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 * *
크세노 황제가 죽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은 카루스였다.
“창문을 열고 쇠공을 떨어뜨렸습니다. 창틀엔 쇠사슬로 긁힌 부분이 있고, 바닥부터 핏자국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흔적은 없는 것으로 보아, 쇠사슬에 묶인 채로 떨어진 게 확실합니다.”
“……그렇군.”
“수색할까요?”
“내버려 둬.”
황제가 살아 있을 가능성은 없었다. 병상에서 일어난 카루스가 선실로 내려갔다. 열린 창문과 창틀에 이어진 핏자국을 확인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르세라로 가서 레위시아 국왕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 서둘러라.”
“알겠습니다.”
카루스의 부하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감시해야 할 황제가 죽었으니 더는 바다 한가운데 배를 띄워 놓지 않아도 되었다. 카루스는 부하들에게 르세라에 닻을 내리라고 명령했다.
반나절 뒤 커다란 군함이 르세라 부두에 정박했다. 소식을 들은 레위시아가 직접 부두로 달려 나왔다.
“황제가 죽었어?”
“그래.”
“그 미친놈이…… 아무것도 마주하지 않고, 그냥 죽어 버렸다고?”
“그래.”
“아니, 최소한 저를 섬기던 자들에게 마지막 인사라도 남겨야 하는 거 아니야? 바이칸엔 아직도 황제의 측근들이 남아 있는데 그들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그냥 죽었다고? 하다못해 그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항복 선언이라도 해야지! 그건 도망친 거잖아. 그냥 도망친 거야!”
카루스가 짜증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
레위시아가 이를 악다물고 중얼거렸다.
“끝까지 나쁜 새끼…….”
그들은 크세노를 용서할 수 없었다. 한 나라의 국왕이며, 사령관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전쟁에 졌어도 황제가 해야 할 일은 많았다. 항복 선언과 함께 섭정왕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모양새라도 갖추어주면, 그를 따르던 자들은 앞으로도 바이칸에서 귀족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레위시아가 카루스에게 물었다.
“그가 죽는 모습을 봤어?”
“아니. 아무도 없을 때 스스로 물에 빠져 죽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레위시아가 카루스에게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실종됐다고 해.”
“뭐?”
“바다 한가운데에서 사라졌다고. 죽었을 확률이 높지만, 기적적으로 살아 있을 수 있다는 식으로.”
“왜 그래야 하는데?”
“황제가 죽었어도 바이칸은 제국이야. 정복군은 언제든 다시 조직될 수 있지. 이 혼란이 가라앉으면 분명 어디선가 제2, 제3의 크세노 황제가 나타날 거야.”
레위시아는 여우 같은 왕이었다. 그를 곁눈질하던 카루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죽은 황제의 유령이 미래의 폭군을 억누른다는 건가.”
누군가 또다시 정복 황제가 되려 한다면 그는 크세노의 유령과 먼저 싸워야만 할 것이다. 바이칸엔 크세노에게 충성하는 자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황제가 살아 있을 수도 있다고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 한동안 또 다른 폭군은 나타나지 않으리라.
“비겁한 도망자라고 발표하고 싶었는데.”
카루스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네 생각이 좀 더 나을 것 같네.”
심지어 데네브라와 반 황제파를 견제할 수도 있었다. 바이칸은 사분오열될 거고, 상대적으로 북부와 남부는 빠른 안정기에 접어들 것이다.
카루스가 부하들을 불러 말을 맞추라고 지시했다. 기사들은 어려울 것 없다는 얼굴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크세노 이베르트 바이칸.
제국의 학자들은 그를 최초의 통일 황제로 역사에 기록될 위인이라 칭했다. 반대로 점령 국가에선 그를 학살자 혹은 폭군이라 부르며 손가락질했다.
누군가는 그를 제왕적 기질을 타고난 우두머리 사자와 같다고 표현했으며, 누군가는 그를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탐욕가라 불렀다.
저보다 뛰어난 부하를 향한 시기심 그리고 저주에의 집착.
이 두 가지가 없었더라면 크세노 이베르트 바이칸은 정말로 대륙을 통일하고 최초의 정복 황제로서 이름을 떨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카루스, 식사나 같이하고 가.”
레위시아가 긴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모아 늘어뜨리며 물었다. 그의 희고 긴 손가락 사이에서 부드럽게 휘어지는 금발이 반짝반짝 빛났다. 은은한 등불을 받고 서 있는 자태도 몹시 고왔다.
카루스가 묘한 눈으로 그를 보며 대답했다.
“여태 굶었어?”
“쫓아다니는 것들이 많아서 어쩔 수 없었어. 이 새끼랑 먹으면 저 새끼가 들러붙고, 저 새끼랑 먹으면 그 새끼가 들러붙어서.”
“왕이 말하는 꼬락서니가 참…….”
“그러는 너는 왕한테 말하는 싸가지가 참…….”
레위시아가 흰 눈을 뜨고 카루스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두 사람은 함께 마차에 올랐다. 거리는 안전했다. 오르테가와 남부 연합이 르세라를 점령하다시피 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위협할 만한 자들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차는 고요한 밤거리를 달려 영주 성으로 향했다.
카루스가 의자 등받이에 깊이 몸을 기댔다. 많이 회복되긴 했어도 그는 여전히 환자였다. 아직은 예전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의사가 단단하게 묶어 놓은 붕대도 답답했다.
그의 몸에서 알싸한 약 냄새와 함께 은은한 박하 향이 났다. 알렉사가 좋아해 율리아도 함께 쓰는 입욕제 냄새였다.
레위시아가 팔짱을 낀 채 카루스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야, 변절자 카루스.”
“왜 또 시비냐.”
“오르테가에 란케아 영지를 내어 줄 테니, 완전히 이주해.”
레위시아는 꼭 아끼는 사탕을 억지로 내어 주는 어린애처럼 말했다. 카루스가 실소를 터뜨리며 물었다.
“오르테가는 작은 나라야. 이번 협상에서도 영토 욕심은 내지 않겠다고 했다며? 나한테 영지를 주려면 누군가의 것을 빼앗아야 할 텐데, 그러면 너에게도 좋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하는 말이겠지?”
“지금 내 나라가 작다고 무시하는 거냐?”
“사람 말을 그런 식으로 곡해해서 듣는 건 누구한테 배운 거냐.”
“코코.”
레위시아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투덜거리던 카루스가 또 한 번 실소를 터뜨렸다. 코코의 이름을 방패처럼 쓰는 그에게서 율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영지는 됐어. 작위도 필요 없고.”
“뭐? 진짜?”
“난 그냥 율리아가 있는 곳에서 살 거야. 그거면 돼.”
카루스는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율리아가 숨 쉬고, 머무르고, 오가는 곳에서 살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그녀를 안고 뺨에 키스할 수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었다.
그는 자신을 뿌리 없는 나무라고 생각했다. 기댈 곳만 있으면 아무 데서나 자라나는 덩굴처럼, 율리아의 곁에서만 뿌리를 내리고 살 것이다.
레위시아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마차 안에서 마주 앉은 둘은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보며 같은 사람을 떠올렸다.
카루스는 무릎에 놓인 자신의 손을 응시하며 율리아를 생각했고, 레위시아도 그런 카루스를 노려보며 율리아를 생각했다.
대도시치고 르세라의 길은 울퉁불퉁한 편이었다. 그다지 빨리 달리는 것도 아닌데 마차가 자꾸 흔들렸다.
레위시아가 입을 꾹 다물고 심호흡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속이 불편한 건 마차가 너무 흔들리기 때문이라고 몇 번이고 되뇌었다. 카루스가 율리아와 함께 살 거라고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고.
그런데 카루스가 대뜸 그에게 말을 걸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뭐?”
“어디 멀리 꺼지라고 해도 되고, 차라리 눈에 띄지 말고 숨어 살라고 해도 되고. 화풀이하거나 욕을 해도 돼.”
“개소리.”
레위시아가 크게 개탄하더니 곧바로 혀 차는 소리를 냈다. 그는 고개를 한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인 채 카루스를 쳐다보았다.
꺼지라고 할까. 눈에 띄지 말고 숨어 살라고 할까. 욕을 하고 때려라도 볼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가 그러라고 했으니까, 걸쭉하게 욕이나 한바탕 늘어놓을까. 그러면 속이 좀 후련해지려나.
그때 카루스의 상처가 시야에 들어왔다. 대부분은 옷과 붕대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거의 다 아물어 밖으로 드러난 부분도 있었다.
레위시아도 카루스가 마지막 전투에서 어떤 모험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율리아의 저주를 풀었다는 사실도 전해 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몰랐지만, 죽을 뻔했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너는.”
레위시아가 물었다.
“만약 꼭 한 번 네가 원하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 어디로 가고 싶어?”
카루스가 고개를 들고 그에게 되물었다.
“레위시아, 너는?”
레위시아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고 싶은 과거 같은 건 없었다. 그에겐 찬란했던 어린 시절이나 그리운 추억이 없었다.
어쩌면 브레웨 아카데미 졸업식에서 율리아와 마주쳤던 그때가 자신의 진짜 삶이 시작된 순간은 아닐까. 그때로 돌아가면 뭔가가 달라지려나.
아니었다. 그래도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한 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카루스는 레위시아를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질문에 아주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첫 번째의 율리아.”
그는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율리아가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았던 시점으로 돌아가서…… 여느 평범한 스물한 살의 아가씨처럼 행복하게 살게 해 주고 싶어.”
복수니 저주니, 전쟁이니 하는 것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살게 하고 싶다. 차별받지 않고 이용당하지도 않고, 어릴 적 꿈을 간직한 그대로의 율리아로 살게 하고 싶다.
“율리아가 너를 몰라도?”
“상관없어.”
카루스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마차 안을 가득 채웠다. 무뚝뚝하고 정 없는 사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목소리에서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연정이 느껴졌다.
레위시아가 그런 그를 노려보다 말을 툭 내뱉었다.
“드추바 섬을 주마.”
“뭐라고?”
“드추바 섬을 기준으로 해적들이 사용하던 옛 항로에서 자유 항로로 이어지는 바다. 그곳이 네 영지다, 카루스 란케아.”
그 정도면 무혈 제독에게 딱 어울리는 영지가 아니냐며, 그러니까 딴생각하지 말고 오르테가에 뿌리를 내리라고 레위시아가 명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