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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화 (287/319)

250화

소름이 돋았다.

크세노는 그 순간 이 모든 게 그를 잡으려 누군가 펼쳐 놓은 그물이라는 걸 깨달았다.

북부 연합은 평원을 수복한 것으로 모자라 운하를 차지하고 바이칸의 수도를 향해 남하하고 있다.

르세라엔 서남부의 대귀족인 프랑크 후작과 데네브라 황비가 리바이어던 함대의 비호를 받으며 반 황제파의 집결을 유도하고 있다.

동북부에선 복수심에 불타는 리바이어던 기사단이 황제를 죽이려 오랜 침묵을 깼다.

바이칸 남부 해안은 이미 남부 연합에 먹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시에라와 녹스가 레위시아 국왕과 손을 잡았다.

사방이 적이었다. 터지기 직전의 둑이었다.

북쪽을 막으면 남쪽이 무너질 것이고, 서남부를 치면 동북부가 내려올 것이다. 어느 쪽이건 구멍이 뚫려 익사하게 되리라.

크세노가 표정 없는 얼굴로 호르헤를 응시했다.

“호르헤.”

“폐하,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그는 어딘가 고장 난 사람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말도 하지 않고, 웃거나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눈앞에 있는 모든 게 허상인 것처럼 낯선 눈으로 바라보았다.

“호르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정복군을 돌려 수도를 지키고 저 건방진 반역자들을…….”

“아무래도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말하는 황제의 얼굴이 더 낯설었다. 호르헤는 저가 뭔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되물었고, 크세노는 똑같이 대답했다.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다고.

“내가 졌어.”

크세노는 그렇게 말하고도 믿을 수 없다며 헛웃음을 머금었다.

지다니. 내가 왜? 나는 황제인데, 정복군의 수장인데. 바이칸 제국을 다스리는 절대자인데. 고작 르세라 하나 빼앗겼을 뿐인데. 아직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는데?

어디선가 기분 나쁜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환청이라는 걸 알면서도 몸이 움츠러들었다. 지독한 겨울 바다, 그 위에서 떠돌았던 한 달간의 기억이 새겨진 탓이었다.

호르헤가 크세노의 주위에서 사람을 물렸다. 그가 명령을 내리기만을 기다리던 지휘관들도, 깃발을 든 기수들도 모두 멀찌감치 물러나 그를 바라보았다.

“폐하, 군의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정복군이 아무리 대단해도 바이칸의 드넓은 국경을 모두 막을 수는 없어.”

이 모든 게 정복 전쟁의 결과였다. 바이칸은 그로 인해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제국이 되었으니까.

황제의 정복군과 귀족들이 소유하고 있는 사병, 상비군과 용병들을 동원한대도 모든 방향의 국경을 막을 수는 없었다.

호르헤가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 목숨을 다해 간청드립니다. 군의 방향을 돌려 최대한 빨리 북쪽으로 올라가셔야 합니다.”

“북부 연합부터 막으라고?”

“르세라의 반 황제파에겐 시간이 필요합니다. 동북부의 리바이어던 기사단은 수가 적고 거리가 멀어 상비군으로 대처할 수 있습니다. 남부 연합의 목적은 저들의 영토를 지키는 것이지, 바이칸을 침략하는 게 아닙니다.”

“이게 다 침략이야, 호르헤.”

“하지만 북부 연합은 너무 많은 것을 탐하고 있습니다. 놈들이 운하를 차지했다는 것은, 본래 바이칸의 것이었던 땅까지 진출하겠다는 말입니다! 수도와의 거리가 너무나 가깝습니다!”

어쩌면 놈들은 수도를 바로 앞에 두고서야 멈출지도 모른다.

호르헤는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소리쳤다. 시에라와 녹스를 빼앗기고, 티타니아와 르세라, 동북부 사막을 모두 빼앗겨도 북부만은 사수해야 한다고 간언했다.

크세노가 호르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렇지 않아.”

“폐하!”

“막으려면 남부를 막아야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호르헤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황제의 얼굴이 낯설었다. 그를 바라보는 호르헤의 눈동자가 크게 확장되었다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크세노는 호르헤가 알 수 없는 과거, 혹은 미래를 떠올리며 말했다.

“처음이야. 북부는 매번 반기를 들었으니까 그러려니 했지. 카루스와 리바이어던도 늘 나를 배신했고……. 그런데, 남부가 여기까지 온 건 처음이야. 해안을 통해서 왔다고? 레위시아 국왕에게 20년 전 티타니아 전투에 대해 알려 준 사람이 있었나 보군.”

“폐하,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한 번은 부딪쳐 봐야지. 그래야 다음엔 좀 더 효율적으로 대체할 수 있어. 나머지는 예상 가능한 일에 속하지만 남부는 아니야.”

남부는 통제할 수 없다. 크세노가 결론을 내렸다. 통제하려면 그들에 대해 알아야 한다. 한 번 부딪쳐 무너뜨리면 다음엔 더욱 쉬워지리라.

“북부는 내버려 둬. 동북부도 뭐…… 그들이 여기 닿을 때쯤이면 이미 승패는 판가름 나 있겠지.”

“바이칸을…… 지키셔야 합니다.”

호르헤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북부 연합이 운하를 이용해 보급을 확충하고 병력을 늘려 바이칸의 수도를 향해 남하하고 있다. 그들은 누구보다 바이칸에 대해 잘 알고, 또한 끓어오르는 복수심으로 똘똘 뭉친 자들이다.

한데 크세노는 ‘다음번’을 위해 바이칸 제국을 적의 먹잇감으로 던지는 일마저 서슴지 않고 있었다.

“말했잖아, 호르헤.”

크세노가 손짓으로 기수를 불렀다.

“이 세상은 율리아나 내가 죽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질 허상일 뿐이라고.”

기수가 달려와 황제 앞에 부복했다.

크세노는 각 부대의 기수와 지휘관을 불러 모아 남부 연합이 국경을 넘어 침략해, 시에라와 녹스를 빼앗았다고 말했다.

북부나 동북부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크게 흥분한 지휘관들이 너도나도 손을 들어 자신을 남부로 보내 달라고 청했다. 오르테가의 어린 국왕을 짐승 우리에 가둬 끌고 오겠노라며, 은혜를 배신으로 갚은 도적의 무리를 섬멸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내가 직접 가겠다.”

“폐하!”

“르세라의 반역자들은 어차피 데네브라가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못해. 내 아내는 멍청하니까 그리 큰 위협이 되지 못한다.”

“남부는 저희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렇지 않을걸.”

크세노가 지휘관들을 어린애 바라보듯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가에 기이한 웃음기가 머물러 있었다. 노란 눈동자가 번들거리며 빛났다. 전투를 앞두고 얕게 부풀었던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이번엔 이길 것이다.”

오래전 그에게 잊지 못할 패배를 안겨 주었던 티타니아.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하여 강제로 지워 버린 패배 위에 승리의 기록을 덧씌워, 누구도 과거의 일을 언급하지 못하게 하리라.

정복군이 방향을 틀었다. 그들은 갑자기 마음을 바꾼 황제를 따라 남쪽 국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기수를 따라 움직이던 거대한 공성 병기도 해체되어 모습을 감추었다.

르세라는 환호했다. 불안과 긴장으로 숨 막히던 도시에 안도와 기쁨이 자리 잡았다.

그동안 불안해하는 자들을 다독이며 뚝심 있게 이 순간을 기다린 프랑크 후작은 반 황제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초원에 이른 봄풀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정복군이 짓밟은 땅 위에도 조그만 새싹들이 머리를 들었다.

르세라를 등지고 돌아서는 길, 호르헤의 부하들이 그에게 다가와 은근슬쩍 말을 걸었다.

“이거 실망입니다. 르세라에 부자가 많다고 들어서 크게 한탕 하고 가나 했는데. 호르헤 님, 남부는 어떻습니까?”

“오르테가에도 부자가 많지.”

“하하, 좋네요! 빨리 가고 싶어졌습니다.”

호르헤는 그들과 함께 정복군 후방 부대를 통솔하며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줄곧 선봉 부대와 함께 움직이는 크세노 황제를 향하고 있었다.

‘아홉 번의 삶이라니, 그걸 여태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호르헤는 황제의 말을 다 믿는 편은 아니었다. 황제 앞에선 그저 순종하며 반발 없이 받아들였으나, 그게 충성심만으로 믿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홉 번째의 삶을 반복하고 있다니. 그것도 죽음의 순간을 공유하는 대적자가 있다니. 사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도 이 세상에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일어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주술이나 저주도 어느 정도는 믿는 편이었다.

하지만 크세노 황제가 겪고 있는 일은 그런 정도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북부를 막아야 해.’

크세노는 지금 황제의 책임과 의무를 모두 내던진 상태였다. 바이칸의 모든 권력은 황제를 향해 집중되어 있는데, 그가 위험한 놀이에 빠진 청년처럼 그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 버렸다.

“수도만은 지켜야 한다.”

남부와 르세라, 동북부는 언제든지 수복할 수 있다. 하지만 북부는 달랐다. 전선이 내려와 수도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그들이 비옥한 평원 지대와 운하를 차지했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바이칸을 지켜야 한다.

생각을 마친 호르헤가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너희는 폐하께서 선봉에 계신 사이, 은밀하게 움직여 지휘관들에게 모든 사실을 알려라. 남부뿐만 아니라 북부와 동북부의 일까지.”

“예?”

“특히 북부 전황에 대해 상세히 전하고, 그곳을 수비해야 한다고 말해.”

“하지만 폐하께서…….”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폐하께서도 언젠가는 이해하시겠지. 지휘관 중에 나와 뜻을 함께하는 자가 있을 거야. 그들을 내게 데려와야 한다.”

호르헤의 부하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각 부대를 향해 자연스레 섞여 드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호르헤가 뻑뻑해진 눈가를 문질렀다.

어쩐지 뒤에서 누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황제는 앞에 있는데, 시선은 뒤에서 느껴졌다.

호르헤가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르세라는 고요했다. 떠나는 정복군을 향해 화살을 쏘거나 야유를 퍼붓지도 않았다.

거대한 도시가 지나치게 고요해, 마치 껍질 속에 숨은 거북이를 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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