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 * *
“조심해.”
“괜찮아요.”
리바이어던 함대의 병사들은 카루스가 율리아의 손을 잡고 배 위에 오르는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맡은 자리를 뜨거나 경박하게 소리를 내는 자는 없었다. 그러나 꾹 다문 입과는 달리 눈만은 번쩍번쩍한 안광을 빛내며 율리아와 카루스를 지켜보았다.
“얼굴이 뚫릴 것 같아요.”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기분 나쁘다는 소리는 아니었어요. 호감이라는 걸 아니까요.”
“그걸 어떻게 알아?”
카루스가 신기하다며 물었다.
그가 보기에도 리바이어던 함대의 병사들은 지나치게 험상궂고 무뚝뚝했다.
피부는 바닷바람과 태양 빛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검고 단단해지고, 바다 위에서 의사소통하다 보니 목소리는 걸걸하다 못해 거칠었다.
그런데 율리아는 도리어 그런 그가 재밌다는 듯 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저는 오르테가 여자예요. 아버지는 해적이었죠. 제 평생 대부분을 바닷가에서 살았다고요.”
카루스가 내민 손을 가볍게 뿌리친 율리아가 한 손으로 밧줄을 잡고 당당하게 섰다. 간편한 복장 위에 코트를 걸친 그녀는 젊은 선원을 떠올리게 했다.
율리아를 바라보는 병사들의 눈이 더욱 흉흉해졌다. 그게 웃음이라는 걸 아는 카루스가 맙소사, 하고 중얼거리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귀찮게 굴어도 이해해 줘.”
“귀찮지 않아요.”
해적의 딸이 배를 무서워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율리아는 흔들리는 배 위에서도 잘만 걸어 다녔다. 병사들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카루스가 그런 그들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너무 귀찮게 하지 마.”
출발을 알리는 뿔 나팔 소리가 들렸다. 카루스의 기함은 함대의 중앙에서 거대한 군함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아갔다.
르세라 부두엔 항구를 떠나는 리바이어던 함대를 배웅하기 위해 수많은 시민이 나와 서 있었다. 손을 흔드는 자도 있었고, 바다에 뭔가를 뿌리며 기도하는 자도 있었다.
그들이 하는 소리가 다 들리는 건 아니었지만, 아마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것이리라.
“나머지는 잘 따라오고 있나?”
“네.”
르세라의 해군 함대가 리바이어던을 뒤따랐다. 프랑크 후작은 한 척의 배도 남기지 않고 전원 출항 명령을 내렸다.
반 황제파는 둘로 갈라져 움직이기로 했다. 절반은 리바이어던과 함께 남부 연합 보급로를 따라 티타니아로 가기로 했고, 나머지는 정복군을 뒤쫓았다.
율리아의 머리카락이 펄럭이듯 휘날렸다.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던 카루스가 웃으며 말했다.
“순풍이군.”
* * *
훗날 한 역사가는 자신의 일기에 이런 문장을 썼다.
[인재를 곁에 두고 육성하지 아니하는 군주는 그 인재 중 셋이 운명적으로 만나 손을 잡았을 때, 그에 대항할 방도를 마땅히 셋 이상으로 찾아야만 한다.]
[신은 한 인간에게 재능과 덕행과 식견, 그리고 권위를 모두 내리지 않으므로 인간은 모여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크세노 이베르트 바이칸은 섬 속의 섬이었다.]
티타니아 전투는 정복군의 선공으로 시작되었다.
남부 연합은 완벽에 가까운 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꽤 큰 상처를 입었다. 대륙 안에선 감히 막아 낼 국가가 없다던 정복군의 명성은 과장된 게 아니었다.
크세노 황제는 그 기세를 몰아 남부 연합을 섬멸하고 본때를 보여 주려 했다.
하지만 절묘한 순간 레위시아 국왕이 후퇴 명령을 내렸고, 남부 연합은 티타니아를 방패 삼아 산맥 안으로 모습을 숨겼다.
“당장 산맥 안으로 진격해야 합니다! 놈들은 겁을 먹고 꼬리를 만 채 달아나고 있습니다! 지금이 적기입니다!”
정복군은 드높은 산맥도 자신들을 막을 수는 없으리라고 외쳤다.
하지만 크세노 황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멈춰라. 군을 정비하고 다음 전투에 대비해.”
“폐하!”
“아무 준비 없이 산맥 안으로 진입해선 안 된다.”
크세노 황제는 요지부동이었다. 뭔가 굉장히 끈끈한 것이 그의 발목을 잡고 산맥 경계선을 넘지 못하게 막았다.
그건 지난 패배로 인한 두려움일 수도 있고, 혹은 전성기 때처럼 날카로워진 육감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함정일 수도 있다.”
“폐하!”
“정찰병을 최대한 넓게, 많이 풀어라. 산맥으로 향하는 모든 길목에 초소를 설치해. 특히 해안가 보급로와 동북부 방향을 경계해야 한다.”
적의 보급로는 끊기 어려웠다. 반도 국가인 오르테가는 티타니아를 머리 위에 품은 모양새라, 지상군이 그 긴 해안을 다 막을 수는 없었다. 지형이 험해 공성 병기를 쓰기에도 적합지 않았다.
그때 고민에 빠진 크세노의 귀에 한 지휘관이 옆 사람과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부는 사실 별것도 아니잖아. 우리도 전부 북부로 올라갔어야 하는 거 아냐?”
“아무래도.”
“운하 밑으로는 대도시가 없어. 호르헤 님이 정복군 절반을 끌고 올라가지 않았다면, 북부 연합이 수도에 닿는 데까지 한 달도 걸리지 않았을…….”
크세노가 그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정복군의 지휘관들이 황제의 명령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지?”
“폐하, 그것이 아니라…….”
수군거리던 지휘관 둘이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크세노는 그들의 변명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날 밤, 목이 잘린 두 구의 시체가 정복군 후방에 내걸렸다. 군을 이탈하려는 자들에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두 번째 전투도 정복군의 선공으로 시작되었다.
“돌격하라!”
며칠이 지나도록 남부 연합이 산맥 안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자, 답답해진 크세노가 결국 진격 명령을 내렸다.
그는 정복군을 여러 단위로 쪼개 섬세하게 움직였다. 기마대는 완만한 길목을, 보병들은 갑옷을 덜어 내고 무거운 방패 대신 도끼를 들었다. 그러곤 나무를 베어 좁은 산길을 넓히며 나아갔다.
예전처럼 무력하게 패하지 않겠다. 그때는 전쟁에 대해서도, 산맥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 이제는 달랐다. 크세노는 기습조 병사들이 산속에서 추위에 떨지 않도록 신경 썼으며, 지형 파악이 되지 않은 곳으로는 진격하지 못하게 했다.
두 번째 전투 역시 정복군의 애매한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남부 연합은 도망치는 듯하다가 뒤돌아 역습하고, 또 도망치는 듯하다가 뒤돌아 역습하는 작전을 썼다. 달아날 때는 쥐새끼처럼 빠르게 흩어져 달아나면서, 역습할 때는 광인처럼 괴성을 지르며 나타났다.
크세노는 레위시아를 멍청한 애송이라고 욕했다. 병사들의 체력을 그런 식으로 낭비했다가는 산속에서 발을 헛디뎌 죽게 될 것이라면서.
“산에 불을 지르는 방법은 어떻습니까.”
“티타니아는 눈이 많은 산이오. 특히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이 시기에 많은 눈이 내리지.”
지휘관들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크세노가 과거의 패배를 곱씹어 보았다.
당시 남부의 사내들은 그에게서 두 번이나 승리를 쟁취하고도 티타니아의 척박한 환경을 견디지 못해 자멸하고 말았다.
그걸 이용하면 어떨까.
“시간을 끌자.”
“폐하? 시간을 끌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부하들이 기겁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사방에서 제국을 공격하고 있는 지금, 한시라도 빨리 전투를 마무리 짓고 움직여야 하거늘.
크세노가 의자에 몸을 깊이 묻으며 말했다.
“티타니아는 그런 곳이야. 여유를 가진 자가 승리한다. 놈들은 지쳐 추위에 떨다가 와해될 것이다.”
지휘관들이 입을 다물었다. 누구 하나 나서서 크세노에게 반발하는 자가 없었다. 두 명의 동료가 목이 잘린 채 후방에 내걸려 있다는 걸 아는 그들은 황제의 명령에 그저 묵묵히 머리를 조아렸다.
하지만 각자 자신의 막사로 돌아간 뒤에는 이런 생각에 휩싸였다.
‘황제는 전쟁을 끝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소문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정복군은 황제가 휘두르는 칼이었다. 너무 거대해서 휘두를 때마다 수백, 수천 명의 삶이 스러지는 칼.
‘어쩌면 우리는 위대한 정복 황제가 아니라 살육에 도취된 폭군을 만든 게 아닐까.’
며칠 뒤 세 번째 전투가 시작되었다.
산맥 안에서 고양이처럼 요리조리 피해 다니기만 하던 남부 연합이 뒤늦게 제대로 된 대열을 갖추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완만한 산등성이를 꽉 채우고 나타나 정복군이 점령하고 있는 평지를 내려다보았다.
크세노가 그것 보라며 그들을 비웃었다.
“잘 들어라. 놈들의 힘은 후방에 있다. 난전에 강한 해적들이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기회를 노려 등장할 것이다. 함정에 주의해라. 산속으로 끌려 들어가지 말고, 놈들을 끌고 내려와 싸워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너희가 지나간 자리에 숨 쉬는 적이 없게 하라!”
크세노가 칼을 휘두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지휘관들이 그를 따라 괴성을 지르며 칼을 들어 올렸다. 각 부대의 깃발이 춤추듯 흔들리고, 병사들은 신호를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전면전이라면 질 리가 없다. 우리는 정복군이다.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가장 높은 곳의 황제부터 가장 낮은 곳의 보병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렇게 믿었다.
날씨는 추운데 정수리는 따뜻했다. 기묘한 느낌이었다. 냉혹하지만 사랑스럽고, 변덕이 죽 끓듯 한다던 요정 티타니아가 머리 위 전장을 날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남부 연합에서 기이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산등성이를 꽉 채우고 있던 병사들이 주섬주섬 뭔가를 나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들고 있는 것은 칼과 방패가 아니라, 밧줄과 도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