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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화 (288/319)

251화

53. 물거품처럼 사라지지 않게

멀리 우뚝 선 티타니아가 보였다.

바이칸 남부 한적한 해안을 통해 제국 땅을 밟은 레위시아는 시에라와 녹스의 왕족들과 함께 거한 저녁 만찬을 즐겼다.

오르테가의 젊고 아름다운 왕을 실물로 처음 본 그들은 첫눈에 호감을 표시하며 그의 잔에 쉼 없이 술을 채웠다.

레위시아는 그들이 권하는 술을 마다하지 않고 넙죽넙죽 받아 마셨다. 청초한 생김새와는 달리 고래처럼 술을 마시는 그를 보며 혀를 내두르는 사람이 많았다.

이게 다 어릴 때부터 자신을 강하게 키운 시녀장 덕분이라며, 레위시아가 해맑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도도한 얼굴의 코코가 그의 옆자리에 앉아 소매치기처럼 술잔을 바꿔치기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이 들어 있는 자신의 잔과 레위시아의 잔을 바꿔치기한 코코가 그걸 마시는 척하며 자연스레 내려놓았다. 그러곤 다른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사이, 몰래 다른 잔에다 부었다. 때로는 바닥에, 때로는 다 먹은 그릇에 흘려 넣었다.

오직 레위시아만이 그녀의 교묘한 솜씨에 감탄하며 즐거워했다.

“코코, 그런 건 어디서 배웠어?”

“아버지한테요.”

“술도 잘 마시잖아. 술은 누구한테 배웠는데?”

“아버지한테요.”

“뭐야. 내가 배운 건 전부 힌치 백작이 원조였던 건가. 이따가 백작을 만나게 되면 아빠라고 불러도 될까?”

코코가 그를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적당히 취한 척하며 하하 웃던 레위시아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술은 그만 마시는 게 좋겠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전쟁을 해야 할지 모르니까요. 황제의 위치를 파악하는 대로 다시 모이기로 하죠.”

“알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일부이긴 해도 왕국의 땅을 되찾은 시에라와 녹스의 왕족들은 레위시아에게 무척 호의적이었다. 사실 구심점인 그가 없으면 남부 연합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 것이기에 다른 선택지가 없기도 했다.

그들에게 황제의 위치를 파악해 달란 말을 남기고 레위시아가 자리를 떴다.

해가 지고 있었다.

코코와 함께 임시 주둔지를 거닐던 그는 멀리 바다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황제는 우리가 배를 타고 오리란 걸 예상하지 못했을까?”

“예상했겠죠.”

“율리아한테 정신이 팔려서 막지 못한 걸까, 아니면 남부 따위는 무시해도 되는 상대라서 막지 않은 걸까.”

“바다에 고립되어 있어서 대처를 못 한 거예요.”

코코가 걸음을 멈추고 길게 이어지는 티타니아 산맥을 바라보았다. 높은 산 능선을 따라 노을이 짙어지고 있었다.

레위시아가 그녀를 따라 걸음을 멈추고 투덜거렸다.

“답답해 죽겠네. 소식을 알 수가 없으니 어디까지 진격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야죠. 이왕이면 국경을 새로 그리는 편이 좋겠어요.”

“제국의 영토가 갖고 싶어?”

“아뇨. 우리 말고요. 시에라와 녹스의 국경을 새로 그려야죠.”

“왜?”

“그래야 우리에게 두 개의 방어벽이 생기는 셈이니까요. 앞으로 시에라와 녹스가 티타니아 앞에서 제국에 대항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황제가 오르테가를 치려면 그들을 다 해치우고도 산맥까지 넘어야겠지.”

“이번 기회에 바이칸이 두 번 다시 오르테가에 보호 동맹이란 헛소리를 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해요.”

레위시아가 작게 감탄했다.

“있잖아. 나는 어쩌면 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을까? 왕자궁의 천덕꾸러기였던 시절에도 코코는 내 시녀였는데. 어쩌면 코코를 만난 그 순간부터 내 운명은 왕이 되는 게 아니었을지.”

“제가 고맙죠? 대단하죠? 존경스럽죠?”

“조금.”

능선에 걸친 노을을 감상하던 두 사람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코코.”

“말씀하세요.”

“나중에 말이야. 시간이 좀 흐른 뒤에.”

레위시아는 느슨해진 갑옷 매듭을 다시 묶고 있었다. 처음 갑옷을 걸칠 땐 어색하기 짝이 없었는데,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 움직임도 자연스러웠다.

그가 지나가는 말투로 가볍게 말했다.

“내 후계자는 코코가 골라 줘.”

“전하.”

“코코가 선택하고, 코코가 가르쳐. 너는 내 시녀이기 이전에 누님이고 스승이니까. 자격이 충분하다 못해 넘쳐. 사실이 그렇잖아. 내 어머니는 어머니의 역할을 하지 못했고,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지.”

“후계자라니, 벌써 그런 걸 생각하고 있었어요?”

“학자들이 말하길 사람의 성향은 태어나는 순간에 어느 정도 정해진다는데, 그럼 나는 겁쟁이 부왕과 사랑에 미친 어머니를 닮아서 태어난 거잖아. 너는 그런 사람을 왕으로 키우고 만들었지.”

“전하께도 좋은 배우자가 나타날 거예요. 후계자 교육은 그 뒤에 생각해도 늦지 않아요.”

“율리아를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래.”

웃음기 섞인 고백은 점점 농담을 닮아 가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평온하게 사랑을 말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방황을 해 왔는지 알기에, 코코는 그냥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레위시아가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한심하지?”

“조금.”

“그래? 정말?”

“낭만적이잖아요. 저는 선왕을 싫어했지만, 그런 점까지 싫어하진 않았어요. 물론 빨리 털어 버리고 전하가 돈 많은 왕족 여자랑 결혼해서 자식을 넷쯤 낳았으면 좋겠지만.”

“그거야말로 걱정 안 해도 되지 않아? 왕궁엔 샤트린이 있고, 4왕자도 있으니까. 누구든 언젠가는 결혼해서 애를 낳겠지.”

“왕의 핏줄이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그게 중요한가?”

레위시아의 융통성은 파격에 가까웠으나 코코는 그것도 딱히 싫어하지 않았다. 이제는 사랑을 말하면서도 아파하지 않는 그를, 코코가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전하는 날 닮았어요.”

“어…… 그래?”

레위시아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코코가 그렇게 말하면 그런 거겠지, 그렇게 중얼거린 그가 멀리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힌치 백작을 발견하곤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아.”

“빠, 라고 말해 보세요.”

“진짜? 해도 돼?”

“네.”

혼날까 봐 슬그머니 손을 내렸던 레위시아가 다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곤 짓궂게 웃으며 소리쳤다.

“힌치 아빠!”

빠른 속도로 다가오던 백작이 걸음을 멈췄다.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웃음기라곤 하나도 없이 돌처럼 굳어 버린 그를 보며, 코코가 흐응 콧소리를 냈다.

레위시아 국왕을 대표로 내세운 남부 연합이 바이칸 남부 해안을 통해 시에라와 녹스의 옛 땅을 수복하고 티타니아를 향해 진격했다.

거대한 산맥은 오랫동안 오르테가와 바이칸을 단절하는 벽으로 존재해 왔다. 그렇기에 바이칸 남부는 침략에 대비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침략자였지, 피해자였던 적이 없으니까.

남부 연합군은 그런 바이칸의 약점을 파고들며 빠른 속도로 행군을 이어 갔다. 정규군의 숫자가 적은 그들은 자신의 약점을 잘 알기에, 전면전은 피하고 국지전 위주의 작전을 썼다.

뭍에 오른 해적들은 남부 연합의 뒤를 따라 나타나 티타니아 경계로 파고들었다.

“우리는 티타니아 전투를 재현할 것이다.”

레위시아의 그 말은 남부 연합 모든 이에게 커다란 용기를 주었다.

모르는 자가 없었다. 20여 년 전, 크세노 이베르트 바이칸은 티타니아 앞에서 두 번이나 처참하게 패했다. 마지막 전투도 황제의 승리는 아니었다.

당시 남부 연합은 어설펐고, 수가 적었다. 그런데도 황제를 상대로 대단한 승리를 거두었다. 난전에 강한 남부의 사내들은 산맥을 등에 지고 짐승처럼 싸웠다. 지형이 험할수록 이득이었다.

“정복 황제를 여기 묻어라!”

레위시아가 소리쳤다. 그가 칼을 들어 올리자, 우레와 같은 함성이 뒤따랐다.

남부 연합은 그때와 같이 티타니아 경계에 진을 펼쳤다. 주둔지는 산속에, 보급은 가장 가까운 해안을 통하기로 했다.

다음 날, 시에라와 녹스의 왕족들이 지천에 깔아 둔 정찰병으로부터 급보가 전해졌다.

“황제와 정복군이 오고 있습니다!”

크세노가 남부를 선택했다는 소식이었다.

긴장한 수뇌부가 빠르게 모였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긴 했지만, 상대는 정복군이었다. 만약 크세노가 정복군을 전부 데리고 이쪽으로 온다면 전멸을 각오해야만 했다.

그런데 늦은 밤 여러 방향에서 달려온 정찰병들이 놀라운 이야기를 꺼냈다.

“정복군이 갈라졌습니다.”

“뭐라고?”

“처음엔 두 부대가 갈라져 북쪽으로 올라가기에, 북부 방어를 위해 군을 나누었나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에도 부대 단위의 병사들이 탈영하듯 정복군을 떠났습니다.”

“탈영인가?”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지휘관이 있었거든요.”

“규모는?”

“절반에 달합니다.”

레위시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소리치며 환호하는 자도 있었다. 절반이라면 해 볼 만하다.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함께 죽기라도 하겠지. 우리에겐 티타니아가 있으니까.

코코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성공했네요.”

레위시아가 빠르게 머리를 주억거렸다. 테이블 위에 펼쳐진 티타니아 인근 지도를 보며, 코코가 살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우리 차례예요. 황제의 기억을 되살려 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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