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4화 (302/319)

264화

율리아도 같은 바닷가에 서 있었다.

그녀를 인도하는 존재는 카루스였다. 그가 자신의 구두를 들고 뒷짐을 진 채 앞서 걸었다.

그의 손가락에 걸려 달랑거리는 구두가 어쩐지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 일정하게 파인 발자국이 사랑스러웠다. 그 위를 똑같이 밟고 걸으면 이 넓은 바다에 그와 자신, 둘만 있는 기분이 들었다.

율리아는 허리를 구부려 작고 동글동글한 조개껍데기를 주웠다. 치마 주머니가 터지도록 가득. 그 사이엔 반질반질하고 푸르스름한 돌도 하나 섞여 있었다.

앞서 걷던 카루스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밀려오는 파도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위치에 서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율리아는 망설임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카루스의 손에서 달랑거리던 구두가 흰 모래 위에 놓였다. 율리아는 구두를 신으려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카루스의 검은 눈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까맣고 깊은 어둠이 보였다. 율리아가 갇혀 있던 마음의 감옥이 그 안에 있었다. 실패하고 절망했던 수많은 율리아가 그 안에서 새카만 비극을 품고 울었다.

언젠가 카루스가 열고 들어왔던 감옥이었다. 아무리 밀어내도 계속해서 두드려, 그는 마침내 그녀에게 닿았었다.

그가 말했다.

내 손을 자르면 너는 나를 잊은 채 살게 될 것이고, 네 손을 자르면 내가 너를 잊은 채 살게 되리라고. 죽은 사람은 과거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

율리아가 물었다.

“손을 놓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서로를 잊게 되리라. 영원히.

그리하여 한 쌍의 저주는 다시 새로운 주인을 찾아 떠돌게 될 것이다. 하나의 저주가 한 사람에게 깃들면 다른 하나의 저주가 상대를 찾아내고, 또 그렇게 죽음을 반복하고 서로를 증오하면서.

그렇다면 율리아에게도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아홉 번이나 겪은 일이에요.”

열 번이라고 못할 게 없었다.

그녀는 과거의 율리아가 아니었다. 이제는 새로운 목표가 있었다. 원하는 삶이 있었다. 복수에 물든 악귀가 아니라, 율리아 아르테로 살겠다고 다짐했다.

레위시아의 시녀로, 코코와 알렉사의 벗으로, 카루스의 연인으로 살겠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율리아가 말했다.

“그를 만날 거예요.”

사랑하고 또 사랑할 것이다. 당신이 나를 잊었대도 사랑할 수 있다.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잊히고 싶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강한 마음으로 당신을 원하게 됐으니까.

율리아가 칼을 들어 올렸다. 처음엔 자신의 손목에 갖다 대었으나, 이내 다시 떼어 냈다.

그녀는 이 순간이 어떤 시험이라는 걸 깨달았다. 눈앞의 카루스는 진짜 카루스가 아니고, 잘라야 하는 건 손목이 아닐지도 모른다.

율리아가 카루스의 모습으로 나타난 존재에게 물었다.

“이걸 원해요?”

칼끝이 심장에 닿아 있었다.

자신을 위해 기꺼이 저주를 받아들이겠다는 남자를, 그 저주를 받아들이고도 모자라 심장까지 바치겠다는 남자를, 그녀는 절대 잊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칼날이 여린 살을 파고들어 심장에 닿게 했다. 슬프고 두려웠지만 이겨 냈다.

“……!”

그런데 그 순간, 쥐고 있던 칼이 물거품처럼 투명해지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칼을 쥐고 있던 손과 그녀의 몸, 눈앞에 서 있던 카루스까지 전부 사라졌다. 흰 모래사장과 주머니 가득하던 조개껍데기, 가지런히 놓인 구두도 사라졌다.

모든 게 사라지고 있었다. 밀려와 부서진 파도가 거품만 일으키고 물러나듯, 온 세상이 제 자리를 찾아 돌아갔다.

* * *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할 인간이 서로를 미워하며 싸우기 시작했을 때, 신은 그들을 시험하기 위해 하나의 보석을 둘로 나누었다.

그리고 그 보석이 선택하는 두 사람에게 시련을 안겨 주었다.

지극히 사랑하는 사이라도 극복하기 어렵고, 지극히 증오하는 사이라도 헤어질 수 없게 만들었다.

언젠가 그 모든 시련을 극복한 자들이 나타나 두 개의 보석이 하나가 되길 기원하면서, 신은 두 개의 보석을 각각 바다와 산에 던졌다.

수많은 전설이 태어나고, 또 사라질 만큼 많은 세월이 흘렀다.

바다에 던져진 보석은 푸른 바다의 환초가 되었다. 산에 던져진 보석은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라 불렸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두 개의 보석은 수많은 사람을 선택하고 포기하면서 그들을 시험에 들게 했다.

그리하여 언제부터인가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가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을 때, 푸른 바다의 환초에게도 새로운 이름이 생겼다.

‘연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