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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화 (296/319)

259화

* * *

티타니아 앞에서 치러진 남부 연합과 정복군의 전투는 남부 연합의 커다란 승리로 끝을 맺었다.

크세노 황제는 포로가 되어 레위시아 국왕의 손으로 넘어갔다. 시에라와 녹스, 해적들과 리바이어던은 황제의 신병을 요구하지 않았고, 그의 처우를 전적으로 레위시아 국왕에게 맡기는 데 동의했다.

해적들의 피해가 가장 컸다. 죽은 자는 셀 수 없이 많았고, 살아남은 자 중에도 전투 중에 달아난 이가 많았다. 일부는 승전 보상을 요구하며 해적질을 그만두고 육지에 정착하려 했으나 나머지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해적 중엔 죽은 정복군의 시신을 뒤적이는 자가 많았다. 값비싼 갑옷과 검, 장신구와 휘장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돈이 될만한 것들을 모두 챙겨 사라졌다.

바실리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그가 마지막 전투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달아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는 말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황제를 버리고 달아난 정복군에겐 돌아갈 곳이 없었다.

르세라 방어군에서 반 황제파가 된 데네브라의 병력은 북진하던 호르헤를 죽이고 북부 연합과 협정을 맺었다.

운하를 차지한 북부 연합은 진격을 멈추었고, 데네브라는 바이칸의 패배를 인정하며 영토와 보상금을 약속했다. 그 대신 북부는 데네브라를 바이칸의 섭정왕이라 부르고 그녀와 협력하겠다고 발표했다. 프랑크 후작의 유연한 외교술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철썩. 철썩.

아무리 큰 배라도 거센 파도엔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다. 주위가 고요하니 뱃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리는 듯했다. 잠을 잘 때도, 잠을 자지 않을 때도 저 소리가 귓가에 맴돌아 괴로웠다.

크세노는 그를 바라보는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낯설었다. 처음 초상화를 확인했을 때보다도 더 그녀가 낯설게 느껴졌다.

크세노는 율리아가 자신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 하나뿐인 벗이자 운명이 짝지은 대적자라고 믿었다. 이렇게 말없이 서로 바라보고만 있어도 평생 함께한 친구처럼 진심이 통하는 상대라고 여겼다.

어쩌면 사랑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저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 만나게 되었더라면.

크세노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힘으로도 들어 올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쇠사슬이 손목과 발목을 구속했다.

율리아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참 한결같이 속을 알 수 없는 여자였다. 데네브라는 껍데기가 얇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점이 사랑스러웠는데, 율리아는 황비와 정반대였다. 이렇게 가까이에 있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괴물을 품은 바다처럼 깊이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크세노가 물었다.

“율리아, 날 어떻게 할 작정이야?”

그는 거짓 웃음으로 율리아의 시선을 끌었다. 이 모든 건 자신에게 있어 그저 한순간의 실패일뿐이라며 여유를 가장했다. 네가 원하는 건 아무것도 털어놓지 않을 거라고 비웃었다. 그녀 앞에서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율리아가 물었다.

“어떤 느낌이었어요?”

“뭐?”

“내가 처음 죽었을 때, 어떤 느낌이었어요.”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였다. 한데 말끝이 선명하고 높아 꼭 뱃전을 할퀴는 파도 소리 같았다. 크세노는 율리아의 물음에 정직하게 대답했다.

“추웠어.”

“추웠다고요?”

“지독한 한기가 뼛속까지 흘러들었어. 안에서부터 얼어붙는 느낌이었지. 너무 추워서 순식간에 굳어 버렸어. 움직이긴커녕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만큼.”

율리아가 어깨를 살짝 늘어뜨렸다. 그때를 떠올리자 자연스레 몸이 긴장돼 억지로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난 얼어 죽었어요.”

“그렇다고 하더군.”

“두 번째는요?”

“비슷했는데…… 그냥 영혼이 몸을 떠나는 느낌이었지.”

그랬더니 처음 그 순간으로 돌아갔다고, 크세노가 말했다.

율리아는 그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그가 하는 모든 말을 주의 깊게 되새겼다. 그가 과거를 회상할 때마다 자신의 과거를 대입해 비교하고, 그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다.

“황제 폐하.”

“그냥 크세노라고 불러.”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는 어디에 있죠?”

“몰라.”

크세노는 그 값비싼 보석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비싼 값에 팔아도 금방 내게 돌아와. 멀리 갖다 버려도 어느 날 주머니 속에 들어와 있어. 다른 사람한테 주고 그와 멀어지면, 어떤 방식으로든 내게 돌아와. 그건 아주 집요한 매개체야.”

“주인을 따라다니나 봐요.”

“땅에 묻어도 보고, 바다에 던져도 봤어. 아무한테나 주고, 가공해서 목걸이로도 만들어봤지. 그런데 소용없더라고. 상상해 봐. 자다가 일어났는데, 절벽 아래로 집어 던졌던 보석이 손바닥에 올려져 있다면 어떤 기분일지.”

“끔찍했겠죠.”

“그래서 데네브라한테 걸어 줬어.”

그 끔찍한 기분을 너도 느껴 보라는 뜻이었다며, 크세노가 웃었다.

율리아는 그가 익숙했다. 어쩐지 친근했다. 처음 왕비궁 데네브라의 침실에서 마주쳤을 때보다 더 가깝게 느껴졌다.

율리아는 크세노가 자신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 하나뿐인 벗이라는 건 너무 절대적인 존재라서 잃을까 봐 두렵고, 이 세상에 하나뿐인 대적자가 그보다 여덟 번이나 많은 죽음을 경험했다면 감히 이기지 못해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크세노 폐하, 저는요.”

율리아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언제나 같은 사람에게서 구원받았어요.”

“카루스를 말하는 건가.”

“처음 죽었을 때는 내가 죽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는데, 두 번째 죽었을 때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어요. 나는 그때 죽었고, 나를 죽음에서 이끌어 주는 존재가 있다는 걸.”

그래서 원망도 많이 했다.

“죽고 싶은데 자꾸 살리니까 화가 났어요. 게다가 그는 날 기억하지도 못했죠. 원망도 못 하고, 하소연도 못 하고, 그렇다고 미워할 수도 없었어요. 내가 아무리 비뚤어진 사람이라고 해도 생명의 은인까지 원수로 삼을 수는 없었으니까.”

이번에는 크세노가 율리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탐색하듯 율리아의 눈빛과 표정을 살피다가도 금세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아홉 번째가 시작됐을 때는 카루스 님을 만나자마자 내가 계속 다시 살고 있다는 걸 말했어요. 매번 당신이 나를 살리고 있다고. 그랬더니 그분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겠지.”

“맞아요. 좋은 소설이 될 뻔했다고 했죠.”

“그게 나였다면 좋았을 텐데.”

크세노가 중얼거렸다. 자연스레 흘러나온 진심이었다.

율리아는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다른 걸 물었다.

“황제 폐하가 대적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내가 제일 먼저 한 생각이 뭔지 아세요?”

“뭔데.”

“당신의 구원자는 누구일까.”

율리아가 크세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 구원자는 카루스 란케아였는데, 크세노 이베르트 바이칸의 구원자는 누구일까.”

“…….”

대답할 수 없었다. 크세노는 자신의 구원자가 누군지 몰랐다.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다. 죽어본 적이 없으니까.

율리아가 그 점을 지적하며 말했다.

“당신은 아무것도 몰랐던 첫 번째의 나와 같아요.”

“나는…….”

“어떻게 죽을지, 어디서 죽을지, 누구에게 죽을지, 누구에게 구원받을지. 아무것도 몰라요. 내겐 그 눈보라 치는 산속이 시작점이었는데, 당신의 시작점은 어디인지 그것조차 몰라요.”

“그럴 리가 없어. 너 때문에 내가 그동안 얼마나…….”

“내 죽음이었어요.”

황제의 것은 아니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올 때마다 무슨 생각을 했어요? 어떤 행동을 했어요? 다르게 살아 보고, 다르게 싸워도 보고, 다른 길을 걸었어요? 당신이 가진 모든 걸 버리고 새로 시작해 봤어요? 누군가의 전부가 되거나, 누군가를 당신의 전부라고 여긴 적이 있어요?”

도대체 그동안 무엇을 했나.

“당신은 그냥 두려움에 떨었을 뿐이에요.”

통제할 수 없는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며, 지독한 권태에 빠졌다.

크세노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어떤 말로 부정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말을 잃어버린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가 움찔거릴 때마다 쇠사슬이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바깥에선 여전히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가 들렸다.

“황제 폐하, 내 여섯 번째에 대해서 말해 줄게요.”

율리아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조금 떨리기까지 했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는 자신의 여섯 번째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때 난 너무 지쳐 있었어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복수하지 않으면 어때, 어차피 이 빌어먹을 세상은 전부 가짜인데. 그렇게 생각했어요.”

먹는 것과 입는 것, 숨 쉬는 것도 우습게 여겨졌다.

“날 학대했어요. 아무렇게나 살았어요. 아무 목표도 없이 그냥 망가졌어요. 누가 날 때려도 반항하지 않았고, 누가 날 착취해도 도망치지 않았어요.”

“어떻게 됐지?”

“정신을 차려 보니, 탑에 갇혀 있었어요.”

누가 저지른 짓인지도 몰랐다. 바실리인지, 크리스틴인지. 혹은 후작이나 후작 부인인지. 아니면 집사나 다른 사람일 수도 있었다.

“다른 사람을 죽이는 건 쉬웠는데.”

율리아가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조르는 시늉을 했다.

“나를 죽이는 건 어렵더라고요.”

크세노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번에는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조금 크게 났다. 어쩐지 파도 소리도 더 커진 것 같았다.

“여덟 번이나 죽었어요. 얼어 죽고, 목 졸려 죽고, 칼에 찔려 죽고, 사형당하고, 온갖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었어요.”

하지만 그 모든 걸 합친다 해도 여섯 번째처럼 힘들진 않았다.

“황제 폐하.”

율리아가 그에게 물었다.

“할 수 있겠어요?”

나는 다시 살아야 할 때마다 죽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했는데, 당신이 나라면 어떨 것 같냐고. 그렇게 묻는 그녀의 눈동자에 새파란 광기가 넘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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