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54. 서막부터 올려라
카루스가 연합군과 함께 정복군을 쳤다. 완만한 구릉지를 따라 비스듬하게 내려간 그들은 적에게 가까워질수록 속력을 높였다.
전날의 패배로 엉망이 된 정복군을 보며 지휘관들은 후퇴 명령을 내렸다. 지금은 카루스 란케아와 싸울 수 없었다. 차라리 바이칸 남부를 포기하고 인근 도시에서 군을 재정비하는 게 나았다.
그런데 황제가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 소리쳤다.
“돌격하라!”
“예?”
크세노의 얼굴은 지극히 평온했다. 그는 전날 그 많은 군사를 잃고도 전혀 비통해하지 않았다.
시신을 수습하진 못해도 간단하게 위령제 정도는 지내야 하는데, 황제는 계속해서 알 수 없는 소리만 지껄였다.
“폐하, 퇴각해야 합니다. 이틀만 올라가면 적당한 크기의 도시와 수성에 유리한 성이 있습니다.”
“그냥 공격해.”
“폐하!”
“너희가 왜 이러는지 아는데, 괜찮아. 나를 믿어라. 너흰 아무도 죽지 않을 테니.”
“퇴각해야 합니다! 제발 정신 차리십시오!”
지휘관들이 눈을 부릅뜨고 크세노를 노려보았다. 그들의 눈에 충성심은 사라지고 의심과 분노가 가득했다. 호르헤가 왜 황제를 배신하고 북부로 갔는지 절절히 이해가 되었다.
“호르헤 님이 죽었습니다. 르세라 방어군이 그분을 죽인 뒤에 시신을 매달았다고 들었습니다! 폐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남부를 포기하고 북부로 가서…….”
“그만해.”
크세노가 처음으로 지친 얼굴을 했다.
“다음을 위해선 어쩔 수 없어.”
너무 이상했다. 황제는 미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감정에 휘둘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차분했다. 부하들이 반발해도 화내지 않을 만큼 너그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번 전쟁에서 내내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내렸다. 북부를 버리고 남부를 선택한 것부터, 산맥을 진입할 때도 몇 번이나 명령을 번복하고, 질 게 뻔한 싸움에 병사들을 밀어 넣기까지 했다.
“나를 믿어라.”
크세노가 다시 말했다.
지휘관들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였다. 주먹을 꽉 쥔 채 부르르 떠는 자도 있었고, 몰래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 자도 있었다.
그사이 카루스와 연합군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크세노가 몇 가지 명령을 내렸다. 기마대를 둘로 나누어 적의 측면과 후방을 노리되, 유연하게 대응하라는 지시였다. 보병들은 산개하여 정면으로, 선공은 궁수 부대에 맡겼다.
평범한 지시였다. 지상에서 전면전을 할 때면 적의 실력을 가늠해 보기 위해 가볍게 부딪칠 때마다 써먹었던 전술이기도 했다.
돌격하라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움직였다. 이제는 절반도 남지 않은 정복군이 무거운 다리를 억지로 이끌었다.
그런데 그때, 한 지휘관이 뒤에서 소리쳤다.
“후퇴하라!”
절박한 목소리였다.
“후퇴해라! 죽고 싶지 않으면 후퇴해서 후일을 도모해! 다음 도시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라!”
“후…… 후퇴하자!”
“괜찮아! 바이칸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빨리, 빨리 달려!”
뒤에서부터 수백 명의 병사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은 황제를 배신한 지휘관이 자신의 부하들을 데리고 서둘러 달아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대열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전투와 행군에 지치고, 연이은 패배에 겁먹은 병사들이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탈하는 자는 모두 즉결 처형하겠다는 황제의 외침도 소용없었다.
“빌어먹을, 가자!”
“빨리 따라와! 여기서 죽고 싶어? 상대는 무혈 제독이라고!”
절반도 남지 않은 정복군 중 또 절반에 달하는 수가 전장을 빠져나갔다.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는 그들을, 크세노는 막을 수가 없었다.
저 앞에서 카루스가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갑옷과 검은 투구, 붉은 망토를 두른 카루스 란케아가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그가 한 손에 들고 있는 건 묵직한 대검이었다. 그가 달려온 길을 따라 부연 먼지가 일었다.
거대한 황소를 보는 듯했다. 전투 마차보다 더 크고, 더 거센 존재감으로 카루스가 달려왔다.
그에게 정면으로 덤벼드는 간 큰 놈은 없었다. 아군의 이탈로 혼란에 빠진 지휘관들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곤 병사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막아라, 막아야 한다! 무조건 막아!”
“활을 쏴라! 궁수들은 어디에 있는 거냐!”
카루스의 뒤엔 그에게 충성하는 기사단 수십 명이 함께 달리고 있었다. 아마도 크세노가 오르테가로 함께 쫓아 보낸 그의 측근들이리라.
남부 연합의 모든 병사와 르세라의 해군, 살아남은 해적들과 리바이어던 함대의 해군이 카루스의 명령에 따라 정복군을 포위하듯 몰려나왔다.
그들의 함성이 티타니아를 뒤흔들었다. 산맥에서부터 시작된 먼지가 구릉지로, 이내 크세노의 눈앞에서 하늘 높은 곳으로 솟아올랐다.
“……후퇴하라.”
크세노가 마침내 퇴각을 명령했다.
후퇴하라. 지휘관들이 목청이 터지도록 크게 외쳤다. 깃발을 바꿔 든 기수들이 방향을 틀어 달렸다. 빨리 알아챈 병사들은 빨리 달아났고, 뒤늦게 알아챈 병사들은 절망하며 울부짖었다.
크세노는 카루스와 싸우려고 했다. 그의 다음번을 위해선 이 싸움의 결말을 알아야만 했다.
그런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패배가 확실한 전장에 기세 좋게 나설 배짱이 없었다. 죽음이 두려운가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이유인 것만은 아니었다.
‘여기선 얻을 게 없어.’
그는 이 전쟁에서 졌다.
전멸을 각오하고 부딪쳐 봤자 얻을 게 없었다. 차라리 호르헤의 말대로 북부로 올라가 시간을 버는 편이 나았다.
크세노는 카루스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리란 걸 알았다. 그래서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말이 거친 투레질을 내뱉더니 미친 듯이 속력을 냈다.
따라와라, 카루스.
짓씹어 터진 입술에서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르고, 크세노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카루스는 연합군과 해적들에게 정복군을 추격하라고 명령한 뒤, 자신은 부하들과 함께 황제를 뒤쫓았다.
아슬아슬한 추격전이 길게 이어졌다. 크세노는 노련한 기사였고, 그만큼 말을 잘 다뤘다. 그가 타고 있는 말은 바이칸에서 가장 혈통이 좋은 군마였다. 그래서 추격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카루스는 크세노를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지독한 놈.”
크세노가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들은 먼지 가득한 벌판에서 서로를 마주하게 되었다. 황제의 기사들이 그를 지키려 칼을 들었으나, 크세노는 그들을 물리고 직접 앞으로 나섰다.
카루스가 그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크세노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의 모든 것이 뒤틀려 보였다. 화가 난 것 같은데 웃고 있고, 두려움에 젖은 것 같은데 망나니처럼 보였다.
“널 좀 더 빨리 죽였어야 했는데.”
크세노가 중얼거렸다.
“아깝다고 살려 놓을 게 아니라, 그냥 죽였어야 했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크세노는 카루스를 몇 번이나 죽이려고 했다. 다만 그의 능력이 뛰어나 죽이지 못했을 뿐이다.
카루스가 그 사실을 지적하려던 때였다.
“카루스.”
크세노가 칼을 뽑아 들었다.
“날 죽이고 싶어?”
카루스의 뒤에 있던 그의 기사들이 거의 동시에 무기를 뽑아 들었다. 황제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벌판에 낮게 깔린 살기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짐승처럼 이빨을 세우고 달려들 기세였다. 그 정도로 거친 살기였다.
특히 리바이어던의 분노가 심했다. 그들은 너무 오랫동안 황제의 핍박을 견뎌 왔다. 섬김을 강요당하고, 전쟁터에 끌려다니고, 가는 곳마다 덫에 걸렸다.
그들은 모두 크세노를 죽이고 싶어 했다.
“불쌍하긴.”
크세노가 한 걸음 더 앞으로 걸어 나왔다.
“너흰 날 죽일 수 없어.”
그가 뚜벅뚜벅 거침없이 다가왔다. 방패를 버리고, 투구도 버렸다. 가슴에 덧댄 갑옷도 힘주어 뜯어 버렸다.
“들었나? 카루스 란케아는 절대 날 죽일 수 없어. 절대로.”
그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마치 너희는 내 손끝조차 건드리지 못하리라고 도발하는 것 같았다.
분노한 기사들이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날을 세웠다.
하지만 카루스가 그들을 막았다.
“안 돼!”
말에서 내린 카루스가 다급하게 부하들을 막았다. 황제에게 달려들지 못하게 했다.
“그를 죽여선 안 된다.”
“카루스 님!”
“절대 안 된다. 건드리지 마라!”
그사이 크세노는 카루스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가 입술을 비틀어 웃음 지었다. 그의 손엔 날카로운 검이 들려 있었다. 그저 뻗기만 해도 카루스를 상처입힐 수 있는 거리였다.
“카루스, 너는 나를 죽일 수 없어. 죽이려는 시도도 할 수 없지. 하지만 난 달라. 난 이 자리에서 기꺼이 네놈의 목을 칠 수 있어.”
카루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황제의 도발이 계속되었다.
“목을 자를 수도, 심장을 찌를 수도 있지. 치명상을 입혀서 죽을 때까지 끌고 다닐 수도 있어. 너희 모두를 그렇게 만들어서 황성에 걸어두고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도 좋겠군.”
그래도 카루스는 크세노를 공격할 수 없었다. 그가 죽으면 율리아가 죽으니까. 빌어먹을 저주에 걸린 그들이 죽음을 공유하고 있으니까.
크세노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부하들에게 무기를 버리고 물러나라고 해.”
침묵이 흘렀다. 거친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침묵이었다. 카루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카루스의 등 뒤, 덩치 큰 기사가 꿈틀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모두가 긴장하여 아무도 나서지 않는데, 그가 말을 움직여 한쪽으로 자리를 비켜섰다.
그의 뒤에 몸집이 몹시 왜소한 기사가 하나 있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맑은 목소리, 율리아였다.
두툼한 장갑을 벗은 그녀가 맨손으로 투구를 벗어 늘어뜨렸다. 긴 머리카락이 쏟아져 바람에 흩날렸다.
말을 타고 달리느라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율리아가 말했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어디 한번 죽어 봐.”
그녀는 웃고 있었다.
“다음으로 가 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