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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화 (285/319)

248화

율리아 아르테가 만약 우리 편이 아니면 어찌하나. 르세라를 이용하고 버리면? 데네브라의 편이 아니라, 반 황제파의 편이 아니라.

아군인 척하는 적군이면 어떻게 하나.

데네브라도 그게 궁금했는지 후작을 비웃는 대신 고개를 돌려 율리아를 쳐다보았다.

한 손에 빗을 든 시녀. 크림색 드레스와 우아함 꾸밈새.

그림처럼 자연스러워 위화감이라곤 전혀 들지 않는 그녀가 두 사람을 달래려 입을 열었다.

“저는 시녀예요.”

시녀는 왕족을 위한다.

“왕족의 시녀가 가져야 할 첫 번째 덕목은 충성심이요, 둘째가 품위이다. 시녀는 왕족의 일상을 함께하기에, 스스로 드높이되 책임을 진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데네브라 님은 황제의 자리에 앉으실 겁니다.”

엉킨 머리카락을 풀어 주는 빗처럼 부드럽고 조곤조곤한 목소리였다. 다시 빗질을 시작한 율리아가 데네브라의 귓가에 속삭였다.

“전하는 금발이 훨씬 아름다워요.”

데네브라가 프랑크 후작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황비의 얼굴도 피가 빠져나가 약간 창백한 빛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 묻지 않고, 칭얼거리지도 않았다.

* * *

르세라가 두 번째 방어전에서 대승을 거둔 뒤 열흘이 지났다.

기마대를 조직해 당장 황제를 쫓아야 한다던 귀족들의 의견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영주인 프랑크 후작이 갑자기 강경한 태도로 방어에 전념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이해할 수 없군. 황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정복군을 데리고 르세라에 복수하려 들 텐데, 후작이 겁을 먹은 건가?”

“리바이어던 함대가 있으니까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겠소?”

“상대는 정복군이야.”

“이쪽엔 무혈 제독이 있지요.”

의견이 분분했다. 답답했던 나머지 몰래 후작을 찾아가는 이들도 있었다. 밤마다 술병을 든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렸다. 가끔 용감한 자들은 데네브라나 카루스를 찾기도 했다.

그렇게 차근차근 시간이 흘러 이른 봄이 왔다.

르세라는 바이칸에서 유일하게 동백꽃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첫 동백이 개화했다는 소식에 들뜬 어부들이 곧 좋은 소식이 들려올 거라며 술잔을 나누었다.

하지만 봄과 함께 나타난 건 황제의 정복군이 르세라를 향해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럴 수가! 정복군입니다!”

크세노와 합류한 정복군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전령이…… 정찰병이 도착했습니다!”

“다 죽고 하나만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후작님, 후작님은?”

“그러게 진작 황제를 죽였어야 했다니까! 이보게, 무혈 제독께도 전해 드려야 하는 것 아닌가?”

먼저 전령을 만난 귀족들이 난리 법석을 떨었다. 서둘러 달려 나온 프랑크 후작이 전령을 붙잡고 소리쳐 물었다.

“정복군이 왔어? 어디까지!”

“하루 거리…… 하루 거리입니다. 더 일찍 발견해서 알려 드렸어야 했는데.”

“하루 거리라고? 벌써 거기까지…….”

“규모가 큽니다. 후작님, 피하셔야 합니다.”

전령은 피하라고 조언했다. 도시를 버리고 달아나라고 말했다.

정복군의 규모가 유례없이 크다고, 황제가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곤 전군이 몰려온 것 같다고 했다.

“선봉대의 숫자만 해도 어림잡아 3만은 되어 보였습니다. 그 뒤엔 본대의 보병들이, 그 뒤엔 보급 부대가…… 특수 부대와 후방은 확인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허어…….”

“공성 병기가 오고 있습니다.”

후퇴해야 한다. 프랑크 후작도 그렇게 생각했다.

선봉대가 3만이라면 본대는 그 몇 배는 될 것이다. 정복군의 공성 병기는 도시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고도 남는다.

하지만 이곳은 항구 도시였다. 후퇴할 곳이라곤 바다밖에 없는데, 어디로 가란 말인가.

같이 바다에 빠져 죽자고 설득이라도 하라고? 정복군이 하루 거리에 있다 함은 달아나도 소용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지 않나?

숨이 가빠왔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불안하고 두려웠다. 그런데 목까지 차오른 숨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가려던 순간, 갑자기 무언가 묵직한 기운이 그를 짓눌렀다.

프랑크 후작은 자신이 어느새 이런 상황에 익숙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두 침착해라.”

그도 자신이 이렇게 인내심 있고 차분한 사람인 줄 처음 알았다.

“잊지 마라. 우리는 크세노 황제를 상대로 두 번이나 승리한 르세라의 수호자들이다. 각자 자리로 돌아가 방어에 전념해라.”

“후작님!”

“명령이다!”

이곳엔 데네브라 황비가 있다. 카루스 란케아가 있다.

무엇보다 율리아 아르테가 있다.

크세노 이베르트 바이칸이 정복 황제라는 위명으로 불리게 된 데에는 정복군의 역할이 컸다.

황제의 직할 부대인 그들은 처음엔 여느 왕국의 중앙군과 다르지 않은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한데 크세노가 첫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다음에도, 또 그다음에도 연이어 승리를 거두자 점점 그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명장들이 말하길 전쟁은 숫자로 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압도적인 전력은 승패에 있어 가장 큰 무기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하물며 그들이 지난 수십 년간 전쟁 정보와 경험, 요령을 터득한 전문가들임에야.

“황제 폐하께 충성을-!”

수많은 병사가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엄격한 군율 아래 살기로 무장한 그들은 완벽하게 도열하여 진을 쳤다.

끝없는 인파. 크세노는 그들을 보며 바다를 떠올렸다.

카루스 란케아에게 바다가 있다면 나에겐 이들이 있다. 놈은 그저 그 바다 위에 둥둥 떠서 표류하는 힘없는 인간에 불과하다.

바다는 위대하고 잔혹하기에 인간이 그에 닿을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은 달랐다. 황제는 신에 닿은 인간이다. 신의 의무를 대신하는 인간이다. 신이 버리고 달아난 자리에서 스스로 희생을 반복하는 자다.

나는 황제다. 인간이 만든 절대자. 그렇기에 땅 위에선 신조차 나를 지배할 수 없다.

크세노가 높은 단상 위에 섰다.

“각 부대에 전달하라.”

그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르세라 항구에 반역자들이 무리를 이루어 감히 내게 대항하고 있다! 놈들의 이름은 데네브라 황비이며, 카루스 란케아이고, 프랑크 후작과 그들을 따르는 수십 개의 가문이다!”

황제의 기사들이 입술을 짓씹으며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들은 데네브라와 카루스를 용서할 수 없었다.

크세노 이베르트 바이칸은 그들이 만든 정복자였다. 황제의 이름은 곧 정복군의 명예였으며, 그가 다스리는 대륙은 정복군의 전리품과 같았다.

“놈들의 머리와 몸을 분리해 대륙의 동쪽 끝과 서쪽 끝에 묻어야 합니다.”

한 기사가 방패를 땅바닥에 콱 박아 넣으며 말했다. 그러자 주위의 기사들이 그를 따라 목소리를 높였다.

“르세라를 사막으로 만들고 100년 동안 봉인해야 합니다.”

“카루스 란케아로부터 리바이어던의 이름을 빼앗고, 황비를 폐위시키셔야 합니다!”

크세노는 카루스와 데네브라가 변절했다는 소식을 최대한 막으려 했다. 그가 앞선 두 번의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마땅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패배했다. 두 번 모두, 어처구니없이 패해 전장을 두고 돌아서야만 했다. 심지어 겁에 질린 짐승처럼 도망치기까지 하지 않았나.

그는 이제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게 되었다.

“르세라를 지도에서 지워 버려라!”

르세라를 하루 앞둔 어느 영지에서, 크세노가 명령했다.

* * *

나는 당신을 죽일 수 없다.

당신도 나를 죽일 수 없다.

언덕 위에 거센 바람이 불었다. 투레질하는 말을 도닥이며 달래던 율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드넓은 구릉지에 빽빽한 인파가 보였다. 크세노 황제의 정복군을 직접 눈으로 보는 건 그녀에게도 처음인 일이었다.

구릉을 가득 채운 병사와 말, 그리고 멀리서 우레 소리를 내며 끌려오는 공성 병기를 보고, 율리아가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크세노가 깨달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율리아는 그동안 몇 번이나 그를 죽일 수 있었다.

그가 오르테가 왕궁에 은밀히 숨어들었을 때, 데네브라와 왕비궁을 포기하고 그 사실을 알려 포위했다면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늙은 해적 선장이 죽여 줄까, 하고 물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면 크세노는 바다 한가운데서 해적들의 공격을 받아 죽을 수도 있었다.

르세라의 두 번째 방어전도 그와 비슷했다.

카루스와 그의 부하들은 크세노를 죽이고 싶어 했다. 프랑크 후작과 데네브라, 반 황제파의 귀족들도 똑같았다.

하지만 율리아는 크세노를 죽일 수 없었다. 황제가 죽으면 자신도 죽어, 2년 전 겨울의 끝자락으로 가게 될 게 뻔했으니까.

두 개의 영혼에 깃든 하나의 저주. 율리아는 크세노와 자신이 서로에게 기생하는 괴물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황제에게도 저를 죽일 기회가 여러 번 있었어요.”

언덕 위에 올라 정복군을 내려다보고 있는 건 율리아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곁엔 카루스가, 그의 곁엔 리바이어던 함대의 부하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카루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여러 번 있었지.”

“하지만 그는 절 죽일 수 없었죠.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일 거야.”

“이건 기만이에요.”

황제와 자신이 서로를 죽일 생각도 없으면서 싸우고 있다는 율리아의 말에, 카루스는 그녀의 싸움이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세상을 구하는 기만이지.”

저들에게 고향을 빼앗기고 노예가 된 자들을 떠올려야 한다. 황제의 야욕에 희생된 수많은 사람을 떠올리다 보면 이게 얼마나 숭고한 싸움인지 알 수 있다.

“세상을 구할 생각 따윈 없어요.”

“그럼 나라도 구해.”

카루스가 가볍게 농담을 건네자 그를 따라온 부하들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적의 주둔지를 지켜보던 율리아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정복군은 소문보다 더 대단하네요.”

그건 한숨 섞인 감탄이자, 어찌할 수 없는 질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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