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짧게 자른 은발이 알렉사의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코코가 손을 뻗어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알렉사가 간지럽다며 눈매를 찡그리고 웃었다.
험한 여정에 거칠어진 그녀의 머릿결이 안타까웠던지, 코코가 마음에도 없는 잔소리를 퍼붓고 있었다.
“그렇구나.”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율리아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 모든 게…… 마지막이네요.”
찰나. 순간. 눈 깜빡할 사이. 그 짧은 시간에만 존재하는 모든 것이 소중했다.
알렉사의 미소와 코코의 잔소리,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르세라의 풍경. 전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저 세 사람의 기억에만 남아 있다가 언젠가는 그마저도 흐릿해지리라.
알렉사에겐 창밖에서 코코와 율리아의 대화를 엿듣다 들킨 기억으로 남을 것이고, 코코에겐 율리아에게 생일을 지정해 준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나는 어떻게 기억할까.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저 너무 소중했다.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영원히, 선명하게 기억하고 싶었다.
내 기억력이 지금보다 더 좋았으면 좋겠다. 이제부터는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엔 복수 따위에 매달리느라 쓸데없는 기억으로 가득했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다.
율리아의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펜을 쥔 손끝이 떨려, 새 종이 위에 또 잉크가 번졌다.
“야, 너 빨리 들어와서 일하지 못해?”
“차라리 부채질을 시키세요.”
코코와 알렉사가 창문을 사이에 두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율리아가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우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였더니 종이 위에 눈물이 떨어져 잉크 자국이 더욱 크게 번졌다.
“야, 너 울어?”
“율리아, 울어요?”
코코가 벌떡 일어나 율리아에게 다가왔다. 알렉사는 창문을 뛰어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우냐고 물어보니까 정말 울음이 나왔다. 눈물만 한두 방울 떨어지고 말 거라고 여겼는데, 율리아는 어느새 서럽게 소리를 내어 울고 있었다.
알렉사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수건을 찾았다. 코코가 너는 어떻게 된 시녀가 손수건도 안 가지고 다니냐고 꽥 소리를 질렀다. 그러는 코코도 손수건이 없었지만, 그걸 지적할 정신이 없었다.
율리아가 더 큰 소리로 울었다.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말보다 울음이 세게 나왔다.
율리아가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못하자, 코코가 결국 그녀를 세게 껴안았다.
“이 골치 아픈 계집애.”
“…….”
“이제 괜찮아.”
코코의 눈이 붉었다. 맑은 주홍색 눈동자에 투명한 눈물이 차올랐다. 꽉 잠긴 소리로 율리아를 달래던 코코도 끝끝내 눈물을 툭 떨어뜨렸다.
괜찮아, 율리아. 이제 괜찮아.
우리 같이 살자.
율리아를 달래는 코코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알렉사가 조용히 창문을 닫았다. 누가 보지 못하게 커튼을 치고, 응접실로 통하는 문도 닫았다. 그러곤 율리아와 코코의 곁에서 말없이 두 사람을 지켰다.
* * *
선실은 고요했다. 밖에서 들리는 파도 소리가 아니었다면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크세노는 어두운 선실에 앉아 율리아를 생각했다.
저주를 완성한 그녀는 그것이 각성이 아니라 해금임을 알려 주었다. 인간은 결국 신에 닿을 수 없었다. 크세노가 보석의 선택을 받아 그녀의 심장을 취했다 해도 이룰 수 없는 소원이었다.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다. 율리아와 카루스가 뭔가 잘못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화를 내며 캐물었으나, 그들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크세노는 카루스가 죽지 않고 멀쩡하게 살아났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깨달았다.
모든 게 끝났다는 걸.
그는 이제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다. 신의 능력을 손에 넣을 수 없었다. 정복 황제가 될 수 없었다.
크세노 이베르트 바이칸은 졌다. 처참하게 패배해 아무것도 손에 남지 않았다. 바이칸 제국은 데네브라 섭정왕의 손에 넘어가 그의 자식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아이에게서 혈통을 잇게 되었다.
북부 패전국 연합에 지고, 르세라 방어군과 반 황제파에게 졌다. 남부 연합은 그를 짓밟고 사로잡기까지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크세노는 선실에 갇혀 있는 동안 계속 같은 생각을 했다. 자신은 언제, 어느 순간부터 잘못된 선택을 했던 걸까.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가 그의 수중에 있는 동안에 대륙 정벌을 마무리 지었어야 했나. 카루스를 견제하지 말고 가까이에 두고 의지했어야 했을까. 아니면 데네브라와 결혼한 게 잘못이었나.
율리아 아르테를.
지켰어야 했나.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푸른 바다의 환초가 선택한 사람이 율리아라는 걸 처음 알았을 때, 그녀를 지키는 일에 모든 걸 걸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만약 율리아가 카루스와 사랑에 빠지기 전에 우리가 만났다면 어땠을까. 그녀의 소원이었던 복수를 이뤄 주고, 죽지 않게 지켜 주고, 함께 저주를 이겨 내기 위해 애썼다면.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는 여전히 내 손에 남아 있었으려나.
실소가 흘러나왔다. 전부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크세노는 자신이 조금씩 미쳐 가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
규칙적으로 들리는 파도 소리가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제는 가슴 속에 심장이 아니라 바닷물이 가득 차서 출렁거리는 것 같았다. 철썩철썩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조금씩 물에 젖어 저 깊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에게 저녁 식사를 가져다주었던 병사가 말했다.
“곧 포로 협상이 시작될 겁니다. 레위시아 국왕은 화해의 의미로 당신을 바이칸에 넘기기로 했고, 데네브라 섭정왕은 당신을 인계받아 북부 패전국 연합에 넘기겠다고 공언했습니다. 몸값을 내겠다는 사람이 없으니 포로 신분으로 승전국의 전리품이 될 겁니다.”
자신은 처형될 것이다.
크세노 이베르트 바이칸은 북부의 원수였다. 그가 가장 활발하고 잔악하게 정복 전쟁을 벌였던 곳이 북부였기 때문이다.
북부 패전국 연합이 매번 그렇게 똘똘 뭉쳐 제국에 반기를 들었던 건 크세노와 제국에 대한 복수심의 작용이었다.
공개 처형에 이어 효수되려나.
크세노는 효수된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덥수룩하게 수염이 자란 얼굴에 갇혀 있는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비쩍 마른 몸, 심지어 씻지도 못해 꼴이 엉망이었다.
아마 여느 죄수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저분하고 볼품없고, 끔찍하겠지. 그가 지금까지 수없이 죽여 왔던 수많은 사람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극히 평범하고, 보잘것없으리라.
벽에 기대어 앉아 있던 크세노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굵은 쇠사슬이 질질 끌려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긴 시간 갇혀 지냈더니 이제는 쇠사슬을 끄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티타니아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만약 원하는 과거로 돌아가 언제든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된다면 그는 꼭 20여 년 전의 티타니아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의 첫 패배.
처참하게 패배한 것도 모자라 그 사실을 숨기고자 사실을 왜곡하고 역사를 날조했다. 그 일은 오래도록 크세노의 가슴에 남았다.
수치심은 분노로 표출된다. 그는 남부 연합을 용서할 수 없었다.
남부를 지배하려면 그때 참전하지 않았던 오르테가의 복종이 필요했다. 그들을 이용해야 했다. 그래서 겁많은 왕을 무릎 꿇려 보호 동맹이란 이름 아래 속국으로 삼았다.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 티타니아에 아칸더스라는 새 이름까지 붙였다.
물론 전부 소용없는 짓이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크세노가 쇠사슬을 질질 끌어 창가로 다가갔다. 선실에 하나뿐인 작은 창은 반쯤 열려 있었다. 그는 두 팔에 매달린 쇠공을 하나씩 끌어 창가로 옮겼다. 쇠사슬에 묶인 손목에서 피가 묻어나왔다.
또 율리아 생각이 났다.
여섯 번째의 율리아 아르테. 지난 삶의 모든 죽음을 더한 것보다 더 힘들었다던 여섯 번째의 죽음.
네가 나라면, 율리아.
크세노가 중얼거렸다. 그는 이제야 진심으로 율리아의 마음을 이해했다.
“네가 나라면…….”
크세노가 쇠공 하나를 끌어안고 들어 올렸다.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무거웠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쇠공을 들었다. 그러곤 힘겹게 창틀에 올려놓았다.
어지러웠다. 침과 함께 위액을 게워 낸 그가 입을 닦을 새도 없이 또 하나의 쇠공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3개의 쇠공을 창틀에 올리고 마지막 하나를 품에 안았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이가 딱딱 부딪치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흐으, 신음과 울음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너무 무서워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에겐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 시간을 끌었다간 누구에게라도 살려 달라고 울며 매달리게 될 것이다.
크세노는 자신의 영혼이 산산이 부서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너무 무서워서 고통마저 둔감해졌다. 이제는 분노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안고 있던 쇠공을 창밖으로 떨어뜨렸다.
묵직한 쇠공이 아래로 떨어지며 손목이 부러졌다.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그의 몸과 함께 두 번째와 세 번째 쇠공이 미끄러졌다.
그는 첨벙 소리와 함께 빠르게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마지막까지 창틀에 남아 있던 쇠공은 크세노가 물에 닿을 때쯤 그의 몸 위로 떨어졌다.
차가운 바닷물에 흰 거품이 일었다. 4개의 쇠공이 크세노를 데리고 저 깊은 밑바닥까지 떨어졌다.
그가 떨어진 곳에 일어났던 거품은 금세 흔적도 없이 가라앉았고, 그가 일으켰던 잔물결도 거친 파도에 뒤섞여 사라져 버렸다.
그를 찾는 몇몇 새들만이 하늘 위에서 날갯짓을 이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