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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화 (299/319)

262화

크세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의 눈이 한계까지 뜨여 있었다. 붉은 핏줄이 터질 듯 부풀어 올라, 눈에서 피가 날 것 같았다.

보석을 보자마자 평정심을 잃은 크세노가 쇠사슬을 질질 끌어 카루스에게 다가왔다. 절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쇠공이 반 바퀴 굴렀다.

“그게 왜 네놈에게 있지? 똑같은 가짜를 만들었나? 너야말로 솔직히 말해 봐, 카루스 란케아. 그게 왜 네놈의 손에 있는지!”

“나야말로 알고 싶군.”

카루스가 크세노의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물었다.

“말해 봐, 크세노. 네가 아직도 이 보석의 주인인가? 말해!”

“당연하지. 그건 내 것이다!”

“그런데 왜 내게 왔느냔 말이다. 왜! 전쟁이 끝나자마자 어느 날 갑자기 손아귀에 쥐여져 있었어. 가짜인 줄 알고 버렸는데, 다음 날에도 똑같이 내 손에 쥐여 있었단 말이다. 말해, 크세노! 너는 그 이유를 알잖아!”

“거짓말하지 마라! 그건 내 것이다! 내가 그 저주의 주인이야! 과거로 돌아가는 건 나란 말이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카루스가 뚜벅뚜벅 걸어가 선실에 하나뿐인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는 보석을 든 손을 창밖으로 내밀고 말했다.

“이걸 바다에 버리고, 이번에는 누구에게 돌아오는지 보자고.”

안 돼. 크세노가 멍하니 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무거운 쇠사슬 때문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금세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율리아, 너는…… 푸른 바다의 환초를 삼켰다지?”

“그건 왜 물어보세요?”

“그때 이야기를 들려줘. 어떻게 발견했고, 어떻게 삼켰는지. 푸른 바다의 환초는 네게 몇 번이고 돌아오거나 그러지 않았단 거지?”

“돌아오다뇨. 그걸 발견하자마자 빼앗길까 봐 얼른 입에 집어넣었어요. 그 뒤론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한 번도?”

“네, 한 번도.”

율리아는 저주를 삼켰다고 했다. 입에 넣은 뒤에는 물처럼 스며들어 두 번 다시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삶을 반복하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푸른 바다의 환초는 그렇게 율리아의 영혼에 스며들었다.

크세노는 달랐다.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는 그에게 매번 돌아오긴 했어도, 그의 영혼에 스며들지는 않았다. 삶을 반복하면서도 늘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처음 그 차이를 깨달았을 때, 크세노는 굉장히 불길한 가능성 하나를 떠올렸다.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는 진짜 주인을 찾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가 진짜 주인이 아닐 수도 있다. ‘보석을 손에 넣은 자’가 ‘저주의 주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과거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마지막 해적왕도 그랬다. 그는 광산 노예였던 대적자가 죽을 때마다 함께 회귀해 마침내 그를 찾아내기까지 했으나, 저주를 완성하지는 못했다.

대적자의 심장을 취해야 한다는 걸 알려 준 자들은 북부 산지의 주술사들이었다. 그러나 전설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 그들이 하는 말은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가 모르는 다른 진실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율리아를 죽여 확인해 볼까 했지만, 그때는 이미 전쟁이 시작된 지 한참이 지난 후였다. 이대로 율리아만 죽어 사라지고 자신은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크세노 이베르트 바이칸은 패배한 황제로 역사 속에 남게 된다.

그는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었다.

“언제부터지?”

카루스가 물었다.

“이 보석이 너를 떠난 게, 정확히 언제냐고 물었다.”

대답할 수 없었다. 크세노는 더욱 굳게 입을 다물었다. 어떤 말로도 카루스를 속일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건 전쟁이 시작된 이후였다. 정확히는 밀수선을 타고 오르테가에 다녀온 뒤였다.

그래도 그때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돌아오는 거겠거니, 여겼다. 데네브라에게 주었을 때처럼, 데네브라가 블라이스에게 주었을 때처럼 돌고 돌아 자신에게 올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한데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부터 크세노는 아침마다 일어나 편집증 환자처럼 제 품을 뒤졌다. 몰래 사람을 시켜 보석을 찾아보게 하기도 했다. 도대체 언제 사라진 건가. 언제부터 돌아오지 않는 건가. 마지막으로 손에 쥐었던 기억은 분명 북부 전선이었다.

북부 패전국 연합이 평원을 앞두고 물러나 전쟁의 양상이 바뀌었을 때, 그날 이후부터 크세노는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를 보지 못했다.

카루스가 창밖으로 내밀었던 손을 끌어당겼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피처럼 붉은 보석이 반짝거렸다.

“그렇군. 너는 율리아를 죽일 수 없어.”

카루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보석은 더는 너를 주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고.”

카루스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전쟁 중엔 긴가민가했는데 이제는 확실해 보였다. 율리아가 말한 대로, 황제는 과거로 돌아가지 못할까 봐 겁에 질린 상태였다.

“그럴 리가 없어.”

“내 말이 사실이라면…….”

카루스가 보석을 만지작거리면서 중얼거렸다.

“너를 죽여도 율리아는 죽지 않겠군.”

카루스의 목소리는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울음 같았다. 그가 거칠고 낮은 소리로 웃었다.

만약 자신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황제가 더는 이 보석의 주인이 아니라면.

죽일 수 있다.

크세노가 두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헛소리하지 마! 연인의 목숨으로 모험을 할 셈이냐? 카루스, 너는 절대 그렇게 못 해. 네 말대로라면 내가 죽어도 율리아는 저주를 완성할 수 없어! 그 여자는 영원히 고통받을 거야!”

“아니.”

카루스가 고개를 저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어떤 말로 협박해야 크세노가 진심을 털어놓을까. 카루스는 크세노를 속이기 위해 자신의 비밀을 먼저 내보이기로 했다.

그가 크세노의 눈앞에서 셔츠를 걷어 올렸다. 길게 베인 상처가 드러났다. 검게 변한 살점이 부풀어 올라 끔찍했다. 이제는 시커먼 멍이 팔 전체에 퍼져 가슴에 닿아 있었다.

그걸 본 크세노가 낮게 신음했다. 그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중독되었나.”

카루스는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해적들에게 얻은 진통제와 의사가 준 약을 먹어 가며 버티고는 있었지만, 곧 한계였다. 그는 자신의 심장이 점점 느리게 뛰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크세노.”

카루스가 황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곤 날카롭게 벼려진 칼을 꺼냈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 해라.”

들어 줄 테니. 카루스가 관대한 척 말을 걸었다. 한때 대륙을 지배했던 황제의 유언이니 기록으로 남겨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허세 부리지 마라. 날 죽였다가 율리아도 죽어 버리면 어떡하려고! 우리가 모두 과거로 돌아가 버리면, 그땐 어떡하려고?”

“상관없다. 나도 곧 죽을 테니까.”

율리아는 과거로 돌아갈 뿐 죽지 않고 살아남을 테니 상관없다고, 카루스가 말했다.

크세노가 기가 막혀 되물었다.

“율리아가 널 원망한다고 해도? 그래도 괜찮다고?”

“과거로 돌아가면 어차피 과거의 나와 만나게 될 것 아닌가. 원망은 그때 들으면 되겠지.”

우린 다시 사랑에 빠질 테니까. 기억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카루스가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크세노의 얼굴에서 혈색이 빠져나갔다.

카루스의 말은 거짓이었으나 크세노는 그걸 깨닫지 못했다. 그는 그처럼 깊은 사랑에 빠져 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의 전부가 되거나, 누군가를 전부라고 여겨 본 적도 없었다. 뭐가 거짓이고 진실인지 몰랐다.

그때 카루스가 몸을 구부리더니 입으로 검은 피를 쏟아냈다. 심장을 가득 채운 독이 그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끝이었다.

크세노가 일그러진 미소를 띤 채 그에게 말했다.

“그래,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는 나를 떠났어. 아무리 기다려도 내게 돌아오지 않았지. 카루스 란케아, 네가 그 보석의 새로운 주인이라면…… 어디 한번 그걸 삼켜 봐!”

“뭐?”

“율리아처럼 입에 넣어 삼키라고! 그 보석은 진짜 주인을 만나면 그런 식으로 변하는 모양이니까. 삼켜! 망설일 필요 없잖아? 네가 진짜 주인이라면 네 영혼에 흡수될 거고, 그게 아니라면 결국 나처럼 되겠지!”

진짜 주인이라고?

카루스가 굳은 얼굴로 보석을 바라보았다. 크세노가 그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기억하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그럼 그걸 삼키고 영원히 삶을 반복해 봐! 과연 네가 그걸 감당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라고!”

* * *

르세라 해군이 내어 준 쾌속선을 타고 부두를 떠난 율리아는 오래 지나지 않아 캄캄한 밤바다 한가운데서 리바이어던 함대를 찾을 수 있었다.

배에 오른 그녀는 야간 경비를 서던 병사들에게 금세 둘러싸였다. 그들은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눈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을 보곤 화들짝 놀라 카루스를 찾았다.

“선창 밑 선실에 계신다고 합니다.”

크세노가 갇혀 있는 곳이었다.

율리아는 그대로 달려서 계단을 내려갔다. 당황한 병사들이 어쩔 줄을 모르며 입구 밖을 서성거렸다.

크세노가 갇혀 있는 선실 앞에 다다른 율리아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안에서 카루스의 목소리가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가까이 귀를 대면 그가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들을 수 있었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두 사람은 싸우고 있었다.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가 카루스에게 있다고 했다. 크세노를 찾아가지 않고 갑자기 주인을 바꾸었다고.

황제가 그 보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건 아닌지 의심하긴 했어도 그게 카루스를 따라다니는 줄은 몰랐는데.

심장이 갈수록 세게 뛰었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크게 두근거렸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카루스는 크세노를 죽이겠다고 협박했고, 크세노는 그게 율리아의 죽음을 불러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비로소 크세노가 보석이 자신을 떠났다는 사실을 인정했을 때.

카루스는.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를 삼키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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