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코코는 도저히 레위시아를 말릴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이 평화 조약이 제대로 맺어지기만 하면 앞으로 한동안은 대륙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며, 그땐 잘생기고 인기 많은 왕이 최고가 될 거라고 말했다.
“음……. 틀린 말은 아니네요.”
“카루스 란케아는 좀 어때.”
간신히 짜증을 가라앉힌 코코가 뒤늦게 카루스의 안부를 물었다. 율리아는 그가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럼 그 남자도 조만간 일하러 나올 수 있겠네?”
“코코! 카루스 님에게도 일 시키려고 물어본 거였어요?”
“그 남자를 의자에 멀거니 앉혀 두기만 해도 협상이 우리한테 유리해질 텐데, 당연하지. 그런 보물을 왜 썩혀?”
“차라리 제가 할게요. 이리 주세요.”
“율리아,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코코가 사악하게 웃었다. 고양이 같은 그녀의 눈이 새침하게 휘어졌다.
“넌 이제 내 거야.”
“그게 무슨 소리예요?”
“오르테가의 귀족에겐 의무가 있어. 왕궁 시녀에게는 더 엄격한 의무가 있지. 난 네 상관이야. 지금까지는 네 저주 때문에 사정 봐주면서 대충 부려 먹었지만, 이제부터는 다를 거야.”
율리아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사정을…… 봐준 거였다고요?”
“넌 왕의 수석이야. 레위시아 전하의 일거수일투족이 네 책임이라고. 전하께서 얼떨결에 왕이 된 데다 왕좌에 오르자마자 전쟁하느라 잊고 있었는데, 측근 시녀도 없이 혼자 다니는 왕족이 세상에 어디 있니.”
“코코가 있잖아요!”
“난 바빠!”
코코가 당당하게 책상 위에 가득 쌓인 서류를 가리켰다. 그녀를 째려보던 율리아가 포기한 듯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투덜거렸다.
“……짜증 나.”
“그러게 누가 귀족이 되래?”
“코코가요.”
“그러게 누가 시녀 하래.”
“코코가요.”
코코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언젠가 그녀가 힌치 백작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다면서, 왠지 아버지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야, 율리아.”
“왜요. 말 시키지 마요.”
대답은 꼬박꼬박 잘만 하면서 말 걸지 말라는 율리아를, 코코가 살짝 흘겨보았다. 그러다 때마침 나타난 알렉사를 보곤 빠르게 일어나 소리쳤다.
“야! 너도 이리 와서 일해!”
“저는 그런 일 못 합니다.”
“야, 알렉사! 야!”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이리 와서 부채질이라도 하지 못해? 하다못해 옆에서 노래라도 불러! 너 혼자 노는 꼴은 못 봐! 야, 거기 안 서?”
“부채질하기엔 아직 이른 계절인 것 같은데요.”
방 앞까지 왔던 알렉사가 복도 반대편으로 빠르게 걸었다. 코코는 보폭이 크고 걸음이 빠른 알렉사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금세 저만치 멀어지는 알렉사의 뒷모습을 보며, 코코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놈의 계집애, 처음부터 그냥 기사단으로 보내 버렸어야 되는데…….”
“기사단은 싫다잖아요. 시녀가 좋다는데, 쫓아내려고요?”
“칼 쓰는 애가 드레스 입고 할 게 뭐가 있다고.”
“그냥 호위 시녀라고 생각해요.”
율리아가 웃으며 건넨 말에 코코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사는 이제 두 사람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였다.
율리아를 괴롭히던 저주의 정체를 파헤치겠다며 오르테가를 떠났던 알렉사는 북부 패전국 연합에 합류하기 전에 바이칸 서북부 무스빌리에 들러 용병 대장 트리스탄의 도움을 받았다.
트리스탄이 가짜 신분증을 준비하는 동안, 알렉사와 맥스웰은 주벤 아르테의 흔적을 조사하는 한편 서북부 해군 기지에 억류되어 있는 리바이어던 함대와도 접촉할 수 있었다.
이제나저제나 제독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그들은 두 사람에게서 카루스가 황제에게 맞서려고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래서 완벽하게 출정 태세를 갖춘 채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릴 수 있었다.
이후 무스빌리를 떠나 북부 패전국 연합에 합류한 알렉사는 수차례 전훈을 쌓아 주술사를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이 평원을 넘어 운하까지 내려갈 수 있도록 전장에 숨통을 트였다.
그러곤 함대에 파견돼 있던 몇 명의 리바이어던 기사단과 함께 바이칸 동북부 란케아 영지로 향했다. 기사단을 데리고 전장에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인근 영지를 함락한 뒤 수도로 향하는 척 남쪽으로 진격하다가 남부 전선까지 올 수 있었다.
알렉사는 자신의 임무를 완벽히 수행했다. 그건 그녀가 아니었다면 누구도 해내지 못했을 일이었다.
남부 오르테가를 떠나 서북부 항구에서 북부 전선으로, 그리고 동북부 사막에서 다시 남부 전선으로, 대륙을 한 바퀴 돌아야 하는 강행군이었다.
하루도 허투루 쓰지 않고 그 긴 여정을 성공리에 이끈 알렉사는 레위시아와 카루스 다음으로 인기가 많았다. 리바이어던 기사단의 기사들로부터는 끈질긴 입단 제의를 받기도 했다.
알렉사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던 율리아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데.”
“아직도 못했어?”
“고맙다는 말만 하려고 하면 손바닥으로 귀를 막고 빙글빙글 웃으면서 도망쳐 버려요. 걸음이 너무 빨라서 도저히 쫓아갈 수가 없단 말이에요.”
“무혈 제독한테 잡아 달라고 해.”
“환자한테 그런 걸 어떻게 시켜요?”
“그 남잔 잡아줄걸.”
코코가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말없이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평화로웠다.
코코의 손가락 사이에서 몇 장의 서류가 팔락거렸다. 방 안을 맴도는 종이와 잉크 냄새, 살짝 열린 창문에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글씨를 쓸 때마다 들리는 사각사각 소리와 코코의 하품 소리. 모든 게 너무 평화로워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전쟁이 끝났고, 저주는 사라졌다.
이게 다 꿈이면 어떡하지. 아닌 걸 알면서도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게 다 꿈이라면, 그때는 어떻게 하지.
환상 속 바닷가에서 카루스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은 물거품이 되어 눈앞에서 사라졌다.
마지막 순간 율리아와 카루스는 같은 선택을 했다. 서로를 잊거나 잊히는 대신 자신의 심장을 바치려 했다.
아마도 간발의 차였을 것이다. 카루스가 그의 심장을 찌른 순간, 신은 율리아의 칼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의 결단으로 율리아가 살았다. 저주는 그렇게 풀렸다.
율리아가 들고 있던 펜에서 검은 잉크가 한 방울 툭 떨어졌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서류를 망친 그녀가 새 종이를 꺼내기 위해 기계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코코가 그런 율리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율리아.”
“네?”
“봄의 첫날로 하자.”
“뭘요?”
“네 생일.”
율리아가 그게 무슨 소리냐며 눈을 깜박였다. 새 종이를 꺼내 자리에 앉는 그녀에게, 코코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생일이라는 게 뭐 별거겠어? 그냥 태어난 걸 기념하는 날이잖아. 넌 언제나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다시 시작했으니까, 그날을 네 생일로 결정하는 게 좋겠어.”
“왜 그렇게 제 생일에 집착하는 거예요?”
“누구나 쑥스러워서 못하는 말이 있잖아.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거나, 고맙다는 말. 선물은 그런 걸 대신하는 거 같거든.”
“나한테 선물하고 싶어요?”
“그것도 있고.”
코코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말을 이었다.
“모여서 놀고 싶은데 마땅한 핑곗거리가 없을 때 써먹기도 좋지. 우리 적어도 계절마다 한 번씩은 파티를 열자. 레위시아 전하와 나, 너랑 알렉사. 이렇게 넷만 있어도 네 번은 놀 수 있어.”
아무래도 코코가 일에 치인 나머지 무척 놀고 싶은 모양이라고, 율리아는 생각했다. 그래서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봄의 첫날로 해요.”
“너는 제일 좋아하는 꽃이 뭐야?”
좋아하는 꽃이라니. 율리아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할 일이 태산이라고 할 때는 언제고 자꾸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는 코코 때문에 영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좋아하는 꽃 같은 건 없어요. 꽃이야 뭐…… 죄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요. 다 비슷하게 예쁘고, 덧없죠.”
“덧없으니까 예쁜 거야!”
“그럼 코코가 좋아하는 꽃을 좋아할게요.”
“그런 게 어디 있어. 진지하게 생각해 봐. 장미나 제비꽃 같은 것도 좋고, 등꽃이나 능소화도 예쁘지.”
코코는 집요했다. 율리아는 그녀에게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해 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서류를 작성하는 대신, 팔짱을 끼고 고민에 빠졌다.
꽃이라.
“코스모스가 좋아요.”
“코스모스?”
“어릴 때 아버지랑 바닷가에 피어 있는 코스모스 꽃밭에서 놀았던 기억이 있어요. 제 귀엔 노란색 코스모스를 꽂고, 아버지는 붉은색 코스모스를 꽂았죠. 그러곤 저한테 춤을 가르쳐 줬어요. 그땐 바보 같다고 비웃었는데…… 지금 떠올려 보니 꽤 잘 어울렸었네요.”
“그렇구나.”
“코스모스가 정말 많았어요. 어릴 때라 거기가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모르겠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넓은 꽃밭이 출렁이던 게 생각나요.”
코코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듣기만 해도 예쁜 기억이었다.
율리아가 그녀를 따라 웃으며 말했다.
“신기하죠. 아버지는 어머니가 살아 있는 과거로 가고 싶어서 보석을 찾아 헤매었는데, 정작 그 보석을 손에 넣은 나는 과거로 돌아가기 싫어서 저주를 풀어 버렸어요.”
“그럼 이제 내가 널 잊어버릴 일은 없는 거지?”
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그녀가 죽더라도 코코에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다시 시작할 수 없으니까.
“맞아요.”
“좋아. 그럼 이제 마음껏 가까워져도 되는 거지? 잊거나 잊힐까 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 그러면 내가 네 생일을 만들어 챙기고, 네가 좋아하는 꽃으로 목걸이를 만들어도 되겠네. 매일 네가 좋아하는 과자를 사서 출근하는 것도 좋겠고.”
“네?”
“두고 봐. 이전 삶의 내가 너한테 얼마나 중요한 친구였는지 몰라도, 그딴 계집애한테 질 순 없지.”
자기 자신을 그딴 계집애라고 말한 코코가 살짝 열려 있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창밖에서 알렉사가 고개를 내밀었다.
“저도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