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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화 (310/319)

271화

바이칸 황성에 새로운 권력자가 나타났다.

이름은 율리아 아르테, 이제 고작 20대 중반에 접어든 젊은 시녀였다.

데네브라의 모든 것을 손에 쥐고 흔들 만큼 그녀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두 명의 황자 위레우스와 제이비온도 율리아 아르테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편이었다.

그렇다 보니 눈치 빠른 자들을 중심으로 율리아에게 닿고자 하는 줄이 생겼다. 물론 번번이 실패했지만.

율리아가 데네브라나 여타 귀족들처럼 공개된 자리에 잘 나서는 사람이라면 접근하기 쉬웠을지 모르나, 그녀는 언제나 데네브라의 그림자 안에서만 움직였다.

수도 안의 작은 도시라 일컬어질 만큼 커다란 황성, 봉우리들이라 불리는 높은 건물들 사이 가장 은밀한 황제의 거처.

율리아를 만나려면 그곳까지 들어가야만 했다.

처음엔 데네브라의 친정 가문과 반 황제파의 수괴들만이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이후엔 위레우스와 제이비온의 가문에서 그녀를 찾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귀족들 사이엔 율리아 아르테가 섭정왕을 꼭두각시처럼 이용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섭정왕께서 그 누구에게도 패전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 하시었소.”

“그게 정말인가?”

“바이칸의 크나큰 비극 앞에서 우리끼리 싸우는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는군. 최근엔 두 분 후계자에게 크세노 황제의 호위였던 자를 붙여 검술을 배우게 한다지.”

“그건 알고 있소? 북부 독립 왕국이 운하의 이용권을 얻어냈으니, 그들에게 통행세를 받아 관리할 책임자가 필요하다더군. 수십 장의 추천서가 들어갔다고 하네.”

귀족들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통행세라. 적국을 상대해야 하니 위험하다며 말리는 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자들이었다.

데네브라는 크세노가 아니었다. 전쟁이라면 지긋지긋할 것이다. 운하의 통행세를 관리하는 건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줄 중요한 책무였다.

추천서는 금세 수백 장에 이르렀다. 데네브라의 집무실엔 매일 비슷한 서류가 쌓였다. 운하뿐만 아니라, 남부 국경 도시 관리자와 르세라에 보낼 영주 대리인도 뽑아야 했다.

프랑크 후작이 퉁퉁 부은 눈을 손등으로 비비며 말했다.

“르세라에는 상업과 무역, 해군과 뱃사람들에 대해 두루 잘 아는 자를 파견하셔야 합니다. 제가 황성에서 전하를 보필하는 동안에는 르세라에 갈 수가 없으니…….”

“누가 그걸 모르느냐? 너는 왜 다 큰 자식 하나 없어서 이 사달을 만들어!”

프랑크 후작이 억울하다며 항의했다.

“제 아이들은 그런 중책을 맡기엔 아직 너무 어립니다. 제일 큰 아이가 이제 고작 열아홉인데, 수도에서 유학하느라 르세라에 온 적도 별로 없어요.”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니, 누구를 보내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능력이 있으면 뭐 하느냐. 반역을 저지를지 안 저지를지,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데네브라가 서류 하나를 박박 찢어 쓰레기통에 던졌다.

처음에는 쓰레기통에 넣지도 못하고 그 주변에 흩뿌리더니, 이제는 제법 정확하게 던져 넣었다.

“후작님.”

율리아가 다가와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프랑크 후작이 얼른 일어나 그녀에게서 서류를 받아들었다.

“이건 누구입니까?”

“무스빌리의 도시 관리자입니다.”

“아……. 거긴 이제 북부의 영역이 되었지.”

“작위가 높지 않아 파벌이 없고, 귀족보다 군인들과 가까웠던 자라고 들었습니다. 무스빌리에서 잔뼈가 굵었다면 상인과 용병, 해적을 다루는 솜씨도 있겠죠.”

“실무자로는 적합하겠습니다. 하지만 시녀장, 정치를 잘하지 못하면 르세라엔 파견할 수 없습니다. 제 가문과 오르테가 그리고 중앙의 압박 사이에서 외줄 타기를 해야 하는데.”

“혼인을 주선하세요.”

“예?”

“나이도 많은데 아직 혼자랍니다. 후작님의 측근 중에서 그런 쪽으로 능력 있는 여성을 골라서 혼인을 주선하세요. 감시와 조력, 둘 다 가능한 사람으로.”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르세라는 프랑크 후작의 시야에서 안전하게 굴러갈 것이다. 율리아가 은근히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프랑크 후작의 머릿속에 비슷한 나이의 여성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의 여동생 중 하나가 오래전에 남편과 이혼하고 상단 일에 빠져 있었다.

“편지를 써야겠습니다!”

프랑크 후작이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데네브라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를 노려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저 인간도 이제 네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구나.”

“운하의 통행세를 관리하는 건 위레우스 님의 가문에 맡기세요.”

“그럼 제이비온의 어미가 크게 반발할 거야.”

“제이비온의 어미는 혼인하지 않았으니, 크세노 황제의 비로 책봉하세요. 그리고 그녀에게 두 아이의 교육을 맡기시고요.”

“허…….”

데네브라가 품위 없이 입을 떡 벌리고 율리아를 쳐다보았다.

“위레우스를 제이비온의 어미가 키우게 하자는 거냐?”

“천성이 자유분방해 나랏일을 시키기엔 부족하지만, 아이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여자였어요. 위레우스의 어미에겐 실리를 쥐여 주고, 아이는 우리 편으로 만들죠.”

부족하지 않게 황비라는 직함까지 준다면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크세노는 아직 공식적으론 실종된 상태이니, 황실의 안주인 역할을 맡길 수도 있었다.

“그랬다가 그것들이 내 뒤통수를 치면 어떡해?”

“배신자는 언제, 어디에나 있어요. 그러니까 전하는 항상 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을 손에 쥐고 놓지 마세요. 완전히 믿을 수 있게 될 때까지요.”

“누구를 후계자로 삼을지 발표하지 말라는 거냐?”

“위레우스를 어여삐 여기셨다가, 그들이 건방지게 굴거든 제이비온과 나들이를 하세요. 제이비온을 어여삐 여기셨다가, 그들이 건방지게 굴거든 위레우스와 만찬을 즐기시고요.”

“다른 귀족들은?”

“크세노 황제를 이용하세요.”

“그를 어떻게?”

“언제 살아 돌아올지 모른다며 두려워하되, 그가 나타나도 흔들리지 않도록 전하께 도움을 줄 자들을 모으세요.”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자세히 좀 말해 보아라!”

“북부와 남부의 왕국들이 독립하면서 영지를 잃은 자들이 많아요. 전쟁 중에 가문이 쇠락한 자들도 많고요. 전하께선 그들을 품으셔야 합니다.”

“아…….”

“그들은 전하의 편이 될 수밖에 없어요. 황제는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요. 그들도 전하께 협조하지 않으면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반드시 그리될 것이다.

율리아가 데네브라의 손에 새 서류 뭉치를 쥐여 주었다.

얼마 뒤, 호르헤의 아들이 율리아를 찾아왔다. 그는 율리아가 말했던 대로 보복보다는 바이칸의 미래를 걱정하며 실리를 추구하는 남자였다.

애초에 그는 호르헤가 죽은 건 크세노 탓이라 여기고 있었다.

“황제께서 북부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죽지 않았을 겁니다.”

“맞는 말씀이에요.”

“당신에게는 기쁜 일이었을 수 있겠지만.”

그가 율리아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분노와 슬픔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탐색하며 바라보고, 관찰할 뿐이었다.

감정을 잘 갈무리할 줄 아는 남자였다. 율리아는 그가 귀족들 사이에서 데네브라에 대한 여론을 주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호르헤 님은 옳은 결정을 하셨죠.”

틀린 건 황제였다.

율리아가 그렇게 말해도 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 한마디가 그의 경계를 누그러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틀림없었다.

“저는 데네브라 님을 섬기지 않을 겁니다. 가까이에서 모시는 당신이 더 잘 알겠지만, 섭정왕에겐 군주의 자질이 없습니다.”

“그럼 왜 저를 찾아오셨나요?”

“위레우스 님과 제이비온 님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그는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었다. 데네브라도 아니고 시녀장인 율리아를 찾아와 아무런 절차도 밟지 않은 채 다짜고짜 후계자들을 만나게 해 달라고 하다니.

하지만 율리아는 그의 말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가시죠.”

후계자들은 데네브라의 거처에서 가까운 곳에서 같이 살고 있었다. 위레우스의 어미가 운하 때문에 황성을 나가게 되어, 제이비온의 어미가 두 아이를 함께 길렀다.

물론 아이들의 교육은 율리아의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율리아!”

제이비온이 다다닥 달려와 율리아의 허리에 매달렸다. 위레우스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긴 했지만 점잖은 태도로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시녀장.”

“두 분 뭐 하고 계셨어요?”

“숙제하고 놀고 있었어요. 위레우스 오빠가 도와줘서 금방 끝냈거든요. 틀린 부분 찾기였는데, 재밌었어요.”

제이비온은 아직 어려서 위레우스와 같은 수준의 공부를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두 아이를 함께 가르치니, 위레우스가 제이비온에게 성실하고 다정한 스승 노릇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경쟁자인 두 어미나 가문과는 달리 아이들은 무척 사이가 좋았다.

율리아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틀린 부분 찾기요?”

“네! 역사서에서 틀린 부분을 찾는 거였어요.”

호르헤의 아들이 두 눈을 번쩍 빛냈다. 그가 말도 없이 다가가 아이들이 해 놓은 숙제를 살펴보았다.

바이칸의 역사서는 온통 자국의 입장에서 유리한 것만 서술하는 경향이 있었다. 때문에 제국인들은 그들이 얼마나 잔혹한 전쟁을 벌여 왔고, 얼마나 많은 피해자를 만들었는지 잘 알지 못했다.

특히 아이들이 배우는 역사서가 그랬다. 너무 많은 것이 생략되거나 사라지고, 그저 제국은 특별하다고만 가르쳤다.

진짜 학자들은 이대로 가다간 바이칸의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될 거라고 경고해 왔다. 백성을 우매하게 만들어 지배하려는 자는 천박한 폭군이 될 뿐이라고 지적했다.

호르헤의 아들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가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율리아도 그를 바라보았다.

“시녀장.”

그가 율리아에게 다가와 말했다.

“저를 기용하십시오.”

“무엇으로요?”

“두 분의 시중인이 되겠습니다.”

고위 귀족이라고 알고 있는데, 고작 시중인이라. 그로서는 아주 많은 것을 양보한 셈이었다. 가까이에서 감시하며 보살피겠다는 계산도 깔려 있을 것이다.

율리아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우선 데네브라 님의 신뢰부터 얻으셔야겠네요.”

섭정왕에게 군주의 자질이 없다면, 당신이 직접 옆에서 보좌하면 되지 않겠나.

다음 날, 호르헤의 아들이 데네브라의 보좌관으로 들어왔다. 그건 바이칸의 귀족 사회가 한차례 들썩거릴 만큼 큰 사건이었다.

이제야 균형이 맞춰졌다고 생각한 율리아는 여섯 가문의 공작들로부터 추천서를 받아, 데네브라의 시녀를 새로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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