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 * *
전쟁이 시작되기 전, 해적들은 티타니아 앞에서 제비를 뽑았다. 선장 중 한 놈을 골라 산맥을 걸어서 넘게 하자는 악의적인 장난질이었다.
그때 운 나쁘게 뽑힌 젊은 해적 선장은 자신을 따르는 천여 명의 해적을 데리고 정말로 산에 올랐다.
산맥을 통과하는 내내 선장을 향한 온갖 욕설과 원망이 나부꼈다.
해적이 산에서 얼어 죽으면 참 볼 만할 거라는 우스갯소리에, 죽을 때도 그냥 죽지는 않을 거라며 선장의 고환을 잡고 죽겠다는 놈도 있었다.
선장이 젊어서 그런가, 그들 무리는 해적치고도 상당히 자유분방한 분위기였다. 그러다 보니 서열에도 융통성이 있었다.
얼마 전에도 노예장을 쓰러뜨리고 놈의 자리를 차지한 녀석이 있었다. 젊은 선장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봐, 산도발!”
이름을 불린 해적이 선장을 향해 어슬렁거리며 걸어왔다.
덥수룩한 수염에 박박 민 머리, 흉터가 많은 몸엔 누더기처럼 여러 사람의 것을 덧댄 갑옷을 걸쳤다.
해적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놈인 것으로 아는데, 유난히 새카맣게 변한 얼굴에선 처음의 도련님 같은 모습을 떠올리기 어려웠다.
“얼마나 남았지?”
“모릅니다.”
“네놈이 지도를 제일 잘 읽는다며?”
“여기가 중간 갈림길이라는 것만 압니다.”
그들이 잠시 멈춰 쉬어 가던 곳은 티타니아 중턱에 있는 한 갈림길이었다. 갈림길 중앙엔 낡은 나무 표지판이 쓰러지기 직전의 형태로 덜렁거리고 있었는데, 젊은 선장이 그걸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제대로 박아 놓고 와.”
“제가 말입니까?”
“돌아갈 때 길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돌아갈 수나 있을까. 안 죽고 살아남는 놈이 있기는 할까.
돌아가더라도 이 산을 다시 넘는다는 선택지는 없을 것 같은데.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그는 묵묵히 걸어가 표지판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해적이 된 뒤에 그가 가장 먼저 배운 건 선장의 말을 거역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배 위에선 모자 쓴 놈이 왕이었다. 선장이 왕이었다. 그는 일개 백성이었으며, 왕의 변덕에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버러지였다.
그래서 노예였던 과거를 떨치고자 싸움을 배웠다. 몸으로 부딪치고 피를 흘리며 익혔다. 제일 약한 놈을 쓰러뜨린 뒤엔 그다음으로 약한 놈을, 뼈가 두어 번 부러진 뒤에는 노예 중에서 가장 강한 놈을 이길 수 있었다.
“이거 미친놈일세?”
“당신이 새로 온 노예장인가?”
“어…… 야, 하하! 하하하하! 너, 너 나 몰라? 이게 무슨 기막힌 우연이야. 미쳤어, 미쳤네!”
“미친 건 당신인 것 같은데.”
“내 이름은 산도발이야.”
새로 온 노예장의 이름은 산도발이었다.
바다 한가운데서 선장이 건진 놈이었는데, 제국 쪽 노예시장에 인맥이 넓고 재주가 많아 단번에 노예장의 자리를 꿰찼다.
“너 바실리잖아. 바실리 마조람.”
“…….”
“이야, 반가워 미칠 것 같네. 내가 너 때문에 어떤 미친 여자한테 걸려서 뒈질 뻔했거든.”
산도발은 눈썰미가 좋았다. 사람을 사고파는 일에 종사하던 놈이라 그런지, 바실리의 외모가 전과는 많이 다른데도 그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날부터 산도발의 학대가 시작되었다. 바실리는 처음 해적선의 노예가 되었을 때보다 더한 폭력에 시달렸다.
바실리는 놈을 죽이기로 했다.
어차피 싸워 이겨야 살아남는 세계였다. 그는 어느새 완전한 해적이 되어 있었다. 노예들과 몸을 부딪치며 갈고닦은 실력에 노를 저으며 굵어진 팔뚝, 이제는 다른 사람의 피를 봐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 자신을 믿었다.
바실리와 산도발의 싸움은 그 해적선의 커다란 유흥거리였다. 두 사람은 무기도 없는 맨손으로, 상대가 죽을 때까지 싸웠다.
바실리는 그 싸움으로 한쪽 귀와 두 개의 손가락을 잃었다. 갈비뼈도 부러졌으나 그건 이미 다 붙었으니 괜찮았다.
싸움에 져서 죽어 가는 산도발을 보며, 심판이었던 선장이 물었다. 그의 무엇을 취하겠느냐고.
바실리는 말했다.
“산도발, 그의 이름을 원합니다.”
마조람 후작가의 하나뿐인 후계자였던 남자는 놈의 이름을 빼앗고 진짜 해적이 되었다.
“산도발!”
선장이 소리쳤다.
표지판 수리를 마친 그가 먹먹한 한쪽 귀를 주먹으로 툭툭 치며 일어섰다. 어쩐지 눈에 익은 갈림길이었다. 처음 오는 길인데, 꼭 언젠가 왔었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새끼가…… 왜 불러도 대답이 없어? 이제 남은 한쪽 귀도 안 들리는 거냐?”
“왜 부르셨습니까.”
“할 말 있으니까 잘 들어.”
선장이 은근슬쩍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이번 전쟁에서 우리는 별동대 같은 거야. 그 예쁘장한 국왕이나 늙은 선장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나도 몰라. 사실 알 게 뭐야. 우리는 그냥 싸워서 이기고, 전리품만 취하면 그만이라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왕이면 신분이 높고 귀한 걸 몸에 걸친 놈만 노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여차하면 인질로 잡고 몸값 협상이나 하게.”
“그걸 왜 저한테…….”
“네놈 귀족이었다며? 잘 알아볼 거 아냐.”
알고 있었나. 바실리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야, 산도발.”
젊은 선장이 허리춤에서 독한 술을 꺼내 입에 머금었다. 그에게서 알싸한 술 냄새와 함께 달콤하면서 매캐한 향기가 났다.
“앞으로 해적들은 남부 해상에선 살아갈 수가 없게 될 거야. 무혈 제독이 남부에 닻을 내린 이상, 우리 같은 놈들은 무조건 바이칸 서부로 올라가야만 해.”
“그가 남부에 정착한다고 합니까?”
“여자가 남부에 있잖아.”
“…….”
“이름이 뭐였더라. 율리아 아르테! 맞아, 그랬지. 어쨌거나 이번 싸움이 끝나도 우린 오르테가로 돌아가지 않는다. 승전 보상 같은 건 줘도 안 받아. 분명 얼마 되지도 않는 거 몇 푼 쥐여 주고 말 거야. 더는 해적질도 못 하게 되겠지.”
“선장님.”
“바이칸 서부로 가자. 거기서 마지막 해적왕처럼 해적들의 왕국을 건설해 보는 거야. 사내라면 이 정도 야망은 있어야지?”
선장은 약에 취해 있었다. 진통제 역할을 하는 독초였는데, 술과 함께 씹어 삼키면 통증이 줄어들고 기분이 좋아지는 약이었다. 몸이 더워져 추운 산을 오르는 데도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얼마 뒤 그들은 티타니아를 넘는 데 성공했다. 예정보다 일찍 출발해 여유롭게 움직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얼어 죽은 놈은 하나도 없었다. 발가락에 동상 걸린 놈이 종종 있었으나, 약으로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정복군과 맞닥뜨렸다.
“황제가 저기에 있다!”
젊은 선장이 커다란 칼에 술을 부었다. 전투에 앞서 마지막 남은 술을 한입에 털어 넣은 그의 몸에서 아지랑이 같은 열기가 치솟았다.
골짜기에 갇혀 사방에서 공격을 받던 정복군은 점점 더 깊은 산속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젊은 선장과 함께 산맥을 넘은 천여 명의 해적들은 그들 바로 뒤에서 나타났다.
“황제를 죽여라! 다 죽여 버려!”
약에 취한 해적들이 정복군을 향해 우르르 달려 내려갔다. 그들 중엔 산도발의 이름을 빼앗은 바실리도 섞여 있었다.
“산도발, 이쪽이다. 이쪽이야!”
“으아아아아! 죽어라!”
그는 이 싸움에서 해적들이 이길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귀족 교육을 받은 만큼, 훈련받은 정규군이 얼마나 무서운 집단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여기서 죽겠구나. 마조람의 후계자가 아니라 한낱 해적이 되어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부터 죽음은 그의 등에 지워져 무게를 가진 짐이 되었다. 삶은 뱃전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와 같았다.
칼과 칼이 마주쳤다. 정복군은 강했다. 한 사람 쓰러뜨리는 것도 힘에 부쳤다. 그래도 해적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산도발!”
젊은 선장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그가 정복군의 칼을 빼앗아 휘두르며 앞장섰다.
등 뒤에서 기습을 당한 정복군은 큰 혼란에 빠졌다. 전장이 너무 시끄러워 누구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러자 정복군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정복군이 여기서 다 죽더라도 지켜야 할 한 사람. 바로 황제를 위한 대열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전신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전장에서 빠지더니 한곳으로 모였다. 그들은 누군가를 등지고 있었다. 황제였다. 바실리는 금세 알 수 있었다.
“황제가 저기에 있다!”
그가 소리 높여 외쳤다.
그러나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지러웠다. 시야가 피로 물들어 잘 보이지 않았다. 한쪽 귀가 망가진 뒤부턴 누가 뒤에서 말을 걸어도 잘 모를 때가 많았는데, 이번엔 아예 모든 소리가 뭉그러져 저 멀리서 들렸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바실리의 눈에 쓰러지는 선장의 모습이 보였다. 선장의 가슴에 긴 창이 꽂혀 있었다. 입에선 피거품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바다에서 도적질이나 할 일이지, 왜 여기까지 와서 정복군과 싸우겠다고 이 지랄인지. 바실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선장에게 달려가 쓰러지는 그를 붙잡았다.
“봤냐? 우리가 이겼어.”
선장은 웃고 있었다. 그의 눈에 초점이 없었다. 바실리는 그가 너무 많은 술과 약을 삼켰다고 생각했다.
그때 멀리서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이겼다!”
“정복군이 달아난다. 황제가 도망친다!”
“이럴 줄 알았어! 그가 왔다! 우리가 이겼다고!”
승리를 알리는 뿔 나팔 소리가 산속에 울려 퍼졌다. 난전 속에서도 가까스로 질서를 유지하던 남부 연합의 병사들이 크게 환호하며 누군가를 맞이하고 있었다.
무혈 제독, 카루스 란케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