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 * *
르세라에 도착한 율리아는 곧장 프랑크 후작의 저택으로 안내되었다. 같은 날 도착한 레위시아와 코코가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후작께서는 언제 돌아오신다고 하던가요?”
“전령을 보내긴 했는데, 아직 정확한 일정은 모릅니다. 데네브라 황비 전하께서 황성에 들어가셨으니 후작님도 오래 지나지 않아 르세라로 돌아오시겠죠.”
“새로운 소식은 최대한 빨리 알려 주세요.”
르세라의 관리들에게 재차 당부한 율리아가 저택 안으로 들어가 귀빈실의 문을 열었다.
코코와 레위시아가 소파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목욕하거나 옷을 갈아입을 기운조차 없었는지, 두 사람은 전쟁터를 떠날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레위시아의 자랑이었던 긴 머리카락은 땀과 먼지로 한 덩어리가 되어 대충 묶인 채였고, 코코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젖은 수건을 올려놓고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뻗고 누웠다.
두 사람을 시중들던 하녀가 괜히 어쩔 줄을 몰라 하더니 율리아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괜찮으니까 나가 봐.”
“예, 아르테 백작님.”
하녀는 욕실에 더운물을 받아 놓았다는 말을 남기곤 서둘러 사라졌다. 갈아입을 옷도 한쪽에 준비되어 있었다.
“전하, 얼른 일어나서 씻으세요. 고단하시겠지만…… 이대로 잠들었다간 내일 전하한테서 구린내가 날지도 몰라요.”
“이미 나고 있어.”
“어서요.
“코코한테 먼저 하라고 해. 난 조금만 더 있다가…….”
레위시아가 몸이 아파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것 같다고 칭얼거렸다. 전쟁이 끝나 긴장이 풀리자마자 티타니아에서 르세라까지 강행군을 이어 왔으니, 몸살이 나도 단단히 난 게 분명했다.
코코도 레위시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투정 부릴 힘도 없는지, 그녀는 누워서 끙끙 소리를 내며 앓기만 했다.
손바닥으로 코코의 이마를 짚어 본 율리아가 열이 난다며 가볍게 혀를 찼다.
율리아는 아까 내보냈던 하녀를 다시 불렀다. 그러곤 의사를 부르게 했다. 프랑크 후작의 저택엔 상주하는 의사가 여럿 있었고, 그중 하나가 서둘러 달려왔다.
“피로 때문입니다. 특별히 해드릴 게 없어 죄송합니다만…… 잘 먹고 푹 쉬는 것밖엔 방법이 없습니다.”
“열은요?”
“내일이면 내릴 것 같긴 한데, 혹시 모르니 약을 지어 드리겠습니다.”
의사가 커다란 가방 안에서 몇 가지 약을 꺼냈다.
코를 찌르는 듯한 약 냄새가 방 안 가득 퍼졌다. 효과를 빨리 보려면 달여서 마시는 게 좋다며, 의사가 물에 약을 넣어 끓이기 시작했다. 진통 효과에 해열제와 영양제가 섞인 약이었다.
가만히 서서 그가 만드는 약을 바라보던 율리아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물었다.
“칼에 베인 상처에 바르는 약에서도 이렇게 독한 냄새가 나나요?”
“예? 그럴 리가요. 바르는 약은 냄새가 독하면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특히 귀족들이 싫어해서, 어지간하면 냄새가 심하지 않게 만들지요.”
“그런데 이거랑 비슷했어요. 코를 찌르는 것 같은 쓴 냄새에…… 바닷물 냄새가 섞인 것 같았어요. 약초인데 꼭 바다에서 건진 것처럼.”
“예? 그건…… 이상하네요.”
의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상처에 바르는 약이었습니까?”
“맞아요.”
“먹는 약이면 모를까, 바르는 약에서 그런 냄새가 났다면 그건 해독제일 확률이 높아요. 독한 진통제에 해독용 생풀을 섞으면 그런 냄새가 나거든요. 꼭 비린내처럼 느껴지죠.”
율리아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해독제……?”
“독을 가진 뱀에 물리거나 해파리에 쏘였을 때 주로 그런 약을 씁니다. 그럴 땐 급하니까 냄새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거든요. 그러고 보니 병사 중에도 독에 당한 사람이 몇 있던데, 그분들한테서 맡은 냄새인가요?”
“독에 당한 사람이 있었어요?”
“티타니아에서 정복군이 썼다고 하던데요. 그 바람에 오늘도 한 사람이 죽었어요. 하여간 그놈들도 어지간히 급했나 봅니다. 독을 쓰는 건 금지되어 있을 텐데.”
“죽었다고요?”
“못 들으셨습니까? 이동 중에도 여럿 죽었다고 알고 있는데…….”
의사는 끝까지 말을 마칠 수 없었다. 율리아가 갑자기 방을 박차고 달려 나갔기 때문이었다.
“아르테 백작님?”
멀어지는 그녀의 발소리가 몹시 다급했다. 의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활짝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며 늘어져 있던 코코와 레위시아도 벌떡 일어나 서로를 바라보았다.
“부두까지 빨리!”
피가 다 빠져나간 듯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저택을 빠져나간 율리아가 마차를 타고 소리쳤다.
“빨리요!”
비명처럼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마부가 서둘러 마차를 출발시켰다.
치마를 꽉 쥔 율리아의 손이 덜덜 떨렸다.
아닐 거야. 아닐 것이다. 그건 그냥 진통제 냄새여야 한다. 카루스가 답답하다면서 붕대를 다 풀어 버리는 바람에, 오래된 약 냄새가 우연히 비슷하게 난 것이다.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배를 타고 오면서도 매일 율리아와 함께 식사하고 바다를 구경했다. 율리아가 크세노를 찾아갈 때마다 근처를 서성이며 그녀를 지켜보기도 했다.
“아니야.”
율리아가 스스로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카루스가 독 따위에 당했을 리가 없었다. 그 남자는 무혈 제독이었다. 율리아가 아홉 번째를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죽거나 쓰러진 적 없는 강한 남자였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크세노를 사로잡기 직전, 카루스는 달아나는 정복군을 헤집고 혼자 뛰어들었다. 그의 속도가 너무 빨라 기사들이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율리아를 지키기 위해 뒤쪽에 남아 있던 덩치 큰 기사가 당황해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율리아는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카루스를 보고 있었다.
그가 수십 명의 정복군을 베어 넘기며 돌격하는 모습, 그를 향해 쏟아지는 무기들, 그리고 마침내 크세노에게 닿았을 때 카루스의 몸에 새겨져 있던 수많은 상처.
그는 그때 피투성이였다.
“아니야.”
율리아가 또 한 번 중얼거렸다. 눈이 타는 듯 뜨거워지더니 맑은 눈물이 차올랐다. 떨리는 손끝에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그러곤 이내 한꺼번에 흘러넘쳤다.
아니야. 율리아가 입을 꽉 다문 채 울음을 터뜨렸다. 그럴 리가 없었다. 아닐 수도 있는데, 자신의 과한 상상일 수도 있는데,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전속력으로 달리던 마차가 부두에 다다랐다. 마부가 거의 다 왔다고 소리쳐 알려 주었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가 들렸다. 짠 내 섞인 바람도 함께였다.
“위험해요!”
율리아는 마차가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깜짝 놀란 마부가 위험하다고 경고했지만, 그녀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카루스의 군함은 이미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였다. 율리아는 그가 어디로 배를 몰고 갔는지도 몰랐다.
“배를…… 배를 타야 해요.”
“왜 그러십니까?”
“저 앞, 수평선 너머에 리바이어던 함대의 배가 있어요. 거기로 가야 해요. 제발…… 도와주세요. 네? 뭐든지 드릴게요.”
마부는 율리아가 오르테가에서 온 아르테 백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데네브라의 곁에서 시중을 들던 우아한 시녀님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떨며 애원하고 있었다. 하얀 얼굴에 눈물이 가득했다.
이미 밤이 깊어지고 있었으나, 마부는 그녀를 돕기로 했다.
“따라오십시오!”
마부가 율리아를 억지로 마차에 태워 해군 기지로 향했다. 그러곤 아르테 백작께서 급하게 바다로 나가야 하니, 가장 빠른 배를 준비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 * *
크세노는 눈앞에 서 있는 카루스를 한동안 노려보았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과 건장한 몸, 그에게서 느껴지는 짐승의 기운과 서늘한 살기, 도무지 빼앗을 수 없었던 긍지까지.
“난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거야.”
크세노가 여유를 가장하며 말했다.
“저주를 완성하는 방법이건, 저주를 끝내는 방법이건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을 거다. 너희는 영원히 행복해지지 않을 거야. 나와 함께 이 가혹한 운명 속에서 끝까지 고통받겠지.”
“크세노.”
카루스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단 한 번만이라도 솔직해져 봐.”
“뭐야. 내가 지금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다는 거냐?”
카루스가 물었다.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는 어디에 있지?”
크세노는 그의 질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율리아도 그렇고 카루스까지, 두 사람이 왜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를 찾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에겐 그 보석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
“말했잖아. 그건 언젠가 나한테 돌아오게 되어 있다고.”
“아직도 네가 그 보석의 주인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크세노가 몸을 움직여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쇠사슬의 길이만큼 움직일 수 있었으나, 그 끝에 매달린 쇠공 때문에 금세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카루스가 그런 크세노를 가만히 응시하다 말했다.
“그럼 이게 왜 내 손에 있는지 설명해 봐.”
그가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 커다란 손바닥에 붉은 보석이 올려져 있었다.
불길한 빛깔을 요요하게 내뿜는 보석은 크세노의 눈에도 무척 익숙한 것이었다.
“그게 왜…….”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