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연인
카루스 란케아는 익숙한 바닷가에 서 있었다.
이상했다. 조금 전까지 뭘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세상이 물감처럼 뒤섞이더니 이내 다른 풍경으로 변했다.
손으로 머리를 짚으려고 했는데, 손가락에 뭔가가 걸려 있었다.
그는 누군가의 구두를 들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에 걸려 달랑달랑 흔들리는 신발이 가볍고 어여뻤다. 푹신한 모래사장 위에 흰 조개껍데기가 갖가지 모양으로 어여뻤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밀려오는 파도와 멀리 높은 하늘을 나는 새, 뜨거운 햇살과 시원한 바람 모든 것이 어여뻤다.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날은 율리아가 그에게 처음으로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 보겠다고 약속했던 날이었다.
율리아.
카루스가 그녀를 불렀다. 소리가 되어 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앞서 걷던 율리아가 걸음을 멈추더니 그를 향해 뒤돌아섰다.
깊이 요동치는 바다가 그녀의 눈동자에 갇혀 있었다.
이상했다. 율리아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눈을 똑바로 마주하기 어려웠다. 고귀하고 장엄한 무언가가 그녀를 통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율리아가 아니다. 그건 율리아가 아니었으나, 그녀와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나 그를 바라보았다.
전설 너머의 존재인가.
카루스는 그녀의 눈에 비친 자신이 모래알만큼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율리아가 손을 내밀었다.
카루스가 왼손을 내밀어 그녀의 오른손을 잡았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구두는 어느새 흰 모래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내 손을 잘라요.”
카루스가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구두가 사라진 손에 날카로운 칼이 쥐여져 있었다.
“내 손을 잘라요. 그러면 당신은 날 잊은 채 살아갈 수 있어요. 나는 죽어 과거로 돌아가겠지만, 이곳에 남은 당신은 계속해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카루스는 대답할 수 없었다. 성대가 없는 물고기처럼 그는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당신의 손을 잘라요.”
율리아가 다시 말했다.
“당신의 손을 잘라요. 그러면 나는 당신을 잊은 채 살아갈 수 있어요. 당신은 죽어 과거로 돌아가겠지만, 나는 이곳에 남아 당신을 잊은 채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칼을 놓아 버리려 했는데 손바닥에 붙은 것처럼 떼어 낼 수 없었다. 꼭 자신의 손이 칼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율리아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아니면 차라리 내 손을 놓으세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우리는 서로를 잊은 채 영원히 같은 비극을 반복하게 될 거예요. 모든 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겠죠.”
카루스가 울며 부정했다. 그런 건 너무 잔인하다. 나 혼자 죽는다면 모를까, 율리아를 잊고 싶지 않다. 그녀를 잊은 채 살아가고 싶지도 않다.
잘못한 게 있다면 대가를 치르겠다. 이 삶이 끝난 뒤에 영원히 저주에 갇혀 산다고 해도 괜찮다.
율리아와 함께 단 한 번의 삶을 살아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카루스가 힘겹게 팔을 들어 칼을 자신의 손목에 가져다 댔다. 율리아를 과거로 돌려보내느니, 자신을 잊고 살아가게 하는 게 나았다. 그녀에게 그 아픔을 다시 겪게 할 수는 없었다.
과거로 돌아가 잊히는 아픔을 감당하는 건 자신의 몫이 되리라.
율리아, 나를 잊어도 괜찮아.
카루스가 마음으로 말했다.
내가 너를 찾을 거다. 너를 살리고, 보살필 것이다. 아무도 네게 상처 주지 못하게 온몸으로 막고 지킬 것이다. 고단했던 과거를 웃으며 추억할 수 있도록, 게으른 행복을 마음껏 누리게 하리라.
그렇게 한 번, 두 번…… 언제까지고 너만을 사랑할 것이다.
아마도 그 속에서 너는 내 삶의 유일한 구원자가 되겠지.
율리아가 카루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요동치는 바다가 그를 향해 밀려들었다. 어디선가 시원한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배 위에서 처음 밤바다를 마주했을 때처럼, 장엄한 평화 속에 잠든 신화가 느껴졌다.
카루스는 전설을 떠올렸다.
대적자의 심장을 찌르면 저주를 완성할 수 있다던 이야기.
전설이란 와전되기 마련이다. 전하는 사람의 입맛에 맞게, 전해지는 사람의 취향에 맞게. 그렇게 조금씩 변해서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어쩌면 저주는 그렇게 탄생했는지도 모른다.
심장이 뜨겁고도 차가웠다. 그는 자신이 아직 살아 있는 건지, 아니면 죽은 뒤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곳은 현실이 아니기에 그는 죽음의 경계에서 자신이 만들어 낸 환상을 마주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카루스가 손목에 닿았던 칼을 되돌렸다. 이번에는 칼을 역수로 쥐고, 날 끝이 자신의 가슴에 닿게 했다. 심장이 있는 자리였다.
너를 잊는 것도.
네게 잊히는 것도.
율리아의 눈동자가 범람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한 거대한 존재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왜, 이건 예상하지 못했어?
카루스가 단번에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