가 3년 동안 바이칸 제국 황실에서 데네브라를 위해 일하겠다고 했을 때 가장 격렬하게 반발했다. 기사단 선배들이야 맨몸으로 오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걸 위해 왜 우리 복덩이가 희생해야 하느냐며 화를 냈다.

하지만 카루스가 그런 그를 달랬다. 율리아는 카루스와 그의 부하들뿐만이 아니라 오르테가를 위해서라도 한동안 바이칸에 남아 있겠다고 결정했다. 그녀의 결심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 아무도 말이 없어요? 복덩이가 우릴 다 잊어버렸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좀 닥쳐.”

카루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의 지친 목소리에 맥스웰이 방정맞은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보면 네놈이 시녀님 가족인 줄 알겠다.”

“가족이나 마찬가지지!”

“시녀님도 그렇게 생각할까?”

“아니, 그건 아닌데…….”

갑자기 자신감을 잃은 바바슬로프가 멀리 보이는 황성을 향해 소리 없이 욕을 했다. 이게 다 크세노와 데네브라 때문이라며, 이놈의 황실 인간들은 하여간에 평생 도움이 안 된다고 투덜거렸다.

바바슬로프가 입을 다물 생각을 하지 않자, 카루스가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닥치라고 했다.”

카루스의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그가 지난 며칠 동안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걸 아는 맥스웰이 슬그머니 다가와 말을 걸었다.

“답장은 받으셨습니까?”

“아니.”

“그럼 저희가 데리러 가고 있다는 걸 시녀님이 모르시는 거 아니에요?”

“나도 몰라.”

“예?”

“아는지 모르는지 모른다고.”

아니 이 양반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맥스웰이 눈을 빠르게 끔벅거렸다.

“그럼 그냥 다짜고짜 찾아가는 거란 말이에요? 시녀님이 바이칸을 떠날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마땅한 이유도 없이 이런 식으로 바이칸 황성에 나타나는 걸 저쪽에서 절대 반기지 않을 텐데…….”

“너도 닥쳐.”

카루스가 결국 짜증을 냈다. 바바슬로프가 맥스웰의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

“야 인마, 좀 이해해 드려라. 전쟁 끝나자마자 바닷가 저택으로 가서 행복하게 살게 될 줄 알았는데…… 3년이나 생이별을 했다고. 우리가 그 3년 동안 저 양반 비위 맞추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네놈이 먼저 긁었잖아!”

“내가 언제!”

두 사람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카루스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한소리 했을 텐데, 그는 벌써 딴 데 정신이 팔린 채였다.

황성이 눈앞에 있었다.

바이칸의 백성으로 살던 때는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이제 와 자세히 보니 참 쓸데없이 넓고 높은 건물이었다. 저 안에는 권력에 미친 괴물들이 우글거리며 살아가고 있을 텐데, 율리아는 혼자서 3년이나 그들을 상대해야 했다.

“시녀님한테 잘하세요.”

바바슬로프가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이번만은 맥스웰도 그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는 듯 얼른 말을 보탰다.

“이참에 우리 모두 아르테 가문에 입적하는 건 어떻습니까. 아르테 가문엔 시녀님 혼자뿐이잖아요? 레위시아 국왕은 우리한테 호의적인 편이니까 잘 구슬려서 아예 기사단 전체를…….”

“쓸데없는 소리.”

황성 안으로 들어간 뒤에는 대정원을 지나 섭정왕의 거처를 향해 움직였다. 카루스의 통행증이 아직 효력이 있어 다행이었다.

바이칸 황성은 작은 도시와도 같았다. 마차가 다니는 길이 따로 포장되어 있고, 대정원엔 넓은 인도가 마련되어 있었다.

카루스와 일행은 마차가 다니는 길로 접어들었다.

넓은 도로에 일정한 간격으로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병사들이 카루스를 흘깃거렸다.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자도 있었고, 누군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자도 있었다.

맥스웰이 고개를 쭉 빼고 눈을 가늘게 떴다.

“이 길로 쭉 가면 어디더라. 하도 오랜만에 왔더니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멍청한 놈아. 이 길로 쭉 가면 황제의 거처지.”

“어쩐지 기운이 안 좋더라니.”

“너 아직도 점쟁이 만나고 다니냐?”

바바슬로프가 큰소리로 맥스웰을 놀렸다. 율리아를 괴롭히던 저주와 두 개의 보석에 관해 알아보고 다녔던 맥스웰은 한동안 점성술과 마법, 전설에 매료되어 있었다.

발끈한 맥스웰이 바바슬로프에게 뭐라 화를 내려던 찰나, 카루스가 갑자기 말에서 뛰어내렸다.

“어? 카루스 님!”

“어디 가십니까?”

말이 멈춰 서기도 전에 뛰어내린 그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 한 마차를 막고 섰다.

여섯 필의 말이 이끄는 새하얀 마차였다. 화려한 옷을 입은 마부와 시중인이 앞에 앉아 있고, 앞뒤엔 제복을 갖춰 입은 병사들이 말을 타고 마차를 호위했다.

높은 사람이 타는 마차였다. 황성 안에서 이 정도로 대접받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고위 귀족, 혹은 황가의 핏줄 정도는 되어야 했다.

카루스가 그런 마차를 가로막고 섰다.

“누구냐!”

병사들이 큰소리로 물었다.

“감히 섭정왕 전하의 시녀장께서 타는 마차를 가로막다니, 신분과 용건을 밝혀라!”

바람을 타고 시원한 박하 향이 흘러들었다. 백합인 것 같기도 했다. 반쯤 열린 마차 창문엔 흰 손이 걸쳐져 있었다. 그 위로 실낱같은 머리카락이 몇 가닥 휘날렸다.

“율리아.”

카루스가 입술을 달싹이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창문에 걸쳐져 있던 손이 움직여 마차 문을 열었다. 풍성한 진주색 드레스 자락 아래, 푸른 공단 구두가 보였다.

율리아가 마차에서 몸을 내밀어 카루스를 바라보았다.

“카루스 님?”

그녀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이내 춤을 추듯 가늘어졌다. 매혹적인 미소였다. 3년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앳돼 보이던 율리아의 얼굴에 깊은 매력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카루스가 홀린 듯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그가 무혈 제독 카루스 란케아라는 사실을 알아챈 병사들이 말 위에서 묵례했다.

“언제 오셨어요?”

율리아가 물었다. 그녀는 여전히 마차에서 반쯤 몸을 내밀고 있었다. 카루스가 다가가 손을 내밀자, 율리아가 그의 손을 잡았다.

카루스가 천천히 입을 뗐다.

“믿을 수가 없군.”

“네?”

“3년 동안 매일 생각했더니…… 헤어져 있었던 것 같지가 않아.”

율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와 조금씩 가까워질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크게 부풀었다. 이대로 질식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의 가슴은 율리아를 향해 뛰는 심장으로 가득했다. 그의 영혼이 기뻐 날뛰고 있었다. 해를 맞이한 꽃처럼 활짝 피었다.

“오늘쯤 오실 줄 알았어요.”

“어떻게?”

“편지를 받았거든요. 전령을 풀었죠. 어디쯤 도착했는지, 어느 길로 오는지.”

“코델리아 시녀장이 꼭 데려오라고 했어.”

율리아가 웃으며 카루스의 손을 잡아당겼다.

“안 그래도 작별 인사를 마친 참이에요.”

“데네브라가 곱게 보내 준대?”

“많이 우셨지만…… 허락해 주셨어요.”

“울었다고?”

“섭정왕께서 우니까 후계자 두 분이 따라 울어서 조금 곤란했죠.”

데네브라는 율리아를 보내지 않으려고 했다. 아르테 공작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황성 가까운 곳에 영지를 내어 주겠다고도 했다. 제이비온과 위레우스의 스승이 되어서 바이칸의 역사를 다시 써 보라고도 했다.

하지만 율리아는 오르테가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남부의 바다 냄새가 그리웠다. 창문을 열고 눈을 감으면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그리웠다. 뜨거운 햇살과 낭만적인 뱃사람들, 아름다운 왕궁이 그리웠다.

코코와 알렉사, 레위시아가 보고 싶어 죽을 것만 같았다.

“카루스 님.”

율리아가 카루스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러곤 마차에서 뛰어내려 그의 품에 안겼다.

“우리 오르테가로 돌아가요.”

카루스가 율리아를 꽉 끌어안았다. 그녀를 품에 안고 깊이 숨을 들이켜자, 티타니아의 차가운 바람과 남부의 향기가 그에게 스며들었다.

“복덩이…….”

바바슬로프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맥스웰은 고개를 젖히고 애꿎은 하늘을 노려보았다. 카루스의 기사들은 말없이 눈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이 마차를 타고 가십시오.”

마차에 올라 있던 시중인이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율리아에게 허리를 숙였다. 병사들도 천천히 물러나 카루스와 그의 부하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섭정왕께서 시녀장님께 선사하신 것입니다. 시녀장님의 물건은 르세라를 통해 배편으로 보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짐 같은 건 안 보내 줘도 괜찮아요.”

“시녀장님의 손이 닿은 물건은 무엇 하나라도 남기지 말고 모두 선물하라 하셨습니다. 보석과 드레스, 거처에 장식되어 있던 미술품과 수집하신 책까지 전부 보내 드릴 예정입니다.”

“그렇구나. ……고마워요.”

“섭정왕 전하를 대신해서 이렇게 감사드립니다. 시녀장께서 떠난다는 말에 전하의 측근 시녀들이 모두 배웅을 나오고 싶어 하셨으나, 전하께서 질척거리고 매달리지 말라며 전부 물리셨습니다.”

“모두에게 고맙다고 인사 전해 주세요.”

“언젠가 꼭 다시 뵐 날이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시중인이 마지막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그의 태도에선 율리아를 향한 깊은 존경심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가자.”

카루스가 율리아를 데리고 다시 마차에 올랐다. 마부석엔 맥스웰이, 병사들 대신 바바슬로프와 카루스의 부하들이 두 사람을 호위했다.

“출발하겠습니다!”

마차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율리아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멀리 높은 곳에 문이 활짝 열린 발코니가 있었다. 붉은 드레스에 긴 금발을 늘어뜨린 섭정왕과 여섯 명의 측근 시녀가 발코니에 나와 서 있었다.

섭정왕은 울고 있었다. 품위는 온데간데없이 눈물 콧물을 다 흘리며 울었다. 그녀의 입에서 원망과 욕설이 마구 튀어나왔다. 시녀들이 돌아가면서 손수건을 쥐여 주었으나 울음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울던 섭정왕 데네브라가 손수건으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나쁜 것.”

“전하, 그만 우세요.”

“나쁜 것…….”

작위와 재산, 명예와 권력. 무엇으로도 율리아를 잡을 수 없었다. 데네브라는 율리아가 오르테가에 남겨 두고 온 게 무엇인지 알기에 끝까지 매달릴 수도 없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율리아가 황성을 떠나는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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