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58. 아름답고 강력한, 여러 가지로 행복한
황제가 실종됐다고 알려진 이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르세라에서 평화 조약을 준비하던 코코와 레위시아가 남부 독립 왕국의 왕족들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을 무렵, 북부 독립 왕국에서 수십 명의 사절단과 함께 반 황제파의 수장이었던 프랑크 후작이 도착했다.
회의는 급물살을 타고 진행되었다. 승전을 이유로 지나치게 많은 영토와 혜택을 달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고, 구렁이인 양 능글맞게 사태를 관망하는 이들도 있었다.
레위시아는 코코와 율리아의 도움을 받아 그들 모두의 의견을 적절히 조율했다. 간혹 심한 의견 충돌이 있을 때는 카루스가 그의 곁에 서서 말 없는 압박을 주었다.
각 나라의 대표들이 거대한 지도 앞에 모여 새로이 그어진 국경을 바라보았다.
남부 독립 왕국들은 티타니아 앞에 펼쳐진 드넓은 초원과 옛 왕국의 영토를 돌려받았다. 새 왕조를 세우는 데는 막대한 돈이 필요했고, 그들은 그걸 전부 바이칸에 요구했다.
북부 연합은 오래전 그들이 차지했던 영토를 대부분 수복한 것도 모자라 운하를 이용할 수 있는 권리까지 넘겨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북부 대운하를 아예 소유하고 싶어 했지만, 그 강이 바이칸의 수도로 향하는 만큼 제국으로서도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북부는 향후 2백 년 동안 독립 왕국들이 공평하게 운하를 이용할 수 있도록 자율권을 보장하고 통행세를 없애자고 제안했다.
프랑크 후작은 이 모든 걸 예상했음에도 절망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르테 백작, 제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회의가 휴식기에 접어들었을 무렵, 프랑크 후작이 율리아를 찾아와 물었다.
다른 왕족들은 모두 레위시아의 만찬장으로 가고 없었다. 율리아는 카루스와 단둘이 식사하려다 프랑크 후작의 초췌한 얼굴을 보고는 그를 식당으로 데려왔다.
카루스가 살벌한 눈을 하고 뺨을 씰룩거렸지만 당장 마음이 급한 프랑크 후작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전쟁 보상금의 규모가 상당하리란 거야…… 당연히 예상했습니다. 물론이죠. 바이칸은 패배했으니까요. 남부 독립 왕국들이 옛 영토뿐만 아니라 더 넓은 땅을 가지고 싶어 할 거라는 것도 예상했습니다.”
“운하가 문제군요.”
“북부가 마지막 전투에서 운하를 차지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르테 백작, 그 강은 바이칸의 수도로 통합니다. 우리가 패전했다고는 하나, 자국의 수도로 향하는 가장 큰 물길을 적국에 내어 주는 멍청이가 어디에 있답니까?”
프랑크 후작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그렇게 노력하더니, 율리아에게는 솔직한 심정을 가감 없이 내비쳤다.
“2백 년이라뇨. 통행세조차 없는 자유라뇨. 돈을 달라는 게 아니라, 통행세가 있어야만 그들을 감시할 수 있어요. 그게 아니면 거기에 어쩔 수 없이 군대를 주둔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또 전쟁이 일어날 거예요.”
율리아가 냉정하게 그 점을 지적했다.
프랑크 후작은 포크를 들고도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카루스는 이미 제 몫의 음식을 다 해치우고 술을 마시려다 율리아에게 제지당하고 있었다.
“아르테 백작.”
그 모습을 원망스레 바라보던 프랑크 후작이 머리를 숙였다.
“지혜를 빌려주십시오.”
카루스가 의외라는 얼굴로 그를 흘깃 바라보았다.
여기 또 여우가 있었군. 카루스가 몰래 웃음 지었다.
프랑크 후작은 레위시아나 코코를 찾아갈 수도 있었다. 최근 사절단들 사이에 카루스의 거취가 가장 큰 화제인 만큼, 은근슬쩍 그를 회유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후작은 카루스를 눈앞에 두고서도 오직 율리아와 대화하며 그녀에게 지혜를 빌려 달라고 간청했다.
“당신은 아직 데네브라 님의 시녀장입니다.”
“그건 데네브라 님께서 제가 제국의 귀족들에게 무시당할까 봐 만들어 준 임시직이에요.”
“그분은 황성으로 돌아간 뒤에도 시녀를 들이지 않았어요.”
“네?”
“시중인이야 많지만, 시녀장은 물론이거니와 측근 시녀조차 뽑지 않았습니다. 데네브라 님이 섭정왕이 될 거라는 소문이 돌았을 때부터 황성엔 시녀가 되려는 이들이 줄을 섰는데도 불구하고.”
“후작님.”
“바이칸으로 와 달라고 부탁하는 게 아닙니다. 바이칸이 이대로 무너지거나, 이 일이 또 다른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도와 달라는 겁니다.”
“그걸 왜 제가 해야 해요. 여기 르세라에 얼마나 많은 책임자가 있는데요.”
“저는 절박합니다.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물어봐야죠.”
“레위시아 전하나 코코에게 물어봐도 되잖아요.”
“그분들을 오르테가 사람입니다.”
“저도 오르테가 사람이에요. 오르테가의 이익만을 위하죠.”
“그래도 당신은 다양한 관점에서 냉정하게 이 일을 바라보고 있잖습니까. 여기 그런 사람이 당신 말고 누가 있습니까?”
프랑크 후작은 오직 율리아만이 그의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율리아가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한동안 침묵하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그녀가 카루스를 한번 슬쩍 쳐다보았다.
그러곤 프랑크 후작에게 물었다.
“르세라를 사랑하세요?”
“예?”
“이 도시를 얼마나 사랑하세요? 도저히 아무것도 포기할 수 없을 만큼 아끼시나요? 하나뿐인 집이자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면서 당신만의 영지로 역사에 남기고 싶어요?”
프랑크 후작이 두 눈을 끔벅거렸다.
“물론 아끼고 사랑합니다만…… 꼭 제 이름으로 역사에 남기고 싶은 건 아닙니다. 저보다 더 나은 영주가 있을 수도 있는 거고.”
“후작님.”
율리아가 생긋 웃었다.
“르세라를 저희에게 넘기세요.”
율리아의 말투는 단호하고도 상큼해서 꼭 프랑크 후작을 놀리는 것처럼 들렸다. 그가 그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버럭 화를 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후작이 설명해 달라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북부가 운하를 노리는 것처럼 2백 년, 르세라 항구를 오르테가에 개방하겠다고 하세요. 자율권을 보장하면서 통행세도 받지 않겠다고. 그걸 위해 르세라에 오르테가의 귀족을 파견해도 괜찮겠죠.”
율리아가 포크를 다시 들었다. 그녀는 예쁜 디저트를 반으로 쪼개 놓고 설명을 이어 갔다.
“북부의 두 번째 관심사는 카루스 란케아와 리바이어던 함대가 남부 오르테가로 완전히 이주하느냐, 에 있어요. 그들은 바이칸 서부 해상으로의 진출을 꿈꾸거든요.”
“그러고 보니 무스빌리, 그 위쪽에 함대의 기지가 있었죠!”
“맞아요. 앞으로는 무스빌리가 북부의 유일한 항구가 될 텐데, 카루스 님의 함대가 계속 그곳에 머무른다면 여러 가지로 눈치가 보일 거예요. 바다에 주인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테니까요.”
율리아는 북부와 바이칸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몇 가지 견제 장치를 마련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레위시아 전하께서 자유 항로를 개방하셨으니, 앞으로는 항구를 가진 자가 돈을 벌겠죠.”
돈은 곧 힘이 된다.
프랑크 후작이 이마에 손을 얹고 탄식하듯 말했다.
“북부가 운하를 욕심내니까 오르테가는 르세라를 달라는 겁니까?”
“네.”
“저희만 너무 손해인 것 같은데요.”
“북부는 오르테가가 르세라를 발판으로 바이칸 서부 해상을 지배하길 원하지 않을 거예요. 어떻게든 견제하려 하겠죠. 카루스 님을 이길 자신은 없고, 바다도 포기하기 싫으니까.”
“그러면 제가…….”
“협상가가 되세요. 북부 대신 중간에서 오르테가를 견제해 줄 테니, 운하를 포기하라고.”
율리아가 또 한 번 생긋 웃었다.
프랑크 후작은 괜찮은 협상가였다. 율리아도 그 사실을 알기에 그에게 은근슬쩍 그런 말을 건넸던 것이었다.
영토 욕심은 부리지 않겠다던 오르테가가 르세라를 요구하자, 북부뿐만 아니라 남부 독립 왕국에 이르기까지 많은 국가가 우려를 표했다. 자원이 풍부하고 해상 무역이 발달한 오르테가가 르세라까지 손에 넣는다면 대륙의 모든 상인이 남부행을 결심할 거라면서.
그때 프랑크 후작이 나섰다.
바이칸은 패전국이기에 어느 한쪽의 손만 들어줄 수는 없다며, 북부가 운하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오르테가에 르세라를 내어 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치열한 회의가 이어졌다. 매일 언성이 높아지고, 수많은 서류가 오갔다. 레위시아와 코코의 손에도 잉크 자국이 마를 날이 없었다.
여름은 그렇게 지나갔다.
“어떻게 됐어?”
카루스가 손을 내밀며 물었다.
그는 마차를 타고 있었다. 꼭 집 없는 어부처럼 배에서 생활하길 고집하던 그가 오랜만에 항구로 나와 마차를 타더니 율리아를 데리러 왔다.
율리아가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누구도 통 크게 양보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서로 애매하게 거리를 좁히고 있어요.”
“코델리아 시녀장이 알아서 잘하겠지.”
“다들 코코가 무서워서 피해 다닌다는 점만 제외하면요.”
평소엔 고래고래 소리치며 싸우던 사람들이 회의장에 코코가 나타날 때마다 얌전해지기 시작했다. 말로 살을 바른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코코는 그들을 하나하나 잘근잘근 짓밟았다.
“북부는 운하를 포기하지 않는 대신 적게나마 통행세를 내기로 했어요. 군대가 주둔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오르테가는?”
“우리도 비슷하게 조율할 거예요.”
“기간은?”
“똑같이 1백 년. 어쩌면 더 적어질 수도.”
많은 양보가 있었군. 카루스가 웃으며 문을 닫았다.
“레위시아가 욕심 없는 왕이라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닐걸요.”
“아니야?”
“리바이어던이 오르테가로 오잖아요. 함대와 기사단만으로도 엄청난 전력인데, 사실 가장 크게 이득 본 건 우리 오르테가가 아닐까요.”
“영지까지 주겠다는데 어떡해.”
카루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드추바 섬은 오르테가에서 가장 큰 섬이었다. 도시 하나에 맞먹는 크기를 가진 데다 옛 항로와 자유 항로가 모두 개방되면 남부 해상에서 가장 중요한 교역로가 될 예정이기도 했다.
율리아가 그를 따라 웃으며 물었다.
“그럼 란케아 섬이라고 이름을 바꿀 거예요?”
“아르테 섬이라고 하려고 했는데.”
“네? 왜요?”
“앞으론 네 영지가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