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리바이어던과 르세라의 해군을 육지로 끌고 올라온 그가 부하들과 함께 달리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회색이 된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카루스는 투구조차 쓰지 않은 채 정복군을 향해 돌격했다. 난전에 지친 정복군은 후퇴를 외치고 있었다. 카루스와 그의 부하들은 달아나려는 정복군을 짓밟고 잔인하게 물어뜯었다.
정복군은 황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며 그를 막았다. 완만한 내리막을 따라 피의 길이 만들어졌다. 오직 황제 한 사람을 위한 희생이었다.
“크세노!”
카루스가 외쳤다.
“두 번 다시 티타니아를 밟지 마라!”
네게는 자격이 없으니.
황제가 그 말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날 크세노 이베르트 바이칸은 티타니아에서 자신의 끔찍한 과거와 마주해야만 했다. 첫 패배, 첫 굴욕, 첫 수치. 역사를 날조하면서까지 덮어야 했던 두려움의 실체가 이곳에 있었다.
그때에도, 이번에도 크세노는 패배자였다. 앞선 두 번의 승리는 승리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티타니아에 올랐던 정복군 공격 부대는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황제를 등에 업고 기세 좋게 진격했던 병사들의 얼굴엔 짙은 열패감과 공포가 깃들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북부를 방어하기 위해 탈주했던 호르헤가 르세라 방어군의 발 빠른 추격으로 북부 전선에 닿기도 전에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절반으로 나뉜 르세라 방어군이 쫓았던 정복군은 크세노가 아니라, 호르헤를 따르는 자들이었다.
* * *
해적들의 피해가 컸다.
살아남은 자보다 죽은 자가 더 많았다.
특히 티타니아를 넘어왔던 젊은 선장과 그를 따르는 천여 명의 해적은 골짜기에 갇힌 정복군의 후방을 기습해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으나, 극소수만 살아남고 대부분 사망했다.
해적들은 선장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시신을 불에 태웠다. 얼어붙은 산에 묻을 수는 없다는 노예장의 지시였다.
그렇게 산도발이라는 이름의 노예장이 살아남은 소수의 해적을 이끌게 되었다.
“해적왕이 되겠다더니.”
바실리는 선장이 남긴 조끼 주머니에서 진통제를, 그리고 그의 짐가방에서 얼마 안 남은 독한 술을 찾아냈다.
밤이 깊었어도 산속은 밝았다. 전사자들을 화장하기 위해 거대한 모닥불을 여기저기 피워 놓았기 때문이었다. 시체 태우는 냄새가 끔찍할 법도 하건만, 불 앞을 떠나는 자는 없었다.
바실리는 선장처럼 진통제를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다가 독한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자 금세 온몸이 뜨끈하게 달아오르면서 고통이 둔해지는 게 느껴졌다.
고통은 둔해지고 감각은 예민해졌다. 기분이 붕 뜨고 긴장이 사라지기까지 했다.
자박자박. 누군가의 발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소름 끼치게 익숙하고, 또 그만큼 낯설어진 목소리도.
“바실리.”
율리아였다.
바실리가 살아 있고, 해적이 되었고, 해적들과 함께 전쟁에 참여해 정복군과 싸우고 있더라는 이야기는 율리아에게도 큰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그를 알아본 건 남부 연합에 소속된 한 왕실 기사였다. 처음엔 외모가 너무 달라져 긴가민가했는데, 자꾸 보다 보니 그가 맞았다. 기사는 레위시아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알렸고, 화들짝 놀란 레위시아가 코코에게 알렸다.
코코는 바실리가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하거든 죽여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하룻밤이 다 지나도록 수상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내 이름은 이제 산도발이야.”
바실리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율리아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산도발?”
“네가 놈을 바다에 던져 죽이려 했다면서.”
“안 죽었던 모양이네.”
“내가 죽였어.”
바실리는 율리아에게 해적선에서 산도발을 만나 그와 목숨 걸고 싸웠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쪽 귀와 손가락을 내어 주고, 그의 목숨을 취할 수 있었다고.
“이름은 왜 빼앗았어?”
“바실리 마조람으로 살고 싶지 않아서.”
그거라면 성공했다. 그는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율리아는 그게 자신 때문인 것만은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율리아.”
바실리가 술을 한 모금 더 삼켰다. 불을 삼킨 것처럼 배가 뜨거웠다. 해적들의 진통제를 처음 먹어 보는 그는 약 기운에 지지 않으려고 일부러 눈에 힘을 줬다.
“걱정하지 마. 이제 내가 너와 얽힐 일은 없을 거야.”
“걱정하지 않아.”
그도 알고 있었다. 율리아는 그가 아는 예전의 율리아가 아니었다. 그 사실은 그동안 너무 뼈저리게 깨달아서 새삼 놀랍지도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바실리도 이제는 예전의 그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널 사랑하지 않았어.”
이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닌데, 그가 중얼거렸다.
“널 동정하고, 질투하고…… 갖고 싶었을 뿐이야.”
율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탐색하듯 바실리를 쳐다보기만 했다.
“사과하지 않을 거야. 넌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내게 복수했으니까. 사실이 그렇잖아? 넌 그저 첫사랑을 잃었을 뿐인데, 난 모든 걸 잃었으니까. 그래도 율리아, 걱정하지 마. 오늘 밤 이후로 우리가 다시 만나는 일은 없을 거야.”
이 전쟁이 끝나면 그는 멀리 떠날 생각이었다. 죽은 선장의 소원대로 바이칸 서부로 가서 자유로이 해적질이나 하며 살 것이다.
율리아가 물었다.
“후회해?”
많은 의미가 함축된 질문이었다.
후회하는 거라면 너무 많아서 탈이었다. 무엇을, 어느 순간을, 어떤 선택을 말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바실리는 그냥 고개를 저었다.
크리스틴이 그를 알아보고도 외면했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그는 동생을 향해 살려 달라고 빌었다. 제발 날 구해 달라고, 괴성을 지르며 몸으로 기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후계자가 되고자 바실리를 버렸다.
“안 해.”
후회하지 않는다. 마조람이었던 바실리는 그날 죽었다. 동생의 손에 찢겨 죽었다. 남은 건 더러운 살인자이며, 노예 상인에게서 이름까지 빼앗아 해적이 된 산도발뿐이었다.
거대한 모닥불에 나무와 시체가 더해졌다. 주머니에 남은 약초와 술을 가늠해 보던 바실리가 율리아에게 물었다.
“내일 무혈 제독이 황제를 잡으러 갈 거라면서.”
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실리에게서 시선을 거둔 그녀의 옆얼굴에 모닥불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바실리가 불쑥 말을 꺼냈다.
“나도 갈 거야.”
“뭐?”
“황제를 잡으러, 나도 자원할 거라고.”
“…….”
“선장의 복수는 해야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바실리는 자신이 왜 갑자기 그런 결심을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선장의 복수라니. 그를 따르긴 했어도 지킬 의리 같은 게 있지는 않았는데.
그렇다고 율리아 때문인 것 같지는 않았다. 이제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사랑하지 않는다. 이렇게 가까이에 서 있어도 그저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시릴 뿐, 예전 같은 설렘은 느껴지지 않았다.
갚아야 할 빚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바실리는 율리아에게 더는 미안하지 않았다. 그녀는 복수에 성공했다. 한 점의 아쉬움도 없이 아주 훌륭하게 완성했다.
어쩌면 이 결심은 두 사람 사이에 얽힌 지독한 악연을 끊어 내기 위한 가위질인 모양이라고, 그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율리아가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뒤돌아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이 익숙했다. 이제는 그녀의 얼굴이나 목소리가 낯설고, 뒷모습이 더 익숙해졌다.
율리아는 그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닿을 수 없었던 여자였다. 그건 두 사람이 연인이었던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별이 두 사람에게 그토록 다른 속도로 찾아온 것도 당연했다.
바실리 마조람은 자격도 없이 사랑을 욕심냈고, 버림받고도 그걸 실감하지 못해 죄를 키웠다.
“어이, 산도발!”
그래서 그는 산도발이 되기로 했다.
“왜 불러?”
“내일 출전할 거냐? 놈들이 멀리 달아나기 전에 빠르게 칠 거라는데, 몸값 벌려면 우리도 귀족 놈 하나 정도는 잡아야 하지 않겠어?”
“좋지.”
어지러웠다. 오랜 산행과 격렬한 전투, 술과 약에 취한 바실리가 히죽 웃으며 칼에 술을 부었다.
“바다면 어떻고, 산이면 어때. 해적 새끼들이 하는 짓이 다 거기서 거기지. 죽이고, 빼앗고, 인질로 삼자.”
해적들이 난잡하게 웃었다. 그들 중엔 죽은 동료의 주머니를 뒤지는 자들이 많았다. 값나가는 건 거의 없었다. 어쩌다 조끼 안주머니에서 유서로 보이는 종이나 편지가 나오면, 재수 옴 붙는다면서 재빨리 불에 던져 넣었다.
바실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율리아를 떠올렸다. 그러곤 그런 자신이 등신 같아서 더 크게 웃었다.
* * *
카루스가 율리아와 함께 남부 연합에 합류한 날, 레위시아는 해적들의 죽음을 마주하고 있었다.
거대한 모닥불에 시체가 쌓였다. 나무가 부족할 일이 없어 다행이라는 우스갯소리가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다행히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레위시아가 연기 때문에 따끔거리는 눈을 주먹으로 비비자, 율리아가 다가와 그에게 젖은 수건을 내밀었다.
“전하, 카루스 님이 작전 회의를 준비하고 있어요. 곧 그쪽으로 가셔야 할 거예요.”
“바실리는 만나 봤어?”
레위시아는 율리아가 바실리를 찾아가 대화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놈이 허튼수작이라도 부리면 바로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기 위해서였다.
바실리는 레위시아와 한 번 눈을 마주치기도 했다. 따로 인사를 건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레위시아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율리아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그는 바실리 마조람이 아니에요.”
산도발이었다.
그의 재미없는 사연에 대해 늘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레위시아도 굳이 되묻지 않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해적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부르는 놈마다 다른 가사를 중얼거렸지만, 대충 금을 가득 싣고 돌아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고백하자는 내용인 것 같았다.
죽은 선장이 많았다. 레위시아는 그에게 농담을 건네던 몇 명의 선장이 시체가 되어 모닥불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죽음이란 이토록 낯설고, 시시한 것이었다.
시체 타는 냄새가 진동하는데도 실감이 나지 않을 만큼 낯설고,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르면서도 산에 장작이 많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시시했다.
그래, 마치 물거품처럼.
“율리아.”
“네.”
사랑한다고 말하면 너는 어떤 얼굴을 할까.
이 낯설고 시시한 죽음 앞에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나는, 그 짧은 고백에 남은 삶을 전부 바칠 수도 있는데.
레위시아가 웃었다. 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찰랑거렸다.
“카루스한테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