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7화 (294/319)

257화

크세노의 눈이 율리아에게 고정되었다.

넓은 전장, 뿌연 먼지와 말발굽 소리. 죽어 가는 자들의 비명과 아군을 부르는 병사들의 고함. 그 모든 게 낯설게 느껴졌다. 낡은 그림처럼 빛바래, 곧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를 지키는 황제의 기사들도, 그를 가로막은 카루스와 그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대적자.

크세노가 자세를 고쳐 정면으로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날뛰던 심장도 억지로 가라앉혔다.

“율리아 아르테.”

크세노의 목소리엔 이해할 수 웃음기가 깃들어 있었다. 그조차 이해할 수 없는 반가움이 불쑥 솟았다.

율리아 아르테. 저 여자를 손에 넣어야 하는데, 어떻게든 그녀의 운명을 빼앗아 전부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렇게 또 가까이에서 마주하니 숨이 막히도록 긴장되는 한편, 솜털이 바짝 일어설 만큼 짜릿한 쾌감이 느껴졌다.

율리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크세노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 역시 자신을 볼 때마다 똑같은 기분일 거라고. 죽여야 하는 상대를 보며 반가워하고, 먼 곳에 있는 상대를 찾으며 그리워하고.

“폐하.”

크세노의 기사가 은밀하게 움직이며 무기를 손에 쥐었다. 서로가 이렇게 가까이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적들의 시선이 황제 한 사람에게 꽂혀 있는 틈을 타 카루스를 죽이려는 계획이었다.

독을 바른 칼이 기사의 손에 들려 있었다. 심지어 그 한 사람인 것도 아니었다. 석궁을 든 자도, 표창을 꺼내는 자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카루스를 노릴 것이다. 비겁하지만 효과적인 수였다.

하지만 크세노는 그들에게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당신은 나를 죽일 수 없어.”

어느새 카루스를 제치고 앞으로 걸어 나온 율리아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뭘 감추고 있는 거지?”

웃음이 났다.

너는 어쩌면 그렇게 나와 같은지.

크세노가 한 손을 크게 휘둘러 기사들을 막았다. 카루스를 죽이려면 앞에 서 있는 율리아를 공격해야 한다. 그럴 수는 없었다. 이런 곳에서, 이런 식으로 그녀를 해쳐서는 안 됐다.

다급해진 기사들이 그를 보챘다.

“폐하!”

“안 돼. 율리아 아르테의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마라. 명령이다.”

“폐하, 왜 이러시는 겁니까! 폐하!”

“명령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제발…….”

기사 중 하나가 뒤에서 크세노의 팔을 잡아당겼다. 완력으로라도 황제를 데려가 이 위험한 상황에서 빠져나가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크세노는 그의 팔을 뿌리치고 칼을 휘둘렀다.

“이거 놔라!”

“황제 폐하…….”

팔을 깊게 베인 기사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붉은 피가 울컥 쏟아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황제를 보고 있었다.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황제가 이상하다. 크세노 이베르트 바이칸은 제정신이 아니다.

그를 가까이에서 모시던 자들은 언제부터인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오직 호르헤 한 사람만 곁에 남았다. 황제가 기행을 일삼는다던 소문도 갈수록 커졌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있어야 할 곳에서 달아났다. 의무를 저버렸다.

마땅히 지켜야 할 것들을 버렸다. 제국을, 전우를, 백성을 멀찌감치 밀어 두고 저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살았다.

“계속 말했잖아.”

크세노가 피곤하다는 듯 두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이건 다 허상이라고.”

황제의 기사들이 말없이 크세노에게 손을 뻗었다. 그들은 이제 크세노를 말로 설득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고 황제를 여기서 버릴 수는 없으니, 힘으로 제압해서 끌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들은 황제를 지켜야만 했다. 뼛속까지 새겨진 의무감 때문이었다.

“멈춰라! 허튼짓하지 마. 거기서 한 걸음이라도 움직이면 내가 직접 너희를 베겠다.”

“폐하!”

크세노가 기사들로부터 한 걸음 더 멀어졌다. 그만큼 율리아와의 거리는 가까워졌다.

율리아는 크세노의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말, 표정, 행동. 흥분을 가라앉히려 억지로 가슴을 내리누르는 모습과 칼을 휘둘러가며 기사들을 물리치는 모습까지.

주위 모든 게 낡은 그림처럼 보이는 기분은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율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크세노와 마주한 순간,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낯설고 볼품없는 허상인 듯 느껴졌다.

‘이제 알겠어.’

몸은 무거운데 마음이 붕 떴다.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이한 설렘이 출렁거렸다. 그건 어떤 쾌감을 닮아 있었다.

‘날 죽일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거야. 적어도 여기서, 이런 식으로는.’

그가 너무 이해돼서 위험했다.

크세노는 리바이어던 기사단 틈에 숨어 있던 율리아를 발견하자마자 분노와 살기를 누그러뜨리고 억지로 웃었다.

떨리는 손을 감추려 칼을 휘둘러 부하를 다치게 했다. 뭘 감추고 있는 거냐는 율리아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다시 시작한다는 건 한 사람의 완전한 죽음을 전제로 했다. 지금까지는 매번 율리아가 죽었다. 여덟 번이나, 온갖 시련 속에서 실패하며 죽었다.

율리아‘만’ 죽었다.

크세노는 한 번도 죽지 않았다. 율리아의 죽음에 이끌려 별안간 과거로 돌아가게 됐을 뿐, 그가 온전히 죽음을 맞이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죽음이라고 느껴 온 순간조차 늘 그녀의 것이었다.

크세노는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었다.

율리아는 그의 눈동자와 손끝, 억지웃음과 광기를 마주하며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가 허상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게 자신의 것일 수도 있다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도, 다시 시작하는 것도 모두 자신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두려워?”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그녀의 말은 크세노의 귓가에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소리가 아니라 입술이, 그 움직임이 강렬하게 눈에 박혔다.

“두려우냐고?”

크세노가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율리아가 조금 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크세노가 칼을 휘두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카루스가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그는 율리아를 말리려 했으나, 섣불리 나섰다가는 이 아슬아슬한 균형이 깨어질 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황제 폐하.”

율리아가 크세노에게 말했다.

“그거 아세요? 당신은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어.”

“…….”

“아직도 첫 번째였어. 그러니까 아홉 번째의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거야.”

그래서 그런 것이었다.

아홉 번의 시련을 기회인 줄 착각하고, 아홉 번의 절망을 희망이라 왜곡하고, 아홉 번의 삶을 허상이라 업신여기면서.

그녀를 두려워하고, 부러워하고, 끔찍하게 여겼다.

율리아가 웃었다. 투구를 벗었을 때처럼 깔끔한 미소는 아니었다. 반쯤은 일그러지고, 반쯤은 부서질 것 같은 미소였다.

“여기서 나를 죽여도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까 봐 무서운 거야. 내가 모르는 뭔가를 당신은 알고 있어. 그렇죠?”

* * *

크세노의 기사들이 먼저 움직였다.

그들은 황제가 저 미친 여자와 계속 대화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들은 무기를 휘둘렀고, 석궁을 쏘았으며, 표창을 던지기도 했다.

“안 돼! 멈춰라!”

크세노가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그의 시선은 율리아에게 못 박혀 있었다. 그녀가 죽을까 봐 무서워하면서도, 자신이 죽을까 봐 나서지도 못했다.

그때 카루스가 번개같이 움직였다. 그는 율리아의 팔을 잡아 뒤로 당기고 그녀의 앞으로 튀어나갔다. 덩치 큰 기사가 커다란 방패로 율리아를 보호하고, 카루스는 거대한 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카루스 님!”

“황제를 죽여선 안 돼!”

이해할 수 없는 공방이 벌어졌다. 어느 쪽도 상대를 몰아붙일 수 없었다. 한쪽의 실력이 우세하기라도 하면 어떻게든 결말이 날 텐데, 황제를 지키는 기사들의 수가 워낙 많아 카루스와 그의 부하들만으론 제압하기 어려웠다.

여기서 황제를 놓치면 안 된다. 카루스가 이를 악다물었다.

이만큼 오기까지 그들은 정말 많은 준비를 해야 했다. 이토록 절묘한 기회는 흔치 않았다. 다음엔 더 많은 희생을 치러야만 할지도 모른다.

그의 몸이 폭발적으로 움직였다. 방패도 없이 거대한 칼 하나만으로 황제를 향해 돌격한 그는 수십 명의 적에게 둘러싸인 뒤에도 움츠러들지 않고 사납게 날뛰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까이.

황제의 기사들을 쓰러뜨릴 때마다 카루스의 검이 애절한 소리를 내며 울었다. 검날에 이가 다 나가도록 격렬하게 휘두르고, 팔 하나를 내줄 각오로 몸을 던졌다.

뒤에서 율리아가 큰 소리로 그를 부르고 있었다. 사령관이 목숨을 걸었다는 걸 깨달은 리바이어던의 기사들이 그와 함께 싸우려 목숨을 걸고 달려들었다.

“카루스를 죽여라! 율리아는 건드리지 마! 차라리 카루스 란케아를 죽여!”

크세노가 기사들에게 이끌려 달아나면서 소리 질렀다. 손가락으론 카루스를 가리키고 있으면서, 그의 시선은 여전히 율리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황제를 사로잡아라!”

카루스가 외쳤다.

그의 몸에 상처가 늘었다. 시체가 쌓여 진입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황제의 기사들이 몸으로 벽을 만들었다. 무자비한 희생이었다.

“저리 꺼져라!”

포악하게 무기를 휘두르던 카루스가 조금씩 멀어지는 황제를 보더니 피에 젖은 투구를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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