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55. 구원
율리아와 일행은 티타니아 승전 후 보급로를 통해 해안으로 돌아와 배에 올랐다. 다른 사람들은 섭정왕이 된 데네브라를 조만간 르세라에서 만나 새로 그어진 국경에 대해 논의하기로 했다.
“아르테 백작께서 남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들은 데네브라와 프랑크 후작이 율리아에게 유독 약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녀에게 오르테가로 돌아가지 말고 르세라에 남아 달라고 부탁했다.
“황비…… 아니, 데네브라 섭정왕도 아르테 백작을 시녀장으로 임명할 정도로 믿고 의지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간절해 보였다.
율리아가 남으면 그들에게는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레위시아 국왕이 각별하게 아끼는 측근이니, 그녀가 있으면 그를 쉽게 끌어들일 수도 있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율리아는 그들에게 확답을 주지 않았다. 아직 그녀에겐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었으니까.
크세노 황제를 좁은 선실에 가둬 버리고, 카루스는 배를 바다 한가운데에 띄워 놓았다.
육지에 머물렀다간 혹시 누가 황제를 구하려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리바이어던 함대가 있는 이상, 바다에서는 감히 그들에게 대적할 자가 없었다.
“오늘은 어때?”
카루스가 물었다.
그는 난간에 기대 서 있었다. 다시 검어진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에 거칠게 휘날렸다.
여기저기 상처가 많았다. 분명 의사가 정성스레 치료하고 붕대를 감아 놓았을 텐데, 답답했는지 다 풀어헤친 모습이었다. 그에게서 쓴 약초 향이 났다.
“알렉사가 곯아떨어져서 안 일어나요. 아무리 피곤해도 식사는 하고 잤으면 좋겠는데……. 란케아 영지에서 온 기사들도 다들 곯아떨어졌겠죠?”
“두들겨 패도 안 일어난다고 하더군. 맥스웰이 너무 심하게 코를 골아서 중간에 쫓겨났다는 말만 들었지.”
“코코는 레위시아 님과 새로운 동맹 협약서를 만든다고 했어요. 다른 왕국들은 물론이고, 바이칸과도 이제는 새로운 관계를 쌓아야 하니까요.”
“휴전 협약서인가?”
“평화 협약서라고 부르던데요.”
율리아가 카루스의 곁으로 다가가 난간에 팔을 걸쳤다. 그녀에게선 은은한 박하 향이 났다. 알렉사가 좋아하는 향이었다.
“크세노는.”
카루스가 다시 물었다.
“좀 털어놓았어?”
“아뇨.”
율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입을 다물고 있어요.”
크세노를 쉽게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겐 목숨과도 같은 비밀일 테니까. 죽인다는 협박은 통하지 않고, 죽는다는 협박도 통하지 않으리라.
그와의 첫 만남부터 해적왕의 유서와 짧았던 전쟁에 이르기까지, 율리아는 크세노의 행동을 되새기며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율리아가 바라보는 바다를 함께 바라보며, 카루스가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여기까지 왔는데 실패하면 안 되잖아요.”
“여차하면 내가 놈을 아주 깊은 감옥에 가둬 두고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으로 만들어 버릴 테니.”
“그만둬요. 그건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 둘래요.”
“코델리아 시녀장도 같은 소리를 하던데? 매일 몸에 좋은 것만 먹이면서 최고의 의사를 붙여 놓고 오래오래 살게 해야 한다고.”
“그게 뭐예요.”
율리아가 웃었다. 봄바람 같은 미소였다. 따스한 여운이 차가운 바람 위에 내려앉았다. 몸은 추운데 마음이 들떴다.
손을 내밀어 율리아를 쓰다듬으려던 카루스가 상처투성이인 자신의 손을 보고는 자연스레 거두어 팔짱을 꼈다.
“육지에 가 봐야 한다면서.”
“조만간 르세라에서 조약을 체결할 거예요. 레위시아 전하와 독립 왕국의 왕족들 그리고 북부 패전국 연합 대표가 먼저 만나서 바이칸을 어떻게 할 건지 상의하겠죠. 데네브라 황비는 먼저 바이칸 황실에서 섭정왕으로 인정받아야 하니까, 다음 계절이 되어야 만나겠네요.”
“레위시아는 네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멍청이야.”
“제가 데네브라 황비의 시녀장이잖아요. 프랑크 후작의 간곡한 요청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그 멍청이들도 똑같군. 네가 없으면 정말 아무것도 못 하나?”
“자꾸 그러면 고자질할 거예요.”
“코델리아 시녀장이 어련히 알아서 할 텐데.”
“코코한테 너무 많은 짐을 지우는 거 아니에요?”
율리아가 웃으며 되물었다. 카루스는 찡그린 얼굴을 풀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알 게 뭐야. 여긴 바다라고. 내 도움이 없이 르세라엔 어떻게 가려고?”
“데려다주시는 거 아니었어요?”
“내가 언제?”
“다들 그러던데요.”
율리아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더니 저 뒤에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리바이어던 함대의 병사들을 가리켰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노려보던 카루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르세라로 가고 있었군.”
어쩐지 기분이 나쁘더라니. 카루스가 투덜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해 질 무렵이 되자 멀리 르세라가 보였다. 붉은 노을을 몰고 나타난 배가 긴 부두에 닿았다. 배가 멈추자 율리아는 카루스의 손을 잡고 좁은 판자 위를 걸어 선창에 발을 내렸다.
“기다리지 마세요. 며칠 걸릴 거예요.”
“그래서 언제 올 건데?”
“조약서 초안 정도는 만들어 놔야 하지 않을까요. 본격적인 이야기는 데네브라 황비가 와야 진행될 테지만.”
“기다리지.”
카루스가 씩 웃더니 율리아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추었다. 함대의 배를 구경 나왔던 사람들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율리아는 카루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린 그녀가 그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러곤 야윈 뺨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다녀올게요.”
그저 담백한 인사였으나, 카루스의 귀엔 한없이 달콤하게 들렸다. 네 목소리가 달아서 큰일이라고 중얼거리는 그를 바라보며, 율리아가 말했다.
“가서 의사한테 치료나 제대로 받으세요. 붕대는 왜 다 풀어 버린 거예요?”
“……그냥, 답답해서.”
돌아왔을 땐 당신한테서 약 냄새가 안 났으면 좋겠다는 율리아의 말에, 카루스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율리아를 부둣가에 내려 준 뒤, 카루스는 육지에서 조금 떨어진 바다 위로 되돌아왔다. 육안으로는 도시가 보이지 않을 만큼 적당히 먼 거리였다.
밤바다 위로 별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한동안 맑은 날이 계속될 거라던 병사들의 말이 떠올랐다.
카루스는 등불 밝은 갑판 위를 천천히 거닐었다.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건네던 병사들도 하나둘 선실로 돌아가고, 밤을 지키는 자들만 남아 각자의 자리에 섰다.
낮에 율리아와 나란히 서 있던 자리까지 온 그가 난간에 기대 바다를 바라보았다. 한 병사가 다가와 그의 곁에 등불을 놓고 물러났다.
카루스는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언제였더라. 무혈 제독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때쯤이었나.
그때 카루스는 대륙에서 가장 강한 남자였고, 가장 위대한 사령관으로 불렸다. 하지만 그는 누구나 탐내는 명예를 얻고도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지위나 권력 같은 건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했다.
그에겐 그저 출렁이는 파도와 고요한 밤바다, 해가 뜨고 지는 수평선만이 전부였다. 격렬한 전투 후에 찾아오는 이 장엄한 평화가 좋았다.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바다. 그는 자신이 종종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어린 물고기보다도 못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자신에게도 죽음이 찾아온다면, 이토록 고요한 밤바다에서 죽는 게 좋을 것 같다.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서부 해적들은 바다에 산 채로 던져지는 걸 가장 두려워했지만, 카루스는 그와 반대였다.
그는 죽어서라도 이 장엄한 평화에 속하고 싶었다.
바람이 불어 등불이 흔들렸다. 등불그림자가 그의 팔에 드리워졌다. 카루스는 난간에 올려진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상처투성이인 손이었다.
셔츠를 걷어 팔을 드러내자, 검붉은 상처가 드러났다. 처음 베였을 때는 살점이 벌어질 정도로 상처가 깊었는데, 며칠 새 검은 피로 채워져 부풀어 올라 있었다.
팔을 들어 올리자 쓰디쓴 약초 냄새가 났다.
율리아가 알렉사의 박하 향에 취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 바람이 많이 불어서 다행이기도 했다. 그래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지만.
카루스는 중독되었다. 마지막 전투에서 황제를 지키려던 정복군 기사들이 비겁하게 독을 바른 무기를 썼다. 그들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며 돌파했던 카루스는 그 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입었고, 몇 개의 상처에서 검은 피가 흐르며 살점이 부어올랐다.
의사는 그가 오래 살 수 없을 거라고 했다. 아무리 독한 약을 써도 시간을 늦추는 정도에 그칠 거라고. 팔에 입은 상처 하나라면 팔을 잘라내면 되지만, 그런 상처가 여러 군데였다. 중독된 피가 돌고 돌아 심장을 까맣게 채운 뒤에는 살 수 없을 거라 말하며, 그 기간이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라고 했다.
고통은 참을 수 있었다. 실제로 카루스는 율리아와 함께 티타니아 앞에서 보급로를 지나 배에 오르기까지 단 한 번도 아픈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를 남겨 두고 죽는 것만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율리아의 곁에 있고 싶었다. 함께 살고 싶었다. 그녀를 지키고, 그녀의 삶에 스며들고 싶었다. 남부의 따뜻한 바닷가에서 함께 늙어 가고 싶었다.
왕궁 시녀 같은 건 이제 그만하라고 투정 부리면서, 때때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며칠씩 망망대해만 바라보며 살고 싶었다.
고단했던 그녀의 삶을 이야기하고, 죽은 아버지를 추억하면서.
하나뿐인 삶을 남들처럼 평범하게.
상처를 중심으로 점점 감각이 무뎌져 갔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날은 그가 중독된 지 꼭 열흘이 되는 날이었다.
카루스는 자신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알았다.
“어디 가십니까?”
“아무도 내려오지 못하게 해.”
갑판 위를 벗어나 좁은 선실로 들어가며, 그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충직한 병사들은 카루스가 황제를 만나러 간다는 걸 알곤 계단 입구에서 경비를 섰다.
선실 앞엔 아무도 없었다. 카루스의 지시였다. 크세노는 어차피 달아날 수 없는 처지였다. 그의 팔다리엔 굵은 쇠사슬이 채워져 있고, 쇠사슬의 끝엔 묵직한 쇠공이 연결돼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벽에 기대앉아 있던 크세노가 눈을 떴다.
카루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크세노.”
문을 굳게 닫은 그가 황제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선실엔 창문이 하나였다. 창백한 달빛이 새어 들어와 카루스의 얼굴을 비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