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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화 (295/319)

258화

투구가, 갑옷이 무거웠다. 놈을 사로잡아 율리아에게 넘기려면 바람처럼 몸이 가벼워야 했다. 그래야 놈에게 닿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다시는 그 외로운 싸움을 혼자 하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 열 번째로 가더라도 너를 기억하겠다는 말은, 열 번째로 가지 않게 하겠다는 맹세였다.

마지막인 것처럼 살라고 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해서. 삶이 하나뿐인 평범한 사람처럼 살라고 했다. 저 가엾은 여자에게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토록 잔인한 말을 내뱉었다.

사랑을 원한다는 이유로 상처를 되새기게 했다.

율리아를 지킬 것이다. 황제를 사로잡아 저주의 제물로 쓰리라. 놈이 알고 있는 모든 비밀을 캐내고, 영원히 탑에 가두어 지킬 것이다. 원수의 문지기가 되어 살아도 괜찮았다. 율리아를 지킬 수만 있다면.

“크세노!”

카루스가 울부짖었다.

그의 절박함이 한계를 넘게 했다. 중력을 벗어난 듯 몸이 가벼웠다. 누구라도 물어뜯고, 무엇이라도 찍어누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거대한 칼이 깃털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팔을 움직이는 것처럼 자연스러워, 칼날에 닿는 적의 살점이 촉감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몸으로 벽을 만들어 그를 막고 있던 황제의 기사들이 경악하며 물러섰다. 그들은 혼자서 수십 명의 적을 무찌르며 무소처럼 전진하는 카루스를 보고, 경외심마저 느끼고 있었다.

“막아라! 카루스 란케아를 막아!”

온몸이 피에 절어 미끄러웠다. 시야가 붉었다. 이른 봄이라 서늘했었는데,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핏물에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카루스의 칼이 크세노의 코앞에 다다랐다.

여기서 너를 죽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카루스는 그 짧은 순간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람을 죽인만큼 벌을 받아야 한다거나 언젠가 지옥에 떨어져 백 배의 형을 살게 된다 해도, 지금 황제를 죽여 율리아의 슬픔을 끝낼 수만 있다면 그는 얼마든지 그 고통을 감내할 자신이 있었다.

“카루스 님이 저를 왜 걱정해요.”

“마조람 후작이 당신과 손을 잡았거든요. 무너뜨릴 수 있었는데…… 사형당했어요. 그때 맹세했어요. 다시 시작하게 되면 이번에는 내가 당신과 손을 잡아야겠다고요.”

“저한테 잘해 주지 마세요.”

죽으면 어차피 다음으로 가게 될 테니, 아무것도 필요 없다던 여자. 걱정하지도 말고, 신경 쓰지도 말라던 여자. 이 모든 기억은 결국 자신에게만 남을 거라며, 아무와도 마음을 나누고 싶지 않다던 여자. 그저 잊히고 싶지 않았던 여자.

그런 여자를 붙잡았다. 제 곁에 뿌리를 내리라고 붙잡고 매달렸다.

‘율리아, 너는 모를 거야.’

카루스가 팔을 뻗었다. 황제의 기사들이 그를 향해 다급히 달려들었다.

팔 하나로는 어림도 없었다. 크세노를 말에서 끌어 내리고 달아나지 못하게 하려면 목숨을 내줘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카루스는 멈추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수십 개의 검날을 보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율리아의 여덟 번째를 생각했다. 복수에 거의 성공했으나, 마지막 순간 자신 때문에 실패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던.

‘너는 모를 거야. 내 삶에 네가 어떤 존재인지.’

아무래도 이게 자신의 운명인 것 같다. 율리아를 살리기 위한 삶. 카루스는 그 순간 어떤 강렬함 끌림을 느꼈고, 그 힘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겼다.

카루스가 크세노를 따라잡았다. 그의 검이 황제의 망토를 찢고 말을 베었다.

놀란 크세노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상처 입은 말이 크게 날뛰었다.

부연 먼지가 일었다. 비명과 고함이 어지럽게 뒤섞여, 무엇이 아군의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크세노가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황제 폐하-!”

황제의 기사들이 카루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카루스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을 수 없었다.

카루스가 크세노를 제압한 채, 그의 턱밑에 칼을 대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 먼지가 걷혔다. 카루스가 피에 젖은 몰골을 하고 크세노를 노려보았다. 그의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너는, 나를 죽일 수 없어.”

크세노가 뚝뚝 끊어지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의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짓눌린 목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카루스가 말했다.

“죽일 수 있어.”

“……거짓말.”

카루스가 크세노의 귓가에 악귀처럼 속삭였다.

“방법을 찾을 거다.”

“내가 말할 것 같아?”

“모든 비밀을 알아낸 뒤에, 너는 반드시 내 손에 죽는다.”

“……뭣들 하는 거냐!”

크세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서 카루스 란케아를 죽여 없애라고, 빨리 떼어내지 않고 뭐 하는 거냐며 화를 냈다. 어차피 놈은 자신을 죽이지 못한다고 외쳤다.

하지만 황제의 기사들은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은 황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카루스가 마음만 먹으면 크세노의 목을 가볍게 내려칠 수 있다는 것만 알았다. 그건 그냥 찰나의 순간일 뿐이었다. 카루스가 마음만 먹으면, 황제는 머리와 몸이 분리된 채 먼지 자욱한 벌판 한가운데에 나뒹굴게 될 것이다.

“죽여! 죽이라니까! 죽이란 말이다!”

황제의 기사들은 카루스를 공격하는 대신 두 사람을 겹겹이 둘러쌌다. 카루스가 남부 연합이나 리바이어던과 합류하지 못하게 몸으로 막았다. 그러곤 이렇게 소리쳤다.

“멈춰라! 가까이 다가오지 마라! 카루스 란케아가 죽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모두 멈춰!”

“무혈 제독! 폐하를 놔주시오! 그분을 해쳤다간 당신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오!”

그들도 알고 있었다.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황제를 잃은 것도 모자라 패잔병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비참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 싸움에서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지도 모른다.

남부 연합의 승리가 확실해지고 있었다. 정복군은 대부분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고, 일부는 남부 연합과 해적들의 포로가 되어 울부짖었다.

“카루스 란케아, 어서 그 칼을 치우고 우리 말을…….”

황제의 기사들이 카루스를 설득하기 위해 애써 입을 열려던 때였다.

진격을 멈췄던 리바이어던의 기사들이 다시 무기를 들어 올렸다. 사령관인 카루스가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는데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공격 준비를 마쳤다.

고삐를 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말들이 거친 투레질을 내뱉었다.

“무슨 짓을……!”

멀리서 기사단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건 아주 느린 구름처럼 보였다. 부연 덩치를 느릿느릿 키우며 바람을 타고 다가오는 구름. 뭉게뭉게 피어난 먼지구름이 일직선으로 솟아올랐다. 진동이 느껴지는 건 조금 더 뒤의 일이었다.

리바이어던 기사단이었다.

란케아 영지에서 출발한 오백 명의 기사들이 카루스와 함께 싸우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다. 동북부 끝에서 남부 전선까지, 그 먼 길을 달려 드디어 도착했다.

“……! ……!”

맥스웰이 뭐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오백 기의 군마가 내뱉는 거친 발굽 소리에 묻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알렉사가 선두에서 달리고 있었다.

길게 꼬리를 물며 달려온 리바이어던 기사단은 정복군을 뒤에서부터 들이받았다. 긴 창이 적의 몸을 꿰뚫었다. 대포가 터지는 것처럼 살벌한 소리가 전장을 뒤흔들었다.

“알렉사!”

카루스가 벌떡 일어나 소리 질렀다.

그를 발견한 알렉사가 말을 탄 채 화살처럼 달려왔다. 그녀는 막아서는 적을 그대로 들이받고, 날뛰는 말 위에서 새처럼 몸을 날렸다.

알렉사의 머리에서 긴 천이 풀렸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을 타고 높이 떠오른 천은 온통 먼지와 땀에 절어 있었다.

말 위에서 몸을 날려 적의 칼을 쳐내고 카루스의 곁에 사뿐히 착지한 알렉사가 크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안 늦었어.”

“황제는 제가 맡을 테니, 부하들을 지휘하세요.”

카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상처투성이였으나, 굳건하게 다시 일어섰다.

부하들이 싸우고 있었다.

해군은 지상군이 되어 싸우고, 기사단은 주군이었던 황제를 무너뜨리려 검을 들었다. 반역자가 되어도 상관없었다. 그들에게는 카루스가 왕이었다.

“들어라!”

카루스가 말에 올라 소리쳤다.

“황제는 우리 손에 있다! 항복하지 않는 자는 이 자리에서 모두 죽을 것이다!”

알렉사가 크세노의 멱살을 잡고 그를 일으켰다. 그녀에게 무기를 모두 빼앗긴 황제는 창백한 얼굴로 카루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바이칸의 패배다! 이 땅에 이제 황제는 없다!”

바람이 불었다. 먼지 냄새와 피 냄새로 가득한 바람이었다. 끝까지 맞서려던 정복군 기사들이 허망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알렉사가 팔꿈치로 크세노를 가격하곤 그를 짓눌렀다.

고귀한 황제가 보잘것없는 포로가 되어 가장 낮은 곳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정복군이 허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륙을 통일해 역사상 최초의 통일 황제가 될 거라던 크세노 이베르트 바이칸. 그가 거친 땅바닥에 강제로 무릎 꿇려졌다. 황제를 따라 정복군의 명예도 함께 추락했다.

그동안에는 그의 승전 기록이 정복군의 역사이며, 그의 권력이 정복군의 힘이었는데.

그 대단한 명예가 티타니아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바이칸이 졌다. 황제가 졌다.

황제는 전리품이었다. 역사상 가장 대단한 전리품. 황제를 사로잡아 포로로 만든 자들이 이 전쟁의 영웅으로 기록될 것이다.

레위시아 오르테가를 중심으로 남부 연합을 조직하고 카루스 란케아의 이름으로 리바이어던을 움직였다. 데네브라 황비를 설득해 반 황제파를 결성, 르세라를 방어하고 서남부를 반역자들의 교두보로 삼았다.

북부 연합이 연이은 승전 끝에 운하까지 내려올 수 있었던 것도 반쯤은 그들의 작품이었다.

코델리아 힌치와 알렉사 콴, 그리고 율리아 아르테.

그들의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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