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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화 (309/319)

270화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입가엔 살짝 미소가 맺혀 있는데, 눈을 저렇게 내리깔고 있으니 어떤 심정인지 알 길이 없었다.

답답해진 데네브라가 율리아에게 더욱 직설적으로 물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그냥 말해.”

“저는 전하께 원하는 게 없어요.”

“거짓말하지 마라. 난 이제 바이칸의 섭정왕이야. 너처럼 욕심 많은 아이가 내게 원하는 게 없을 리가 없어. 하물며 너는 내가 뭐든지 해 주려 한다는 것도 알고 있잖아!”

데네브라가 버럭 화를 냈다. 율리아는 그녀가 조급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어쩌면 꽤 절박한 상황일지도 모른다.

데네브라는 아직 죽은 황제의 그림자를 떨쳐 내지 못했다.

크세노의 유령과 가장 먼저 싸워야 하는 건 데네브라였다. 바이칸의 황성에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매일 도마 위에 올랐고, 끊임없이 시험당했다.

데네브라 같은 여자가 섭정왕이 되다니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자들이 허다했고, 데네브라 같은 여자도 섭정왕이 되는데 우리라고 못 할 게 무어냐는 자들도 허다했다.

데네브라는 불안했다. 크세노가 살아 있을 때보다 더 불안해졌다. 그의 사생아들을 방패 삼아 버티고는 있었으나 언제 또 다른 반역이 일어날지 몰랐다.

패전국이 된 이상, 바이칸의 진짜 적은 내부에 있었다. 이제부터 그녀는 내부의 적과 싸워야만 했다.

봄과 여름, 두 번의 계절을 보내며 그녀는 거의 매일 죽음의 위기에 처했다고 말했다. 식사에 독이 들어 있는 건 물론이고, 마시는 물과 입는 옷에 이르기까지 위험하지 않은 게 없었다.

창문이 없는 방을 골라 매일 다른 방에서 잠들었다.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자들을 곁에 두고 호위로 삼았으나,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버티기만 할 수는 없었다.

그때 그녀는 율리아를 떠올렸다.

“율리아.”

데네브라가 율리아의 곁에 무심하게 앉아 있는 카루스를 바라보았다. 그토록 열렬하게 사랑했던 남자인데, 이제는 가슴 시린 통증만 남았을 뿐 전처럼 강렬한 설렘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와 함께 바이칸으로 가자.”

데네브라가 몸을 숙이자 풍성한 금발이 쏟아졌다. 그녀는 크세노와 결혼하기 전처럼 긴 금발을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난 위기에 처해 있어. 수도엔 나를 이용하거나 죽이려는 자들이 넘치지. 내 친정 가문과 프랑크 후작 하나만으로 상대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자가 내 자리를 노리고 저들끼리 파벌을 형성하면서 반역을 꾀하고…….”

“데네브라 님.”

율리아가 데네브라의 말을 끊었다,

“저는 당신의 시녀가 아니에요.”

나는 오르테가 사람이다. 오르테가의 왕궁 시녀다. 나의 왕은 레위시아 오르테가다. 율리아는 먼저 그 사실을 분명히 했다.

데네브라가 무척 실망한 얼굴로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뭐든지 해 준다고 해도?”

“네.”

“정말 아무래도 안 되겠어?”

데네브라의 목소리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틈만 나면 소리 지르며 화를 내던 그녀가 누가 봐도 기죽은 목소리로 물으니, 곁에 있던 프랑크 후작까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율리아가 또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카루스는 시종일관 그런 그녀의 곁에서 침묵하고 있었다.

프랑크 후작이 이제 그만하면 됐다는 듯 데네브라에게 다가왔다. 율리아를 움직일 수 없다면 그녀에게서 몇 가지 지혜라도 빌리는 편이 낫지 않겠냐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좋다.”

그런데 데네브라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건넸다.

“리바이어던 함대의 군함을 전부 오르테가로 보내 주마. 그것들은 본래 바이칸의 재산이었으나, 카루스의 변절로 소속이 불분명해. 어디에 있어도 문젯거리가 될 거야.”

“전하!”

프랑크 후작이 깜짝 놀라 데네브라의 팔을 잡았다. 그러곤 되레 놀라 얼른 손을 떼었다.

데네브라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리바이어던 기사단이 오르테가로 이주할 수 있도록 돕겠다. 카루스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무사히 재산을 처분할 수 있는 시간과 인력을 보장하고, 나머지 가족들도 그들의 의사에 따라 안전하게 이주시켜 주마.”

또 있었다.

“바이칸에 남는 자들이 변절자의 부하라 손가락질당하지 않도록 그들이 가진 지위와 재산을 보호하고, 란케아 영지의 자치권을 보장하겠다.”

파격적이다 못해 충격적인 대가였다.

프랑크 후작이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두 눈을 내리깔고 데네브라의 말을 흘리기만 하던 그녀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제게 원하는 게 뭔지 말씀해 주세요.”

율리아의 마음이 움직였다.

“바이칸 황성으로 와. 내 시녀장이 되는 거야.”

“기간은요?”

“바이칸 여섯 가문의 공작들이 내게 충성을 맹세하고, 내가 정한 후계자가 황태자 임명식을 치를 때까지.”

파격적인 대가를 치를 테니, 너도 그만큼의 보상을 줘야 한다. 데네브라는 진심이었다. 카루스를 눈앞에 두고도 그녀는 이제 율리아에게만 시선을 쏟았다.

카루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역시 놀라서 할 말을 잃은 상태였다.

율리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잡고 곱게 허리를 숙였다. 긴 드레스 자락이 펼쳐지며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공손하면서도 우아하게. 율리아가 데네브라에게 머리를 숙였다.

* * *

바이칸의 수도는 넓은 강과 완만한 산맥을 끼고 있어, 상업과 건축이 비약적으로 발달한 도시였다. 운하에서 이어지는 강줄기가 수도 안쪽까지 닿고, 산지를 등지고 아름다운 성벽이 길게 이어졌다.

황성은 도시에 존재하는 가장 높은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수십 개의 성이 빼곡하게 이어졌다. 바이칸 제국인들은 산맥 아래 뾰족하게 솟은 황성 건물을 ‘봉우리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섭정왕이 된 이후, 데네브라는 크세노의 거처를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모든 시중인을 내쫓고 자신의 사람으로 채웠다.

여름 동안 황성엔 여러 차례 피바람이 불었다. 데네브라를 죽이려던 자들이 매일 처형장에서 비명을 지르며 죽어 갔다.

그리고 가을이 한창이던 어느 날, 황성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섭정왕 데네브라 전하께서 들어오십니다!”

거대한 홀을 가득 채운 인파가 한꺼번에 입을 다물었다. 데네브라의 구두 소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로 고요했다. 긴 장식용 망토에 붉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오만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걸어 들어와 황제의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바이칸 귀족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데네브라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

섭정왕의 오른쪽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율리아였다.

긴 갈색 머리카락에 신비로운 초록색 눈동자, 그녀는 우아한 크림색 드레스에 넓은 산호색 허리띠를 둘러 묶고 두 손엔 흰 장갑을 끼고 있었다.

눈에 띄게 화려하진 않았으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황제의 최측근만이 허락받을 수 있는 자리였다. 손만 뻗어도 황제를 죽일 수 있는 위치이기에 가족보다 더 깊은 신뢰를 받는 자만이 그 자리에 서곤 했다.

크세노에겐 호르헤가 있었다. 그 이전의 황제들에겐 주로 스승이나 조언자, 가장 가까운 시중인이 있었다.

저 여자는 도대체 누굴까.

다음 대의 황제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위레우스와 제이비온이 등장한 뒤에도 사람들은 율리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연회가 시작되자 귀족들은 작위가 높은 순서대로 데네브라에게 다가가 머리를 숙였다. 그때마다 율리아가 귓속말로 무언가 말을 건넸고, 데네브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귀족들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데네브라가 달라졌다.

그녀는 감정적이기만 했던 과거와는 달리,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귀족들을 대했다.

실종된 크세노 황제가 돌아와 바이칸을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 기대하는 자에게는 권위적인 모습으로 심리전을 걸고, 자신에게 우호적인 자에게는 잘 계산된 친근함을 보여 주었다.

그때 한 젊은 남자가 단정한 자세로 걸어왔다. 그의 얼굴을 알아본 율리아가 재빨리 데네브라에게 말했다.

“크세노 황제와 가까운 가문이라고 하셨죠? 가주인 호르헤를 잃은 뒤에도 흔들림 없이 후계자가 빈자리를 채웠다고 들었어요. 전하와 반 황제파에게도 보복을 거론하지 않았죠.”

율리아의 속삭임이 데네브라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호르헤는 실리주의자였어요. 남부 연합과의 전쟁을 앞두고 황제를 버리고 북부 방어를 선택했을 만큼 바이칸에 충성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어쩌라는 것이냐?”

“그 역시 실리주의자일 거예요. 그러니까 전하의 편으로 만드세요.”

“그게 가능하다고?”

“비전을 제시하세요.”

비전이라. 데네브라가 은근슬쩍 손바닥을 드레스에 문질러 닦았다. 황비로서 황제의 곁에 있을 때는 이렇게 긴장한 적이 없는데, 손바닥이 땀이 찰 만큼 마음이 초조했다.

그 모습을 힐긋 바라본 율리아가 다시 귓속말을 건넸다.

“위레우스와 제이비온을 소개하세요.”

“아이들을?”

“잘 자란 후계자야말로 전하께서 내보일 수 있는 최고의 비전이니까요.”

데네브라가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이 가주가 된 호르헤의 아들이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흠잡을 데 없는 인사였다. 데네브라는 괜찮으니 일어나라며 손을 내밀었고, 그는 그녀의 손등에 지그시 이마를 갖다 대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대에겐 특별히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단다.”

데네브라가 위레우스와 제이비온에게 손짓했다.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위레우스가 데네브라의 오른손을, 제이비온은 왼손을 잡았다.

“돌아가신 황제 폐하의 아이들이야. 나는 이 아이들을 잘 가르칠 것이다. 바이칸의 황금기는 아쉽게 지나간 게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지.”

호르헤의 아들이 탐색하듯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시선 끝에 닿은 사람은 데네브라나 두 명의 후계자가 아니라, 그 상황을 뒤에서 연출하고 있는 율리아였다.

인사를 마친 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사람도 소개해 주십시오.”

공손하면서 단호한 요청이었다. 데네브라는 당황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장 율리아 아르테다.”

“처음 뵙겠습니다.”

율리아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 물고기가 꼬리를 치듯 유연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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