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당신은 좋겠다.
아무 노력도 없이 저토록 대단한 힘을 손에 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는 그저 황제의 아들로 태어났을 뿐인데, 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저 많은 사람의 충성을 받게 되었다.
나는 한 끼 식사를 위해 목숨을 걸었는데, 사랑받고 싶어서 노예이길 자처했는데, 끔찍하게 죽고도 비참하게 매달렸는데.
이 세상은 나 같은 사람에게 꽃 한 송이조차 공짜로 주지 않았는데.
“율리아.”
그녀와 함께 정복군을 살피던 카루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십수 마리의 새가 거센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그러곤 누군가를 찾는 듯 주위를 빙빙 돌았다.
“왔군.”
그건 황제가 각지에 심어 둔 첩자들이 날린 새였다. 그동안 율리아의 계략에 빠져 이리저리 이동해야 했던 크세노 황제는 받아야 할 소식을 제때 받지 못하고 있었다.
율리아도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곧 해가 질 것이다. 그녀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카루스가 율리아에게 다가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 성공했을 거야.”
“걱정 안 해요.”
율리아의 눈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전 코코와 알렉사를 믿어요.”
어쩌면 나보다 더, 그 두 사람을 믿는다. 우리가 이 순간을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달려왔는지 안다면 신도 내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봄은 언제나 그녀의 편이었다.
정복군과 합류한 크세노는 한 영주의 성을 빼앗아 임시 주둔지로 삼고 그곳에서 부대를 편성했다.
르세라는 두 번의 승리와 리바이어던 함대의 합류로 상당히 고무되어 있는 상태였다. 사기 높은 적은 상대하기 까다롭다. 반역자인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가 없는 경우에는 더 그랬다.
“단 한 놈도 살려 주지 마라.”
크세노가 지휘관들을 모아 놓고 명령했다.
“포로는 필요 없다. 인질이나 협상도 필요 없어. 항복도 받아 주지 않겠다. 르세라를 포위하고, 그 안에 살아 있는 건 사람이건 동물이건 모두 다 죽여라.”
“알겠습니다!”
“놈들은 방어에 전념할 것이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면 리바이어던 함대의 대포 사정거리에 들어가게 되니, 그 밖에서 움직여야 한다.”
“폐하, 놈들은 쥐새끼처럼 도시 안에 숨어 있을 겁니다. 도대체 무슨 수로 끌어내야 합니까?”
“끌어낼 필요 없다. 튀어나오게 만들면 돼.”
“예?”
“공성 병기를 전면에 배치해. 기름통을 던져 도시에 뒤집어씌우고, 불화살을 날려라. 영주성과 항만 관리국, 그리고 해군 기지부터 부숴라. 크고 높은 건물일수록 빨리 부숴야 한다.”
크세노가 쉴 새 없이 말을 했다. 정복군과 함께 직접 전장을 지휘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청년이었던 2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 그의 가슴이 얕게 부풀었다.
“공성탑을 보내 중앙을 들이받은 뒤엔 도시 측면에 전차 부대를 써. 르세라는 저지대에 있다. 방어 시설이라곤 바닷가에 있는 게 전부야. 공성 병기만으로도 도시의 절반을 무너뜨릴 수 있을 거다.”
“쉬운 전투가 되겠군요.”
“리바이어던의 대포 사정거리. 그 안에만 들어가지 않으면 된다. 명심해.”
“알겠습니다. 저희는 폐하께 반드시 승리를 안겨드릴 것입니다.”
지휘관들이 흉흉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봐도 유리한 전투였다. 리바이어던 함대만 아니었다면 정복군이 이렇게 몰려올 필요조차 없어 보였다.
“해가 뜨는 즉시 출발하겠다. 병사들에게 충분한 양의 고기와 금화를 베풀어라.”
“예, 폐하!”
지휘관들이 각자 부대로 돌아가고, 크세노는 영주성에서 술과 고기를 잔뜩 먹은 채 침대에 누웠다. 한데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았다. 평소보다 술을 많이 마셨는데도 그랬다.
막바지 겨울이 기승을 부려, 밤이 되자 날씨가 살이 에이도록 추웠다.
그에게 성을 빼앗긴 영주는 황제 폐하를 소홀히 모셨다가 정복군에게 목이 잘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창문을 꽁꽁 닫은 채 침실을 따뜻하게 데워 놓았다.
두툼한 양모 이불 위에 짐승의 털가죽을 얹고, 벽난로엔 장작이 가득했다. 찬바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바닥까지 끌리는 커튼이 창문과 침대 앞을 이중으로 감쌌다.
괜찮아. 어차피 이긴 싸움이다.
크세노는 자신에게 정복군이 있는 이상 르세라의 행운도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20여 년 전 티타니아에서의 패배와는 달랐다.
그때는 정복군이 지금처럼 규모가 크지도 않았고, 그에게 충성하는 자도 많지 않았다. 모두가 젊은 황제의 능력을 시험하고 싶어 했다. 앞에선 그를 찬양하고, 뒤에선 저울질하느라 바빠 보였다.
그래서 그때의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이겨야만 했다. 승전의 상징이어야만 했다. 그래야 정복 황제로서 대륙을 통일할 수 있었다.
건방진 북부 연합이 평원을 차지하고 남하하는 건 괜찮았다. 하지만 남부가 하나가 되어 그에게 반기를 드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 지독한 남부의 사내들이 티타니아를 넘어오게 해서는 안 됐다.
‘율리아.’
인정한다. 이번만은 네게 놀아났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카루스 란케아와 리바이어던이라니. 놈들이 외딴 섬을 뛰쳐나와 르세라 항구까지 내려왔을 줄이야.
‘하지만 거기까지다.’
반복되는 삶에서 카루스는 언제나 그를 배신하고 반기를 들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직은 모든 것이 예상 범주 내였다.
‘이 정도는 막을 수 있어. 아직은 내가 통제할 수 있어.’
율리아가 르세라에서 두 번 이겼다고 해도 고작 도시 하나뿐이다. 바이칸엔 그런 도시가 수십 개나 된다. 그가 빼앗긴 건 고작 오래된 항구 하나일 뿐이다.
그렇게 되뇌자 그제야 잠이 쏟아졌다. 넓은 침대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크세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맑은 날이었다.
얼어붙은 구릉지를 뒤로하고 르세라로 이동하는 동안, 정복군은 조금 더 봄에 가까워진 느낌을 받았다.
병사들조차 이 싸움이 자신들의 승리로 끝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들은 이미 각 부대의 지휘관으로부터 가장 중요한 지시 사항을 전달받은 뒤였다.
리바이어던 함대의 대포 사정거리 안에만 들어가지 않으면 된다. 그 외엔 전부 오합지졸이며, 한낱 연습 상대일 뿐이다.
“르세라가 보입니다!”
르세라로 향하는 가장 큰길을 차지하고 보란 듯이 행군하던 선봉대가 깃발을 들어 올렸다.
크세노는 선봉대와 함께 있었다. 그가 여유롭게 손짓하자, 깃발을 든 기수들이 말을 타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부대 위치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 호르헤가 다가와 말했다.
“폐하, 새가 왔습니다.”
“뭐?”
호르헤가 손짓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크세노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가 부리는 새들이 길게 울며 머리 위 하늘에서 빙빙 돌고 있었다.
“호르헤, 방해하지 마라. 지금은 무엇보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가 중요해.”
“하오나 폐하……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새들로부터 소식을 받지 못한 지가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저 새들은 폐하를 찾아 헤매다 운 좋게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날 알아봤구나.”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크세노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고 싶지는 않았으나, 호르헤의 말대로 그는 너무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었다.
새들은 황제를 알아본 게 분명했다. 하루 동안 그를 따라오기까지 했다. 하지만 수많은 인파에 둘러싸여 있는 그에게 날아올 생각까진 하지 못했다.
“쏴라.”
호르헤가 궁수들을 불렀다. 그러곤 새를 가리키며 말했다.
“쏴서 떨어뜨려라. 내게 가져와.”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궁수들이 그의 명령에 따라 화살을 쏘았다. 크세노의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던 새들은 모두 화살에 꿰뚫려 죽음을 맞았다.
툭. 툭. 죽은 새들이 여기저기 떨어졌다. 병사들이 죽은 새를 들고 호르헤에게 달려왔다. 그는 새의 다리에 매달린 통에서 암호 섞인 편지를 꺼내 빠르게 읽었다.
호르헤가 두 손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폐, 폐하…….”
크세노가 그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래?”
“폐하, 폐하. 큰일 났습니다. 당장…… 당장 군대를 돌려야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이게 대체 언제 일어난 일이란 말인가. 이런 일이 왜 동시에 일어나느냔 말이다!”
호르헤가 미친 사람처럼 고함을 질렀다. 애꿎은 병사들이 겁먹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선 채로 경련을 일으키던 호르헤가 크세노에게 구르듯 달려와 편지를 내밀었다.
그러곤 끓는 분노를 담아 외쳤다.
“북부 연합이 운하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북부 방어군을 섬멸하고 수도를 향해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뭐?”
북부 연합이 운하를 차지하다니.
“오르테가의 레위시아 국왕이 남부 연합과 함께 해안을 통해 진입, 바이칸 남부 국경을 넘어 시에라와 녹스의 옛 땅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믿을 수가 없었다. 크세노가 편지를 들고 하나하나 펼쳐 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폐하, 군을 돌려야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종이를 든 손가락이 움찔 떨렸다. 크세노는 구겨진 편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어 보았다. 그러다 가장 먼 곳에 떨어진 새를 마지막으로 가져온 병사를 보곤 그의 손에서 새를 빼앗아 직접 편지를 꺼내 읽었다.
“아.”
크세노가 입을 벌리고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건 그가 동북부 란케아 영지에 심어 놓은 첩자가 보낸 급보였다.
그 편지엔 아주 다급한 한마디가 쓰여 있었다.
[리바이어던 기사단이 인근 영지를 습격, 승전 후 수도를 향해 빠른 속도로 진격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