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4-2화 (303/319)

57. 아홉 번째의 율리아 아르테와 두 번째의 카루스 란케아

카루스는 자신이 한 번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독에 중독돼 죽었을 수도 있고, 심장이 칼에 찔려 죽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순간부터 자연스레 다시 살게 되었다. 과거의 한 장면에서 율리아의 모습을 한 존재와 만나 심장을 내어 주는 선택을 한 뒤, 그는 한 번 죽음을 뛰어넘었다.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는 사라졌다. 저주는 완성되었다. 그건 보석의 주인을 신으로 만들어 주는 기회가 아니었다. 일종의 증명이었다. 저주의 완성은 곧 저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전설 너머의 존재는 보석을 통해 물었다.

인간은 사랑과 증오, 둘 중 무엇에 더 이끌리는 존재인가.

신이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카루스는 그 두 개의 보석이 다시는 이 땅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일어났어요?”

알싸한 약초 향을 뚫고 율리아가 다가왔다. 그녀는 의사가 지어 준 약을 넓은 그릇에 물과 함께 넣고 섞었다.

“먹기 싫어.”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세요.”

“한번 찍어 먹어 봐. 그게 얼마나 끔찍한 맛인지 알고 나면 너도 그렇게 말할 수 없을걸.”

“후유증이 남는 것보다는 나아요.”

율리아가 그릇을 내밀었다. 침대에 누워 있던 카루스는 말로는 투덜거리면서도 그녀가 내민 약을 남김없이 비웠다.

“신이 참 속 좁기도 하지. 이왕 살려 줄 거면 상처와 독까지 다 없애 주지 않고.”

“그건 좀 동감이네요.”

율리아가 카루스의 몸에 그어진 여러 줄의 상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흉터가 깊게 남을 것이다. 평범한 상처도 아니고 독을 바른 무기에 당한 상처였다. 저주를 완성한 뒤부턴 부풀었던 살점이 가라앉고 검은 멍도 사라지기 시작했으나, 그건 그가 괴물 같은 회복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의사는 카루스가 살아 있는 게 기적이라고 말했다. 카루스도 그런 것 같다고 얼버무렸다. 율리아는 그가 한 번 죽은 순간부터 다시 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 과거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그럼 나는 두 번째인가.”

카루스가 침대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그가 짓궂은 농담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율리아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농담이 나와요?”

“살아 있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그래. 자꾸 확인하고 싶어서.”

“이게 마지막이에요.”

“그래.”

“우리 둘 다 마지막이에요. 다음은 없어요. 저주가 사라졌으니까요. 이제부턴 당신도 삶이 하나뿐인 평범한 사람처럼 살아요.”

“난 항상 그랬어.”

“자꾸 이상한 농담하지 말고요.”

율리아가 카루스의 몸에 새 붕대를 감아 주었다. 냄새가 덜 나는 연고를 발랐기 때문인지, 그에게서 느껴지던 쓰고 독한 냄새도 대부분 사라졌다.

“카루스 님.”

율리아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약 기운이 도는지 카루스가 무거운 눈꺼풀을 손등으로 비볐다. 율리아는 그가 편히 누울 수 있게 베개를 받쳐 주었다. 그러곤 그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빨리 나아요.”

우리 손 잡고 해변으로 나가요. 평화 조약 같은 건 아무한테나 떠넘기고 오르테가로 돌아가요. 당신과 함께 저택을 꾸미고 싶어요. 저택 앞 바닷가로 나가서 맨발로 걸어요. 그날처럼 같이 작은 조개껍데기를 주워요.

카루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반쯤 잠들어 있는데도 그는 율리아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을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 얽어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율리아.”

그러곤 잠에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부터는 네가 내 삶의 주인이야.”

카루스는 빠르게 회복되었다.

그가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리바이어던의 기사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그의 침실을 찾아와 침묵시위를 벌이는 통에 잠자리가 뒤숭숭했다는 점만 제외하면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크세노 이베르트 바이칸은 카루스 란케아와 남부 연합의 전리품이었다. 그는 여전히 군함 깊은 선실에 갇혀 있었다.

여름이 코앞이었다. 오르테가는 이미 뜨거운 여름일 것이다. 하지만 율리아와 일행은 아직도 바이칸 서남부 르세라에 머무르고 있었다.

할 일이 태산이었다.

“안 돼.”

코코가 단호하게 말했다.

“너만 오르테가로 돌려보낼 수는 없어. 나는? 나는 어쩌라고? 네가 카루스 란케아를 간호하면서 쉬는 동안 나는 잠도 줄여 가면서 일했다고! 국가와 국가 간의 협약이야. 국제 조약이라고! 준비해야 할 문서가 한 보따리에, 협의해야 할 조항이 한 보따리인데!”

“그걸 왜 우리가 다 해요? 북부와 남부에서 독립 왕국 왕족들 모아 놓고 하나씩 시키면 되잖아요. 바이칸에도 합리적인 방식으로 협상할 줄 아는 귀족들이 있을 거라고요.”

코코가 꽥 소리를 질렀다.

“이게 다 레위시아 전하 때문이야!”

“전하께서 왜요?”

“이놈이랑은 술 마시다가 절친한 벗이 되고, 저놈이랑은 술 마시다가 이상한 사교 모임을 만들었어! 어떤 사람들은 전하의 외모에 반해 따라다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전하가 미혼이라서 따라다닌다고!”

한마디로, 레위시아가 왕족과 사절들 사이에서 가장 친화력이 높은 사람이란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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