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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화 (308/319)

269화

율리아가 할 말을 잃고 카루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직 의자 끝에 걸치듯 앉은 상태였다.

그때 마차가 출발하면서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카루스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율리아의 손을 잡았다.

“제대로 앉아. 넘어질라.”

“아르테 섬이라뇨?”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당신 영지에 왜 제 이름을 붙여요!”

“우리가 결혼하면 드추바 섬을 란케아라 부르건, 아르테라 부르건 아무 상관 없어지잖아.”

“그냥 드추바 섬이라고 부르죠. 이미 오랫동안 불러온 이름이 있는데, 우리 마음대로 바꾸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율리아가 새침하게 눈을 흘겼다.

속력을 더할수록 마차가 더 크게 흔들렸다. 카루스는 여전히 율리아의 손을 잡고 있었다. 프랑크 후작에게 도로 정비 좀 하라고 해야겠다며, 그가 불만스럽게 창밖을 내다보았다.

여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율리아는 르세라에서 보냈던 이번 여름을 오래도록 잊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코코의 일을 돕느라 바쁘긴 했지만 그 시간조차 너무 즐거웠다.

카루스가 그녀의 손가락 끝을 꼭 쥔 채 살살 문질렀다. 이제는 그만 놓아도 될 텐데, 그는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다는 걸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율리아가 카루스에게 물었다.

“드추바 섬에 성을 지을 거예요?”

“그래야겠지.”

“섬이니까 요새처럼 지을 수 있겠네요. 해안선이 완만한 쪽으로 부두를 길게 빼고, 리바이어던 함대는 남부 함대 기지를 공유해도 될 것 같고.”

“난 네 집에서 살 거니까 거기서 섬으로 오가면 되고.”

“네? 그런 걸 그렇게 마음대로 정하는 게 어디 있어요?”

“네가 그랬잖아. 함께 집을 꾸미고 싶다고.”

그게 같이 살자는 소리가 아니고 뭐냐고, 카루스가 물었다. 할 말을 잃은 율리아가 그를 또 흘겨보았다.

“성도 있고 관저도 있는데 왜 우리 집에서 살려고 한담.”

“방도 많은데 속 좁게 굴지 마.”

“뭐예요?”

율리아가 카루스의 손목을 찰싹 때렸다. 그는 하나도 아프지 않으면서 아프다고 엄살을 피웠다. 마차가 방향을 틀면서 한쪽으로 쏠렸고, 장난을 치던 두 사람은 동시에 중심을 잃었다.

카루스가 손을 뻗어 율리아를 잡아당겼다. 그의 힘에 이끌리듯 자리를 옮긴 율리아가 의자에 앉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음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카루스는 계속 투덜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큰 항구 도시에서 길을 왜 이따위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며, 마부에게 조금 천천히 가라고 소리쳤다.

“괜찮아요. 재밌는데요, 뭐.”

율리아가 카루스에게 바짝 몸을 붙이고 앉았다. 그의 어깨가 높고 넓었다. 그의 팔 안쪽에 손을 넣어 끼우고 머리를 살짝 기댔더니, 그제야 안정감이 들었다.

투덜거리던 카루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여전히 율리아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피부가 맞닿은 곳마다 간질간질 나비가 앉은 것 같았다. 손을 잡고 있을 뿐인데 심장이 맞닿아 함께 뛰는 기분이었다.

입술을 달싹이던 카루스가 고개를 홱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러면 이 느낌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 내려앉은 나비가 날아가지 않게 하려면 그저 입을 다문 채 이 시간이 영원하기만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 * *

코델리아 힌치가 오르테가 왕궁의 악마 시녀장에서 대륙 회의의 악마로 자리 잡으면서 지지부진하던 협상도 급물살을 탔다.

코코의 목욕물을 데우는 건 장작이 아니라 그날 폐기한 서류 더미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모든 국가의 사절들이 대충이나마 동의한 평화 조약서가 완성되던 날, 레위시아가 가장 먼저 서명을 마쳤다.

“그럼 저는 이만 오르테가로 돌아가겠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왕궁을 비워 놓았어요. 불안해하며 기다린 백성들에게 긴 전쟁이 끝나 대륙에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언하겠습니다.”

레위시아의 부드러운 작별 인사에 사절들이 아쉬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레위시아를 둘러싸고 웅성거리며 인사말을 건넸다.

“곧 뵙겠습니다.”

“조만간 찾아가겠습니다. 저희 왕께서 오르테가와는 우호 동맹을 맺길 원하신다고 하셨으니까요.”

“남부의 겨울이 그렇게 따뜻하다지요? 겨울엔 꼭 그곳에서 휴가를 보내야겠네요.”

레위시아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는 친근하면서도 수줍은 듯한 얼굴로 사절들이 건네는 작별 인사를 하나하나 다 받아 주었다.

“저도 여러분과 이렇게 헤어지기 아쉽습니다.”

코코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무표정하고 도도한 얼굴이었지만, 그녀가 상당히 기분 나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율리아가 속삭이며 물었다.

“왜 그래요?”

“착한 척하는 게 웃겨서.”

“전하가요?”

“어제는 저것들이 너무 들러붙어서 한시라도 빨리 왕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칭얼거리더니…… 저 거짓말하는 것 좀 봐. 우리 전하께서는 어쩜 저렇게 가증스러우실까.”

“왕께서 거짓말을 잘하는 건 재능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나도 알아. 그냥 내가 꼴 보기 싫어서 그래.”

한 사람 한 사람 빠뜨리지 않고 모두와 인사를 나눈 레위시아가 코코에게 걸어왔다. 그는 몸을 돌리기 전까지 축 처진 눈으로 처연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코코를 향해 돌아선 순간, 그의 얼굴엔 이별의 슬픔 대신 후련함이 가득했다.

그날 레위시아와 코코, 알렉사가 먼저 오르테가로 출발했다. 왕국을 너무 오래 비워 뒀기에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르세라에 남은 율리아와 카루스에게 뒷일을 맡기고 배에 올랐다.

“금방 처리하고 갈게요.”

율리아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코코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고, 알렉사는 율리아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레위시아가 카루스에게 말했다.

“율리아 데리고 멀리 도망가면 죽여 버린다.”

카루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입술을 한쪽만 끌어올려서 웃자, 레위시아가 발끈해서는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코코, 저 자식 좀 봐!”

“유치하니까 그만하세요.”

“저 자식이 먼저 시비를 건 거잖아!”

“뭔 소리예요. 시비는 전하께서 걸어 놓고.”

두 사람이 토닥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배가 출발하고 있었다. 르세라를 떠나 오르테가로 돌아가는 그들을 배웅하는 사람이 많았다. 소문을 듣고 몰려나온 시민들이 손을 흔들었다.

멀어지는 코코와 알렉사를 보며, 율리아가 말했다.

“어젯밤에 코코가 물었어요.”

“뭘?”

“이제부터 뭘 하면서 살고 싶으냐고요.”

카루스가 의외라는 얼굴로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가 계속 왕궁 시녀로 남아 있을 거라 여겼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고 대답했는데?”

“왕궁 시녀로 살겠다고 했죠.”

역시. 카루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는 게 뭔지 아세요? 알렉사도 며칠 전에 비슷한 질문을 했다는 거예요.”

두 사람은 율리아가 복수를 끝마친 데다 저주에서 벗어났으니, 이제부터 다른 삶을 살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경치 좋은 바닷가에서 푹 쉬면서 놀아도 좋고, 브레웨 아카데미로 돌아가 학자가 되어도 좋겠대요. 뭐든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했어요.”

“의외네. 코델리아 시녀장은 널 놔주지 않을 것 같았는데.”

왕궁 시녀는 엄격하게 법도를 지키며 살아야 하는 데다 기본적으로 할 일이 많았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부려먹을 거라던 코코의 협박은 반쯤 농담이었다. 평화 조약이 체결된 뒤에는 어차피 율리아를 쉬게 해 줄 생각이었다며, 코코는 그녀에게 뭐든 원하는 삶을 살라고 말했다.

“제가 계속 시녀로 살 거라고 말했더니 짜증을 냈어요.”

“왜?”

“더 깊이 생각해 보래요.”

두 사람의 마음을 알기에, 율리아는 좀 더 깊이 고민해 보았다. 율리아 아르테의 삶에서 복수와 저주를 빼면 무엇이 남는지.

첫 번째부터 여덟 번째의 율리아 아르테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카루스가 은근슬쩍 물었다.

“저주에 걸리기 전에 첫 번째의 율리아 아르테는 어떤 삶을 살고 싶었어?”

“여행자가 되고 싶었죠.”

“그래?”

카루스가 이번에는 정말 의외라는 얼굴로 율리아를 돌아보았다. 높은 신분의 귀족이 되거나 권력자가 되어 야망을 펼치고 싶어 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과거의 그녀는 전혀 다른 삶을 꿈꾸고 있었다.

“배를 타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싶었어요. 아버지와 함께했던 모든 추억을 돌아보면서, 이야기책에 나오는 장소를 한 번씩 다 가 보는 거예요.”

“지금은 달라졌어?”

“네.”

율리아가 카루스의 손을 잡아끌었다. 멀리서 프랑크 후작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세부적인 협상이 몇 가지 남았다. 데네브라로부터 율리아를 만나고 싶다는 전갈이 도착해 있기도 했다.

“저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거예요.”

넓은 돌계단을 오르는 율리아의 머리 위로 늦여름의 태양이 뜨거운 빛을 뿌렸다.

“세상을 알고 싶어서 여행자가 되려 했지만, 세상에 저를 알리는 방법도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여름의 마지막 날, 섭정왕 데네브라가 르세라에 도착했다.

데네브라는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율리아에게 바이칸의 귀족이 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당장 공작으로 만들어 줄 수는 없지만, 황성의 시녀장은 오르테가처럼 조그만 왕국의 백작보다는 높은 지위를 갖는다며 그녀를 회유했다.

“후작부터 시작해. 내 시녀장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은 뒤엔 제이비온과 위레우스의 스승이 되어라. 길어 봤자 10년이야. 너는 바이칸 귀족계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어.”

데네브라는 바이칸의 귀족들이 부리는 텃세쯤은 율리아가 콧방귀로도 물리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율리아가 두 눈을 살짝 내리뜨고 말했다.

“데네브라 님, 저는 바이칸의 백성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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