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3화 (290/319)

253화

우르릉우르릉. 천둥이 울었다. 하늘은 맑은데 도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의아해진 정복군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태양 빛이 강렬했다. 눈이 부셔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어…….”

누군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주먹으로 거세게 눈을 비비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나무……?”

위에서부터 나무가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굵고 거대한 나무들이 며칠 전 정복군이 나무를 베어 가며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한꺼번에 쏟아졌다.

우르릉우르릉. 산에서 천둥이 울었다. 거목이 통째로 굴러떨어지는 모습은 여느 공성 병기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피, 피해!”

“달아나! 후퇴해! 비켜, 이 새끼들아!”

“엎드려!”

달아날 곳은 없었다. 뒤에도, 그 뒤에도 아군이 있었다. 도망치면 목이 잘리고, 맞서면 개죽음이었다.

정복군 병사들의 비명이 티타니아를 가득 채웠다.

코코는 산등성이 한쪽에 세워진 임시 초소에서 전장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가엾은 병사들이 아니라, 저 멀리 본대 한가운데 있을 크세노 황제에게 못 박혀 있었다.

‘사로잡아야 해.’

코코는 이 싸움을 시작하기 전부터 계속해서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해 있었다.

‘죽이면 안 돼. 사로잡아야 해.’

죽이면 안 된다. 실수로라도 죽여선 안 된다. 만약 황제가 죽을 위기에 처한다면 연합을 배신하는 한이 있어도 그를 보호해야 한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으나, 코코는 이미 결심을 마친 상태였다.

“빌어먹을 카루스 란케아는 왜 여태 안 오는 거야!”

분명 배를 타고 온다고 했다. 르세라에서의 작전이 성공한 뒤에는 리바이어던 함대를 끌고 해안으로 와서 보급로를 통해 합류하겠다고.

황제가 좀 더 시간을 끌어 주면 좋으련만. 코코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정복군이 산을 마주하고 머뭇거리는 동안 산등성이를 차지한 남부 연합은 반대편에서 큰 나무를 베어 조심스레 운반했다. 그러곤 세 번째 전투가 시작된 후에야 그걸 아래로 굴려 보냈다.

허점이 많은 작전이었다. 완만하고 넓은 입구엔 이미 적들이 진을 치고 있고, 남부 연합이 차지한 길목은 너무 좁아 나무가 떨어져도 중간에 저들끼리 막혀 괜히 진입로만 위험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코코는 율리아의 말을 믿었다.

“코코, 황제는 시간을 끌려고 할 거예요. 함정이 있을까 봐 조심할 거고요. 그에게 두려운 건 사람이 아니라, 티타니아니까.”

그래서 강행했다. 정복군이 저들을 위해 좁은 산길을 넓히기를 기다렸다.

정복군 병사들이 창 대신 도끼를 들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을 때, 레위시아는 미리 준비해 둔 나무들을 산등성이 위로 끌어 올리라고 지시했다.

성공이었다. 아래 전장에 비명이 가득했다. 초소 위에서 적군의 동태를 살피던 코코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빨리 끝내야겠어.”

적의 죽음조차 가슴에 쌓여 독이 되기 전에, 이 지독한 비극을 끝내야만 한다.

* * *

우울한 전장에 봄기운이 내려앉았다.

해가 떠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추위가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뼛속까지 시리던 새벽 한기가 저만치 물러나자, 병사들이 바삐 움직이며 식사를 마쳤다.

전날 제법 많은 수의 정복군 병사들이 거목에 깔려 목숨을 잃거나 전투 불능이 되었다.

황제를 찾아 은 지휘관들이 레위시아 국왕과 타협해 죽은 병사들의 시신을 수습하자 제안했으나, 크세노는 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괜찮아.”

“하오나, 폐하!”

“걱정하지 말라니까. 자네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이 전쟁에서 죽는 사람은 없어. 어차피 다 돌아가게 될 거야.”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전쟁 상황이 아니라 황제 크세노였다. 그나마 호르헤가 있을 때는 그에게 부탁해 황제를 설득할 수 있었는데, 이제 그런 역할을 해 줄 사람은 없었다.

크세노가 물었다.

“적의 동태는?”

“지난밤 여기저기에서 불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숫자는 불규칙하고, 금세 꺼지는 곳이 많았습니다.”

“한계에 다다랐다는 소리지.”

불을 피우면 적에게 위치를 들키게 된다. 숨어 있는 쪽은 저들이기 때문이다. 레위시아도 그걸 모르지 않을 테니, 병사들에게 멋대로 불을 피우지 말라고 명령했을 것이다. 추위를 견디지 못한 자들이 결국 그 명령을 어겼을 테고.

크세노가 웃으며 말했다.

“밤새 얼어 죽은 병사라도 있었나? 산 밑은 이미 봄인데, 티타니아는 그렇지 않겠지.”

때가 됐다. 크세노가 정복군 산맥 진입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들어가야겠다.”

준비는 끝났다. 이만하면 놈들을 충분히 파악했다고 생각한다.

“또 나무를 굴리면 어떻게 합니까?”

“산개한다.”

감상하듯 티타니아를 바라보던 크세노가 산등성이를 따라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산개해서 진입하되, 산등성이를 차지한 후에는 한데 모여라. 달아나는 놈들까지 애써 쫓을 필요 없다. 너희는 무조건 적의 중앙, 레위시아 오르테가를 노려라.”

“알겠습니다!”

남부 연합은 여러 국가와 세력이 합쳐져 있기에 결속력이 약하다. 그러니 정복군 주력 부대가 레위시아를 노려 친다면 단번에 진영 전체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었다.

“이번엔 내가 직접 출전하겠다.”

크세노가 칼을 허리에 찼다. 그의 시종이 다가와 투구를 내밀자, 지휘관들의 얼굴에도 비장한 기운이 감돌았다.

황제가 직접 나서 준다면 전날의 패배로 가라앉은 사기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정복군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십 갈래로 갈라져 산맥에 진입한 그들은 길도 없는 골짜기를 뱀처럼 파고들었다.

남부 연합 병사들이 밤새 피운 모닥불의 흔적이 지척에 깔려 있었다. 그들은 추위를 달래기 위해 냄새나는 짐승의 털가죽을 뒤집어쓰거나, 마른 나뭇잎을 모아 놓기도 했다.

정복군은 승리를 확신했다.

이번엔 나무를 굴려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한 자리에 가만히 서서 나무나 굴리고 있다간 오히려 표적이 되기 쉬웠다.

“흩어져라!”

그때 레위시아의 명령이 남부 연합 여기저기에 퍼졌다. 병사들은 미리 언질받은 대로 각자 정해진 방향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뛰어!”

“빨리 뛰어! 저쪽으로!”

가까이에서 본 그들은 혼란에 빠져 아무렇게나 달아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멀리서 보면, 남부 연합은 크게 두 갈래로 갈라져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는 산맥 서쪽 보급로를 향해.

다른 하나는 더 깊은 산 속으로.

지척에서 칼을 휘두르던 정복군은 그 사실을 눈치챌 수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정복군은 골짜기를 따라 산맥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고, 이제는 쉬이 방향을 돌리기도 어렵게 되었다.

산속은 추웠다. 봄이 왔다는 걸 믿을 수가 없을 만큼 추웠다. 해가 들지 않는 곳에선 여전히 흰 입김이 흘러나왔다. 정복군의 마음이 급해졌다. 그들은 해가 떨어지기 전에 이 싸움을 끝내야만 했다.

어디선가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짐승의 누린내 같기도 하고, 갓 잡은 생선에서 흘러나온 비린내인 것 같기도 했다. 비명과 고함으로 요란하던 티타니아에 낯선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제는- 어디에- 있냐-!”

누군가 우렁찬 고함으로 황제를 찾았다. 사내의 고함이 메아리가 되어 골짜기를 맴돌았다. 거칠고 날카로우며, 광기 어린 목소리였다.

“해적들이 왔다!”

달아나던 남부 연합 병사들이 반갑게 외쳤다.

“해적들이다! 남부의 사내들이 왔다!”

통일성이라곤 전혀 찾을 수 없이 아무렇게나 갖춰 입은 갑옷에 덥수룩한 수염, 사람을 여럿 죽여 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살육의 본능, 죽음을 베개 삼아 안고 잔다던 해적 특유의 광기.

“이 개새끼들아! 황제를 내놔라!”

해적들이 정복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붓고 미친 사람처럼 웃기도 했다. 온몸에서 독한 술 냄새를 풍기는 자도 있었다. 때로는 걸리적거린다며 아군의 머리채를 잡아당기고 그를 앞질러 달리기도 했다.

산개한 채 올라온 정복군은 하나로 뭉쳐 있고, 하나로 뭉쳐 있던 남부 연합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그런 와중에 산속에서 튀어나온 해적들이 정복군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지형에선 난전에 강한 자가 유리했다. 갑옷은 무거워 거추장스럽고, 상관이 보는 앞에서는 멋대로 달아날 수도 없었다.

“지금이다! 쳐라!”

때마침 보급 경로로 달아난 줄 알았던 레위시아와 연합군 병사들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뒤늦게 도착한 해적들도 질세라 전력으로 달렸다.

“어이, 국왕! 비켜! 비키라고!”

“황제 대가리에 선장의 배가 걸려 있다고? 빌어먹을, 다 비켜! 그건 내 거야!”

“정복군 하나당 금화가 한 주먹이라고 했겠다! 이번에야말로 자식 새끼한테 아비 노릇을 할 수 있겠구나!”

“속옷까지 다 벗겨 팔아먹자! 비켜, 귀족 놈들은 내 거야!”

그 언젠가 젊은 크세노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사내들이 죽을 자리를 찾아 달리고 있었다.

살아 돌아오겠다는 맹세는 없었다. 해적은 바다에서 죽어야 한다고 외치던 사내들이, 이번에는 자유와 고향을 지키고자 티타니아에 생명의 닻을 내렸다.

목이 터지도록 고함을 지르던 레위시아가 다 쉬어 바람 새는 소리로 말했다.

“죽지 마.”

오르테가 왕국 법에, 해적은 무조건 사형이었다.

해적을 죽인 자에겐 살인죄를 묻지 않고, 해적의 것을 훔치는 자에겐 절도죄를 묻지 않았다. 단 한 번이라도 해적질에 가담한 자는 사형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레위시아가 그들을 보며 기도하고 있었다.

“죽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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